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살 대마법사는 아직 할 일이 남았다.


정리할 건 다 정리했다. 짐도 챙길만큼 챙겼다.

오랫동안 함께 낡아간 곳을 떠나기 전에
창 밖을 바라보면서, 지나간 세월을 돌이켜 본다.


8살 그 해 마지막으로 먹은 고깃국을 기억한다.
아버지가 겨우 얻은 고기쪼가리로 만든, 거의 1년만에 먹어본 스튜는 분명 밍밍할 수 밖에 없을 터였지만 아직까지 기억 한켠에 남아있는 맛이다. 하지만 그때 나를 웃음 짓게 했던건 가족 모두가 함께 앉아 끝나가는 겨울에 안도하며 기도하고, 희망을 얘기하며 식사하는 모습 자체였다. 


10살 성 근교로 이사를 갔다.
성벽을 볼 때부터 압도된 나는 모든 것이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는 장사로 타고난 체구 덕에 치안대에 들어갈 수 있으셨다. 월급은 적지만, 사람들에게 질서와 안정된 일상을 주는 일이라고 자랑스러워 하셨다. 나도 그런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13살 나에게 기회가 왔다.
놀랍게도 나에겐 재능이 있었다. 그것도 무려 마법의 재능이. 배움의 기회와 신분상승의 기회가 동시에 찾아왔다. 본래라면 꿈도 못 꾸겠지만, 얼마 전 혁명이다 뭐다해서 일어난 난리 덕에 위에서 평민들 불만을 잠재우려고 아카데미를 세웠다. 장학금은 물론 집으로도 소정의 지원이 전달되는 판에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가족들과 떨어지는게 불안했지만, 어머니는 그런 나의 불안을 잠재우고 등을 밀어주셨다.


21살 난 구원자가 되었다.
마왕군이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학생들이라도 뛰어난 기량을 보이면 차출되어 전선으로 향했다. 

그들 중에서도 나는 두각을 나타냈고, 이내  용사파티에 들어가게 되었다.

비슷한 또래인 용사와는 살아온 환경이 비슷했지만 생각이 퍽 맞지는 않았다. 그래도 사선을 함께 넘어다니다 보니 서로 이자식 저자식거리면서 챙기는 관계가 되었다.
그리고 정말 기적과도 같은 전투를 통해 마왕을 격퇴할 수 있었다. 지금도 돌아가는 길에 울려퍼지던 울음과 환성을 잊을 수가 없다.


28살 난 결혼을 했다.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강가에 핀 들꽃과도 같은 미소를 지을 줄 아는 그녀였다. 그리고 그 해 태어난 아들은 자기 할아버지를 닮았는지 한눈에 봐도 남다른 체격을 지니고 태어났다. 처음으로 내 자식을 안아본 그날 나는 어느새 희미해진 8살 때 그 식탁을 떠올렸다.


49살 내 아들이 성검을 뽑았다.
어려서부터 용사 용사거리더니 정말 뽑고 말았다.
맙소사, 내 아들이 용사라니.
내 아들이 인류의 생존과 기대를 어깨에 진 유일한 희망이라니
얼마전에 손녀를 안겨주면서 잘 좀 부탁한다더니만...
어떻게 도와주려 해도, 나는 갈 수 없다. 지금 내 마력이면 마왕성 입구는 커녕 마족 영역에만 들어가도 들킨다.
또, 밀려드는 마족들을 막기 위해 나도 전장에 나가야 한다.
그래서 전재산을 털어서 물질적으로 지원했다. 
덕분인지는 몰라도 녀석은 나간지 1년도 안되어 마왕 목을 따서 인류에 승리를 바쳤다.


60살 나는 이제 늙었다
그저 소일거리나 하면서, 뒷일을 정리하는 늙은이일 뿐이다.
이제 오랫동안 미뤄왔던 일을 할 예정이다.
몸은 늙고 시들었지만 늘어난 마력은 그런것에 개의치 않는다.
서른 중반쯤에 생각만 하고 미루기만 하다

차마 하지 못했던 일



이 일의 기원은 아마 내가 9살 때 였을 것이다.





9살 난 동생을 잃었다
3년에 걸친 기근은 겨우 네살박이 막내동생에게 너무나 가혹했다. 우리 가족은 굶주린 이웃들에게서 식어가는 동생을 지키려 했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다.

그들이 토해내는 울분섞인 고함에 우리는 두달 전에 먹은 고깃국에 대한 값을 치러야만 했다.
다시 생각하건데, 나도 그 때 뒤졌어야 했다.


11살 난 아버지를 잃었다.
빌어먹을 혁명이, 불길처럼 닥치는대로 사르면서 고작 말단 치안대인 아버지마저 삼키는 모습을, 나는 두손 놓고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안전한 일상을 시민들에게 선물하겠다던 다부진 몸뚱아리가, 바람을 타고 흐늘거리며 시민들에게 환호와 욕설을 선물하는 모습이 숨어있던 내 두눈에 새겨졌다.
남은 가족마저 잃기 싫어서, 두손을 으스러지게 틀어쥔 채로 다신 놓지 않으며 살았다.


22살 난 혼자가 되었다.
개같은 전쟁, 개좆같은 전쟁.

그 아귀같은 아가리에 손목 한 짝, 왼쪽 눈까리를 던져주고서야 전쟁은 4년만에 나를 놓아주었다.

그 거대한 놈은 첫발을 뗀지 1년도 안되어 제국 땅 절반을 헤집어 놨다.

그리고 그 위에는 내가 살아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가족들도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백방 수소문한 끝에 시신들만은 찾아 수습했다.
그 뒤론 홀로 남은 눈마저 감은듯이 지냈다.


32살 난 아내를 잃었다.
제국을 성난 파도처럼 휩쓸은 지랄맞은 역병에 아내가 떠내려가는 것을 나는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넘치는 마력도, 뛰어난 재능도 소용이 없었다. 나는 무언갈 부수는 건 능했지만, 다른 것은 아니었다.
지난 8년 동안 폐인같이 시간을 허비한 것을 후회했다.
남은 며칠의 시간 동안 그저 기적이 일어나길, 병신같이 두 손을 모으고 기도만 했다.
그 이후로 꽤 오랫동안 기도하지 않았다.
후에 역병을 퍼뜨린 것으로 밝혀진 악신의 추종자들을 다 쳐죽이곤 이 빌어먹을 삶을 끝내고만 싶었다.
그래도, 어미의 죽음도 모르는 자식을 위해 나는 다시 한 번 이를 악물고 버텨내며 살았다.


50살 난 아들을 잃었다.
개좆같은 전쟁은,
다시 한 번,
왜 하필이면,
개같은 새끼들아.
그렇게 처먹고도 모자른거냐. 
강하게 키웠다.
내 모든 걸, 한 줌 부스러기까지 모아 쥐어주고 살아만오라 했다.
자살특공대같은 임무에서도 우리 파티는 사지 한 두개를 두고라도 살아는 왔으니까.
기적이 다시 한 번 일어나길 빌었다.

창밖에서 종전과 영웅들을 찬양하는 환호가 들리고, 문 앞에 선 친우가 머뭇거리는 걸 느꼈을 때, 가슴 깊은 곳에 달군 쇳덩이가 떨어졌다.
타들어가는 고통과 함께 피끓는 울분이 터져나왔다.
날뛰는 내 마력을 힘겹게 막는 친우의 모습이 아주 질 나쁜 희극처럼 보였다. 
꺽꺽거리며 웃는건지, 우는건지도 모를 시간이 지나고, 아들의 마지막을 들었다.
내가 준 아티팩트로 폭사했단다.

우리 한 많은 아버지, 잘 좀 부탁드립니다.
사지육신은 커녕 저 한 문장만이 입에서 입을 거쳐 돌아왔다.


그때,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53살 다시 혼자가 될 뻔 했다.
이번엔 지켰다.
한 비밀단체가 손녀를 납치하려는 시도를 막아냈다.
그렇게 분노하진 않았다. 시도였고, 실패했고, 살았으니까.
그래도 다 죽였다. 시도했고, 성공할 수도 있었고, 죽이려했으니까.
벌에 놀라 우는 자식을 본다면 누구나 그냥 놔둘순 없을 거다.
그래서 그랬다
벌들을 일일히 잡아 끄집어내어, 날개를, 다리를 떼어내고,
살던 벌집을 보이는 족족 부수고 가루내어 짓밟으며,
숲에다 약을 뿌리고 불살랐다.

꽤 넓게 자리잡아서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2년에 걸친 구제 작업을 마치고나니, 주변에서 나를 괴물이라고 말하는게 들렸다.


60살 난 다시 혼자가 되었다.
손녀는 친우의 양손녀로 들어갔다. 서로 목숨도 구한 사이에 제국의 2인자라면 최선은 아니라도 차선은 되겠지.
불효자식의 마지막 말만이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다.
우리 한 많은 아버지.
한 많은 인생
한, 한, 한
취해서라도 아들에게 내 인생을 푸념한 적은 없다.
내 평소 행실에서 느낀건지, 아니면 입싼 누군가의 주둥이에서 들었던지 간에 제 아비의 인생이 안타까웠나보다.
제 자식보다 아비를 챙기다니. 내가 손녀를 어련히 잘 챙길까 믿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들의 유언을 듣고서야 이게 삶인가 싶은 삶을 살아온 것을 느꼈다.
빼앗기고, 약탈당하고, 짓밟히고
살만하다 느껴지는 순간 세상은 비웃으며 발을 걸었다.
이래도? 이래도? 또 일어설거야? 하하 이번에는 어때?
늘그막에 망상병이나 치매에 걸렸다는 소린 듣기 싫지만, 신이든, 악마든, 운명이든 나에게 낙인을 찍은 것 같다.

흔히들 용사에게 시련과 고난이 주어진다고 하지만 난 용사가 아니다.
그 용사는 지금 내 방 창가에서 보이는, 해가 눈부시게 내리쬐는, 땅 그리고 비석 밑에 있다.

좋은 철과 숙련된 대장장이가 만나면 명검이 탄생한다.
영웅이 시련과 고난 끝에 완성되듯.

내가 좋은 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세상은 숙련자가 아니었다. 아니면 애초에 명검을 바란게 아니던가.

만약 그렇다면, 그래, 세상은 성공했다.

고통과 절망, 공포로 나를 두들겨 마침내 흉측한 형상의 무언가를 만들어 내었다.

일평생 잃어가며 정말 잘 참았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내 마음 한구석에 방향없는 증오가 싹트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갈 데 없는 분노가 심장을 태우고, 이따금 머리까지 훅 치솟는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래서 지난 5년간은 정말 숨을 참듯이 살았다.

늙고, 시든 몸이지만 마력은 그런것에 개의치 않으니까.

증오가 광기로 변하면, 가족들의 남은 흔적마저 지울 것만 같았으니까.


나는 이 세상을 사랑한다.

(나는 이 세상을 증오한다)
내 아들이 지킨, 아내와 함께 거닐은, 가족들과 살던 이곳을
(내 아들을 희생시킨, 내 아내를 뺏아가고, 가족들을 짓밟은 이곳을)

부수고 싶다.

...아니, 지키고 싶다


지금까지 휘둘려 온 삶, 마지막 순간마저 증오가 나를 휘두르게 두진 않을 것이다.


그것만은 참을 수가 없다.

비틀리고 일그러진 날붙이로 완성되었지만 이 칼날을 사방팔방 미친듯이 휘두르는 게, 내 삶이 시궁창인 이유에 대한 대답이 아니다.

그건 핑계나 도피에 가깝다.


운명이라고 뭉뚱거릴 수도 있지만, 나는 그 보단 명확한 것을 목표로 삼기로 했다.


결과는 원인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이제 그 원인을 찾으러 떠나는 참이다.


떠나기 전 친우와 황제에게 찾아가 방을 하나 붙여달라고 했다.

황성에서 자기들끼리 3일 밤낮을 갑론을박을 벌이더니 붙이는걸로 결정을 내렸나보다.

- 나는 일찍이 전전대 용사를 도와 마왕을 토벌하는 데 큰 힘을 보탠 바가 있고, 나의 아들 전대 용사 또한 맡은 과업을 충실히 수행하여 마왕을 토벌하였다.
따라서 빌어먹을 마족 새끼들을 제외하면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지성체들은 나에게 빚을 졌음을 인정하라.
그렇다고 그대들에게 재물을 요구하지는 않겠다.
도움을 달라고 요청하지도 않겠다. 
나와 나의 아들이 그것이 설령 원치 않은 일임에도 수행했음은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의 의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인간말종 같은 것들이 나와 내 아들이 지킨 세상 위에서 제 배를 살찌우고, 횡행하고, 거들먹거리며, 인간을 좀먹는 계획을 떠올리며 쳐웃는 짓거리를.
그래서 나는 그딴 짓거릴 하는 놈들에게 채권자로써 찾아가기로 하였다.
배를 가르는 악신의 추종자들, 고혈을 빨아재끼는 위정자들, 쥐어짜내는 흑마법사들, 폭력을 숭상하고, 지성체를 같은 지성체로 보지 않는 놈들은 모조리 찾아갈 것이다.
채무는 오직 핏값으로만 계산할 것이며, 그 무엇도 그것을 막거나 덜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너희들을 위해, 너희와 같은 수준으로 내려가겠다.
나는 너희들을 지성체로 보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희들을 위한 재해가 될 것이다.
내가 너희들을 찾아갈 것이다.


누가 작성했는지 몰라도 굵고 딱딱한 필체로 힘주어 잘 써내려 간듯 했다. 내일이면 온 세상이 이 내용을 보게 될 것이다.

누군가는 미쳤다고 할 것이다.
오만하다고 분노하고
멍청하다고 비웃거나
정신나간 소리라며 실소하겠지.

나를 눈앞에 두고도 그럴 수 있을지, 이 소일거리를 하면서 하나의 여흥처럼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이걸 보고 숨거나, 더 은밀히 행동하는 놈들도 있을 것이다.
상관없다. 
단 하나의 흔적도 남기지 않는 건 품이 많이 드는 일이다.
조직은 더더욱 그렇다.
놈들이 흔적 하나 없앨 시간과 비용 때문에 누군가는 살 수도 있다.


누군가는 진작 이랬어야 했다.

누군가가 저들이 감자를 빼돌리기전에 손모가지를 잘랐으면 됐다.

누군가가 저들이 민중을 꼭두각시처럼 부리기 전 주둥이를 꿰맸으면 됐다.

누군가는 저들이 좆같이 행동하기 전에 한 번쯤 고심하게 만들었어야한다.

문득 아버지가 떠오른다.
우습게도 아들은, 말년에 당신과 비슷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죽으면 욕하고 환호성을 지를 놈들이 많을 것 같네요.
심지어 보상은 아버지 때보다 박하군요.
그래도...할렵니다.
...창가 앞에 들어온 햇살이 눈을 때린다.

떠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