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굴이 상기된 마왕의 달뜬 환영에 용사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정말 긴 여행이었다.

 

고향이 마족에게 불타 없어진 순간부터 이어진, 복수심에 불타 달려온 그의 보잘것없는 인생의 마침표를 찍기 위한 마지막 과정.

 

마왕 토벌.

 

고난을 거치며 함께한 동료들의 희생을 뒤로한 채 마왕이 기거한다는 판데모니엄에 도달했다.

 

서로 목숨을 건 싸움이 이어질 거라고 예상했다.

 

무조건.

 

둘 중 하나는 죽는다.

 

아니, 재수가 없으면 둘 모두가 죽는다.

 

자그마치 10년이다.

 

선정의 검을 뽑아 든 순간부터, 마왕군과 쉴 새 없이 격돌하며 용사는 마왕이란 존재의 강함을 뼛속 깊이 각인할 수밖에 없었다.

 

강하다.

 

마족의 간부라는 존재와 싸울 땐 말 그대로 죽음을 각오했다.

 

소중한 동료를 잃기도 했다.

 

처절한 싸움을 계속하며 죽음을 이웃하며 살아온 용사는 이제 죽음이 친근하게마저 느꼈다.

 

죽어도 괜찮아.’

 

싸움을 거듭하며 마음이 피폐해질 때마다 용사는 마음을 놓았다.

 

다행히.

 

과거를 뒤로한 채 새로운 인연을 맺었지만, 여전히 그에게는 고향에서 그를 기다리던 가족과 친구, 그리고 주민들의 마지막 모습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죽어도 그들이 자신을 마중하러 나올 것을 상상하면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기쁘게 찾아갈 터였다.

 

하지만.

 

정작 마왕으로 추정되는 붉은 머리 여자는 그를 반기고 있었다.

 

반려라고 부르면서.

 

그게 무슨.”

 

용사가 눈살을 찌푸리며 성검을 꽉 꼬나쥐었다.

 

또각.

 

마왕이라 자칭한 여자가 우아한 걸음걸이로 왕좌에서 내려왔다.

 

또각.

 

목숨을 걸고 다툴 상대와 대치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느긋하면서도 평온한 분위기.

 

동일한 눈높이.

 

마왕이 상처투성이 용사의 입술에 검지를 댔다.

 

!”

 

용사가 이를 쳐내며 뒤로 크게 물러났다.

 

후후. 앙칼지구나.”

닥쳐!”

 

용사가 팔로 입술을 거칠게 문댔다.

 

검지가 닿으며 느껴졌던 보드라운 감촉이 그의 피투성이인 거친 옷감에 씻겨 사라진다.

 

할짝.”

 

마왕이 용사의 입술에 닿았던 검지를 혀로 핥았다.

 

!”

 

소름이 끼쳤다.

 

용사가 마른침을 꿀꺽 삼킨 채 마왕을 경계했다.

 

그런 용사의 가련한 모습이 파충류처럼 세로로 날카롭게 수축된 마왕의 동공에 담긴다.

 

마왕이 피식 웃으며 팔짱을 끼고, 손등에 턱을 얹었다.

 

보아하니 전혀 모르는 모양이구나?”

모르다니?”

예를 들자면 용사 자네가 쥐고 있는 그 검… 어디서 난 신물이라고 생각하느냐?”

여신께서 내린 선정의 검이라고.”

아하하하하!”

 

마왕이 배꼽을 잡고 목놓아 웃었다.

 

검의 실체를 아는 마왕으로서는 웃길 수밖에 없었다.

 

, 뭐가 그렇게 웃긴 거지?”

하하. 하아. 아니, 생각해보거라. 여신께서 내린 선정의 검?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구나! 역시 인간 놈들이야! 광대 노릇은 그 어느 마족도 따라갈 수가 없어!”

 

웃다가 눈물이 나서 눈가를 가린 마왕이 헐떡이듯 어깨를 들썩인다.

 

듣자 하니 그놈의 종교쟁이들이 선정의 검이란 부분만 쏙 빼간 모양이야.”

마왕답게 여신을 섬기는 신성교국을 모욕하는 건가?”

여신? 아직도 그딴 게 실존한다고 믿나?”

 

마왕이 용사를 비웃었다.

 

좋아. 내 마왕의 반려가 될 그대에게 친히 검의 진실을 알려주마.”

검의 진실?”

 

마왕이 손가락을 튕겼다.

 

우웅.

 

거대한 마나의 파도에 이끌리듯 용사의 손에 들린 성검이 부르르 떨며 공명하기 시작했다.

 

?”

 

용사는 당황했다.

 

여신께서 지상에 내려주신 성검이 마족의 마나와 공명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게.

 

성검은 마족의 힘과 상반된 힘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그대라면 이해하겠지? 검에게 선택받은 주인이니까.”

성검이 어째서.”

그야 그 검은 성검 따위가 아니니까.”

 

마왕이 사근사근 걸어와 용사의 거친 뺨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성검이… 아니야?”

그래. 그대는 그 검의 재료가 무엇인지 아느냐?”

 

알 턱이 없다.

 

그동안 여신께서 지상에 내려주신 검으로만 알았으니까.

 

용사는 분명 지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천상의 강철과 여신이 본인의 신성력을 직접 부여해서 만들어졌다고 믿었다.

 

마왕이 짓궂게 웃으며 용사의 귓가에 속삭였다.

 

전대 마왕.”

!?”

 

용사가 두 눈을 부릅떴다.

 

마왕이 지척까지 다가오자 성검이 전례 없을 정도로 크게 공명한다.

 

, 기지 마!”

 

용사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이 마왕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전력을 담아 휘두른 검은 정확히.

 

마왕의 목덜미까지 실처럼 가느다란 공간을 남겨둔 채 정지했다.

 

멈춘 게 아니다.

 

정지했다.

 

마왕이 성검의 날에 검지를 대며 밀어내더니 용사를 햫ㅇ해 싱긋 웃었다.

 

왜 그러느냐? 어서 이 몸을 베지 않고. 네 숙원이 아니더냐?”

.”

혹여 목이 보이지 않아서 그런 것이더냐?”

 

마왕이 똑똑 소리를 내며 단추를 풀어낸다.

 

목을 꽁꽁 감싼 의복을 풀어내자 자연스럽게 뽀얀 목덜미가 드러난다.

 

자아, 여기다.”

 

마왕이 고개를 들고 검지로 제 목에 위치한 경동맥을 짚었다.

 

여기를 베라. 거창하게 자를 것도 없다. 그 잘난 검으로 조금 깊이 찌르기만 해도 이 몸 역시 너희 인간처럼 출혈 끝에 실혈사한다.”

 

마왕이 검 가까이 목을 들이댄다.

 

자아, 빨리. 베어보거라. 내 반려가 될 그대에게 죽는 것 역시 여흥 거리가 될 터니까.”

어째서.”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숙인다.

 

검을 쥔 용사의 손이 추운 것처럼 부들부들 떨린다.

 

문득.

 

그를 마왕에게 보내기 위해 희생한 동료들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마왕!”

 

전의를 다진 용사가 눈을 부릅떴다.

 

그래. 바로 그 눈빛이다. 자아, 어서 이 몸을 베어보거라.”

 

팔을 회수한다.

 

등 뒤까지 팽팽하게 당겨진 팔이 용사의 모든 마나를 품은 채 크게 반원을 그리며 마왕의 목을 향해 나아간다.

 

초근접 거리다.

 

검을 다루는 기술은 용사보다 뛰어난 야만전사조차 피할 수 있을 리가 없는 치명적인 일격.

 

하지만 검은 닿지 않았다.

 

어째서.”

그러게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조금 전과 똑같이.

 

목덜미에 닿기 직전 멈춘 검을 마왕이 검지로 밀어낸다. 손이 명백히 날에 닿았는데 그녀는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

 

예리하기로는 그 어떤 무구도 따라올 수 없어 검집조차 전용 검집이 아니면 수납할 수 없는 검을 맨손으로 잡아도 상처 입지 않는다.

 

쨍그랑!

 

용사가 검을 떨어뜨렸다.

 

주륵.

 

검을 쥐었던 손에서 피가 흘렀다.

 

혼신을 담아 휘두른 검이 강제로 멈춘 것이다. 그 충격은 고스란히 용사의 팔에 전가되었다.

 

어떻게.”

 

망연자실한 용사가 무릎을 꿇자, 마왕이 그가 떨군 검을 쥐었다.

 

성검이란 표현이 무색하게 마왕은 부드럽게 검을 쓸어내렸다. 거울처럼 뛰어난 투명도를 지닌 검날에 마왕의 아리따운 얼굴이 고스란히 비쳤다.

 

흐음. 아버지도 참 짓궂으시군.”

아버지?”

그러니까 내 말하지 않았더냐. 검의 재료가 전대 마왕이라고.”

 

용사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다리를 굽힌 마왕이 용사의 허리춤에 매달린 칼집에 성검을 수납하고는 용사의 턱을 검지로 치켜세웠다.

 

보다시피. 이 몸은 우수한 혈통을 타고나 태어나서부터 너무 강했다. 아무리 날고 기는 마족도 이 몸 앞에선 무력한 존재들이었지.”

 

전대 마왕조차도 그녀 앞에선 백중지세에 그쳤다.

 

무얼. 그것도 내가 덜 성장했을 때 이야기였지만.”

무슨.”

 

용사가 황당해했다.

 

, 시간이 조금만 더 흐르면 전대 마왕조차 눈앞의 여자를 이기지 못했다는 소리다.

 

그러다 보니 아바마마께서도 이 몸을 걱정하셨지.”

 

여성 마족은 대대로 자신보다 강한 자하고만 결혼하는 전통이 있었다.

 

요즘은 지키지 않는 이들도 많지만, 적어도 마왕의 혈통은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하기에 이 전통을 반드시 준수하고는 했었다.

 

하지만 세상에 이 몸보다 강한 마족이 있을 리가 없지 않겠느냐.”

 

이는 그녀의 아이가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녀의 아이는 그녀가 결혼해서 남자와 사귀지 않는 한 태어날 수조차 없는 상자 안의 고양이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전대 마왕은 마족이 아니더라도 자기 딸과 맺어질 수 있는 사람을 선정하기 위한 검을 만들기로 했다.

 

재료는 전대 마왕 본인이었다.

 

후후. 잔학무도한 마왕치고 딸 사랑이 지극하신 분이셨지.”

그럼 네가 날 반려라 부른 것도.”

그렇다. 아바마마는 그대를 선택했다. 그리고 이 몸을 만나도록 이곳까지 인도하셨지.”

 

마왕군의 핵심 전력인 간부라 불리는 이들을 무참히 베면서까지 말이다.

 

무얼. 전부 필요한 희생이었지. 더 강한 마왕의 혈통을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라면 말이야.”

 

마왕은 간부들도 새로운 혈통의 탄생을 기리며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였을 거라고 혼자 만족스럽게 웃었다.

 

웃기지 마!”

 

분노에 찬 용사의 주먹이 바닥을 강타했다.

 

내가, 내가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달려왔는데! 동료들을 희생하면서까지 내가 이곳에 도달한 건 전부 마왕인 널 죽이려고!”

왜 그렇게 분노하지? 영광스러운 희생 아니더냐?”

영광?”

그래. 새로운 시대를 지배할 마왕의 혈통. 그리고 그 탄생을 위한 희생. 이게 영광스럽지 않으면 대체 무엇이 영광스럽다는 게냐, 내 반려여.”

 

마왕은 진심이었다.

 

마왕을 무려 3대째 섬기던 불굴의 악마, 사탄조차 새로운 마왕 혈통의 탄생을 위해 기꺼이 용사에게 몸을 바쳤다.

 

무수히 많은 마족의 군벌이 검 아래 무참히 쓰러졌다.

 

, 하하.”

 

용사가 아직도 선명히 떠오르는 과거를 회상했다.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그가 아무리 어리고 늙은 마족을 베여 죽여도 그들은 슬퍼하지 않았다.

 

처음엔 그들이 감정이 없어서.

 

말 그대로 우리와 다른,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 같은 이들이라 그런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그들은 새로운 마왕의 탄생을 위해서 기꺼이 몸을 바친 것이었다.

 

그럼 설마 내 고향이 너희 마족에게 습격당한 것도.”

따로 명령한 적은 없다.”

 

우연의 일치라며 마왕이 절망한 용사의 얼굴을 양손으로 부여잡았다.

 

총기를 잃은 눈빛에 마왕의 얼굴이 담긴다.

 

하지만 용사. 생각해보거라.”

무엇을.”

나는 그대가 이 검을 쥐기까지 그 존재를 의식한 적이 없다. 그래. 내 주변을 알짱거리는 미물인 날파리보다도 못한 존재였지.”

 

하지만 그대는 마족에게 가족과 친구들을 잃어 검을 쥐게 되었고, 끝내 이 몸을 만나러 시련을 넘어서 이곳까지 당도했다.

 

마왕은 안다.

 

그녀 휘하 마왕군은 누구와 견주어도 밀리지 않는 굴지의 전사들이라는걸.

 

즉 용사가 이곳에 도달하는 걸 실패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대는 당도했다. 이 몸 앞에. 사지가 성한 상태로.”

 

말 그대로 숱한 죽음의 고비와 전장을 넘어 이곳에 도달한 역전의 용사를 보며 마왕이 황홀한 듯이 매혹스럽게 웃었다.

 

실로 낭만적이지 않더냐?”

 

우리의 만남이.

 

이윽고.

 

혼례의 의식을 마치듯 마왕의 보드라운 입술이 용사의 거친 입술 위로 포개졌다.

 






그렇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