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인 줄 알았다.



아니, 분명히 '끝'이었다.



나는 마왕의 가슴팍에 검을 꽂아 넣었고, 마왕은 그것으로 명을 다했다.



용사가 마왕을 무찌르는 이야기. 어릴 적 어머니가 읽어주셨던 평범한 동화 이야기.



그거면 충분했다. 내 이야기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런데, 왜 나는 다시 돌아왔는가.



나는 왜 이 이야기의 시작으로 다시 돌아왔는가.




*




"어...그러면 나부터 소개를 하면 되나?"




덩치 큰 드워프 사내가 머리를 긁적이면서 멋쩍게 웃었다. 제국 최고의 방패. 그는 자신의 이명을 말하면서 부끄럽다는 듯 다시 한 번 웃음을 내뱉었다.



그 사내 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제국 최고'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전사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한곳에 모인 이유는 당연하게도 마왕 토벌 때문이다. 제국을 위협하는 마왕을 처단하라는 황제의 명령 아래 조직된 파티. 그 파티가 처음 결성된 오늘, 천막 안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저마다 인사를 주고 받았다.



그들이 친해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교성이 좋은 몇몇을 중심으로 사람들은 하나 둘 모여들었고, 호탕한 웃음과 함께 곳곳에서 왁자지껄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맨주먹으로 오우거랑 맞치기를 이겼다는 허세 섞인 무용담부터, 마왕군의 기습에 아끼던 드래곤을 잃어버렸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까지. 사람들은 하나씩 이야기를 풀어냈고, 빙빙 돌아가던 차례는 어느새 내게로 넘어왔다.




"자, 그러면 이번에는 이 파티의 주인공 차례죠? 겨우 열한 살에 소드마스터 직위를 획득한 우리 제국 최고의 용사님!"




낮 부끄러운 소갯말에 이어 갈채같은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웃었다. 저절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엘프의 소갯말이 기분이 좋았다거나, 저 드워프 사내처럼 이 분위기가 어색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끔찍했다. 이 상황이 끔찍해서 웃었다.



모든 상황이 똑같다. 분위기가 어색해 멋쩍게 웃는 드워프 사내부터, 거창한 소갯말로 나를 소개하는 엘프까지. 모든 말과 행동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다.



아홉 번째의 결말.



그리고, 열 번째의 시작.



또다시 돌아왔다. 마왕을 무찌른 최후의 순간에서 파티가 결집된 최초의 순간으로.




"아이고, 용사님 어색하신가보다. 그러면 우리 자기소개는 나중에 할까요?"


"아뇨, 하겠습니다."




두 눈을 꾹 감고 앞으로 두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숨을 들이마셨다.



속이 거북했다.




"제가 사실 끔찍한 저주에 걸렸습니다."




그렇게 말했다. 시끌벅적했던 파티 분위기는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나는 말을 이어 나갔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은 하지 말아주세요. 마왕을 무찌르면 풀리는 저주니까요."




애써 웃음을 섞어가며 가볍게 말했지만, 파티 안에 흐르는 정적을 깨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조용했다.



심장 소리가 들려온다.



쿵쾅. 쿵쾅.



누군가 가슴을 옥죄는 기분이 든다. 숨이 답답하다.




"진짜로, 진짜로 걱정하지 마세요. 아마도 풀릴 겁니다. 아마도...."




더 이상은 한게였다.



천막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정신없이 숨을 헐떡였다.



두 눈을 찌푸렸다. 머리가 아프다.



뭐가 문제였을까. 혹시나 싶어 이번에는 모든 동료들을 살리면서 차근차근 공략했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공략이었다.



그런데, 왜.




"하아...."




깊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어올려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더럽게도 맑았다.




*




열 번째 공략이 끝났다.



덩치 큰 드워프 사내가 머리를 긁적이면서 멋쩍게 웃었다.




"어...그러면 나부터 소개를 하면 되나?"




*




스무 번째 공략이 끝났다.



맨주먹으로 오우거랑 맞치기를 이겼다는 허세 섞인 무용담에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었다.




*




서른 번째 공략이 끝났다.



덩치 큰 드워프 사내가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먼저 나서서 말했다.




"다들 자기소개는 필요 없으시죠? 워낙 유명하신 분들이니까요."




*




마흔 번째 공략이 끝났다.




*




백 번째 공략이 끝났다.




*




공략이 끝났다.



몇 번째 공략이었더라.



글쎄, 기억도 잘 안 난다.



아무튼 끝났다.




*




*




*




"너, 미래에서 왔지?"


"푸흡."




느닷없는 마법사의 질문에 사래가 들렸다. 마시고 있던 차를 잘못 삼킨 나는 한참이나 헛기침을 반복했고,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법사는 재밌다는 말을 내뱉었다.




"용사도 사람이구나. 헛기침도 할 줄 알고. 매번 딱딱하게 대답하고 행동하길래 기계인 줄 알았는데."


"무슨 말을 듣고 싶으신 겁니까?" 급한 대로 입가를 닦고 마법사를 쏘아봤다.


"말했잖아, 미래에서 왔냐고. 대답을 해."




어떻게 대답하는 게 좋을까.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보는 그녀 앞에서 잠시를 고민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실대로 말해도 아무런 상관 없었다. 실제로, 내가 이렇게 회귀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든 파티원 앞에서 공개했을 때도 결말이 달라지지는 않았으니까.



그래서, 그냥 말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와아, 상상했던 것보다도 더하네. 그런 이야기인 줄은 몰랐는데."


"미래에서 왔다는 추측은 어떻게 하신 겁니까?"


"그냥, 얼굴에 쓰여 있잖아. 세상 만사 귀찮다는 듯 행동하고, 매번 파티원들한테 철벽이나 쳐대고. 그리고 첫날에 그런 소동도 있었고."


"......."


"그럼 한 가지만 더 묻자. 대체 몇 번이나 회귀한 거야?"


"기억도 잘 안 납니다. 대충 천 번은 넘은 것 같은데."


"허."




내 대답에 그녀는 헛웃음을 내뱉더니 마법진을 펼치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의 마법을 감지할 수 있는 분석형 마법진이었다.




"이상하네. 너한테 시간과 관련된 마나 조작이 걸려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마법이 아니라 저주일 겁니다. 아마."


"아니아니. 저주도 결국 마나를 건드린다는 메커니즘은 동일해. 이건 세계의 법칙이야. 저 위에 있는 북쪽의 마녀나 마왕조차도 어길 수 없는 이 세계의 법칙."


"그럼 이 세계 위에 서 있는 존재가 이 상황을 만들었나 보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 역시 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이 세계 위에 서 있는 존재. 그런 존재라 함은ㅡ




"가령, 신이라던가."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매번 우리가 지극정성으로 기도하는 그 신이 우리를 버렸다고?"


"버린 건 저 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세계가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으니까."




진실이다. 신은 나를 버렸다. 그러지 않았다면 내가 원하는 결말을 일천 번씩이나 거부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래, 다른 건 다 그렇다 치자. 그게 전부 사실이라면, 왜 혼자만 그런 걸 알고 있어. 공유하면 되잖아. 신이 널 버렸다 한들, 우리 파티는 아무도 너를ㅡ"


"......."


"...이런, 이건 이미 했었나 보네."


"모든 경우를 돌려봤습니다. 할 수 있는 방법은 전부 동원해봤고요. 그런데, 그 결과가 지금 이곳이죠."


"아니. 아직 안 해본 게 한 가지 있을 텐데. 네 성격 상 절대로 할 수 없는 한 가지."




그렇게 말하면서 마법사는 한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그녀가 뭘 말하는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오래 전, 이 파티 전체에 내 저주를 말했을 때도 그녀는 비슷한 말을 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안됐다. 내 양심이 용납할 수 없었다.



아니, 양심 따위의 문제가 아니라 이거는ㅡ




"지금 세계를 멸망시키자는 말씀이십니까?"




마왕의 승리. 세계의 멸망. 내가 선택하지 않은 단 하나의 경우.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묻잖습니까. 지금 세계를 멸망시키겠다는 거냐고."


"아니, 나도 그럴 생각은 없어. 나한테도 소중한 곳이야. 하지만, 정말로 신이 널 버린 거라면 정해진 결말은 그것 뿐인 것 같아서."




이번엔 내가 대답하지 않았다. 반박할 수 없었다. 용사가 마왕을 이기는 결말이 이뤄질 수 없다면, 남은 결말은 마왕이 용사를 이기는 결말 뿐이니까.



이빨로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서야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신이 버린 건 나 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이 무한의 감옥에 갇힌 것은 내 의지를 꺾기 위한 과정에 불과할 뿐. 신이 버린 건 이 세계 전체였다.



마왕이 용사를 이기고 세계를 멸망시키는 결말. 운명은 그렇게 정해진 거다. 과정이나 이유 따위 없이, 그렇게 정해져 버린 거다.




"그래도, 상관없지 않아?" 일순간, 마법사가 웃음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마왕에게 이길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마왕이 이길 수도 없는 거잖아. 네가 굳건하게 우리를 지켜준다면 언제까지나ㅡ"


"지긋지긋합니다!"




소리를 내질렀다. 숨이 가쁘게 차올랐다.



온몸에 열이 달아올랐다. 계속해서 말했다.




"겪어보셨습니까? 변하는 것 없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이 세상을 살아보셨습니까? 마왕을 무찔러도 기쁘지 않고, 누군가 목숨을 잃어도 슬프지 않고, 그런 감정 없는 무의미한 삶을 수천 번씩 살아보셨냐고 물었습니다!"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뭐가 무의미하지 않죠? 어차피 내일이면 마왕이 죽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겠죠. 지금 제가 당신과 나눈 이 이야기조차 없던 일이 되는 겁니다. 전부, 전부!"


"확신해? 세상이 처음으로 돌아간다고."


"...뭐라고요?"


"정확히 말하자면, 네가 마왕을 무찌른 그 세계는 너와 함께 처음으로 돌아가는 게 맞냐고 묻는 거지. 확실하지 않잖아? 그 이후의 세계는 본 적도 없고 볼 수도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마법사는 내 눈 앞에 기다란 직선을 그려주었다.




"그러니까, 네가 마왕을 무찌르고 돌아간 세계는 이 세계가 아닌 거야. 쉽게 말해서 네가 마왕을 무찌를 때마다 하나의 세계가 구원받는 거지. 물론 그 마왕을 무찌른 용사님은 더 이상 그 세계에 남아있지 않겠지만."


"그 부분도 확신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 아닙니까. 지금 저 보고 그런 바보같은 희망을 믿으라고 하시는 겁니까?"


"맞아, 검증할 수 없는 바보의 바보같은 이론이지."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그렇게 됐으면 해서. 기억해주는 사람 하나 없이 혼자서만 이 시간대를 떠도는 건 괴롭고 힘든 일이니까."




천천히 내 쪽으로 걸어오던 그녀는, 내 옆에 나란히 서더니 힐끗 고개를 들어올렸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밤하늘이었다.




"궁금하네. 다른 세계의 용사님은 나처럼 이렇게 밤하늘을 쳐다봤을까? 이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나는 어떤 존재일까, 하고."


"......."


"없었나 보네. 그럼 질문 하나만 더."




그녀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이번에 그녀가 멈춰선 곳은 내 앞이었다.



그녀는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 둘이 사귀었던 세계도 있었어?"




*




"가끔, 밤하늘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나. 저 넓은 세상 속에서 나는 무슨 존재일까."




똑같은 날, 똑같은 장소. 밤하늘을 쳐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녀는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있잖아. 신기하게 널 봐도 비슷한 기분이 들더라. 뭘까 이거는?"


"뒤늦은 사춘기?"


"장난치지 말고. 솔직히 말해봐,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없는데."


"에휴, 됐어. 대답을 기대한 내가 바보지."




그렇게 한숨을 내쉬던 그녀는 이윽고 내 손을 맞잡았다.




"있잖아. 마왕을 무찌르고 나면 뭘 할 생각이야?"


"글쎄, 별로 하고 싶은 건 없는데."




갑작스러운 질문에 대답을 얼버무렸다. 이 반복되는 시간 속에 갇힌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보니, 가장 처음에는 뭘 하고 싶었더라.



그때는 분명 꿈이 있었다. 마왕 토벌이 끝나면 미래에는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는, 그런 꿈.



진짜로 뭐였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까먹어 버렸다.




"난 당당하게 아버지께 가서 자랑할 거야. 아버지, 아버지께서 곱게 키우신 딸이 세상을 구한 마법사가 됐어요, 하고."




웃음이 묻어나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나도 싱긋 미소를 지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읜 탓에 아버지와 단 둘이서 살아왔다는 그녀의 이야기가 문득 생각났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랑 오래오래 살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두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왜 대답 안해줘? 넌 싫어?"


"설마, 그럴 리가."




피식 웃으면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지키지 못할 달콤한 거짓말을 귓가에 속삭였다.




"평생동안 행복하게 해줄게. 사랑해."




그 다음날, 마왕은 죽었다.



그리고, 세계는 다시 돌아갔다.




"어...그러면 나부터 소개를 하면 되나?"




덩치 큰 드워프 사내가, 머리를 긁적이면서 멋쩍게 웃었다.




*




"묻잖아, 사귀었던 세계도 있었냐고."




계속되는 물음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내 대답에 마법사는 흠칫 놀라면서 뒷걸음질을 치더니, 이내 상황을 파악했는지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 그래! 하긴, 그러지 않고서야 처음 만난 날부터 나를 요상한 애칭으로 부르지 않았겠지."


"맞습니다. 그쪽이 먼저 고백해서 사귀었었죠."


"내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왜?"




어깨를 으쓱였다.




"...뭐, 굳이 생각해보자면 특이한 면은 있네. 사람이 텅 비어있으면서도 요상하게 빛나는 게, 저 밤하늘이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칭찬입니까 욕입니까?"


"내가 고백을 한 거라면, 그 시절의 내게는 칭찬이었겠지."


"지금은 아니고요?"


"좋은 대로 생각해." 그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면, 하나만 더 묻자. 그때의 나는 네가 이렇게 시간 속에 갇혔다는 사실을 알았어?"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하긴, 이렇게 성질이나 버럭버럭 내는 인간인 줄 알았으면 상종도 안 했지."


"욕 맞네요. 아까 그 말."


"좋을 대로 생각하라니까."




그녀는 영혼 없는 목소리로 대답하면서 자신의 가방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그것들을 꺼내 내 손에 쥐여 주었다.



한 장의 두꺼운 종이와 연식이 오래 된 듯한 펜 한 자루.



그녀가 말했다.




"아버지가 널 무척이나 좋아하시거든. 그래서, 기념으로 뭐 하나 정도는 받아두는 게 좋겠다 싶어서."


"...사인해달라는 겁니까?"


"왜, 안돼?"




너무나도 당당한 그녀의 태도에 할 말을 잃고 웃음을 터트렸다.




"혹시나, 아까 말한 내 바보같은 이론이 맞다면 이 세계에 용사님이 있었다는 흔적 정도는 남겨두는 게 좋잖아?"


"그래요. 뭐 힘든 것도 아니고."




나는 펜을 슥슥 움직였다. 그녀의 말에는 무언가 힘이 있었다.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생각해보면 늘 그랬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은 이 시간 속에서 그녀만큼은 늘 다르게 움직였다.



이 시간이 실제 살아있는 삶이고 현실이라는 걸 그녀가 계속해서 깨우쳐주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그날, 그 어처구니없던 고백을 받아준 것도 그 특별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사인을 완성했다.



그리고, 그 밑에 작은 글씨를 적어 넣었다.




"그러면, 여기 계속 서 있을 거야?" 그녀가 물었다.


"네, 아마도요."


"그러면 옆에 있어도 되지? 내일부터 못 보는 사람이라 생각하니 아쉬워서."




종이를 가방 속에 주섬주섬 넣어두던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다시금 내 옆으로 다가왔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네."


"무엇 말입니까?"


"내가 왜 너를 좋아했었는지, 그 이유 말야."




그녀의 눈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별들이 반짝반짝 빛나는 화창한 밤하늘이었다.




*




끝이다.



분명히 '끝'이었다.



나는 마왕의 가슴팍에 수십 개의 화염구를 꽂아 넣었고, 마왕은 그것으로 명을 다했다.



용사 없이도 똘똘 뭉쳐서 마왕을 물리치는 이야기. 어릴 적 아버지가 읽어주셨던 평범한 동화 이야기.



이제 그 이야기는 끝났다. 이야기는 결말을 맞이했다.



그런데, 이 종이는 대체 뭘까.



대체 누가 나에게 고맙다는 글자를 적어준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지만 정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왜 나는 이 종이의 주인을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나는 왜 이 이야기를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