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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독수리 아님 엌 ㅋㅋ) 먼저 보고 오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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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이 글에는

정의가 항상 선은 아니고

악의가 항상 악은 아니고

다 비틀리고 뒤틀려서 개판나버린 거고 어쩌구저쩌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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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지. 당연히 기억하고말고.

그날의 하늘을 어떻게 잊겠어.


우리는 정의라는 대의 아래 하나로 뭉쳤지.

지금도 그들의 이름을 하나씩 읊을 수 있을 정도야.


그때는 착각이라도 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군.

먼저 쓰러진 이들의 시체를 밟고 일어설 때 까지만 해도 말이야.


네 심장에 성검을 꽂아 넣은 후에야 알 수 있었지.

너와의 싸움은 네 심장을 도려내는 것 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교묘하게 숨겨둔 영혼이 이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는 것을.


네 가슴에서 솟구친 피는 세상을 적셨지.

기억하다마다. 이제 거기는 살아있는 자를 배척하는 죽음의 땅이니.

넌 내가 한순간 당황한 틈을 놓치지 않고 도주해버렸고...

다른 동료들도 다들 후퇴했지.


하늘을 수놓던 핏빛 물보라가 일때,

나는 그저 허망하게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어.

마왕을 처단하지 못했다는 그 감각은 내게 질척하게 들러붙었지.


하늘이 빨갛게 물든 그날, 나 마음 속 역시도 빨갛게 물들었지.

용사로서의 사명을 완수하라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부르짖는 그 마음 말이야.


나는 우선 하늘을 빚어 끔찍한 이형의 용을 창조해냈지.

그들에게 마왕의 피를 마시게 하고, 하늘을 훑어 네 영혼을 찾으라 했어.

세상의 하늘은 그 용들에게 5년간 지배당했지.


그 날 이후로 5년만에, 하늘로 쏘아지는 푸른 빛이 있은 후로...

용들은 자취를 감추었어. 그리고 그곳은 사람들이 차지했지.


마왕의 피를 통해 마왕을 감지할 수 있게 되었기에, 나는 세상 곳곳을 그 피로 물들였지.

뿌리깊은 세계수의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 생명의 원천인 연못에 그 피를 풀었어.

세계수의 이슬을 마시던 지고한 숲의 현자들은,

이제 나의 명령과 광기에 몸을 맡긴 채 숲속을 배회하는 파수꾼이 되었지.


다 죽어가던 그들에게 네 소식은 전해들을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때는 이미 네가 떠나 있었지.


교단을 무너뜨리는 행동도 서슴지 않았어.

네게 돌아갈 신의 축복 따윈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피를 머금은 땅은 교단에게 마왕의 피를 뿌렸고,

교단의 대부분은 자살해버렸지.


마음과 육신이 해리되어버린 이들은 자살했지만,

그저 미쳐버린 이들은 내가 정리할 수밖에 없었지.


...그리고 너에게 대항하기 위해...

나와 함께했던 동료들, 이제는 죽은 그들을 되살려냈어.


너와 합을 겨뤄본 이들은 너를 상대하는 데에 도움이 되겠지.

그들은 오로지 너를 찾고, 너와 관계된 이들을 죽일 뿐이야.


나는 이 장막의 너머에서,

어딘가에 있을 너를 찾아 고군분투했지.


죽이지 못했다는 사실은 내 마음을 좀먹었고,

찾지 못했다는 사실은 날 미치게 했으며,

한사코 널 죽여야만 한다는 것이 내 남은 목표였으니까.


그래. 그 날의 파아랗던 하늘을 기억하기에,

나는 널 죽여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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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드디어 찾았다.

수많은 전사들과 부하들을 갈아넣어, 이제야 마왕을 이곳까지 유인했다.


하늘을 감시하던 용들은 모두 죽었다.

땅을 감시하던 엘프들도 죽었다.

교단은 내가 직접 무너뜨렸다.


전부 저 문 앞에, 빌어먹을 마왕을 죽이기 위해서.


"문..."


이 굳건한 문은 열릴 생각이 없다.

나를 가둬둔 이 문은 열리지 않았다.


하늘도 보이지 않고, 나갈 수 없는 이 자그마한 독방.

나를 가두기에 충분한 장소였다.


"문이 열리면, 난 네놈의 목을 따겠어."


몇 번이고 다짐한 말을 다시금 입 밖으로 꺼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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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의 피로 인해 이따금 광증이 도지던 나는, 치명적인 선택을 했음에 부정할 수 없었다.

이 문 너머에 그토록 바라던 설욕의 대상이 있는데, 날 가둬 둔 이 작은 방에서 나갈 수 없었다.


밖과 소통할 수단이라고는 가증스러운 마왕의 피뿐.


1개월 전, 용사 행세를 하던 추악한 마왕의 유체 파악했다.

나는 그것을 유인하기 위해 이곳을 마왕의 오래된 성으로 만들었다.

이곳까지 오게 하기 위해 소문을 부풀리고, 다시 창조했다.

수많은 모험가들의 칼끝이 이곳을 향하도록.


방해꾼들은 이곳까지 오는 길에 모조리 처단했다.

이제 마왕과 자신만이 이곳에 남아있었다.


"...참 빌어먹게도 큰 문이군."


문 너머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앳되고, 때묻지 않은 목소리지만, 틀림없는 마왕의 목소리다.


"그대는... 햇살이 따사롭던..."


그리고 그 빌어먹을 시까지.

이곳에 들어오면서 읊던 그 시는 계속해서 내가 있는 문 앞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저 시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자기가 걸어온 길에 대한 서사시?

아니면 나를 향한 조롱이 가득 담긴 헌사?


"용사 노릇을 하더니, 이젠 날 마왕이라고 모함하는 건가?"


너머로는 전해지지 않을 비아냥을 뱉자, 그 시의 다음 구절이 새어나왔다.


"...그래. 그대 역시 그 날의 하늘을 기억하겠지."

"파아란 하늘이었지. 그 어느 물보다도 청아하게 파랗던."


이제는 볼 수 없는 하늘을 회상하며 대답했다.


그리고 몇 개의 문답이 이어졌다.


"네 심장을 찌른 그날. 나는 승리를 확신했지만... 결국 승리는 반쪽짜리였을 뿐이었어."


"그러니, 나는 오늘 널 죽이고..."


"나머지 절반의 승리를 받아내겠다."


결의를 다지며 선언했다. 나는 옥좌로 터벅터벅 걸어가, 내것이었던 성검을 들어보였다.

피로 물들었지만, 그 자태를 잃지 않은, 명검이었다.

마지막으로, 잠시 앉아 성검을 점검했다.

행여라도 또 마왕의 숨을 완전히 끊지 못할 것에 대비한 만반의 준비.


결심이 섰다는 듯, 문이 열리고.

붉은 후광을 등에 진 채 마왕이 걸어들어왔다.


"가만 생각해보면... 처음과 딱히 변하지 않은 것도 있겠지." 


마왕이 중얼거렸다.

나는 마왕에게 할 대꾸따윈 없었기에, 일어나 검을 고쳐 쥐었다.


피에 물든 성검이 흉흉하게 빛났다.


"나는 마왕이다. 마왕은 악을 행하지." 

-그래, 마왕은 악을 행하지. 용사를 처단하고 세상에 혼란을 가져오는 자.


"그대는 용사다. 용사는 정의를 행하지."

-나는 용사지. 널 쓰러트리고 평화를 가져올 용사.


그녀가 레이피어를 꺼내기 무섭게, 마왕에게 돌진했다.

반격의 기회를 주지 않고, 쇄도하는 단 하나의 찌르기.


"그대는, 그대가 관철하는 정의를 계속해서 행하는 것이겠고."

"나는, 내가 관철하는 악을 행할 뿐이다."


마왕의 중얼거림과 함께, 마왕은 나의 찌르기를 검을 비틀어 흘려냈다.

나를 향해 레이피어를 겨누며,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마왕.


"용사의 정의는, 마왕을 처단하는 것."


쉴 틈을 주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마왕은 모든 방향에서 들어오는 칼날의 폭풍을 레이피어를 통해 막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마왕의 악은 용사를 처단하는 것."


레이피어가 품속으로 파고든다.

빈틈을 노린 찌르기. 반사적으로 검을 올린 나는 레이피어를 쳐냈다.


"이것이야말로, 용사와 마왕의 결전이 아니던가?"


마왕. 그리고 용사.

검과 검이 맞부딪치며, 악의와 정의가 뒤섞여간다.


나는 정의를 위해, 마왕은 악을 위해.

서로 검을 맞부딪힌다.


지독한 찌르기의 연속이 나를 향해 달려든다.

마왕의 악의가 가득한 찌르기는 하나하나가 위력적이었다.

성검을 통해 하나씩 쳐내기엔 무리가 있어, 하나의 호선을 그리며 튕겨냈다.


그리고 그대로 큰 원을 그리며 아래에서 위로 올려 베는 성검.

내 정의를 관철하는 하나의 일격.


마왕은 그런 일격을 몸을 돌려 피하며 레이피어를 고쳐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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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공방이 오갔다.


일보 전진하면 일보 후퇴하는 교착 상태가 지속되었다.


그리고 이윽고, 결판이 났다.


"쿨럭..."


한쪽 팔에 일격을 쑤셔넣었지만, 팔을 포기하면서까지 달려든 마왕은 이윽고 내 심장을 관통했다.

이기지 못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는데도, 끝내 마왕을 넘을 수는 없었다.


마왕은 능숙하게 차단 마법을 걸어 내 육체를 봉합했고,

나는 사라져가는 시야 속에서 마왕의 조소를 보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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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교수는 못마땅한 얼굴로 눈앞의 대학원생에게 물었다.


"어딜 갔나 했더니... 유적에 다녀 온 거냐?"


"네. 이건 분명 마도 고고학계를 흔들만한 발견이 될 것입니다."


"하아..."


교수는 한숨을 쉬더니 대학원생에게 말했다.


"자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 줄은 알아. 과거 적천(赤天)사건 관련 자료들을 조사한 거겠지."


"네. 아무래도 그 때의 기록들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으니까요."


"그렇다고 아직까지 기준치 이상의 마기 농도로 위험판정을 받은 유적에 갔다 온 것은 별로 탐탁치 않구나."


"씁... 그건 죄송합니다. 연구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다 좋아... 다 좋은데... 난 내 노, 아니, 소중한 학생이 다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단 말일세."


무심코 속마음을 뱉을뻔 한 교수는 빠르게 말을 삼켰다.


"후우... 그래서, 칼럼 제목은 뭐로 할 건가?"


"음... 이건 어떨까요?"


대학원생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정의와 악의와 선과 악. 붉은 하늘 아래 뒤섞인 것들.>, 어떤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