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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탤릭체(기울임)는 외국어를 의미합니다

예아


-4-

   

바람 소리에 섞여 사방에 쥐라도 돌아다니는 듯 부스럭대는 소리가 가득했다. 사람 움직이는 소리가 그만큼 줄어들 수 있다는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 훈련이라면 훈련이다. 그에 맞추어 움직임을 찾아내는 훈련을 받지 못한 것도 잘못이라면 잘못이겠다. 

한둘이면 저항이라도 해 보겠으나, 그 잠깐 동안 헨델과 눈을 마주친 사람만 다섯이다. 

   

“저들의 목적은 저입니다. 저항하거나 적의를 보이지 마세요.”

“어차피 총알보다 저놈들 머릿수가 더 많은데.”

   

사수는 눈을 뜨기 전부터 상황을 대강 파악했다. 

멀리 가지 않은 게 잘못이었다. 마차를 둘러싼 제1파의 상황을 보자마자 제2파는 인근을 뒤지기 시작했다. 산속에서 몇 사람 숨어 있으면 눈에 띄지도 않는다고는 하지만, 찾아보는 눈이 백 개를 넘으면 그것도 틀린 얘기인지라. 

두더지 셋은 얌전히 포박당하는 걸로 끝났다. 여인은 대신 두 발로 섰다. 

   

“아, 에른스트 중령, 오랜만이네요. 새벽부터 열심이니 보기 좋습니다.”


“폐하께서 출타하시는데 신하 된 자로서 그 뒤를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기병대로도 닷새 걸릴 거리를 반나절만에 쫓아오다니, 당신이 평소에도 그렇게 열심이었으면 지금도 중령에 주저앉아 있지는 않을 텐데 말이에요.”


헨델은 도통 대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양손을 묶어 놓은 줄을 혼자 풀 수 있을까, 아니면 사수가 귀신같은 재주로 나머지 둘을 구해 주지 않을까, 뭐 그런 얄팍한 상상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중령은 대답 대신 검을 빼들었다. 그의 마력은 감정을 매개로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마력에 대해 문외한인 헨델도 분위기가 나쁘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보아하니 두더지 셋도 멀쩡하게 살아서 나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헨델은 좌우로 고개를 돌려 사수와 척후를 바라보았다. 둘 다 칼 빼든 남자에게 시선이 꽂혀 있다. 사수는 늘 하던 그 표정이지만 척후는 떨리는 눈빛을 쉬이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저들이 뭐라고 떠드는지 사수가 귀띔이라도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지만, 정말 바람뿐이었다. 

   

“폐하, 의심을 거두고 따라오시면 다 괜찮을 겁니다.”

   

“당신은 여전히 내게 충성하는가요?”

   

“물론입니다, 폐하. 계셔야 할 곳으로 돌아가셔야죠.”

   

마왕이 억지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에른스트, 지금 자결하여 당신의 충의를 증명하세요. 나도 병력이 있어서 나쁠 건 없으니, 31대대의 지휘권은 내가 가져가겠습니다.”

   

대령은 마왕과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칼을 고쳐 잡았다. 

   

“누가 부추겼죠? 나를 잡아오면, 아니 목이라고 가져가면 자리 하나라도 준다고 하던가요?”

   

“그게 궁금하십니까, 폐하?”

   

“물론 궁금하죠. 알겠다. 모나흐카 준장이죠, 그렇죠? 뭘 주겠다고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당신 중령에 앉혀 놓은 것도 그 양반이니까, 그 사람 말이라면 철석같이 믿었겠죠. 안타깝네요. 그 사람은 이제 당신이 필요하지 않은 모양인데.”


“마음대로 생각하시고, 마음대로 떠드십시오. 모나흐카는 폐하처럼 교활한 여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칼끝에 물든 마력은 주변을 시뻘겋게 비추고 있었다. 열까지 펄펄 끓는 것 같았다. 치켜든 칼끝으로 쏠린 수많은 시선도, 중령의 감정도, 

   

“폐하께 놀아나는 건 지쳤다고, 다들 그렇게 말하더군요. 덕분에 용기가 났습니다. 폐하 덕분입니다.”

   

그리고 중령의 칼끝이 만들어내는 그리 우아하지 않은 원호까지도.

   

“그래요, 그 여자가 물론 나만큼…”

   

칼은 불길로 곡선을 그리며 마왕의 가슴팍을 관통해 발언을 끊어 놓았다. 

불길은 그러고서야 사그라졌다. 잠깐 환했던 덕에 그 불 꺼진 밤은 더더욱 어둑했다. 

중령은 구태여 자기 마력을 동원하여 다시 불을 켜지 않았다. 

그 잠깐 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중령은 어설픈 자세를 고쳐 똑바로 서지 않았고, 주변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으며, 마왕은 쓰러지지 않았다. 

   

“…나만큼 못된 사람은 아니겠죠. 그래도 나를 보자마자 죽이라고 시킬 만큼 바보도 아닐 텐데, 당신은 칼질 한 번으로 명령과 충의를 다 내다 버리는군요.”

   

“어째서…?”

   

“어째서긴, 당신이 바보라서 그렇죠.”

   

마왕은 오른손으로 옷가지를 털어냈다. 중령은 왼손으로 불을 밝혔다. 마왕은 건재하다. 옷이 시커멓기는 하지만 피를 흘리는 건 아니다. 안 그래도 거무죽죽한 외투를 웬 흙이 더럽히고 있다. 중령은 오른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방금까지 예리한 검이었던 것은 칼날 중간부터 거무스름한 흙빛으로 변해 부스러져 있었다. 방금까지 어둠 속을 응시하고 있던 주변이 웅성인다. 

   

“중령, 당신답네요. 어울려요.”

   

중령은 반쪽만 남은 칼을 그대로 들고 요지부동이었다. 한 번 더 내지르려는 듯 칼을 들었다가 공중에서 멈추었다. 고민하는 칼끝이 떨린다. 그러다가 이제는 단검이 되어 버린 칼로 다시 마왕을 내려친다.

   

손이 칼날을 붙잡고 있다. 마왕은 피 흘리지 않는 손을 털어냈다. 중령의 왼손에서 허공을 떠돌고 있던 불길이 형체를 잃고 흩어졌다가, 다시 손끝에서 새 형체를 갖추고는 물이 되어 쏟아졌다. 중령의 왼쪽 소매가 축축하게 젖었다.

   

“모나흐카는 저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하던가요? 왕의 마력은 오직 <통섭> 하나뿐이다, 그리 유력한 집안도 아니고, 본인은 힘 좀 쓴다는 군인도 아니며, 늘상 맹한 얼굴이니, 위치만 알면 사로잡는 건 식은 죽 먹기다, 뭐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겠죠.”

   

“아니야…”

   

헨델도 ‘아니야’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중령은 자기 검을 쳐다보고 있다. 

   

“그 <통섭>이라는 게 뭘까요? 직접 겪어 본 소감을 말해 보세요.”

   

“타인의 마력을 제어하는 것…이것이라면 역시, 스스로가 강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모나흐카가 이야기해 주지 않았죠? 당연합니다. 그 여자도 모르니까요. 당신을 미끼로 집어던지면 마왕이 능력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겠죠. 에른스트 중령, 그리고 그대 병사들, 다른 누군가의 버림패로 살겠습니까? 타인이 그대를 종용한다면 그대로 끌려가 의미도 역사도 없는 전장에 살을 버리고 뼈를 묻겠습니까?”

   

헨델은 잠깐 귀를 의심했다. 마왕이 난데없이 우리나라 말을 하는 줄 알았다. 그게 아님은 다음 순간에 알았다. 

말하자면 그것은, 언어를 피부에 새기는, 혹은 언어를 물에 녹여다 들이키는 것 같았다. 마왕은 어느 순간부터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에워싼 수많은 인파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하도록,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도록 하였다. 

   

기묘한 감흥에 좌우를 둘러보았다. 사수와 척후가 똑같은 표정을 하고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시선이 또렷이 모였다. 다행히도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라, 적어도 다같이 하는 착각이었다. 

   

땀 닦을 생각을 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새벽 찬바람이 한 차례 불었다. 마왕은 옷자락 하나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중령은 다른 사람보다도 특히나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에른스트,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왕이 감추던 비밀을 엿보았다는 이유로 그대를, 나의 가신들을 죽여 묻어야 하겠습니까? 그대가 한 찰나 무지했던 것을 죄로 삼아야겠습니까? 

 자, 칼 에른스트, 그리고 31대대의 병사들이여, 이곳을 떠나십시오. 설령 그대가 다시 내게 칼을 겨누어 내 목이 떨어진다 하여도, 나는 그대를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무능하여 나라에 죄스러워 마땅한 왕이라면, 나는 그 쓸모없는 삶을 부지하기 위해 그대의 목숨을 빼앗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물러나십시오. 이것은 한 사람으로서의 부탁이며, 아직 목 떨어지지 않은 왕으로서의 명령입니다.”

   

마왕은 중령의 오른손을 붙들고 칼을 떨어뜨렸다. 아직도 뻣뻣한 중령의 귀에 한 마디를 불어 넣었다. 

   

“중령, 그대가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병사들이 감히 움직이겠습니까?”


중령은 이제야 태엽 감긴 기계처럼 움직이기 시작한다. 말이 없다. 낙엽바닥에 떨어진 칼을 주울 생각도 없다. 

예를 갖추어 한 번 인사를 올리고 황망히 빠져나갈 뿐, 조용하게 몰려든 제31대대는 그렇게 조용하게 그들의 눈앞에서 물러났다.

   

   

-5-

   

“황당한 수준이군. 손발을 다 묶어 놓은 줄 알았다니까. 묶여 있기는 했지만.”

   

“이럴 거면 굳이 쫓기고 있을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본보기로 몇 놈 정도만 박살을 내도…”


마왕은 아래쪽만 남은 칼로 밧줄을 끊었다. 날이 잘 들지 않았던 덕에 사수가 손을 살짝 베였다. 

   

“제 마력은 진짜 악랄한 자들에게는 통하지 않아요. 방금 그 중령 정도면 정신머리가 멀쩡하게 박힌 편이라 다행이었지.”

   

“뭐길래 그렇습니까? 내가 배운 건 없지만 내 생각에는 그 중령이 생각한 대로 타인의 마력을 제어한다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사수는 손발이 제대로 움직이는지 허공에 좀 휘저어 보더니 출발하자는 신호를 했다. 이번에도 헨델이 앞장서고, 척후 에딜이 후방을 맡았다. 

   

“제 마력은…”

   

“잠깐, 잠깐.”

   

헨델이 가던 걸음과 마왕의 발언을 동시에 끊었다. 

   

“우리, 국경 건너면 다시 남남이 될 텐데, 그렇게까지 자세하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남의 비밀을 안다는 게 꼭 좋은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뭐가 됐든 살아서 국경만 넘으면야.”

   

“아, 그래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마왕이 잠깐 웃었다. 

   

“국경을 언제 넘을 줄 알고요.”

“난 마왕 씨한테 찬성하겠소. 당신 같은 사람이랑 잘 모르면서 동행하려면 폭탄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느낌이니까.”

   

사수가 척후 에딜과 헨델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고, 마왕이 자신의 마력에 대해 털어놓는 것으로 임시동맹은 체결되었다. 

   

“제 마력은 적(敵)이 누구인지를 정합니다. 남이 심어 놓은 적의를 흐트러뜨리거나, 타인을 증오하게 만들거나, 혹은…의지 아래의 차원에서 스스로에 대해 끝없는 의구를 품게 만들죠. 중령의 손끝은 그 찰나의 순간 스스로를 의심했고, 제 주인을 거역했어요. 중령도 자기 손이 자기 말을 안 들었던 적은 없으니, 제가 남의 마력을 통제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던 것이고요.    

이것이 <통섭>의 전부예요. 다만 스스로 느껴 뼛속까지 새겨 놓은 적의는 손쓸 수 없죠. 그래서 악랄한 자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것이고요.”

   

아리송했다. 설명을 들어도 이해보다는 질문이 느는데, 굳이 알아야 할까 하는 의구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헨델은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 끝났으면, 이걸 좀 드시오.”

   

사수가 종이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봉투에서 마왕의 손안에 떨어지는 약이 여섯 알 정도. 

   

“발산되는 마력을 좀 감춰 주는 약이오. 부작용으로 마력 자체가 억제되긴 하는데, 어쩔 수 없고. 그렇지 않으면 또 누가 쫓아올 게 분명하니까. 내 앞에 하루 한 알 처방된 건데, 일단 네 알 정도 먹으면 괜찮을 것 같으니.”

   

“고마워요. 그런데 말이 좀 짧아진 것 같은데요?”

   

마왕은 약을 삼키고 쓴맛에 얼굴을 한껏 구기면서 감사의 인사를 짜내었다. 마력에 관여하는 약은 하나같이 맛이 없다 보니, 마력 하나도 없는 체질로 태어난 것에 이렇게 소소한 장점도 있었다. 

   

“이제 동료니까.”

   

사수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 

   

“중령을 살려서 보냈는데, 누가 또 쫓아오지 않겠습니까?”

   

“물론 오겠죠. 그러니까 열심히 움직여야 해요.”

   

   

-6-

   

헨델은 오래 걷지 못하고 또 낙엽더미 안으로 들어갔다. 사수는 다시 라이플 조준경으로 여기저기를 들여다보고 있다. 이번에는 마왕과 척후도 낙엽 신세를 지게 되었다. 

   

“마력으로 어떻게 안 됩니까?”


속삭이는 목소리.

   

“마력을 전혀 못 쓰겠어요. 아까 먹은 약효가 생각 이상으로 끝내주는데요.”

   

마왕군이 골짜기를 가로막고 진을 치고 있다. 이번에는 산길에도 일정 거리마다 셋씩 조를 지어 척후를 세워 두었다. 

막사와 장애물도 여러모로 준비가 철저하다. 여기에 누가 무슨 이유로 방어선을 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제 얼굴을 보고 지나가게 해 줄 확률은 아마 2할 정도 될 거예요.”

   

“그러면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마십쇼.”

   

사수는 엎드려서 옆눈길로 탄약을 세었다. 일전에 사수가 탄약을 철저하게 파악해 두었던 덕분에, 소음탄약이 단 한 발도 없다는 나쁜 정보만 분명해졌다. 몇 발 있다고 해도 지금처럼 감시가 철저하면 소용도 없겠거니와. 

   

“지도가 제대로 됐다면 저 진영은 남서를 향하고 있습니다. 동쪽 후방에는 조병창과 보급창이 있고, 전방에는 대군을 전개할 수 없는 협곡이 이어집니다. 우리도 빠른 길로 가려면 여기에서 저 길목을 돌파해야 합니다.”

   

“그런 것도 알고 있나요?”

   

“우회하면 시간이 얼마나 지연되지?”


“최소 4일입니다.”

   

“4일씩이나. 난 여기에서 기회를 좀 더 보았으면 하는데. 헨델,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즉시 우회, 아니면 여기에서 대기.”

   

“저는 우회에 찬성합니다.”

   

“마왕 양반, 당신은 어떻소?”

   

“저도 발언권이 있나요? 저는 이 자리가 포근하니 좋네요. 제가 아는 우리 군이라면 하루를 머물러도 확실하게 하고 가는 편이니까, 어쩌면 단시일 내로 자리를 비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잠깐.”

   

누가 온다. 바지를 주섬대며 좌우를 살핀다. 괜히 바위 뒤쪽까지 오더니 바위로 등 뒤를 가린다. 

오줌이라도 마려운지 바지를 내린다. 두 걸음만 오른쪽으로 갔으면 헨델의 오른손을 밟았을 텐데. 

헨델은 낙엽더미 속에 몸을 완전히 파묻고, 왼손으로 검을 잡았다. 오른쪽에서는 졸졸대는 소리가 들리다가 잠시 후 끊어졌다. 다시 주섬대는 소리. 

그리고는 조용하다. 헨델도 숨을 멈추었다. 

발소리가 두어 번 들렸지만 주변을 맴돌 뿐이다. 

약한 발소리가 제자리에서 몇 번. 망설이고 있다. 헨델은 자신을 본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옷자락 펴지는 소리. 

낙엽더미가 누군가의 손에 의해 아주 조용히 눌리는 소리. 

   

헨델이 일어났다. 

   

팍, 찌르는 소리가 좋지 못하다. 갈비뼈에 가로막히지는 않았다. 

사병은 비명 없이 쓰러졌다. 시선이 혼탁한 가운데 사병의 왼손이 무언가를 더듬는다. 

검을 한 번 다잡아 손목을 내리찔렀다. 푹신한 바닥이 관통을 방해했다. 두어 번을 더 찌르고서야 왼손은 기능과 목적을 포기했다. 

헨델은 그러고 나서야 ‘끝’을 맺을 수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왼쪽 허리춤에서는 권총 하나와 두툼한 총알 몇 발이 걸린 가죽 주머니가 나왔다. 그 외의 것은 건질 것이 없었다. 옷은 피로 얼룩져 써먹을 수 없게 되었다. 

   

“신호탄이다. 급한 상황에 상대를 겨누고 쏘는 멍청한 짓은 하지 말도록.”

   

“곧 이놈을 찾으러 올 겁니다. 위치를 옮기죠.”

   

“골치 아프게 됐구만.”

   

숨기 좋은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다만 산악에서 대충 용변을 보기에도 좋은 위치인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잠깐 숨 돌릴 틈도 없이 뒤쪽에서 누가 휘슬을 불고 신호탄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너나할 것 없이 파 놓은 자리에서 뛰쳐나왔다. 

   

“저놈들 화기를 들었다, 머리 숙여!”

   

산길이 달리기에 적합하지는 않았다. 한 발을 내딛을 때마다 바닥이 푹 꺼지며 자빠질 뻔을 하거나, 반대로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낙엽더미 안에서 덩굴이 발목을 그었다. 달리기보다는 허우적대며 그래도 내리막길이라고 산길을 어찌어찌 내려가고는 있었다.

   


사수가 땅속으로 푹 꺼졌다. 헨델은 분명히 보았으나 내리막에서 멈출 수도 없었다. 

뒤를 쳐다보다가 나가떨어질 뻔 한 헨델의 시선에 마지막으로 닿은 사수는 바짝 엎드려 라이플을 겨누고 있었다. 


좌우로 총탄이 날아들어 낙엽 바닥에 박힌다. 

귀가 떨어질 듯한 총성이 바로 뒤에서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낙엽투성이 산에서는 저쪽도 잽싸게 다가올 수 없었다. 사수는 차분하게 방아쇠를 당길 뿐.

   

“아악-뭐야?”

헨델은 허벅지에 통증을 느끼며 낙엽 위로 세 바퀴를 굴렀다. 척후가 민첩하게 멈춰서 헨델의 왼쪽 어깨를 움켜쥐고 헨델을 일으켜 세웠다. 뭘 맞은 건지, 허벅지가 욱신거리지만 지금 당장 달리는 데에 문제는 없었다. 또 정신없이 달렸다. 

얼마쯤이나 되었을까? 뒤에 남은 사수의 노고로 날아드는 총탄이 차츰 줄었다. 뵈는 것 없이 냅다 달린 마왕이 먼저 저 앞에 가 있다. 

걸음이 어찌 저리 빠른지는 모르겠으나, 서 있다. 가만히. 

덕분에 금방 따라잡을 수 있었다. 

   

“뭐 하십니까?”


“앞에도 적이 있는데요…”

   

일출까지는 조금 남았어도 주변은 충분히 환했다. 저쪽에 보이는 건 적어도 나무는 아니다. 정말로 사람만 하고 갑옷과 방패도 갖추고 약간씩 움직이기까지 하는 나무가 아니라면. 

   

“저거 국군 아닌가?”


“국군이 어떻게 벌써 여기를… ‘사자’가 들이쳤다는 말입니까?”

   

“저렇게 노란 어깨 할 놈들이 그놈들 말고 누구 없지. 자세히 보라고.”

   

척후가 본 바가 옳았다. 특유의 노란 견갑이 한 줄 선으로 보였다. 이쪽을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만, 더 다가가면 확실히 이쪽을 보게 될 터였다. 그리고…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산중턱이 아니었다면 그 묵직한 신발이 박자 맞추어 쿵쿵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을 텐데, 대낮도 아닌 새벽에, 저쪽도 먼지를 한참 뒤집어쓰고 있으니 그렇게까지 근사하지는 않았다. 

   

다음 순간 헨델은 어떤 생각이 들었다. 

   

“우리를 뭐라고 생각할까요?”

   

‘두더지’는 ‘사자’의 존재를 알고 있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았다. 두더지는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만큼 길을 닦아 두면 그만, 혹여나 두더지가 사자에게 의존하거나 사자가 두더지를 구호하기 위해 불필요한 인력을 소모하지 않도록 한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지금 헨델은 진흙에 묻었다가 꺼낸 몰골로, 피 묻은 검과 마왕군 제식 신호탄을 차고, 옆에는 비슷한 진흙투성이 한 명과 신원불명의 덜 진흙투성이인 마족 한 명을 끼고 있다. 

   

“글쎄…”

   

마왕군은 잠깐 서서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귀가 먹먹해지는 동시에 헨델은 나뒹굴었다. 나머지 둘도 마찬가지로. 

포탄은 헨델 일행과 왕국군 사이에 착탄했다. 저 앞에서 천천히 진군하던 왕국군은 마왕군의 포탄 사격에 분주히 태비를 갖춘다. 

온몸을 동시에 몽둥이로 난타당한 것처럼 욱신거린다. 일어나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몸이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왕국군은 속도를 높여 다가온다. 

척후는 먼저 몸을 일으켰다. 두어 걸음을 가다가 또 날아드는 총탄에 다시 엎드렸다. 

   

“영역 전개-!”

   

등 뒤에서 나는 소리에 대해서만 귀를 틀어막은 듯이 먹먹해졌다. 뒤에서 벽 두드리는 소리가 몇 번 났다. 

왕국군이 자랑하는 선봉대와 용사 ‘사자’ 일행이 이제 어깨와 허리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다가왔다. 별다른 적의를 보이거나 경계하지는 않았다. 

헨델이 혹시 마왕국의 사람이라서 지나가는 기사에게 칼을 휘두른다 해도 흠집도 나지 않을 것이니 그럴 만도.

   

왕국군은 저쪽에서 마왕군이 퍼붓는 화력에 아랑곳않고 다가왔다. 기사 하나가 저 앞에서 척후를 일으켜 세웠다. 그 다음은 마왕. 

다른 기사가 헨델의 앞에 섰다. 걸치고 있는 갑옷 무게만 다 합쳐도 헨델과 엇비슷할 것 같았다. 속에 받쳐 댄 천은 자색 벨벳, 군에서 제식으로 취급하는 물건은 아니었다. 갑옷은 무게만 아니라 몸값에 있어서도 헨델을 압도할 모양이었다. 

어쨌든 그 기사가 헨델의 어깨를 끌어올렸다. 잠깐 보더니 다른 쪽 손으로 손짓을 한다.

   

“의무관.”

   

헨델은 때에 어울리지 않게, 혹은 때에 어울리게 선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