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122 전사의 천막 / 밤>

 

 

“야, 바지 벗어.”

 

 

전사는 그의 개인 천막 안으로 들이닥친 

앙증맞은 마법사의 뻔뻔한 요구에 

놀라움이나 수치심 대신 의문만을 느꼈다.

 

 

“오늘도 할 건가?”

 

 

전사가 책을 내려놓고 멍청하게 묻자

마법사의 얼굴이 구겨졌다.

 

 

“왜? 싫어? 짜증 나?

여정이 너~무 험난해서 지쳤어?

우리 하플링 짐꾼 물건도 대신 들어주면서 

온갖 허세란 허세는 다 떨더니 

너무 피곤해서 안아 달라는 여자 상대로도 안 서?”

 

 

마법사의 싸구려 도발에 

전사는 책을 완전히 덮었다.

 

 

“그런 것보다는 마왕성을 목전에 둔 장소에서까지

성교를 원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마법사가 콧방귀를 뀌더니

전사가 할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듯 

자기 옷을 훌렁훌렁 벗기 시작했다.

곱고 인형 같은 여체가 드러났다.

 

 

“바보야, 마왕성이 코 앞이니까 해야 하는 거야.

푹 자고 일어나야 할 것 아니야!

용사도 자러 가기 전에 말했잖아.

긴 여정의 마지막 밤이니까 

후회가 없도록 만전을 기하라고.”

 

 

전사는 책을 아예 천막의 구석으로 치운 후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그래서 마지막 밤을 성교로 채우고 싶다?”

 

 

마법사가 쏘아붙였다.

 

 

“거 말 참 많네. 왜, 아니꼬와?

원래 숙면의 필수 요소 중엔 

규칙적이고 적절한 운동도 포함되어 있다고.”

 

 

제아무리 눈치가 없기로 정평이 난 전사라도

여기서 마법사의 전적을 읊는 것이 

영 현명하지 못하다는 생각은 떠올릴 수 있었다.

 

 

“그렇지만 너는 적절한 운동 수준을 넘어

매일 밤마다 지쳐 기절하듯 잠들지 않았나?

지난 수 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물론 전사는 현명하지 못한 선택을 내리는 데에선

몸을 사리는 남자가 아니었다.

전사의 발언에 마법사의 얼굴은 

짜증과 부끄러움이 섞인 홍당무로 변했다.

전사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모습이 

못마땅스러운 마법사가 소리를 빽 질렀다.

 

“시끄러워! 중요한 건 루틴이라고! 루틴!

몇 개월 동안이나 매일 밤 하던 걸

갑자기 멈추면 오히려 잠이 안 온단 말이야!

그러니까 잔말 말고 자지나 세워!

 

내일 내가 마법 차단 제때 못 써서

마왕이 마법 쏘기 시작하면

그거 전부 처맞아야 하는 건 너다?”

 

 

전사는 이런 추잡한 말과 억지 주장을 

목소리 높여 말하는 마법사에게 감탄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다른 일행이 

그녀의 말을 들을 위험은 없었다는 점이었다.

용의주도한 그녀는 전사의 천막에 들어오기 전 

주변에 침묵 마법을 설치해 두었을 테니까.

그녀가 언제나처럼 비명에 가까운 교성을 질러도

천막 밖으로는 소리가 새나가지 않도록 말이다.

 

 

그러므로 전사의 감탄을 자아낸 것은

마법사가 부끄러움도 없이 목소리를 높였다는 사실보다는,

나름 왕국에서 명망 있는 가문의 여식인 그녀가,

한 때 용사 일행을 들들 볶으며 

귀족의 예의범절을 가르치던 그녀가,

그의 눈앞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자지니 뭐니 하는 말을 

당당하게 입에 담고 있는 지금 이 상황 자체였다.

 

전사는 그의 코앞까지 다가와 

나선 모양으로 말린 머리카락을 치렁거리며

계속해서 으르렁대는 나신의 마법사를 상대로 

(의식적으로 그녀의 눈만 보려 노력하면서)

차분히 반박했다.

 

“나는 애초에 ‘처맞으려고’ 따라온 것 아닌가?

역사가 증명한 바에 따르면,

오로지 용사의 성검만이 역대 마왕에게 피해를 끼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마왕성에 진입한 후부터 

나는 그의 보호를 최우선과제로 삼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전사는 근본부터가 아군이 안심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막아주는 역할이다.”

 

 

전사의 말에 마법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제 분을 못 이기는 것처럼 땅을 몇 번 밟더니

마치 무용수와도 같은 우아한 동작으로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그르 돌면서 살린 원심력으로

전사의 이마를 걷어찼다.

 

 

빡!

 

 

여러모로 우락부락한 전사에 비하면 

마법사는 하염없이 가볍고 조그마한 여인이었다.

따라서 소리와는 달리 전사는 아프기는커녕 

별다른 충격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전사는 순순히 뒤로 넘어가 주었다.

놀릴 만큼 놀렸으니 맞춰줄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벌렁 드러누운 그의 다리 방향에서 마법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잘나셨으면 

아군이 내일 안심하고 마왕 공격할 수 있게

숙면하는 것도 좀 도와주시지그래?”

 

 

다음 순간 보이지 않는 손이 그의 옷을 벗겼다.

전사는 갑작스러운 냉기에 살짝 몸을 꿈틀했지만

특별히 저항은 하지 않았다.

곧 완전히 발가벗겨진 그의 시야 아래쪽에서 

마법사의 얼굴이 들이밀어졌다.

전사 위에 드러눕다시피 한 마법사가

우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머나, 이게 뭐람?

뻣뻣한 목석처럼 굴던 주제에 

고간도 목석처럼 뻣뻣해져 있잖아?”

 

무어라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있었지만

전사는 그저 콧김만을 뿜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마법사의 손이 그의 목석 같은 물건에 닿아 있었다.

 

남성기를 위아래로 문지르는 마법사의 손은

부드럽고, 따스하고, 섬세했다.

가장 낮은 뿌리에서부터 제일 높은 위쪽까지 쓰다듬으며

전사의 쾌감이 극대화되도록 

세밀한 강약조절로 손을 놀렸다.

전사가 기껏 입을 열어도 탄성만이 흘러나왔다.

그의 말문을 완전히 막은 마법사가 신이 난 듯 한껏 깐족거렸다.

 

“하여튼~ 센 척은 알아줘야 해.

첫날만 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귀족 아가씨의 기술 따위로는 

영영 안 갈 거라고 지껄이더니 말이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높은 귀족 가문의 영애로 태어나 금이야 옥이야 다뤄지면서

마법적 재능을 발휘해 왕국의 초신성 취급을 받던 시절의 마법사는,

용사 일행과 함께 왕국의 수도를 떠났던 당일까지만 해도

마법을 제외하곤 제대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오죽하면 남자의 몸조차 제대로 본 적이 없던 바람에

전사가 목욕 후 제대로 옷을 갖춰 입지 않는 것만으로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상스럽다고 면박을 주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 시절도 있었다.

 

계기는 단순했다.

마법사로서 미지를 향한 학구심을 추구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궤변.

그러나 마법사는 전사의 몸을 관찰하기 시작한 이래

한번 냄새도 맡아보겠다, 어디 한번 만져도 보겠다,

직접 맛도 보겠다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폭주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이제 와선 누가 봐도 훌륭한 치녀로 성장했다.

 

심지어 언젠가부터는 성교만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매번 자기만 먼저 뻗어 잠드는 것이 짜증 난다며

매일 밤 교접하기 전에 손만 써서 

전사를 절정에 이르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까지 했다.

 

직업 때문에 생긴 기본적인 체력의 차이 정도는 

그냥 넘어가 달라는 전사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마법사의 호승심은 사그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매일 밤 본격적으로 이어지기 전의 습관으로 굳어져 버렸다.

 

마법사의 탐구심과 실험정신이 훌륭한 결실을 본 오늘날,

전사는 그녀가 성기를 쓰다듬는 것만으로도 

반사적으로 사정감이 몰려오는 것을 억눌러야 했다.

 

마법사는 그녀의 손길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전사를 보면서 이죽댔다.

 

 

“뭐~? 마왕의 마법을 대신 다 맞아 주시겠다고~?

네가~? 이렇게나 마나 농도도 짙은 곳에서~?

자기보다 머리 두 개는 작은 여자애 손에도

이렇게 껌뻑 죽는 주제에~?”

 

솔직히 고백하자면,

전사는 이제 그녀의 의기양양한 얼굴을 보거나 

특유의 도발적인 언동을 듣는 것만으로도 

성욕이 샘솟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전사는 가파르게 숨을 들이켜며

성기를 속절없이 부풀렸다.

긴 여정 동안 밤마다 학구열을 불태웠던 마법사는

그 의미를 즉각 깨달을 수 있었다.

마법사의 입가에 능글맞은 웃음이 떠올랐다.

 

 

“싸버려.

귀족 아가씨 손으로 받는 대딸로 가버리라고.

이 변태 자식아.”

 

 

그 나지막한 속삭임과 함께 마법사의 몸이 전사에게 밀착했다.

그녀의 말랑말랑한 전신이 그의 단단한 육체 위에 포개졌다.

그녀의 천박한 손이 그의 성기를 빠르게 비볐다.

마법사의 눈이 살며시 감기고

그녀의 요망한 입술이 그의 것을 덮었다.

 

전사는 일말의 저항도 없이 곧바로 사정했다.

 

뜨거운 정액이 천막 안을 비상했다.

맥동하며 격렬하게 뿜어져 나온 백탁액과 함께

전사 목에서 새어 나온 신음소리는 

마법사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짧았던 전희만큼이나 빠르게 지나간 절정의 여운에 

전사가 빠져 있는 동안에도

마법사는 입맞춤을 멈추지 않았다.

 

가끔은 마치 소동물이 고개를 내밀듯 

전사의 입술 사이로 빼꼼 혀를 내밀었다가 도로 집어넣었고,

그것이 재미있는지 작게 웃었다가 다시 혀를 살짝 내밀었다.

한편, 이랬다 저랬다 하며 장난스럽게 이어진 입맞춤과는 달리

그녀의 손은 계속해서 쉬지 않고 움직였다.

과한 자극에 전사가 아파하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도

그의 물건을 느리면서도 꾸준히 짜내어

자지 안에 남아 있던 정액을 뽑아냈다.

 

잠시 후, 전사의 정액을 충분히 빼냈다고 판단했는지

마법사가 손을 멈추고 그에게서 입을 뗐다.

그녀는 발갛게 상기한 얼굴로 

헐떡이는 전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렇게나 좋았어?”

 

 

전사는 떨떠름하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는 배시시 웃더니 그제야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전사의 시야 아래로 사라졌다.

 

전사가 머리를 들어 마법사 쪽을 향하자 

그녀가 그의 몸을 혀로 핥는 모습이 보였다.

폭발적인 사정에 잠시 위로 솟았다가 도로 떨어져

전사 몸 위로 흩뿌려진 새하얀 정액을

마법사는 한 방울도 빠트리지 않겠다는 듯 

열심히 손가락을 움직여 긁어모은 후 입안에 집어넣었다.

전사는 이리도 추잡한 청소를 하면서도 

황홀한 표정을 짓는 귀족 아가씨를 보며 

도대체 누가 누구를 변태라고 부르는 건가 싶었다가,

열중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귀여움을 느끼고 

살며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법사는 그렇게 한참이나 전사를 몸을 핥는 일에 집중하다 

더는 정액이 보이지 않자 아쉬운 듯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커다란 손에 잠시 코를 박고

기분 좋다는 듯 킁킁거리며 전사의 향을 맡다가,

정신이 퍼뜩 든 것처럼 눈을 떴다.

 

두 남녀의 눈이 딱하고 마주쳤다.

 

마법사가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거 참 많이도 쌌네!

나 아니었으면 무조건 다른 애들한테 들켰을걸!

이렇게나 맛없고, 냄새나고, 끈적하고, 진한 걸

억지로라도 먹어주는 내가 있어서 망정이지!”

 

 

그러고 보니 초반에는 그런 핑계를 댔던 것 같다.

온천이 붙어있는 여관에 묵는 와중에도 

굳이 정액을 핥아 먹는 이유로는 말이 안 됐지만.

 

마법사는 슬쩍 전사의 안색을 살폈다가

그녀의 말을 믿는 대신 그녀의 성벽을 의심하는 것 같은 

전사의 얼굴을 보고 도로 눈을 피했다.

 

그녀는 마치 화제를 돌리려는 것처럼 헛기침한 뒤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전사 위에 올라탔다.

그의 성기에 그녀의 음부가 닿았다.

마법사는 승마 중인 영애처럼 자연스럽고 품위 있게

엉덩이를 들썩이며 성기끼리 비비기 시작했다.

마치 물을 뿌리자 살아나는 난초처럼

그녀의 애액에 닿자 전사의 육봉에 생기가 돌아왔다.

마법사는 그제야 다시 놀리듯 말을 꺼냈다.

 

“나 원 참, 대체 뭘 먹고 다니길래 이렇게 정력이 흘러넘치는 거야?

자기가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 상대로 

이렇게나 발딱발딱 세우고 싸지르는 꼴을 보니

나중에 왕국에 돌아가서 귀족작위까지 받으면

아예 난봉꾼이 되는 것 아니야?”

 

 

그 순간

여태까지 태연하던 전사가 눈썹을 꿈틀했다.

 

 

“……무슨 말인가?”

 

 

마법사는 아직도 시선을 피하고 있었기에

전사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전부 다 잘 끝나고 왕국으로 귀환하고 나면 

너도 용사 일행으로서 귀족 작위 정도는 받을 것 아니야.

그러고 나면 검투사로 살던 시절이랑은 달리 

든든한 배경이 생기니까, 내키는 대로 

여자애들을 마음껏 건드릴 수도 있겠다는-”

 

“아니다.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했느냐는 거다.”

 

 

전사가 마법사의 손목을 잡았다.

그제야 고개를 돌린 마법사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전사를 마주 보게 되었다.

마법사는 뒤늦게 놀라 허리를 멈췄다.

 

 

“아, 아니, 갑자기 왜 그래? 그냥 장난이야. 장난.

나도 안다고, 네가 그런 무뢰한이 아니라는 것쯤은.

너, 넌, 나름 신사적이기도 하고,

생긴 거랑은 다르게 엄청 배려심도 있는 데다가 

되게 착한 것도 있고-”

 

 

마법사가 횡설수설하기 시작하자 

전사가 답답한 듯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것 말고 말이다.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애 상대로’라고 했나?”

 

 

마법사가 움찔했다.

 

 

“어? 응? 맞잖아? 너 나 싫어하잖아?

나랑 안 맞는다고 하지 않았어?”

 

 

전사의 위협적인 인상이 한층 더 험악해졌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대체 누구에게서 그런 망발을 들었는가?”

 

“어?”

 

“?”

 

 

 

 

<S#1 선술집 / 낮> - 마법사의 경우

 

 

“참으로 경사스러운 날이네요.

반가워요. 앞으로 잘 지내봐요.”

 

살포시 웃으며 건넨 마법사의 손을

마물사냥꾼이 고풍스럽게 맞잡았다.

다른 용사 일행에게선 절대로 기대할 수 없을

귀족적인 대응에 감탄하는 그녀를 향해

엘프가 간드러진 목소리로 답했다.

 

 

“이쪽이야말로 영광이야.

설마하니 왕국의 초신성으로 명성이 자자한 아가씨를

직접 모실 기회가 생길 줄은 몰랐는걸?”

 

“어머나, 과찬이세요.”

 

 

마물사냥꾼이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호감 가는 언행에 엘프 특유의 미모까지 더해지자 

마치 마물사냥꾼에게서 자체적으로 빛이 나는 것 같은 

착시가 느껴질 지경이었다.

엘프가 너스레를 떨었다.

 

 

“아니, 정말이야. 소문이 벌써 이 구석진 곳까지 쫙 퍼졌다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부패한 왕국의 관리를 때려잡고,

억울한 누명을 쓴 이들을 구제하고,

마물 무리에 습격당하던 마을을 지켰다면서?

그 모든 게 왕국 내 최고의 재능을 갖췄다는 

마법사 없이 가능할 리가 없잖아?”

 

“어머나, 그것참-“

 

“그것참 말도 안 된다.

얘는 무섭다면서 구석에서 벌벌 떨기만 하으윽!”

 

 

마법사가 쾅 소리 나게 발을 짓밟는 바람에

전사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마물사냥꾼은 슬쩍 둘의 안색을 살폈다가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말을 돌렸다.

 

 

“뭐, 여태까지는 여러모로 고생이 많았겠지만

앞으로의 여정은 내게 맡겨줘.

마왕령은 마나가 짙어서 일반인들은 못 다니는 곳이지만,

내게는 앞마당과 다를 바 없는 곳이니까.”

 

“호호호, 역시 마물사냥꾼이라는 

칭호에 걸맞은 호언장담이시네요.

마왕령의 흉포한 마물들을 전문적으로 

사냥하시는 분답게 실로 듬직해요.

그러시다면 앞으로의 길잡이 역할은 전적으로 맡기겠어요?”

 

“뭘 인제 와서 믿고 맡기는 것처럼 구는 건가?

애초에 결정은 이미 다 같이 만장일치로으아악!”

 

 

전사가 꼬집힌 옆구리를 문지르는 사이

마물사냥꾼이 상큼하게 웃으며 답했다.

 

 

“아무렴, 믿고 맡겨줘.

그 믿음에 전적으로 보답할 테니까.”

 

 

 

 

<S#2 선술집 / 밤> - 마법사의 경우

 

그날 밤,

선술집 겸 여관에서 벌어진 팔씨름 대회에  참가한 전사가

부산스럽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용사와 신관은 일찍 자러 위층의 침실로 올라간 사이,

어느새 고주망태가 되어 엎어진 채 잠든 것처럼 보이는 하플링 짐꾼을 

조심스럽게 옆으로 치운 마물사냥꾼이 

포도주를 가득 채운 술잔을 들고 마법사의 옆에 와 앉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을 게.

마법사, 혹시 전사랑 사이 안 좋아?”

 

“네?”

 

 

갑작스러운 질문에 마법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곧 마물사냥꾼과 서로 소개했을 당시 

옆에서 장난을 치던 전사를 떠올리고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오호호, 아니어요. 원래 그런 장난을 치는 친구랍니다.

말투가 무뚝뚝할 뿐 악의는 없어요.

검투사로 살아와서 그런지 제가 온 힘을 다해 때려도 

정말로 아파하지도 않고요.”

 

 

마법사는 설명을 끝마치고 

여유롭게 본인의 잔을 기울여 술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마물사냥꾼이 고개를 끄덕이며 지나가듯 물었다.

 

 

“그래?

같이 잔다고 해서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고?”

 

 

마법사는 그대로 술을 뿜었다.

분수처럼 뿌려진 술로 지저분해진 탁자를 

마물사냥꾼이 대신 닦아주는 사이 

마법사는 얼굴을 훔치려는 생각조차 떠올리지 못하고 

술방울을 뚝뚝 흘리며 되물었다.

 

 

“그, 그, 그게 무, 무슨 마, 마, 마, 말씀이시죠?”

 

“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원래 전사랑 마법사는 직업적으로 궁합이 잘 맞는 조합이야.

그 두 직업이 엮이는 건 꽤 자주 봐왔어.”

 

 

마법사는 부정조차 하지 못하고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마물사냥꾼은 말을 이었다.

 

 

“한쪽은 육체에, 다른 한쪽은 지성에 극단적으로 특화되어 있다 보니

이 두 직업이 부대끼다 보면 서로 얕잡아보는 동시에 

존경하는 마음도 싹트기 마련이거든.

너희도 처음에는 꽤 티격태격 싸웠지?

근육뇌라거나 물몸이라거나 부르         면서.”

 

“그, 그, 그건 또 어떻게?”

 

 

마물사냥꾼이 피식 웃었다.

 

 

“말했잖아. 두 직업끼리 엮이는 걸 자주 봐왔다고.

같은 엘프라도 세계수 근처에서만 머무는 애들과는 달리

나는 줄곧 인간 마을을 들락거려서

보고 듣는 게 꽤 많은 편이 거든.”

 

 

어안이 벙벙한 것처럼 보이는 마법사를 앞에 두고

엘프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그 외에도 전사랑 마법사가 엮이는 데에는 여러 요소가 있지.

예를 들자면 동료를 지켜야 하는 전사가

일반적으로 보호하는 대상은 후열의 동료고,

개중에서도 특히나 공격력이 막강한 대신 체력이 취약한

마법사를 전담하다시피 맡는 경우가 잦다는 점.

생사가 오가는 전투 속에서 계속해서 그런 도움을 받다 보면

마법사 처지에선 호감이 생기지 않을 수 없지.”

 

실제로 그랬다. 수인의 천부적인 반사신경 덕분에 

어느 정도 적의 공격을 회피할 수 있는 신관과는 달리 

마법사는 전적으로 전사의 보호에 의존해야만 했다.

 

특히나 마법사가 주문을 외우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전력으로 그녀를 보호해줬던 전사는……

크고 듬직한 등과, 잔뜩 힘을 준 팔뚝과,

그를 믿으라고 외칠 때의 굵직한 목소리와,

위기 상황에서 더욱더 빛나던 강인한 눈은……

 

 

“또 하나 맞춰볼까?”

 

 

마물사냥꾼의 목소리에 마법사는 화들짝 놀라

현실로 돌아왔다.

 

 

“먼저 본격적으로 접근한 건 아가씨였지?

책상머리 앞에서 공부만 하던 인간이 

야성적인 육체를 옆에 둔 채 몇 개월씩 여행하다 보면

그렇고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더라.

그전까지 몸을 훑어볼 기회도 적지 않았을 테고.”

 

 

마법사는 수치심으로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았다.

확실히 전사의 복근이나, 단단한 팔통이나,

두꺼운 목덜미를 훔쳐본 적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이를 남에게 들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물사냥꾼은 뻔하다는 어조로 이어 말했다.

 

 

“전사 처지에서는 상당히 기분이 좋았겠지.

격이 다르고 잘난 체하는 줄로만 알았던 사람이

자기를 매력적으로 본다는 건 

상당한 자부심이 생기는 일이거든.

심지어 체력적으로 본인이 유리하다 보니까

육체 관계를 맺더라도 전혀 주눅이 안 들지.

그래서 어느 정도 같이 일한 마법사와 전사가 

육체 관계를 맺는 것까지는 꽤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야.”

 

 

마법사는 양손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오늘 처음 만난 엘프한테 그녀의 성관계가 

낱낱이 까발려지는 것은,

첫만남부터 괜히 귀족 시늉을 하지 않았더라도 

사회적 고문으로는 차고 넘쳤다.

 

마법사가 이제라도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순간,

마물사냥꾼이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한마디를 던졌다.

 

 

“그러다가 관계가 파투나는 일도 흔하고.”

 

“네?”

 

 

마물사냥꾼은 그 말을 끝으로 포도주를 쭉 들이켰다.

엘프가 술잔을 내려놓았을 무렵,

마법사는 엘프의 귀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그녀의 얼굴을 들이밀고 따졌다.

 

 

“잠깐만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관계가 파투난다니요?

조금 전까지의 말이랑 다르잖아요. 그게 말이 돼요?”

 

 

엘프는 마치 하늘은 황토색이라는 말을

들은 것 같은 표정으로 설명했다.

 

 

“그야 거기까지는 단순한 육체적 관계에 불과하니까 그렇지.

정신적인 궁합은 전혀 다른 문제고.

예를 들자면, 전사로서는 침대 위에선 속수무책이던 마법사가 

밖에서는 가식적으로 구는 모습이 고까워 보일 수도 있거든.”

 

“네에? 아, 안 그래요!

우리 전사는 착해서 그런 생각은 떠올리지도 못할 거에요!”

 

 

마물사냥꾼은 마법사를 묘한 얼굴로 쳐다보다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뭐, 그냥 예시로 든 말이야.

나도 고작 하루 만에 너희 관계를 전부 파악한 건 아니니까.”

 

“마, 맞아요! 그렇죠!

당신이 어느 정도 통찰력이 있다는 것까지는 인정하겠지만,

그런 식의 주장까지 하시려면 적어도-“

 

“설마하니 네가 전사의 특기인 육체노동을 깔봤다거나,”

 

 

마법사는 흠칫하고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그녀는 육체노동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면서 

대놓고 헐뜯는 발언을 뱉곤 했다.

 

 

“그를 자기 말은 무조건 따라야 하는 꼭두각시로 취급했다거나,”

 

 

마법사의 머릿속에 과거의 풍경이 펼쳐졌다.

귀족의 예의범절을 굳이 지켜야 하느냐는 투정에

‘내가 하라면 해!’, ‘그냥 닥치고 내 말대로 하라고!’라면서

신경질을 부리던 본인이 보였다.

 

 

“심지어 전사를 자기보다 아랫것으로 취급했다거나

한 적이 있다면 또 모르지만.”

 

 

마법사는 그녀도 모르는 사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나 같은 사람이 너희와 어울려 주는 걸 영광으로 알아’라는

기가 막힌 말을 내뱉던 첫 만남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마물사냥꾼이 말없이 술을 홀짝이는 동안 

마법사는 한참이나 침묵했다.

마물사냥꾼이 새로운 포도주로 술잔을 채운 다음에서야

가까스로 입을 연 그녀는

거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아진 목소리로 

엘프의 주장을 부정했다.

 

 

“그, 그래도 우리 전사는 진짜 착해서…….“

 

 

마물사냥꾼이 마치 마법사의 목소리를 

더 잘 들으려는 것처럼 몸을 숙였다.

물론 그럴 리 없었다.

엘프는 세계수 꼭대기에 돋아난 잎사귀에

아침이슬이 맺는 소리까지 듣는 종족이었으니까.

대신 마물사냥꾼은 오직 마법사만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그렇다면 말이야,”

 

 

마법사의 귓속으로 엘프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그렇게나 착한 전사는 

왜 처음 보는 내 앞에서 

사사건건 널 폄하했을까?”

 

 

마법사의 동공이 흔들렸다.

 

 

생각해봐.

 

 

 

 

<S#122 전사의 천막 / 밤>

 

마법사는 차마 전사를 마주 볼 수 없다는 듯 시선을 떨궜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의 당찬 태도를 잃고

쪼그라드는 것처럼 몸을 잔뜩 움츠렸다.

그녀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려는 것처럼 조곤조곤 말했다.

 

 

“그, 내가 아무래도 입이 좀 험하고 그래서,

네가 나한테서 정떨어질 수도 있단 말을 들었거든.”

 

“……어조에 관해서는 부정하지 않겠으나,

나는 귀족도 아니고 그런 걸 신경 쓸 정도로 예민하지도 않다.”

 

“아니, 그런 수준이 아니라, 왜,

내가 몸 쓰는 일 같은 건 누구나 할 수 있다면서

네 노력을 좀 안 좋게 말한 적도 있고 그랬잖아……”

 

 

울상이 된 마법사를 바라보던 전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반박했다.

 

 

“그건 배낭이 너무 커서 짐꾼이 버거워할 때 

네가 물건을 대신 들어주면서 했던 말로 기억한다.”

 

“으, 그랬던가?

그래도, 뭔가, 그, 표현을 좀 더 잘할 수 있었다고 해야 할까……

너뿐만 아니라 짐꾼한테도 되게 미안한 표현이기도 하고…….

그것 말고도 왜, 막 내 말대로만 하라는 식으로 소리 지르면서

다른 사람 말을 무시하고 짜증을 부린 적도 있었잖아?”

 

“그건 대체 언제 이야기인가?

혹시, 우리가 귀족들 앞에서 예의 차려야 했을 때 아니었나?”

 

“아, 응. 그, 부패했던 후작 쫓아내고

새로운 영주 취임식을 준비했을 때……”

 

“그때는 그렇게 해서라도 네 방식을 고수하는 편이 옳았다.

우리의 추천을 받아 자리에 오른 새 영주의 권위를 

최대한 세워줘도 모자랄 판국에

너를 제외하고는 우리에게 귀족 예법을 

가르쳐줄 사람이 아무도 없지 않았나?

단기간 내에 평생을 수도원에서만 살던 신관,

시골에서 올라온 용사,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검투사로만 살아오던 나까지 

그나마 용인 가능한 수준까지 가르치려면 어쩔 수 없었다.

당시에는 분명히 불합리하다 느낀 부분도 있었으나,

돌이켜 보면 그 취임식이 큰 탈 없이 마무리된 데에는

네 공로가 혁혁했다.”

 

“아, 으, 고, 고마워…….

그, 그렇지만, 뭣보다도, 그, 그……”

 

 

어느새 마법사의 목소리가 쥐소리와 맞먹을 정도로 작아졌다.

전사는 인내심을 갖고 그녀를 기다려 주었다.

마법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소리 내어 말했다.

 

 

“나, 나, 너 처음 봤을 때 엄청나게 못된 말을 했잖아…….”

 

 

마침내 마법사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마치 엄격한 부모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는 어린아이 같았다.

서투르고, 어색하고, 도망치고 싶어하는 그녀의 마음을 

전사는 이해했다.

 

 

 

마법을 제외하곤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던 귀족 아가씨는 

바로 그 때문에 자기평가가 굉장히 낮았다.

 

그녀가 주문을 한 구절 외우는 동안 

세계는 빠르게 변했고

그녀가 마법약을 제조하는 동안 

새로운 가십거리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마법사가 영애들의 다과회에 꾸준히 참석할 수 있던 까닭은

간신히 배운 (제일 기초적인 수준의) 예의범절과

희소한 마법사로서의 재능,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시할 수 없는 가문의 위세 때문이었다.

 

복잡한 인간관계와 왕국의 거물들이 얽힌 정치,

최신 유행의 찬양과 뒤떨어진 구식시대의 폄훼를

다과와 함께 은유적으로 나누는 영애들 사이에서 

마법사는 삐죽 튀어나온 못만큼이나 어색하고 

길 잃은 소동물만큼이나 위태로운 모습으로

말 그대로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그녀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는 것은

다과회에 참가한 모두에게 명백했다.

 

마법사에게 있어 최대의 불행은

그녀가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다른 영애처럼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통찰력만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마음에 갑옷을 둘렀다.

그녀의 자리가 정당하다 믿기 위해 끝없이 자신을 부풀렸다.

겉과 속마음 사이의 간극을 허영심으로 메꿨다.

 

 

그러나 가시방석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익숙해질지언정 편해지는 일은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다과회에 참석할 때마다 거짓된 호의와 웃음 뒤에 도사린

멸시와 혐오를 삼키며 이대로 살아가느니

대놓고 그녀를 죽이려 드는 마물을 상대하는 편이 

차라리 신선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시골에서 올라온 한 젊은이가 성검을 뽑았다.

 

그리고 가족의 반대와 애원에도 불구하고

마법사는 마왕 토벌에 자원했다.

 

 

안타깝게도 마법사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그녀의 몸은 귀족 사회에서 멀어졌다고

배웠던 습관이 사라지진 않았다.

어쩌다 성검에게 선택받은 촌뜨기와 투기장의 제왕,

그리고 주신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신관 앞에서도

마법사는 다과회 속 영애처럼 행동하고 말았다.

 

그녀 같은 사람이 어울려 주는 걸 영광으로 알라는 말은,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건네면서도

최대한 품위를 잃지 않으려는 귀족이나 할 법한 언행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딴 습관은 여정이 시작된 후 산산이 조각났다.

몇 주에 걸쳐 맛없는 음식과 불편한 잠자리와 끝없는 도보여행 속에서

숙녀답게 불평하다, 애처럼 징징대다 

미친 년처럼 욕까지 한 바가지 걸쭉하게 뱉은 후,

마법사는 오히려 그런 그녀를 더 편하게 여겨주는 동료 사이에서 

귀족의 껍질을 완전히 벗었다.

 

하지만 가장 깊은 곳에선 그녀는 그대로였다.

그녀는 마법으로 벼락을 꽂고 산을 뒤흔들거나

홍수를 일으킬 수는 있어도

그녀를 받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다과회 속에 갇혀 있던, 여정을 시작할 때의 그녀 그대로였다.

 

용사 일행 중 그 누구도 그녀의 발언을 물고 늘어지거나,

그녀를 차별하거나, 반대로 추앙하지도 않았지만,

언젠가 그녀의 망언 때문에 그녀에게 있어 가장 소중해진 이들을

멀어지리라는 공포는 여전했다.

마치 겉으로만 웃는 것처럼 보였던 그 아가씨들처럼,

사실은 용사 일행도 마법사가 간파만 하지 못했을 뿐

속으로는 몰래 다른 생각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전사는 이를 모두 알고 있었다.

 

 

 

 

<S#4 선술집 / 밤> - 전사의 경우

 

마물사냥꾼에게서 약간의 조언을 새겨들은 마법사가 

충격 속에서 비틀거리며 침실을 찾아 위층으로 올라간 후,

전사는 땀범벅이 되어 뒤늦게 마물사냥꾼에게 다가왔다.

 

 

“마법사는 어디 갔나?”

 

 

마물사냥꾼이 어깨를 으쓱하고 답했다.

 

 

“올라가서 쉬겠다던데? 피곤했나 봐.

용사랑 신관도 그렇고, 여기서 잠든 짐꾼도 그렇고,

용사 일행들은 다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생활을 하나 보지?”

 

 

전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물사냥꾼의 건너편에 앉았다.

 

 

“마법을 쓰려면 그런 생활이 중요하다고 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해야 하는 것이 있어 

방해 받지 않고 잘 자야 한다는 모양이다.

그래서 보통 짐꾼과 내가 돌아가며 불침번을 선다.”

 

“어이쿠, 그러면 하루에 몇 시간 못 자겠네?

고생이 많겠다.”

 

“익숙해진다.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다.”

 

“그래? 나도 마법을 쓸 줄은 알지만

활 덕분에 매일 쓸 필요는 없으니까,

가끔은 같이 불침번 서보도록 해볼 게.”

 

“그런가? 고맙다.”

 

 

말이 끊겼다.

마물사냥꾼이 조용히 포도주를 홀짝이고 있자

전사가 무언가 말하려다가, 생각을 바꿨다가,

다시 말하려고 자세를 고쳐 앉기를 반복했다.

 

 

“할 말 있으면 맘껏 해.”

 

 

마물사냥꾼의 말에 전사가 눈을 크게 떴다.

 

 

“너도 마음을 읽나?”

 

 

마물사냥꾼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너‘도’?”

 

“마법사가 말했다. 그녀 정도가 되면

내 마음을 읽는 건 마법 지팡이 없이도 충분하다고.”

 

 

마물사냥꾼은 입꼬리를 조금 꿈틀거렸다가 답했다.

 

 

“뭐, 말이 되겠네. 굉장한 마법사니까.”

 

 

전사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사실이다. 마법사는 대단하다.

들어봤나?

마물 무리에 습격 당하던 마을은 사실

마법사가 혼자서 막은 거다.”

 

 

마물사냥꾼은 애초에 마법사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바로 그 소문을 말하지 않았느냐고 핀잔주는 대신 

가볍게 답했다.

 

 

“그랬어?”

 

 

전사가 신이 나서 말했다.

 

 

“그랬다. 마법사는 정말 굉장하다.

나는 내 앞에 있는 마물 하나씩 밖에 죽일 수 없다.

백 마리 죽이려면 백 번 베어야 한다.

하지만 마법사는 다르다.

번개를 내리치고 산을 움직여서 

마물 무리를 한 곳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강줄기를 바꿔 모조리 물에 빠트려 죽였다.

마법사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아직도 

그 마을에서 마물을 죽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야, 대단하시네.”

 

“정말이다. 그러니까, 음…….”

 

 

전사가 다시 우물쭈물한 기색을 보였다가

결심한 듯 말했다.

 

 

“그러니까, 만에 하나라도 내 말 때문에

마법사를 안 좋게 보지 않으면 좋겠다.”

 

 

마물사냥꾼의 눈이 가늘어졌다.

 

 

“허, 신경 쓰여서 일부러 말해주러 온 거야?”

 

 

전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마법사를 놀리는 게 좋다.

재밌고, 반응을 잘해준다.

진심으로 싫어하지도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전에 신관이 내가 가끔 너무, 짓, 짖다?

그, 그……”

 

 

마물사냥꾼이 단어를 떠올리려 애쓰던 전사를 거들어주었다.

 

 

“짓궂다?”

 

“그거다. 내가 너무 짓궂다고 말했다.

특히 우리를 잘 모르는 사람 앞에서는 그러지 말라고 했다.

우리, 이제 동료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팔씨름하면서 생각해보니까 

동료라도 아직 우리를 잘 모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그저 마왕령 지리를 잘 안다는 이유로 

잠시 고용된 용병일 뿐이라서 

제대로 된 용사 일행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말하는 대신,

마물사냥꾼은 적당한 추임새만 넣어 주었다.

 

 

“아아, 그런 거구나.”

 

“알겠나? 마법사는 대단하다.

나는 마법사를 놀리고 싶어서 한 말이니까

진짜라고 믿으면 안 된다.

마법사가 겁먹었을 때는 성격 나쁜 귀족을 상대해야 했던 때뿐이었다.

평소에는 누구보다도 앞장서 싸우려 드는 용맹한 전사다.”

 

“응, 완전히 이해했어.”

 

 

마물사냥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찬찬히 전사의 얼굴을 살폈다.

그 후 느릿느릿 말했다.

 

 

“너, 혹시 마법사 좋아하나?”

 

 

전사는 멀뚱멀뚱한 눈을 하고

의외의 질문이라는 식으로 답했다.

 

 

“당연히 좋아한다.

용사랑 신관이랑 짐꾼도 다 좋아한다.

다들 좋은 동료다.”

 

“……남녀로서 좋아하느냐는 말이야.

그러니까, 그래.

결혼하고 싶다거나,

함께 아기를 낳고 싶다거나.”

 

 

조금 긴장한 듯한 마물사냥꾼의 반응에

전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마물사냥꾼, 왕국 잘 모르나?

귀족은 평민이랑 결혼하면 안 좋다.”

 

“그런 거야?”

 

“나도 잘은 모르지만 그렇다고 들었다.

그런데 나는 귀족인 마법사랑은 많이 다르다.

어렸을 때 마왕군이 내 부족을 멸망시키는 바람에

가문 같은 것이 없어졌다.”

 

 

마물사냥꾼이 그런 건 별문제가 안 된다는 듯 

손을 휘저었지만, 전사는 꿋꿋이 말했다.

 

 

“그리고 나는 검투사다.

몸으로 싸우는 것밖에 모른다

글도 마법사가 가르쳐줘서 

이제서야 겨우 읽는 법 배웠다.”

 

 

전사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만약 내가 마법사랑 결혼하면,

마법사는 손가락질받을 거다.

마법사는 똑똑하니까 더 잘 알 거다.

나는 마법사와 어울리지 않는다.”

 

 

마물사냥꾼이 갑자기 전사 쪽으로 몸을 숙였다.

전사의 귓속으로 엘프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하지만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만약 다른 것들은 하나도 신경 쓸 필요 없다면,

남은 평생을 마법사랑 같이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

 

 

전사의 동공이 흔들렸다.

 

 

생각해봐.

 

 

전사는 입술을 깨물었다가, 숨을 골랐다가,

머리를 긁고 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오직 엘프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짧게 답했다.

 

전사의 대답을 들은 엘프가 후련해진 듯 허리를 쭉 폈다.

마물사냥꾼의 느긋한 태도에 전사는 재빨리 이어 말했다.

 

 

“하지만 나는 마법사한테 도움이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검투사로 살아와서 안다.

나는 몸쓰는 일 밖에 못하니까, 너무 많은 걸 원하면-“

 

 

그 순간 엘프의 귀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마물사냥꾼의 눈이 빛나더니 

갑자기 전사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아하, 그러니까 네 말을 요약하자면,

아무래도 마법사는 너와 신분도 다르고,

너보다 훨씬 더 나은 사람을 신랑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는 거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그리고 마물사냥꾼은 갑자기 

엘프와 어울리지 않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너랑 마법사는 안 맞는다고 생각하는 거지!!!”

 

 

전사는 뜬금없이 소리를 지른 엘프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엘프가 뻔뻔하게 말했다.

 

 

“이런, 실례했어.

갑자기 귀가 잘 안 들리는 것 같아서 그런데,

대답은 아까 나 정도로 큰 목소리로 말해주겠어?”

 

 

전사는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순순히 새로운 동료의 요구에 부응했다.

 

 

“그렇다!!!”

 

 

전사의 대답 직후 계단 방향에서 

누군가 우당탕하고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 무엇인가가 위층의 복도를 달리다가 

쾅하고 방문을 닫는 소리가 났다.

전사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계단을 바라보고 있자 

엘프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아, 고마워. 덕분에 귀가 뚫린 것 같네.

다만 아쉽게도 우리가 너무 큰 소리를 내는 바람에 

생쥐를 깜짝 놀라게 한 모양이야.”

 

 

전사가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생쥐 맞는가? 발걸음 소리가 너무 컸다.”

 

“그래?

우리 말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생쥐였나 보지.”

 

 

마물사냥꾼은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것처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술잔을 기울였다.

전사가 엘프의 말을 이해해 보려고 머리를 굴리는 사이에

자신의 술잔을 말끔히 비운 마물사냥꾼이

문득 떠오른 것처럼 전사에게 물었다.

 

 

“너, 혹시 포도주에 관한 조예는 있어?”

 

“포도주?”

 

“응, 술 말이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술이지.”

 

“잘 모른다. 나는 맥주를 더 좋아한다.”

 

 

마물사냥꾼이 은근슬쩍 전사 쪽으로 몸을 기댔다.

 

 

“그래? 그럼 이번 기회에 귀족의 음료,

포도주에 대해 가르쳐줄 테니 들어 보겠어?”

 

“듣겠다.”

 

 

갑자기 무슨 생뚱맞은 소리를 하냐며 묻는 대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전사를 보고

엘프가 미소 지었다.

 

 

“예상했던 것보다도 호기심도 많고 

새로운 걸 배우는 데에도 저항이 없군?

훌륭해.”

 

 

엘프는 만족스럽다는 듯 숨죽여 웃고 말했다.

 

 

“포도주는 예민한 음료야.

숙성하는 기간이 굉장히 중요하지.

병을 지나치게 일찍 따버리면 너무 거칠고 역동적인 맛만 나서 

본연의 매력을 스스로 해쳐.

뭐, 그 나름대로도 맛이 있지만,

깊이가 부족해서 금세 아쉬움이 생기는 경우가 잦아.

 

그렇다고 무작정 오래 숙성시키려 드는 것도 안 돼.

맛도 향도 다 날아가 즐거움이 전부 희석되어버리거든.”

 

 

마물사냥꾼의 초점이 풀리더니,

거의 전사가 듣든 말든 상관이 없는 것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시음하는 개인의 주관적인 기호에 따라 

최적인 숙성 단계에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럼에도 일정 수준의 절대적인 지표를 세우는 것이 불가능하진 않아.

 

중요한 건 너무 일러서도, 너무 늦어서도 안 된다는 거야.”

 

 

전사가 끼어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아는 말이, 그, 숫자가 적다.”

 

“어휘력 말이지? 오히려 좋아.

숙성할 여지가 잔뜩 남았다는 거니까.

섣불리 병 따려는 걸 막기 잘했다는 의미지.”

 

“그, 아까부터 말하던

‘숙성’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부터 알려줄 수 있나?”

 

 

마물사냥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엘프가 전사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아주 좋은 질문이야. 그건 말이지,

내가 너에게 알려줄 게 아주 많다는 뜻이야.”

 

“음?”

 

“기초적인 눈치부터 시작해서 여심에 관한 모든 것,

인간 귀족 사회의 예의범절, 결례를 피하는 언행, 고급진 어휘……

그래도 마왕성에 도착하기 전까지 전부 익힐 필요도 없어.

모든 게 성공적으로 끝난 뒤의, 특출난 공을 세운 너희라면 

귀족들이 알아서 맞춰줄 테니까.

물론 그런 배려가 영원하진 않을 테니 

그 유예기간 동안 네가 더 노력해야 하겠지만,

적어도 내 지원을 받는 동안에는…….”

 

 

자신의 흥을 주체하지 못해 눈을 반짝이는 마물사냥꾼에게

전사가 양해를 구했다.

 

 

“미안하지만 이번에도 무슨 말인지 잘……”

 

“아, 쉽게 말하자면,

우선 네가 읽기 좋은 책을 몇 권 빌려주겠다는 거야.”

 

현실로 돌아온 듯한 마물사냥꾼의 미소가 한층 더 깊어졌다.

 

“그렇게 널 숙성시켜 줄게.

생쥐가 너를 맛보는 순간 

영영 너밖에 생각할 수도 없도록.

네가 강렬한 풍미를 머금은,

생쥐에게 완벽하게 맞춰진 포도주가 될 때까지.”

 

마물사냥꾼은 엘프의 얼굴이라고 

도저히 믿기 힘들 정도로 

뒤틀린 비소를 띠었다.

 

 

 

 

<S#108 야영지 / 밤> - 전사의 경우

 

그 후, 마물사냥꾼은 말한 대로 했다.

어릴 적부터 투기장에서만 시간을 보내며

평범한 인간관계와는 담을 쌓았기 때문인지

전사의 눈치가 엄청나게 좋아지는 일은 없었으나,

전사는 마물사냥꾼이 제공한 책을 읽으며 어휘력을 길렀고

마물사냥꾼의 지도를 통해 귀족들의 언행을 배웠다.

 

중간중간 함께 불침번을 서면서 시간이 남아돌 때는 

전사조차 알지 못했던 마법사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마법사에게서 드문드문 들은 것만으로는 

도통 이해할 수 없던 마법사의 행적과 사고방식을 

친절하게 알려주던 마물사냥꾼에게 감탄하면서도 

전사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이런 건 어떻게 다 알게 된 건가?”

 

“네가 사회생활이 부족해서 그렇지,

원래 왕국 수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소문 거리가 된다고.

하물며 고위 가문의 괴짜이면서도 특별한 아가씨 같은 이야기는

마왕령 바로 옆에 있는 도시에서도 속속들이 알 수 있지.

속마음 같은 건 추리 가능한 영역이고.”

 

 

그렇게 마물사냥꾼은 설명했다.

마법사는 어떤 여자인가, 마법사는 어떻게 살아왔나,

마법사는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두려워하며,

어째서 이 여정에 올랐는가?

그리고,

 

 

“마법사가 널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아무리 너라도 이제는 눈치는 챘지?”

 

“……짐작은 하게 되었다.”

 

“겨우 짐작이라…….

정조의 중요성을 누누이 들어가며 

폐쇄적인 환경에서 나고 자란 아가씨가,

아무리 일생일대의 일탈이라고는 해도 

아무런 시정잡배한테 몸을 맡길 것 같아?

 

“…….”

 

“아니면 뭐, 너 말고 다른 사람한테

한눈판 적이라도 있어?

진심으로 널 욕하거나 상처 주려고 한 적은?

네가 아는 마법사는 그런 여자야?”

 

“……그렇지 않다.”

 

“그러면 하다못해 너를 이용만 하다가

어느 순간 뒤돌아서서 나 몰라라 할 정도로

매정하고 타산적이기라도 해?”

 

“그건 절대로 아니다.”

 

 

딱 잘라 말한 전사는 

마왕령의 황폐한 토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마물사냥꾼이 그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뭐, 너는 여태까지 절대적인 지식이 부족했을 뿐

어리석은 남자는 아니니까, 알아서 잘 생각해 봐.

뭐, 사랑은 사람을 바보나, 장님이나,

머저리로 만든다고들 하지만.”

 

“내가 그녀를 사랑하나?”

 

 

전사는 마음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마물사냥꾼을 쳐다봤다.

그의 기묘한 질문에 엘프가 피식 웃었다.

 

 

“우리가 만난 첫날에 네 입으로 말했잖아.

너는 좋아도 걔가 힘들어할 것 같아서 

함께해선 안 될 것 같다고.

자신의 불행을 각오하고 다른 한 사람의 행복을 우선하는 거,

흔한 거 아니다.

 

뭐, 용사 일행으로서 마왕 잡으러 여정에 오른 인간한테는

평범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전사가 시선을 돌렸다.

 

 

“나의 불행으로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진다…….

내가 그런 정의로운 마음으로 여정을 시작했다고 생각하나?”

 

“아니야?”

 

 

마물사냥꾼의 반문에도

전사의 눈은 황폐한 지평선을 훑었다.

 

 

“나는 내 부족의 마지막 생존자지만,

이제는 부족에 관한 기억이 거의 남지 않았다.

그저 걸음마와 함께 몸에 익혔던

검술과 보법 등에만 미세하게 남아있다.”

 

 

전사는 검의 손잡이를 만졌다.

그에게는 익숙한 그 촉감이 그를 안심시켰다.

 

 

“그 후로 나는 평생 검투사로 살았다.

먹고 살기 위해. 아는 것이 그것뿐이라.

투기장의 제왕이니 뭐니 하는 칭호도 그때 받았다.

그저 나만큼 투기장에 남아 있으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충격을 버티는 근력, 고통을 삼키는 정신력보다도

그저 그 외에 갈 곳이 없어서 나는 그곳에 남았다.

신전이 제공하는 신성 마법 덕분에 

죽거나 불구가 될 걱정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내게는 돌아갈 곳도 없었고 달리 살아갈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것,

검투사의 삶에 매달린 채로 살아왔다.”

 

“그러다 왕의 서신이 온 거군?”

 

“그렇다. 그 칭호 덕분에 용사의 일행으로 추천받았다.

내가 그때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고생을 감수하겠다는 고결한 명목으로 

이를 승낙했다고 생각하나?”

 

 

엘프가 고개를 젓고 말했다.

 

 

“말하는 걸 보니 아니었나 보네?”

 

“하나는 왕의 명령.

거절자체가 선택지가 아니었다.

 

둘은 개인적인 호기심.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투기장 밖의 세계에 대해 잘 알지 못했으니.

 

그리고 셋.

나 대신 서신을 읽어준 투기장 주인이 말했다.

내가 너무 많이 이겨서 배율이 영 안 높으니

잠시 자리를 뜨는 것도 괜찮다고.

 

그래서, 그렇게 했다.

그것뿐이었다.”

 

 

엘프가 전사를 바라보았다.

 

 

“그렇군. 그럼 세상을 누벼본 감상은 어때?”

 

 

전사가 엘프를 마주 보았다.

 

 

“별거 없다.”

 

 

마물사냥꾼의 헛웃음에 전사가 말을 이었다.

 

 

“근본적으로는 바뀌지 않았다.

적은 베고, 아군은 지킨다.

단순해서 좋다.

내 세계가 바뀌는 일은 없었다.

한 명을 제외하고는.”

 

 

엘프의 눈이 빛났다.

 

 

“단 한 명, 그녀만이 달랐다.

적은 마법으로 공격하고 아군은 말로 공격했지.”

 

 

전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 나름의 농담이 웃겨서였을까,

아니면 그녀를 떠올렸기 때문일까?

 

 

“아무도 부탁하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내 세계를 넓혀주었다.

나는 그녀 덕분에 이제 글을 읽고,

보다 평범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다른 이들에게서 감사 인사를 받고,

진심으로 그들의 행복을 빌 수 있다.

 

불의를 보면 고치겠다고 다짐할 수 있고,

적을 쓰러트리기에 앞서 동료를 살필 수 있으며,

선을 본받고 악을 징벌하는 것의 중요함을 안다.

 

마왕을 쓰러트리는 것은 

개인의 권력이나 명예를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방치하는 것으로 더욱 커질 슬픔을 막기 위함이라는 것을

이제는 이해한다.”

 

 

마물사냥꾼이 어깨를 으쓱했다.

 

 

“충분히 정의로워 보이는데?”

 

“만약 내가 정의롭게 보인다면,

그것은 지금의 내가 될 수 있도록

그녀가 내 눈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전사가 잠시 숨을 골랐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다.

나 혼자선 의미를 찾을 수 없던 곳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사람이다.

떠밀리듯 여정에 오른 나와는 달리 

자진해서 이곳에 온 그녀는,

스스로 길을 찾아 걷는 사람이다.”

 

“그런가? 내 설명을 들었으면 알겠지만,

그녀가 여정에 오른 이유도 도피성이 강했는데?”

 

 

전사는 고개를 젓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군청색 비단 위에 수 놓인 흰 보석들이 반짝였다.

 

 

“나는 평생 눈으로는 별을 쫓으면서도 

가만히 자리에 앉아 안주하고만 있었다.

 

그녀는 다르다.

세상에 순응하는 대신 새로운 활로를 찾는다.

그녀는 충분히 다과회에 불참하거나,

마법사의 탑에 틀어박히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가족이나 가문을 위한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녀는 차라리 적과 맞서 싸워 길을 개척하기를 택했다.

그렇기에 나는-”

 

 

그 순간 야영지 근처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전사는 즉시 검자루를 쥐고 일어나 

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검을 겨눴다.

 

하플링 짐꾼이 자기 전 설치했던 경보장치 때문에

위치를 노출해버린 작은 설치류가 

갑자기 드러난 전사의 형상에 놀라

순식간에 저 멀리 도망쳤다.

 

전사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제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는 말없이 다시 주변을 경계하다가

엘프가 아직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말했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를 존경한다.

그래서 그녀가 찾아낸 이 길이 옳았기를 소원한다.

그녀가 겪어온 모든 고통이 바로 그 순간을 위해서라면 

전부 가치 있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의 길 끝에 행복한 날이 기다리고 있기를 희망한다.”

 

 

전사가 주먹을 쥐었다.

 

 

“가능하다면, 그녀에게 그날이 오도록 도울 수 있기를 바란다.

환희에 찬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이 모든 것은 그녀가 누려 마땅한 것이니

마음껏 즐기라고 말해주고 싶다.”

 

 

전사가 말을 마치자 엘프가 피식 웃었다.

 

 

“말하는 걸 들어보니 내 책들이 꽤 도움된 것 같아 기쁘네.

그런데 그 정도의 각오가 있는데 

대체 뭘 그리 우물쭈물하는 거야?

그냥 지금 그 말을 그대로 전하면 

마법사가 좋아서 방방 뛸 텐데.”

 

 

전사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쉽지 않다.”

 

 

엘프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아니 뭐가? 뭔데? 대체 왜 그러는데?

도와줄 테니까 말해봐. 들어나 보자.”

 

“……마음은 고맙지만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

 

“아니, 왜?”

 

 

엘프의 추궁에 전사가 시선을 피했다.

 

 

“남에게 발설하기에는 부끄러운 내용이다.”

 

 

엘프가 콧방귀를 뀌었다.

 

 

“아니, 이미 말할 거 다 말해놓고 부끄러울 게 남았어?”

 

“…….”

 

“어휴, 그럼 이렇게 하자.

네가 솔직히 말해주면 나도 네가 묻는 거 뭐든지 답해줄게.

내가 몇 살까지 나무 타다가 굴러떨어졌는지부터 

성경험 횟수까지 가감 없이 알려줄 테니까 

제발 들려만 줘.”

 

 

전사는 그제야 엘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마물사냥꾼에게 답했다.

 

 

“실례라는 건 알지만……

나는 그런 걸 알고 싶지 않다.”

 

“어, 알아, 넌 마법사랑 전혀 연관 없는 일에는

하나도 관심 없는 거.

아무튼 질문은 아무거나 네가 고르면 되잖아.

그러니까 말해봐. 응, 응?”

 

 

엘프의 고급스러운 미모를 

앙탈과 떼쓰기에 써먹는 마물사냥꾼을 보고

전사는 엘프식 징징거림이 심해지기 전에 

그냥 말하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하나는, 지금 우리의 상황 때문이다.

우리는 마왕을 상대해야 하지 않는가?

더군다나 두 개의 뿔이나 검은 피부 등을 제외하면

우리가 마왕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다.

약점이 이전의 마왕들과 마찬가지로 성검이라고 짐작할 뿐.

즉, 위험요소가 크다.

 

만약 내가 죽었을 때 그녀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고 싶지 않다.

마왕을 무찌른 후 마음을 전하더라도 늦지 않다.”

 

“……개인적으로 동의하기는 힘들지만, 이해는 했어.

둘은?”

 

“……말하기 부끄럽다.”

 

 

마물사냥꾼의 얼굴이 굳었다.

 

 

“너, 다 큰 성인이 땅바닥에 누워서

떼쓰는 것 본 적 있나?

지금 바로 보여줄 수 있어.”

 

“아니, 괜찮다. 하지 마라. 마법사가 깰지도 모른다.

그저, 듣고 나서 웃지 않겠다고 약속해 줄 수 있겠나?”

 

“약속하지.”

 

 

전사는 심란한지 한참을 머뭇대다가 말을 꺼냈다.

 

 

“마법사는 아는 것도 매우 많고,

이를 통해 많은 것을 성공적으로 추론해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심히 왜곡해서 해석하는 경향도 있다.”

 

“?”

 

“그러니까, 마법사의 머릿속에서,

내가 성교 전에 하는 말은 전부 섹스에 미쳐서 뱉는 빈말이고

정작 성교 후에 하는 말은 전부 오르가슴에 취해서 뱉는 헛소리로 취급된다.”

 

 

마물사냥꾼의 방향에서 숨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전사는 기왕 꺼낸 말은 끝까지 하기로 했다.

 

 

“그래서 단둘이 있을 때 뭔가 진지한 말을 꺼내려고 해도

대충 넘기기만 하고 내용을 잘 듣지 않는다.

그래서, 솔직한 마음을 전하려고 해도 쉽지가 않다.”

 

엘프는 계속해서 얼굴을 씰룩이면서도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흠, 그렇구나. 꽤 진지한 이유네.

경청, 음, 크흠, 맞아, 경청하는 자세는, 큼, 중요하지.”

 

“힘들면 웃어도 된다.

다른 일행들 깨지만 않게 조용히 하면 좋겠다.”

 

“콜록, 큭, 콜록, 아, 이걸 어째?

대신이라고 하기는 뭣하지만, 약속대로 뭐든지 물어봐.

에잇, 내 쪽에서도 약속 못 지켰는데, 기분이다!

세 개든 다섯 개든 원하는 만큼 물어봐!”

 

“아니, 거듭 말하지만, 너에 대해선 그다지 궁금한 것이 없다.”

 

“안다고, 네 관심사는 온통 마법사한테 집중되어 있다는 거.

포도주 얘기만 해도 귀족의 음료라는 말 때문에 

마법사가 좋아할까 싶어서 신경 쓴 거였고.

어쨌거나 아무거나 물어봐. 답할 수 있는 선에선 전부 답해줄게.

내가 미안해서 그래.”

 

 

전사는 부담스럽다는 눈으로 

마물사냥꾼을 보고 난 후 시큰둥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묻겠는데,

나랑 마법사를 왜 이렇게나 이어주려고 애쓰는 건가?”

 

“응?”

 

“우리에 대해 잘 알지 못했을 첫날부터 뭔가를 했었지.

솔직히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돌이켜보니 무언가 수작을 부린다는 인상을 받았다.”

 

 

마물사냥꾼이 항복한다는 듯

양손을 들어 올리고 순순히 인정했다.

 

 

“그게 벌써 몇 달 전인데 잘도 기억하고 있네.

하여튼 마법사랑 관련된 기억만 참 오래가는 녀석이야.

사실대로 말하자면, 맞아.

내가 정확히 뭘 어떻게 했는지 말하면 

두들겨 맞을지도 몰라서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너희 둘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도록

몇 가지 수작을 좀 부렸어.”

 

“……예상되는 바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적어도 우리를 농락하려는 것보다는 

궁극적으로 도우려는 것 같았기에 넘어가겠다.”

 

 

마물사냥꾼이 능구렁이처럼 웃었다.

 

 

“그 신뢰에 감사할 따름이야.”

 

“아무튼, 포도주 얘기를 하길래 그날 밤이 떠올랐다.

그래서 물어본 거다.

왜 나를 마법사와 엮으려는 건가?

그리함으로써 얻는 이득이라도 있나?”

 

 

마물사냥꾼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이것 참, 뜻밖에도 답하기 어려운 걸 묻네.

이건, 일종의, 뭐라고 해야 하나?

삶의 이유? 뭐 그런 거지.

순애보를 응원하는 취미생활이라고 봐줘.

한 쌍의 연인이 알콩달콩한 걸 보는 것만으로도 

배불러오는 취향도 있거든.”

 

 

전사가 지나가듯 대꾸했다.

 

 

“그런 것치고는 내게 제공한 책들이 

거의 내 개인 교습서에 가까울 정도였다.

원래부터 이런 책을 종류별로 다 소지하고 있는 건가?

돈이 남아돌 정도로 많아서 일부러 구매한 건가?”

 

 

엘프가 어깨를 으쓱했다.

 

 

“믿거나 말거나, 난 딱히 너나 마법사만

이어주려는 사랑의 전령은 아니야.

만인을 위한 사랑의 길잡이지.

 

내 책들이 너한테 적합한 어휘력과 내용을 담았던 건

기왕 하는 건 제대로 하자는 주의라서 그런 것뿐이지.

마물사냥이 내 천직이자 본업이라면,

이건 부업 같은 거야.”

 

 

영 믿기 힘든 엘프의 대답이었지만 

전사는 순순히 답했다.

 

 

“그렇군.”

 

“끝이야? 다른 질문은 없어?

뭐든 물어봐도 된다니까?”

 

“미안하지만 조금 전 질문들도 그리 신경이 안 쓰이던 걸 

억지로 물어본 거라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마법사에 대해 묻고 싶은 것이 훨씬 더 많다.”

 

 

마물사냥꾼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라. 나중에 가서 땅을 치면서 후회하지나 말라고.

이런 기회는 매일 같이 오는 게 아닌데 말이야.”

 

 

궁시렁대는 엘프의 말에 전사가 잠깐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잠시 후 덧붙이듯 말했다.

 

 

“정 그렇다면 하나만 더 묻겠다.”

 

“오, 뭔데?”

 

“네가 마법사와 나 사이에 간섭한 목적은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백년해로하길 바라서인가?”

 

 

이에 마물사냥꾼이 전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전사도 엘프를 보다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엘프는 사뭇 진솔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답했다.

 

 

“정답이야. 이건 장담해줄 수 있어.”

 

 

마물사냥꾼의 답을 들은 전사는 도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됐다.

너에게 악의가 없다는 것만 알면 충분하다.”

 

“아니, 그래도 몇 개월이나 함께 한 

네 사랑의 길잡이에 대해 더 알고 싶진 않아?”

 

“알고 싶다. 마법사와 관련된 것이라면.

둘이서 따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눈 건 없나?”

 

“어휴, 내 이럴 줄 알았다.”

 

 

 

 

<S#123 마왕성 앞 / 밤> - 마물사냥꾼의 경우

 

짙은 마나 안개 너머의 마왕성이 

육안으로도 흐릿하게 보이는 곳.

용암이 발산하는 열기가 

독천에서 기어나온 습기와 만나

일반인이라면 접근하는 것만으로도 실신할

맹독성 증기가 사시사철 거하는 곳.

 

그런 곳에서조차 생명은 뿌리를 내렸다.

비록 메마르고, 뒤틀리고, 배배 꼬인 모습이었음에도,

그것은 엄연한 나무의 형상을 띠고

척박한 마왕령 대지 위에 우뚝 솟아 있었다.

 

 

존재 자체가 삶의 찬가인 그 기적적인 생명의 꼭대기에서 

마물사냥꾼은 얇은 나뭇가지 위에 걸터앉아

달빛처럼 맑은 피부와 햇빛처럼 찬란한 금발을 

뭇별의 바닷속에 숨긴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무 밑동 근처에 세웠던 간이 천막들은 

전사가 판 구멍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하플링 짐꾼의 위장술과 마법사의 광학미채 마법이 더해져

이미 야영지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는 엘프조차도  

한눈에 천막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 외에도 냄새나 소리 등 야영지가 들킬 수 있는 

온갖 방도에 대비한 각종 기술과 마법이 뒤섞여 

용사 일행을 안전하게 숨겨주고 있었다.

설령 고위 마족이 야영지 바로 옆에서 마력 탐지를 쓰더라도 

그들을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모두의 도움으로 안전해진 야영지와 

수인 신관이 설치해둔 정화의 술식 덕분에 

용사 일행은 마왕성 지근거리에서도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심지어 만에 하나의 사태에 대비해 

엘프가 불침번까지 서고 있으니,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용사 일행 전원은

내일 아침 만전을 기한 채 마왕성에 진입한 후

마왕의 목을 베어낼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이 야영지 하나만 보아도 이들이 

용사와 그의 동료에 걸맞은 실력의 소유자임은 분명했다.

 

 

엘프는 야영지 방향을 똑바로 바라보며

느긋하게 다리를 흔들거리고 실실 웃었다.

본디의 목적대로 망을 한 번 쭉 둘러본 그녀는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마치 코와 입을 가리려는 것처럼 

손을 얼굴 가까이에 가져다 댄 후

조용히 속삭였다.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료했다.”

 

 

엘프의 말이 끝나자 그녀의 손바닥 안쪽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시나리오에 차질은?]

 

“없었다.”

 

[접수했다. 나머지 계획은 이쪽에서 진행하도록 하지.]

 

“내가 할 일은 다 끝났다고 봐도 되겠나?”

 

[그렇다. 축하한다.

네 요구 또한 그분께서 허락하셨다.

나머지 시나리오 취사선택해서 사용해도 된다.

물론 기존의 조건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물론이지.”

 

 

마물사냥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엘프는 나름 침착을 가장했으나

목소리가 조금 높아지는 것은 숨길 수 없었다.

 

 

“그렇다면 마침내 전부 끝났군.”

 

[수고 많았다.

모든 것은 마왕님의 뜻대로.]

 

“모든 것은 마왕님의 뜻대로.”

 

 

엘프는 앞으로 다시는 입 밖으로 뱉을 일 없는

마왕군의 구호를 뇌까린 다음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지난 몇 주 동안 용사 일행의 길잡이로 일하면서

온종일 어깨를 짓누르던 짐에서

가까스로 해방이 된 느낌이었다.

 

그러나 기쁨에 몸을 맡기기는 아직 일렀다.

최후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주문을 외워야 했다.

손안에 숨겨두던 통신기용 마도구를 파괴하여

그녀와 마왕군을 연결 짓는 유일한 증거를 인멸하려던 찰나,

엘프의 목에 단검이 들이밀어 졌다.

 

 

“당장 널 죽이지 말아야 할 이유를 대라, 배신자.”

 

 

엘프의 등 뒤에서부터

하플링 특유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녀의 뾰족한 귀를 타고 들려왔다.

엘프는 느릿느릿 양손을 펼치는 것으로

항복의 의사를 표하며 말했다.

 

 

“단순한 짐꾼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무기 다루는 게 이렇게나 능숙할 줄은 몰랐네?”

 

 

하플링은 단검을 엘프의 목에 고정한 채로 

그녀의 손안에 있던 마도구를 빼 갔다.

그가 작게 말했다.

 

 

“도적이 나 도적이요 하고 광고하면서 다니지는 않지.”

 

“아하, 종족 특성을 훨씬 더 잘 살린 직업이 따로 있으셨군?”

 

 

하플링의 발에 달린 털은 은신에 적합하고,

그들의 작은 체구에 반비례하는 잽싼 몸놀림은 

전투 중 적의 눈과 귀를 농락한 뒤

목숨을 앗아가는 치명적인 조합이다.

 

엘프의 귀로조차 접근을 눈치 못 챌 정도로

은밀하게 움직이는 것이 가능한 소인족은 

필요한 순간에만 정체를 드러내는 비밀병기로서 최적이다.

특히나, 마왕을 죽일 정도의 실력자가

왕국한테 칼을 돌릴 때에 대비하기에 적합하다.

 

여태까지 남몰래 최후의 제동장치 역할을 맡고 있었을 하플링 도적을 

왕국이 그들을 믿고 하사하여 주신 짐꾼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을 용사 일행을 상상하며 엘프는 웃었다.

 

 

“나름 다들 자고 있는 사이를 잘 골랐다고 생각했는데,

암습의 대가인 직업 앞에서는 조금 어설프게 보였겠어?”

 

 

엘프의 웃음기 어린 질문에

단도가 가볍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어깨를 으쓱할 거면 적어도 보이게 해주지.

하플링이 말했다.

 

 

“그래도 나름 노력은 한 것 같더군.

그래도 명명백백한 물증을 잡을 수 있는 기회는 

이번이 유일했으니까.”

 

“아, 그러셔? 그렇다면 심증은 이미 충분하셨다는 뜻인가?”

 

 

엘프는 자신의 노력이 폄하되는 것 같아 

괜히 심술을 부려보았다.

 

 

“나름대로 열심히 뒤처리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까지 책잡을 거리를 남기고 다녔을 줄이야.”

 

 

자신의 행적을 곰곰이 떠올리던 

엘프의 머리 위로 반짝이는 가루가 흩날렸다.

 

 

“콜록콜록, 뭐, 뭐야?”

 

엘프는 그녀의 목에 단검이 닿을락 말락 한 상태라는 것도 잊고

하플링을 향해 몸을 돌렸다.

하플링이 잽싸게 단검을 빼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목에 절취선이 생길 법한 위험한 행동이었다.

하플링은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어설픈 엘프에게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어주며 설명했다.

 

 

“마법 차단 가루다.

앞으로 몇 시간 동안은 마법으로 저항 못할 테니 

일단 검은 넣어두겠어.

자칫하다가 자백을 받기 전에 자해부터 도와줄 것 같군.”

 

 

마치 그녀를 완벽하게 무력화했다는 투로 

납도하는 하플링을 향해

엘프는 심통이 난 듯 팔짱을 꼈다.

 

 

“나름 마물사냥꾼으로 명성 높은 이 몸 앞에서

너무 자신만만한 것 아니야?

날 마법에만 의지하는 바보로 보면 곤란한데?”

 

 

이에 하플링 도적이 미간을 좁혔다.

 

 

“그렇다면 뛰어난 궁술로 마왕령 내의 

많은 마물을 토벌하신 마물사냥꾼님께선

활은 얻다 두고 오셨을까?”

 

“……걸리적거릴 것 같아서 아래에 두고 왔지.”

 

 

하플링 도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표정의 변화조차 없이 말했다.

 

 

“마왕성을 목전에 두고 불침번을 맡은 주제에 

그렇게나 태평하다는 건

기습이 없으리라는 확신이 있거나,

하다못해 마왕군에게 들키더라도 

자기는 멀쩡하다는 판단이 섰다는 의미겠지.”

 

 

엘프는 슬쩍 눈을 피하며 멋쩍은 듯 뺨을 긁었다.

 

하플링은 한숨을 푹 쉬었다.

하다못해 변명거리 하나는 준비해 놓은 줄 알았건만

눈앞의 허술한 엘프 첩자는 아예 생각조차 안 해본 눈치였다.

하플링은 아예 대놓고 발뺌 못할 증거를 짚어주기로 했다.

 

 

“다른 심증도 대볼까?

마법 차단 가루를 뿌리자마자 보이는 그 착색된 피부 말이야.

너, 마물과 본질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지?”

 

 

엘프는 놀란 듯 자기 몸을 둘러보았다.

이제서야 눈치챘지만, 지금의 마물사냥꾼은 

가루가 뿌려지기 전과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찬란한 황금빛 머릿결은 달빛에 녹아드는 은색으로 변했고 

백옥만큼 희던 피부는 흑요석처럼 어두워져 윤기가 흘렀다.

마법 차단 가루로 탓에 변신 마법도 함께 풀렸다는 걸 깨달은 엘프는 

한숨과 함께 사실을 인정했다.

 

 

“정답이야. 난 세계수 근처에서 꽃꽂이 안 하면서 살면 

큰일나는 줄 아는 멍청한 족속들과는 달라.

나는 마족이다.”

 

 

마물과 마족은 모두 사람의 사념이 응축되어 탄생한다.

대마법사들이 개념을 떠올리고 의지를 불어넣는 것만으로 

마나를 움직여 현실을 조작하는 것과 유사하다.

 

차이점이 있다면 대마법사가 마법을 부릴 때는

한 명의 개인이 자연 속 마나를 의식적으로 조종하는 반면,

마물과 마족이 탄생할 때는

다수의 일반사람이 떠올리는 갖가지 욕망과 사념들에 

자연 속 마나가 반응하여 부산물을 낳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마나가 짙을수록 나타나는 부산물도 위험해진다.

인간들의 거주지처럼 마나가 옅은 장소에선 

슬라임이나 고블린처럼 식사나 번식 등 

기초적인 본능만 따르는 미약한 마물이 탄생하지만,

마왕령처럼 애초에 마나가 짙은 장소에선

인간과 맞먹는 지능과 지혜를 갖춘 마족이 태어난다.

마왕성처럼 마나가 제일 짙은 공간에선

수십 년에 한번 꼴로 마족을 지배하는 마왕이 등장하기도 했다.

 

다크 엘프도 그렇게 태어난 마족 중 하나였지만

그녀는 오히려 뻔뻔하게 나왔다.

 

 

“하지만 그게 뭐? 내가 마족인 게 뭐 어떻다는 거지?

설마 마족과 인류의 공존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할 셈인가?

인류가 마족과 거래를 하고 

교류를 맺는 경우가 없지는 않을 텐데?”

 

 

마족의 근본은 마물처럼 인간의 사념이라는 것은 바뀌지 않기에,

그들은 개체의 차이는 있어도 본인을 구성하는 사념을 

본능이자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간다.

 

폭력의 충동이 모여 탄생한 마족은 

눈에 닿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가 되고

재물을 탐하는 욕망이 뭉친 곳에선

금은보화라면 무조건 눈이 돌아가는 드래곤이 나타나는 것처럼.

 

그러나 모든 사념이 파멸을 부르지는 않는다.

 

정결과 순수함을 지키려는 사념이 모이면 

처녀의 수호자인 유니콘이 되고

세계수의 번영과 보호를 향한 엘프의 집착은 

숲의 관리자인 드라이어드를 낳는다.

그리고 마물을 향한 인류와 마족의 혐오 속에서

마물절멸을 숙원으로 삼는 다크 엘프가 태어난다.

 

이들은 근본적으로는 마족이지만 

악마나 드래곤과는 달리 인류의 적이 될 이유도, 필요도 없다.

인류에 해당하는 수인이나 엘프, 인간, 하플링 등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다른 이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고,

배려할 줄 알며, 신의를 지킬 줄 안다.

 

다만 인류의 비율이 높은 수도권에 가까울수록 

마물이나 마족과 관련된 것을

모조리 악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런 곳에선 마족이라면 무조건  

색안경부터 끼고 보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마을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터지면 

의심의 눈초리가 그들에게 쏠리는 경우가 흔했다.

 

마족이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누명을 쓰거나 아예 악의적인 모함에 빠진 경우도 더러 있었으며,

용사 일행이 직접 나서서 위기에 빠진 마족을 보호하고 

진실을 밝혀내지 않았더라면 

억울하게 마을에서 추방당하거나 

심지어 처형당할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인류의 마을이 마왕령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사람들은 마족과 공생하는 법을 배웠다.

유니콘의 보호 속에서 안전한 수도원이나 

드라이어드의 도움을 받아 무럭무럭 자라나는 과수원 등을

여정 중 직접 목격한 용사 일행은 

누구보다도 이를 확실히 알고 있었다.

 

 

마왕령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에는

특이할 정도로 변신 마법을 잘 쓰는 엘프가 

모험가 길드를 들락거리기도 했다.

 

그 엘프는 마물은 어차피 모조리 죽일 예정이라면서

마물 중 인간에게 피해를 끼치는 녀석들을 최우선적으로 처치하거나

일반인들은 접근하기 힘든 마왕령 심층부의 마물을 잡은 다음 

마법의 재료로 쓰이는 부위들을 채취해 모험가 길드에 넘겼다.

엘프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보다 잘 날아가는 화살과 보다 튼튼한 활을 받았다.

마을은 심지어 그 수상쩍은 엘프를 

일반 모험가들보다도 높이 대우하기도 했다.

‘마물사냥꾼’ 같은 이명도 붙여주면서.

 

 

“실제로 나를 마왕령의 길잡이로 삼기 전에 

용사 일행들도 공공연한 비밀이랍시고 들었을 텐데?

마족일 테니까 신용하지 못하겠다면 

계속 인간 마을 근처에서 일하도록 내버려두라고.

뭐, 용사 일행 중에 여정 내내 나를 직접 추궁할 정도로 

멋없는 짓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는 했어.

오히려 마족이더라도 믿고 맡기겠다느니 

우리는 동료라느니 같은 번지르르한 말만 했지.

그 덕분에 지금처럼 단신으로 불침번도 설 수 있었고.”

 

“그래. 나도 그래서 너에게 유예를 준 거다.

네가 평범한 엘프가 아니라 다크 엘프라는 확신이 선 다음에도.

길잡이의 지식이나 용병으로서 실력은 출중했으니까.”

 

“아하, 감사할 따름이야.

그렇지만 수도권에서 나고 자란 첩보원으로선

차마 마족을 향한 선입견은 지울 수 없었다는 거지?”

 

 

하플링의 눈이 매서워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마족들과 마찬가지로

네가 마왕의 끄나풀이 아니라는 증거가 없었기에

주의를 기울였던 거다.

오늘밤까지는.”

 

 

마족은 분명 다른 이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고,

배려할 줄 알며, 신의를 지킬 줄 안다.

그러나 그 대상이 굳이 인류일 필요는 없다.

 

마왕과 인류의 전쟁이 한창인 지금,

한 세대에 걸쳐 마왕령을 철권으로 통치하는 이번 마왕이 

수 세기 동안 그들을 핍박해온 인간들보다는 

마족 눈에 더 좋게 보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런 마족들은 의사소통으로 인류에게서 정보를 빼내

마왕과의 신의를 지키는 첩자 노릇도 할 수 있었다.

 

바로 그런 위험 때문에 하플링은 매일 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해야 했다.

도적은 언제라도 단도를 뽑을 수 있는 자세를 유지하고 말했다.

 

 

“헛소리는 그만둬라.

내가 너를 아직 살려두고 있는 유일한 이유는

네가 어떤 정보를 얼마나 넘겼는지 확인하기 위함이니까.

순순히 이실직고해.

네 임무는 뭐였지? 목적은 무엇이냐?

무슨 정보를 전달했지?”

 

 

다크 엘프가 과장해서 겁난다는 몸짓을 선보였다.

 

 

“아이고, 무섭기도 해라. 이걸 어쩌지?

얼른 전부 사실대로 말해서 쓸모를 잃고 살해당해야겠네?”

 

 

도적은 결국 단도를 다시 뽑아 마물사냥꾼을 겨눴다.

이건 그의 직업에서 가장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었다.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해주면 되겠군?

아직 네 팔다리가 멀쩡한 이유는

그만큼 잃을 수 있는 것이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하플링의 고문을 은유하는 협박에도

다크 엘프는 어깨를 으쓱하기만 했다.

 

 

“그리고 도망쳐 봤자 단거리 경주로는 

하플링을 이기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래도 따로 결박까지 안 한 건 좀 의외인데?

묶는 건 딱히 취향이 아닌가 봐?

아쉬워라.”

 

 

 

하플링은 계속해서 말을 돌리는 

다크 엘프를 상대로 한숨을 내쉬고 싶었지만

위엄을 지키기로 했다.

 

 

“네가 길잡이로 일하는 동안 관찰한 결과 

완력 자체는 걱정할 것 없다고 판단해서다.

마법의 보조 없이는 활도 제대로 당기지 못할 정도인데

용케도 마물사냥꾼 같은 칭호도 받았더군.”

 

“뭐, 마왕령은 마나가 뭉쳐 있는 곳이라 

이 안에 들어온 다음부턴 약한 마법도

효과가 증폭되는 곳이니까 말이지.”

 

“그래, 그래서 여기선 반대로

마법 차단 가루가 가장 효과적이리라 확신했지.”

 

 

다크 엘프가 혀를 찼다.

 

 

“맞는 말이긴 해.

그래도 그렇지 그 값비싼 걸 

고작 첩자 하나 잡으려고 낭비할 줄은 몰랐어.

마왕을 상대할 때 쓰거나 하다못해 끝까지 잘 간수했다가 

몰래 팔았으면 거금을 벌었을 텐데.”

 

“어차피 마왕전에서는 역이용 당해 

우리 마법사만 무력화 당할 위험이 있어서 

그 전에 처분할 생각이었다.”

 

“아하. 그렇군.”

 

“그리고 내가 개인의 부귀영화를 원했다면 

애초에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거다.”

 

 

다크 엘프가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하플링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마물사냥꾼을 바라보았다.

마물사냥꾼의 미소가 깊어졌다.

 

 

“있지, 믿거나 말거나 자유지만,

나는 용사 일행이 꽤 마음에 들어.”

 

 

하플링은 조용히 다크 엘프의 말을 기다렸다.

어쩌면 순순히 자백하려는 걸 수도 있으니까.

 

 

“시골에서 올라온 순박한 용사는

자기 부모님을 마왕군에게 잃었는데도 

마족 전체를 증오하진 않는 선인이야.

 

인간들 사이에서 고아이자 수인으로 살아가면서

수많은 따돌림을 당하다 종교에 귀의했음에도

복수보다 용서와 관용을 더 믿고 행하는 신관도 귀엽고.

 

말로는 시도때도없이 남을 폭행하는 주제에 

정작 누구보다도 가장 사람을 아끼는

새침데기 귀족 마법사는 참 깜찍하고,

 

그저 사랑하는 여인을 뒤따르던 것뿐이었는데

본인도 모르는 사이 진정한 정의의 사도가 되어버린 

전사도 참 매력적이야.”

 

 

다크 엘프는 마치 묘기를 부리는 것처럼

얇은 나뭇가지 위에서 한 바퀴 빙그레 돌았다.

엘프의 기다란 은발이 가볍게 떠올랐다가

깃털처럼 사뿐하게 가라앉았다.

엘프가 하플링을 바라보고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리고 감히 마족 따위를 변호하고,

대화가 통하는 적을 상대로는 전투를 피해가는 꼴을 지켜보면서도

무의미한 피가 흐르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기며

끝까지 용사 일행을 믿고 여기까지 따라온 도적도 좋아해.”

 

“아부 따위로 이 상황을 모면할 생각이라면 접도록 해.”

 

 

다크 엘프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이 일행의 최대 단점은 사람이 최대한 진심을 담아 

직설적으로 얘기해도 신경조차 안 쓴다는 점이야.”

 

 

하플링은 딴죽을 걸었다.

 

 

“인간도, 엘프도, 하플링도,

수인도 아니면서 사람 타령은.”

 

“왜? 색만 제외하면 엘프나 다크 엘프나 

다를 게 뭐가 있는데?”

 

“아니 근본적으로 마족은……

뭐, 뭐하나?”

 

“응? 아무리 왕국의 첩보원이라고 해도 

다크 엘프가 어디까지 엘프랑 같은지는 모를 것 같아서 

직접 보여주려고.”

 

 

그 말과 함께 다크 엘프는 

걸치고 있던 모든 옷가지를 벗어 

나무 밑으로 던졌다.

 

 

 

“……그런 걸 보여줄 필요는 전혀 없으니까 

다시 옷 입어라.”

 

“거 참 섭섭하네.

선술집에서 잠든 척하면서 몰래 보거나

내가 몸을 씻고 있을 때 관음도 했으면서.”

 

 

도적은 다크 엘프의 수작에 놀아나고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태생적으로 부끄러움이 많은 하플링으로서

차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말장난으로 왜곡하지 마라.

관음이 아닌 감시다.”

 

“아하, 그래서 사람이 발가벗고 있는 동안에도

숨어서 힐끗힐끗 보셨다?”

 

“……가장 무방비해지는 순간에 

본색을 드러낼 가능성이 높으니까

굉장히 합리적인-”

 

“굳이, 변태처럼, 한 번도 빠짐없이, 매번?”

 

“……한두 번은 조심했을 수도 있으니까 

완벽을 기하기 위해-”

 

“내가 일부러 너 보라고 대놓고 몸을 보여준 다음에도?”

 

“……들켰으니 다음부턴 안 오겠지라는 발상을 역이용하려고.”

 

“말은 청산유수야.

야, 사람이 말을 하면 이쪽을 보고 얘기해.”

 

 

하플링은 얼굴을 찡그리며 다크 엘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리따운 조형물을 닮은 나신의 흑색 피부가 그를 반겼다.

 

 

 “이제야 이쪽을 보는구나?”

 

 

하플링은 다크 엘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동시에 분을 삭이기 위해 애썼다.

그는 목소리에서 동요가 들리지 않길 바라며 웅얼댔다.

 

 

“우리 일행의 최대 단점은 자기 알몸을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들밖에 없다는 점이야.”  

 

 

고향에선 다 같이 냇물에서 멱을 감으며 발가벗고 놀았다는 용사,

원래부터 반은 벌거벗은 채로 검투사 일에 종사하던 전사,

얼굴이 새빨개지면서도 자기 같은 미녀에게서

눈 떼기 어려운 마음은 이해한다던 마법사,

신께서 내려 주신 육체는 부끄러워할 것 하나 없으며

뭣보다 수인 여성의 몸 따위에 여러분이 관심을 두실 리 없다던 신관은

최소한 혼탕온천에서 입욕하던 중이라는 변명거리라도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엘프는 도적이 숨어있는 곳을 향해

일부러 눈짓하고 슬쩍 자세까지 잡을 정도로

본격적인 노출광이었다.

 

아니, 적어도 변신 중일 때는

자기 마법의 효과를 보여주는 것뿐이니 

정상참작 해줄 수 있는 일말의 여지라도 남아있었지만,

변신이 풀린 인제 와서 뜬금없이 옷을 벗으며,

오히려 얼굴을 붉히면서까지 이 상황을 즐기는 모습은 

그녀가 변녀라는 명백한 증거였다.

 

하플링은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행동거지만 보면 영락없는 중년 아재인데…….”

 

 

훈련으로 살인이나 폭력에는 익숙해졌어도

이런 면에선 한없이 어수룩한 하플링의 천성이 

그대로 남아있던 도적으로서는

차라리 부패한 아저씨들이 대하는 편이 

미모의 아리따운 여성을 상대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쉬웠다.

하플링이 속으로 한탄하며 눈을 가리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다크 엘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혼탕에서 유일하게 눈 가리던 사람 답네.

내가 지금 널 공격하면 어쩌려고 

자진해서 시각을 포기해?”

 

 

그녀가 나뭇가지 위를 걸어 

그의 곁으로 자박자박 걸어오는 발소리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기에

하플링은 소리를 묻기 위해 이것저것 말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넌 완력도 부족하고,

이 근방에 무기라고는 내 단도밖에 없는데?

공격이라고 해봤자 기껏해야 

나무에서 밀어 떨어트리는 것밖에 더하겠어?

그나마도 네가 나보다 몸이 잽싸진 않으니

너 혼자 추락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리고 소리만으로도 네 위치는 다 알 수 있으니까

도망칠 염려도 없는데다-”

 

그 순간 하플링의 뺨에 다크 엘프의 숨결이 닿았다.

그는 말하던 그대로 굳어버렸다.

 

“핑계는 고맙지만, 그냥 눈을 떠.

어차피 여태까지 훔쳐봐 온 거랑 크게 다를 것도 없어.

변신할 때 피부색이랑 머리카락색 빼고는 거의 그대로 유지했으니까.

아, 유두 색은 좀 더 짙고 음모가 은발이긴 해.

그리고 여기 밑 쪽에 점도 있고. 볼래?”

 

 

상상만으로도 아연실색하는 하플링의 어깨에

둥그렇고 부드러운 지방이 얹혀졌다.

그는 자신이 절대 그런 것을 집중해서 본 적이 없었기에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내용을 장황히 설명했지만

다크 엘프는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솔직히 말해. 너 이런 거 좋아하잖아.

여행 중 흔들릴 때마다 눈을 못 떼던데, 뭘.”

 

 

하플링은 침을 삼켰다.

그 우렁찬 소리에 성 안에서 자고 있던 마왕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속옷도 안 입고 돌아다니는 여자를 앞에 두고도 멀쩡할 수 있는 건

신관에게 찰싹 달라붙어 다니는 용사와 

마법사와 관련 없으면 신경도 안 쓰는 전사밖에 없다고 항변하려던 순간,

 

하플링의 작은 귓속으로 

다크 엘프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눈 .”

 

 

그러자 하플링은 눈을 떴다.

그의 동공이 떨렸다.

 

 

“어떻게-!“

 

 

입 다물어.

 

 

하플링의 입이 닥쳐졌다.

뒤이어 그의 머리만 한 크기의 유방이 그의 시야를 막았다.

하플링을 품 안에 꼭 껴안은 다크 엘프가 즐거운 듯 말했다.

 

 

“아, 정말 오래전부터 이러고 싶었어~.

이렇게나 귀여운 사람을 눈 앞에 두고 

손대기는커녕 임무를 그르칠까 봐

오히려 거리를 두게 만들고 말이야.

마왕도 참 마족 험하게 굴려.

정말이지 고문이 따로 없었어.”

 

 

동요한 하플링이 팔을 버둥거리기 시작하자

즐거운 듯 재잘거리던 다크 엘프가 다시금 속삭였다.

 

“참, 내 정신 좀 봐.

반항하지 마.

 

 

그러자 아까처럼 버둥대던 하플링의 움직임이 멈췄다.

 

 

“뭐, 그래도 이렇게나 날카로운 가시를 숨기고 있었으니

결과적으로는 옳은 판단이었지만 말이야.”

 

 

 

다크엘프는 하플링의 단도를 빼앗았다.

그러자 하플링은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순히 그녀에게 단도를 넘겨주었다.

그녀의 명령을 순순히 따르는 하플링을 내려다보며

다크 엘프는 방긋 웃었다.

 

 

“아~ 처음부터 이렇게 순순히 

내 말대로 해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말이야. 그렇지?”

 

 

소인족으로서 불쾌해 할만한 말이었음에도,

하플링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한 채

눈만으로 다크 엘프를 쏘아보았다.

그녀는 마치 놀리는 것처럼 말했다.

 

 

“아이고, 말 잘 들으니까 얼마나 좋아?

그렇지, 맘마라도 먹을래?

입 벌려도 돼.”

 

푸핫하고 숨을 몰아쉰 하플링이 외쳤다.

 

“대체 어떻게-!”

 

그의 입 사이로 풍만한 유방이 들어왔다.

다크 엘프는 사실상 약점을 완전히 노출한 채 

하플링에게 몸을 맡긴 모양새였으나,

정작 하플링은 다크 엘프의 볼록 튀어나온 

유두를 씹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그녀의 달콤한 체취를 맡으며 

빳빳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크 엘프가 하플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이고, 우리 아기 궁금한 게 많나 보구나?

음, 어디부터 얘기하면 좋으려나?

일단 마법 차단 가루에 관해서 얘기해볼까?”

 

 

하플링이 최대한 저항하려 노력한 결과

유두가 핥아진 다크 엘프는 

기분 좋은 듯한 신음을 낸 후 말했다.

 

 

“수도권에서만 일했으면 모르는 것도 당연하지만,

같은 양의 마법 차단 가루라도 

마나가 짙은 장소에선 효과가 떨어진단다.

 

마왕성에 가까워질수록 마나 농도가 짙은 건 알지?

오죽하면 마법적 소양이 없는 사람 눈에도 안개로 보일 정도잖아?

그래서 여기선 마법 차단 도구는 효과가 굉장히 짧아.

손가락이 살짝 베인 것 정도는 든든하게 감싸주는 양의 붕대라도 

팔 하나가 날아가 피가 철철 흐르는 상황에서

똑같은 양을 써서 같은 효과를 보긴 어렵잖아?

그런 거야.

 

마법사의 경우에는 이 넘치는 마나를 이용해서 

더 강력한 마법 차단을 시전할 수 있지만,

도구로는 그런 응용이 불가능하지.

네가 마법사라면 바로 눈치챘을 텐데,

마법에 조예가 전혀 없는 바람에 실수해 버렸구나?”

 

 

다크 엘프가 하플링의 입에서 젖가슴을 떼어냈다.

실실 웃는 엘프와는 달리 

하플링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그래서 헛소리를 하며 시간을 끈 거였나?

마법 차단의 효과가 금방 끝날 거라는 걸 알아서?”

 

“그것도 있고, 너랑 숨기는 것 하나 없이

진득하게 얘기 나눠보고 싶기도 했고.

아, 미안해. 눈 감아도 돼.

 

 

하플링은 따가웠던 눈을 질끈 감고 물었다.

 

 

“아까부터 대체 날 어떻게 조종하는 거야?

무슨 사악한 마법을 부린 거냐?”

 

“조종이라니, 거창하기도 하지.

가벼운 암시랑 현혹마법을 섞은 술법에 불과해.

내 말을 집중해서 경청한 상대 외에는 전혀 쓸모없는,

마법이라고 부르기도 부끄럽고

마법사도 눈치 못 챌 수준의 잔기술이지.

 

그냥 마왕령의 마나 농도가 워낙 진하다 보니까

마법 저항이 낮은 도적 따윈 

농락할 수 있을 정도로 강화됐을 뿐이야.”

 

 

하플링 도적은 거센 숨을 몰아쉬며 추궁했다.

 

 

“그래서 종일 자거나 씻는 동안에도

변신 마법을 유지할 정도로 용의주도했으면서

오늘따라 흔적을 많이 남긴 거냐?

나를 일부러 끌어내고 무력화하려고?”

 

 

다크 엘프가 청량하게 웃었다.

 

 

“하하하!

날 좋게 봐주는 건 고마운데 너무 과대평가하진 말아줘.

시나리오에 있는 부분도 있지만, 실은 마지막 임무를 

마무리 짓는 날이라 마음이 해이해진 게 더 크거든.

나는 너랑 달리 어릴 적부터 첩보 기술을 배우며 크질 않았으니까,

네 기준으로 봤을 때는 허술한 점이 많은 건 어쩔 수 없어.

아, 마도구 돌려줘.”

 

 

하플링은 그녀의 명령대로 마도구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가 턱에 힘을 준 채 말했다.

 

 

“이미 내 뒷조사까지 다 마쳤군?”

 

 

다크 엘프가 몇 마디 주문을 외우자 

마도구는 먼지조차 남기지 않고 불타 사라졌다.

그녀는 다시 하플링을 바라보며 답했다.

 

 

“뭐, 그렇지. 설마 이렇게까지 뛰어난 도적일 줄은 몰랐지만.

첨언하자면 너만 특별대우한 건 아니야.

우리가 같이 여행하는 사이 

용사 일행의 뒷조사는 거의 다 마쳤어.

서큐버스와 인큐버스를 동원할 수 있는

마왕군의 첩보실력을 얕봐선 곤란해.”

 

 

하플링이 이를 갈았다.

다크 엘프는 진정하라는 듯 양 손바닥을 보였다.

 

 

“오해하지 말아줘.

난 마왕군 보다는 용병에 가까워.

인간 마을에서의 내 명성을 들은 마왕 측에서

쓸모가 있겠다면서 접촉해왔거든.

그 이후로 서로 상부상조한 것뿐이야.

 

나는 인간 마을에서 얻은 정보를 제공하고,

마왕군은 내가 마왕령을 돌아다니면서 사냥하는 중에 

멋모르는 병사가 나를 죽이지 않도록 안전을 보장해주고.

마왕의 일시적인 첩보부원 같은 거였어.

내 보고를 들었다면 짐작이 가겠지만,

그나마도 이번 임무를 마지막으로 그 관계도 끝났고.”

 

”이번 임무라면, 용사 일행의 감시 말인가?”

 

“그렇게 일차원적인 임무는 아니었지만, 뭐 그것도 포함해서.

사실 내가 보낸 정보보다 제대로 된 첩보부대가 

따로 수집한 정보 쪽이 더 가치 있는 경우가 잦았어.

덕분에 너희 호감을 사서 

남은 임무를 수행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됐지.

 

그런 면에서 엘프의 외모는 유용했어.

대충 전에 비슷한 경우를 본 적 있다는 식으로 둘러대면 

별걸 다 안다고 해도 크게 의심을 안 하더라.

그냥 다들 착해서 넘어가 준 걸 수도 있긴 하지만.”

 

“남은 임무라면, 대체 뭐냐?

용사 일행의 능력이나 약점을 간파하는 것 말고?

암살? 방해 공작? 성검 탈취?”

 

 

다크 엘프는 즐거운 듯 웃었다.

 

 

“아하하! 그런 거였으면 오히려 손쉬웠지.

마왕군이 파놓은 함정 쪽으로 이끌거나 

다들 잠든 사이에 슬쩍 해치우면 됐을걸?”

 

“그럼 대체 뭘 노리고-”

 

 

다크 엘프가 하플링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녀가 빙긋 웃고 속삭였다.

 

 

비장의 수단 전부 버려.”

 

 

하플링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그의 손은 혁대 안에 숨겨놓은 독침부터 시작해 

갑옷 아래에 보관하고 있던 각종 도구와 장비들을 버리기 시작했다.

하플링이 허물을 벗듯 나무 아래로 비기들을 버리는 모습을 

다크 엘프는 입술을 핥으며 구경하다가 말했다.

 

 

“많기도 해라.

나한테서 최대한 정보를 뽑아낸 후에 몰래 

제압려던 모양인데, 미안하게 됐어.

대신이라고는 하기 뭣하지만 답해줄까?

내가 마왕군에게서 받은 임무가 정확히 뭐였는지?”

 

 

하플링은 치아 뒤쪽에 숨겨 두고 있던 

자살용 독약까지 뱉은 후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미 완벽히 무력화되었다.

다크 엘프는 십중팔구 그녀가 내킬 때까지 잔뜩 떠든 다음 

입막음을 위해 그를 살해할 것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 그를 묻어버린 후 

용사 일행에게는 짐꾼이 마지막 순간에 겁을 집어먹고 

야간도주를 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완전범죄를 성립할 수 있었다.

 

하플링은 과거 어둠 속에서 일하던 시절의 업보 때문에라도

그가 곱게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이렇게 허무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도 이유도 모른 채 

객지에서 비명횡사하는 게 태반인데

아리따운 다크 엘프에게 농락당하다 죽는 건 

이쪽 업계에선 호상이지.’

 

 

모든 저항수단이 완전히 거세당하자

오히려 마음 한켠이 후련해진 하플링은 

자포자기하고 말했다.

 

 

“그래, 한 번 들어나 보지.

마왕군이 뭘 시키든?”

 

 

다크 엘프가 빙그레 웃고 답했다.

 

“백문이 불여일견.”

 

 

다크 엘프는 하플링과 어깨동무를 하며 주문을 외웠다.

그녀가 달빛의 정령과 바람의 정령에게 부탁하자

비밀을 까발리기 좋아하는 장난꾸러기 정령들은 흔쾌히 승낙했다.

다크 엘프에게서 그들의 목표와 정확한 위치를 들은 정령들이

각종 마법과 물리적 장치, 농축된 마나를 피해 가며

먼 장소에서 보이는 빛과 소리를 전달했다.

하플링과 다크 엘프의 눈앞에

마왕의 진정한 음모가 드러났다.

 

 

 

<S#124 신관의 천막 / 밤>

 

“아아앙❤! 용사님!”

 

“신관 씨, 저, 저, 더는!”

 

“싸주세요, 용사님!

제 안 깊은 곳에 용사님의 씨앗을 

마음껏 내보내 주세요!”

 

“갑니다! 전부, 전부 받아내 주세요!”

 

“하아아앙❤!”

 

 

<end scene>

 

 

 

하플링 도적은 그렇게 

난생 처음으로 음란 동영상에 노출되었다.

 

 

“이게 뭔-!”

조용히 .”

 

 

두 지인이 함께 거사를 치르는 광경을

관음해버린 하플링이 기겁했다.

다크 엘프는 빠르게 그의 목소리를 낮춘 후

얼굴을 붉히면서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둘, 매일 밤 서로 치료해준다는 명목으로

서로 마사지나 해주면서 속내를 삭히더니만

인제야 마지막 한 발자국을 나아간 거야.

 

아아, 이렇게 되기까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

‘다시는 맞이하지 못할지도 모르는 마지막 밤’,

‘내일의 전투에 대비해 후회 하나 남기지 않고 

만전을 기하기 위한 선택’ 같은 말로

용사를 부추기지 않았으면 틀림없이 실패했을 거야.”

 

 

하플링이 혼란에 빠진 눈으로 다크 엘프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 의미를 곡해해서 답했다.

 

 

“아, 걱정하지 마, 우리 전사랑 마법사도 잘 이어줬어.

자, 봐봐.”

 

 

그녀가 마치 무언가를 쥐고 돌리는 시늉을 하자

정령에게서 전달받는 화면이 다른 천막으로 바뀌었다.

 

 

 

<S#122 전사의 천막 / 밤>

 

마법사가 전사 위에 누운 채로

위아래로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애액이 묻은 살결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천막을 가득 채웠다.

그 안에서 마법사가 눈물범벅이 된 채로 

전사의 얼굴 앞 입을 맞추며 소근댔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사랑해.”

 

 

이에 전사도 전에 본 적 없는 뜨거운 눈으로

마법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사랑한다, 에스메랄-”

“아, 안 돼! 진명은 금지야!”

 

 

전사는 안타까움 속에서 가까스로 침을 삼켰다가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에스미, 나도 사랑한다.”

 

“하으읏!”

 

 

연기가 모락모락 날 것처럼 얼굴이 빨개진 마법사가 

전사의 두꺼운 목을 와락 양팔로 감싸 안았다.

그녀도 환희에 찬 목소리로 전사를 애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마법사가 기쁨의 눈물 속에서 말했다.

 

 

“좋아해 줘. 내 몸으로 기분 좋아져 줘.”

 

“기분 좋다.”

 

“읏❤ 그리고 맹세해줘. 죽지 않겠다고. 하읏!

마왕이 마법을 쓰면 최선을 다해 피할 거고,

용사를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바보 같이 다 처맞지는 않겠다고!”

 

“맹세한다.

하지만, 너를 위해서라면 어떤 위험이라도 무릅쓸 거다.”

 

“이 바보야❤ 그런 말은 하지 마!

같이 살아서 돌아가야 할 것 아니야!”

 

 

<end scene>

 

 

 

두 남녀가 마침내 솔직해진 채

알콩달콩하게 말을 나누는 풍경을 

다크 엘프는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보는 것만으로도 배부르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 둘의 경우엔 용사와 신관이랑은 정반대였지.

육체적으로는 궁합이 딱 맞았지만

서로 자라온 배경이 너무 달랐어.

그 간격을 좁히지 않은 채로 너무 일찍 이어졌으면 

틀림없이 서로 쉴 새 없이 싸우고 오해하면서 부딪혔을 거야.

 

평상시였다면 그것도 느긋하게 보는 맛이 있겠지만

마왕토벌처럼 정신적 압박이 큰 여정 중엔

그런 사소한 어긋남이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거나

돌이키기 힘든 사고로 이어질 수 있어서

굉장히 세심한 조율이 필요했어.

 

내가 항상 옆에서 둘 사이를 중계해줄 수 있다면 모를까,

네 눈치 살피랴, 용사랑 신관도 이어주랴,

너무 바쁠 것 같아서 조금 더 안전한 선택지를 택했지.

결과는? 보다시피 완벽했어.

늘 새로워. 짜릿해. 난 정말 최고야.

내가 이 맛에 이 부업을 못 멈춰.”

 

 

다크 엘프가 자랑하듯 떠벌렸는데도

하플링은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입만 뻥긋거릴 뿐이었다.

다크 엘프가 그를 흘깃 바라본 다음 말했다.

 

 

“조용히 하라고만 했지

말하지 말라고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괜찮니?”

 

 

하플링은 간신히 영상에서 눈을 떼고 

다크 엘프 쪽을 바라보았다가,

그의 눈앞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둔덕 때문에 얼굴을 붉히며 

도로 영상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가,

마법사와 전사의 개인적인 시간을 목도하곤

아예 고개를 푹 숙였다.

 

 

“생각보다 충격이 큰 것 같은데,

괜찮아? 가슴 만질래?”

 

 

다크 엘프의 위로 아닌 위로에

하플링이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뭐하자는 짓거리야…….”

 

“응? 말했잖아.

마왕군에게서 받은 임무라고.”

 

 

하플링은 기가 막힌다는 듯 물었다.

 

 

“……이게?

뭐, 용사 일행을 육욕에 빠지게 한다거나,

유혹에 취약하게 하겠다, 뭐 그런 취지로?”

 

 

다크 엘프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아니, 나보다 더 오래 함께 여행해온 주제에

동료를 너무 모르는 것 아니야?

쟤들이 지금 육욕 같은 욕망에 물들어서 저러는 줄 알아?”

 

 

그녀가 답답한 듯 토로했다.

 

 

“서로 마음이 맞고, 몸이 맞는 사람들끼리

긴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몸과 마음을 피폐하게 하던 수많은 역경을 뚫고!

마침내 이어지게 되었는데!

어떻게 그걸 성욕에 졌다는 식으로 깎아내릴 수 있어?

 

쟤들이 지금이 유혹에 약해진 걸로 보여?

천만에!

오히려 지금 쟤들 눈앞에 색마가 나타나면

누구보다도 먼저 정신 차리고 두들겨 팰 걸?

쟤들 사이에 있는 건 성욕처럼 단순한 게 아니니까!”

 

 

다크 엘프의 눈이 빛났다.

그녀는 마치 선포하듯 말했다.

 

 

“사랑이야, 사랑!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고귀하고, 아름답고, 순수한!

순애를 하고 있다고!”

 

 

하플링의 얼굴에 수많은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공포, 경악, 혼란, 의심.

 

다크 엘프는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쉬면서 

정령과의 연결을 끊었다.

교성이 사라져 조용해진 나무 위에서 그녀가 말했다.

 

 

“마왕이 내게 내린 마지막 임무는,

만약 용사 일행 중에 

서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둘을 단단하게 엮어주라는 거였어.

기왕이면 섹스까지 하게.”

 

 

하플링은 비명을 지를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대체 왜?”

 

 

이번에는 다크 엘프가 혼란에 빠진 것 같았다.

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되물었다.

 

 

“왜……냐니?

좋잖아, 순애 섹스.

왜? 넌 싫어?”

 

“아니, 그야 좋으냐 싫으냐를 따지자면 좋지만!

내 취향을 떠나서 대체 마왕이 뭘 어쩌자고

용사 일행의 중매쟁이 노릇을 하는 건데?

 

어차피 싸우면 자기가 이길 거니까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 즐기기라도 하겠다, 이거야?

아니, 설령 그럴 자신이 있더라도 너무 불필요하잖아!

이딴 걸 마지막 임무랍시고 너한테 줬다고?

적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침투한 간첩한테?

암살이나 파괴 공작 같은 게 아니라?”

 

“순애 섹스를 이딴 거라니…….

사랑의 멋짐을 모르는 네가 불쌍해.”

 

“아니!

거듭 말하지만 이건 내 취향을 떠나서 

마왕한테 의미가 없는 행동이라고!”

 

 

다크 엘프가 미간을 찌푸렸다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딱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아하, 그러고 보니 인류는 아직 

이번 마왕의 정체를 모르겠구나?

신의 힘을 담은 성검한테 취약하다는 것 빼곤.”

 

“너야말로 인간의 첩보실력을 얕보지 마라.

무수히 많은 천리안 마법을 시도한 끝에 마나 안개를 뚫고 

확보한 대략적인 정보는 분명히 있다.

전신을 감싸는 검은 피부, 위압감을 주는 한 쌍의 뿔,

근육으로 뒤덮인 육체 같은 것.”

 

 

다크 엘프가 다시 봤다는 듯 휘파람을 불었다.

 

 

“아하, 그렇다면 이번 마왕의 종족이 뭔지도 알아?”

 

“악마의 일종이겠지.

블랙 드래곤으로 판단하기에는 

비늘을 탐지해낸 적이 따로 없으니까.

그래서 용사 일행은 다들 서로 진명으로 부르지 않았다.

만에 하나라도 우리의 이름이 넘어갈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악마는 진명을 아는 상대에게 더 위험한 술수를 부리니까.”

 

 

다크 엘프는 감탄했다는 듯 손뼉을 치고 말했다.

 

 

“합리적인 추론이네.

하지만 아쉽게도 틀렸어.”

 

“뭐라고?”

 

“이번 마왕의 종족은 바이콘이야.”

 

 

하플링은 순간 그의 귀를 의심했다.

 

 

“바이… 콘?”

 

 

엘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플링의 미간이 좁아졌다.

오늘 밤만해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써 수십 번은 일어났지만,

이것은 그 중에서도 가장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엘프가 하플링에게 말을 걸었다.

 

 

“마족이 어떻게 태어나는지는 알지?”

 

“마물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사념에 뭉친 마나 속에서…….”

 

“맞아, 그리고 마왕은 마나가 가장 농축된 곳,

즉 마왕성에서 태어난 마족이지.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마왕을 만드는 사념은 

마왕성에 모인 사념 중 가장 흔한 것이라

역대 마왕 중에는 탐욕의 드래곤이나 

파괴의 악마 같은 녀석들이 많았어.

그저 이번에는,”

 

 

다크 엘프가 피식 웃었다.

 

 

“그저 이번에 마왕이 탄생하려던 시점에 

우연히 불륜하던 쓰레기들의 사념이 많았던 것뿐이야.

그래서 바이콘이 탄생했지.

그런데 당연히 지나치게 농축된 마나로 인해…….”

 

 

다크 엘프가 발끝으로 나뭇가지를 가볍게 톡톡 찼다.

짙은 마나에 장기간 노출되어 

비틀린 채로 성장한 나무가 가볍게 떨렸다.

 

 

“본성이 뒤틀리고, 왜곡되었는데……

그 결과 특이한 일이 벌어졌어.

유니콘이어야 했을 사념도 도중에 섞이기라도 한 건지,

처녀를 없애고 싶은 종족적인 본능은 유지하면서도

정작 순애 외의 방식은 혐오하는 존재가 되었더라.

 

그래서 최대한 빨리, 많은 순애커플이 

잠자리를 갖도록 독촉하는 마왕이 탄생해 버렸어.”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들은 것처럼

하플링의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즉, 이번 대의 마왕은 

순애대마왕이야.”

 

“미친 소리!”

 

“미친 소리 같지만 전부 사실이다.

그래서 내 임무는 용사 일행을 순애 섹스로 유도하는 거였어.

그게 이번 마왕의 본능이자 삶의 목적이니까.”

 

 

하플링은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거의 한 세대에 걸쳐 꾸준히 인류를 공격하고,

최근 들어선 대대전인 전쟁까지 선포한 마왕의 진면목이

뒤틀린 순애충이었다고?

하플링의 반응이 재밌는지 엘프가 킥킥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말로만 들으면 웃기게 들리지만

그래도 나름 훌륭한 악의 수장이니까 너무 심란해하지는 마.

순애가 아닌 관계는 모조리 죽여버리는 미친놈이거든.

 

문화적으로 난교가 일상이었던 어느 야만인 부족은

가장 어린 남아 한 명을 빼고는 모조리 몰살당했어.

아무리 시골구석에서 사는 사람일 지라도

자식까지 둔 주제에 불륜을 저지르던 부모를 죽이기 위해 

일부러 군대까지 파견 보냈고.

 

게다가 유니콘만큼이나 깐깐해서 

나도 이번 기회에 순애 한 번 해보겠다는데도 

조건을 엄청나게 붙이더라니까?

최면순애는 순애가 아니다, 강간순애도 순애가 아니다 

같은 소리나 하면서 말이야.”

 

 

다크 엘프는 은색 머리카락을 배배 꼬면서 

은근히 하플링을 향해 눈짓했지만

마음이 어지러웠던 그는 그런 걸 알아차릴 상황이 아니었다.

하플링은 마치 스스로를 납득시키려는 것처럼 말했다.

 

 

“설령 네가 전부 사실대로 말했더라도, 말이 안 돼.

그래, 정말로 마왕이 정신 나간 바이콘이고,

그래서 순애하는 사람을 한 쌍이라도 더 만들고 싶었다고 치자,

그렇다고는 해도 마왕의 입장에서는

용사를 방해하는 게 맞지 않아?

용사의 팔다리를 분지른다고 해서 순애를 못하는 건 아니잖아?”

 

 

다크 엘프는 그녀가 신호가 깡그리 무시당한 게 아쉬웠는지

조금 시무룩한 어조로 답했다.

 

 

“흉악하긴 하지만 맞는 말이야.

마왕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정도로 무자비하지.”

 

“그렇다면 어째서?”

 

“마왕은 용사한테 죽을 생각이거든.”

 

 

하플링이 눈을 깜박였다.

대화가 이어질 때마다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정보가 들어와

머리가 터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뭐, 뭐뭐, 뭐?”

 

 

말도 제대로 못하는 하플링을 위해

마물사냥꾼이 차근차근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서로를 사랑하는 두 남녀가 맺어지고 그 과실을 맺기 위해,

그러니까 정부 차원의 관점으로 해석하자면,

출산율을 올리기에 가장 큰 적이 무엇인지 알아?

 

생존의 위협이야.”

 

 

그녀는 하플링을 품안에 껴안고 시선을 위로 올렸다.

별이 빛났다.

 

 

“아무리 모든 방해물이 사라지더라도

생존이 힘들다고 느끼면 동물은 자연히 번식을 꺼리지.

일자리가 없어서, 직장을 잃을 것 같아서,

아이를 낳고 관계를 맺어도 그걸 똑바로 유지할 자신이 없어서.

 

단기간의 적절한 스트레스는 생존본능을 자극하지만

이미 마왕은 지나치게 오랜 기간 통치해왔어.

마왕의 명령으로 부모와 부족을 잃었던 아이들이 장성하여

마왕을 처단할 특수부대원이 될 때까지의 시간이었으니.”

 

 

바람이 불었다.

다크 엘프는 품 안의 하플링에게 먼지가 닿지 않도록

그를 꼭 껴안았다.

 

 

“그래서 마왕은 인류를 향한 전면전을 선포한 거야.

인류를 위협하는 성향을 지닌 모든 마족을 

한 곳에 모으고 용사 일행에게 제물로 바치는 동시에

인류 중 누구를 죽이고 누구를 살릴지 냉철하게 정하고 따랐지.

그 결과 서로를 아끼던 이들은 사랑의 힘으로 살아남았고,

위기의 순간 서로를 내치거나 간통, 불륜을 저지른 이들은 

모조리 죽였다.

 

그렇게 순애에 방해될 적들을 다 솎아낸 후,

이 세계에서 순애를 향한 유일한 위협이 마왕 자신만 남게 되자 

그조차도 없애기로 한 거야.”

 

 

하플링의 숨이 거칠어졌다.

 

 

“인류는 그를 악마라고 비난하고, 효수한 뒤 

세상에 평화가 도래했음을 선포하겠지.

마왕은 그 모든 걸 알고 있어.

그럼에도 그 길을 걷기로 결심했어.

그래야 마땅하니까.

 

진실보다도 중요한 가치가 있으니까.

진실한 사랑은 맺어지고,

선은 반드시 승리하며 악은 필멸한다는,

인류의 신념에는 보상받을 가치가 있으니까.”

 

 

다크 엘프가 숨죽여 말했다.

 

 

“그래서 마왕은 용사의 손에 스러질 거야.

한 때는 순애를 위해 필요한 영웅이었지만

더는 아니니까.

 

마왕은 용사의 검에 기꺼이 찔릴 거야.

그는 견뎌낼 수 있으니까.

그는 인류의 영웅이 아니니까.

 

숨어있던 악에게서 인류를 구원하고 

나무 아래 대지가, 나뭇가지 속 바람이,

밤하늘 위 별빛이 되어 순애를 영원히 지켜볼 수호신,

 

어둠의 왕이니까.”

 

 

 

 

<S#125 마왕성 앞 / 새벽> - 하플링 도적의 경우

 

 

더욱 밝은 빛이 떠오르기 위해

하늘의 어둠이 한층 더 짙어졌을 무렵,

다크 엘프가 말했다.

 

 

“이걸로 내 시나리오는 끝이야.

재밌었으면 좋겠네.”

 

 

하플링이 고개를 들었다.

 

 

“시나리오라고?

……어디까지가 진실이냐?”

 

“전부.

네게 진실을 전부 밝히는 것까지가 마지막 시나리오였거든.

감상은 어때? 뭘 해도 이길 전투에 참가하기 위해

마왕성까지 갔다 오는 게 무의미하다는 생각은 들었어?”

 

“……네 말대로라면 아귀가 맞는 부분이 많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동시에 네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명확한 물증도 없으니…….

나는 용사의 동료로서 그들과 함께할 거다.

네 말에 거짓이 없다고는 해도 

마지막까지 짐꾼으로 일한다 해서 손해 볼 일은 없지.”

 

“그런가? 아쉽게 됐는걸.”

 

 

다크 엘프가 손에 턱을 괴며 답했다.

하플링은 무엇이 아쉬우냐고 물어볼 기운조차 남지 않았기에

그대로 하던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만에 하나 네 말에 거짓이 있어 

용사가 위험에 처한다면,

내 본업이 도적이라는 걸 들키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마왕을 죽이고, 널 뒤쫓을 거다.”

 

 

분명한 협박에도 다크 엘프는 피식 웃었다.

 

 

“명명백백한 간첩을 상대로 

단도를 뽑고도 머리카락 하나 안 건든 도적의 말 따윈

하나도 무섭지 않은 걸?”

 

“웃기지 마라. 내가 지식이 부족하고 

지나치게 방심해서 일을 그르쳤을 뿐,

다음번에 너를 만나면-“

 

“그때는 칼 대신 좋은 포도주나 한 병 들고 와.

또 여기보단 분위기 있는 장소에 데려가 줘.

나무 위에서 바라보는 밤하늘도 좋지만 

기왕이면 침대 같은 게 있는 곳이 좋겠어.”

 

 

능청스러운 다크 엘프의 말에

하플링은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그 틈 사이로 다크 엘프가 끼어들었다.

 

 

“내 ‘잔재주’ 말인데.

현혹마법의 일종이라고 말했던 거 기억나?”

 

 

하플링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게 말이지, 실은 조건이 꽤 많아.

내 말을 잘 듣기만 한다고 무조건 따르는 되는,

그런 굉장한 게 아니야.

복잡한 명령은 소용이 없고,

그렇다고 명령이 오래가는 것도 아니고,”

 

 

다크 엘프가 장난스럽게 손가락을 뻗어

하플링의 뺨을 꾹 하고 찔렀다.

 

 

“뭣보다 나한테 호감이 있는 사람한테밖에 효과가 없거든.

정확히는, 호감이 높은 사람일수록 명령을 잘 따라주지.”

 

 

그녀의 말을 이해한 하플링의 동공이 흔들렸다.

 

 

“게다가 진심으로 듣기 싫어하는 명령 같은 건 저항할 수 있어.

태생적으로 마법 저항력이 높은 하플링들에게는 더 쉽고.

말했잖아? 잔재주라고.”

 

 

다크 엘프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하플링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그녀는 이어서 말했다.

 

 

“뭐, 애욕을 애정으로 착각하는 일이 

흔하다고 변명한다면 막지는 않겠어.

 

상대의 자유의지를 완전히 빼앗는 건 

내 빈약한 잔재주로는 할 수도 없고,

그런 짓을 했다간 마왕이 남겨놓은 

직속부대가 나를 죽이러 쫓아올 거라서.

 

하지만 말이야…….”

 

 

다크 엘프가 하플링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그녀의 은색 머리카락이 밤바람 속에서 휘날렸다.

그녀의 얼굴이 하플링에 근접했다.

그녀의 입술이 하플링의 차가운 뺨에 스쳤다.

그녀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그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네가 만약 날 한 번 더 믿어줄 수 있다면,

모든 일을 다 끝내고 난 후 

우리가 처음 만났던 선술집으로 와주지 않겠어?”

 

 

다크 엘프가 하플링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 때는 네가 뭘 물어보든 전부 다 말해줄게.

내가 몇 살까지 나무 타다가 굴러떨어졌는지부터,

성경험 횟수에, 그리고

나라고 수치심이 없어서 아무한테나

알몸을 보였는지 같은 것까지,

전부 다 가감 없이 알려줄게.”

 

다크 엘프는 하플링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녀는 허리를 펴고 색이 살짝 짙어진 뺨아래로

입꼬리가 내려간 미소를 지은 다음 그에게 말했다.

 

 

“기다릴게.”

 

 

그 후 다크 엘프는 자신에게 변신주문을 걸었다.

마물사냥꾼이 하플링에게 속삭였다.

 

 

“눈 감고 100까지 센 다음,

길잡이 역할까진 완수했지만 마왕을 상대하는 것은 두려워 

도망친 마물사냥꾼을 대신해 용사 일행을 깨워주겠어?

마법 쓰는 일행들에게 마법을 암기할 시간은 충분히 줘야 하니까.

부탁해.”

 

 

그 말을 끝으로 마물사냥꾼은 나무 아래로 뛰어내렸다.

하플링은 그녀가 벗었던 옷을 주워서 차 입고,

개인천막과 활, 화살을 챙긴 후, 조금도 급하지 않은 것처럼 

한 걸음 한 걸음 인간 마을을 향해 되돌아가는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지평선에 조금씩 가까워지는 그녀의 등을 바라보며,

하플링은 몽환적인 기분 속에서 

무언가 당연해선 안 되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살아있었다.

 

 

그는 마치 이제서야 마법이 풀린 것처럼 입을 벌렸다가,

지평선에 가까워진 마물사냥꾼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하플링는 한숨을 쉬고 조심조심 나무 아래로 내려갔다.

널부러진 장비도 전부 챙기고 갑옷을 도로 입었다.


그리고는 나무에 기댄 채 자리에 주저앉아 

눈을 감고 천천히 100까지 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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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339자...

ㄹㅇ 잘만 하면 15화도 쓸 수 있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