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분이나 늦었군. 목욕물이 차다. 시계 보는 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귓등으로 들은 건가?

몸살이 나서 그렇게 되었다, 죽을 죄를 지었다고? 네게 그런 식으로 말할 권리는 없다. 

너야 물론 그 기구한 목숨을 끊고 싶겠지만, 난 내 소유의 노동력이 날아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 꼴로 일하겠다고 설칠 필요는 없다. 남들도 너처럼 환자로 만들고 싶지 않다면 얌전히 처박혀 있다가 내일 두 배로 일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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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야밤에 뭘 하고 있는 거지? 도망이라도 가려던 참인가?

두 배로 일을 하는 중이었다고? 내가 어제 그렇게 하라고 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도망치려다 걸린 주제에 거짓말이 뻔뻔하기도 하군. 들어가서 쉬어라. 지금 일해 봤자 내일 또 골골거릴 걸 알고 있다. 

'그냥' 일하겠다고? 네가 그러고 있으면 다른 하인들은 얼마나 난처한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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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다 나은 모양이군. 정말 다행이구나. 네가 며칠만 더 기침을 했다가는 남들에게 옮겨 대기 전에 쫓아낼 참이었으니 말이다.

비단 네가 아니더라도 하인들이 하나같이 허약하기 짝이 없으니, 덕분에 내 주머니가 나날이 가벼워진다. 다 내쫓아 버릴 수도 없고 원.

더 이상 그 몸살 핑계를 대지 못하도록 옷을 잔뜩 사 왔으니 맞는 걸로 골라 입고 나머지는 나누어 주도록. 오늘은 이 이상 나를 귀찮게 굴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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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냐? 아침 첫 일과를 빼앗긴 기분은? 그 표정을 지으니 더 못났군. 

이게 뭔지 알아보겠나? 하인을 위한 목욕 시설이다. 너희가 끼치고 있는 민폐의 일환이지. 

요즘 들어 너희가 단체로 골병이 들면 내가 파산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의사에게 말하니 질병을 쫓으려면 청결이 제일이라더군. 방금 뜨끈하게 데워 둔 참이니 궁금하면 들어가 봐도 좋다. 

단 아예 익어 버리지는 말도록. 오늘도 넌 내게 빚을 진 거고 다 갚기 전까지는 어디 못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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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뭔가? 진 빚이 너무 많아서 죄스러우니 어떻게든 도움이 되겠다고? 

이 시간에 침실에 들이닥친 걸 보니 '몸으로 갚겠다' 따위의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려는 건가? 또 그 자식이 헛소리를 한 모양이로다. 

역시 저번에 그 이야기꾼을 잡아서 혀를 뽑았어야 했는데. 

뭐, 좋다. 네가 타고난 어리석음에까지 죄를 물을 수는 없겠지. 들어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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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뜨거웠나? 내가 내쳤으면 더 뜨거웠을 텐데 아쉽게 됐군. 밤 사이 네 처소에 누군가 불을 질렀다. 

주범은 이미 잡아서 파묻어 놓았으니 더 묻지 마라. 네가 알아야 할 것이 아니다.

난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나무토막 같더군. 옷을 근사하게 입혀 주니 그 아래 앙상한 꼴이 티가 나질 않아서 문제라고나 할까. 

하인들이 하나같이 단식이라도 하는 모양인지,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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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매달려 있는 자를 봐라. 조리장이다. 식비 예산의 절반을 자기가 먹어치웠다더군. 나뭇가지가 부러지게 생겼다. 

덤으로 식비 예산을 더 늘렸다. 나뭇가지들이 일하는 꼴을 보고 있으니 절로 기분이 나빠져서 말이지.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도록. 물론 지금까지 제대로 된 요리라고는 먹어 본 적이 없으니 하나도 모르겠지만, 조만간 몇 가지 정도는 알게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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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고향에서 편지가 왔다고 한다. 마침 한가하니 시간을 내서 읽어 주도록 하지. 

…이제는 복에 겨워서 감사하다는 인사도 잊어버린 모양이구나. 나도 기분이 나빠졌다. 편지는 알아서 읽도록.

아, 글을 모른다는 걸 잊고 있었군. 글 정도는 내가 가르쳐 줄 수 있다. 이 편지부터 시작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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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배웠으면 대가가 있어야겠지? 앞으로는 경작지 따위에 나갈 필요는 없다. 실내에도 일이 산더미다. 

내 가장 가까이에서 한심한 모습을 온종일 보여주도록. 그걸 구경하는 게 내 요즘 유일한 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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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벌 만큼 벌었다 싶더니 전란이 여기까지 미친다는군. 머리가 좀 돌아가는 자들은 이미 달아났다. 왜 너는 아직도 여기 있는 거냐?

받은 은혜에 보답을 해? 내 노동력이 그런 알량한 소리를 하는 걸 두고 볼 수는 없다. 

여길 떠나라. 갈 곳과 가는 방법은 정해 두었다. 글을 배웠으니 이걸 읽을 줄은 알겠지?

명령이다. 내가 살면서 처음으로 채찍을 들어야 말을 듣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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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 표정을 하지? 마치 어떻게 살아서 돌아왔느냐는 표정이군. 달아난 하인을 철저하게 붙잡는 것이 주인의 할일이니 그뿐이다. 

꽤 많이 바뀐 얼굴이군. 마치 누구의 하인도 아닌 것 같아. 도시에서 사기를 좀 배웠나?

작가가 되었다고? 문화 수준이라는 게 어디까지 땅으로 곤두박질치는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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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주인보다 아침이 늦는군. 네가 쓴 극이 오늘 초연이라고 하지 않았나? 

이야기한 적 없다고? 착각이다. 난 분명 들었으니. 어쨌든 서둘러 움직여야 하지 않겠나?

나도 미천한 출신이 어쩌다 주인을 잘 만나서 신세를 편다는 유치한 이야기를 감상할 참이었다.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감상하고 기분이 나빠져야 일상의 행복을 알게 되니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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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군. 나도 마찬가지다. 

이런 이야기에 관객들이 단체로 일어나서 양손으로 소음을 내고 있는 꼴을 보니 눈물이 다 나온다.

…좀 앉지. 서 있는 주인 눈치도 안 보이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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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침 첫 기차를 타고 돌아간다. 영지가 쑥밭이 된 게 아니냐고? 거기까지 관심이 있나?

더 이야기하기엔 피곤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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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는 거지? 갚겠다고? 이런 소리를 전에도 들은 적이 있던 것 같은데. 그만둬라. 장난할 기분이 아니다.

하, 뻔뻔함에 두 손 두 발 다 들겠군. 이것저것을 다 얻어먹더니 이제는 주인까지 잡아먹으려고 드는 꼴이. 

이건 반역이다. 알고 있나? 상관없다고? 그래…그렇겠지. 

나도 모르겠군. 먼저 불이나 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