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 정신 차려라. 앞으로 한 걸음이야."


질퍽한 진창을 제집 마룻바닥처럼 뛰어다니는 도적이 말을 건다.


저런 부분은 참 부럽다. 이런 지형은 아무리 걸어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단 말이지.


"전에 썼던 비를 막아주는 마법 또 써주시면 안 되나요? 마나가 많이 드는 것도 아니잖아요."


"마왕성에 도착한 다음에 옷을 말려버리는 게 훨씬 소모가 적은걸. 이제 마지막인데 최대한 힘을 아껴놔야지."


"비에 젖어서 기분이 나빠지면 전력을 못 낼 것 같은걸요."


사제와 마법사가 나누는 만담도 이따금 들려온다. 원수지간이었던 저 둘도 알게 모르게 친해졌다.


특히 사제 녀석은 마음을 많이 터놓은 게 느껴진다. 저 녀석만큼 딱딱하고 신실해 보이는 사람도 없었는데 말이야.


"...용사. 역시 신경 쓰는 건가. 하긴, 나라도 그럴 수밖에 없겠군."


그만해. 겨우 잊어버렸는데, 다시 떠올라버렸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어. 그런데... 쉽지 않네."


"흠."


그래. 차라리 조용히 있는 게 도움이 될 것 같다. 이놈 성격에 제대로 된 위로를 해줄 것 같지도 않고.




빗줄기가 약해진다.




*




"오. 드디어 해가 뜨네."


"주신의 자비가 이곳 마대륙까지 미치고 있다는 증거겠지요."


"그럼 이쪽 낮이 왕국이 있는 곳보다 짧은 건 주신이 쫌생이라서 그런건가?"


"...하아. 예전 같았으면 일주일 정도 설교를 들어도 모자랄 발언이지만, 내일로 미뤄두도록 하죠. 마법사양은 긴장도 안 되나 봅니다."


동료들의 긴장이 많이 풀려있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가장 큰 산이었던 사천왕들을 아무도 죽지 않고 무찔렀으니, 실질적인 전력이 아닌 마왕을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도적은 짙은 물안개 속에서 열심히 길을 찾고 함정을 탐색하고 있다.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 녀석 성격이 변하지 않았다면, 이런 곳에 자질구레한 함정을 깔아두진 않았을 것 같거든.


뭐, 사기를 떨어뜨릴 만한 발언이니 속으로만 삼켰다.


"마왕성까지 해가 지는 방향으로 두 시간, 구조물이나 능선은 없으니 직진하면 된다. 함정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경계를 늦추지 마라."


오, 벌써 탐색을 마친 건가. 역시 유능하단 말이야.




*




말없이 걷기를 30분 정도, 마법사가 말을 걸어온다.


"저... 용사. 마왕은 어떤 사람... 아니, 마족이라 해야 하나? 하여튼, 어떤 녀석이야?"


이런. 타이밍이 너무 나쁘잖아.


"그냥... 어릴 적 기억이야. 동네에 흔히 있던 여자아이였어. 착하고 명랑한, 온종일 같이 놀고, 서로의 가족을 저녁식사에 초대하던 그런..."


아. 이럴 거면 처음부터 이 녀석들에게 밝히지 말 걸 그랬나 보다.


그 시절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아직도 추억하는 걸 보면, 마왕을 마왕으로만 보겠다는 다짐은 이미 무뎌진 지 오래였나봐.


정신 차려. 마왕은 인류의 적이다. 이미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어.


...이번 대의 마왕이 저지른 짓은 아니지만.


아냐. 생각이 자꾸만 다른 길로 새버린다.


마대륙으로 부터의 위협을 제거하려면, 무력이 약하고 내정에 신경 쓰고 있는 지금의 마왕이 재위한 타이밍이 절호의 기회다. 


인류의 희망. 성검의 주인. 국왕의 명과 사람들의 염원을 한 몸에 안고 있는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다.


"마법사. 그만 해라. 용사를 흔드는 게 목적이라면, 이미 완벽하게 완수했군."


"뭐? 아니... 미안.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어. 자세한 얘기는 해준 적이 없었으니깐..."


이 녀석, 역시 하고 싶은 말은 끝까지 해내고야 만다. 끊임없이 지식을 탐구하는 마법사답달까.


"그래요, 이미 마지막 결전만을 남겨뒀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용사, 당신 마음을 이해해요. 어릴 적 친우와 이렇게 마주하는 건 정말 힘들겠지만, 우린... 우선해야 할 것이 있으니깐요."


"그래, 충분히 알고 있어. 난 진작 마음을 정리했으니, 너희들이 하는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야."


이해한다, 라.


그래.




*




그녀가 주워 온 아이라는 건 부모님이 알려주셨다. 


그녀와 놀지 말라고 하셨지만, 내가 허물없이 지내는 걸 보고 마음을 고쳐먹으셨다. 그때 일을 많이 반성한다고 하셨지, 아마.


그녀의 부모님도 평범한 분이셨다. 모험가 일을 하다 눈이 맞았고, 결혼까지 해 함께 여행하다 마대륙과의 접경지 근처에서 갓난아이였던 그녀를 발견했다고 하셨다.


잔잔한 시냇물에 떠내려가다 바위에 걸려있던 바구니에 들어있었다니, 무슨 동화 같은 이야기인지.


아무튼, 나와 그녀는 어릴 적 둘도 없는 친구였다. 해가 뜨면 산과 들로 뛰다녔고, 해가 지면 둘 중 누구나의 집으로 들어가 저녁식사를 함께했다. 


결혼하자는 약속도 했던 것 같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하하. 뭐, 애들 장난이었지만.


열 살 생일이 되던 날, 교회의 마차 행렬이 우리 마을을 찾아왔다. 역대급의 마왕군 공세를 막아내고 장렬히 산화한 전대 용사의 뒤를 이을 자를 찾고 있다고 했다.


조건은 간단했다. 집어 든 성검이 빛난다면, 그자가 바로 용사였다.


어렸던 나는 용사가 지녀야 할 무게를 알지 못했다. 그저 신나서 빛나는 성검을 들고 동네 곳곳에 자랑하러 다니기 바쁠 뿐이었다.


그녀는 성검을 보고는 새하얗게 질려 이불 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본능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녀가 날붙이를 무서워 하는줄로만 알았다.


그저 그녀 근처에서 요리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열네 살이 되던 해에, 지옥 같은 훈련을 견디고 잠시 휴가를 얻어 마을로 돌아왔다. 


그녀와 기쁨과 재회의 포옹을 나눴다. 내 투박해진 손을 그녀의 머리에 얹고는 그대로 쓰다듬어 주었다. 그때의 감촉이 생생하다. 참, 이러면 안 되는데 말이야.


다음날, 그녀가 심하게 아팠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펄펄 끓는듯한 고열과 두통에 시달렸다. 의원도 원인을 모르겠다고 했었다.


나와 그녀의 부모님은 정성껏 그녀를 간호했고, 사흘이 지나자 모든 증상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녀는 실없이 웃으며 나에게 안겼고, 나는 안도하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데, 며칠 전과 같이, 내 투박한 손을 그녀의 머리에 얹었을 때, 손에서는 느껴져서는 안 될 이물감이 느껴졌다.


그녀의 머리에 뿔이 자라있었다. 머리카락에 가려있어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새끼손가락 한 마디도 안 될 정도의 길이였지만, 그것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마을 전체에 소문이 퍼지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기사단이 찾아왔을 때, 그녀와 그녀의 부모님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나는 그녀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




"오랜만이야."


마왕이 태연하게 인사를 건네온다.


"..."


"대답해줘, 용사님. 목소리가 듣고싶어."


"...비꼬는 거야?"


"너를 비꼬는 게 아니야, 운명을 비꼬는 거지. 목소리가 많이 굵어졌네. 아마 인간들 사이에선 최고의 신랑감이겠지?"


"너..."


"예전이랑 조금 달라졌지? 힘든 일이 많았거든. 온갖 비열한 방법을 쓰면서 이 자리까지 올라왔어. 아, 인간의 기준으로는 정상적인 방법일지도 모르겠네."


달라졌다고 자기 입으로 말했지만, 혼자서 재잘재잘 떠들어대는 건 옛날과 똑같다.


"...조금만 늦게 오지 그랬어. 한 5년... 아니, 3년만.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


"용사, 넘어가지 마라."


"알고 있어."


"나도 지키고 싶었단 말이야. 내 백성들, 내 부하들, 내 친구들, 인간으로 지낼 적의 부모님."


"..."


"우리 둘 다 짊어진 것이 너무 많아졌어. 왜 전대 마왕들은 이런 생각을 안 했던 걸까? 그저 욕심 때문인걸까?"


"무슨 생각을... 말하는 거야?"


"...싸움을 멈추겠다는 생각 말이야. 죽고 죽이지 않아도, 뭐, 교류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그렇게 되면 좋긴 하겠지만 말이야. 이쪽에서 기초를 거의 다 다져놓았는데... 그런데..."


"용사! 진지하게 들어줄 필요 없어!"


알아. 알고 있다고.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용사였다면, 마왕과는 일면식도 없었다면 저런 말은 감언이설로 치부하고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겠지.


그리고 나는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 용사니까.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지쳤어. 사천왕 자리에 앉아있던 내 친구들. 인간 사회에 섞여 있던 나를 아무런 차별 없이 받아줬고, 나와 같은 길을 걷고자 했었어. 그런데... 이제 더는 볼 수가 없네."


"용사! 이제 공격해야 합니다! 더 이상 마음 약해져선 안돼요!"


"..."


"원망하진 않아. 서로를 해치려고 했었고, 승자가 너희였을 뿐이니까. 


너희와 싸우고 싶지 않아. 그러니... 이번만큼은 내 말을 들어줬으면 좋겠네.


무기를 내려놓고 투항해. 목숨만은 살려줄게.


그러고 나서, 함께 새 시대를 만드는 거야."




*




그는 용사다.


마왕을 무찌른 영웅. 평화의 상징.


동료들과 함께 귀환식에서 성대한 환영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


증거로 가져온 마왕의 뿔 한쪽은 증오의 대상으로써 교회 깊숙한 곳에 영원히 봉인될 것이다.


사람들은 더는 불안에 떨지 않고, 왕국은 더욱 발전할 것이다.




작년, 재작년에도 그랬던 것처럼, 그는 마왕성 옛터 근처에 있는 작은 무덤에 찾아간다.


그 앞에서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묘비를 끌어안는다.


묘비에 이름은 적혀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