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시!”

 

 귀를 째는 듯한 비명이 울려퍼졌다. 리시가 퍼뜩 소리가 난 방향을 돌아보았을 때, 그녀의 동공이 심하게 요동쳤다. 쌔애액, 매서운 기세로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물체가 있다.

 

 “아...”

 

 눈앞이 깜깜해졌다. 바위의 크기는 대략 성인 남성만해, 리시의 힘으론 도저히 막을 수 없다. 그녀는 흡 무거운 숨을 삼켰다.

 

 “안 돼...”

 

 성직자라고 해도 명색이 모험가다. 곧장 반응했다면 아슬아슬하게나마 공격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리시는 피하지 않았다.

 

 (큭...)

 

 아니, 피할 수 없다. 리시의 앞엔 한 명의 여자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리시는 일고의 망설임도 없이 쓰러진 여자를 감쌌다. 그것으로 그녀를 지킬 수 있을지는 차후의 문제였다.

 

 -빠직

 

 둔탁한 파열음이 울려, 으깨지는 소리가 뒤를 따른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리시는 눈을 깜박여, 다행히 그녀도 정신을 잃은 여자도 무사했다. 어느 새 눈앞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콜...”

 

 리시는 망연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콜은 리시의 동료이자 근육질의 몸을 한 거체의 전사다. 언제나 그랬든 위기의 순간에서 동료를 지켜 준다. 콜은 아직 얼떨떨해하는 리시를 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씩 웃었다.

 

 “어이, 무사하지?”

 

 하지만 그 웃음은 몹시도 힘겹다. 만전의 상태라면 모를까 콜 역시 진작에 만신창이다. 지금의 충격이 결정타가 되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털썩 무릎을 꿇었다.

 

 “콜!”

 

 당황한 리시는 콜에게 달려간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콜은 팔을 들어 리시를 제지했다.

 

 “이까짓 거, 신경쓰지 마. 리시, 그보다 빨리 에델을...”

 

 콜은 간곡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리시는 표정에 당혹스러움이 어린다. 지금 당장 콜에게 응급처치를 해야 한다.

 

 “에델...”

 

 리시는 입술을 꾹 깨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결연한 표정으로 쓰러진 여자, 에델의 가슴에 손을 얹는다.

 

 -사아아아

 

 공기가 떨렸다. 리시는 찬송가를 닮은 주문을 읊조려, 손에선 푸르스름한 빛을 발한다. 온화한 빛이 에델의 몸을 감쌌지만, 상황은 그렇게 여유롭지 않았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이제와서 발악해 봤자다!”

 

 볼타르가 포효했다. 

 그는 마왕군의 4대 간부 중 하나, 커다란 외뿔을 가진 수인이다. 일설로는 산을 뒤엎는다고 할 정도의 완력을 보유해, 그와 직접 무기를 맞대고 살아남은 적이 없다는 소문까지 들려오는 괴물이다. 그나마 콜이라면 그를 상대로 조금이나마 버틸 수 있겠지만 콜이 중상을 입은 이상 볼타르를 제지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여기다, 근육 뇌 자식아!”

 

 조롱과 함께 몇 개의 암기가 날았다.

 

 “흐읍!”

 

 볼타르는 기합과 함께 가슴을 폈다. 어떻게 된 몸인지, 분명 정확히 맞았음에도 암기들은 생채기 하나 내지 못 한 채 튕겨나온다. 볼타르는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오르더를 흘겨보았다.

 

 “누군가 했더니...날파리 주제에 끼어들 셈이냐?”

 

 “제길...”

 

 오르더는 깊은 낭패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냉정한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도적인 자신과 볼타르 같은 중전차는 상성이 좋지 않다는 걸.

 

 “누가 날파리라는 거야. 뇌가 작으면 상대가 누군지 제대로 안 보이나?”

 

 그럼에도 마음을 굳게 먹고 볼타르를 도발했다. 말 뿐만이 아니다. 암기를 포기한 오르더는 직접 칼을 빼들고 볼타르를 막아섰다.

 

 “호오...”

 

 볼타르는 용하다는 듯 휘파람을 불었다. 그건 아주 잠시로, 험악한 시선으로 오르더를 노려보았다.

 

 “도망치면 목숨이라도 건질 수 있었을 텐데...주제넘는 만용은 죽음을 재촉할 뿐이란 걸 모르나?”

 

 볼타르는 번쩍 도끼를 쳐들었다. 도끼날에 스민 햇빛은 얼음장마냥 차갑다.

 

 “저승에서나 후회해라!”

 

 -부웅

 

 커다란 도끼가 허공을 갈랐다. 오르더는 옆으로 뛰어 피했지만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어느 새 접근한 볼타르는 연이어 도끼를 휘둘러댔다. 붕붕대는 풍압마저 살기가 배어 있어, 볼타르는 큰 소리로 비웃었다.

 

 “요리조리 피해다니는 잔재주가 있나본데, 자신있게 나서서 하는 짓이 고작 그거냐!”

 

 오르더의 머릿속에선 수많은 생각이 흘렀다. 어떻게든 난국을 타개할 해법을 찾아 헤매지만 자신의 짧은 검, 부족한 완력으론 도저히 정면에서 부딪칠 수가 없다. 어설프게 시도라도 하는 순간 바로 무기와 함께 두동강이 날 게 뻔하다.

 

 (이 자식...빨라!)

 

 그렇다고 마냥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도끼와의 간격은 겨우 종이 한 장 차이, 필사적으로 도망다니고 있지만 어느 새 식은땀으로 흠뻑이다. 집채만한 덩치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민첩한 상대다.

 

 (제길, 못 이겨. 내 힘으론...)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자신에겐 승산이 없다는 걸. 그럼에도 도망칠 수가 없다. 자신이 도망치고 나면 그 뒤엔 정말 아무도 없다.

 

 “어디 계속 피해 봐라! 멈추는 순간 죽을 테니까 말이야!”

 

 아무리 낮은 확률도 거듭하면 잡을 수 있다. 볼타르의 체력이 떨어지는 것 보단 오르더의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게 먼저였다.

 

 -쌔액

 

 (아뿔사...)

 

 오르더는 비스듬히, 목을 향해 엄습해 오는 도끼날을 감지했다. 그 찰라의 시간이 고무마냥 매우 길게 늘어진다. 그게 주마등, 죽음이라는 개념임을 깨닫았다.

 

 -우뚝

 

 하지만 도끼가 오르더의 몸에 닿기 직전이었다. 기적이 일어나, 거짓말처럼 도끼의 날이 멈췄다.

 

 “으윽...”

 

 볼타르의 팔이 부들거렸다. 그는 성난 눈길로 홱 뒤를 돌아본다. 토른이 숨을 헐떡이며 손을 뻗고 있었다.

 

 “허억...허억...”

 

 속박 계열의 마법, 바닥난 마력을 긁어모은 최후의 저항이다.

 

 “이 자식이!”

 

 결정적인 순간을 방해받은 볼타르가 소리쳤다. 치솟는 짜증 만큼이나 불끈 그의 근육이 더 크게 부푼다. 혈관이 울룩부룩 튀어나올 만큼, 볼타르는 쿵 힘껏 땅을 밟았다

 

 -빠직!

 

 “커헉!”

 

 토른이 피를 토했다. 기합으로 속박을 벗어난 볼타르에 의해, 마력의 반동을 버티지 못 한 탓이다. 토른의 몸이 축 늘어졌다.

 

 “감히 귀찮게 하기는...”

 

 볼타르는 다시 오르더를 노려보았다. 오르더는 비분, 한편으론 두려움으로 이를 딱딱 부딪쳤다. 기적처럼 한 번은 살았지만 더 이상은 없다. 하지만 여전히 칼을 내민 채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아, 볼타르는 다시 도끼를 쳐들었다.

 

 “놀이는 여기까지다.”

 

 처형을 고하는 사형수와도 같았다. 토른의 방해에 기분이 상해, 이번에야말로 오르더를 두 토막 내겠다는 듯 흉흉한 살기를 내뿜는다.

 

 “응?”

 

 돌연 볼타르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의 시선은 오르더가 아닌 그 뒤쪽으로 향했다.

 

 “미안해. 올, 이제 물러나도 돼. 내가 할 테니까.”

 

 은구슬을 굴리는 듯 맑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경직되어 있던 오르더의 표정이 단번에 밝아졌다. 그는 반색하며 흘끔 뒤를 보았다.

 

 “에델!”

 

 에델이 깨어나 있다. 리사는 숨을 헐떡이며, 하지만 몸을 돌보지 않고 콜을 향해 달려간다. 일련의 광경을 바라보던 볼타르는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뭐야, 네 년, 제일 먼저 나가떨어진 주제에 이제와서 폼 잡기는. 얌전히 자고 있었으면 그나마 편하게 죽여 줬을 텐데 말이지.”

 

 에델은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주위를 슥 둘러보았다. 만신창이가 된 동료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는다.

 

 -척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자세를 잡고 검을 앞으로 내민다. 깨끗하다고 할지, 그 자세에선 손톱만큼의 미혹도 느껴지지 않는다.

 

 “응?”

 

 볼타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별 거 아니다. 처음 덤벼들었고 순식간에 제압했던 상대다. 분명 그럴 텐데, 어딘가 위화감이 느껴진다. 그녀의 몸을 감싼 기류가 달라져 있다.

 

 “네 년, 정말로 해 볼 셈이란 말이지...”

 

 착각이다. 그 짧은 순간 사람이 변할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서로의 시선이 교차했을 때, 볼타르는 또다시 자기도 모르게 흠칫했다.

 

 (뭐지, 이건?)

 

 쿵쿵, 심장이 경종을 울린다. 살짝 눈빛을 주고받았을 뿐인데, 칼날이 목에 닿은 듯한 서늘함이 엄습했다. 에델은 잔잔한 수면처럼 굴곡 업는 목소리로 고했다.

 

 “네 녀석...용서하지 않겠어.”

 

 아름다운 눈이다. 보석과 같아, 하지만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뭐라고...주제 모르고 나대고 있어.”

 

 명색이 마왕군의 간부다. 볼타르는 뺨을 이죽거리며 괜시리 두려움을 떨쳐낸다. 해 볼테면 해 보라는 듯 빈정거렸다.

 

 “용서라니, 감히 누가 할 말을 하고 있어. 고깃덩어리가 돼서 후회하게 해 주지.”

 

 에델은 볼타르를 노려보며, 검을 쥔 손에 힘을 가한다.

 

 -파직

 

 스파크가 튄다. 검날에 푸르스름, 빠직거리는 기운이 서렸다. 볼타르의 동공이 벌어졌다.

 

 (전격이라고? 그럴 리가...)

 

 애써 태연한 척 하고 있지만 도끼를 쥔 손바닥엔 땀이 스몄다. 화염, 빙한계열의 마법과는 다르다. 볼타르가 암만 일자무식이라도 직책이 마왕군의 간부로, 이야기로 들은 적이 있다. 선택받은 용사만이 다룰 수 있다는 속성에 대해서.

 

 -꾸욱

 

 볼타르는 자세를 고쳤다. 이제까지의 상대와 격이 다르다. 더 이상 얕볼 수 없어, 그는 이제까지 없었던 진심을 내비쳤다.

 

 “네 년, 아무래도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것 같은데...지금 처리하지 않으면 위험해지겠어.”

 

 손에 잡힐 듯 진한 살기가 맞부딪쳤다. 먼저 움직인 것은 에델로, 타악 지면을 찼다. 번개같은 움직임으로 단숨에 거리를 좁힌다.

 

 (빨라!)

 

 볼타르의 표정이 굳었다. 순간 에델을 놓쳐, 다시 그녀를 포착했을 때는 어느 새 눈앞에 와 있다.

 

 “어림도 없어!”

 

 볼타르는 반사적으로 도끼를 들었다. 그녀의 검을 막아낼 요량이었지만 에델은 멈추지 않는다. 그대로 검을 내리쳐, 강렬한 전격이 폭발해 둘을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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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이 흘러나온다. 명랑하면서도 부드러운 선율이 숨이 멎을 듯한 침묵을 누그러뜨렸다.

 

 “아, 뭔데. 여기서 끝내면 어떻하냐고.”

 

 “하여튼 중요한 데서 끊는데 뭐가 있다니까. 당장 작가놈 끌고 와! 내가 정강이를 까버릴라니까!”

 

 곧장 불만이 터져나온다. 관객이자 손님들의 심정은 음악만큼 유쾌하지 않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꿀꺽꿀꺽 술을 들이킨다.

 

 “여기 술! 술 더 가져와!”

 

 장소는 번화가의 대형 주점이다. 2층까지 족히 수십개는 되는 테이블이 손님들로 꽉꽉 들어차 있다. 주방에선 끊임없이 요리가 담긴 접시를 내어놓는다.

 

 “21번, 40번 테이블, 빨리 가져가!”

 

 양념을 발라 구운 고기와 버터빵, 옥수수 수프, 맥주가 주점의 최고 인기 메뉴다. 주점의 규모에 비해 꽤나 소박한 건, 해당 음식들의 인기가 맛 때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완전 멋있잖아. 용사가 거기서 각성할 줄이야.”

 

 여느 테이블에 세 명이 앉아 있다. 그 중 한 남자가 연신 감탄을 발하며 맥주 한 잔을 통째로 비웠다. 마법 영상에 나온 용사 파티는 예전 이 주점에 들른 적이 있어, 인기 메뉴도 당시 그들이 주문했던 음식이다.

 

 “내 말이 맞지? 오르더는 리시를 좋아한다니까. 맨날 겉도는 척 하면서 중요할 때는 나서잖아.”

 

 맞은 편의 여자도 맥주 한 모금을 마시곤 뿌듯해한다. 또 한 명의 남자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니뭐니해도 정통파 스토리가 최고야. 괜히 복잡하게 꼬아봤자 나중에 감당을 못 하지.”

 

 세 명은 아하하 동시에 웃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용사들에 대한 화제를 이어간다. 다른 테이블의 화제도 크게 다를 건 없어, 이세계 용사 모험기는 연일 호조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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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를 중심으로 한 연합과 악마를 중심으로 한 마족들이 평화조약을 맺은 지 수 백 년이 흘렀다. 풍족한 자원과 오랜 평화는 전에 없던 번영을 촉발해, 세계는 전에 없던 황금기를 맞이했다. 굶주림과 잔혹한 전쟁 따윈 이제 낡은 서적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염원하던 평화가 세상을 옳은 길로만 인도해 주진 않았다. 결국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는 건 누구도 아닌 본인들이다. 

 눈부신 번영에도 욕망의 그릇은 결코 채워지는 법이 없다. 그득히 쌓여 가는 부 만큼이나 욕망의 한계치도 같이 솟구친다. 부유함은 필연적으로 기행을 부르는 법, 따분함을 못 견뎌하던 누군가가 의견을 냈다.

 

 ‘이세계에서 용사들을 부르자’

 

 최초 발의자가 누구였는지는 모른다. 이세계에서 용사를 부른다는 개념 자체는 태초부터 존재했지만, 그건 인류가 멸망의 위기에서 택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다.

 적어도 이제까진 일선을 지켜왔다. 하지만 말초적인 쾌락에 목마른 인간들의 눈에는 더 이상 그런 리스크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세계 용사들을 불러, 꾸며낸 위기를 설파한다. 그리고 마왕을 물리치도록 설득해, 그 과정에서 피어나는 사랑과 우정, 용기와 정의를 영상에 담는다.“

 

 심각하게 비틀린 욕망, 어이가 없는 촌극이다. 정말로 신이란 존재가 있다면 당장 산뜻한 웃음을 띠고 강림해서 발상을 떠올린 인간을 손수 지옥불에 내던졌을 것이다. 굳이 신이 아니어도, 인간들의 교만함을 틈타 마족이 조약을 깨고 침공해 오기라도 하면 그때는 모든 게 끝이다.

 

 “볼타르 말이야. 번개 맞는 거 엄청 리얼하던데...새까맣게 탔잖아. 진짜 죽은거 아냐?”

 

 남자 두 명이 앉은 테이블이 있다. 그 중 하나가 혀를 내두르며 물었다. 당연하다. 인위적으로 유도한 상황이지만 진실을 모르는 용사 파티는 진심이다. 정말로 칼을 휘둘러 적을 베고 죽인다. 그들에게 마족이란 세상을 위기로 몰아넣는 악의 무리에 지나지 않으니까. 하지만 맞은편의 남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뭘 새삼스럽게 그래. 어차피 마왕이 부활시킬 텐데.”

 

 “그게 어이없단 거지. 부활을 시켜도 마왕 입장에선 자기 부하만 고통받는 거잖아?”

 

 맞은편의 남자는 쯧쯧 핀잔을 놓았다.

 

 “이봐. 마왕이라고 피 대신 쇳물이 흐르는 게 아냐.”

 

 무엇보다도 수명이다. 마족의 수명은 제각기지만 마왕만은 장생족인 엘프조차 따라갈 수 없는 긴 수명을 가지고 있다. 살해라도 당하지 않는 이상 사실 영생이라고 해도 좋은 존재다.

 

 “게다가 마족이잖냐. 인간 이상으로 욕망에 충실하다고.”

 

 긴 수명은 어떤 의미에선 저주다. 익숙해진다는 건 동시에 무감각해진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타 종족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무료함을 견뎌야 하는 게 마왕의 숙명이다.

 무엇보다도 이 놀이는 마왕의 협조가 없으면 시행부터 불가다. 즉, 처음부터 이 촌극의 적극적인 후원자 중 한 명이 마왕이다.

 

 “그래도 죽는 놈은 아플 거 아냐. 마족이라고 고통을 안 느끼는 게 아니니까.”

 

 “볼타른지 뭔지 실제 이름은 모르지만, 그것도 이유가 있어. 일단 전쟁이 없잖아. 싸움에서 공을 세워서 신분이 올라가는 시대가 아니라고. 게다가 상위 마족일수록 수명은 오질나게 길어서 늙어 죽지도 않아요. 다들 마왕의 눈에 들고 싶어서 안달이 났지. 무슨 말인지 알아? 마족들도 다들 계산이 있는 거야.”

 

 “하, 마족으로 사는 것도 고달프구만.”

 

 “그러니까 우린 얌전히 즐기기만 하면 된다고.”

 

 “헷...”

 

 둘은 짠 하고 술잔을 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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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시각 왕성, 이계에서 용사들을 소환한 장소이기도 하다. 왕성에서도 이번 용사들의 활약에 대한 호평이 자자한 가운데, 왕은 한 사람을 객실로 불러들여 치하했다.

 

 “훌륭해. 이번 편도 만족스러웠어. 아주 짜릿하더군. 국민들도 즐거워하고 있을 거야.”

 

 “황송합니다.”

 

 라온은 깊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는 이번 용사들의 모험을 유도하는 인물로, 말하자면 작가이자 총 책임자다. 왕은 시종에게 명해 금화가 담긴 주머니를 건넸다.

 

 “그런데 말이야...”

 

 돌연 왕이 마땅찮은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어리둥절한 라온은 조심스레 왕의 기색을 살피며 물었다.

 

 “뭔가 마음에 안 드시는 점이라도...?”

 

 왕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어흠 입가에 손을 대고 헛기침을 한다.

 

 “이건 내가 아니라 공주의 생각이네만. 공주, 내 딸 말이야.”

 

 “공주님께서...?”

 

 초조해하는 라온에게 왕은 거듭 공주를 강조하며 말했다.

 

 “그래. 공주의 바램인데...조금 화수를 늘릴 수 없겠나?”

 

 라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어 허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만, 그건 어렵습니다.”

 

 “공주가 하도 성화라서 말이야. 내가 아니라 공주가. 정말로 안 돼?”

 

 “세트도 인원도 이미 다음화에 맞게 준비해 놓았습니다. 마왕에게까지 이야기가 되어 있는데, 억지로 늘리다간 전개가 엉망이 될 겁니다.”

 

 왕은 태연하게 웃으며 라온을 설득했다.

 

 “마왕은 걱정 말고...내가 어떻게 할 테니까 말이야. 제작비도 배로 얹어 주지. 맨입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야. 자네도 숨겨놓은 비장의 시나리오 한 편 정도는 있을 거 아닌가. 잠깐 돌아서 가자는 거야.”

 

 거기까지 말한 왕은 안타깝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뭐, 정 안된다면 어쩔 수 있나. 내가 강제할 수야 없지. 하지만...그 정도의 재주도 없다면 다음 용사들을 불렀을 때 또 자네한테 기회가 갈 지 모르겠군.”

 

 라온은 복잡한 얼굴을 했다. 고압적인 자세에 상대는 왕으로, 사실상 부탁을 가장한 협박이다. 한참을 고심하던 그는 체념한 기색으로 말했다.

 

 “정 그러시다면 조금만, 5화 정도라면...”

 

 “아, 그리고 하나만 더.”

 

 “예?”

 

 왕은 손짓으로 라온을 가까이 오게 했다. 몸을 바싹 붙여, 그의 귀에 대고 조그맣게 속삭인다.

 

 “모처럼 용사가 여자인데 너무 밋밋하구만. 혹시 서비스 장면 같은 건 없나? 아주 살짝이라도 말이야.”

 

 절찬리에 방영 중인 이세계 용사 시리즈 시즌 4.

 용사 일행이 마왕을 물리치기까지 여정은 좀 더 험난해 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