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용사님,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그래."

 

새까만 로브를 뒤집어 쓴 소녀, 마를린이 내게 방독면을 건네며 말을 걸어왔다.

 

정화통의 결합상태를 확인하고 그걸 뒤집어쓰자, 좁은 시야 너머로 오늘 처리해야 할 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멀 와이번의 둥지. 

 

바람이 잘 드는 이 협곡에만 최소 열다섯 개의 둥지를 튼 모양이었다.

 

아마 여기가 웰링턴 백작령을 떠날 때 기사단장이 말했던 놈들의 본거지겠지.

 

막 사냥에서 돌아와 입에 문 들짐승의 사체를 내려놓는 어미와 알껍질을 머리에 뒤집어쓴 채 재잘대는 새끼들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지금부터 자기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말이다.

 

"디에고, 가스 살포 시작해."

["알았어."]

"유리스는 둥지에 불화살 좀 쏴주고."

["확인했습니다."]

"오코에, 걔네 둘 잘 부탁한다."

["하여간 귀찮은 일은 다 나 시키지."]

 

통신석을 통해 지시를 내리고 녀석들에게 회신을 받았다.

 

묵묵하게 대답하는 디에고와 떨리는 목소리의 유리스, 만사가 다 귀찮다는 어투의 오코에까지.

 

각각 수색과 정찰, 전위를 맡고 있는 든든한 동료들이었다.

 

"불쾌하시다면 굳이 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 거 아냐."

 

긴 한숨을 내쉬는 나를 두고, 마를린은 무미건조한 어투로 그리 말했다.

 

분명 지지난번의 코볼트 마을 토벌 때 토악질을 했었던 것이 원이겠지.

 

"마물들 죽이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그럼 됐습니다."

 

짧은 대화를 마친 우리는 그대로 입을 닫고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지켜봤다.

 

협곡의 입구에서 바람의 흐름을 읽던 디에고는 준비해둔 다섯 개의 가스통 마개를 차례로 풀어나갔다.

 

이윽고 투명한 포스겐 가스가 새어 나와 협곡을 메우기 시작했고, 처음엔 이변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와이번들도 하나둘 이상행동을 보였다.

 

가장 먼저 입구 근처에 있던 둥지의 어미 와이번이 괴성을 지르며 피를 토했다.

 

둥지의 새끼들은 단말마조차 지르지 못하고 제자리에 쓰려졌고, 하늘로 날아오른 몇몇 성체들은 무의미한 날갯짓을 반복하다 맥없이 떨어졌다.

 

하늘을 날기 위해 체적 대비 몸이 가볍고 기낭이 큰 와이번이었으니, 가스의 효과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다음은 유리스가 쏘아 올린 불화살이 아직 살아있는 새끼들이 자리한 둥지에 작렬했다.

 

산 채로 타들어 가며 비명을 지르는 새끼들 덕분에 겨우 가스를 피해 날아올랐던 어미들도 다시 내려앉아 그것들을 껴안은 채 죽어갔다.

 

마지막엔 오코에가 휘두른 폴암에 와이번의 머리통이 으깨졌다.

 

방독면을 쓴 탓에 그 움직임은 다소 둔했지만, 가스에 중독되어 느릿하게 땅을 기어 다니는 와이번을 도륙하는 데에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끝에 가선 디에고까지 합세하여 멱을 따고 다닌 걸 보면, 이번 토벌 임무도 간단하게 끝이 난 셈이었다.

 

"마법식 수정했다는데, 잘 됐나 보네."

"그동안 쌓인 데이터 덕분입니다."

"그래도 고생했어. 쉬운 일 아니잖아 그거."

 

나의 칭찬에 마를린은 드물게 얼굴을 붉히며 침묵했다.

 

웰링턴 백작령에서 머물 때, 거의 매일 숙소에 박혀있던 성과를 거둔 셈이니 말은 안 해도 내심 기쁘겠지.

 

"이봐, 리. 안 바쁘면 와서 이것들 어금니 뽑는 것 좀 도와줘."

"어. 금방 갈게."

 

그게 기특해서 머리라도 쓰다듬어주고 싶었지만, 멀리서 들려오는 오코에의 목소리에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마왕을 토벌하기 위해 소집된 용사 일행이라곤 해도, 그 여정에는 적지 않은 금액의 돈이 들어갔다.

 

그러니 이렇게 중간중간 의뢰받은 마물 토벌 임무를 수행하고 전리품도 챙기는 것이었고.

 

처음에는 생물체의 사체를 훼손하고 적출물을 가공하는 것에 거부감도 들었는데,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디에고하고 유리스는?"

"늘 하던 거 하러 갔지."

"하긴, 요 며칠 바빴으니까 고팠겠네."

 

어느새 모습을 감춘 디에고와 유리스를 주제로 실없는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피에 젖은 어금니의 탑이 완성됐다.

 

이 정도면 금화 30다르크 정도는 될 테고, 웰링턴 백작이 걸었던 보수가 50다르크.

 

앞으로 최소 두 달은 돈 걱정 없이 여행길에 매진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근데 넌 용케 이런 싸움법을 생각해 냈네?"

"별거 아냐. 나 있던 곳에선 100년도 전에 써먹던 전술이었거든."

"네 고향은 대체 어떤 곳인 거냐……."

 

내 대답에 오코에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야 그럴 만도 했다.

 

녀석을 포함한 내 일행, 더 나아가 왕국 전체에서 내 고향 얘기를 곧이곧대로 믿어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테니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저 억울할 따름이었다. 

 

어디 흔해 빠진 소설 도입부마냥 트럭에 치이거나 높은 곳에서 투신을 했던 것도 아닌데.

 

그냥 주말 오후에 알바 나가려고 현관문을 열었더니 이곳, 리가 왕국의 궁정이었다.

 

그때 처음 얘기를 나눴던 사람이 마를린이 아니었다면.

 

내가 이곳에서 부여된 과업을 수행하지 않으면 녀석이 처형당한다는 말을 그냥 무시했다면.

 

아마 이런 이야기는 시작되지 않았겠지.

 

"제독 작업 끝났습니다. 방독면 벗으셔도 돼요."

"어, 고마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날 이곳으로 불러온 장본인인 마를린이 그리 말하며 방독면을 벗었다.

 

아까 방독면의 안경 너머로 봤을 때도 그랬지만, 여전히 발갛게 달아오른 양 볼은 녀석이 얼마나 칭찬에 약한지를 잘 확인할 수 있게 해줬다.

 

"후-, 신선한 공기."

 

문제가 있다면 그런 아저씨나 낼법한 감탄사와 함께 분위기를 깨는 오코에의 존재였다.

 

아니, 애초에 남의 집안에서 칼춤 춰놓고 그 사체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게 우스운 노릇이었다

 

"왜, 뭔데. 뭐가 문제야."

"아니. 아무 문제 없어. 빨리 물건 챙기고 가자. 춥다."

"딱 봐도 뭐 있구만. 뭔데, 얘기-"

"디에고! 유리스! 빨리 안 오면 우리 먼저 간다!"

 

그러니 이제 남은 일은 자리 정리하고 해지기 전에 다음 역참까지 이동하는 것이었다.

 

이곳 와이번의 협곡에서 가장 가까운 A39 역참까지 반나절.

 

그곳에서 웰링턴 백작이 보낸 행정관에게 토벌 결과를 확인받고 보수를 수령.

 

거기서 노스엔드 변경백령 초입까지 또 반나절이 걸렸다.

 

이것도 그나마 웰링턴 백작이 지원해준 마차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정이었다.

 

"그럼, 영지에 머무르시는 동안은 이쪽 여관은 이용해주시면 되겠습니다."

"협력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리 오스왈드 용사님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우리가 노스엔드 변경백령에 발을 들였을 땐 이미 자정이었다.

 

그나마 성문의 위병조장이 내게 호의를 베풀어 금화 1다르크 정도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 행운이라면 행운이었겠지.

 

내 이름이 리 오스왈드라는 우스꽝스런 이름인 건 제쳐두더라도, 위병조장이 손수 숙소를 안내해준 덕분에 헤매지 않고 짐을 풀 수 있었다.

 

취사장에서 더운물을 얻어다가 간단히 목욕을 마치고, 밀짚을 채운 침대에 몸을 눕히자 하루 동안의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조악하긴 해도 지붕 아래에서 잠을 청하는 건 열흘 만이었다.

 

마물 걱정 없는 안전한 영지로 들어온 것은 한 달 만이었고.

 

이곳에 넘어와서 왕도를 떠난 지는 이제 3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 잠이 오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던 중, 품 안에 안겨 있던 마를린이 고개를 들어 말을 걸었다.

 

단둘이 있을 때만 이름으로 불러주는 부분이 귀엽기 그지없었지만, 불안에 젖은 녀석의 표정을 보니 그런 감상에 젖어있을 때는 아닌 것 같았다.

 

"아냐. 잠깐 생각 중이었어."

"고민이 있으면 저한테 말해도 됩니다."

"그럴 일이 생기면 바로 말할게."

"……정말, 리는 혼자서 너무 많은 걸 짊어지려고 합니다."

"걱정 끼쳤으면 미안해."

 

짧은 대화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또 녀석에게 걱정을 끼쳤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의 섣부른 사과가 불만이었는지, 마를린은 볼을 부풀리고는 그대로 내 가슴팍에 얼굴을 부벼왔다.

 

어떻게 원망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상냥하고 귀여운 아이를.

 

다만 걱정인 것은 앞으로의 여정이었다.

 

노스엔드 변경백령을 넘고 나면 그 앞은 완전히 마족들의 영역이었다.

 

지금까지야 어떻게 나의 조악한 전술과 지휘가 먹혀들었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리…는…, 충분히… 훌륭한… 용사예요…."

 

잠꼬대하듯 그런 말을 늘어놓은 마를린은 머지않아 새근대며 잠에 빠져들었다.

 

충분히 훌륭한 용사라.

 

새끼 마물로 어미를 꾀어내고, 상처 입은 동족을 미끼로 함정을 파내며, 종국에는 독가스를 이용하여 적을 몰살시키는 자.

 

그런 사람을 과연 훌륭한 용사라고 할 수 있을까.

 

운명의 부름을 받고 인류를 수호하기 위해 오른 여정에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왔다. 

 

한정된 자원으로 최대한의 결과를 뽑아내기 위해 전술을 연구했고, 내 동료들의 안위만을 우선으로 여겼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거였다.

 

언젠가 켄타우로스 평원에 팠던 시체 구덩이가 가득 메워졌던 일. 

 

그것의 맨 아래에는 병든 개체들이 꼬챙이에 꽂혀 동족에게 도와달라며 신음하고 있었다.

 

드레이크 절멸 작전 때 훔친 알을 수은에 절여 돌려놨던 일.

 

그것들은 멍청하게도 수은 중독으로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품에 안은 썩어버린 알을 놓지 않았었다.

 

코볼트 마을에서, 다크엘프 취락에서, 와이번의 협곡에서 포스겐 가스를 사용했던 일…….

 

그동안의 여정에서 겪은 기억의 편린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내게 그런 좋은 말을 하지 말아줘.'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그 말을 속으로 집어삼키며, 나는 오늘의 일정을 마쳤다.

 

 

 

1.

 

["리! 가스 정화통!"]

["용사님! 전위 지원 부탁드립니다!"]

["여기 디에고, 가스탱크가 모자라다."]

"알았으니까 천천히 좀 말해."

 

귀에 꽂은 통신석이 쉴 틈 없이 울려댄다.

 

노스엔드 변경백령을 지나, 마물의 땅에 들어선 우리는 하루가 멀다하고 치열한 전투를 이어갔다.

 

오래전 왕국군이 버려둔 거점들을 중심으로 기동로를 잡고, 인간형 마물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습격해 보급을 해결했다.

 

이따금 다른 용사 일행이나 왕국군 군수지원단으로부터 필요한 물품을 교환·보급받기도 했지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다른 용사 일행들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보급 소요가 높은 전술을 구사하는 우리로선 치명적인 부분이었다.

 

"이번에도 어떻게 넘어가긴 했네."

"좋아할 일이 아냐. 이대로 가다간 마왕성 문턱도 못 밟고 돌아가게 생겼다고."

 

엎어진 채로 눈앞에 놓인 도끼를 들어 올리려던 오크의 멱을 따며 그리 읊조리자, 오코에가 불만스럽다는 듯 맞받아쳤다.

 

분명 포스겐 가스 제작에 쓸 활성탄 잔량도 아슬아슬하고, 디에고와 유리스가 사용할 소모품은 다음 거점에서 확보하지 못하면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하긴 힘들 터였다.

 

하지만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니, 이제부턴 남들하고 똑같은 라인에서 달리면 되는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지금까지 편하게 성과를 냈다고 해서 다른 용사 일행한테 있는 게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

"아……."

 

마를린의 마법 구사력은 이미 아크 메이지의 반열에 들었고, 디에고와 유리스는 우리 일행에 합류하기 전에도 모험가로서 활동해온 탓에 이런 지구전에는 잔뼈가 굵었다.

 

거기에 오코에는 왕실 기사단장이 직접 추천해준 인물이 아닌가.

 

다들 머리 회전이 빨라 내가 얘기하는 얼토당토않은 뜬구름 잡는 소리를 금방 이해하고 따르는 점도 행운이었다.

 

포스겐 가스 추출이 그랬고, 원시적이긴 해도 항생제 제작이나 멸균 붕대 따위를 만들어 내는 것도 곧잘 해냈다.

 

이를 통해 불필요한 비전투 손실을 줄이고 다른 용사 일행들과 물물거래를 할 때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도 있었으니, 여기에 기여한 마를린과 디에고에게 특히 감사할 일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비장의 수가 남아있었으니.

 

"어차피 우리 역할은 수색대야. 기동로 확보만 끝나면 나머지는 왕국군이 알아서 해주겠지."

"그건 처음 듣는데?"

"국왕하고 직접 얘기했었거든."

 

현재 리가 왕국의 국왕인 에드먼드 루이세 프레드릭 2세는 선대 국왕이 이루지 못한 마왕 토벌이라는 업적을 반드시 이루고자 하는 눈치였다. 

 

다만 그 야망을 머리가 따라가지 못해 주변국과의 사이는 썩 좋지 못했고, 그런 상황에서 인구 500만 남짓의 리가 왕국 홀로 마왕을 토벌하겠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그 고집덩어리를 어떻게 설득했길래."

"당신 즉위 기간 내에 마왕 모가지 떨어지는 거 보고 싶으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했지."

"간단하네."

"꼭 그렇지만도 않았어. 그 인간, 멍청한 주제에 또 의심은 더럽게 많았거든."

 

내가 했던 제안은 단 두 가지였다.

 

왕국군의 정예화와 용사 일행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

 

인구 500만의 리가 왕국에서 현 규모인 3만 이상의 군대를 징발해 체계화한다는 건 무리였다. 

 

오히려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군을 정예화하여 전반적인 전투력 상승을 꾀하는 것이 나았다.

 

그리고 정치적 카드 내지는 대국민 행사 따위로 써먹은 탓에 파편화된 용사 일행의 모집과 운용에도 개혁을 단행해야만 했다.

 

그들 대부분은 특별한 재능을 가지거나 기구한 사연이 있어, 조금만 단조하면 충분히 쓸만한 전력으로 운용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서 써먹고 사후관리는 뒷전인 탓에 전반적인 의욕 고취나 활동 면에서 비효율의 끝을 달렸다.

 

그런 그들에게 합당한 예우를 갖추고 전폭적인 지원을 함으로써, 적극적인 마물 토벌을 장려해 국민의 삶의 질 향상과 마왕 척결의 기틀을 다져나갈 필요가 있었다.

 

"그래도 고작 3년 만에 여기까지 진출한 걸 보면 말은 잘 들었나 보네."

"자기 아버지까지 팔아가며 꺼냈던 얘긴데, 똑바로 안 하면 그게 사람 새끼냐."

"하긴, 그것도 그렇지."

 

오코에는 짧게 혀를 차며 폴암에 들러붙은 피딱지를 닦아냈다.

 

이 짓도 이제 길어봐야 1년이다.

 

마왕성까지의 기동로 확보가 끝나면 지난 3년간 정예화를 거친 왕국군이 마왕 토벌 임무를 완수하겠지.

 

그때가 되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가능하면 마를린도 데리고 돌아가고 싶은데. 

 

"그럼, 출발할까?"

"……."

"오코에?"

 

그런 속 편한 생각에 잠겼던 것도 잠시,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려 했지만 어째서인지 돌아와야 할 오코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사람이 말을 하면 대답을-"

 

그대로 고개를 돌려 녀석에게 핀잔을 주려 했으나, 다음 순간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나는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용사 오스왈드가 당신이야?"

 

장난기 섞인 가벼운 목소리. 

 

하지만 그 모습은 전혀 장난스럽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새까만 털옷을 걸치고, 오른쪽 어깨엔 용의 두개골을 장식한 고혹적인 인상의 여인은 딱 봐도 불길한 마력이 넘쳐흐르는 완드를 쥔 채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반대 손에는 오코에…. 아니, 오코에였던 것의 머리가 들려있었다.

 

"그래. 내가 리가 왕국의 서른두 번째 용사, 리 오스왈드다."

"일단 이거, 선물이야."

 

그것은 내게 오코에의 머리를 던지며 그리 말했고, 받아든 머리의 표정은 고통으로 끔찍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다크엘프의 독화살에 옆구리를 맞았을 때도 이런 표정은 짓지 않았었는데.

 

"보아하니 그쪽은 마왕인 거 같은데."

"그렇다. 나는 5대 마왕, 안타리엘이다."

 

한 쌍의 거대한 검은 날개를 펄럭이며 자신을 소개한 마왕, 안타리엘은 날 향해 차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서, 뭐가 목적이길래 이딴 패악질을 부린 거지?"

"패악질? 그건 그쪽이 지금까지 우리한테 한 짓 아닌가?"

 

패악질이라는 단어에 그것은 한순간 미간을 찌푸리며 가시 돋친 말투로 응수했다.

 

그 말을 한 뒤에 애써 미소를 유지하려 하는 모습이 애처로울 따름이었다.

 

"난 국왕이 주문한 일을 수행했을 뿐이야. 애초에 너희들만 아니었어도 딴 세상에서 잘살고 있던 내가 이딴 뭣 같은 일 하러 오지도 않았을 거고."

 

뭐, 나도 그동안 한 일이 있어 적당히 끝내고 싶었지만, 그쪽에서 같잖은 도덕론 따위를 들고나온 이상 이쪽도 할 말은 많은 입장이었다.

 

오코에의 머리를 조심스레 내려놓고 마왕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니, 그것은 당황스러운 시선을 회피하며 우물거렸다.

 

"우린 그냥 우리 영역에서 살아가고 싶은 것뿐이야. 그쪽이 자꾸 들쑤셔 대니까 이런 불상사가 생긴 거지."

"그냥 살아가는 거가 남의 재산 침해하고 마을 단위로 학살하고 시체로 장난질 치는 거냐? 아가리는 찢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해야 할 거 아냐."

 

마왕씩이나 돼서는 한다는 말이 씨알도 안 먹히는 극단적 문화 상대주의라니.

 

그런 식으로 얘기하는 걸 보면 그동안 했던 짓에 죄책감을 느껴온 내가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 그 부분은 내 생각이 짧았네."

그래도 순순히 자기 실책을 인정하는 걸 보면 썩어도 왕은 왕이라는 건가.

 

"나는 관대하니까, 그런 사소한 부분 그냥 넘어가 주도록 하지."

 

정정. 이건 그냥 자기 성애자다.

 

"그것보다, 동료가 죽는 걸 옆에서 본 것 치곤 냉정하네?"

"여기서 눈물 짠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니니까."

"나라면 살려줄 수 있는데?"

"지금 나하고 그딴 거래 하자고 찾아온 거야?"

 

난 이런 족속들이 싫다.

 

태어날 때부터 가진 게 많으면 자기 처지에 감사한 줄 알고 살면 그만인데, 이딴 식으로 남을 능멸하며 희열을 느끼는 사이코패스 새끼들.

 

당장이라도 허리춤의 칼을 뽑아 멱을 따고 싶었다.

 

"흠흠, 그래. 내가 너를 찾아온 이유는 따로 있었지."

"뭘 말하던 네가 듣고 싶은 대답은 들을 수-"

"용사 오스왈드, 내 반려가 돼라."

 

뭐?

 

방금 이게 뭐라고 한 거지?

 

"너, 자기가 한 말의 의미가 뭔지는 알고 내뱉은 거냐?"

"물론. 내가 그대의 소유물이 되고, 그대는 나의 소유물이 되는 것. 설령 그것이 어떤 불결한 결과를 낳더라도 말이지…."

 

끝의 불결 어쩌고 하는 부분에 와서는 아예 고개를 도리질 치며 얼굴까지 붉혔다.

 

이쯤 되면 어이가 없는 것을 넘어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니, 일단 이유라도 한 번 들어보자. 목적이 뭔데?"

"딱히 그쪽이 취향인 건 아니지만, 그 능력만큼은 가상하거든."

 

그 말을 들은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집어삼키느라 허벅지를 꼬집어야 했다.

 

내 능력이 가상하다니. 이 마왕이란 작자, 사람 보는 눈이 어지간히도 없는 모양이었다.

 

나같이 학부생 수준의 개념이나 겨우 아는 놈을 국정 운영에 썼다간 나라 말아먹기 딱 좋을 텐데.

 

리가 왕국의 체질 개선도 내가 던진 개념을 유능한 관료들이 떼거리로 붙어서 정책을 연구한 끝에 겨우 성과를 낸 경우였다.

 

그런데 지금 마왕은 그런 것에 대한 고려는 일절 없이 어디서 뜬소문 몇 개 주워듣고 나를 등용하겠다는 건데, 웃음이 안 나오고 배기나.

 

"내가 그 요구를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나?"

"물론이지. 마왕국의 부마 자리를 노리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이런 미인을 매일 밤 마음대로 취할 수 있다고?"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팔꿈치로 커다란 가슴을 받친 모습은 분명 치명적인 퇴폐미를 풍기고 있었다.

 

저런 여자와 권력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면 그거만 한 행운도 없겠지.

 

"확실히 그건 좀 구미가 당기네."

"그렇지? 그럼 빨리 돌아가서 결혼식 준비하자. 신혼여행은 오케아노스 제도의 휴양지가-"

"허나 거절한다."

"에? 방금 뭐라고…?"

"거절한다고. 이 몸만 큰 애어른 새끼야."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넋이 나간 얼굴로 바들바들 떠는 마왕의 모습은 참 걸작이었다.

 

다른 용사 일행들도 이 광경을 봤어야 했는데 말이다.

 

아니, 애초에 초면부터 동료의 모가지를 따놓고 한 제안에 긍정적으로 대답해줄 거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류였다.

 

"……후회할 것이다."

"잘 안 들린다. 말할 거면 크게 말해라."

"후회할 거라고! 용사 오스왈드!"

 

나의 도발에 돌연 날갯짓을 하며 날아오른 마왕은 울분을 토해내듯 그리 소리를 지르더니, 그대로 동쪽 하늘을 향해 사라졌다.

 

분명 저쪽이 마왕성이 위치한 곳이겠지. 이 부분만큼은 고마워할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저렇게 멍청한 짓만 하는 걸 보면 리가 왕국의 마왕 토벌도 시간 문제나 다름없었다.

 

무력이야 왕국군 3개 군단에 왕실 기사단이 붙으면 해결될 테고, 난 그전까지 마왕의 수족들을 하나씩 잘라나가면 될 일이었다.

 

"어우, 머리야…."

 

마왕이 사라진 자리를 쳐다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도중, 옆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리, 너 거기서 뭐하냐."

 

그건 오코에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확인하니, 거기엔 멀쩡히 목이 붙어있는 오코에가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나를 부르고 있었다.

 

"오코에!"

"야, 인마. 징그럽게 들러붙지 마. 마를린이 보면 오해하겠다."

 

아무렇지 않게 재미없는 농담을 건네는 그는 분명 오코에였다.

 

마왕은 말했었다. 자신에겐 죽은 사람을 되살릴 능력이 있다고.

 

하지만 그녀의 제안을 거절한 내게 마왕이 호의를 베풀어줄 이유 따윈 없을 텐데.

 

"안타리엘이 왔었군요."

"이것 봐. 마를린도 다 보고 있었잖아."

"그런 거 아닙니다."

 

내 의문을 알아차린 듯 말을 걸어오는 마를린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해 보였다.

 

재미없는 농담을 건네다 튕겨진 오코에가 안쓰럽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어떻게, 바로 알아차렸네?"

"용사님과 오코에가 있었던 자리만 마력의 흐름이 왜곡됐었거든요."

"과연……."

"안타리엘이 무슨 말을 했어도 그걸 그대로 믿으시면 안 돼요. 그것에겐 사람을 홀리는 재주가 있다고 들었으니까요."

 

별로 긍정할만한 부분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말하는 마를린의 모습이 너무 진지해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긴 그 사람 홀리는 데에 일가견이 있다는 마왕이 사실은 나르시시스트에 겉모습만 그럴싸한 애어른이라고 해봤자 믿지도 않겠지.

 

"걱정 마. 이제 와서 편을 바꿀 생각은 없으니까."

"그런가요."

"애초에 내가 한 짓이 있는데, 그쪽으로 가봤자 이용만 당하다 사지가 찢기겠지."

"……."

 

순간적으로 어두워진 내 표정이 신경 쓰이기라도 한 건지, 마를린은 내게 무어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녀석도 부정할 수 없는 거겠지. 내가 그동안 용사 직함을 달고 인류 수호라는 미명하에 저지른 일들을.

 

사후세계가 있다면 난 아마 죽고 나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애들 다 모였으면 가자."

 

부정적인 생각들을 애써 떨쳐내며 자리를 정리하자, 멀리서 디에고와 유리스가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유리스의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걸 보아하니, 보나 마나 또 어디 구석진 데에서 재미 좀 보고 온 것이 분명했다.

 

"용사님…. 아니, 리."

 

막 디에고를 향해 달려가는 오코에를 따라가려던 때, 뒤에서 들려오는 마를린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고,

 

"리는 충분히 훌륭한 용사예요."

 

더없이 맑은 미소를 지으며 그리 말하는 녀석이 동공에 비쳤다.

 

마를린이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나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아주 조금은…, 구원받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