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한포기 보이지 않는 죽어버린 땅.
 대지마저 검게 물든 그곳에, 모닥불에 둘러앉은 부랑자들이 있었다.

 정정하겠다. 부랑자는 아니다.
 낡아 부스러지는 망토 사이로, 관리되진 않았어도 범상치 않은 무구들로 무장한 그들이 부랑자일리 없으니 말이다.

 "이봐."

 그들 한가운데, 덜덜 떠는 손으로 매캐한 연기를 뿜어대며 연초를 피우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계속 해야 할까?"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말게.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지만. ......조심하게. 부작용이 심한 물건이야. 몸이 망가지면 안되지."
 "이미 이거 하나 없으면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무슨."

 외팔이 노인의 말을 흘려듣는 척 연초를 집어넣은 사내는, 지금꺄지 있었던 더러운 일들을 기억했다.

 성직자를 희롱하려던 왕.
 공포에 질려 신도들을 팔아넘긴 교황과 추기경들.
 그들이 얻어낸 작은 공조차 자신들의 행적으로 포장하던, 사실이 밝혀지자 현상금까지 걸어 추격한 황제까지.

 그 외에도 자잘한 사람들이 떠올랐지만 그들보다 증오스럽지 않았다.
 아니, 그들을 증오하는게 맞나?
 자신의 착각이 만들어낸 환상의 존재가 아닐까.
 분명 그럴 것이다. 세상에 그만큼 혐오스러운 인간이 있을리 없으니까.

 "이젠 약 때문에 뇌까지 썩었나."

 사내는 흐려진 정신을 붙잡고 일어나려댜 그대로 누웠다.
 며칠간 먹은 음식이라곤 약간의 육포 쪼가리가 전부.
 더 있긴 하지만 여정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데 낭비할 수 없는 법.
  조금이라도 힘을 아끼기 위해 잠을 청한다.

 잠이 오지 않는다.
 당장 뭐라도 먹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태평하게 잠이 올리가 있나.

 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새운 그들은 최대한 흔적을 지우고 힘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작은 벌레 하나 앖는 황량한 벌판.
 조금이라도 힘을 아껴야 하는 그들의 앞에 한무리 마물들이 나타났다.

 사내가 가볍게 휘두른 검에 반으로 갈라지는 마물 무리.

 "이거 먹을 수 있나?"
 "아....... 아, 아."

 사내는 간절하게 벙어리 성직자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됐어. 마물을 먹는다는 건 미친 생각이지."

 사내는 덧붙였다. 혹시 성직자가 자책할까봐.

 다들 마물이 죽은 흔적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들이 이곳에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
 그렇다고 이것들을 치우면 탈진해 죽을 것이 뻔한 일.

 "...가자."

 그들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먹을 수 있는 무언가를 찾길 바라며.



 제국이 고용한 현상금 사냥꾼의 추격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그들이 굶주렸다는 사실을 알아낸 순간부터 가까이 붙는 사냥꾼들은 일체의 식량을 가져오지 않았다.
 한번 놈들이 타고 온 말을 노획한 적이 있는데, 눈이 붉은거시 심상치 않다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마기를 이용한 독이다. 이걸 먹으면 모두 죽을거야."

 피를 찍어먹은 사내가 말했다.
 멀쩡한 상태라면 모를까 약해진 지금은 내성이 있는 그조차 위험하다.
 성직자라면 해독이 가능하겠지만 지금은 부담이 될 일.
 순간 다른 것에 눈이 갔지만 필사적으로 참았다.
 아직은 아니다. 적어도 지금은.


 
 놈들의 추격이 거세지고 있다. 더는 버티기 힘들어 아껴둔 식량을 조금 먹었다.
 어찌된건지 놈들이 우리를 포위했다. 우리보다 앞에 있는게 말이 되나? 모종의 방법이 있는 것일까?
 기운을 되찾은 절름발이 무투가 덕에 편하게 막아냈지만 머리가 아파온다.
 이제부터 앞도 경계해야 하다니.

 궁수가 한 건 해냈다. 놈들의 보급을 발견해 저격을 성공.
 노인네가 마력을 쥐어 짠 환상마법으로 놈들의 시선을 끌었으니 노획도 문제 없다.
 독도 없는 걸 확인했으니 오랜만의 포식이 가능하리라.
 주로 쓰던 눈을 상실했길래 걱정했더니, 잘 적응한 모양이다.

 여기는 아무것도 없는 마경. 즉, 보급이 사라진 것도 모르고 물자를 낭비한 놈들도 뒤가 없다는 뜻이다.
 놈들의 공격이 거세졌으나 이전보다 수월하게 막아냈다.
 스크롤을 이용한 자폭공격엔 정신이 아찔했으나 무투가가 대부분 받아낸 덕에 성직자와 노인네는 무사했다.
 며칠 쉬지 않았으면 위험했을 텐데, 웃는 모습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놈들이 찾아왔다.



 "용사!"
 "용사 아니라니까. 무슨 일이야?"
 "놈들이 나타났어!"
 "누가 말이야?"

 현상금 사냥꾼의 습격이 멈춘지 3일.
 전보다 여유있는 모습으로 연초를 태우던 남자가 궁수를 맞이했다.
 사냥꾼은 전멸했고 마물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식량도 충분하고. 지금까지 걱정거리는 없었지만 이런 좋은 상황이 오래 갈리는 없는 법.

"황실 근위대!"

 며칠간 풀어졌던 남자는 궁수의 말에 얼굴을 굳혔다.
 휴식이 끝났다. 가장 만나기 싫은 형태로.



 저 멀리서부터 은은한 금빛을 띈 병사들이 능숙하게 말을 몬다.
 그들의 앞에는 금빛도, 푸른 빛도 띠는 묘한 전신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있었고.

 황실 근위병과 그들을 통솔하는 근위기사단이다.

"돈이 썩어 넝치나보군."

 옅은 금빛은 갑옷에 진금이 섞였음을 의미한다.
 기사단의 갑옷은 진은과 진동까지 섞었는지 세 금속이 섞였을 때 보이는 푸른빛까지 띄고있었고.

 저 갑옷을 만들 금액 일부만 지원했어도 이 지독한 여정이 끝났을거라 생각되는, 오로지 제국의 위엄을 보여주기 위한 돈지랄.

 남자는 겁없이 그들의 앞에 섰다.

 "머리가 나와라"

 노인의 마법으로 증폭된 음성이 울려퍼지자 기사단은 말을 멈췄다. 그리고 한 근위병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황제의 칙령이다.

 "자신을 용사라 감히 칭하는 무뢰배는-."
 
 서걱.

 "난 나를 용사라 칭한 적 없다. 그리고, 머리가 나오라 했을텐데?"

 근위병 사이에서 혼란이 퍼진다.
 당연하다.
 근위대의 이름을 대면 모두 고개를 숙이기 바빴을 터.
 근위대의 이름이 통하지 않는 적은, 아니 경험은 처음일 테니까.

 허나 이곳에, 자신들을 쫓아오면서까지 그런 안일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용사는 분노가 치밀었다.

"내가 알기로 근위대는 임명될 때 황실의 안녕과 동지 간의 영원한 우정에 헌신할 것을 맹세한다고 알고 있다."

 한번의 휘두름에 하나씩.

 "너희들의 동지가 죽어간다. 그런데 머리란 놈은 뒤에만 있을거냐?"

 아니 둘, 셋, 다섯.

 근위병의 눈에 공포가 피어오른다.
 발악하며 달려도 닿지 않는다. 새끼부터 함께하던 말과 함께 스러질 뿐.

 "그만!"

 죽은 근위병이 스물을 넘을 무렵.
 벼락처럼 달려간 노기사 하나가 남자의 참격을 막아낸다.
그대로 뛰쳐나가 이어지는 반격.
쪼개지는 검날. 갈라지는 팔뚝.

 "말해라 근위대장. 네가 머리인가?"

 멈추지 않고 비명을 지르는 근위대장. 그럴수록 남자의 눈에 혐오가 짙어진다.
 끝을 내기 위해 들어올려지는 칼.

 "용사님. 그만하세요!"

 기사들 사이에서 누군가 다급히 달려나온다.
 투구를 벗자 흘러내리는 찬란한 금발.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자 근위대장을 제외한 모두가 무릎을 꿇었다.
 기가 찬 일이다. 아직 적이 건재한데 빈틈을 보이자니.

 "말씀하신대로 나왔습니다. 그러니 제발 그만하세요. 용사님."
 "......정말 있었군. 황녀. 보고싶지 않았건만."

 "이...! 고귀한 혈통 앞에 무슨 망말이냐! 당장 무릎을 꿇고 사죄하지 못할-."

 지친듯 휘두른 검에 그곳에 있던 근위병 일부의 목숨이 사라진다.
 떨어지는 머리카락에 소름이 돋았지만, 황녀는 다리에 힘을 주고 최선을 다해 버텼다.

 "지금 무슨 짓인가요!"
 "닥쳐라. 위선자."

 남자의 말에 충격받은 듯 굳어지는 황녀.

 "내가 네게만 존댓말을 쓰고 대우한 이유는 그쪽 피 중 가장 제정신이 박혀서다. 내게 계속 대우받고 싶었으면 여기 있으면 안되지."
 "저는 그저 당신을 설득하려고."
 "그랬다면 혼자 왔어야지."

 남자의 눈짓에 거대한 마법진이 허공에 떠오른다.
 
"마탑주. 당신은 제국의 충신 아닌가. 자네가 이러는 건 말도 안되네!"
 "그럼... 제국이 우릴 잡으러 자네들을 보낸 건 말이 되는가?"

 탁한 눈으로 대답한 노인.
 정신을 차린 근위대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완성이 가속되는 마법진.
 그사이로 검은 실선이 새겨지고, 마법진이 깨어진다.

 "커헉!"

 반동에 휘청이는 노인을 성직자가 다급히 부축한다.

 "흑마법사!"

 피를 토하면서도 치를 떨며 소리치는 노인.

 "흑마법사는 악마에게 영혼을 판 배반자. 제국은 어디까지 떨어질 속셈인가!"
 "아니, 우린. 더 위로 올라갈 것이다. 흑마법사를 부려 마왕을 처리함으로써!"
 "악마의 하수인인 흑마법사가 악마의 수족인 마족을 진심으로 적대하리라 생각하는 건가!"
 "마나의 맹약까지 받았다. 의심할 이유는 없지."
 "마나의 맹약은 만능이 아니...  쿨럭!"

  각혈하며 기절한 노인.
  그 모습을 배경삼아 흑마법사가 나타나고, 그와 동시에 시간을 되돌리듯 재생되는 근위대장의 팔.

 "너희들에게 날리는 젓번째 명령이다. 당장 저들을 죽여라!"

 근위대장의 명령에 흑마법사 하나가 앞으로 나선다.
 천천히 펼쳐지는 앙상한 손.
 손을 쥐자, 근위대장이 폭발한다.

 "안녕하신가. 나는- 그래. 흑탑주라고 한다네. 용사. 자네를 만나고 싶었지."

 손짓 한번으로 뛰쳐나가려던 황녀를 제압한 노인이 말했다.

 "난 용사가 아니다."
 "그래. 자네는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지. 허냐 그건 자네가 정하는게 아니야. 모든 이름은 타인이 부르기 위해 탄생하고, 사람들이 말하는 자네의 이름은 용사지."

 끌끌거리며 미소짓는 흑탑주.

 "자네를 만나기 위해 자신이 용사이리라 망상하는 멍청한 황제의 소원까지 들어준다 하였지. 아무걱정 할 것 없네. 자네에게 제안 하나를-."

 콰직!
 권풍이 날아들어 흑탑주의 안면을 가격한다.
 연이어 이어지는 공격.
 이제는 흔적마저 보이지 않을만큼 깊게 파이자, 무투가가 말했다.

 "가라 흑마법사가 악마에게 무슨 마법을 받았는지 모르니 내가 막고 있겠다."
 "근위대까지 있어. 우리가 함께라면 해치우는데 얼마 걸리지 않는다."
 "흑마법사가 무슨 수를 준비했을지 모르니 안전하게 가야한다. 그리고 근위대는 나도 혼자 상대할 수 있어."
 "그래도."
 "가라."

 헤진 도복 사이로 가슴팍의 상처가 눈에 들어온다.
 폭발의 흔적이라 예상되는, 무투가의 회복력을 생각하면 진작 회복되어야 했을 상처.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잘 먹었다고 해도 고생한 것이 사라지지 않는다.
 한참 요양했어야 하는 상태에서 받아낸 폭발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이상한 일.

 "늙은이의 대화에 끼어들다니, 버릇 없는 젊은이군."
 "난 죽지 않을거다. 살아서 다시보자."

 거짓말이다.
 그걸 증명하듯 등을 돌려 달려나가자마자 활성화되는 무투가의 선천지기가 느껴진다.
 그래도 노인을 들쳐업은 남자와 일행은 최선을 다해 달렸다.
 등 뒤에 짐이 또 하나 늘었다.



 여유가 생겨 노인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일어날만 한데 일어나지 않는다.
 최악의 경우도 생각해야 한다.

 흑마법사들의 추격이 눈 앞까지 다가왔다.
 멀리서 황녀의 시체가 보인다.
 궁수의 화살이 깔끙하게 머리를 꿰뚫었다.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강력한 흑마법을 막아내고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니 궁수가 보이지 않는다.
 성직자에게 물어보니 말없이 눈물을 흘린다.
 그런 성직자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궁수가 사라진 날부터 이틀.
 거대한 폭발이 모두를 덮쳤다.
 위험했지만, 성직자의 보호막이 우리를 살렸다.

 노인네가 깨어났다. 흑마법사의 공격을 방어하는 와중에.
 무투가와 궁수에 대해 묻더니, 자신은 가망이 없다며 이곳에 두고 가라 하였다.
 흑마법사를 생각하지 않았기에 허를 찔렸을 뿐, 몸은 안좋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살아남을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말이다.
 짐이 하나 늘어났다.

 마왕성에서 머지 않은 야영지.
 불침번을 서던 성직자가 애지중지하던 로자리오를 내 목에 걸어주었다.
 무슨 일인가 일어나니 배에서 검게 썩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투가보다 심한 상처다. 가녀린 성직자가 버텼다고 는도저히 믿기지 않는.
 폭발 때 완전히 막지 못했던건가?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하니 얼마 남지 않은 기적까지 이용해  나를 잠재웠다.
 일어났을때 몸은 개운했지만 성직자는 보이지 않는다.
 하루종일 성직자를 찾아다니다가 모닥불로 돌아왔다.
 갑자기 느껴지는 공허함에 밤새 연초를 태웠다.
 또다시...

 그 이튿날.
 마왕성의 문을 열었다.
 흑마법사에 비하면 간단한 마물들.
 놈들을 모두 햬치우고 끝자락에 다다랐다.
 이제 끝이다.
 끝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