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의 일이다. 화창한 날씨에 노을이 저물어가는 오후 시간에 어떤 남자가 한 가정집 문을 두드렸다. 곧 집 안에서 어떤 여인이 나와 예정에 없던 손님을 맞이했다. 

 

“누구시죠?”

 

여인은 자신보다 머리 두개는 더 커 보이는 남자의 몸집에서 나오는 위압감에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상한 사람은 아닙니다. 저는 여신 주노를 섬기는 사제, 프랜시스라고 합니다.”

 

여인의 질문에 남자가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비로소 그의 목에 걸린 신의 징표가 여인의 눈에 띄었다.

 

“아 네, 그런데 무슨 일로 저희 집을 찾아오셨나요?”

 

“아드님의 기도를 주노 님께서 들으시고는 도움을 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여인은 짐짓 놀랐다. 추측일 수도 있겠지만, 이 수상한 사제 방문자는 자신의 아들의 존재를 당연하다는 듯 거론했다. 게다가 기도를 듣고 도움을 주러 왔다니, 다소 허무맹랑한 방문 사유였지만, 짐작 가는 일들은 있었다. 그러나 신께서 이런 농민의 사소한 일들까지 신경 써서 사람을 보낸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도움이요? 무슨 도움을…?”

 

“글쎄요, 제가 들은 것은 거기까지입니다. 존이라는 소년의 기도를 들었으니 가서 도와주라고 말입니다.”

 

곱슬하니 더부룩한 수염을 매만지며 프랜시스라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마도 남자가 아는 것은 거기까지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마을사람도 아닌 낯선 남자가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정확하게 거론하는 것 만으로도 여인에게는 무언가 있다는 확신을 주기에 충분했다. 

 

“… 존을 불러올게요.”

 

여인은 집밖으로 나가더니 존의 이름을 외치며 아들을 불렀다. 다행히 소년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듯했다. 소년이 다가오는 것을 확인한 여인은 낯선 손님을 집안 가운데 하나뿐인 테이블로 안내했다. 프랜시스는 들어오면서 주노의 성호를 긋고는 의자에 걸터앉아 소년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달려와서 지친 숨을 헐떡이는 소년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남자는 앉은 채로 미소를 지으며 소년을 맞이했다.

 

“안녕, 네가 존이니? 너의 기도를 주노께서 들으시고 날 보내셨단다.”

 

“정말요? 제 기도를 들어주셨다고요? 그러면 빨리 아버지를 도와주세요!”

 

남자의 말에 소년은 가쁜 숨에도 굴하지 않고 화색이 도는 얼굴을 띄며 말했다. 사실 소년이 딱히 어떤 신을 지목하여 기도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어떻게 되셨지?”

 

“저희 아버지는 지금 억울한 일을 당해서 감옥에 갔어요.”

 

“제가 설명할게요.”

 

여인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아들을 진정시키고 자신의 가족에게 일어난 일을 프랜시스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인의 이름은 미노나라고 했다. 그녀는 약 십년 전 남편 마르셀과 결혼하여 존을 낳고 지금까지 셋이서 살고 있다고 했다. 

 

“남편 마르셀은 영주님 루드비히 판 브로이닝 공의 저택에서 말 관리인으로 일하고 있지요. 그러다가 며칠 전에, 영주님이 사냥을 나가려고 말을 타려고 할 때, 갑자기 말이 날뛰어서 영주님이 떨어지는 바람에 바닥에 머리를 부딪혀 크게 다치셨어요. 가신들의 결론은 말을 잘못 관리한 우리 남편 탓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남편이 최근 좀 이상하긴 했지만 십년이 넘게 말을 관리한 사람인데. 그 말도 제가 듣기로는 굉장히 순하고 똑똑한 말이었거든요.”

 

“최근 남편이 이상했다는 것은?”

 

프랜시스는 우선 미노나의 말에서 신경쓰이는 부분부터 물어보기로 했다. 미노나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 최근에 좀 술을 많이 마시더라고요. 무슨 고민이 있는 것 마냥. 왜 그러는지 이유를 물어도 이상한 말만 하고 화내면서 얼버무리고. 하지만 그것과 사건이 연관이 있는 지는 모르겠네요. 제가 아는 것은 이게 다에요.”

 

언뜻 미노나가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심 그 이상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는 듯한 그녀의 의중을 프랜시스는 우선 따르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우선은 조사를 좀 더 해보는 수밖에 없겠군요.”

 

“사제님, 빨리 도와주셔야 해요. 병사들이 곧 아버지의 목을 매달거라고 했어요.”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던 존이 말했다. 미노나는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하지 않은 자신을 자책하는 듯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무의식 중에 바라지 않는 일을 말하는 것을 잊은 것은 아닐까? 프랜시스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느긋하게 며칠 묵으면서 마을을 조사하며 사건을 알아 가보려 했는데, 역시 무엇이든 쉽게 풀리는 법이 없었다. 

 

“그게 언제죠?”

 

프랜시스는 만회할 기회를 주듯이 미노나에게 물었다.

 

“사흘 후에요.”

 

생각보다 훨씬 시간은 다급했다. 그러나 이미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기에, 더 이상 알아보는 것은 힘들었다. 프랜시스는 내일 일찍부터 조사를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걱정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돕겠다는 프랜시스의 마지막 말에 결국 미노나는 참고 있던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존 역시 눈물짓는 어머니를 안으며 위로했다. 프랜시스는 마지막으로 짧은 축복의 말을 건네며 그들에게 인사하고 집을 떠났다. 프랜시스는 여독을 풀고자 저물어가는 노을의 끝자락을 뒤로한 채 여관으로 향했다. 

 

 

이튿날, 프랜시스는 마을로 나가 길거리의 소문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주노의 가호 중 하나인 『엄마의 수다』는 백 걸음 안에서 가십거리를 나누는 아줌마들의 이야기라면 무엇이든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엿듣는 데 특화된 능력이다. 마을의 우물 근처 어느 앉기 좋은 울타리에 앉아 수 분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던 프랜시스는 마침내 물을 길러 나온 아줌마들의 무리가 쓸모 있는 잡담을 나누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나저나 마르셀은 어떻게 됐대요.”

 

“이틀 후가 처형식이라던데.”

 

“술 취해서 애랑 마누라를 때린 것도 모자라 영주님까지 다치게 만들고, 참.”

 

“멀쩡하던 양반이 왜 그랬대?”

 

“십년간 키운 아들이 자기 아들이 아니라고 하면 화가 나지.”

 

“그거 진짜 맞아? 소문으로 듣기는 했는데…”

 

대화로 미루어 보건대 이미 마을에는 퍼질대로 퍼진 소문인 듯했다. 진상은 알 수 없지만, 프랜시스가 미노나에게서 대화 중에 느꼈던 어떤 망설임의 근원으로 보였다. 

 

“이웃집에 다 들리도록 소리지르는 걸, 한 두 번 그런 게 아니래.”

 

“하기사 그런 일이 있다보니 일이 손에 잡히겠어. 그러니 말을 제대로 안 돌봤겠지.”

 

“아무튼 존 하고 미노나만 불쌍하게 됐어.”

 

“존이야 불쌍하지, 미노나는 뭐가 불쌍해.”

 

“아니 뭐, 소문이 사실이면 몰라도. 그렇게 성실하고 나긋나긋한 사람이 그랬겠어?”

 

“원래 조용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가는 법이야.”

 

“그래서 아빠는 누구래요?”

 

“그거야 모르지, 존이 벌써 10살인데. 여행하는 음유시인이라는 말도 있고, 건넛마을 소꿉친구 누구라는 말도 있고. 그 왜, 미노나가 어렸을 때 건넛마을에서 왔잖아.”

 

“혹시 영주님 아들 아니야? 옛날에 미노나가 영주님 댁에서 일할 때 둘이 친했다면서.”

 

“그것도 그럴싸하긴 하네. 함부로 말했다간 목이 달아나겠지만.”

 

여인들은 못할 말이라도 한 듯 누구 듣는 사람이 없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프랜시스의 경우 제법 먼 곳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여인들 중 아무도 그가 듣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한동안 수다를 떨던 여인들은 묵묵히 우물에서 물을 길렀다. 어느새 마지막 한 동이만을 남겨놓고 가지고 왔던 물동이를 거의 다 채웠다. 여유가 생겼는지 여인들 중 한 명이 다시 마르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애초에 마르셀은 어떻게 존이 자기 아들이 아니라는 걸 알았대?”

 

“아무도 모르지 뭐.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애를 때리고, 밤마다 술취해서 바람을 폈니 어쩌니 내 애가 아니니 하면서 소리를 지르고 싸우니 다들 그냥 뜬구름 잡듯 추측 하는거지.”

 

“에휴, 요새 동네 분위기가 흉흉하네.”

 

“그러게 말이야. 대낮에 강도질을 하는 도적놈들이 설치지를 않나, 이번에는 영주님까지 저렇게 되셨으니.”

 

“그나마 영주님이 병사를 보내서 토벌을 했으니 망정이지.”

 

“그것도 내가 듣기로는 미네르바의 챔피언이라는 사람이 도와줘서 겨우 그 도적들을 소탕했다고 하더라고.”

 

“아 그래? 그런 이야기가 있었구나, 챔피언은 뭐야? 처음 들어보는데.”

 

“나도 자세히는 모르는데, 신을 대신해서 싸우는 사람이라던데? 신의 힘을 빌어서 기적을 일으킨다나 뭐라나.”

 

“왜 그 있잖아, 동화에 나오는 용사 같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도 다 챔피언이래.”

 

“그래? 실제로 있는 거구나. 한번 만나보고싶네.”

 

“잘생겼으려나?”

 

“신들도 얼굴은 보고 뽑지 않을까?”

 

“에구, 조심해. 신께서 들으시면 신성모독이라고 할 수도 있어.”

 

깔깔거리며 웃던 여인들은 마지막 물동이에 물을 채운 것을 마지막으로 거리 너머로 사라져갔다. 이후 한 시간 정도를 더 기다렸지만 그다지 의미있는 대화는 들리지 않았다. 프랜시스는 조사를 위해 다음 장소로 향했다. 

 

 

프랜시스의 다음 목적지는 영주의 저택이었다. 아무래도 사건이 일어난 실제 장소와 관련 인물들을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았다. 누가 봐도 마을에서 가장 큰 건물로 보이는 곳이 바로 영주의 저택이었다. 특별한 수소문 없이도 프랜시스는 입구를 지키는 병사의 모습에서 이곳이 영주의 저택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프랜시스는 병사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안녕하시오. 나는 여신 주노를 섬기는 사제 프랜시스라고 합니다. 루드비히 영주님을 뵐 수 있겠습니까?”

 

프랜시스는 인사와 함께 목에 걸린 사제의 징표를 꺼내 보여주며 말했다. 

 

“영주님은 지금 병석에 누워 계셔서 만나기 힘듭니다. 무슨 일로 찾으십니까?”

 

병사는 프랜시스의 행색을 훑으며 말했다. 

 

“그 소식을 듣고 여신께서 영주님을 도와주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기도를 드리면 어떨까 싶어서요.”

 

어렴풋이 여러 변명거리를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이것이 제일이었다. 실제로 가호를 통해 영주의 회복을 돕는 일도 가능했기에 딱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는 …”

 

어지간하면 예기치 않은 손님의 방문을 거절하는 것이 응당 병사의 역할이었지만, 통념상 사제의 방문을 거절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신이 이미 영주님의 상태를 알고 사제를 보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만약 거절한다면 어떤 신의 분노가 닥칠 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병사가 확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뒤에서 한 사람이 구원자처럼 나타났다.

 

“무슨 일인가?”

 

균형 잡힌 체구에 수염에 가려진 곱상한 외모를 가진 남자였다. 걸치고 있는 옷만 봐도 높은 신분의 인물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병사는 예의를 갖추며 다가온 남자에게 말했다. 

 

“아, 카를 님. 이 사제분이 영주님을 위해 기도드리고 싶다고 찾아오셨는데요.”

 

“음, 사제를 문전박대하면 신의 분노를 사게 되지. 어서 들어오시지요.”

 

카를이라고 불린 남자는 사제라는 말 공손히 프랜시스에게 인사를 하며 그를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영주의 저택은 귀족 신분의 거주지 치고는 화려하거나 규모가 있는 저택은 아니었다. 이 영지 근방은 사람의 왕래가 적은 지역이었기에 큰 저택을 짓기에 걷히는 세수가 많은 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정돈된 물건과 가구들, 깨끗한 길바닥, 그리고 사용인들의 분주한 모습에서 프랜시스는 어딘지 모를 긍정적인 기운을 느꼈다. 마을의 분위기, 마을 사람들의 대화에서도 느꼈지만, 아마도 이곳의 영주는 나름 존경받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를과 프랜시스는 함께 걸으며 통성명을 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를은 영주 루드비히의 아들로, 지금은 다쳐 쓰러진 영주를 대신해 영지 관리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주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프랜시스가 보기에 카를은 상대방이 어떤 주제를 이야기해도 몇 마디 정도는 가볍게 나눌 만한 지식이 있는 박식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길게 이야기를 나눌 틈도 없이, 저택 안으로 들어서 계단을 한 번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영주의 방에 도착했다. 카를은 조심스레 영주의 방 문을 열며 프랜시스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영주는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는지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침대에 잠들어 누워있었고, 한 사용인이 그 옆을 지키고 있었다. 프랜시스는 천천히 영주의 곁에 다가갔다.

『엄마손은 약손.』

프랜시스는 팔을 뻗어 영주의 이마에 손을 대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특별히 눈에 보이는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프랜시스는 수 분간 들리는 듯 마는 듯 중얼거리며 영주에게 기도를 통해 신의 가호를 사용했다. 이윽고 프랜시스가 기도를 끝마치자 카를이 다가왔다.

 

“어떻습니까.”

 

“심각한 부상이었던 듯합니다만, 초기 조치를 잘 하셔서 생명에 지장은 없으신 것 같군요. 회복을 돕는 축복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아마 도움이 될 겁니다.”

 

프랜시스의 말에 카를은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프랜시스 역시 굳이 거짓말할 필요없이 할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이군요, 감사합니다 사제님.”

 

카를은 정중하게 프랜시스에게 감사를 표했다. 영주에게 볼일을 끝마친 프랜시스는 카를과 함께 밖으로 나섰다. 프랜시스는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저택의 안팎을 둘러보았다. 

 

“그나저나 좋은 저택이군요.”

 

“음, 지은 지는 꽤 되었지만, 관리를 잘 해왔다고 들었습니다. 한번 둘러보시겠습니까?”

 

“허락해 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예의상 건넨 말이었겠지만 사건이 일어났던 저택을 둘러볼 귀중한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카를도 약간은 의외라는 듯 멈칫했지만 이내 말없이 자신의 뒤를 따르고 있던 한 가신을 소개했다. 듀란이라는 이름의 가신은 카를을 호위하는 경호인으로, 언뜻 보기에도 카를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에 다부진 몸을 지닌 무인의 분위기가 풍기는 사람이었다.

 

“제가 좀 더 안내해 드리고 싶지만, 저는 이만 할일이 있어 가봐야할 듯싶습니다. 듀란, 프랜시스 사제님께 저택을 구경시켜드릴 수 있겠나?”

 

“예, 알겠습니다.”

 

카를은 아쉬운 듯 인사를 나누고 먼저 떠나갔다. 프랜시스는 이내 듀란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저택의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듀란은 무뚝뚝해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친절하고 예의바르게 응접실, 부엌 등 저택의 공간을 프랜시스에게 소개했다. 그리고는 바깥으로 나와 텃밭, 안뜰 등을 둘러보았다. 사건과 관련이 있을 마구간도 지나갔지만 특별하게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엄마의 수다』가호를 통해서도 특별히 들리는 것은 없었다. 소득없이 나서야 하나 싶을 때쯤 프랜시스의 눈에 저택 옆에서 지하로 이어지는 공간이 눈에 띄었다. 

 

“저곳은?”

 

“아, 감옥으로 가는 곳입니다. 딱히 안내드릴만한 곳은 아닙니다만.”

 

프랜시스는 문득 존의 아버지인 마르셀이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지금이 아니라면 그와 이야기를 나눌 틈은 없을 것이다. 

 

“혹시 감옥을 방문해도 되겠습니까?”

 

프랜시스는 망설이지 않고 듀란에게 말했다.

 

“무슨 일로 그러시죠?”

 

듀란은 의심의 눈초리로 프랜시스를 바라보았다.

 

“곧 사형을 당할 죄수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기도를 해주고 싶군요.”

 

즉석에서 임기응변으로 대답한 것 치고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 알겠습니다.”

 

듀란은 잠시 고민하더니 프랜시스를 감옥으로 안내했다. 지하로 이어진 계단을 내려가자 좁고 어두컴컴한 공간이 나타났다. 듀란은 감옥을 지키는 병사와 인사한 뒤 가장 끝에 있는 감방으로 프랜시스를 안내했다. 그곳에서 프랜시스는 아마도 마르셀로 보이는 사람을 보았다. 그는 며칠 되지 않았지만 모진 고문을 받은 듯 초췌하고 지치고 상처입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듀란은 그를 보자마자 혀를 차며 말했다.

 

“영주님을 죽이려고 한 놈입니다. 굳이 기도드릴 필요가 있을지?”

 

프랜시스는 듀란의 말이 어딘가 마을에서 듣던 것과는 다름을 느꼈다. 미노나야 남편의 일이니 다소 편파적인 입장에서 말했을 수 있겠지만, 마을 아낙네들의 이야기에서도 마르셀의 잘못은 단지 말을 잘못 돌본 것이 아니던가?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조사해 본 결과 말 안장을 고정하는 가죽 벨트가 끊어져 있더군요. 만약 영주님이 그대로 말을 몰았다면 안장이 떨어져 더 크게 다치셨을 겁니다.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사람들 눈을 피해 영주님이 타시는 말의 장비를 손댈 수 있는 인물은 저놈뿐입니다.”

 

듀란은 차가운 말투로 감방 안의 인물을 쏘아보며 말했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합니까? 크흑, 저는 억울합니다, 나으리!”

 

“입 다물어라. 이미 증거는 명백하다. 동기도 그렇다. 최근 네놈의 소문에 주의를 주고자 한 영주님의 문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겠지.”

 

지쳐 고개를 떨구고 있던 마르셀은 듀란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힘없이 팔을 흔들며 소리쳤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프랜시스는 가호를 통해 느껴지는 어떤 강렬한 위화감을 계속해서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주노의 가호 중 하나인 『엄마의 촉』으로, 누군가 진리에서 벗어난 말이나 행동을 할 때 느껴지는 감각이었다. 다만 그 출처가 어디인지는 불분명했다. 

 

“영주님을 죽이려고 한 것이 사실입니까?”

 

프랜시스는 자신의 감각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자 마르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니까 아니라고요. 제가 영주님을 왜 죽이려고 합니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사제님, 그쯤 해두십시오. 여봐라, 이놈이 진실을 말할 때까지 더 심문하도록.”

 

듀란은 대화를 시도하던 프랜시스를 제지하며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프랜시스도 이 이상 무리하게 부탁하기는 힘듦을 깨닫고 듀란과 함께 감옥을 빠져나왔다. 감옥 안에서는 마르셀의 겁먹은 듯한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이후 듀란은 말없이 프랜시스를 저택 밖으로 안내한 후 예의를 갖춘 인사를 나눈 뒤 사라졌다. 프랜시스도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하며 거리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날 해가 지기 전, 프랜시스는 마을에 있는 지성소로 찾아갔다. 지성소는 허락받은 사제들이 신과 직접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제단이 있는 특별한 장소이다. 신을 대면하는 특별한 장소 치고는 화려하거나 유난스럽지 않은데, 일부 큰 도시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마을에 있는 지성소는 적당한 집에 천막을 두르고 내부에는 돌을 쌓아 만든 원형의 제단이 있는 것이 전부이다. 과거에는 좀 더 화려했다고 하지만, 전설에 의하면 신들의 전쟁 이후 대부분의 지성소가 검소한 형태로 바뀌었다고 한다. 프랜시스는 지성소 담당 사제의 허락을 얻은 후, 안으로 들어가 신을 대면할 준비를 했다. 신을 대면하는 방법은 특별히 정해져 있지 않지만, 대부분은 신에게서 받은 징표를 제단 위에 올려놓고 기도하는 것이다. 프랜시스 역시 늘 하던 대로, 원형의 제단 위에 자신의 목에 걸려 있던 주노의 징표를 올려놓고 기도를 시작했다. 

 

“주노 여신이시여.”

 

그가 기도를 하자마자 어딘가 성스러운 분위기가 제단 주변을 감돌면서 가득 채웠다. 이윽고, 어디선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랜시스.”

 

목소리는 엄중한 경고 같은 느낌으로 프랜시스의 이름을 불렀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춘기가 되어 자신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 아들을 훈계하는 말투였다. 

 

“…네, 어머니.”

 

프랜시스는 마지못해 여신과 약속한 호칭으로 불렀다. 그 말과 동시에 여신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래 우리 아들, 별 일 없지? 밥은 잘 먹고 다니니? 못 본 사이에 또 마른 것 같네. 그렇게 못 먹고 다니면 건강에 안 좋아요. 너무 그 빵만 먹지 말고, 고기랑 야채도 잘 챙겨 먹고. 술도 너무 많이 먹지 말고. 그 사이에 아는 여자는 좀 생겼니? 전에 같이 다니던 그 아가씨 참하던데, 계속 연락하니? 너도 이제 가정 만들어서 애도 키우고 해야지.”

 

“아니오, 헤어졌습니다. 애초에 그런 사이도 아니었습니다.”

 

“에이, 그건 모르는 일이지. 너가 좀 더 밀어붙여보지 그랬어. 또 너무 외모만 보고 그런 거 아니야? 아니면 전에 그 너가 구해줬던 상인 딸은 어떠니? 그 정도면 집도 괜찮고, 딸도 참 예의 바르게 잘 컸던데. 다만 걔 집안이 헤르메스 믿는 건 좀 그렇더라. 헤르메스 딱히 싫어하는 건 아닌데, 그냥 좀 왜, 헤르메스 믿는 애들은 보면 깍쟁이 같고 좀 그래.”

 

프랜시스는 늘 그렇듯이 여신과 대면한 지 채 몇 분도 되지 않아 심각한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다. 여신과 처음 만난 것은 아주 어렸을 적으로, 고아였던 그때의 프랜시스는 자신을 선택한 여신을 여신을 진심으로 어머니로 생각하고 따랐다. 문제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계속되는 여신의 집착과도 같은 관심 때문에 프랜시스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다만 근본이 성실하고 의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프랜시스가 결코 신에게 불평하거나 거부하는 일은 없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여신은 오랜만에 아들을 만난 엄마 마냥 회포를 풀듯이 대부분은 프랜시스가 알지 못하는 신과 인물들의 일을 꺼내며 일방적인 수다를 계속 이어나갔다.

 

“르마노의 존이 올린 기도 건으로 연락 드립니다.”

 

이대로는 끝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프랜시스는 어쩔 수 없이 여신의 말을 가로채듯 용건을 말했다. 

 

“아 그래 어떻게 됐니? 그나저나 너는 꼭 엄마한테 일 있을 때만 연락하더라. 평소에도 좀 자주 연락해줘. 어떻게 사는 지 엄마가 궁금해서 그래. 미네르바 챔피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미네르바네 챔피언은 거의 매일 연락하고 그런대. 미네르바네 챔피언은 신도도 잘 모은대요. 얼마 전에도 어느 마을에서 사람들 좀 도와줬다고 신도가 수십 명 늘었다는데, 별거 아니라면서 엄청 생색내고 자랑하더라. 우리 아들 어디 내놔도 모자람 없는 거 엄마가 제일 잘 아는데, 좀만 더 싹싹하게 하고 그랬으면 좋겠더라고.”

 

“노력하겠습니다.”

 

프랜시스는 틈을 길게 두지 않고 서둘러 자초지종을 주노에게 설명했다. 미노나와 존을 만난 이야기, 거리의 소문들, 그리고 영주의 저택을 찾아가 마르셀을 만난 일까지. 다른 이야기로 빠지는 일 없이 여신은 프랜시스의 말을 경청했다. 

 

“그랬구나. 정리하면 영주가 말에서 떨어져 다쳤고, 조사해보니 마르셀이 말 안장에 손을 댔다는 거고, 그래서 사형당하기 직전인데, 마르셀 본인은 누명이라고 한다는 거지?”

 

“네, 누명이라는 심증은 있습니다만, 확실치 않습니다. 왜 누군가 영주를 해하려 했는지, 동기도 아직은 불확실하고요.”

 

“그나저나 그건 좀 궁금하네. 10년동안 화목하게 잘 살고 있더니 갑자기 왜 마르셀이 변한 걸까? 네가 말한 소문이 사실이라면 미노나가 10년 전에 남편 몰래 바람을 피워서 다른 남자랑 동침해서 존을 가졌다는 건데. 지금까지 몰랐다가 최근에 뭔가를 알아차렸나보네. 미노나도 대단하다. 억울해서 나 같았으면 남편이 그랬으면 거기를 걷어차버렸을거야. 아니지, 진짜로 자기가 한 짓이 있어서 뭐라 말 할 처지가 못돼서 그런가? 음, 그나저나 네 아버지는 딱히 날 때린 적은 없단다. 한번은 내가 오해하고 화가 나서 대드니까 엄청나게 화나서 나에게 수갑을 채우고 매달아 놓은 적은 있지만. 이왕 거 마르셀한테 물어보러 갔을 때 왜 그랬는지 그것도 좀 물어보지 그랬어.”

 

“사건과는 상관없는 질문이라 생각했습니다.”

 

프랜시스라고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귀중한 이야기를 들을 증인을 만나자마자 대뜸 던지는 질문이 ‘왜 존이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까?’ 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은가? 거기다 옆에는 듀란이나 다른 병사가 있었을뿐더러 굳이 남의 사생활에 참견하고 싶지도 않았다. 설령 사실이라 하더라도 사건과 얼마나 관련이 있을까? 물론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소문대로라면 존이 자기 자식이 아님을 안 마르셀이 가정폭력을 일삼고 일을 소홀히 했고, 이를 들은 영주가 마르셀에게 문책을 한 것에 불만을 품은 마르셀이 영주를 다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한 영주의 문책은 그 전에도 더러 있었을 것이기에, 이제와서 이런 모략을 꾸민다고 하기에는 동기로 어딘가 불분명했다. 이런 경우 대개는 둘 중 하나다. 좀 더 직접적인 동기가 있었거나, 아니면 다른 인물의 소행이었거나. 

 

“그래도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어볼 수는 있잖아. 미노나가 바람 핀 거 아니고 존이 자기 아들 맞으면 어떡해? 자기도 뭔가 확신이 있으니까 그렇게 고민하고 그랬겠지. 나는 이런 거 궁금하면 하루 종일 궁금해. 나중에 기회 있으면 꼭 물어봐줘. 실패하면 나중에 따로 프로세르피나한테 물어보면 되긴 한데. 그래도 우리 아들보고 실패하라고 할 수는 없잖아.”

 

이쯤되면 여신도 꽤나 궁금한 것이 분명했다. 마르셀이 죽으면 저승의 안주인에게라도 찾아가서 어떻게 된 건지 물어보겠다는 것 아닌가? 그러나 프랜시스로서는 여신의 임무를 수행해야하는 입장으로서 절대 실패할 수는 없었다. 주노의 말은 프랜시스에게 반드시 임무를 성공시켜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기회가 되면, 물어보겠습니다.” 

 

이후 프랜시스는 다시 시작된 주노의 수다를 몇 시간째 들으며 정신을 잃을 뻔했다. 다른 신이 불러서 떠나가는 주노와의 대화를 겨우 마친 후 프랜시스는 터덜터덜 여관으로 향했다. 다행히 잠을 자기에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 잠자리에 들며 프랜시스는 지성소에 일찍 갔다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랜시스의 생각은 명확했다. 좀 더 영주나 마르셀, 그리고 주변인물들의 정황을 잘 알 만한 사람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눠 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미노나를 찾아간 프랜시스는 그녀로부터 과거 카를의 유모로 일했다는 테레사라는 사람을 추천받았다. 그녀는 얼마 전 은퇴하여 마을 변두리의 집에서 홀로 살고 있다고 했다. 프랜시스는 지체하지 않고 테레사의 집으로 향해 문을 두드렸다. 곧 온화한 외모의 늙은 여인이 집에서 나와 그를 맞이했다. 

 

“안녕하십니까.”

 

“누구세요?”

 

“저는 여신 주노를 섬기는 사제 프랜시스라고 합니다.”

 

“그렇군요. 그런 분이 무슨 일로 이 늙은이를 찾아오셨는지?”

 

“몇 가지 질문 드릴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 사제라고 했지요? 일단 들어오세요.”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테레사 역시 사제의 이유있는 방문을 함부로 거절한다면 신의 분노를 산다는 속설을 믿고 있었다. 테레사는 프랜시스를 위해 구석에서 쓰이지 않던 의자 하나를 꺼내왔다. 프랜시스의 몸집에 비하면 작았지만, 앉기에는 충분했다. 테레사는 냄비에 물을 채우고 화로에 끓인 후 컵에 따로 담아 프랜시스에게 대접했다. 

 

“그래서 어떤 것이 궁금해서 이런 늙은이에게 찾아오셨는지?”

 

“미노나에 대해 아십니까?”

 

프랜시스는 우선 미노나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직접적으로 사건부터 묻는 것은 어쩐지 경계심이 드는 주제였다. 미노나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면 자연스레 마르셀의 이야기가 나올 것이고, 그 후에는 마을에 퍼진 소문에 대해서, 그리고 나아가서는 사건에 대해서도 질문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미노나? 잘 알지요. 싹싹하고 일 잘하고. 요 근래 안 좋은 일을 겪어서, 참 안됐어요.”

 

“소문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알다마다. 사람들은 그저, 가십 거리만 있으면 입이 근질근질 한가봐요. 딱 잘라 말해서, 미노나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마르셀과 둘이 결혼했을 적 모습을 생각하면 사람들도 쉽게 말 못할 텐데. 둘이 아주 천생연분이었어요. 결과적으로 마르셀하고 결혼한 것은 미노나한테도 참 잘 된 일이었지요.” 

 

“무슨 뜻이죠?”

 

“음, 원래는 … 카를 님하고 미노나는 어렸을 적부터 아주 친한 친구였어요.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 저택에 카를 님 또래 여자아이라고는 미노나 정도였으니까요.”

 

단순히 친한 친구라는 늬앙스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느꼈다. 마을 여인들의 이야기에서도 들은 바가 있었다. 또한 그들은 미노나는 과거 영주의 저택에서 일했다고 했다. 당시 카를과 미노나는 연인에 가까운 사이였던 것일까?

 

“둘이 연인이었단 말씀이십니까?”

 

“그게 그렇게 들렸나요? 뭐, 딱히 비밀은 아니에요. 카를 도련님이 한 열 두살쯤 되던 해에 미노나가 왔지요. 이웃 마을에서 소개장을 받고 와서 시녀로 일하기 시작했어요. 그 이후로 카를 도련님하고는 금방 친해졌죠. 다들 쉬쉬했지만, 틈만 나면 둘이 몰래 만났어요. 그러다가 열 여덟 되실 무렵에 카를 님이 미노나하고 결혼하겠다고 난리였었어요.”

 

“그랬군요.”

 

생각보다 더 놀라운 이야기였지만 프랜시스는 우선 담담하게 테레사의 말을 듣기로 했다. 

 

“당연하겠지만 영주님께서 반대하시고, 미노나는 일을 그만두고, 얼마 후 카를 도련님을 다른 마을 영주의 딸과 캐롤라인 사모님과 혼인시키셨지요. 캐롤라인 사모님은 재작년쯤 병으로 돌아가셨지만요.”

 

유모는 따듯한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계속해서 말했다.

 

“영주님도 사려 깊으신 분이라, 미노나를 나름 신임하던 말지기인 마르셀하고 결혼하도록 주선하셨지요. 누가 봐도 아주 금슬이 좋은 부부였어요. 존도 결혼하고 다음 해에 바로 태어났지요.” 

 

“혹시나 …”

 

이쯤 되면 프랜시스도 합리적으로 의심을 할 만했다. 카를과 미노나는 신분을 떠나 결혼까지 생각했던 연인사이였고, 영주에 의해 헤어졌다. 그 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사람과 만나 결혼했다. 미노나는 마르셀과 결혼하고 일년 후에 아이를 낳았다. 그런데 과연 카를과 미노나가 그 이후에도 만남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까? 만약 존의 아버지가 카를이라는 것을 어떻게 마르셀이 알게 되었다면, 신분의 문제 상 카를에게는 뭐라고 말할 수 없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술만 마시다 존과 미노나를 괴롭혔다는 것도 그럴듯하게 들린다. 다만, 이것이 사실이라면 여전히 왜 카를이 아니라 영주 루드비히를 노렸는지는 설명하기 힘들다. 

 

“이거, 소문도 있으니 말을 잘 해야겠군요. 글쎄, 사람 일은 모르는 거지만요. 무슨 아비 자식 간에 흐르는 징표라도 있지 않는 이상, 낸들 알겠나요. 그냥 미노나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지. 카를 도련님도 그렇고. 특히 카를 도련님은 절대 그럴 분이 아니죠.”

 

“어째서죠?”

 

“카를 도련님이 한 네 살 때였나, 영주님이 시녀 하나랑 정분이 난 거에요. 나중에 그것을 알게 된 사모님은 난리가 났죠. 슬픔과 분노에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입에 대지 않고 시름시름 앓다가 병으로 돌아가셨어요. 다른 사람들도 충격이었지만, 카를 도련님은 더했죠.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알 나이가 되었을 무렵부터는 영주님과도 사이가 썩 좋지 않았어요. 그 후로는 입에 달고 사는 말이 그거였죠, 자기는 절대로 자기 부인을 슬프게 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그러면 미노나는 자기 연인이었으니 오히려 더 미련이 가지 않겠습니까?”

 

“그랬을 수도 있죠.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캐롤라인 사모님과 도련님도 아주 보기 좋은 부부였어요. 캐롤라인 사모님이 병에 걸려 돌아가셨을 때에는 도련님도 슬픔 빠져 한동안 앓아 누우셨죠. 다만 남겨진 따님을 생각해서 다시 기운을 차리신 것 같아요.”

 

“그랬군요.”

 

잠깐의 만남이었지만 마르셀이 느끼기에도 카를은 윤리 의식이 투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 테레사의 이야기에서도 미루어보듯이 남의 아내를 탐하거나 하는 일을 쉬이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다. 영주와 시녀, 그리고 그 부인의 일도 그렇고, 비너스의 사제들이 말하듯, 사랑은 폭풍과도 같다고 하니 말이다. 

 

“마르셀 그 친구도 참 성실하고 듬직한 사람인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네요. 뭔가 있긴 있었겠죠. 안 그러던 사람이 미노나나 존을 그렇게 괴롭히고, 더 나가서는 영주님을 다치게 한 것을 보면.”

 

테레사는 고맙게도 프랜시스의 예상대로 자연스레 마르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본인은 자기가 한 일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이미 만나고 오셨나요? 그게 사실이더라도 안타깝네요. 이미 영주 대리인인 카를 님이 사형을 결정하셨으니.”

 

테레사의 말 대로, 영지 내에서 영주가 한 번 정한 일은 왕의 칙명이라도 오지 않는 이상 되돌리기 어렵다. 그나마 현실적으로 영주의 결정을 무르는 방법은 어떻게든 영주를 설득해 영주 본인이 결정을 취소하는 방법일 것이다. 이도 저도 안 되면 결투를 신청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방법이 있지만, 결투라고 한다면 십중팔구는 비슷한 신분의 사람들끼리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지, 하극상으로 일어나는 일은 없다고 무방하다. 과연 어떤 사람이 목숨을 걸고 영주의 결정에 반대하며 평민을 위하여 나설까? 더군다나 영주를 경호하는 대전사를 상대로 영지 내에서 그보다 강한 사람이 있을지도 의문이다. 무엇보다도, 영주 이상으로 사건을 조사하고 증거를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대전사라 하니, 영주의 저택을 방문했을 때 보았던 사람들이 전부라면, 프랜시스의 뇌리에 가장 인상깊게 남았던 사람은 듀란이었다. 

 

“혹시 듀란에 대해 아십니까?”

 

프랜시스는 문득 직감적으로 듀란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감옥에서 마르셀을 만났을 때 가졌던 위화감은 아무래도 듀란에게서 느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듀란? 몇 년 전부터 도련님의 경호를 맡은 사람 말이군요. 나이 차이도 많이 안 나고 하니 도련님이 형처럼 의지하셨죠. 따로 이야기해 본 적은 없지만, 군말없이 맡은 일을 잘 하는 사람이라 들었네요. 예전에 들었던 말로는 동네에서 유명한 효자라고 하더라고요. 그 이상은 저도 잘 몰라요.”

 

특별히 의미있는 정보는 아니었다. 프랜시스가 듀란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을 때 느꼈던 점과 큰 차이는 없었다. 그 뒤 두사람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좀 더 주고받았다. 의외로 테레사는 프랜시스가 그녀를 찾은 이유에 대해서 전혀 물어보지 않았다. 하지만 테레사는 이미 프랜시스가 어떤 이유로 그녀를 방문했는지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프랜시스로서는 그것이 자신을 향한 테레사 나름의 배려라고 느꼈다. 프랜시스는 테레사에게 여신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기도하고 그녀의 집을 떠났다.

 

 

프랜시스는 나서기 전 테레사에게 마르셀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있는 지 물어보았다. 테레사는 마르셀의 마구간 관리인 동료인 아이작을 추천했다. 프랜시스가 테레사가 알려준 대로 아이작의 집에 도착했다. 그는 저녁을 먹기 전 여유를 가지고 집 밖에서 연초를 태우고 있었다. 

 

“뉘슈?”

 

마침내 자신에게 가까워지고 있는 낯선 남자의 시선을 알아챈 아이작은 연초를 거두며 말했다. 아이작은 마르셀이나 카를 보다는 좀 더 나이가 있는 깡마른 체격의 남자였다. 

 

“저는 여신 주노를 섬기는 사제 프랜시스라고 합니다. 당신이 영주의 말 관리인 아이작입니까?”

 

“그렇소만.”

 

“몇 가지 질문 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눠도 되겠습니까?”

 

“그러시구려. 어차피 지금 시간은 한가하니.”

 

아이작은 크게 개의치 않는 듯 다시 의자 등받이에 편하게 기대며 연초를 태우기 시작했다. 집 안에서는 아이작의 가족들이 분주히 저녁 식사 준비를 하는 듯했기에 프랜시스도 굳이 집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나지 않았다. 프랜시스는 그의 옆자리 벽에 기대어 적당히 걸터앉았다.

 

“영주님 밑에서 일한 지는 얼마나 되었습니까?”

 

“글쎄, 이제 한 20년 되었지.”

 

“말 관리인은 당신뿐입니까?”

 

이미 테레사에게서 말 관리인은 마르셀과 아이작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테레사 때와 마찬가지로, 프랜시스는 마르셀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꺼낼만한 이야기를 유도했다. 

 

“원래는 나랑 마르셀이라는 친구가 일했소. 나는 마구간을 청소하고 말 먹이를 담당하는 역할이고, 마르셀은 말의 상태와 말에게 사용하는 도구를 관리하는 친구였지. 다만 마르셀은 아는지 모르겠지만 영주를 다치게 한 죄로 목을 매달리게 되어버렸지만. 덕분에 나 혼자 다 하게 생겼어. “ 

 

문득 아이작 역시 주요 용의자 중 한명이라는 생각이 든 프랜시스는 가호 『엄마의 촉』 이 주는 감각을 느끼는 것에 최대한 집중을 하고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미안하오만 당신은 의심받지 않았습니까?”

 

“처음에는 나도 의심받았지만, 곧 병사들이 조사를 하더니 말 안장을 고정하는 가죽 벨트에 누가 일부러 자른 듯한 흠집이 나있다고 하더군. 그러더니 얼마 안 있어 마르셀을 잡아갔어. 일부러 영주를 다치게 했다고. 나야 뭐 그냥 평소처럼 마구간을 청소하고 말들에게 먹이를 줬을 뿐이야.”

 

“그렇군요.”

 

딱히 가호를 통한 위화감이 느껴진 것은 아니었지만, 어딘가 사실과 어긋나는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에 생각을 정리해보기로 하고 우선은 아이작에게 질문을 이어갔다. 

 

“마르셀이 왜 그랬는지 당신은 아는 바가 없습니까?”

 

“낸들 알겠나? 요사이 좀 이상하기는 했어. 술 냄새 풀풀 풍기면서 지각을 하기도 하고. 들리는 소문도 있고. 오죽하면 영주님도 정신차리라고 크게 한 소리 했었지.”

 

적어도 영주 루드비히가 마르셀을 꾸짖은 것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그것 때문에 앙심을 품거나 하진 않았을까요?”

 

“글쎄, 내 눈에는 그럴 만한 배짱은 없는 친구였는데. 아무튼 조사 결과가 그렇다니 어쩌겠나.”

 

여전히 가호는 반응하지 않는 걸 보니 아이작의 말에 특별히 거짓은 없어보였다. 이후 카를이나 영주에 대해서도 물어보았지만 아이작은 그다지 고용주와 사용인으로서의 관계 이외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듯 프랜시스가 아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알고 있지는 않았다. 그 때 집 안에서 저녁식사를 알리는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랜시스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을 깨닫고 마지막으로 듀란에 대해 물어보기로 했다.  

 

“혹시 듀란에 대해서 아십니까?”

 

“카를 도련님을 보좌하는 무인 말인가? 원래는 영주님과 거래하던 상단을 호위하던 사람인데, 도련님 눈에 띄어서 옆에서 일하게 되었지. 들은 바에 의하면 굉장히 강하다더군. 그래서 그가 졌다고 들었을 때는 깜짝 놀랐네.”

 

아이작은 어딘가 무인에 대한 동경을 가진 소년처럼 듀란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테레사도 말했지만 듀란과 카를은 꽤나 가까운 사이인 듯했다. 그리고 듀란이 강하다는 것은 프랜시스도 느꼈듯이 분명해보였다. 그런데 그가 패배했었다니, 이 근방에 또다른 강자가 있다는 말인가?

 

“누구에게 진 거죠?”

 

“몇 달 전에 영주님이 도적떼를 소탕한다고 병사들을 보낸 적이 있었어. 그때 듀란이 어떤 도적에게 패해 목숨을 잃을 뻔했다고 하더군. 다행히 그 때 같이 싸우던 한 용사가 대신 도적을 쓰러뜨렸다고 하더라고. 내가 보기에는 듀란도 그보다 강한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주 뛰어난 검사인데, 세상은 참 넓구만 그래.”

 

그 때 다시 한번 집안에서 여인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작은 좀 더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프랜시스는 그의 목숨을 우선하기로 하고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아쉬워하며 집안으로 들어가는 아이작을 뒤로하며 프랜시스는 나지막히 여신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기도하고 그의 집을 떠났다.

 

 

밤이 오기 전, 프랜시스는 미노나의 집을 방문하여 그녀와 존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당장 내일로 다가온 마르셀의 사형집행일에 미노나는 자포자기한 듯했다. 존은 자신의 기도를 듣고 찾아온 프랜시스가 증거라고 하며 기적이 있을 거라고 그런 어머니를 달랬다. 프랜시스는 다시금 그들을 안심시키고 기도를 한 후 지성소로 향했다. 

프랜시스는 알고 있다. 아무리 수다스럽고 성가신 여신이라고는 하더라도, 돌이켜보면 옳고 그름을 떠나 여신과의 대화가 임무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프랜시스는 경험해왔다. 대화에서는 오지랖이고 쓸데없는 관심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결과적으로는 중요한 문제였다는 것을. 아마 이번 사건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국 프랜시스가 미노나와 마르셀의 지인들을 조사해보고자 나선 것은 여신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여신이 일깨워줬기 때문이다. 아직은 알 수 없지만, 분명 마르셀이 어떤 진실을 깨닫고서 갑자기 행동을 바꾸었는지 역시 이 사건을 관통하는 문제일 수 있다. 그렇게 프랜시스는, 마음을 다잡고 여신 주노의 지혜를 구하기 위해 다시 한번 제단 위에 징표를 올려놓았다.

 

“어머니, 주노 여신이시여.”

 

성스러운 기운이 감돌 틈도 없이, 여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아들, 왔어? 한참 기다렸네. 그래, 뭐 좀 알아냈어?”

 

프랜시스는 여신 주노에게 테레사와 아이작과 나누었던 대화를 이야기했다. 카를과 미노나의 관계, 영주의 가족사, 마르셀의 동료 아이작, 그리고 듀란. 여신은 예상대로, 카를과 미노나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만큼은 흥미진진한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고 신나게 떠들었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마을에 소문 날 정도면 뭔가 있는 게 분명했다니까? 역시 내가 촉이 좀 좋아. 나는 늘 그런 신분을 뛰어넘는 풋풋한 첫사랑 이야기가 좋더라고. 아 물론, 다른 사람이랑 가정을 꾸린 후에는 허튼 짓 하면 안 되지. 그래도 그리워하는 것 정도는 봐주겠는데 말이지. 그런 점에서 네 아버지는 … 갑자기 또 화가 나려고 하네. 그래서 결국, 존은 누구 애야? 카를 애야? 아니면 마르셀 애야? 아직 모른다고? 하아, 그래. 원래 연극도 미리 알면 보는 재미가 없지. 더 재밌는 부분은 천천히 기대하고 있을게. 그래서? 그다음은 무슨 이야기를 하던?”

 

 영주가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는 이야기를 할 때에는 감정에 한껏 이입한 듯 슬픔과 분노, 그리고 즐거움을 감추지 않았다. 

 

“아, 결국 신분을 극복하지 못하고 연인은 비극을 맞이하는구나. 카를은 캐롤라인이라는 다른 영주의 딸과 결혼하고, 미노나는 마르셀과 결혼하고. 하지만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를 그리워 한 두 사람은… 안 되지. 나야말로 가정의 신인데, 불륜에는 천벌을 내리는 것이야. 그렇다고 마냥 두 사람에게 뭐라 하기도 그렇네. 이 경우에는 나쁜 건 두 사람을 갈라놓은 영주 루드비히 아닌가? 더군다나 영주 자기는 옛날에 시녀랑 바람피워서 마누라가 앓다가 죽었다고? 천벌 받을 녀석이네.”

 

“어머니, 어머니께서 천벌이라고 하시면…”

 

“아, 알겠어, 알겠어. 그런 거 안하기로 한 거 알잖아? 아무튼, 거기에 카를은 충격을 받고, 자기는 안 그럴 거라고 했다는 거지? 그 이야기 들으니까 또 존 하고 별 상관없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지 뭐, 결국 그 아비에 그 자식일지도. 아아, 부자 관계를 증명하거나 하는 방법은 없나? 그런 게 있었다면, 전 인류에게 돌려서 남편이 얼마나 씨를 뿌려댔는지 알 수 있을텐데. 뭐, 더 알아봐야 뭐 하겠어? 100명이나 1000명이나 그게 그거지.”

 

아이작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어쩐지 흥이 식은 듯했다.

 

“아, 뭔가 재미가 없네. 그 양반도 어떻게 미노나한테 얽힌 게 있으면 재밌었을 텐데. 그랬으면 거의 무슨 메데이아 수준이지. 아니지, 뭐 본인이 딱히 한 건 없으니 헬레네 정도인가? 음, 내가 이런 이야기했다는 건 어디 가서 말하지마. 사실 아이작은 부인말을 잘 듣는 것을 보니, 칭찬받아 마땅한 인물이군. 가호를 썼는데도 반응이 없었던 걸 보면 거짓말한 건 아니라는 거네. 아무튼, 병사들이 와서 조사를 했고, 누군가 가죽벨트에 일부러 자른 듯한 흠집을 내놓았고, 정황 상 그걸 할 수 있는 건 최소한 아이작은 아니다? 정말로 마르셀인가?”

 

마지막으로 프랜시스는 듀란에 대해서 말했다. 이야기를 듣던 여신은 아들을 타이르듯 말했다. 

 

“너도 정말 변하지를 않는구나. 강한 사람만 보면 신경이 쓰이나보지? 아레스도 그렇고, 어떻게 남자들은 그렇게 강한 상대를 보면 한 번 겨뤄보고 싶어하는지 모르겠네. 힘이 없을 때는 신의 가호를 찾더니, 신의 가호가 있을 때는 가호 없이 자기 힘만으로 한 번 싸워보고 싶다? 알다가도 모르겠다 나는.”

 

“저는 딱히 싸우고 싶단 말은 한마디도…”

 

“엄마가 눈치 100단 코치 100단 합이 200단이에요. 그게 아니면 너가 관심 가질 이유가 있을까? 제발 그런데 관심 가지지 말고 참한 아가씨 한 명만 데려와. 애 키우는 거는 엄마가 해 줄게. 어쨌든, 이야기한 걸로만 들어보면 강하고, 성실하고, 예의 바르고, 일 잘하고, 부모한테 잘하고. 좋은 사람이네? 도적한테 진 것? 뭐 그럴 수도 있지. 알고 보면 엄청나게 강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도적이 뭐 헤르메스의 새로운 챔피언이던가 그럴 수도 있잖아?”

 

프랜시스는 주노 특유의 말투에서 그녀가 무언가를 돌려말하고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굳이 불경한 것을 거론하고 싶지는 않았다. 평범한 인간이 규격 이상으로 강해지는 방법은, 챔피언처럼 신의 가호를 가지는 것 외에는 없다. 그러나 신의 가호는 신이 허락한 자에게만 허용되는 것. 아무리 헤르메스라 한들 일개 도적에게 신의 가호를 허용했을 리 없다. 그렇다면 도적이 정말 듀란보다 강하다는 말인가? 그런 자라면 어느 영주나 용병이든 호위든 고용하려고 했을 터. 설령 무법자라 하더라도 고작 도적으로 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프랜시스가 듀란에게서 느꼈던 강함은, 정식으로 오랫동안 무술을 체득한 자의 것이지 아무렇게나 칼을 휘두르는 도적에게 질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만약, ‘신의 허락’ 없이 가호를 얻는 방법이 있다면?

 

“됐어 됐어, 그건 일 끝나고 조사해보기로 하고. 아무튼 내일이 사형집행일이라고? 이제와서 영주든 영주 아들이든 설득하는 건 힘들겠고, 결국 당일 날 뭔가 저지를 수밖에 없겠네. 그 좋아하는 거 한번 해보던지. 근데, 그러고 나서는 어떡하려고? 신의 뜻이다! 이러고 끝내려는 건 아니지? 사람들한테는 뭐라고 할 거야? 마르셀은 좋은 녀석입니다, 제가 『엄마의 촉』으로 느껴봤더니 그래요! 이럴 거야? 그게 뭔지 또 설명하고?”

 

프랜시스는 마침내 여신이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는 대화에 들어섰음에 만족했다. 한동안 여신은 이런 저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내일 있을 비극 혹은 희극을 몇 번이고 써내려가고 있었다. 알고보니 카를의 자작극이었다, 카를은 아버지가 미워 영주를 죽이려 했다, 존은 카를의 아이다, 아니, 마르셀이 한 것이 맞다, 원래는 카를을 노렸는데 실패했다, 아니다, 사실은 영주의 시험이었다, 사실은 듀란이 범인이다, 모종의 이유로 듀란이 마르셀을 싫어했을 것이다, 사실 미노나의 애인은 듀란이었다, 등등. 여신에게서 한줄기 지혜를 기대하고 있던 프랜시스가 점점 지쳐갈 때쯤, 여신이 궁금한 듯 프랜시스에게 한 마디 던졌다.

 

“근데, 말에 탈 때 안장을 뭐 어떻게 하는건데?”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불안한 듯 구름 낀 흐린 하늘이었다. 사람들은 점점 사형집행을 위한 교수대를 에워싸며 하나 둘 모여들었다. 그리고는 저마다 마르셀과 그의 가족에 대해 한마디씩 했다. 존과 미노나도 불안한 모습으로 멀리서, 여차하면 눈돌릴 각오를 하며 교수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곧 사형 집행인과 카를, 그리고 듀란을 포함한 몇몇 다른 가신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 뒤로 병사들이 피와 먼지로 얼룩진 처참하고 지친 모습의 마르셀을 끌고 나왔다. 병사들의 뒤로 마을 지성소의 두 사제가 아스트라이아 (정의)와 타나토스(죽음의 인도)를 상징하는 의식용 징표를 들고 걸어 나왔다. 모든 준비가 끝마쳐진 후,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병사들의 진중한 눈빛에 제압되어 잠잠해질 때쯤, 사제들은 짧은 의식을 거행하며 사형 집행의 시작을 알렸다. 이어서 듀란이 카를을 대신해 연설을 시작했다.

 

“마르셀은 영주님의 말 관리인임에도 불구하고 임무를 게을리하고, 가정을 소홀히 하여 풍기를 어지럽혔다. 이에 대해 영주님이 꾸짖자 적개심을 품고 영주님이 타는 말 안장을 의도적으로 조작하여 끊어지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영주님께서 말에서 떨어져 크게 다치셨다.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명백한 정황과 증거가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죄를 부인하고 있다. 이 죄는 심히 크다. 따라서 법도와 신의 뜻 따라, 영주 대리인 카를 님의 허가 아래 마르셀을 교수형에 처한다.”

 

듀란은 연설을 마친 뒤 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외쳤다. 

 

“여기에 이의 있는 자는 있는가?”

 

“이의 있소.”

 

사람들은 모두 놀라 수군거렸다. 누군가 대답하지 말아야 할 질문에 대답하고 만 것이다. 그저 어딘가의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일어나지 말아야할 일이 일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당황하기는 질문했던 듀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소리가 났던 방향을 향해 외쳤다.

 

“누구냐?”

 

그와 동시에 사람들의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걸어나오며 후드를 벗고는 당당하게 소리쳤다.

“아시지스에서 온 프랜시스, 주노의 챔피언이오.”

 

“아아, 그 사제로군. 그런데, 챔피언이라고?”

 

“그렇소.”

 

듀란은 익숙한 얼굴을 알아본 것에 한 번, 그 얼굴이 이의를 제기했다는 것에 또 한 번, 그리고 그가 사제가 아니라 챔피언을 자칭하는 것에 도합 세 번을 놀랐다. 특히나 가까이에서 챔피언이라는 말을 들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겉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다. 듀란은 손을 뻗어 다시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대전사로 소개하는 자에게 외쳤다.  

 

“아무리 신의 대리인이라고 해도, 함부로 영주님의 결정을 함부로 뒤집을 수는 없소.”

 

“알고있소.”

 

이 경우에는 영주 대리인 카를이겠지만, 어쨌든 영주의 결정을 함부로 돌릴 수 없다는 말은, 불가능은 아니라는 뜻이다. 다만 동시에 결정을 뒤집을 만한 어떤 것이 준비 되어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듀란의 질문에 대해 제대로 답을 한 것이 맞다면, 이 챔피언은, 신의 뜻에 따라 우격다짐으로 영주의 결정을 뒤집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의 제기를 할 권리를 얻을 수만 있다면, 반드시 영주의 결정을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 보였다. 그리고 그에 앞서, 이의 제기를 할 권리를 얻는 방법은 현재로서는 하나이다. 

 

“대단한 자신감이군. 당신이 정말로 신의 뜻을 행하는 자라는 말인가?”

 

듀란은 다시 한번 그가 신의 대전사인지를 확인하고자 물었다. 챔피언을 자칭하는 자를 만나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질문은 유명인을 만나서 들뜬 나머지 던진 것이 아니었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듀란은 챔피언을 자칭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지금까지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짜였다. 

 

“물론이오.”

 

그리고, 누구나 자신이 진짜라고 말한다. 이 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배짱 하나만은 칭찬해줄 만하다. 단순한 결투가 아니라, 영주의 결정에 반대하는 결투 재판에서 자신을 신의 챔피언이라고 소개하다니. 물론 일반 평민이 결투 재판을 신청했다면 들어줄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의 챔피언이라면 다르다. 진짜든 가짜든, 신의 선택을 받은 자가 재판에 도전한다면 과연 무슨 명분으로 거절할 것인가? 진짜라면 신의 뜻대로 이길 것이고, 가짜라면 허무하게 목숨을 잃을 뿐이다. 과연 이자는, 듀란이 만난 두번째 신의 챔피언인 것인가?

 

“그것을 증명할 방법은 하나뿐이지.”

 

듀란은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았다. 프랜시스 역시 천천히 걸어오며 로브를 벗어 던지고 검을 뽑았다. 곧 사람들이 물러나고 두 사람 사이에 둥근 공간이 생겼다. 사람들은 예상외의 사태에 긴장하며 모두 숨을 죽였다. 그러나 모두의 마음에는 말못할 흥분감이 솟아나고 있었다. 어느 새 교수대 앞에는 사람들의 벽으로 이루어진 작은 콜로세움이 생겼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며 검을 상대에게 향한 채 주위를 맴돌았다. 서서히 거리를 좁히면서 검을 부딪혀 서로의 검의 길이를 가늠하고 다시 멀어지기를 두어 차례, 기합과 함께 먼저 달려든 것은 듀란이었다. 

 

“하아앗!”

 

순식간에 프랜시스의 왼쪽으로 거리를 좁혀온 듀란은 프랜시스를 향해 검을 내려쳤다. 프랜시스는 옆으로 슬쩍 비켜나며 듀란의 머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듀란은 재빠르게 상체를 비틀어 프랜시스의 검을 막았다.

 

“흠!”

 

프랜시스는 틈을 놓치지 않고 비어있던 듀란의 반대쪽 어깨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듀란은 유연한 자세로 피하며 거리를 벌렸다. 

 

“신의 챔피언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평범한 사제는 아니구나.”

 

“자네도 소문대로군” 

 

두 사람은 첫 움직임에 서로가 쉬운 상대가 아님을 파악했다. 둘은 다시 거리를 재듯 검끝을 서로에게 두고 나선을 그리며 서서히 거리를 좁혔다. 

 

“핫!”

 

이번에 먼저 움직인 것은 프랜시스였다. 보폭을 순간적으로 좁히며 찌르듯이 듀란의 목덜미를 노렸다. 듀란은 능숙하게 검신으로 칼을 위로 쳐내며 프랜시스의 옆을 노렸다. 프랜시스는 반대쪽으로 몸을 이동시켜 듀란의 검을 막아냈다. 듀란은 쫒아가며 검을 휘두르는 척하면서 프랜시스의 몸 쪽으로 발차기를 노렸다. 프랜시스는 발차기를 흘린 뒤 연격으로 따라 들어오는 검을 튕겨내고 거리를 벌리며 다시 자세를 고쳐 잡았다.

 

“제법이군. 이걸 피하다니.”

 

두 사람은 다시 거리를 유지하며 틈을 찾았다. 거리를 좁히고, 합을 주고받고, 다시 벗어나기를 세 번, 그러나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미끄러지듯 서로의 옆을 스칠 뿐 서로에게 결정타를 주지는 못했다. 마지막으로 합을 주고받은 후 다시 거리가 벌어지고 나선을 그리며 움직이기 시작하기를 열 걸음, 듀란이 입을 열었다.

 

“이상하군, 분명 너는 강하지만, 내가 아는 신의 챔피언은 이정도가 아니었어.”

 

“상대해 본 적이 있나?”

 

신의 챔피언을 상대해본 사람이라니, 진정한 신의 챔피언인 프랜시스 입장에서는 오히려 희귀한 사례였다. 그런데 이정도가 아니었다는 말은, 신의 가호를 두르고 싸운 챔피언을 상대로 싸우고 살아남았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좀 이상했다. 프랜시스는 지금 가호 없이 싸우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름 검술에 자신이 있기는 했지만, 자신의 실력이 가호를 두른 챔피언을 이길 정도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지금 듀란은 프랜시스와 거의 호각으로 싸우고 있는 걸 생각하면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직접은 아니지만, 싸우는 걸 본 적은 있지. 기적 같은 능력을 사용하더군, 자네와는 다르게 말이야.”

 

그제서야 프랜시스는 이해할 수 있었다. 듀란은 직접 다른 신의 챔피언과 싸운 게 아니었다. 다른 챔피언이 ‘무언가’와 싸우는 것을 본 것이다. 

 

“음, 내 경우에는 사정이 있어서.”

 

“어설픈 변명이군, 그렇다면 …”

 

듀란은 잠시 말을 끊은 후 교수대에 있던 초초해하고 있던 카를을 한번 쳐다보았다. 이 이상 시간을 끌어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질 생각은 없었지만, 행여나 결과가 좋지 않다면, 영주와 카를의 명예가 실추될 뿐 아니라 영민들도 혼란에 빠질 것이다. 가까스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는 힘의 격차를 보여주면서 압도적으로 승리하여, 신의 뜻이 단순히 검술 실력이 뛰어난 저 이방인 사기꾼이 아니라 카를과 듀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 순간, 결의를 확실히 다신 듀란은 품에서 마른 고기 조각 같은 것을 입에 넣었다. 

 

“내가 보여주도록 하지. 신의 기적을!” 

 

프랜시스는 그 직후 듀란의 기세가 점점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듀란은 걸음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자세를 취했다. 프랜시스 역시 자세를 가다듬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적막이 흘렀다. 한편으로는 프랜시스는 듀란이 먹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었지 결론을 내릴 틈도 없이 일순간에 거리를 좁혀온 듀란의 검이 프랜시스를 노리기 시작했다. 

 

“이야압!”

 

[챙!]

 

“큭!”

 

피할 틈도 없이 다가온 검격에 프랜시스는 반사적으로 검을 막았다. 그러나 조금 전과는 다른 강력한 일격에 프랜시스의 자세가 무너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듀란의 검격이 거칠게 프랜시스를 노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서로의 노림수를 가늠하여 주고받던 합과는 느낌이 달랐다. 검격 하나 하나를 받아낼 때마다 검을 쥔 프랜시스의 손이 떨려왔다. 조금만 방심해도 손에서 검이 튕겨 나갈 것만 같았다. 프랜시스는 당황하며 검격을 피해 빠르게 뒷걸음질 치며 거리를 벌렸다.

 

“어딜!”

 

듀란은 격차를 순식간에 좁혀오며 호흡을 가다듬기도 전에 맹렬하게 검을 휘둘렀다. 프랜시스는 가까스로 검을 막았지만 뒷걸음질 치던 반동으로 뒤로 구르며 겨우 물러났다.

 

“헉, 헉 …”

 

프랜시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반면에 듀란은 느긋하게 검을 좌우로 휘저으며 프랜시스와의 거리를 조여왔다. 듀란의 얼굴에는 진지한 표정 뒤로 승리를 확신하는 여유가 비쳤다. 그와 동시에 프랜시스에게도 아주 잠시 결론을 내릴 틈이 생겼다. 그리고 프랜시스는 조금 전 그가 삼킨 무언가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차렸다. 

 

“기적의 성찬인가.” 

 

프랜시스의 말에 듀란은 멈칫하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걸 알고 있다니, 정말 신의 챔피언인가? 그런 것 치고는 그렇게 강한 것 같진 않은데.”

 

듀란이 먹은 것의 정체에 확신을 가진 프랜시스는 경멸과 분노가 서린 눈빛으로 듀란을 바라보았다. 

 

“기적의 성찬을 어떻게 만드는 지 알고 있나?”

 

프랜시스는 차분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듀란에게 물었다. 

 

“… 글쎄, 어떨까? 내게 중요한 건, 이것을 먹으면 강해진다는 것뿐이야.”

 

듀란은 프랜시스의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는 듯했다. 프랜시스는 더 이상 기사도를 지키고자 하는 명예의 굴레에 구속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안심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다행이로군.”

 

“뭐가 말인가?”

 

“네놈이 신의 힘을 쓴 이상, 이제 내가 비겁하다고는 말 못하겠지.”

 

그리고 프랜시스는 왼손으로 목에 걸려있던 신의 징표를 꺼내 기도를 읊었다. 듀란은 상대도 신의 힘을 쓸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검을 고쳐 잡으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특별한 외형의 변화나 다른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다만 찰나의 기도 후에 프랜시스는 오히려 전투 자세를 풀어 듀란에게 다가왔다. 

 

“뭐하는 짓이냐?”

 

“…”

 

프랜시스는 말없이 검을 내린 채로, 마치 듀란에게 공격해보라는 듯이 천천히 걸어갔다. 듀란은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프랜시스를 향해 검을 휘두를 준비를 했다. 신의 능력이든 뭐든, 바뀐 것은 없었다. 상대가 공격하기 전에, 기적으로 얻은 강력한 힘과 순발력으로 먼저 상대를 베면 되는 것이다. 

 

“흐아압!”

 

듀란이 천천히 걸어오는 프랜시스의 목덜미를 향해 참격을 휘두드려던 순간, 듀란은 다시금 상대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조금 전까지 상대하고 있었던 프랜시스 대신 자신이 너무나 잘 아는 모습이 서 있었다. 듀란은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멈추어 서서 나직이 내뱉었다.

 

“어, 어머니?”

 

그리고 듀란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인자한 공격에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결투의 결과에 마을 광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음유 시인의 노래에나 나올 법한 달인들 간의 검투 대결로 모자라, 자신을 향해 검을 들고 달려오는 상대에게 아무런 자세도 취하지 않고 유유히 걸어가 뺨을 후려쳐 기절시키다니. 그것도 영지 최고의 검사를 상대로? 더군다나 단순한 결투가 아니라, 영주의 결정에 신의 이름을 거론하며 반대하고 나선 자였기에, 파급력은 더 컸다. 사람들은 프랜시스와 주노의 이름을 연호하며 교수대로 향하는 프랜시스를 바라보았다. 카를은 바닥에 쓰러진 듀란과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프랜시스를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했다.

 

“이, 이게 무슨 짓인가?”

 

“신성한 결투 재판에서 승리했소. 이긴 쪽의 말을 들어야 하지 않겠소?”

 

“그렇다고 내 아버지를 해하려 한 저 놈의 죄가 사라지지는 않네.”

 

카를은 마르셀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는 여전히 목에 밧줄이 메인 채 놀란 눈으로 프랜시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르셀은 죄가 없소.”

 

“증거라도 있나?”

 

“최소한 마르셀이 안장에 손을 대서 영주님이 말에서 떨어졌다는 사실은 진실이 아니오.”

 

“무슨 소리인가?”

 

“듀란은 안장이 끊어져서 영주님이 낙마했다고 했지만, 막상 안장은 누군가가 낸 흠집이 나 있을 뿐, 끊어지지는 않았소. 설령 마르셀이 안장에 흠집을 냈다고 해도, 영주님이 말에서 떨어진 것은 그것과는 상관이 없지. 안장은 말에 잘 매여 있었소.”

 

“그렇다면 아버지는 왜 말에서 떨어진 것이지?”

 

“나야 모르오. 결국 말이 흥분했을 뿐이니까. 어쩌면, 말이 안장이 불안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주인을 태우려 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어쨌든 마르셀이 아버지를 해하려 안장에 손을 댄 것은 맞지 않은가?”

 

“그것도 알 수 없소. 아무도 보지 못했으니까. 그보다 애초에 안장은 누가 왜 조사하라고 시킨 것이오?”

 

“…”

 

“이상하지 않소? 애초에 흠집은 나 있지만 안장의 가죽 끈이 떨어져서 영주님이 낙마한 것도 아닌데, 마치 안장 끈이 떨어져서 영주님이 낙마한 것처럼 안장을 조사하라고 시키다니. 마치 안장 끈이 떨어질 것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말이오.”

 

“…”

 

프랜시스는 이미 안장 끈이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아이작을 통해 확인했다. 조사하러 나왔던 병사도 분명히 안장 끈이 흠집이 난 것을 확인했지, 떨어져 나갔다고는 보고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듀란은 이미 두 번이나 안장 끈이 떨어져 영주가 낙마했다고 했다. 이것은 분명한 모순이다. 안장 끈이 떨어지지 않았는데, 왜 영주가 낙마했는가? 그것은 모를 일이다. 다만 명백한 것은, 마르셀이 안장을 손을 대었건 대지 않았건, 안장과 영주의 낙마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 이상은 캐묻지 않겠소. 다만, 나는 마르셀과 영주님이 말에서 떨어진 것은 상관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오.”

 

“…”

 

카를은 말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프랜시스는 사형집행인에게 마르셀의 손발에 묶인 밧줄을 풀도록 명령했다. 마르셀은 눈물을 흘리며 연신 프랜시스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언젠가부터 멀리서 지켜보던 존과 미노나도 그 모습을 보고 달려왔다. 마르셀은 미노나와 존의 이름을 외치며 손을 흔들었다. 그때였다.

 

[푸욱–]

 

“아니!”

 

“저런!”

 

카를이 칼로 미노나를 찔렀다. 아니, 정확히는 카를이 마르셀을 찌르려던 순간 미노나가 몸을 던져 대신 찔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두가 당황해 말을 잃었다.

 

“아, 안돼! 미노나!”

 

의외로 가장 당황한 것은 카를이었다. 그는 허겁지겁 미노나를 찌르던 검을 뽑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러나 이미 미노나의 가슴께에는 옷 아래로 피가 번져나가고 있었다. 

 

“어째서 저런 몹쓸 놈을 감싼 것이냐! 왜! 저놈은 너와 네 아들을 때리고 고통스럽게 하지 않았느냐!”

 

카를이 마르셀을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마르셀의 눈에는 살기어린 분노가 가득찼다.

 

“이제 알겠구만, 이제 알겠어. 나를 죽이고서 둘이서 어떻게 할 속셈이었구만. 까먹을 뻔했어, 그래. 미노나, 솔직히 말해. 존 저놈 누구 아들이야?”

 

마르셀은 분노에 이성을 잃은 나머지 칼에 찔려 쓰러진 미노나의 상처에도 아랑곳하지않고 그녀를 모욕했다.

 

“그만해요 여보, 아직도 그 소리에요? 존은 당신 아들이에요.”

 

“개소리 집어치워! 이 수작질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제발 믿어줘요, 여보! 흑흑, 으윽…”

 

미노나는 고통과 슬픔 속에 눈물지으며 소리질렀다. 그러나 그녀의 외침은 눈앞의 상황에 이성이 마비된 마르셀에게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지금 그런 소리를 할 때가 아니오. 『엄마 손은 약손.』”

 

프랜시스는 서둘러 미노나의 상처를 누르며 기도를 시작했다. 출혈은 있었지만, 다행히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었다. 그 와중에 뜬금없이 마르셀은 화가 난 모습으로 존을 낚아채듯이 자신에게 끌어왔다. 그러고는 억지로 존의 윗옷을 내려 그의 어깨를 사람들에게 보이며 말했다. 

 

“나는 봤어, 봤다고! 존 이놈 어깨에 있는 반점이랑 똑 같은 것이 저 자식한테도 있는 것을!”

 

마르셀은 신분의 경중도 잊은 채 카를을 향해 삿대질하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존의 어깨에는 별 모양의 반점이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놀란 것은 카를이었다. 

 

“어, 어떻게, 저것이…?”

 

카를의 반응으로 볼 때 마르셀의 외침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소문이 사실이었어?”

 

이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아니라고요 시발! 으윽, …”

 

미노나는 억울함과 슬픔 그리고 고통속에 몸부림치며 욕지꺼리와 함께 있는 힘껏 소리질렀다. 다행히 프랜시스의 기도가 효과를 발휘하여 피가 잦아들고 있었다. 정확히는, 억울함에 사무쳐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는, 살고자하는 의지가 프랜시스의 기도와 공명하여 상처를 회복시키고 있었다.

 

“내가 설명하도록 하지.”

 

충격적인 현장과 사실에 아수라장이 된 교수대를 정리하듯 병사들을 이끌고 누군가 나타났다. 영주 루드비히였다. 

 

 

영주 루드비히 공은 연관된 사람들을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응접실 같은 공간에 사람들이 모였다. 조금 전 사건의 흔적을 말해주듯 미노나의 옷은 여전히 피로 물들어있었다. 프랜시스는 여전히 미노나의 치료에 열중했다. 피는 멎었지만 미노나는 여전히 고통스러워했다. 저택으로 오는 동안 진정하고 정신을 차린 마르셀은 고통스러워하는 미노나를 보며 걱정했지만, 카를과 존의 반점을 떠올리며 다시금 분노를 삼키고 루드비히의 설명을 기다렸다. 카를 역시 어이없는 상황에 얼이 나간 듯 기다리고 있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버지, 건강은 어떠십니까?”

 

“더할 나위 없다. 나를 위해 기도해주셨다고 하더군요, 사제여. 아니, 주노의 챔피언이신가? 감사하오.”

 

영주 루드비히는 자리에 앉아 프랜시스에게 감사를 표했다. 

 

“주노 님께 대신 전해드리지요.”

 

프랜시스는 겸손히 감사를 여신에게 돌렸다. 루드비히는 머리에 손을 댄 채 생각을 가다듬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럼… 어디부터 시작해야하나. 우선 반점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하지. 그건 우리 가문의 남자들에게만 나타나는 표식 같은 거라네.” 

 

그 말을 들음과 동시에 마르셀은 고함치며 자신의 머리를 쥐어팼다.

 

“그럼 그렇지, 내가 바보 병신이지! 저럴 줄을 모르고 자식새끼라고, 마누라라고 끼고 산 내가 병신이지!”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당신, 제발… 흑흑.”

 

미노나는 짧은 탄식 이후에 억울함을 토로하듯 소리치며 울었다. 존은 마치 죄인이라도 된 듯 풀 죽은 모습으로 머리를 떨구었다. 카를은 아무 말이 없었다. 

 

“오해가 있는 모양이네만, 아무래도 이제는 말할 수밖에 없겠군. 사실 미노나는 … 내 딸이라네.”

 

“…?”

 

“네?”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루드비히를 바라보았다. 

 

“딸이라뇨? 어머님은 저 외에… 설마?”

 

카를은 머리를 스치듯 무언가가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보던 프랜시스도 얼마전에 테레사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 설마가 맞다. 미노나는, 여기서 일하던 시녀 조세핀과 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모두가 충격을 먹은 듯 잠잠해졌다. 감정을 주체 못하던 미노나와 마르셀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네가 어렸을 적, 나는 네 어머니 엘레노어를 놔두고 조세핀과 사랑을 나눴다. 그러다 엘레노어가 그것을 알고 앓아누워버렸지. 조세핀은 날 위해서였는지, 엘레노어를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보복이 두려워서였는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어. 그 이후에 엘레노어가 죽고, 나는 모든 것을 잊고 지냈다. 미노나가 나타나기 전 까지는.”

 

잠시 뜸을 들이면서 루드비히는 따듯한 눈빛을 숨기며 미노나를 바라보았다. 미노나는 고통도 잊은 듯 얼이 나간 표정이었다. 

 

“미노나 네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나는 네가 누군지 몰랐다. 하지만 네가 준 물건을 보고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내가 조세핀에게 선물로 줬던 시가 적힌 손수건이었어. 하지만 너는 내가 네 아버지인지 알지 못했던 거야. 조세핀이 죽기 전 이곳에 오면 자신을 돌보아줄 거라고 했다고만 말했지. 조세핀은 죽을 때까지도 나에게 폐를 끼치기 싫었나보더군.”

 

미노나는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오래된 기억이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좋은 사람이었다.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을 먹여살렸다. 두 사람은 행복했다. 다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겨울, 조세핀은 병을 얻어 미노나에게 영주를 찾아가 도와달라고 하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그대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 이후는 모두가 아는대로다. 나는 미노나를 거둬서 시녀로 삼고 돌보아주기로 했지. 카를, 네게는 야속하겠지만 이것이 너와 미노나를 결혼시키지 않은 이유다. 배다른 남매라고는 해도 남매를 결혼시킬 수는 없잖나. 그리고 마르셀, 나름 자네를 믿고 있어서 미노나와 결혼시킨 것일세. 그래서 자네와 미노나에 대한 안좋은 소문이 들렸을 때 자네에게 그렇게 훈계한 것이네만, 설마 존에게 그 징표가 나타날 거란 것은 생각하지 못했군. 그리고 그것을 자네가 알아버린 것도.” 

 

“그, 그러면, 존은 제 아들인 게…”

 

마르셀은 자신의 상상을 뛰어넘은 진실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갈곳을 잃은 분노와 억울함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내가 몇 번을 말했잖아요! 존은 당신 아들 맞다고. 내가 예전에 카를 님하고 친한 사이였던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일을 그만두고 당신하고 만나 결혼한 이후로는 카를 님과는 따로 본 적도 없어요!”

 

자신의 결백함이 증명되는 순간에 미노나는 마르셀을 노려보며 억눌러왔던 분노와 억울함을 폭발시켰다. 마르셀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앉아있던 미노나의 곁에 다가가가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미노나… 미안해.”

 

“당신이 왜 의심했는지는 이해가 가요. 설마 나도 이럴 줄은 몰랐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나를 그렇게 지독하게 의심할 수가 있나요? 내 마음도 모르고 … 흑흑… 나는 정말 억울했다고요.”

 

마르셀은 말없이 일어서서 미노나를 끌어안았다. 미노나는 몇번이고 마르셀을 밀쳐냈지만 이내 못이기는 척 그의 품에 안겨 울었다. 존 역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달려가 그들에게 안겼다. 그러나 카를은 여전히 넋이 나간 상태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서…”

 

“아직, 연심이 남아 있었던게냐.”

 

루드비히의 질문에 카를은 아무런 부정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캐롤라인이 죽고, 딸만 보며 살고 있었네. 어느 날 소문이 들렸어. 미노나가 남편에게 맞고 산다고. 처음에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소문이 점점 이상해지더군. 미노나가 낳은 자식이 남편의 자식이 아니라니? 어처구니가 없었지. 내가 알던 미노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말이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네. 마르셀 자네와 결혼하는 바람에 사실 미노나는 불행한 것이 아닌가? 나라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녀를 구원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그래서 나한테 그런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씌웠단 말이오?”

 

카를의 말에 마르셀은 화를 내며 말했다. 

 

“부인은 하지 않겠네. 자네를 손봐달라고 한 건 나일세. 자네와 미노나에게 용서를 받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자네가 입은 피해에 대해서는 응당한 보상을 하겠네. “

 

카를은 무릎을 꿇어 고개를 숙인 채 그들에게 용서를 빌었다. 미노나와 마르셀은 당황하며 무릎꿇은 카를을 만류했다. 비록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씌워 자신을 죽이려고 한 카를이지만, 오해가 풀리고 여유가 생기고 나니 귀족이 자신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사실이 더 신경쓰이게 되었다. 

 

“아니, 억울하게 죽을 뻔한 것은 아직도 화가 납니다만, 여기 계신 프랜시스 사제님, 아니 주노의 챔피언 님 덕에 목숨을 건졌으니 됐소. 어찌되었든, 내가 미노나를 믿지 못하고 손찌검을 한 것도 사실이고. 죽어 마땅한 일이지. 따지고 보자면, 영주님이 바람 핀 게 일이 이렇게 된 원인 아닙니까?”

 

마르셀의 눈치 없는, 자칫하면 목숨을 내건 핀잔에 루드비히는 화가 났지만 이번만은 넘어가주기로 했다. 그보다 궁금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왠지 괘씸하지만 이번만은 때가 때이니 봐 주겠네, 마르셀. 카를, 너를 처벌해야 마땅하지만, 아무래도 나 역시 네게 네 어미에 대한 빚이 있지. 미노나와의 혼인을 막은 건도 있고. 나를 해하려 한 것도 이해는 한다만… 왜 이제 와서 이랬는지는 모르겠구나. “

 

다소 씁쓸한 듯 표정을 짓는 루드비히의 물음에 카를은 몹시 놀라며 난색을 표했다.

 

“아니오, 아버지. 저는, 아버지가 그리 되실 줄 몰랐습니다. 저는 마르셀을 손봐달라고만 했지, 아버지를 다치게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프랜시스님의 말에 따르면 영주님이 말에서 떨어지신 것은 그냥 말이 흥분해서라고…”

 

마르셀이 카를을 거들어주듯이 말했다. 

 

“그랬군, 하지만 누군가 말 안장에 손을 댄 것은 사실이지. 만약 내 말이 흥분하지 않고, 내가 그대로 사냥을 위해 말을 몰았더라면, 빠르게 달리는 말 위에서 떨어졌다면, 아마 지금쯤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야. 그러면 마르셀도 그대로 목이 매달렸을테지. 그러나 단순히 마르셀을 모함하기 위해 일을 벌이기엔 내 목숨을 노리다니, 너무 지나치다. 카를 네가 지시한 것이 아니라면, 누가 일을 꾸민 것이냐.”

 

루드비히의 날카로운 질문에 카를은 조용히 말을 꺼냈다.

 

“듀란에게 부탁했습니다. 그가 왜 아버지를 노렸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죄송합니다 아버지. 모든 것이 저의 불찰입니다.”

 

카를은 엎드려 숙인 채 루드비히에게 사죄했다. 루드비히는 듀란의 이름을 듣더니 뭔가 떠오른 듯이 중얼거렸다.

 

“듀란, 그 상단의 호위무사였었나. 잊고 있었군. 설마 이런 식으로 나를 노릴 줄이야.”

 

“아버지, 무슨 말씀이신지…?”

 

카를이 물었다.

 

“평소에 거래하던 상단이 있네. 몇 달 전에 그들이 도적떼에게 당해 큰 손해를 입었던 것을 내가 도와준 적이 있었지. 그러다 소문을 들으니 그 손해를 메꾸려 썩 좋지 않은 것에 손을 대고 있다고 하더군. 암암리에 우리 영지에도 퍼지고 있고 말이야. 그래서 얼마 전에 왔을 때 말했네. 이 이상 불법적인 것에 손을 대면 거래를 끊겠다고 말이야.”

 

루드비히가 말했다.

 

“그래서 듀란을 시켜서 아버지를?”

 

“그것 말고는 따로 짐작가는 것이 없구나. “

 

카를의 물음에 루드비히가 대답했다. 아마도 그 상단은 루드비히의 경고에 미리 구해두었던 물건들을 포기해야 해서 더 큰 손해를 볼 처지에 놓였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루드비히를 처리하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실행인은 이전 그 상단에 호위로서 몸을 담고 있던 듀란이었다. 그러나 카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듀란이 무엇이 아쉬워서 그들의 말을 들었을까?

 

“하지만 아무리 친분이 있다 하더라도, 특별한 동기도, 원한관계도 없는 듀란이 왜 상단의 말을 듣고 아버지를 노린 것일까요?”

 

카를이 물었다. 듀란이 이미 영주의 식솔이 된 지 수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왜 상단의 말을 듣고 영주를 노린 것일까? 다들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을 때, 프랜시스가 말했다.

 

“아마도 중독되었기 때문이겠죠.”

 

“중독이라니요?”

 

카를이 물었다.

 

“조금 전 그와 싸울 때 그는 기적의 성찬을 먹었습니다. 꽤 오랫동안 먹은 듯 보였고요. 기적의 성찬은 기적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하지만 그 능력과 중독성 때문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됩니다. 이미 기적에 중독된 상태라면… 필시 루드비히 공을 처리해준다면 더 많은 기적을 약속했겠지요.”

 

“… 설마.”

 

카를은 짐작가는 것이 있는 듯 고민에 빠졌다. 몇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카를과 루드비히는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맥락을 이어보자면, 아마도 그 상단이 다루기 시작했다는 불법적인 물건은 아마도 기적의 성찬인 모양이었다. 

 

“짐작가는 것이 있느냐?”

 

“그가 종종 품에서 뭔가를 꺼내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도적단 소탕 작전 이후 힘도 강해지고 검술 실력도 늘어 패배를 거울 삼아 실력이 더 늘었다고만 생각했는데.”

 

그러나 카를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듀란이라면 이미 충분히 강한데, 무슨 이유로 그런 물건에 손을 댄 것일까? 그때였다.

 

“꺄아아악!”

 

“으아악!”

 

바깥에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문득 카를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는 곁에 있던 병사에게 물었다. 

 

“듀란은 지금 어디 있지?”

 

“병사들이 그를 부축해서 데려가는 것을 본 이후로는…”

 

그 순간, 바깥에서 듀란의 울부짖음이 들렸다.

 

“어디있나 챔피언! 어서 나와! 아직 승부는 끝나지 않았다!”

 

 

일행이 밖으로 나갔을 때, 광장은 더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고 있었고, 부상입은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조금 전까지 듀란이 입고 있던 옷과 갑옷을 입은 채 검을 들고 서 있는 광폭한 괴물의 모습이 보였다.

 

“저게 뭐지?”

 

“설마, 듀란인가?”

 

루드비히와 카를은 옷을 보고 듀란임을 알아차렸지만, 그의 얼굴이 있어야 할 곳에는 본래 모습 대신 악마와도 같은 형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빨갛게 충혈된 눈, 독이 퍼진 듯 선명하게 부어오른 핏줄, 온몸을 덮은 나무껍질에 회색 빛 재를 뿌린 듯한 피부. 그리고 소름끼치게 갈라지는 목소리.

 

“저주받은 모습이군요. 한꺼번에 너무 많은 기적을 바란 모습의 말로입니다.”

 

프랜시스가 말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듀란이었던 것에게 걸어갔다. 

 

“주노의 챔피언.”

 

“여기 있소.”

 

“네놈, 비겁한 술수를 쓰다니. 그러고도 신의 챔피언이냐?”

 

듀란은 충혈된 눈으로 프랜시스를 노려보며 고함쳤다. 

 

“신의 힘에는 신의 힘으로 상대하는 것, 그것이 나의 정의요.”

 

“흥, 신의 힘을 손에 넣은 자가 고작 그런 비겁한 방법으로 승자인 양 으스대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검술 자체는 호각이라 생각했소만.”

 

프랜시스는 아쉬운 듯 말했다. 프랜시스에게도 주노의 가호는 나름 콤플렉스였다. 임무를 위해서 어쩔 수 없다고는 해도, 힘이나 속도, 혹은 자연의 원소를 다루는 강력한 기적을 사용하는 이들에 비해 정신을 공격하는 기술은 스스로도 어딘가 비겁하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더욱 검술을 단련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잠시였지만 자신과 대등하게 싸운 훌륭한 검사에게 비겁하다는 소리를 들으니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나라고 신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누구보다도 남을 지킬 힘을 가질 수 있기를 신에게 수도 없이 기도했지. 그런데 뭐냐? 내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복수조차 할 수 없었다. 그 도적놈 조차도 신의 힘을 쓰는데, 도대체 신은 뭘 하고 있는 것이냐?”

 

듀란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지 프랜시스는 알 수 없었다. 후일 알려진 이야기였지만, 듀란은 몇 달 전 일어났던 도적단의 상단 습격에 자신의 부모를 잃었다. 영주와 카를에게 고용되어 상단을 떠나왔지만 그의 부모는 여전히 상단에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그는 복수를 위해 영민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영주에게 적극적으로 탄원하여 도적단 토벌에 나섰다. 실력에 자신이 있었기에 반드시 복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는 뜻밖이었다. 도적단의 두목에게 패하고 만 것이다. 그 바람에 토벌은 실패할 뻔했다. 당시의 듀란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압도적인 힘과 속도에 듀란이 십 수년간 훈련과 실전으로 쌓아온 검술 실력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알고보니 별거 없더군. 그냥 이걸 먹으면 강해지는 거였어.”

 

듀란은 마지막 남은 조각을 뜯어먹었다. 그 때, 도적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집어먹은 후 엄청난 힘과 속도로 움직였고, 그 힘 앞에 듀란은 패배했다. 그 후 그는 미네르바의 챔피언에게 쓰러진 도적의 몸에서 그것을 찾아냈고 그것이 무엇인지 조사했다. 그가 알아낸 것은 ‘기적의 성찬’ 이라고 불리는, 의미심장한 말린 고기 조각. 그러나 그것을 먹으면 엄청난 힘을 낼 수 있었다. 자신이 보았던 그 도적의 힘, 그리고 심지어 그 도적을 쓰러뜨린 챔피언의 힘. 듀란은 힘을 탐하기 시작했다. 일생동안 찾아왔던 강력한 힘을 얻을 단서를 손에 넣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상단에게 조사를 부탁했다. 상단 역시 ‘기적의 성찬’을 손해를 만회할 기회로 생각했다. 이후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지 알았지만, 듀란은 개의치 않았다. 문제는 ‘기적의 성찬’ 거래를 하려고 하는 상단의 움직임을 눈치 채고 이를 방해하기 시작한 영주 루드비히였다. 결국 듀란은 더 강력한 ‘기적의 성찬’을 대가로 영주를 처리하는 것에 동의했다. 방법을 고민하던 와중에 카를이 마르셀과 미노나에 대한 자신의 고뇌를 털어놓았다. 기회였다. 치정싸움을 가장하여 영주를 처리할 방법을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는 마르셀이 마구간 관리인이라는 점을 이용하기로 했다. 사냥 전날, 밤에 몰래 자신의 말을 돌보는 척하면서 은밀히 영주의 안장 가죽 벨트에 손을 대기란 쉬운 일이었다. 계획대로 영주는 말에서 떨어졌지만 그러나 죽지는 않았다. 듀란은 기회를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고, 우선은 마르셀에게 누명을 씌우자는 카를의 계획에 협력하는데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그래야 영주가 깨어나더라도 마르셀이나 카를에게 덮어씌울 수 있으니까. 다만 그가 놓친 것은, 당연히 가죽 벨트가 끊어져 영주가 떨어진 줄 알았다는 것이었다. 프랜시스의 말 대로 영주의 말은 말 안장 평소와 다른 가죽 벨트의 장력에 흥분하여 영주를 태우기를 거부하며 날뛰었고, 영주는 그대로 머리부터 떨어져 쓰러졌다. 그래서 듀란이 흠집내어 놓았던 가죽 벨트는 끊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 소용도 없었다. 진실이야 어쨌든, 지금 듀란의 머릿속을 채우는 것은 강력한 힘에 대한 갈망, 그리고 비겁한 신의 챔피언에 대한 복수였다. 

 

“아아, 힘이 차오른다. 힘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신의 힘이라는 것이, 고작 이 고기조각에서 나오는 것이라니. 주노의 챔피언, 여기서 너를 쓰러뜨리면, 너의 신도 이 고깃덩이에 비할 바가 못되는 것이겠지. 그것으로 나는 능멸하는 것이다. 나의 노력을, 나의 기도를, 나의 복수를 무시하는 신들에게! 아까 같은 환상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각오해라!”

 

듀란이 무서운 속도로 돌진하며 공격해왔다. 조금 전 결투 때와는 차원이 다른 짐승과도 같은 속도였다. 그러나 듀란은 또다시 공격이 닿기 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전의 결투 때와 마찬가지로 프랜시스가 서있는 곳에 느닷없이 어머니의 모습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으아아! 이 비겁한 놈! 당장 그 모습을 그만두어라!”

 

“미안하군. 이것은 일종의 신의 가호 같은 것이라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네. 그나저나, 힘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크아아, 이놈!”

 

프랜시스의 비꼬는 말투에 듀란은 흥분하며 또다시 맹렬한 속도로 프랜시스를 공격해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현혹되지 않도록 눈을 감은 채 검을 휘둘렀다. 프랜시스는 피하려고 했으나 맹렬하게 따라붙는 듀란의 찌르기 공격을 피하기란 힘들었다. 가까스로 검으로 빗겨내려고 했지만 밀고 들어오는 듀란의 힘을 이겨내기엔 역부족이었다.

 

“크윽…”

 

프랜시스는 복부의 베인 상처 부위를 감싸면서 뒤로 물러났다. 듀란은 자신의 공격이 먹혀들어갔음을 확인하고 눈을 뜨며 여유있게 미소를 지었다. 

 

“왜 그러지, 챔피언? 자네의 신은 비겁한 환상 말고는 재주가 없는 모양이군.”

 

“… 자기 어미를 찌르다니.”

 

눈을 뜬 듀란에게 보인 것은 피를 흘린 채 서있는 자신의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악! 닥쳐라, 닥쳐!”

 

듀란은 혼란에 빠져 이성을 잃고 눈을 감은 상태로 프랜시스를 향해 검을 휘두르며 돌진해왔다. 속도는 빨랐지만 단순해진 듀란의 동선에 프랜시스는 상처를 감싸던 손을 떼고는 고통을 이겨내며 슬며시 몸을 움직였다. 흥분한 채 눈을 감은 듀란에게는 그것이 보일 리 없었다. 듀란의 검이 허공을 가를 때, 프랜시스는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고 저주받은 자를 향해 신의 가호를 담은 일격을 준비했다.

 

“조건은 만족했다. 『탈룰라 – 패륜아를 베는 검.』”

 

순간, 두 손으로 치켜든 프랜시스의 검이 눈부신 황금빛으로 빛나며 그 위로 자애로운 여신의 모습이 나타났다. 프랜시스를 찾아 충혈된 눈을 뜨고 두리번 거리던 듀란은 갑작스럽게 그 빛을 마주하는 바람에 잠시 시야를 잃었다.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프랜시스의 검에서 솟아난 빛 기둥은 번개처럼 순식간에 듀란을 사선으로 베어 갈랐다. 

 

“크헉!”

 

듀란은 빛 기둥에 베인 부위에 타들어가는 고통을 느끼며 검을 떨어뜨리고 바닥에 고꾸라졌다. 빛 기둥이 지나간 흔적은 회색 빛이던 그의 피부 위로 그을음과도 같은 깊은 열상을 남겼다. 그 흔적에서 흐르는 뼈를 태우는 고통에 듀란은 몸부림치며 일어나지 못했다. 고통의 강도가 더해지면서 몸에 끓어 넘치던 힘이 빠져나가고 알 수 없는 죄책감과 혼란스러움이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크허억…”

 

일어서려 해보기를 두어 차례, 어느덧 듀란은 힘을 다한 듯 격한 움직임을 멈추었다. 프랜시스는 바닥에 쓰러진 채 꿈틀거리는 듀란을 향해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다. 그리고 듀란의 몸을 돌려 그의 머리를 자신의 품에 놓았다. 여전히 충혈된 채 흐릿해진 듀란의 눈에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어머니… 용서해주십…”

 

말을 잇지 못하고 듀란은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눈에 담긴 마지막 모습은, 자애로운 미소로 자신을 안고 바라보는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프랜시스는 말없이 듀란의 눈을 감겨주었다. 금기를 범했기에 그의 영혼은 타르타로스에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겠지만, 이 순간만큼 프랜시스는 그의 명복을 빌었다. 

 

 

듀란의 죽음과 함께 마을은 안식을 되찾았다. 사람들은 부상자를 치료하고 혼란을 수습했다. 마르셀과 미노나, 그리고 존은 오해를 풀고 잘못을 용서하며 다시 화목한 가족으로 돌아왔다. 영주 루드비히는 듀란의 사태를 보고 기적의 성찬에 대한 규제와 감시를 더욱 철저히 하기로 하고 그 임무를 카를에게 맡겼다. 카를은 친형과도 같았던 듀란을 잃은 것에 대해 내심 아쉬워했으나, 앞으로 그와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기로 다짐했다. 또한 진심으로 마르셀과 미노나에게 사과하며 적절한 보상을 하고, 존의 대부가 되어주기로 약속했다. 비록 잘못된 길로 빠져 영주의 목숨을 노리고, 마르셀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고, 마을 사람들을 다치게 했지만, 마을을 도와준 영웅 프랜시스의 부탁에 듀란을 신성한 의식에 따라 화장시켰다. 마을 사람들은 영웅 프랜시스의 싸움과 이야기를 오래도록 술안주로 삼았다. 이것으로 프랜시스는 르마노 마을에서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해냈다. 그러나 신의 대행자로서의 그의 임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어머니 기사’라는 이명으로 불리게 된 것은 먼 훗날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