시험삼아 뽑아본 빌런 일러

*


"히어로는 편하지. 참 편해."



피칠갑이 된 히어로 위로 빌런이 조롱을 얹었다.


무거운 갑주 아래에서, 빌런의 중후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똑같이 건물을 부숴도 히어로라 자칭하면 욕을 먹지 않거든."



그야 빌런이 건물을 부술 때는 테러를 위해 부수는 게 대부분이니까.


"똑같이 사람을 때려도 히어로는 욕을 먹지 않아."



그야 빌런이 사람을 때릴 때는 가학 그 자체가 목적인 경우가 많았으니까.


"우리 빌런들은 밥 한그릇을 먹어도 욕을 먹고 사는데. 히어로 참 편리하지, 응?"


그야 무전취식하는데 욕을 안 먹을 리가 없지.


"히어로, 나의 귀여운 히어로들. 우린 항상 너희가 부러웠다."

"아아, 윽, 으으윽..."


푹, 푹, 푹.

히어로의 배에 세자루 단검이 꽂혔다.

그 자신의 패션에 어울리지 않는 단검, 빌런명 [회색기사] 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히어로는 차마 비명조차 마음껏 내지 못하고 어금니를 깨물었다.


"상태창."

[28화. 현재 공백 제외 1658자]


시험삼아 상태창을 켜보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가슴 아픈 모습이지만 더 참고 견뎌야 했다.

나도, 히어로도.


"... 히어로가 그래서 위선적이란 거지. 빌런을 봐! 우린 우리가 악당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하잖아?"

"그래... 그러니까 너는, 네가 깽판치는 걸 아니까... 네가 깨끗하단 거냐?"

"그렇지. 너희 같은 위선이 없잖아! 얼마나 청결하냐."

"청결... 청결, 다, 죽었나보군그래..."

"... 피떡이 된 놈이 입은 살아있는데, 어디까지 가는 지 한번 보자."


히어로의 도발적인 반어법.

오만한 빌런에겐 '날 죽여줍쇼' 하는 메시지와 다를 바 없었다.

콰왕-.

빌런은 우선, 히어로의 머리통을 잡고 그대로 땅바닥에 매다꽂았다.

차도가 붕괴되었고, 흙먼지가 포슬포슬 피어올랐다.

철의 의지를 보이던 영웅도 기어코 땅에 쓰러지고 만 것이다.


"상태창... 어서!"

[28화. 현재 공백 제외 2097자.]


아직도 때가 오지 않았다.

지금 일을 도모하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크다.

나는 잠자코 다시, 관전하는 일개시민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네가 히어로협회 기준 10위권 안에 든다고 들었다. 맞나?"

"... 맞다."

"히어로도 망했네. 이깟 게 10위권이라. 이거이거, 히어로 말살의 날도 멀지 않은 모양이다. 하하!"


빌런이 껄껄 웃었다.


"기분이다. 멋진 제안을 하지. 너도 빌런이 되지 않겠나? 빌런이 된다면..."

"집어치워."


아직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히어로가 완강한 거부의 의지를 보였다.

빌런은 입맛을 다시며 바닥에 쓰러져버린 히어로의 등에 단검을 박아넣었다.


"'악마의 육편' 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큰 전력이 됐을 텐데 말이지..."

"무슨 육편...?"

"됐다. 모르면 굳이 설명할 필요 없지."


악마의 육편.

원래 설정에서 악마계 능력자의 육신을 갈아 만든 신체 강화제였다.

효능은 확실하지만 사용시엔 정신이상이 온다는 게 문제였던 도구였다.

살인충동에 시달린다던가.

지금 내 알 바는 아니지만.


"오이, 오마에, 소꼬마데다."


허허벌판이 되어버린 상점가.

피칠갑이 되어버린 히어로.

살인마가 되기 직전인 빌런.

그 앞에 내가 나타났다.

상태창에 원하던 문구가 떴으니까.


[28화. 현재 공백 제외 2560자.]


지금부터라면 아슬아슬하게 분량을 채울 수 있으니까.


*


빙의!

흔한 웹소의 정석.

재밌게 읽던 책에 들어가거나 반대로 재미 없게 읽던 책에 들어가거나 하는 게 이런 장르의 도입부이다.

빙의자의 행동에 의해 원작이 꼬이며 여러 해프닝이 벌어진다던가
원작 주인공과의 이런저런 친밀도를 쌓는다던가
볼 거리야 여럿 있다.

내 경우.

내 경우에는 조금 달랐다.

내가 쓴 소설에 들어온 것이다.

다만... 내가 쓰지 않은 소설이었다.

다들 어렸을 때 설정만 짜다 버려놓은 소설 하나씩은 있잖아?

쉽게 말하면 그런 소설에 들어온 것이다.

문제는...


"상태창."

[현재 28화. 공백 제외 3068자]

[작가의 말 : 드디어 28화까지 왔네요. 본래 생각했던 1부 분량이 거의 끝났습니다.
2부에 들어가기 전에 Q&A 를 해보고 싶은데, 혹시 질문거리 있을런지요.]

[매일 연재]

[현재 독자 : 132명]


'소설 속 세상' 이 아니라, '소설' 에 들어와버렸단 점이겠지.

누군지 모를 사람이 나 대신 내가 짜놓은 설정으로 소설을 쓰고 있고.

예까지만 해도 신기한 일이지만 내가 주목한 포인트는 달리 있다.


[현재 독자 : 132명]


이 숫자다.

짧지 않은 웹소설 독자 경력의 교훈은
저 독자수는 연재중단, '연중' 으로 이어질 지도 모른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었다.

그럼, 작품이 '연중' 하면 어떻게 되냐고?

어떻게 되긴.


[미션 : 살아남아라!]
[실패시 패널티 : 사망.]


상태창에 떠 있는 한줄 미션을 볼 때, 손쉽게 예측 가능하다.


"작품의 연중은 곧 빙의자인 나의 죽음이란 거겠지."


잘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신 적인 능력을 지닌 작품 최상위권 먼치킨임에도
작품 스토리에는 최대한 발을 들이지 않기로 한 것이다.

요새 말로 하자면 힘순찐과 같은 삶을 살기로.

먼치킨인 내가 초장부터 들입다 쓸고 다니면
작품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연중 밖에 없으니까.


"별 수 없지. 작품이 죽으면 나도 죽잖아."


... 아무리 그래도 주인공이 죽으면 하차하는 사람이 많아질 테니 방금 같은 경우는 예외지만.


[댓글이 등록되었습니다.]
[댓글 : 1화부터 봐왔는데 고구마 너무 심함. 님들도 적당히 보고 하차 ㄱㄱ.]
[댓글 : 도대체 주인공 위선 성격 언제 고침? 히어로 같은 위선 집단에 있는 거 슬슬 안 지겨움? 그냥 솔직하게 빌런으로 가자]
[댓글 : 남작가들 원래 이러나요? 이번 빌런 여캐로 나온 게 또 하렘 분위기 잡는 거 같은데.]
[댓글 : 주인공 혼잣말 왤캐 많음? 이 새퀴 찐따임?]


"아 쌍, 설마."


[작가입니다... 여러분들 덕에 부족한 점을 깨달은 바... 잠시 머리를 식히고 오려고 합니다. 진지하게 연재에 대해 재고해보려고요.]


눈 앞이 깜깜해졌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살인충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