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는 아직 방안에 틀어박혀 있는가..."


궁사의 물음에 사제는 끄덕이며 문 앞에서 기도하던 몸을 일으켰다. 그의 초췌한 몰골이 상황을 말해주고 있었다.

궁사는 사제를 지나쳐 문 앞으로 걸어갔다.

갑작스레 나타난 궁사의 행동에 사제는 힘없이 막아섰다.


"그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 했습니다."

"우리는 아무도가 아니니까 상관없다는 말이지."


옷자락을 붙잡는 사제를 뒤로하고 궁사는 그대로 그를 지나쳐 문을 부수려는 듯 두드렸다.


"궁사다. 들어가겠다."


굳게 닫힌 문을 천천히 열어재낀 곳에는 쾌쾌한 공기와 종이 넘기는 소리, 묵묵히 앉은 자리에서 얼굴을 처박고 무언가를 열중해서 읽고 있는 사람만이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의자에 앉은 사람은 미동 없이 계속 몰두해있다. 그 모습에 사제는 고개를 떨구었다.


"내일 나는 고향땅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기사는 이미 가 있다더군."


운을 뗀 궁사의 첫 말에 사제는 놀란 기색이었지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제국 놈들이 기어코 국경을 넘었다. 이 짓거리는 그만하고 나도 하루빨리 가야겠다. 내가 군수를 내려놓고 마족령에 간 사이, 제국은 우리 땅을 넘어올 간이나 보고 있었다는 거지. 본업으로 돌아가야겠다. 용사 자네 마음은 이해 가지만 어찌되었든 할 일은 해야지."


궁사는 꼼짝않는 용사를 잠시 응시하고는 고개부터 천천히 몸을 돌렸다.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국가와 국민, 가족과 친구, 동료와 나 자신을 의심해본 적이 없습니다."


나지막한 용사의 말에는 또렷함이 보였지만 마족령에서 함께 싸울 적의 기상은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입을 연 용사의 모습에 사제는 그제야 안심이라도 한 듯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 한쪽 벽에 기대어 웅크렸다.

궁사는 조용히 미간을 쭈그러트리며 눈을 감았다.


"그런데 이것 좀 보십시요. 이 수많은 문서와 전쟁 간에 현자가 기록한 글들, 부서진 그녀의 환원석에 남겨진 그때의 기록까지... 무엇하나 이제는 의심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평생을 정의를 부르짖으며 평화를 위해 싸운 전 이제 무얼 위해 싸워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나와 함께..."


궁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용사는 손으로 책상을 내려치고 박차 일어나 소리쳤다.


"황금의 눈을 가졌다는 이유로 고아원에서 태어나 끌려가듯 도착한 왕성에서, 누구 하나 의지할 사람 없이 무리한 기대 속에 단순히 정해진 운명만을 기다리며 의미 없는 정의를 듣고 자란 저는..."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뒤돌아선 용사의 얼굴에는 실핏줄이 터져 피눈물이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황금빛 눈이 반짝이던 그의 눈가엔 빛없는 공허함과 피로 얼룩진 자국이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으며 고뇌로 쥐어뜯긴 머리는 흉하게 뻗쳐있었다.


"이제는 그녀조차 없는데 왜 그대와 일어서 제국을 향해, 그것도 이번엔 같은 인간과 싸워야 하는지도 모르겠단 말입니다."






"...이게 용사가 떠난 현자의 방에 있던 것들입니다."

"자네 말고는 자네 이전이나 이후에 출입한 사람이 없는 건 확실하고?"

"예, 예...! 용사님들의 방 관리는 저를 필두로 매일 아침 8시경, 저 혼자 용사님들을 뵙고 시작하니 없을겁니다..."


앉아 있는 몇 사람들 앞에 서 있던 시녀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입술을 떨며 말을 이어갔다.


"열쇠도 제가 관리하니 분명 할 겁니다..."

"용사가 돌아왔었다는 보고는 왜 진작에 올리지 않았지?"

"그게... 다들 오랜 여행에 지쳐 보이셔서 서둘러 방을 준비해드리고, 용사님께서 일주일 정도 아무도 들이지 말라하여...  2주가 지나도록 아무런 기별이 없으셔서 살피러 갔더니... 저는 맹세코 교두보의 관문에서 확인하고 보고하였을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후... 자네는 이만 들어가 봐도 좋네. 입단속은 철저히 하고. 용사에 관련된 말은 무조건 모른다고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시녀가 도망치듯 서둘러 나가자 한 사람이 책상 위에 놓인 수정구에 손을 올렸다 .


"방금 나간 시녀에게 사람을 붙여라. 용사와 관련된 질문에 모른다 외에 말을 하면 처리하라."


방금 전 시녀에게 질문하던 사람이 입을 열었다.


"전쟁이 끝나고 갑자기 사라졌나 했더니 돌아와서는 다시 자취를 감췄다? 그래서... 학장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시녀를 보던 가운데 이마를 짚고 물끄러미 허공을 바라보던 사람이 질문한 사람을 바라봤다.


"저한테 무어라 한들 해결책이 뚝딱 나오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이번 일은 문서고를 지키던 기사들에 가장 큰 책임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 기사단에 잘못이 있다는 거요? 그러면 성국에서 나온 이 문서들은 뭡니까. 성술과 마술로 대륙에서 보안하면 제일가는 곳조차 용사가 무리 없이 들어갔다는 것 아닙니까?"

"용사파티에는 차대 교황 후보인 사제도 있었으니 어쩔 수 없다는 겁니다!"

"사제? 사제라 함은 우리도 용사와 남방 변경백 궁사가 있었소. 그런 식으로 걸고넘어지면 이쪽도 문서고에 들어가는 건 별일도 아니라는..."


말다툼이 격해지는 분위기에 국왕은 그만하면 됐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그만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궁사가 제출하고 간 환원석에 남은 기록이나 확인합시다. 그걸 위해 이렇게 넓은 방을 준비했으니."


학장이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나 환원석을 들어 마력을 흘려 넣으며 주문을 외자 결정에서 일렁이던 붉은빛이 주변에 퍼지며 용사파티의 형태를 띠었다.

용사는 뜯겨나간 옆구리에서 피를 쏟아내는 현자를 안고 거구의 마족 앞에 쓰러져있다.

마족 역시 전투로 인한 상처가 깊은지 비틀대는 몸을 이끌고 다른 시체를 넘어 왕좌에 반쯤 눕듯 쓰러졌다.


"보아라! 용사여... 참으로 부질없지 않은가? 이렇게 죽여가며 싸운 끝에 자네에게 남은 건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일곱 마왕 중 나 하나의 목?"


마족은 왕좌 옆에 고꾸라진 반쯤 불탄 시체를 외팔로 가리켰다.


"저기 현자에게 불타버린 시체는 내 보좌였다."


다 죽어가는 상황에 입을 열기 시작한 마족의 생각을 용사는 알 수 없었다.

마왕의 성에 들이닥쳐 정의라는 말로 포문을 열며 마왕을 공격한 용사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는 마족령에서 있었던 전쟁통에 부모를 잃고 고아원에서 내가 데려 온 아이였다. 나다니지 않고 공부만 한 녀석은 마술과 산술, 경제 등에 밝았던 녀석은 금방 임관되어 시간이 지나 내 옆에 서게 되었다."


마왕은 황금빛의 또렷한 눈으로 용사를 바라보았다.


"그래, 용사라는 자는 여기까지 오면서 무얼 보았나?"

"저는 평화로운 마을을 보았습니다."


마왕의 물음에 입을 연 건 용사가 아닌 그의 품에 뉘어있는 현자였다.


"공원에서 행복해 보이는 가족들도 보았습니다. 즐거운 듯 뛰어다니는 아이들도 보았습니다. 평화를 위해 노력한 마왕을 기리는 비석도 보았습니다. 그를 찬송하는 음유시인도, 집중해 귀 기울이는 청중들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왜 자네들은 전쟁을 일으켜서 짙은 마력 탓에 인간 몸으로는 살기도 힘든 이 땅까지 기어들어 와 네놈의 정의를 빌미로 살육을 벌이느냐는 말이야."

"그게... 이제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기억이 안 나는 건지... 처음부터 정의란 무엇인지 몰랐던 건지... 정의를 위한다는 건 무엇일까요?"


그녀의 물음에 왕좌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용사가 바라본 곳에는 눈을 감은 마왕과 그가 가리키던 잿더미가 된 보좌만이 있었다.

현자는 힘이 빠진 듯 용사의 손에서 천천히 늘어지며 웃었다.


"정의를 위해... 살아주세요."


그 말과 동시에 현자가 숨을 멈추자 용사의 눈에서 반짝이던 황금빛이 사라졌다.

환원석에서 비치는 인물들의 모습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후로는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아마 이때 궁사는 의식을 잃은 걸로 보입니다."


학장은 마술을 이용해 손을 휘저어 환원석을 가루 내고 문서들은 잿더미로 만들어버린다.


"보아하니 몇백 년도 전에 기록된 것처럼 마족들은 피를 바라지도, 인간을 죽이는 걸 즐기는 것도 아닌 평범한 지성체에 변방의 마왕은 평화를 바라고 있다는 게 사실이었나 봅니다."

"대충 눈치는 채고들 있었잖습니까. 실제로 맞닥뜨린 건 오래전 기록들밖에 없어서 그렇지."

"이걸로 마족들의 땅과 발에 챌 만큼 있다는 마석은 둘째치고 새로 오를 마왕도 평화를 바라기만 고대하게 생겼군."

"제국 놈들이 쳐들어오는 바람에 기껏 갈아놓은 땅은 밟아보지도 못하는 게 말이나 되는가? 용사는 어딜갔느냔 말이야?"


원탁에서의 말다툼이 다시 한번 격해지자 국왕은 자신들이 벌인 상황에 눈을 질끈 감았다.






"기사단장님, 적습! 적습입니다...! 이미 상급 기사들이 병사를 이끌고 대치 중이라 합니다!"


큰 나팔 소리와 함께 한 병사가 대형 막사에 허겁지겁 뛰어들며 말했다.

그 중앙에는 원탁의 말다툼 사이에 끼어 있던 인물이 반쯤 취한 채 앉아있었다.


"나도 그쯤은 보면 안다! 개같은... 이번 마왕은 더럽게 호전적이구만... 뭔놈의 본인이 직접 전장에 나서서 남하하고 지랄이야!"


남자는 손에 든 술병을 바닥에 패대기치며 일어나 의자 뒤편의 검을 쥐고 병사를 쳐다봤다. 입구의 병사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굳은 표정으로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사이 바깥은 검과 장병기가 부딪히는 소리와 전투의 함성만이 가득했다.


"전 상급 기사들은 본인의 위치로 집결시키고 방위를 굳혀라. 이대로 계속 지나가게 둘 수는 없다!"


기사단장의 호령에 병사는 발을 구르며 재빨리 뛰쳐나간다.


"전대 변방의 마왕이 다른 마왕의 반대에도 평화를 고수하고 있었다는 소문도 이미 다 퍼져버렸다더니, 마왕이라는 것들은 무력으로 그 자리에 선다고 들었는데 이번 작자는 어디서 튀어나왔길래 며칠 새에 자리를 꿰찮게야!"


구시렁대며 남자는 막사의 뒤쪽으로 빠져나와 묶어두었던 말에 올라탔다.


"빨리 여길 벗어나서 은신처에 숨겨둔 귀중품들을 모조리 들고 성국으로 달아나야겠군. 재수가 없으려니 세 살 난 꼬맹이가 봐도 이번 전쟁은 틀렸다."


남자가 고삐를 쥐고 채찍을 튕기어 출발하려는 순간 불현듯 주변을 귀 기울인다. 조금 전의 시끄러운 소리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말의 거친 숨소리와 채찍을 올리며 갑옷에서 난 쇳소리만이 주위를 매웠다.

무거운 발걸음과 함께 천막이 걷어지는 소리가 들려오자 기사단장은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그가 본 곳에는 피칠갑이 된 갑옷을 입은 남자가 투구 속의 황금빛 눈을 번뜩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 너는 설마..."


붉은빛이 일렁이는 목걸이 위로 초연한 말투로 남자는 중얼대며 단장에게 다가갔다.


"정의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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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차에 탑승합니다. 막판에 가서는 이게 정의가 맞나 싶어서 개최조건 읽어보고 다시 글 읽고 반복하다 그냥 찍 싸버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