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00자 주의


 

낡은 침대 하나와 협탁 하나, 마찬가지로 낡아 귀퉁이가 깨진 탁자와 나무 의자 4개가 고작인 세월의 풍파와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어느 낡은 여관방에 한 남자가 앉아 있다.

 

제 역할은 할 수 있을까 싶은 낡고 허름한 방문이 열리고 검과 지팡이, 성서와 십자가를 지닌 세 사람이 들어왔다.

 

"음, 오셨습니까."

탁자에 앉아 서류를 읽고 있던 남자는 그들이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늦었나요?"

"아뇨, 도리어 일찍 오신 겁니다. 제가 좀 더 일찍 왔을 따름이죠."

 

남자는 그 들을 맞이하며 자신이 앉아 있던 탁자의 맞은 편에 놓인 의자에 손짓했다.

"우선 앉으시죠, 그간 여정이 힘드셨을 텐데."

 

그의 말에 세 사람은 등에 메고 있던 무기와 가볍게 지니고 있던 짐꾸러미를 탁자 주변에 내려놓고서 남자의 맞은편에 나란히 앉았다.

 

"얼마 만에 뵙는 거죠? 3개월 정도 되었나요?"

"그쯤 된 것 같네요, 담당관님께선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신 것 같으십니다."

검을 등에 메고 있던 금발의 남성은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여전히 눈 밑에 피로가 가득하시네요."

"하하, 일이 끊이질 않다 보니 여유가 생기질 않네요. 마무리되면 길게 휴가를 받아 여행을 떠날까 생각 중입니다."

"휴가로 여행-... 좋죠. 지난번에 저희가 엘프 숲에 이상 징후를 해결하고 세계수의 빛을 돌려놓았습니다. 숲이 아름다운 곳이니 한번 들려보세요."

"꼭 기억해두었다가 꼭 한번 들러 보겠습니다."

금발의 남성의 말에 담당관도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담당관, 그런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자고 온 게 아닐 텐데. 우리에게 뭐라 할 말이 있어 그 피로에 찌들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직접 이곳까지 행차하신 것 아닌가?"

지팡이를 쥐고 있던 여성은 차가운 눈초리로 담당관을 쏘아보며 날이 선 말투로 말했다.

 

"당신도 쓸데없는 농담엔 관심 없고, 우리 안부도 그리 궁금하지 않잖아? 본론을 말해."

그녀의 말에 금발의 남자는 그녀를 손으로 막으며 그만하라고 작게 말했다.

 

"그렇군요, 제가 사담이 다소 길었나 봅니다. 바쁘신 용사분들에게 큰 실례를 범했네요. 정식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담당관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천천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런 그를 보던 여인은 콧방귀를 뀌고선 팔짱을 끼고 그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본론이라... 그럼 마법사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희가 있는 이 방에 거짓말을 할 수 없도록 마법을 걸어 주시겠습니까?"

담당관의 말에 그녀는 인상을 찡그리더니 "우리가 거짓말을 하기라도 한단 말인가요?"하고 차갑게 쏘아붙였다.

담당관은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손사래를 치고는 "위에 사실대로 보고를 드려야 하는 처지기에, 부탁하겠습니다." 하고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팡이를 쥐고 있던 여인, 마법사는 불편한 기색을 풀풀 풍기며 지팡이를 집어 들고는 주문을 외웠다.

짧은 주문과 함께 지팡이 끝에 푸른 마법진이 맺히는가 싶더니 번쩍이는 빛과 함께 옅은 푸른색의 결계가 방을 감쌌다.

 

"부탁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법사님. 그럼 이야기를 나누어 보죠."

담당관은 자기가 앉은 의자 옆에 기대두었던 서류가방에서 서류 뭉치 몇 개를 집어들어 탁자에 놓았다.

 

"유다이아 변경 백의 관할 영지, 헤로데를 아십니까? 여느 촌락입니다만 거주민이 다소 있죠. 소도시 규모의 마을입니다."

담당관은 서류 뭉치에서 지도가 그려진 종이를 집어 그들에게 내밀었다. 금발의 남성, 용사는 그가 내민 종이를 찬찬히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대략 12일 전, 그곳에서 떠나 오늘 새벽, 이곳 탈린 백작령에 도착하셨고요.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담당관은 용사의 담담한 말투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종이 하나를 꺼내어 그의 앞에 내밀었다.

"헤로데에 거주 중이던 거주민 2천 2백명을 선동해 함께 이곳으로 오셨고요. 맞습니까?"

그 순간 마법사가 탁자를 거칠게 손으로 내려찍으면서 소리쳤다.

"이봐! 선동이라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녀의 돌발 행동에 탁자에 올려져 있던 서류가 바닥에 어지럽게 떨어졌지만, 담당관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허리를 숙여 서류를 다시 주웠다.

그가 서류를 정리하는 사이 용사는 마법사를 어르고 달래다가 담당관에게 말했다.

 

"선동이라뇨, 말이 심하시네요. 그 들이 저희를 따라 이곳에 온건 맞지만, 선동이 아닙니다."

"그렇습니까, ‘선동이 아니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하나 정정 부탁하겠습니다. 그 들이 여러분을 따라 간 것이 아니라. 그 들을 여러분이 이끌고 간 것 아닙니까?"

"그, 그건..."

 

용사가 당황하는 사이, 십자가를 양손으로 꼭 쥐고 있던 여인, 사제가 끼어들어 말했다.

"헤로데의 촌장님과 마을 주민분들은 헤로데를 떠날 수 있다면 언제든 떠나길 바라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말씀드렸을 때, 자의로 저희와 함께하기로 하셨던 거죠."

"사제님, 말씀 감사합니다. 먼저 여러분이 떠나도록 종용했고, 주민은 그에 따랐군요."

 

"이봐! 담당관! 말을 해도 무슨 그따위로 해!"

"마법사! 진정해! 흥분하지 말고 대화로 풀어야지!"

자리에서 일어나 당장에라도 멱살을 잡을 것 같은 마법사를 용사가 붙잡아 진정시켜 강제로 자리에 앉히고는 용사도 원망스런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담당관님, 아무래도 말씀이 과하시네요. 저희가 종용했다뇨."

"잘 설득하고 달래어 권하다. 저희는 그것을 종용한다고 합니다. 틀립니까?"

 

담당관의 말에 용사는 입을 닫고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사제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담당관님, 그건 다 이유가 있어서 그랬던 것이랍니다. 결단코 선동이란 강한 단어로 저희의 선한 의도가 왜곡되어선 안 되어요."

"이유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담당관의 차분하고 담담한 말투에 사제는 용사와 마법사를 번갈아 보고 결심한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헤로데는 오랜 마물과의 전투로 인해, 땅이 오염되고 주변의 식생이 붕괴되어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에요. 게다가 틈만 나면 마물과의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져 그 들은 항상 불안 속에 살고 있었어요. 게다가 그 곳의 백작과 왕국의 폭거로 인해 그곳에서 떠나지도 못하고 갇혀 살고 있었죠."

사제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담당관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사제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마주 보던 사제는 숨을 크게 들이키고 말을 이었다.

 

"말씀드렸듯, 그곳은 농사도 사냥도 할 수 없는 척박한 땅이에요. 힘없고 나약한 주민들을 풀 한 포기조차 자라지 않는 그런 외지고 위험한 곳으로 내몰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건... 저희는 보고만 있을 순 없었어요."

"그랬군요. 그 들을 구하고 싶으셨군요."

 

담당관의 말에 그녀는 그제야 경직되어 있던 몸과 긴장이 풀린 듯, 유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맞아요. 이해해 주시는군요."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담당관은 조금의 표정 변화 없이 서류를 뒤적이다 어느 서류 몇 장을 집어 들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여러분은 잘못된 판단을 한 겁니다. 그래선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담당관의 눈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 눈과 마주친 사제는 놀란 얼굴로 당황한 듯, 그가 내민 서류를 훑어보았다.

 

"해당 지역, 헤로데는 마물 접경지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마물과의 오랜 전투로 인해, 식생이 붕괴되었고, 척박한 땅이죠. 인력을 통해 개간되어야 할 필요가 있고 식생이 자랄 정도로 지력을 회복하기 까지는 인력이 소모되는 거친 땅입니다."

담당관은 사제가 읽고 있는 서류를 살짝 곁눈질로 보고는 다른 서류를 집어 들어 건넸다.

 

"해당 지역 거주민에 관한 것입니다. 폭거라고 말씀하셨지만 왕국과 백작은 부랑자, 유랑민, 피란민 등 생활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시민, 대부분 사회적 약자에게 헤로데의 거주권을 7년간 보장했습니다. 대신 그들은 인근 농지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으로 개간한다는 조건입니다. 그 기간 동안 이사는 불가능하며, 허가증을 소지한 여행이나 외출을 제외하면 헤로데 밖으로 벗어나는 게 불가능하죠. 그들이 직접 서명했으며, 일부는 거주 기간을 더 길게 조율하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때, 그 어떤 외압이나 강압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사제와 용사가 서류를 보며 경악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사이, 담당관은 말없이 다른 서류를 집어 들고 그 들에게 내밀었다.

"말씀하신 헤로데의 촌장, 토마스는 전직 병사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1년 전 마물 토벌령 당시, 자의로 입대하였으나 토벌 작전 직후, 겁에 질려 탈영했고 2주간 도주 후 체포되어 5년 형을 선고 받아 4년 2개월 뒤, 출소했습니다. 그리고 지방을 떠돌며 용병활동을 하다 헤로데로 오게 되었습니다."

 

담당관의 말에 마법사는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서 그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그래서, 여러분께서 잘 못 판단하셨단 사실을 알려 드리는 겁니다. 그자가 무슨 말로 여러분을 속였는지 모르겠으나..."

"이봐! 그래서 어쩌란 거야!! 그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굶주리고 있었다고!! 도움의 손길을 애타게 바라고 있었다고!! 당신이 뭘 알아!!"

 

마법사가 사나운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담당관은 여전히 담담했다.

"그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뭐? 뭐라고?"

 

담당관의 말에 어처구니없단 표정을 짓는 마법사를 두고 담당관은 서류를 정리했다. 그러다 몇 장의 종이를 집어 들고 탁자에 펼쳤다.

"헤로데에 작년까지 등록된 거주민은 총 3천 5백여 명 입니다. 올해 조사는 아직 되지 않았으니 그보다 많을 수도 적을 수도 있겠군요."

"뭐라는 거야! 본론을 말하라고!"

"유다이아 변경백의 관할 장원, 2곳에서 생산된 밀과 보리, 옥수수를 포함한 곡물과 육가공된 식재를 보름마다 헤로데로 각각 14수레를 보냅니다. 보름마다 총 28수레로 이는 4인 기준으로 한 가정이 먹어도 부족함 없는 량이죠. 충분히 3천 5백명이 먹을 수 있는 량입니다. 또한, 마물을 막아내는 결계 또한 설치되어 있어 안전하죠."

 

마법사가 담당관이 건넨 서류를 찬찬히 읽고 있는 사이, 담당관은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헤로데 거주민 중 누군가가 모두 함께 나눠야 할 곡물을 숨기고 독점했군요. 아마 그 사람이 여러분을 교묘한 거짓말과 속임수로 속였겠죠. 마물을 막아내는 결계는… 아마 위기감을 조성하기 위해 누군가 의도적으로 해제한 모양입니다. 위기와 위험은 사람들을 급박하게 만들죠, 사고를 더디게 만듭니다. 그 것을 잘 이용하는 영리한 자가 있었군요. 안타깝게도 여러분은 속으신 겁니다. 그 사람이 저지른 행위는 명백한 범죄입니다. 거주민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고 용사 일행을 속인 범인은 반드시 처벌받도록 하겠습니다."

"뭐? 지금 협박하는거야? 사람 목숨을 가지고?"

"마법사님의 마법으로 인해 거짓말을 못하지 않습니까. 범죄자에게 처벌은 응당한 것입니다. 저는 그저 사실만을 말하는 겁니다."

 

담당관의 말에 마법사는 단숨에 탁자를 넘어 그의 멱살을 잡고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마법사!! 그만둬!"

용사가 급하게 그녀를 잡아채고서 뒤로 끌어당겼다. 주먹이 눈앞까지 다가와도 담당관은 조금도 미동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다만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있었다.

 

"미친 새끼! 저급한 놈! 역겨운 새끼!"

마법사가 그를 보며 욕지거리를 뱉었지만, 담당관은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다.

 

"용사님, 당신들의 저지른 행동이 잘 못되었음은 인지하셨습니까?"

"잘 알았습니다. 저희가 속았고, 멍청했군요. 그런데 아직 본론은 말씀하지 않으신 것 같은데요."

 

용사의 질문에 담당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조용히 남은 서류를 그러모아 하나의 뭉치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뭉치를 용사에게 건내었다.

"이것은 여러분이 저지른 그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벌어진 사건과 피해를 모두 정리한 것입니다."

"네? 이게 전부...?"

 

담당관이 건낸 종이 뭉치의 두께는 손가락 두 마디는 될 만큼 두꺼웠다. 그만한 두께의 서류가 전부 용사 일행이 벌인 그 사건으로 인해 벌어진 사건이란 말이었다.

"이건... 말이 안되는데요, 어떻게 이만큼..."

 

당황한 용사에게 담당관은 다시 손을 내밀었다. 서류를 달라는 듯한 손짓에 용사가 서류를 건네주자 그는 조용히 서류를 살피면서 몇 개의 덩어리로 나누었다.

"우선 이것부터 보시죠. 헤로데에서 2천 2백 명이 여러분을 따라 떠난 뒤, 그 곳에서 벌어진 12일간의 사건 목록입니다."

 

용사는 그에게서 서류를 받아 들고 찬찬히 내용을 살폈다.

"읽고 계신 사이에, 다른 두 분께도 간략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선 소수의 소형 아인종 마물, 이하 고블린 13마리가 새벽에 헤로데를 습격했습니다. 보호 결계가 해제되었고 그 것을  유지하던 인물 또한 사라진 관계로 마을을 지켜낼 수단은 마을에 남아있던 천 3백여 명의 거주민 중, 전투가 가능한 전력 350명이었습니다. 다만, 대부분이 넓게 흩어져 분포한 탓에 마을 외곽에 거주 중이던 26명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습격 온 고블린 12마리는 죽었고 한 마리는 도주했습니다."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서류를 보던 용사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게 전부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그럼 모두 풀어 이야기하자면 길어질 것 같으니 간략하게 이어서 말씀드리죠. 그 후, 도주한 고블린이 300여 마리의 고블린 세력을 이끌고 돌아와 마을 주민 200여 명을 살해했습니다. 사망한 대부분이 전투에 나섰던 건장한 청년과 중년들이었고 남은 거주민은 대부분이 중년 이상의 여인과 14세 미만의 아이들만 남았습니다. 뒤 이은 마물의 습격에 그들은 대부분 마을 밖으로 도망쳤으며, 그 들 대부분 행방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담담한 담당관의 말에 사제는 놀란 토끼 눈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맙소사, 말도 안 돼…"

"헤로데를 떠난 거주민 중 일부는 산적을 맞닥뜨렸고 유다이아 변경백의 병사가 구역을 순찰하던 중 산적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그 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이 여성이었으며 겁탈당한 흔적이 확인되었습니다. 피해자의 나이는 57세에서 12세로 다양하게 확인 되었습니다."

 

"닥쳐! 이 쓰레기 새끼야! 당신은 쓰레기야! 벌레만도 못한 새끼!"

마법사는 용사에게 가로 막혀 담당관을 죽일 듯이 버둥거리며 욕을 뱉었다.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가만히 있던 담당관은 용사가 그녀를 차분하게 진정시키자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외에 해당 사건에 얽힌 사건이 더 있지만 모두 설명하기엔 오랜 시간 여러분을 괴롭히는 게 될 것 같으니, 다른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이끌고 온 2천 2백여 명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 들은… 또 무슨 문제가 있길래 그러시나요?"

 

사제가 불안한 듯, 양손을 포개어 모으고 그를 향해 몸을 기울여 다가갔다. 그녀를 흘겨본 담당관이 말을 시작했다.

"그들은 계약으로 그곳에 거주권과 개간권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열심히 땅을 일구어 소출을 얻으면 그 모든 소출은 계약 기간동안 자신들의 것이 되죠. 모든 세금도 면제됩니다. 큰 혜택이 있는 만큼 조건이 걸려있죠. 말씀 드렸듯, 허가증을 소지하지 않은 외출, 여행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지금 그들이 헤로데를 떠난 이상 그들은 모두 범법자가 되었습니다."

"안돼요! 그럴 순 없어요! 모두 범법자라뇨! 그저 마을을 벗어나 이곳으로 온 것뿐인데요!"

 

사제는 울먹이는 표정으로 담당자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안돼요! 그 사람들은 굶주렸는걸요! 따뜻하고 안전한 잠자리, 배부를 만큼 풍족한 음식이 필요했던 것 뿐인데!"

 

사제의 말에 담당자는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가 탁자에 놓았던 서류를 집어들고 하나로 모아 정리했다.

"그래서 여러분은 12일간의 여정동안 2천 2백여 명의 대 인원을 이곳, 탈린 백작령으로 이끌고 오면서 따뜻하고 안전한 잠자리를 보장해 주었습니까? 배부를 만큼 풍족한 음식은요?"

 

여지껏 표정 변화가 조금도 없던 담당자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이곳 탈린 백작령은 헤로데처럼 변경 지방이 아닙니다. 마물로부터 안전하죠. 하지만 이곳에도 농작지는 없습니다. 이곳의 특산품은 마정석 광산에서 나오는 품질 좋은 마정석이죠. 대부분 식량과 식자재, 생활에 필요한 물품은 옆 지역과의 무역이나 타국과의 교역에 의존하죠."

 

점점 일그러지던 담당관의 표정은 이늑고 화를 억누르는 듯, 딱딱하게 굳었다.

"탈린 백작령 거주민은 3천 백 명입니다. 여러분이 이끌고 온 인원은 2천 2백명이죠. 이곳 거주민의 반이 넘습니다. 저희 중앙에서 계산한 바, 현재 탈린 백작령의 보유 식량으로 1인 하루 2식할 경우, 3일 버틸 수 있단 판단입니다."

"하지만…! 주변의 다른 영지에서 식량을 조달받는다면!"

"제가 이 곳에 오면서 이미 식량을 요청했습니다. 수레로 18대분의 식재를 지원받았고, 짚단과 지푸라기 따위도 6대분을 받았습니다. 놀랍게도 몇 일 정도 간신히 더 버티겠군요."

"상인들은요? 그 들이 식량을 가지고 온다면…!"

"그 것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리 빨리 오리란 기대는 않는게 좋습니다."

 

담당관의 말에 사제는 안절부절못하고 손만 꼼지락 거리고 있었다. 용사도 서류를 바닥에 내려놓고 우울한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 그 들을 담당관은 차갑게 쏘아보았다.

 

"먹을 것만 문제입니까? 운 좋은 이들은 마구간에서 잘 것이고 몇몇은 지붕 아래에 누워 새벽이슬은 피하겠죠. 운 나쁜 이 들은 차디찬 돌 바닥에서 잠들겠지만."

그의 말에 마법사는 차갑게 그를 쏘아보았지만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여러분은 좋은 사람들입니다. 용사님들은 정말 정의로운 분들이에요. 그래서 불의를 보고도 지나칠 수 없었을 테죠. 신의 부름을 받으셨고, 의를 행하며, 빛을 따라 걷고 계실 테죠."

담당관의 말에 용사 일행은 일제히 그를 쳐다보았다.

"신께서 여러분을 모은 목적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담당관의 질문에 용사는 마법사와 사제를 번갈아 보고, 잠깐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인류를 위기로 몰아넣는 마물의 왕을 무찌르고, 정의를 행하며,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용사님께선 욕심이 많으시군요."

"그렇습니다. 전 욕심이 많습니다. 모든 것을 해내고 싶습니다."

 

용사의 말에 담당관의 얼굴이 급격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니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겁니다. 무고한 사람이 몇이 죽고, 몇이 굶었으며, 몇이 고통받는지 여러분은 모를 겁니다. 알 턱이 없지!"

 

그리고 처음으로 담당관은 분노에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용사를 차갑게 쏘아보며 소리쳤다.

"하지만 난 알아! 나는 안다고! 지금까지 찾아낸 것만 25명이 마을을 떠나 아사했고 4명이 동사했다! 지독하게 겁탈당하고 목이 따여 널부러진 시체를 내가 직접 수습했고, 들개에게 뜯어먹혀 조각난 아기의 시체를 내가 그러모아 묻었다! 아이를 먹일 빵을 훔치다 잡혀 두들겨 맞아 죽은 어미의 주검은 내가 이야기 했나? 내가 지금까지 무슨 이야기를 했지? 그 것들을 기억은 하나?”

 

담당관은 소리를 버럭 지르고는 일어나 창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주먹으로 창문을 주먹으로 세게 쳐서 열었다. 창문이 열리며 여관 밖에 용사 일행을 구경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혹시나 용사 일행을 볼 수 있을까 기대에 찬 사람들의 얼굴이다.

 

사람들은 용사 일행이 아닌 담당관의 모습이 보이자 일제히 야유하며 그를 모욕하기 시작했다.

"역겨운 공무원 새끼!! 용사님의 여정을 방해하는 방해꾼!!"

"용사님의 걸림돌!! 죽어라!!"

"인류의 반역자!! 마물의 스파이!! "

"죽어라!! 용사님의 고혈을 빠는 모기!!"

 

그들을 차갑게 쏘아보던 담당관은 아무런 말 없이 창문을 벌컥 닫았다. 그리고 마법사와 용사를 쏘아보며 말했다.

"오직 내가 죽기만을 바라는 사람들을 위해 일 해본 적 있나? 그 들을 먹일 밀 한 톨을 구걸하기 위해 신발 밑창을 핥아 본 적 있나? 나를 죽이기 위해 모여든 군중 가운데서 발가 벗겨진 채 바닥에 머리를 찧으면서 목숨을 구걸해 본 적 있나? 응답 없는 신을 원망하고 구원을 울부짖다 절망한 적은 있나?"

 

담당관의 질문에 용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법사의 표정도 잔뜩 일그러져 있었으나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사제만이 조용하게 흐느끼고 있었다.

 

그들을 차갑게 쏘아보던 담당관은 숨을 크게 들이 마셨다가 천천히 내뱉으며 심호흡했다. 그리고 아까와 같은 무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담담하게 말했다.

"저 들은 범법을 저질렀습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범죄자가 되었단 말은 하지 마세요. 저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마을을 떠나는 것은 죄가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을 따라 나선 겁니다. 왜인 줄 아십니까?"

 

그의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 끝에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용사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빛이자 소금이니까. 자신의 앞에 손 내민 구원을 쫓은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저들은 당신이란 구원을 쫓았지만 벌을 받게 될테죠. 하지만 제가 막을 겁니다. 당신들의 말대로 굶주림은 죄가 될 수 없으니까." 

 

담당관의 말에 용사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사제가 그의 곁에 다가가 소매를 잡고서 애처롭게 매달렸다.

 

"용사님, 당신은 정의로운 사람입니다. 이 모든 일도 당신이 정의롭고 선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저는 당신을 비난했으나,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당신은 선한 사람이니까. 이 모든 어그러짐은 모두 우리가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이겠죠. 용사님은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입니다. 모든 이가 타락하고 더럽혀져도 당신만은 빛으로 존재할 테죠."

 

용사는 그의 말에 불편한 듯,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그 어떤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담당관은 말을 이었다.

 

"마물의 왕을 죽여 주십시오. 제발… 제 소원이고, 모든 사람이 용사님께 바라는 소원입니다. 부디 모든 불의에 눈을 돌리고, 이런 허튼짓 하지 말고 마물의 왕을 죽여 주십시오."

"담당관님… 모든 게 제 잘못입니다. 제가 모든 걸 바로 잡도록 하겠습니다."

 

용사가 담당관에게 다가와 그의 손을 포개어 잡으면서 말했다.

"제 모든 과오를 바로 잡겠습니다. 제 어리석음으로 벌어진 모든 일을 제가 풀겠습니다."

 

용사의 진심 어린 말에 담당관의 표정은 싸늘하게 식어갔다. 그의 반응에 용사는 짐짓 당황했지만,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 담당관은 가만히 그를 쏘아보다가 그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제 말을 전혀 듣지 않았군요."

"예? 무슨…"

"이런 허튼짓 말고 가서!! 당장 가서 마물의 왕을 죽이란 말야. 당신이 할 일은 그것 뿐이야. 가서 그 새끼를 죽여! 당신의 그 허튼 짓거리에 죽어가는 사람이 수 백이고 수 천이야!! 낭비되는 세금이 수 백이고 수 천이라고!! 그냥!!! 가서!!! 그 새끼를!!! 죽여!!!"

 

얼굴이 벌겋게 익을 정도로 흥분한 담당관은 쓰러지듯이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을 꿇고는 용사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제발… 제발 그냥 가서 그 빌어먹을 놈을 죽여… 제발… 제발… 그 것 말곤 바랄 게 없으니까… 이젠... 너무 힘들어..."

그의 눈에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애처롭게 손을 바들바들 떨며 그는 쥐어짜듯 말했다.

"마물의 왕을 죽이고 제발… 제발… 당신들도 죽었으면 좋겠어…!"

 

다음 날, 보유 식량이 부족한 탈린 백작령에서 천 명가량의 인원이 인근 영지로 이동했다. 다른 영지에서 연이어 식자재와 생활용품이 지원 왔다. 여전히 많은 인원을 수용할 시설도 자재도 부족했지만, 이곳에 남은 여러 사람이 힘을 모아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다.

 

이틀 째 되는 날, 용사 일행은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와 배웅을 받으며 여행길을 떠났다. 같은 시각, 담당관은 아무도 모르게 두꺼운 로브를 뒤집어쓴 채로 마을 뒷길을 통해 사라졌다.

 

2개월 뒤, 마물의 왕이 토벌되었다는 소문이 북쪽 마물의 땅에서부터 입과 입을 통해 퍼져 나갔다. 사람들은 용사 일행의 무위를 찬양했고, 그 들에게 구원받은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그 들을 칭송하는 노래를 만들고 장식품을 만들며 방방곡곡에 퍼뜨렸다.

 

마물의 왕이 토벌되고 2개월 뒤, 수도까지 용사 일행의 놀라운 업적과 그 들을 칭송하는 노래가 퍼졌다. 욕심 많고 권력에 찌든 귀족들은 불안해졌다. 하지만 용사 일행의 찬란한 업적을 찬양하는 노래는 날이 갈수록 부풀어 갔다.

 

마물의 왕이 죽은 지 4개월이 되고 용사 일행이 수도로 돌아왔다. 그들은 찬란하게 빛났고 많은 사람이 축복의 말을 하며 찬양했다. 왕이 그들의 업적을 직접 치하했으며, 이날은 성축일로 정해졌다.

 

마물의 왕이 죽고 나서 7달이 지나고 일부 사람들로부터 용사 일행은 신으로 추앙받기 시작했다. 일부 지방에선 그들의 모습을 본뜬 신상을 만들었고 매주, 특정한 날에 맞춰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마물의 왕이 죽은지 9개월, 대륙의 4할 가까이 퍼진 용사 신앙은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용사 일행이 그들의 신앙을 억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면 할수록, 그의 눈부신 광휘에 눈이 먼 사람들이 용사 신앙에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용사가 마물의 왕을 죽이고 10개월 되던 때, 중앙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용사 신앙은 신성 모독인가 아닌가 판단하기 위해 동방 박사와 연금술사, 소서러와 마녀, 드루이드, 신비주의자가 이 논의를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3일 밤낮을 논의하였고 용사 신앙은 신성 모독이란 판결이 내려졌다.

 

수 많은 사람들의 반대 속에 용사 일행이 체포되었다. 그를 재판하기 위해 수 많은 재판관과 학자들이 모였고 그 재판을 보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용사는 왕에게 자비를 구하며 어디에도 기울어지지 않은 천칭과 어느 편에도 서지 않은, 바르게 선 재판관에게 심문받기를 바랐다. 왕은 용사의 업적과 그의 명성을 보아 이를 허가 했으나, 조건을 충족해야만 그를 심문 할 수 있노라 명했다.

 

용사를 신으로 추앙하지 않으며, 신실하게 신을 섬기는 자.

오로지 국가와 인류에 헌신하며, 그 충성의 대가를 받는 자.

용사 탄생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행적과 발자취를 아는 자.

 

모든 조건에 충족하는 자, 용사 일행의 담당관이었던 남자가 재판장에 들어섰다.

 

그는 용사에게 질문했다.

"그대를 신으로 추앙하는 이들에게 답하라. 진리란 무엇인가."

담당관의 질문에 용사는 재판을 보는 많은 사람을 둘러보며 무어라 대답했다.

 

수 많은 교리 문답과 신의 존재, 죽음과 삶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죄를 이야기하며, 신성을 입에 담았다. 해가 뜨고 졌으며, 달이 뜨고 질 때야 그 들의 문답은 끝이 났다.

 

오랜 문답 끝에 담당관이었던 남자, 재판관은 그 들을 보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 이 사람이다. 이 사람을 바로 보라. 이 사람에게서 무엇이 보이는가."

 

7일 후, 용사 일행의 담당관이었고, 재판관이었던 남자가 피고인 석에 섰다.

그는 과연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올바르게 그를 심문하였는가.

 

그의 재판을 보는 사람은 없었고, 재판관은 주머니의 금화를 세기에 바빴다. 그의 판결이 내려지기까지 하품 한 번 할 시간이 걸렸다.

 

남자는 모든 재산을 몰수 당하고 왕국에서 추방되었다. 그가 짚과 헝겊을 엮어 만든 신을 신고 황야를 떠돈 지 6시간 되던 때, 젊고 혈기 왕성한 청년 무리가 그에게 돌팔매질하며 비난했다. 도망쳤으나 도망치지 못했고 막았으나 막지 못했다.

 

그곳에서 남자, 본티오 빌라도가 죽었다.


누군가가 말했다. 

용사는 정의로우며, 뭇 사람을 공경하며 돌보았고 그 보다 많은 사람을 구원하여 빛으로 인도하였다.

천국의 신의 곁에 그의 자리가 있을 것이라 칭해졌다.


다른 이는 이렇게 말했다.

용사는 정의로우나, 뭇 사람을 돌보지 못 하였고 그 보다 많은 사람을 구원하지 못 하였고 그 빛으로 눈 멀게 하였다.

이는 용사는 정의로우나, 저 들이 그렇지 못함 때문이라.

이 들을 죽여 저 들의 죄를 대속하라. 



금요일, 뜨거웠던 태양의 열기가 식어가는 오후 3시.

너른 뜰 어느 곳, 볕이 잘 드는 야트막한 언덕에 세 개의 십자가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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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에 친척 따라 교회 가서 예배랑 설교 듣다가 머리 속에 떠오른거 정리해서 적었습니다.


길어도 많이 봐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