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왕, 마족의 제사장이자 군주이며, 인간이 마족을 멸망시킬 것이라는 오래된 예언을 부정하고자 인간을 멸망시키려 하는 자.

 그가 전쟁을 일으켰다.

 귀족들을 중심으로 한 반대 세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결국에는 마왕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인간들은 침공해오는 마족의 군세를 막는 한편, 마족의 정세를 전해듣고 마왕만 처치하면 전쟁이 끝날 것이라 판단하고 마왕을 처단할 이들을 추려냈다.


 촉망받는 기사, 의뢰를 실패한 적이 없는 암살자, 마법학교 수석 졸업자…. 굉장힌 실력과 이력을 가진 이들을 성검의 시험을 통과한 용사를 중심으로 묶어 일명 '용사파티'로 만들어냈다. 그런 용사파티는 총 20개가 만들어져 제각각 마왕령으로 향했다.


 롤랑의 파티도 그 중 하나였다. 정확히는 마지막이었다. 마왕의 암살이라는 중대한 사안을 맡길 수 있는 기준을 아주 아슬아슬하게 충족한 이들을 몰아넣어 만들어진 파티. 이른바 3류 용사파티였다.


 아무도 롤랑의 파티가 마왕을 처치할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다른 파티가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시선을 끄는 정도라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2

 롤랑은 시골 출신의 평범한 청년으로 검술은 떠돌이 용병에게 몇 번 배운 것이 다였지만 힘과 체력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마족의 침공이라는 심각한 사태에 병사라도 되어 도움을 주고자 수도로 올라왔다.

 모병소로 향하는 줄인 줄 알고 무작정 줄을 선 그는 얼떨결에 등을 떠밀려 성검의 시험을 받고, 얼떨결에 시험을 통과해 20번째, 그러니까 마지막 용사로 임명됐다. 그저 성검을 들 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용사가 된 본인은 당황했지만 이미 결정된 것을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그는 어쩔 수 없이 마왕 처단이라는 무거운 사명을 짊어지게 됐다.



 베닌은 꽤 유능한 도둑이었다. 하지만 귀족의 창고를 털다가 보물을 독차지하려던 동료의 배신으로 그만 감옥에 수감되고 말았다.

 운이 좋다고 하기엔 사태가 심각했지만 직후 발발한 전쟁 때문에 능력이 있는 범죄자들은 사면령을 받고 군대로 차출되거나, 베닌처럼 용사파티의 일원으로 임명됐다. 그도 나름대로 능력에 자신이 있는 편이었지만 전투에 익숙한 편은 아니었고, 애초에 잡히지도 않았던 암살자나 도둑들이 면죄부를 대가로 고용되자 점차 순위가 밀려 결국에는 마지막 용사파티에 합류하게 되었다.



 세리아의 경우에는 자원에 의해서 합류했다. 교단의 치유사들은 최전선과 마왕령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지자 대부분은 최전선으로 가기를 희망했다. 둘 다 고된 일이지만 죽을 위험이 더 큰 마왕령으로 들어가기에는 용기가 부족했던 탓이다.

 세리아를 포함한 소수의 용감한 치유사들만이 살아있는 성녀로 인정받고 용사파티에 합류했다.



 니아는 하프엘프 궁수였다. 정령술로 아득히 먼 거리에서도 강력한 화살을 쏘아내는 엘프 궁수들과 달리 정령술에 서투른 니아에게는 그런 압도적인 사거리나 정확한 명중률, 강력한 위력을 기대할 순 없었다. 셋 중 둘을 챙기면 하나가 모자란 수준이었다.

 엘프는 인류가 멸망하면 마족의 다음 목표는 엘프가 될 것이라 보고 정예를 추려 보냈지만 워낙 수가 적은 탓에 반푼이인 니아도 파견됐다.



 에스더는 마법학교를 자퇴하고 용병 마법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녀는 태평한 성격 탓에 모여든 마법사들이 서로의 수준을 따지며 은근히 자존심 싸움을 할 때에도 심드렁했다. 그래서 용사에게 배정될 마법사를 가려내는 대련에서도 항상 느긋하고 여유롭게 임했다.

 그녀는 마왕 암살에는 인류 최고의 마법사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끄트머리에 위치한 것이 자신이라고 생각했기에 여유를 가지면서도 결코 방심하지는 않았다.

 정확한 평가였다. 결국 그녀는 대련을 턱걸이로 통과해 마지막 용사에게 배정됐다.



 롤랑과 베닌의 서로에 대한 첫인상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상대를 성검을 어떻게 얻은 건지 모를 시골 무지렁이, 수감될 정도로 허접한 도둑놈이라고 생각하니 대화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성녀 세리아가 진땀을 흘리며 중재하고, 니아는 이런 것들과 같은 수준이라고 취급받았다는 현실에 한숨을 쉬는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에 말다툼은 끝이 났다.

 졸다가 깬 에스더가 하품하는 소리에 맥이 풀렸기 때문이었다.


 어찌 됐건 간에 그들은 이제 운명공동체였다.

 각자 다른 환경에서 성장했고 다른 생각을 하며 살아왔지만 나름대로 사명감을 가지고 모였다는 점은 같았다.




 #3

 가장 빛나는 이들은 곧바로 마왕성으로 향하는 직행 경로로 향했다.

 그에는 못 미치지만 여전히 환하게 빛나는 이들은 마왕령 내에서 교란 작전을 펼쳤다. 보급로를 습격하고, 흔적을 위장하고, 가짜 작전서를 흩뿌렸다. 그렇게 함으로써 조금이라도 다른 용사들이 마왕에게 향하는 것을 돕고자 했다.


 그리고 미약하게 빛나는 이들은 최전선에서 멈춰섰다.

 이는 성녀 세리아의 주장에 의한 것이었지만 다른 이들도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전투 경험이 부족한 용사 롤랑과 도적 베닌 때문이었다.

 롤랑은 그나마 힘과 체력이 받쳐주고 성검이 있긴 하지만 아직은 기술이 부족했고, 베닌은 몸은 날랬지만 무기술이 특기는 아니었다.


 그들은 최전선에서 머무르며 군인들과 함께 공세를 막아냈다.

 처음에는 그들을 보는 시선이 곱지는 않았다. 마왕령으로 향하지 않는 세리아의 성녀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점차 그 시선이 변하기 시작했다.



 용사는 몸을 아끼지 않고 적에게 돌진했다. 처음엔 어설프던 움직임도 점차 정돈되어갔고 땀보다 많이 흐르던 피도 몸에 잘 보관하는 법을 익혀갔다.


 도둑은 생각보다 전투에 소질이 있었다. 도둑질보다 단검술이 더 손에 익자 용사가 그를 부르는 호칭도 도둑놈에서 도적으로 바뀌어갔다. 여전히 본인은 호칭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성녀는 용사가 미숙할 때에는 치유에 전념했지만 그가 스스로 몸을 지킬 수 있을 정도가 되자 직접 전방으로 나서 곤봉을 들고 싸웠고 전투가 끝난 뒤에는 탈진할 때까지 부상병들을 치료했다.


 궁수는 다른 엘프들처럼 정령술을 잘 다룰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버렸다. 대신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했다. 동족들처럼 멀리, 강력하게, 정확하게 쏠 수는 없었지만 대신 가까운 거리 내에서는 확실하게 맞출 수 있게 연습했다. 하지만 거리가 짧은 탓에 사실상 거의 전열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마법사는 항상 한 걸음 뒤에서 시야를 넓게 가져갔다. 다른 마법사들처럼 웅장하고 강력한 마법은 사용할 수 없었지만 대신 작은 마법을 수십 개씩 통제하는 건 익숙했다. 그 점에서 최전선은 그녀가 활약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그녀는 쉴새없이 마법을 쏘아내며 빈틈을 드러낸 병사들을 구원했다.



 그들이 전선에 머무른 것도 1년이 지났다. 그들에게는 경험을 쌓고, 연계하는 법을 깨닫고,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그렇게 전선에서 지내다 보면 길보가 찾아올 거란 희망이 있었다.


 어느 날, 희망은 깨졌다.



 한 용사가 피투성이인 채로 전선에 나타났다. 그가 피눈물을 흘리며 마왕령 내의 소식을 토해냈다.


 마왕성으로 직행했던 용사파티들은 생사불명, 마왕령 내에 머물던 이들은 소수만 살아남아 추격대를 피해 도주 중.


 말을 마친 용사는 부러진 성검, 찢어진 천에 남긴 조잡한 지도를 남기고 그대로 숨을 거뒀다.


 -


 "우리가 마지막 희망이라고?"

 소식을 전해들은 롤랑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베닌은 독기도 생기도 빠진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그들은 1년 동안 전선에서 싸우며 실력에 자신이 붙었다. 그렇지만 그게 마왕을 처치하는 여정을 떠날 수 있을 정도라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가야겠지."

 "응, 그래도 가야지. 우리밖에 없으니까."

 누군가 사지로 가지 않으면 그들의 가족을 비롯한 인류 전체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다. 대안이 없는 상황은 오히려 결정을 쉽게 만들었다.

 하지만 쉽게 한 결정이라고 그 선택의 무게가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


 "니아가 안 가도 저는 갈 거에요."

 성녀 세리아의 말에 니아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가면 죽을 텐데."

 "안 가도 죽어요."

 "그렇긴 해."

 "하아암, 결론은 내렸어?"

 에스더가 나른하게 하품을 하며 천막으로 들어왔다. 니아가 그 모습에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언니는 왜 그렇게 태평한 거야."

 "어차피 해야 하는 거잖니? 그러면 그냥 하는 거지, 뭐."

 "하아…."

 니아는 한숨을 쉬다가 힘을 주어 말했다.

 "그래, 가자. 어차피 해야 하니까."

 "그래,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뭐라도…."

 "죽네 마네 재수없는 소리 좀 하지 마!"

 니아가 에스더에게 소리를 질렀다. 에스더는 그런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웃음을 지었다.

 "농담인데 왜 화를 내고 그래, 응?"

 "화가 안 나게 생겼. 아, 진짜! 그거 하지 말라고…! 읍, 읍!"

 마법으로 허공에 매달린 니아가 입까지 막히자 눈으로 욕을 했다. 세리아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음, 그럼 그렇게 된 걸로 알고 준비할게요?"




 #4

 그들은 최소한의 보급품과 죽은 용사의 유품을 챙긴 뒤 마왕령으로 돌입했다. 전선에서 대규모 반격 작전을 하는 척 위장한 덕분인지 감시하는 병력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무사히 마왕령으로 침투한 그들은 천천히 지도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것도 잠시, 며칠이 지난 뒤 일행은 처음으로 마족 순찰대와 맞닥뜨렸다. 경험이 쌓인 그들에게 이기는 게 어려운 상대는 아니었지만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다.

 

 마왕령 내의 대부분의 병력들이 그들을 잡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들은 몇 주 동안이나 도주와 전투, 짧은 휴식을 돌아가며 위태로운 곡예를 이어갔다.

 극한 상황에서 그들의 실력은 극적으로 성장했지만 그것은 목숨을 담보로 한 도박에 성공한 결과 얻어낸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점차 지쳐가고 있었다.


 어느 날, 적의 처리에 시간을 지나치게 소모했던 그들은 전투 직후 휴식을 취하지도 못한 채 또 다른 순찰조와 전투에 돌입했다.

 그렇게 도박에 실패하기 직전, 뜻밖의 조력자가 나타났다.


 -


 하인즈는 가장 빛나던 이들 중 하나였다. 고위 귀족 출신으로 문무를 겸비한 황실 기사였으며 첫 번째로 성검의 시험을 통과한 자였다. 또한 최초로 마왕성에 발을 들인 인간 중 하나였고, 최초로 마왕에게서 살아나온 인간이기도 했다.

 그는 동료들을 모두 잃고 마왕령 내에서 악착같이 살아가던 중이었다. 그의 실력으로 마왕을 죽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지만 그렇다고 곧장 포기하고 죽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다른 생존자를 찾아 헤메다 달라진 순찰대의 움직임을 통해 다른 용사파티의 존재를 알아채고 곧장 달려왔다.


 "아."

 하지만 그가 도착한 장소에서 발견한 이들은 마지막 용사파티였다.

 그는 체념했다. 마왕과 직접 싸워본 그는 마법사를 제외하면 다들 마왕을 처치하기엔 실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마왕을 처치한다는 헛된 생각은 포기하고 그들과 합류해 전선으로 복귀하는 것이 최선일 거라 생각했다. 일단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을 구해야 했다.

 하인즈는 빛바랜 성검을 빼어들고 순찰대의 후방을 덮쳤다.


 마왕에게 패배해 꼴사납게 도망쳤지만, 그는 가장 강한 용사였다. 그는 어렵지 않게 마족 순찰대를 몰살한 뒤 마지막 용사파티를 구출해냈다.


 -


 "여긴 정말 안전한 건가요?"

 "그래. 마족들도 총공세를 펼치느라 병력이 많이 줄어든 상태다. 그래서 마왕령 내부에 짧게나마 이렇게 감시의 공백이 생기는 거지. 내일 정오까진, 아니. 오늘 일 때문에 순찰 주기가 바뀔 수도 있으니 그 전엔 떠나야겠군. 최소한 내일 아침까지는 안전할 거다."

 말을 마친 하인즈는 나뭇가지와 천으로 만든 조잡한 천막을 세우기 시작했다. 롤랑이 그걸 거드며 말을 붙였다.

 "하인즈 님은 기사셨다고 하셨죠?"

 "그래. 근데 그건 왜."

 "잠깐 검술을 봐주실 수 있나 해서요."

 "잠깐이라면, 뭐."

 하인즈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행하는 이의 실력을 향상시키는 건 그의 생존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팔에 힘이 너무 과하게 들어갔다. 그런 움직임으로 잘도 여기까지 왔구나. 힘을 줄 때와 뺄 때를 제대로 판단해라. 항상 힘을 주면 지치기도 빨리 지치고 힘을 뺐을 때보다 오히려 검이 더 느리고 약해질 수도 있다."

 "아, 넵. 알겠습니다."

 롤랑이 어색하게나마 하인즈의 지도대로 움직여보다가 문득 떠오른 것을 질문했다.

 "저, 근데 제가 성검을 하나 더 얻었는데 활용할 방법이 있을까요? 쌍검술이라든가…."

 "뭐? 어디 보지."

 하인즈는 부러진 성검을 살피다가 롤랑에게 다시 돌려줬다.

 "단검 정도의 길이가 됐군. 흐음, 아예 못 쓸 정도는 아니지만 네 움직임을 생각했을 때 쌍검술은 무리다. 그냥 여분으로 가지고 있는 편이 좋겠어."

 "그렇군요…." 

 롤랑은 부러진 성검을 품에 갈무리했다.

 "그런데 그건 누구의 성검이지?"

 "저도 잘 모르는 분인데, 아마 이름이… 알베르트 님이었던 것 같아요."

 "알베르트가… 그런가."

 롤랑이 하인즈에게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아는 분이신가요?"

 "동생."

 "아."

 "잡담은 됐다. 계속 해봐라."

 롤랑은 묵묵히 검을 휘둘렀고 한동안 하인즈의 조언이 이어졌다.



 한편 도적 베닌과 궁수 니아도 체력을 회복하고 잠시 훈련 중이었다.

 "근데 이걸 나한테 가르치는 의미가 있는 거야?"

 "근접전을 대비해서 익혀둘 가치는 있다고 봐."

 "글쎄, 내가 근접전을 할 정도면 이미 다 글러먹은 상태인 거 아닌가…."

 그렇게 투덜대면서도 니아는 베닌이 지도하는대로 단검을 움직였다. 그녀는 귀찮지만 자신을 위해서 가르쳐준다는데 거절하기도 곤란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편 베닌은 니아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제안한 것이었는데, 정작 교습이 계속되고 니아가 땀투성이가 되자 다른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만져보고 싶다….'

 그는 그런 충동을 참으며 시선을 잘 처리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결국 참지 못할 것 같자 아예 눈을 질끈 감았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 그… 아직 피로가 덜 풀린 것 같아."

 "그래? 흐음, 그럼… 손 줘 봐."

 "손은 갑자기 왜?"

 "빨리."

 베닌이 슬며시 손을 내밀자 니아가 그 위에 손을 얹었다. 푸른 기운이 손을 타고 베닌에게로 넘어갔다.

 "이게, 뭐야?

 "숲의 정령. 엄청난 건 아니지만 피로 회복에 도움이 될 거야."

 "아, 응. 고마워."

 베닌이 얼떨떨한 기분으로 감사인사를 했다. 대충 손을 휘저은 니아가 말했다.

 "별 거 아닌데, 뭘. 자, 그럼 다시 시작하자."

 "어, 어? 아, 그래야지."



 세리아와 에스더는 하인즈에게서 넘겨받은 식량을 확인하고 있었다.

 "양이 많긴 한데 이거…."

 "전부 다 마왕령에서 얻은 건가? 보기보다 악착같은 구석이 있네."

 하인즈의 식량 주머니는 온통 풀과 날고기로 가득했다.

 "세리아, 일단 내가 마력으로 보존처리를 할게. 너는 축복을 내려주렴."

 "알았어요, 언니."

 그녀들은 모든 식량을 다 오래 먹을 수 있게 가공하고 난 뒤에는 가지고 있던 식량을 꺼내들었다.

 "저희 식량도 별로 안 남았네요."

 "그때가 되면 우리도 이제 현지에서 보급해야겠지."

 "으, 생각만 해도 싫네요…."

 진저리를 치던 세리아가 고민을 입에 담았다.

 "으음, 오늘은 많이 힘들었으니까 좀 푸짐하게 먹고 싶은데… 재료를 너무 많이 쓰기도 그렇고. 어쩌죠?"

 에스더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앞으로는 느긋하게 요리할 여유도 없을 거야. 기껏해야 고기를 구워먹는 정도가 다겠지. 제대로 된 요리는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마음껏 쓰자."

 "음, 그럴까요?"

 에스더는 하인즈의 고기들 중에서 상태가 좋은 것들을 골라 꼬치에 꽂고 마법으로 굽기 시작했다. 

 그 옆에서 세리아는 수프를 준비했다. 그녀는 곡물가루를 물에 풀어 솥째로 모닥불에 올리고, 딱딱한 빵을 잘게 찢고 굳은 육포를 두들겨 부드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열기가 올라오자 준비한 건더기들을 수프에 빠트렸다.

 아껴둔 고급 고기들도 모두 굽거나 수프에 넣었지만 조미료는 미래를 대비해 조금만 사용했다.

 음식 냄새가 풍겨오자 곧 훈련 중이던 이들도 모닥불 앞에 모여들었다.


 -


 식사를 마치고 사용한 그릇과 솥까지 모두 정리한 일행은 다시 모닥불 앞에 둘러앉았다. 밤이 깊어가는 가운데, 모두를 돌아보던 에스더가 중얼거렸다.

 "좋네. 아무도 안 죽고, 아무도 안 다치고. 계속 이러면 좋겠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방금 보니 실력이 아주 나쁘진 않더군. 전선 복귀도 먼 일은 아니야."

 하인즈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지자 일행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눈치를 보던 일행 중 롤랑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하인즈 님. 저희는 마왕성으로 가는 중입니다."

 "뭐? 농담… 아니, 진심인가? 잠깐…."

 하인즈가 생각에 빠져들었다. 실력이 가장 떨어지는 이들이 한 명도 죽지 않고 마왕령 내에 있으며, 보급품도 약간이지만 남아있었다는 건 최근에 마왕령에 돌입했다는 걸 의미했다.

 "내 생각이 맞다면 너희는 최근에야 마왕령에 들어왔겠군."

 "예. 전선에서 버티다 다른 분들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들어왔어요. 그, 동생 분이 죽기 전에 알려주신 거에요."


 하인즈는 차분하게 설득을 시도했다.

 "상황은 대강 알겠다. 하지만 포기하는 게 좋다. 남은 전력으로 마왕을 처치하는 건 불가능해. 마왕 암살으로 전쟁을 끝낸다는 건 단념하고 전선으로 돌아가서 방어전을 돕는 게 합리적인 판단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전쟁은 길어지고 더 많은 사람이 죽을 거에요. 우리가 가세한다고 전쟁을 이긴다는 보장도 없고요. 마왕 암살만 성공한다면 전쟁도 끝나고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으니까, 도박을 걸어보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다. 우리가 여기서 죽으면 확실하게 모든 사람이 죽는다."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절망적인 상황인 건 마찬가지인데, 성공하기만 하면 최선의 결과를 만들 수 있어요. 하인즈 님도 함께라면 분명 성공할 수 있을 거에요."

 하인즈가 한숨을 쉬었다.

 "정말 진심으로 그런 소리를 하는 건가? 지금 네 실력으로 마왕에게 도전, 아니, 아니지. 마왕에게 도달할 수라도 있을 것 같나?"

 말하다 말고 하인즈가 헛웃음을 터트리자 롤랑이 조금 소리를 높여 다시 말했다.

 "할 수 있냐 없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해야 하는 거니까요…."

 "롤랑."

 "예, 하인즈 님."

 "죽고 싶은 거냐?"

 "그런 건 아닙니다."

 모두를 한참동안 노려보던 하인즈가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알겠다. 나도 협력하지."

 그 말만 남기고 하인즈는 부실한 천막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무거워진 분위기 속에서 다른 일행들도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고 잠을 청했다.




 #5

 몇 달이 지났다. 하인즈는 습관적으로 전투 현장에 남은 발자국을 위조하려다 그만뒀다.

 처음에는 흔적을 위조하는 방법이 잘 통했다. 하지만 마왕성으로 너무 가까이 접근한 지금은 마족들도 그들의 목적지를 알아챘기 때문에 더이상 속지 않았다.

 이제 추격은 없었다. 그저 대부분의 병력이 마왕성 근처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가 한숨을 쉬려다 멈칫하고 다른 일행을 살폈다.

 성녀 세리아와 마법사 에스더는 마족의 시체를 뒤지며 식량이 없는지 살피고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수확이 없는 듯 세리아가 인상을 찌푸렸고 에스더가 뭐라 말하며 세리아의 어깨를 토닥였다.

 궁수 니아는 마력 화살을 많이 쓴 탓에 비틀거리면서도 마족들의 물 주머니를 챙기고 있었고 도적 베닌은 상태가 양호한 암기들을 시체의 품에서 빼내고 있었다.

 롤랑은, 시체 하나에 걸터앉아 빛이 약해진 성검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마신과 마찬가지로 그들 인간의 신은 세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그들이 신에게서 받은 것은 기적과 성검이 전부였다.

 기적 또한 그렇듯이 성검은 인간의 긍정적인 감정에 반응해 더욱 강해지고 더욱 환한 빛을 뿌린다. 지금 롤랑의 성검을 꺼트리는 것은 짙은 무력감이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게 작게 혀를 찬 하인즈가 롤랑에게 다가갔다.

 "정신 차려라.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

 "하지만, 성검이 이래서는 저는 아무 쓸모도 없는 게…."

 살짝 올라오려는 짜증을 억누르며 하인즈가 롤랑의 어깨를 짚었다.

 "네 의지가 약해진 것뿐이다. 마음 단단히 먹고, 잡념을 비워라. 그럼 성검도 다시 빛을 되찾을 거니까."

 롤랑이 계속 멍하니 있자 하인즈가 롤랑의 어깨를 꽉 쥐며 소리를 높였다.

 "네가 이럴수록 모두가 죽을 위험은 커진다. 그걸 원하는 건 아니겠지."

 "당연히 아니에요. 아닌데… 부정적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아요."

 "부정적인 생각을 억지로 밀어낼 필요도 없다. 그냥 네가 지켜야 할 것을 생각하면 싸울 때만큼은 절망을 잊을 수 있을 거다."



 그렇게 말하며 돌아서는 그도 사실 매 순간 비관적인 전망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왕에게서 간신히 도망쳐 나온 뒤부터 희미한 빛을 내던 그의 성검은 지금은 오히려 밝게 빛났다. 하인즈의 성검을 밝히는 것은 묵직한 책임감이었다.


 마왕의 힘을 확인한 그는 현재 실력으로 절대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일행의 계획에 비관적이면서도 차마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보다 어린 일행들이 죽은 동생과 겹쳐보였던 탓이다.


 반면 다른 일행들은 여정이 점차 길어지면서 어쩌면 전선이 이미 무너졌을지도 모르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만약 마왕을 처치하는 데에 성공하더라도 그들의 고생은 아무 의미도 없던 것이 된다.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이미 모두의 분위기는 축 처진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하인즈는 천성에 맞지도 않는 보모 노릇을 하며 억지로 일행을 이끌었다. 그는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나마 태평한 성격의 에스더가 분위기를 환기시켜 준 덕에 버틸 수 있었다.




 #6

 드디어 일행은 마왕성에 도착했다.

 그들은 몇 번이고 몰래 마왕성에 접근했지만 병력 밀도가 너무 높은 탓에 발각돼 후퇴했다. 도주 과정에서 마족 경비병 수십을 죽이긴 했지만 그 정도가 한계였다.

 숨을 돌리던 하인즈가 새로운 의견을 제시했다.

 "그때는 정면에서 뚫고 들어갔지만 지금은 그러기엔 전력이 부족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땅굴로 침투해보는 건 어떨까 하는데."

 "땅굴 말인가요…."

 "그래, 아직은 마족들이 추격하지 않고 있지만, 아예 병력을 줄이는 방향으로 기습과 도주를 반복하면 분명 추격이 붙을 거다. 그때 환상으로 추격하는 병력을 다른 방향으로 유도하고, 우리는 관심이 쏠린 사이 다른 방향으로 이동해서 땅굴을 파고 진입한다."

 "좋은 생각인 거 같긴 한데… 그럼 언니가 엄청나게 무리를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언니, 괜찮겠어?"

 니아의 말에 잠깐 생각하던 에스더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한 물건만 있으면 인형에 환상을 걸고 유인하는 건 충분히 가능해. 땅굴을 유지하는 게 문제일 것 같은데… 조금 무리하면 못 할 것도 없을 것 같아."

 "땅굴은 나랑 세리아가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거야. 잠깐 지나갈 정도라면 될 거니까 언니는 환상에 집중해."

 에스더는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명백히 그녀의 능력을 넘어서는 범위의 일이었다. 그 말을 말하면 사기가 떨어질 지도 모르니 할 수 있다고 했다.

 '인형술도, 환상도… 전문 분야는 아니어도 익히긴 했으니까. 할 수 있어. 있을 거야… 아니, 해내야지.' 



 그날 이후로 일행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경비대를 기습했다. 발각되지 않고 통과하는 건 어려웠지만 처음부터 싸울 생각으로 나오니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멀리서 마법을 날리거나 마력 화살을 쏘고, 가끔은 최대한 몰래 접근해 한바탕 싸움을 걸고 피해를 입힌 뒤 도주했다.

 기습으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할 때가 더 많았지만 그들의 행동이 거슬렸는지 결국은 추격대가 붙었다.

 처음으로 추격대가 편성된 날, 쫓아온 추격대를 전멸시킨 일행은 계획을 준비했다. 그날 밤 곧바로 화살을 날려 존재를 알리자 이번에는 좀 더 많은 추격대가 몰려왔다.

 "언니!"

 "하고 있어."

 에스더는 마족의 시체로 급조한 인형에 환상을 덧씌워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게 했다.


 추격대의 주의가 쏠린 틈을 타 그늘에 숨어있던 일행이 성벽의 측면으로 이동했다. 롤랑과 베닌이 급하게 땅을 팠고 세리아와 니아가 땅굴의 벽면을 축복하고 정령으로 굳히며 뒤따라갔다. 하인즈는 바로 따라가지 않고 혹시나 추격대가 눈치채거나 성벽 위에 다른 병력이 없는지 살피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갑자기 에스더가 몸을 기대자 인상을 쓰면서 받아들다가 얼굴을 굳혔다.


 받아든 에스더의 몸에서 열이 펄펄 끓고 있었다.

 '무리였으면 말을 하지.'

 끝내 한숨을 참지 못한 하인즈는 혼절한 에스더를 업고 땅굴로 따라들어갔다.


 - 


 땅굴을 통과한 베닌이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어."

 일행이 차례로 땅굴을 빠져나오고 마지막으로 에스더를 업은 하인즈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언니? 어떻게 된 거에요?"

 "무리한 모양이다. 일단 따라와라."

 "땅굴을 숨겨야…."

 "시간낭비다."

 하인즈가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적막 속에서 일행은 건물들의 그늘을 타고 이동했다.

 한참을 이동한 그들은 왕궁에 도달했다. 경비병들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한밤중이라 확실히 병력이 적었다. 그들은 경비병들이 조는 틈을 타 조용히 담을 넘고, 근처에서 잠겨있지 않은 문을 발견해 왕궁 안으로 돌입했다.

 "아."

 굶주린 그들에게 행운이 따랐다. 그들이 발견한 문은 주방에 난 작은 쪽문이었다. 모두가 급히 주방을 뒤적거렸고 곧 남은 음식들을 발견한 세리아가 축복을 내렸다. 그런 뒤 일행은 잠시 숨을 돌리며 음식을 나눠먹었다.

 식사가 끝나자 하인즈가 곧바로 말했다.

 "내가 중간에 서겠다. 나머지 순서는 알아서 정하도록."

 말을 마친 하인즈는 그대로 주방 구석에 가서 웅크리고 누웠다. 남은 일행들은 익숙하게 불침번 순서를 정했다.

 불침번은 롤랑, 세리아, 하인즈, 베닌, 니아 순으로 정해졌다.




 #7

 롤랑은 고향의 가족들을 떠올렸고, 전선에서 친해진 군인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잠든 일행을 응시했다.

 성검을 움켜쥔 그는 꼭 성공해서 모두와 함께 돌아가겠다고 다짐했다. 검집 사이에서 새어나오는 빛이 서서히 강해지고 있었다. 아직 그는 무력감을 다 떨쳐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보다 모두를 위하는 마음이 더 큰 힘을 주고 있었다.

 그는 졸음이 몰려오자 조용히 세리아를 깨워 교대했다.



 세리아는 모두를 애틋한 눈으로 돌아보았다. 본인은 공평하게 모두를 살피려고 했지만, 롤랑에게 향한 시선이 약간 더 길게 머무르는 건 그녀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신에게 모두가 노력하는 모습을 지켜봐달라고 기도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그녀는 하인즈를 깨우고 잠에 들었다.



 하인즈는 피곤한 몸을 추스렸다. 매일 중간에 불침번을 서느라 피로가 누적된 상태였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견뎌냈다.

 그는 끔찍한 마왕성에 돌아왔다는 것을 다시금 실감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절망감을 느꼈지만 이내 그 감정을 간신히 떨쳐냈다.

 복도에서 누가 접근하지는 않는지 살핀 그는 다음으로 모두 잘 자고 있는지를 살폈다. 끙끙대는 에스더를 보고 혀를 찬 그는 에스더의 뜨거운 이마를 그의 차가운 손으로 식혀주었다.

 "미련하긴."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에스더를 내려다보는 눈빛에는 온기가 감돌았다.

 만약 마왕 암살이 실패하더라도 에스더와 다른 일행은 어떻게든 살려보내겠다고 다짐하며 그는 마왕의 옥좌로 가는 최단거리 경로를 머릿속에 그려나갔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그는 감각이 점차 둔해지는 걸 느끼자 베닌과 교대했다.



 베닌은, 한심하지만 좀 상스러운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자 마왕성에 돌입할 때까지 팽팽하던 긴장감이 풀렸고, 우울했던 기분도 한결 나아진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잠든 일행을 살피다 니아를 보고 그만 서버렸다.

 그는 니아가 좋았다. 겉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알게 모르게 남들을 챙기는 점도, 항상 단련하는 것도, 가끔 기분이 좋을 때 노래를 흥얼거리는 습관도 좋아했다.

 그렇지만, 그가 니아를 정신적으로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육체적으로도 좋아했다. 얼굴도, 표정도, 땀에 젖어서 옷 너머로 은근히 드러나는 몸의 곡선도 좋아했다.


 그동안은 잘 참아왔는데, 한번 서버린 물건은 좀처럼 수그러들지를 않았다. 그렇다고 처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마족이 잠든 일행을 발견하면 그대로 전멸이었다.

 그는 들끓는 욕망을 필사적으로 식히며 한참을 안절부절하다 대강 교대 시간이 다 되었다고 느끼자 떨리는 손가락 끝으로 어깨를 툭툭 두들겨 니아를 깨웠다.


 막 잠에서 깬 니아는 베닌을 이상하게 쳐다봤다. 약간 상기된 얼굴이나 시선을 피하는 태도야 평소에도 많이 접했지만 지금은 뭔가 기분이 나빴던 것이다.

 "나, 나 잠깐 볼일 좀."

 베닌은 그 말을 마치고 곧바로 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가 잠시 후에 다시 들어와 곧바로 잠을 청했다. 많이 급했나보다, 그렇게 생각하던 그녀는 그가 왜 그랬는지 깨달았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잠기운은 이미 달아난 지 오래였다.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미친 놈… 미친, 더러운 놈…."

 그녀는 구석에 웅크린 채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에스더는 부스스한 눈으로 기절에서 깨어났다. 마력 탈진을 겪은 것 치고는 열도 안 나고 몸 상태가 꽤 괜찮았다. 찌뿌둥한 몸을 기지개로 편 그녀는 니아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안녕, 니아."

 "아, 언니… 일어났네요."

 둘은 잠시 소곤댔다. 주제는 당연하게도 베닌에 대해서였다. 상황을 듣고 키득거린 에스더가 니아를 달랬다.

 "너무 신경쓰지 마. 원래 그게 평범한 거지. 하인즈 씨나 롤랑이 이상한 거라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이런 상황이니까 더 참기 힘들 수도 있지. 너나 나나 거의 누더기만 걸친 상태니까."

 전투 도중 옷이 손상되면 찢어진 천 따위로 수선해온 탓에 원형을 찾기가 더 힘든 상태였다. 니아가 몸서리를 쳤다.

 "그래도 조금, 기분 나빠요."

 "조금만? 엄청 나쁘진 않았나 보네?"

 "그게 왜 그렇게 되는 거에요…?"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일행들도 모두 잠에서 깨어났다.

 잠에서 깬 하인즈가 습관적으로 롤랑의 성검을 살폈다. 검집 사이로 새어나오는 선명한 빛을 보고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뒤에는 다른 일행의 상태를 살폈다. 에스더는 지난밤 고생한 탓에 안색이 어두웠지만 정신은 멀쩡해 보였고, 세리아도 약간 긴장한 것을 제외하면 평소와 같았다.

 그런데 베닌과 니아가 약간 이상했다. 눈을 가늘게 뜬 하인즈가 물었다.

 "다들 불침번 중에 특별한 일은 없었나?"

 각자 그렇다고 대답하는 와중에 베닌과 니아의 대답은 조금 늦게 들려왔다.

 "음, 네."

 "네, 별일은 없었어요…."

 '무슨 일이 있긴 했나보군. 고백일까? 아니면 추행? 아니, 그럴 것 같은 녀석은 아니었는데.'

 하인즈는 생각을 그만뒀다. 전투에 지장이 없다면 당장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일단 식사부터 하자."




 #8

 주방의 식재료로 간단한 식사를 한 뒤 몸을 풀고 하인즈부터 천천히 주방 밖으로 나섰다.

 "아."

 그는 마침 주방으로 걸어오던 마족 시종과 눈이 마주쳤다. 시종이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하인즈의 성검이 깔끔하게 그 목을 베었다.

 시체를 빈 찬장 안에 처박은 뒤 일행은 다시 출발했다.


 "이쪽이다."

 이미 마왕궁에 한번 와봤던 하인즈 덕에 순조롭게 마왕의 알현실로 향하는 듯했지만 결국 전투를 피할 수는 없었다. 앞으로 복도 하나만 남겨둔 상황에서 일행은 재수없는 마족 경비병 둘을 맞닥뜨렸다. 일행은 빠르게 적을 처치했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한 소음 때문에 다른 경비병들이 몰려왔다.

 "뛰어!"

 일행은 마왕궁의 복도를 전력질주했다. 복도를 돌자 곧바로 알현실이 나왔고, 알현실 앞을 지키던 친위대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무기를 치켜들었다.

 "내가 맡겠다, 먼저 가라!"

 "안 됩니다!"

 롤랑이 고민하다 베닌을 쳐다봤다.

 "베닌, 하인즈 님을 도와줘!"

 "알았어!"

 "기다리고 있을게요!"

 친위대가 알현실의 출구를 막아서려고 했지만 휘둘러지는 하인즈의 성검에 멈칫한 사이 일행을 놓치고 말았다.

 마족들이 마족어로 욕설을 내뱉었다.

 "저기, 하인즈 님!"

 베닌은 후방에서 몰려오는 경비병들에게 비수를 던지며 외쳤다. 하인즈는 친위대 여럿에게 둘러싸인 채로 짜증스럽게 외쳤다.

 "뭐냐!"

 "그 만약에, 제가 죽으면 말인데요!"

 얼굴을 찡그린 하인즈가 친위대 하나의 목을 절단하며 소리쳤다.

 "헛소리 말고 집중해!"

 "윽, 옙!"

 그도 베닌의 사정은 대강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는 고향에 어린 동생들이 있다. 그마저 죽으면 동생들은 부모도 가장도 잃은 채로 방치되게 된다. 그가 사면령을 받으면서 그 동생들도 중요인물의 가족으로 보호를 받게 됐지만 그가 죽고 난 뒤에도 지원이 유지될 리는 없었다.

 하인즈가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그의 성검이 더욱 밝게 타올랐다.


 -


 옥좌에 앉은 마왕에게서 유창한 인간어가 흘러나왔다.

 "호오, 여기까지 올 줄이야."

 마왕은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얼마나 많은 고난과 시련을 넘어 여기까지 왔는지 짐작하기도 힘들구나. 그 실력과 의지에 일단 경의를 보내마."

 그가 천천히 옥좌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너희 인간은 멸망해야만 한다."

 "그, 예언 때문입니까. 고대의 방랑자가 남겼다는 예언…."

 롤랑의 말에 마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그 외에도 많은 예언을 남겼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 그리고 나는 젊음을 바쳐 그 예언들이 전부 실현됐음을 확인했다. 그러니 나는 운명을 바꿔보고자 한 것이다."

 "정말 고작 그런 걸 가지고 이렇게까지… 전부 다 우연의 일치였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허탈해진 롤랑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곧 이어진 마왕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우연의 일치라. 수천 개가 넘는 예언이 실현됐는데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느냐."

 주먹을 내밀어 꽉 움켜쥔 마왕이 말을 이어갔다.

 "확정된 운명 같은 건 없다, 노력하면 바꿀 수 있다… 하지만 어떤 행동도 하지 않으면 그대로 실현되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인간이 마족을 멸망시킨다면 먼저 인간을 멸망시키겠다는 것이 내 결론이다."

 침묵하던 롤랑이 의지를 다지며 마왕을 강하게 노려보았다. 그가 뽑아든 성검이 전에 없을 정도로 환한 빛을 뿜어냈다.

 "그렇다면 나는 확정된 운명은 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수천 개의 예언이 실현됐으니 마지막 예언도 실현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그 어떤 노력으로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겠습니다."

 마왕이 허를 찔렸다는 듯 입을 벌렸다가 이내 얼굴을 풀고 웃음을 터트렸다.

 "허, 심지가 굳군. 마음에 들어. 인간만 아니었으면 좋았을 것을."

 롤랑이 안정을 되찾자 굳어있던 다른 일행들도 소리를 높였다.

 "하, 운명을 바꾸겠다고 큰 소리 치는 주제에 남들만 앞세우는 건 뭐 하자는 거야. 너무 졸렬한 거 아닌가?"

 "그러게, 혼자 안전한 옥좌에 앉아서 구경이나 하는 건 좀 우습네. 인간에게 겁이라도 먹은 걸까."

 "마, 맞아요! 마신께서도 당신의 겁먹은 태도에 실망하셨을 거에요."


 마왕이 다시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일행을 바라봤다.

 "그래, 그렇게 보였느냐."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마왕이 검을 뽑아들었고, 그 직후 분위기가 반전됐다. 이미 하인즈에게 설명을 들었지만 직접 보는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마왕의 검술은 뛰어난 이들 중에서는 평범한 편이었지만 마족의 우월한 육체와 절대 부러지지 않는 검, 거기에 수시로 날아드는 마법의 조합은 하인즈와 함께 마왕성으로 돌입했던 14명의 목숨을 손쉽게 앗아갔다.


 일행이 긴장하는 와중에도 마왕은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니구나. 싸우다 죽으면 몰라도 굶어 죽는 건 싫어서 말이다."

 "갑자기 그건 무슨 말입니까."

 "전쟁을 원하지 않는 이들은 많다. 내가 자리를 비우면 언제든지 들고 일어날 자들 말이다. 믿고 맡길 부하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수도 적고 나만큼 강한 것도 아니니 결국 내가 옥좌를 지킬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이제 그것도 곧 끝날 것이다. 여기서 너희를 꺾으면 그들도 인류에게 가망이 없음을 알게 될 테니, 나에게 맞서는 것보다 협력하는 것이 우리 마족들에게…."

 날아든 화살을 마왕이 어렵지 않게 검으로 걷어냈다.

 마왕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일행을 쳐다봤다. 니아가 조용히 말했다.

 "혓바닥이 너무 길어."

 "그런가? 내가 말이 좀 많았던 것 같군."

 마왕은 연달아 날아드는 화살과 마법을 모조리 쳐내며 계속 말했다. 

 "자네들이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고, 나에게 있어 마지막 장애물이니 좀 기분이 들떴던 건지도 모르겠군."

 "진짜 말 많네…!"

 일행은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마왕도 무적은 아니다. 그가 화살과 마법의 접근을 차단했다는 점에서 이미 그들의 공격이 유의미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수단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롤랑이 정면에서 시선을 끌고 원거리 공격으로 타격하거나, 그 반대의 경우를 노리는 것도 가능한 상황이었다.

 다만 마왕의 검이 성검을 부술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하다는 점이 문제였다.


 하지만 언제까지 적진에서 머뭇거릴 수도 없는 노릇, 일행은 롤랑을 필두로 전투를 개시했다. 달려나간 롤랑의 성검이 마왕의 검과 충돌했다.

 "큭!"

 그의 성검은 전에 없을 정도로 밝게 빛나고 있었지만, 그것이 무색하게도 가는 금이 갔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롤랑은 더욱 더 성검을 강하게 휘둘렀다.




 #9

 "후우."

 하인즈가 검을 시체에서 뽑아냈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베닌이 경비병들의 시체들을 뒤적거리며 뭔가를 설치하고 있었다.

 "함정인가?"

 "아, 네. 거창한 건 아니지만요. 그래도 시간끌기 정도는 될 겁니다."

 하인즈가 함정을 살폈다. 연막탄을 시체 밑에 깔아두고 비수를 단단히 고정한 시체들의 손 사이에 가는 실을 연결한 간단한 함정이었다.

 운이 좋다면 곧 마왕을 도우러 온 경비병들이 연기 속에서 자중지란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그 정도면 됐다. 들어가지."

 "예."

 그들은 잠시 숨을 고른 뒤 알현실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윽!"

 베닌이 먼저 달려나갔다. 이미 니아의 한쪽 다리가 잘려나간 상태였다.

 "괘, 괜찮아?"

 "이게 괜찮아 보이냐? 얼빠진 소리는 집어치우고 가세해!"

 베닌을 밀쳐낸 니아가 누운 채로 계속 활시위를 당겼다.

 피투성이가 된 롤랑이 부서지기 직전인 성검을 들고 쓰러져 있었고 세리아가 치료를 하고 있었다. 에스더는 그 앞에서 간신히 마왕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적당히, 했으면… 좋겠는데!"

 "저런, 힘든가? 금방 끝내주겠네."

 마왕이 에스더의 방어막에 검을 내리찍으며 동시에 마법을 시전했다. 직후 니아에게로 날아드는 마법을 베닌이 황급히 쳐냈다.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그냥 앞으로 가라고!"

 "으, 알았어!"

 베닌이 단검을 고쳐쥐고 마왕에게로 뛰었다.


 심호흡을 한 하인즈도 베닌의 뒤를 따르며 소리쳤다.

 "롤랑! 일어나라!"

 그 말에 롤랑이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마왕은 강했다. 그들만으로는 승산이 없었다. 하지만 하인즈가 온 이상 희망은 충분히 있었다.


 에스더와 니아를 제외한 모두가 방어를 도외시하고 달려들었다.

 마법과 화살은 모두 마왕의 마법에 상쇄되어 사라졌다. 하지만 롤랑은 그 틈을 타 마왕의 사각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먼저, 롤랑의 내려찍기가 마왕을 노렸다. 마왕이 몸을 돌리며 가볍게 올려친 일검에 한계에 달한 성검이 조각나 흩어졌고 롤랑은 튕겨나가 쓰러졌다.


 후방에서 암기를 날린 베닌이 곧바로 질주해 마왕의 목을 목표로 단검을 들이댔다. 공격은 허무하리만큼 쉽게 막혔고 베닌은 튕겨나갔지만 잠깐의 시간은 벌었다.


 그사이 다가온 세리아는 묵직한 곤봉을 휘두르는 척 하다가 갑자기 곤봉을 집어던졌다. 마왕이 곤봉을 조각내는 사이 그녀는 몸을 아래로 날려 한쪽 다리를 끌어안았다.


 마왕은 한 발을 털어내는 어정쩡한 자세에도 하인즈의 성검을 강하게 맞받아쳤다. 갈라지는 성검에도 개의치 않고 하인즈는 계속 검을 휘둘렀지만 검이 부서지기 직전 들려온 파공음에 잠시 물러섰다.


 직후 에스더와 니아가 협력해 만들어낸 마법의 화살이 마왕에게로 쏘아졌다. 에스더와 니아의 남은 마력 모두를 갈아넣고 숲의 정령과 바람의 정령이 힘을 실어준 화살은, 마왕의 자세를 약간 흐트러뜨리는 선에서 역할을 마치고 흩어졌다.


 다시 돌아온 세리아와 베닌이 피를 흘리며 마왕의 팔다리에 달라붙고, 하인즈가 마왕에게 다시 성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미 격전을 거쳐온 하인즈의 성검은 수명을 다한 상태였다.


 하인즈의 성검이 산산조각나는 것을 보면서 마왕은 환한 웃음을 지었다.

 성검도 없는 용사들과 좀도둑, 마력 없는 마법사와 궁수, 치료의 기적을 다 소모한 치유사… 그는 질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겼… 흠, 이건 예상 못 했는데…."

 돌연 가슴을 뚫고 나온 칼날을 보고 그가 말을 흐렸다.

 롤랑이 여분의 성검을 꽉 붙잡고, 힘을 주어 쭉 내리그었다.

 마왕이 피를 토하며 무너져내렸다. 그와 동시에 부러진 성검도 완전히 가루가 되어 스러졌다.



 쓰러진 마왕이 허탈하다는 듯 말했다.

 "하, 결국 예언은 이뤄지는가… 하지만 용사여, 안심해선 안 될 것이다. 인간이 마족을 멸망시키는 것은 필연이라 해도, 그 과정은 확정된 것이 아니니."

 피를 토하며 쿨럭대던 마왕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당장 여기서 몇 명이 살아나갈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러니 내 말을 잘 들어라. 여기 구석의 장식용 갑옷이 있는 곳의 벽면을 잘 보면 비밀통로가 숨겨져 있다. 성 밖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지만 남문 근처에 이어져 있으니 잘 하면 성을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열쇠는 내 품 안에…."

 지친 듯 주저앉은 하인즈가 물었다.

 "그걸 말해주는 이유가 뭡니까."

 "어차피 마족이 멸망한다면, 그 사실을 바꿀 수 없다면 적어도 다른 모습으로 멸망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한 일이 있으니 염치는 없지만… 나에게 약간이라도 고마운 마음이 든다면… 나를 증오하되, 마족들을 증오하지는, 말았으면…."

 마왕은 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 그대로 숨을 거뒀다.


 완전히 긴장이 풀려 니아는 아예 드러누웠다. 그 옆에서 베닌이 잘린 다리를 붙여보려고 애쓰고 세리아가 신에게 기적을 내려주길 빌고 있었다.

 그나마 여력이 남아있는 에스더는 마왕이 말해준 비밀통로를 확인하러 가고, 롤랑과 하인즈는 마왕의 시체를 뒤졌다.

 "어? 여길 좀 보세요."

 롤랑이 깨진 갑옷을 떼내다 마왕의 몸에서 흉한 상처를 발견했다. 살이 터졌다가 아문 흔적이 가득한 상태였다. 살이 그 정도로 터졌다면 내부는 어떨지 굳이 상상할 필요도 없었다.

 "엄청 오래된 건 아닌 것 같고… 아무래도 최근에 엄청 큰 부상을 입었던 것 같네요. 이런 상태로 그런 힘을 내다니…."

 계속 마왕성에 머물렀을 마왕이 부상을 입을 일은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런가,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은 아니었나… 어쩐지 예전보다 느리더라니."

 하인즈가 중얼거렸다. 그는 죽은 동생과 동료들을 생각하다 울적한 기분을 털어냈다. 살아있는 이들이라도 살리려면 감상에 빠져있을 시간이 없었다.

 곧 그가 마왕의 시체에서 작은 열쇠 하나를 찾아냈고 에스더도 비밀통로를 발견했다.

 그때, 바깥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지원이 오는 것 같군. 빨리 가자."

 누워있던 니아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잘린 다리는 붙이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상처부위만 치료한 채였다. 베닌이 눈치를 보다 슬쩍 말을 꺼냈다.

 "내가 업어줄까?"

 "싫어."

 "어, 어? 왜?"

 베닌이 즉답에 전전긍긍하자 니아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정 도우고 싶으면 부축이라도 하든가."

 한편 세리아가 급하게 마왕의 시체로 달려갔다.

 "잠깐, 저 검도 가져가야 할 것 같아요."

 절대 부러지지 않는 검이 마족에게 남아있으면 곤란했다.

 그녀가 마왕의 옆에서 검을 집어들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검이 말을 걸어요. 자기가 마신이 내려준 마검이라는데요?"

 롤랑이 급하게 다가와 검을 받아들었다.

 "진짜네…  대가를 바치면 그만큼 소원을 들어준다고…."

 베닌에게 부축받으며 걸어온 니아가 검을 낚아챘다.

 "흠. 된다고? 그래, 그럼."

 곧 마왕의 검이 먼지로 변하며 사라지고 베닌이 혹시 몰라 챙겨들었던 니아의 잘린 다리도 핏물로 녹아 사라졌다. 그걸 본 세리아가 소리를 질렀다.

 "뭐, 뭘 한 거에요!"

 "어차피 허벅지 아래로 잘렸으니까 바쳐도 상관없잖아. 없앨 수 있다길래 그냥 없앴어."

 하인즈가 망설임 없이 다리를 바친 니아와 대가를 받았다고 스스로를 녹여버린 마신의 검에 잠깐 할 말을 잃고 침묵하다가 말했다.

 "잘 했다. 우리가 쓰기도 애매하지만 남겨두기도 껄끄러운 물건이었으니까. 뭐, 일단 움직이자. 시간이 없다."

 일행은 비틀거리면서도 비밀통로를 통해 이동했다.




 #10

 정말 마왕의 말대로 비밀통로는 남문 근처까지 이어져 있었다. 거기에 왕궁의 소란 때문에 성벽의 경계도 허술한 상황이었다.

 문제는 일행이 남문을 통과하기 직전, 밤새 허탕을 치고 막 돌아온 마족 추격대와 마주쳤다는 점이었다.

 각자 베닌이 여분으로 가지고 있던 단검을 건네받긴 했지만 무장도 부실하고 체력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하인즈가 여차하면 희생할 각오를 다지던 그때, 갑자기 추격대의 후방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어느새 나타난 십여 명의 부랑자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달려! 우리도 호응한다!"

 하인즈의 말을 신호로 일행이 당황한 추격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잠깐 실례할게!"

 "뭐, 뭐? 자, 잠깐!"

 베닌도 부축하던 니아를 한 팔로 간신히 안아들고 곧바로 달렸다. 니아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얼마 없는 마력을 짜내 마력의 화살을 쏘아냈다.


 양쪽에서 공격을 받고 우왕좌왕하던 적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전멸했다.

 일행과 생존자들은 무기를 노획하고 곧바로 마왕성에서 떠났다.

 "이렇게 생존자가 많았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렇게 때맞춰 도우러 올 줄도 몰랐고 말입니다."

 하인즈의 말에 생존자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저희도 놀랐습니다. 순찰 병력이 줄어들기에 혹시나 싶어서 온 거였는데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해서 모였더군요."

 "그것도 그렇지만 저는 성공한 게 더 놀랍네요. 솔직히 큰 기대는 없었거든요… 그냥 이대로 말라죽기 싫어서 억지로 움직였던 거지."

 여기저기서 동조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인류 최고의 인재들이 마왕 하나를 꺾지 못하고 죽어나간 것은 그들에게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하인즈가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대답했다.

 "첫 시도에는 실패했지만 마왕도 부상을 입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니 이번에 성공할 수 있었고, 때마침 여러분들이 도착한 것 덕분에 탈출까지 성공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합니다."

 "감사는 됐어요,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근데 이제 어쩌죠? 국경을 넘을 순 있을까요."

 하인즈가 생각하다 답했다.

 "일단은 잠시 상황을 좀 보는 게 좋겠습니다. 마왕이라는 구심점이 사라졌으니 전쟁이 끝나는 건 확실한 일이겠지만 언제 끝날지는 모르니까요."


 용사 2명, 마법사 4명, 도적 6명, 궁수 3명, 성녀 5명.

 총 20명의 생존자들은 그들 중 한 명이 머물던 동굴에 도착했다. 

 주변을 한참을 경계하던 그들은 추격이 붙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그제서야 간신히 휴식을 취했다.



 생존자들은 아는 사람들끼리 몇 명씩 무리를 이루어 옹기종기 모여앉았다.

 베닌에게 부축을 받으며 니아가 다른 엘프 궁수들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마을의 언니들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뭐야, 왜 나만 외다리야."

 "그야 어디든 하나 잘린 애들은 다 죽었으니까 그렇지."

 "네가 신기한 거야. 진짜 어떻게 살았지?"

 "그러니까. 죽는 게 정상인데 잘도 살아왔네."

 놀리는 말에 니아가 인상을 썼다.

 "오랜만에 봤는데 한다는 말이… 아, 이제 됐어. 앞으로는 언니들 부려먹으면 되니까."

 "아, 알았어."

 베닌은 니아를 앉혀주고 머쓱하게 자리를 떴다. 다른 도적이나 암살자들과는 안면이 없어서 끼지 못하고 같은 일행을 찾아다녔다.


 그는 세리아가 다른 성녀들과 서로를 끌어안고 울고 있어서 눈치껏 물러났고, 에스더도 마법학교 동문들과 전쟁 도중 깨우친 마법 이론에 대한 심도 깊은 토론을 나누는 중이라 차마 끼어들지 못했다.


 주변을 살피던 그가 하인즈와 롤랑을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갔다.

 "그래서 말인데, 롤랑. 폐하의 호위기사가 될 생각은 없나?"

 "호위기사라니, 제가 그런 중요한 자리를 맡아도 되는 건가요?"

 "그래. 폐하께서는 능력 있는 자를 아끼시니 네 실력이면 충분하다."

 "제가 기사가 되는 건 상상이 좀 안 가는데… 일단 생각해 볼게요."


 베닌이 슬쩍 옆자리에 앉으며 질문했다.

 "저기, 하인즈 님. 저는 돌아가면 어떻게 될까요?"

 "허, 언제는 곧 죽을 것처럼 말하더니. 이제 좀 미래에 대한 생각이 드는 거냐."

 "그게, 음… 그야 그때는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랬고, 지금은 큰 고비를 넘긴 상황이니까요."

 고개를 끄덕인 하인즈가 생각에 잠겼다.

 "흐음… 이미 사면을 받았으니 본래는 포상이 끝난 것이긴 하지만, 폐하의 성정으로 봤을 때 따로 관직을 내리실 것 같군."

 "윽, 관직이라니. 서류나 들추는 건 적성에 안 맞을 것 같은데요."

 "꼭 그런 쪽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지. 아마 너와 다른 이들은 비밀 감찰관으로 임명될 확률이 높다. 그렇게 되면 서류를 볼 일보다는 밖에서 돌아다닐 일이 더 많을 거고."

 베닌이 곧바로 질문했다.

 "감찰관은 보통 어떤 일을 하는데요?"

 "나도 다 아는 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관료의 부정을 조사하고 백성들의 고충을 파악하는 일을 하지. 그리고 또, 당분간은 손에 피를 묻히게 될 일이 많을 거다."

 "예? 갑자기요?"


 하인즈가 설명을 시작했다.

 "전쟁 중이니 한동안 잠잠했겠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다시 불법 노예상들이 기승을 부리겠지. 폐하께서는 그 분의 대에서 그런 자들을 확실히 뿌리뽑고자 하신다. 그동안은 제대로 박멸하지 못했었지만, 너나 다른 이들이 나선다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닐 거다."

 "예, 뭐. 확실히 그렇게 어렵진 않겠네요. 마왕도 이겼는데, 노예상 정도야…."

 베닌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떠오른 점을 질문했다.

 "아, 그런데 하인즈 님은 황제 폐하의 호위기사셨죠? 혹시 독대도 가능한가요?"

 "짧게라면 안 될 것도 없지."

 "저, 그러면 그, 폐하께 니아의 의족을 부탁드려도 될지…."

 베닌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트린 하인즈가 말했다.

 "그런 당연한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 다른 건 없나?"

 "재물을 좀…."

 "그것도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관직까지 받으면 앞으로 돈이 부족할 일은 없을 거다. 또 다른 건?"

 "어, 음. 없는 것 같습니다."


 베닌이 머쓱한 표정으로 침묵하자 기다리던 롤랑이 말을 꺼냈다.

 "제가 폐하의 호위기사가 되면, 하인즈 님이 지도해주시는 건가요?" 

 "아니, 나는 이제 기사는 그만둘 생각이다."

 "예? 어째서요?"

 "조금 지친 것 같아서. 그래서 너를 내 후임으로 추천하고 은퇴할 생각이었다. 모르는 게 있어도 다른 기사들이 도와줄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베닌이 끼어들어서 물었다.

 "그럼 앞으로는 뭘 하시게요?"

 "글쎄, 한동안 쉬다가 내키면 관료라도 되볼까 싶군."




 #11

 마왕 사후 억눌려있던 귀족들이 수도를 장악했다. 마왕의 자리는 공석으로 남았지만 각 가문의 가주들이 임시로 공동 통치에 나섰고, 그렇게 구성된 귀족 회의에서 회군 명령이 내려졌다.


 전쟁의 진행도 지지부진해져 양측에 무의미한 피해만 늘어가고 있었다. 거기에 마왕이라는 구심점이 사라지자 전쟁에 대한 회의론이 병사들과 지휘관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다.

 그런 상황에서 회군 명령이 떨어지자 마왕의 지지자들이 대부분이었던 마왕군 내에서도 명령에 따라 회군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를 점했다.


 계속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긴 했으나 수도 적고 능력도 부족해 대세를 바꾸지는 못했다. 그 중 일부는 인간과의 평화 교섭을 위해 포박되어 사절단에 끌려갔으며 눈치가 빠른 이들은 미리 탈영을 시도했다.


 또 탈영에 성공한 이들 중에서 일부는 인간령 내부로 멋대로 숨어들어가 파괴 공작을 시도했고 나머지는 마왕의 복수를 하고자 마왕령 내에서 인간들을 추적했다.


 물론, 긴 시간 동안 적진에서 생존해온 용사 일행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고, 탈영병들을 추격해온 마왕군들은 인간들이 탈영병들을 도륙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경계하는 인간들 앞으로 무장을 해제하고 앞으로 나선 마족 지휘관이 어색한 발음으로 종전 사실을 알렸다.

 거기에 병력을 물리고 스스로 길잡이를 자처하자 그제서야 누더기를 걸친 용사들은 안심하고 국경을 넘어 귀환할 수 있었다.




 #12

 복잡한 마법 이론을 써내려가던 여인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잠깐 멈칫한 그녀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문을 열었다.

 관료 치고는 꽤 건장한 편인 제국 수석재무관이 서 있었다. 그녀는 은은한 미소를 띠며 손님을 맞았다.

 "어머, 재무관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올해 예산계획서는 이미 제출했는데요."

 "오늘은 업무 때문에 온 게 아닙니다."

 "흐음, 업무 때문이 아니면 어떤 일로 저를 보러 오셨을까요."

 "지금 시간이 된다면 같이 연극이라도 보러 가시겠습니까?"

 잠깐 멈칫한 그녀가 잠시 눈을 감고 감정을 추슬렀다. 항상 그녀가 상상해왔던 일이지만, 실제로 일어날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 그녀는 상대가 자신에게 호감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그게 사실일까, 하는 비관적인 생각이 마음 한 켠에서 치고 올라왔다.

 그녀는 부푼 마음을 가라앉히고 평소대로 여유로운 표정을 가장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연극, 나쁘지 않죠. 근데 재무관님이 저랑 연극을 보자고 하실 줄은 몰랐는데요. 뭐, 우연히 표를 얻으셨는데 안 쓰기도 그래서 제게 제안하신 거겠죠?"

 "아닙니다."

 "네?"

 재무관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에스더, 저는 당신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어서 표를 샀습니다. 더 설명이 필요합니까."

 "네에…?"

 얼이 빠진듯한 그녀의 말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재무관 하인즈는 연이어 말했다.

 "당신을 좋아합니다. 당신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고,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상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마음을 확인하려고 연극을 보러 가자고 했습니다."

 하인즈는 잠시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런데 반응을 보니 저만 좋아했던 것 같군요. 알겠습니다.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에스더가 여전히 얼떨떨한 기분으로 있다가, 그 말에 소리를 질렀다.

 "아, 아니야! 저도, 저도 좋아해요!"

 삽시간에 하인즈의 안색이 밝아졌다.

 "정말입니까? 그런데 왜 아까는…."

 얼굴을 붉힌 에스더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랬어요. 설마 저를 좋아할 거라곤 생각도 못 해서… 그, 그리고."

 고개를 든 그녀가 다시 소리를 높였다.

 "무슨 제안 한 번 실패했다고 바로 포기하려고 그래요? 좋아한다면서!"

 "상대에게 마음이 없다면 그 의사를 존중하는 게…."

 "그런 게 어딨어요! 정말 좋으면 상대 마음을 돌리려고 해야지! 하아, 그나마 솔직해서 다행이네…."

 하마터면 서로 좋아하면서 마음이 없는 걸로 오해하고 이어지지 않을 뻔했다는 사실에 에스더가 몸서리를 쳤다. 그러다가 하인즈를 끌어당겨 꼭 안았다.

 "저기, 이건."

 "이제 싫어도 안 놔줄 거에요. 어떻게 잡았는데, 절대 안 놓칠 거야."

 하인즈는 슬며시 에스더를 마주 안았다. 둘은 한참이나 그러고 있다가 하인즈가 조심스레 에스더를 떼어냈다.

 "이러다 연극 시작하겠습니다."

 "너무 시간을 촉박하게 잡은 거 아니에요?"

 "원래는 여유로웠습니다. 누가 끌어안아서 지체된 거지."

 헛기침을 하며 에스더가 외투를 챙겼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아, 근데 언제부터 좋아한 거에요?"

 그 말에 하인즈는 마왕과 결전을 치르기 전날 밤을 떠올렸다. 순순히 대답하려던 그는 문득 장난기가 들어서 대답했다.

 "비밀입니다."

 "뭐야, 그게."

 둘은 가볍게 투닥거리며 집무실을 나섰다.



 #13

 동료와 임무를 교대하고 잠시 황궁의 정원을 산책하던 기사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살아있는 성녀 다섯 중 하나로 그도 잘 아는 이였다.

 "아… 성녀님,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그녀는 자신을 깍듯하게 대하는 기사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오늘부로 교리에서 수도자의 연애와 결혼을 금지하는 조항은 사라졌어요."

 "예? 갑자기 그게 무슨."

 갑작스레 그녀가 기사를 껴안았다. 정원을 가꾸던 하인들과 잠깐 바람을 쐬며 휴식하던 관료들이 놀라서 탄성을 터트렸다. 그녀가 이어서 말했다.

 "롤랑, 이제 제 마음을 숨기지 않을 거에요."

 "세리아…."

 "계속 함께 있고 싶어요."

 롤랑은 난처한 표정을 짓다가, 결심한 듯 세리아를 꼭 껴안아주었다. 하지만 곧 그녀를 밀어냈다.

 "성녀님, 저는 황제 폐하의 기사입니다."

 "그, 그 말은…?"

 거절로 받아들인 세리아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저 혼자 판단할 수 없는 일이니 폐하의 허락을 받고 오겠습니다."

 "네?"

 세리아가 그 말을 해석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자리에서 벗어난 롤랑은 무려 황제와 관료들을 대동하고 다시 정원에 나타났다. 젊은 황제는 현재 상황에 약간 흥이 오른 것 같기도 했다.

 "음, 마침 날씨도 괜찮군. 여기서 성녀 세리아와 롤랑의 결혼식을 진행하겠다."

 "감사합니다, 폐하!"

 "뭐 이런 걸 가지고. 영웅의 주례를 서다니, 내가 다 영광이지."

 당황한 세리아가 롤랑의 옷소매를 잡아끌고 소근거렸다.

 "저, 저기. 갑자기 이 자리에서 결혼식을 한다고요…?"

 "응? 세리아, 그건 무슨 소리야. 네가 청혼했잖아. 어, 설마 싫은 거야?"

 "아니, 그건, 아니기는 한데…."

 "그렇지? 나도 좋아."

 "그, 근데 너무 성급한 거 아니에요? 왜 바로 여기서 하는 거에요…?"

 "폐하께서 서로 좋아하고, 잘 아는 사이니까 곧바로 진행하는 게 좋겠다고 하셨거든. 주례도 폐하보다 더 적합한 사람은 없으니까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결혼식이 될 거야."

 세리아가 떨리는 눈으로 황제를 쳐다봤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황제가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내가 폐하의 장난에 당했구나.'

 순진한 롤랑은 황제의 말에 어떤 의심도 품지 않았다. 당사자인 그녀가 거부한다면 이 졸속 결혼식은 취소될 것이지만….

 '여기서 멈추고 싶진 않아.'

 결혼식 준비는 간단하게 끝났다.

 정원에 임시로 차양막을 치고, 시종들이 사람들에게 시원한 음료를 돌렸다.

 그녀는 수녀복 차림에 베일만 쓴 채로 롤랑 옆에 섰다.

 '엉망진창이야….'

 그래도 행복하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14

 금속 의족을 한 하프엘프가 마을 입구에서 따분한 듯 하품을 했다. 그때, 짐마차 몇 대가 길 저편에서 달려오더니 그녀 앞에서 멈췄다.

 "예, 여기로 오세요."

 마차에서 내린 인간들이 짐칸에서 쇠약해진 엘프들을 부축해서 내렸다.

 그 중에서 책임자가 슬그머니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오랜만이네."

 "오냐. 이번에는 몇 명이야?"

 책임자가 서류를 건네며 답했다.

 "36명."

 "그럼 맞네. 다 찾았어. 수고했어, 잘 가. 아, 폐하께 감사하다고 전해드리고."

 그녀는 엘프들을 데리고 마을 안쪽으로 향했고 인간들은 마차에 탑승해 다시 떠나갔다. 그런데도 책임자는 다시 그녀에게로 따라붙었다.

 "뭐야, 넌 왜 안 돌아가?"

 "휴가야."

 "아, 그래. 잘 쉬다 가."


 얼마 지나지 않아 소식을 전해들은 엘프들이 가족을 찾아나섰다. 납치당해 노예로 전락했던 엘프들이 가족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가는 걸 보면서 하프엘프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몸을 돌리고 말했다.

 "왜 자꾸 따라오는데."

 "그, 다리는 괜찮은가 싶어서."

 "이게 괜찮아 보여?"

 그녀가 다리를 살짝 들어올린 것만으로도 의족에서 철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아니… 그, 미안."

 "미안할 건 없는데? 이거 엄청 편하거든. 드워프제라서."

 "어? 아, 그렇구나…."

 하프엘프는 그녀 앞에서 전전긍긍하는 그를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이대로는 안 된다, 그런 생각을 했다.

 '심술도 적당히 부려야지.'


 심호흡을 한 그녀가 상대의 어깨를 붙잡고 눈을 맞췄다.

 "야, 너. 솔직히 말해. 그때 나 보고 했지?"

 눈을 질끈 감았다 뜬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 미안… 주체가 안 돼서 그만 실수했어."

 "그래, 실수했지. 다음부턴 허락 맡고 해."

 "어, 어?"

 "못 들었어?"

 제국 감찰관 베닌은 눈을 꿈벅거리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니아. 혹시… 허락, 해 줄 수 있어?"

 코웃음을 친 니아가 답했다.

 "뭘 그런 걸 물어봐? 너 변태야?"

 "어…?"

 "농담이야. 허락할게."

 잠시 기쁨에 몸을 떨던 베닌이 니아를 꽉 껴안았다.

 "야! 이거 놔! 이건 아직 허락 안 했어!"

 그날 베닌은 발등에 멍이 들었다. 드워프제 의족은 드워프들의 명성대로 꽤나 튼튼했기 때문이다.







 #?

 한 마족이 있었다. 그는 왕족이었지만 계승권이 낮아 치열한 경쟁에서 한 발 물러설 수 있었다.

 탐구심이 넘쳤던 그는 학자가 되어 다양한 것들을 연구했는데, 그가 가장 관심을 쏟았던 것은 오래된 예언서였다.

 고대의 방랑자가 남겼다는 아주 두꺼운 예언서에는 수천 개의 예언이 실려있었고, 그 마지막 예언은 인간이 마족을 멸망시킬 것이라는 것이었다.

 과연 이 예언서는 진짜일까, 그런 의문을 품은 학자는 다른 예언들의 실현 여부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과거의 기록조차 소실되어 확인할 수 없었던 것도 있었고, 예언의 실현에 대해 상반된 일화가 떠돌기도 했다. 신빙성이 떨어지는 기록들을 걸러내고, 귀족들이 소장하고 있던 가문의 고문서들을 양해를 구해 확인하기도 하며 그는 예언 하나하나를 검증해나갔다.


 수십 년이 지났다. 젊음을 다 바친 학자는 끝내 예언서의 내용을 검증해냈다.

 2245개의 예언 중 확실하게 실현된 것이 2076개, 기록이 없거나 부족해서 확인할 수 없었던 것이 168개, 그리고 문제의 예언이 마지막 1개였다. 

 그는 예언서의 내용이 진실임을 확신했다. 마족이 멸망할 거라는 예언에 절망한 그였지만, 문득 인간이 마족을 멸망시킨다면 먼저 인간을 멸망시키면 되지 않겠냐는 발상을 떠올렸다. 그는 헛된 발악일지라도 시도해 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늙고 쇠약한 학자에 불과했다. 그에게는 저들끼리 나뉘어 다투는 왕족들과 귀족들을 규합할 힘이 없었다.


 방법을 찾아헤매던 그가 고문서에 적혀있던 마검을 떠올렸다. 마검은 대가를 바치면 소원을 이뤄주며, 그 자체로도 그 무엇보다도 단단한 강도를 자랑했다.

 그는 즉시 마검을 찾아나섰고, 몇 년의 시간이 지난 뒤 폐허가 된 옛 도시의 지하에서 마검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학자는 그동안 쌓아온 잡다한 지식들, 그리고 5년을 제외한 나머지 수명을 대가로 그가 평생 노력했어야 얻을 수 있었던 수준의 육체와 기술을 획득했다.

 마족을 구원하겠다, 그리 다짐하며 그는 마왕의 자리에 도전했다.



 #??

 아주 먼 옛날, 인간들을 매우 혐오하던 마족이 있었다.

 그가 인간들을 혐오하게 된 이유는 여럿 있었지만 사실 별로 중요하진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가 유명한 예언서의 몇 권 안 되는 사본을 가지고 있었으며, 마지막 장에 멋대로 인간이 마족을 멸망시킬 것이라는 문구를 추가했다는 사실이다. 먼 후대가 이걸 보고 인간을 멸망시켜줬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낙서를 한 마족은 그 책을 훌륭한 보물상자에 넣고 땅에 파묻었다.

 그리고 긴 시간이 흘렀다. 이런저런 사고를 겪으며 예언서의 원본과 사본들이 소실되는 과정에서 보물상자 안에 보관된 사본은 아무 탈 없이 잘 있었으며,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어느 마족 학자에 의해 발견되었다.



 #???

 "환자분,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 가족도 동족도 다 죽은 지 오래고, 몸은 아프고… 그만 끝내고 싶어."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며칠만 기다려주세요."

 며칠 뒤 정부의 허가로 병마에 시달리던 마지막 마족의 안락사가 집행되었다.

 인간이 마족을 멸망시킬 것이라는 오래된 예언이 실현된 것이라며 인터넷 상에서 잠깐 화제가 되었으나 그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에게서 잊혀져갔다.

 예언을 믿는 시기는 이미 끝난 지 오래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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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에 의의를 두고 가볍게 쓰려고 했는데 거의 한 달 동안 붙잡고 있었네...

쓰고 지우고 다듬고 한동안은 문장에서 막혀서 멈추기도 했더니 너무 오래 걸림


그냥 용사파티 1군 2군 3군 정도로 나눠놓고

그 중에서 턱걸이한 3군 용사파티가 결국 마왕 암살에 성공하는 스토리가 목표였는데

일단 그 과정을 쓰는 데에 집중하다가 분량조절도 실패했다... 지금 보니 3만자 넘겼네


일단 주인공은 중간에 합류한 하인즈라고 생각하고 썼고

마왕 암살 성공하고 복귀하는 것까지가 당초 계획이었음

뭔가 행복하게 적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후일담이 좀 길어졌는데

아무튼 행복하면 된 거 아닐까?


연애요소 넣긴 했는데 모솔이라 어색할 수 있음

어색해도 그냥 소설에서 생략됐을 뿐 서로 호감이 있었다고 생각해 줘


이제 자러 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