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에는 종교를 가지는게 직업으로 대우받기도 했다고 한다.

그 부류의 사람들을 성직자라 불렀는데,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박칠수 목사가 그 중 하나이다.

박칠수 목사는 종말 전부터 살아온 노인이었는데, 재난 전의 그는 같은 사람이라고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는 성직자의 권위를 악용해 탈세와 투기를 일삼았으며, 대중을 우롱하고 법을 모독하는 이였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였는데, 그는 서울에 자신이 소유한 빌딩이 여러채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다 모두가 아는 그 날이 왔다.

거대한 재난과 전쟁이 연달아 몰려왔고, 문명은 붕괴했다.

붕괴된 국경에서 적기를 휘날리는 군대들과 청기를 휘날리는 군대들이 격돌했다. 

다른 모든 것들이 그렇듯이 그의 교회도 빌딩도 은행 잔고도 전부 붕괴되었다.

그러나 이는 어쩌면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허나 가족은 그렇지 못한다.

다른 이들처럼 그 또한 가족을 잃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의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우리가 아는 것은 전쟁이 끝나고 약 10년 후에 충청도로 후퇴한 대한민국 정부가 서울을 재건한 이후에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종말 이전의 사람들을 위해 부연설명을 하자면, 과거의 서울은 원시적인 법률과 풍습 탓에 50층도 채 되지 않는 작은 빌딩이 도시를 이뤄, 대한민국 인구의 불과 20%가량 가량만이 거주할 수 있었다고 하며, 그조차도 포화상태였다고 한다.

물론 서울이 지금같은 모습이 갖춰진 것은 좀 더 이후지만.

어쨌든 이 기적같은 도시가 재건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박칠수 목사가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많은 사람들이 바쁜 나날을 보내는 동안 그는 조용히 지냈다.

종교 자체가 사장되는 분위기이기도 했고, 재산의 대부분을 잃고 늙은 그가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는 것도 이유겠지.

어쩌면 가족을 잃은 상실감이 그를 주저앉힌 것일 수도 있고.

그렇게 또다시 5년이 흘렀다.


뒷방 늙은이로 쓸쓸히 죽어가던 그는 이 시점에서 각성하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도 이어진 환경재난으로 많은 국가가 붕괴되었으며, 살기위해 고향을 등진 이들이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을 향한 행렬을 이어갔는데, 대한민국도 그 중 하나였다.

일본과 동남아, 중국 등지에서 수많은 난민들이 대한민국으로 몰려들었는데, 구시대의 윤리관이 남아있던 재건 초기에는 이들 중 상당수의 채류를 허용했고, 전성기에는 난민의 숫자가 대한민국 국민의 수에 필적할 정도였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들을 대전과 경흥 등 광산촌에 주로 수용하여 노동력으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난민들은 대한민국 국민과 같은 대우를 원했고, 대한민국 측도 난민이 일으키는 범죄와 자원소모 등으로 반 난민정서가 확산되면서 갈등은 더 깊어졌다.

물론 그 사건 이후, 모든 것이 바뀌지만 말이다.

용산 참사말이다.

난민 중 극단주의 세력은 조직적으로 용산역 안에서 폭탄테러를 감행였고, 300명에 달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이로써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추방하려는 자와 남으려는 자들의 전쟁이.

사람들은 그나마 안전한 서울로 몰려들어, 서울은 인구 3천만명에 달하는 초거대도시로 거듭났다.

서울이라는 거점을 둔 국군은 범처럼 거리를 헤집으며 난민들을 축출하였다. 

난민들은 도시를 떠나 버려진 마을과 산악에 정착하여 저항을 이어갔다.

한국인과 외국인.

같으면서도 다른 두 집단의 전쟁은 많은 슬픔을 낳았다.

아이들은 부모를 잃고, 어른들은 아이를 잃었다.

서울의 밖에 적들이 창궐하고, 자식잃은 부모아 고아가 서울에 폭증하자 한국인들은 서로가 가족처럼 서로를 보듬어주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 난민들은?

애석하게도 한국인이 그런 여유가 있었던건 서울이라는 든든한 요새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행히도 난민들에게는 그런 요새가 없었다.

기껏 건설한 정착촌은 전차가 짓밟았고, 전차를 피해 산으로 도망친 이들도 헬기를 보내던, 보병을 보내던 어떻게는 색출해 내었다.

인심도 곳간에서 나온다고, 고아는 버려졌고, 노인과 환자는 쓸쓸히 굶어 죽었다.


이때 행동하는 이는 그 누구도 없었다.

서울의 시민들은 이들의 고통에 즐거워 했으며, 난민들은 고통을 나눌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아무도 나서지 않는 상황에 한 남자가 서울을 나섰다.

부패 성직자이자, 실업자, 노인인 한 남자가.

바로 박칠수 목사였다.


서울을 나선 박칠수 목사는 길을 가다 마주친 고아들을 거두며 강원도로 향했다.

그 험난한 길에서 마주친 고아는 무려 12명에 달했는데, 박칠수 목사는 이 중 단 한명도 외면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양구의 버려진 폐가에 정착한 박칠수 목사와 12명의 아이들은 함께 터전을 일구었다.  

무너진 지붕위에 직접 깎은 너와를 얹었고, 잡초가 무성한 공터를 손수 개간하여 작은 밭을 만들었다.

그는 작은 밭을 일구며 봄에는 감자를 길렀고, 겨울에는 보리를 길렀다.

그리고 덫을 놓아 잡은 메추리와 토끼를 기르는 토끼장을 건설했고, 계곡에 도랑을 파서 작은 저수지를 만들었다.

이렇게 강원도 양지에는 작은 고아원이 들어섰다. 

고아원이 건설되고 그 후로 아이들이 9명이 더 합류하여 고아들의 숫자는 무려 21명이나 되었다.

이들은 평온한 일상이 계속되기를 바라며 이 고아원을 이렇게 불렀다.

'소망원'


그들이 세상에 등지고 살아가는 동안 세상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한국인들은 서울을 몰려살고, 국군이 난민들을 토벌하면서 산악은 자연스레 재생하였고, 당연히 동식물도 늘어났다.

야산에는 사슴과 토끼같은 초식동물도 늘어났지만, 동시에 멧돼지같은 맹수들도 늘어났다.

정부는 생태계를 재건하고 멸종위기 동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강에는 미시시피악어를 풀었고, 산에는 호랑이, 표범, 늑대같은 맹수를 풀었다.

어차피 한국인들은 거대도시에 몰려사니 맹수의 습격을 받을 일이 없다는 것을 이용한 함정이었다.

맹수들의 습격으로 소규모 난민 집단은 소멸되었고, 맹수와 맞설만큼 큰 집단은 국군이 처리하면 그만이었다.

이로써 한반도는 거대한 요새가 된 것이요, 호랑이는 이민족으로부터 승리한 한민족의 위대한 상징이 되었다.


오지에 있던 소망원이 이 소식을 알리가 없었다. 

소망원에 살던 이들은 처음에는 사슴과 토끼가 늘어나 풍족해진 식단에 기뻐하였다.

그들은 허름한 헌옷이 아닌 모피로 만든 따뜻한 옷을 입고, 고기로 배를 채우며 인생의 기쁨을 누렸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박칠수 목사가 이변을 알아차릴리 없었으리.

그들은 불신자들의 함정인 것도 모르고 양식을 내려준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사건은 예고도 없이 일어났다.

원인모를 공격에 토끼장과 창고가 부서진 것이었다.

이 습격으로 가축이 전멸했고, 보존식이 손실되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평소처럼 족제비나 스라소니같은 야생동물 소행이리라.

반쯤 맞은 답이었다.


토끼장과 창고가 비자, 다음은 사람이었다.

소망원의 아이 중 하나가 사라졌다.

남은 것은 피묻은 신발 뿐이었다.

온 산을 뒤졌지만, 결국 찾을 수 없었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아이들이 혼자가 되면 귀신처럼 사라졌으며, 짝을 지어 보내더라도 2배로 빨리 사라질 뿐 바뀌는 것은 없었다.

그렇게 21명이나 되던 아이들이 불과 7명으로 줄어든 상황. 

비로소 범인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새벽에 내지르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치게 만드는 포효.

동물원이 동화책에서나 나오는 시대에 살던 아이들은 그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그저 겁에 떨고만 있었다.

상황을 인지한 이는 재난 전의 사람이던 박칠수 목사 뿐이었다. 


14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잃었다.

박칠수 목사는 선택해야 했다.

죽음을 기다릴지, 도망칠지.

목사는 창을 깎기로 결정하였다.

목사는 나무를 모아 창을 만들고, 높은 울타리를 세웠다.


호랑이도 바보는 아니었다.

달조차 뜨지 않은 밤, 기껏 세운 울타리를 부수고 그들을 습격한 것이다.

7명의 아이들과 1명의 노인은 이 흉악한 맹수의 적수가 아니었다.

호랑이는 순식간에 박칠수 목사의 팔을 배고, 방 안에 숨은 아이 7명을 모조리 도륙내었다.

모든 것을 잃은 박칠수 목사는 거대한 장작더미가 된 집에 불을 질렀다.

놀란 호랑이는 깜짝 놀라 뛰쳐나왔고, 이 틈을 놓치지 않은 박칠수 목사는 남은 힘을 모두 목창에 담아 내질렀다.

그렇게 모든 이야기는 끝으로 이어진다.


이 화재로 인해 군대와 소방관이 출동했고, 죽은 호랑이와 아이들 사이에서 주저앉은 박칠수 목사가 발견되었다.

그는 중상을 입었지만 살아있었고,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써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재판을 받았다.

장차 국가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는, 불법체류자의 은닉과 희귀야생동식물을 불법적으로 포획한 혐의로.

내란에 대한 형사재판이 늘 그렇듯이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고, 최후에 다음과 같이 항변하였다.


"어찌 모두가 무고한 아이를 외면하고, 짐승이 사람보다 귀한 세상이 왔단 말입니까? 사람의 생명이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났다는 것을 박칠수 목사는 교수형대에 목이 메달리는 순간까지 알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