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햇살이 따사롭던 그 날의 하늘, 그 날의 푸름을 기억하는가?

우리는 그날 처음으로 마주했었지. 햇살이 따사롭던 그 날 말이야.


그 때도 이곳에서 만났었지.

마왕의 옷을 입고 위풍당당하던 이와, 정의감으로 무장한 수많은 이들 말이야.


그들의 정의감은 위대했으나, 그들의 승리의 열쇠는 되지 못했다네.

마왕의 불꽃 앞에 쓰러진 이들의 시체를 밟고 올라선 한 사내를 빼곤 말이야.


그 사내는 마침내 마왕의 심장에 칼을 꽂았지.

마왕의 가슴팍에서 부정으로 가득 찬 검은 피가 솟구쳤고.

이미 쓰러진 이들의 땅을 적셨지.


기억하는가? 그곳은 결국 누구도 살 수 없는 죽음의 땅이 되었다네.

운명의 장난일지, 신의 섭리일지...

마왕의 심장을 정확히 도려내지 못한 검은 떨어졌고,

마왕은 삶을 위해 도피할 틈을 만들 수 있었다네.


분수처럼 솟구친 피는 하늘 높이 흩뿌려져 수많은 재앙을 낳았지.

비에 섞여 땅에 떨어진 그 피는 세상을 황무지로 만들었고.

수많은 사람들은 사내와 마왕을 원망했지.


파아랗던 하늘은 그날 이후로 노을빛보다 더욱 빨갛게 변했고.

음유시인들은 용사를 더 이상 노래하지 않게 됐다네.


그대는 그대와 함께하던 푸른 마법사를 기억하는가?

그녀는 마왕의 피를 마신 용에 의해 찢어졌다네.

죽음의 순간에 드는 때까지도 집요하게 눈과 핵을 향해 마법을 쏘아대던 모습이란.


그녀가 남긴 대공마법식을 통해 재앙의 탄생 이래 5년 만에 하늘을 정복할 수 있었지.

푸른 하늘을 누비던 인간들은 이제 붉은 하늘을 누빈다네.


그대는 그대와 함께하던 금발머리 궁수를 기억하는가?

애석하게도 그녀가 돌아갈 곳은 없었지.

위대한 세계수의 이슬을 마시던 그녀의 부족들은,

이제 세계수가 빨아들인 마왕의 피를 마시게 되었으니.


이성을 잃은 동족들에게 겁탈당하면서도 그들을 용서하던 그녀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네.

결국 그들을 마왕의 광기에서 구할 방법은 죽음밖에 없었지만 말이지.


그대는 그대와 함께하던 성녀를 기억하는가?

안타깝게도 그녀는 성수를 마시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네.

위대한 신의 성수라면 오염되지 않았을 거라 판단한 건지는 몰라도.

마왕의 피를 한껏 들이킨 그녀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마음과 육신의 괴리로 인해 급사했다네.


눈과 코, 모든 구멍에서 검붉은 피를 쏟으며 마지막까지 신에 대한 기도를 멈추지 않았지.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는 그녀를 죽일 수 밖에 없었네.


그리고 수많은 이들을 기억하는가?

자네를 믿고 따라온 이들 말이야.


마왕의 피는 죽은 이에게도 안식을 선사하지 않았다네.

그들을 끔찍한 몰골로 살려내 그들의 마음과는 전혀 다른 일들을 하게 만들었지.


나는 무엇을 했느냐고?

나는 이 참상을 눈에 똑똑히 새겨뒀다네.


하늘로 솟구친 마왕의 피를 맞아도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지.

살아가는 이들은 삶의 의욕을 잃고 광기에 휩싸이기도 했으며,

죽은 이들에게는 안식을 선사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네.


...그렇다면 그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파아랗던 그 날의 하늘을 기억하던 이들은 이제 모두 죽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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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지막이군."


마법사, 하니엘이 용에게 뜯어먹혔다.

궁수, 레이첼은 세계수에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

성녀, 요한나는 내가 직접 죽였다.


모닥불을 맞으며 나른한 한숨을 쉬었다.


"끄으으으응..."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 빌어처먹을 하늘은 그날 이후로 시뻘겋게 변했다.

가장 거지같은 건, 밤에도 더럽게 시뻘개서 잠을 자기 힘들다는 것이랄까.


"쯧, 이게 끝인가..."


마지막 남은 장작을 모조리 모닥불에 쑤셔넣고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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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날 아침. 나는 여느 때와 같이 굳게 닫힌 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참 빌어먹게도 큰 문이군."


나는 혀를 차며 혼잣말을 씹어삼켰다.


...벌써 이 짓거리를 한 지 1개월이 다 되어간다.

수많은 용사들과 전사들, 마법사, 궁수...

끝도 없이 많은 이들을 쑤셔넣어 여기까지 도착했다.

1개월이라는 시간과 인간을 소모하여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이 문을 열면, 이 빌어먹을 하늘과 세상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었다.


"...그대는, 햇살이 따사롭던..."


문고리를 붙잡은 나는, 차마 문고리를 돌리지 못하고 계속 같은 시만을 읊을 뿐이었다.


나 혼자다. 어차피 이곳까지 오는 동안 만난 마수들이면 나 혼자 있는 것을 두고 뭐라 할 사람들도 없다.

아니, 오히려 뭐라 할 사람들은 모조리 마왕의 피에 죽거나, 이곳까지 오는 것에 목숨을 바쳤지.


"큭큭..."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다.

생면부지인 나를 위해 이 빌어처먹을 곳까지 목숨을 바치다니.


겨우 내가 그 새끼들의 임종을 지켰다는 이유 하나로 말이다.


나는 웃음을 삼키며 문 너머의 있을 존재에게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평소와 같은 시지만, 조금의 변주를 가해서.


"...그래. 그대 역시 그 날의 하늘을 기억하겠지."


지금은 빌어처먹을 정도로 빨갛지만.


"...마왕의 군세가 두려웠지만, 다들 행복하고, 활기찬 세상이었지."


지금은 그들이 모두 마왕의 군세가 되었겠지만.


"...그래. 한 사내가 마왕의 심장을 찔렀지."


진짜 더럽게 아팠다. 가슴은 두짝인데 하나가 될 정도로 아팠지.


"마왕의 피는 하늘로 날아 그곳을 적시고, 세상을 피로 물들였다네."


그리고 피에 물든 이들은 모두 나의 광기와 분노에 물들었지.


"그렇다면, 바로 앞에서 그 피에 범벅이 된 그대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야 당연히, 이 문 너머에 있을 네놈 또한 그렇게 되었겠지.

다른 누구보다 잔혹하고, 미쳐있으며, 광분한.

누구보다도 나의 모습에 가까운, 나의 분신이여.


"나도 미쳤나 보군. 재미있지 않나?"


"그대의 연인이던 마법사는 용에 찢겨 죽었다."

"그대를 짝사랑하던 궁수는 평생 지켜온 처녀를 미쳐버린 동족에게 헌납했지."

"그대가 가장 신뢰했던 성녀는 가장 끔찍하게 미쳐버렸다네."


"그리고... 그대와 함께 했던 이들은 모두 죽었지."


말 한마디 한마디에, 냉소를 담아서.


"재미있지 않은가? 그 모든 걸 자네가 이뤘다네."


이 세상을 모조리 바꾼 건 자네라네-

라는, 여느때와도 같은 비웃음을 전하며.


"자네 덕분에 이 모양 이 꼴이 됐는데, 이 정도 복수는 괜찮지 않은가?"


"그대의 부수고도 모자랄 성검에 심장을 찔리는 바람에 생긴 이 빌어먹게도 정의로운 마음은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덕분에 누군가를 죽일 수도 없다.

덕분에 분노와 광기에 휩싸일 수도 없다.

덕분에 용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 빌어처먹을 성검 덕분에.


나를 이따위로 만든 새끼는 저 문 너머에서 내가 해야 했을 일을 마음껏 누리는데.

어째서 나는 구차하게 삶을 연명하고도 방해를 받아야 하는가.


"참... 기구하지 않은가?"


문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손이 징징 울리며 고통이 몰려왔다.

마왕의 힘을 쓸 수 없는 평범한 인간 여자의 몸.


이 유약한 몸으로 살아남기 위해 나를 토벌한 이들에게 접근했다.

그들을 통해 마법을 배우고, 생존을 배우고, 실력을 길렀다.


"그대는 선을 향했지만 악을 행하고, 나는 악을 향했지만 선을 행하게 되었군."


이 또한 운명의 장난이겠지.


"그래. 이제야 결심이 서는군."


이제야, 결심이 선다. 문고리를 돌렸다.


끼이익-거리는 소리와 함께 낡은 문이 열렸다.

어둠으로 가득한 방에, 한줄기 붉은 빛이 들어온다.


"가만 생각해보면... 처음과 딱히 변하지 않은 것도 있겠지."


붉은 빛을 뒤에 이고 들어오는 소녀는 마왕.

이제는 용사의 모습으로 이곳에 들어오고 있다.


"나는 마왕이다. 마왕은 악을 행하지."


붉은 빛을 맞으며 옥좌에서 일어서는 이는 용사.

이제는 마왕의 모습으로 용사를 맞고 있다.


"그대는 용사다. 용사는 정의를 행하지."


용사는 아무 말 없이 나의 피로 물든 검을 고쳐 쥐었다.


"그대는, 그대가 관철하는 정의를 계속해서 행하는 것이겠고."


용사가 나에게 돌진하고, 나는 그것을 레이피어 하나에 의존하여 흘려낸다.


"나는, 내가 관철하는 악을 행할 뿐이다."


레이피어를 그에게 겨누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용사의 정의는 마왕을 처단하는 것."


우레와 같은 검격이 내 앞에 쇄도한다.

검이 흐르는 길 하나하나마다 그의 정의와 나의 악의가 뒤섞여 끔찍한 비명을 자아내고 있었다.


"나를 죽이려 한 모든 행위가, 인류를 적으로 돌리는 마왕의 행보였던 게지."


레이피어가 호선을 그리며 검의 길을 뒤섞는다.

나의 악의에 덧씌워진 그의 정의가 비틀린 환희를 뱉는다.


"그리고 마왕의 악은 용사를 처단하는 것."


빈틈을 노린, 날카로운 찌르기.

힘을 일점에 집중하여 용사의 심장을 노렸다.


"그대를 죽이려 한 모든 행위는, 마왕을 죽이려던 용사의 행보가 되었군."


청량한 금속음이 울리며, 레이피어가 그의 검에 의해 막혔음을 확인한 나는, 그대로 몸을 뺐다.

용사의 역습이 시작되고, 그의 검에 물든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러니 그대는 그대의 정의를 관철하게나. 나는 나의 악을 관철할테니."


레이피어와, 성검이 부딪힌다.


"이것이야말로, 용사와 마왕의 결전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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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푸르름을 되찾았다.


1개월에 걸친 마왕 토벌 작전의 성공을 알리는 표시였다.


사람들은 생기를 되찾았고, 죽음의 두려움이 없어진 이들은 행복을 되찾았다.


ㅡ훗날, 자욱한 마기를 뚫고 이곳을 발견한 이들은 보았다.


피가 한 방울도 새어나가지 않게 마법으로 봉합당한 용사와,

스스로의 배를 찔러 죽음을 택한 마왕의 시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