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자를 힘들여 수습하는 대신에 국기를 땔감 삼아 거리낌 없이 불태웠고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동료가 괴로워하는 소리를 들으며 몸뚱이의 사지를 잘라내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막아냈다. 목을 베지 않아 꽤 오랫동안 비명을 질렀지만 살아있는 동료를 내 손으로 죽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건 반역이니까. 


한번은 빗속에서 적에게 포위 당했을 때 식량이 다 떨어져 상관의 시체를 뜯어먹은 적이 있었는데 익히지 않은 탓에 혀가 망가지기라도 했나 지금까지도 음식 맛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게 형제들과 어머니가 나에게 전해준 목숨을 헛되이 버릴 수 없다는 일념 하나로 추하게 살아남은 덕에 승진에 승진을 거듭해 기사단의 부단장 자리까지 올랐다. 전쟁터는 노예가 대장군의 자리까지 오르는 기적이 벌어질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는 말이 있다. 나는 그 기적을 직접 경험했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동기들은 진작 다 뒤졌고, 내 윗사람들도 차례차례 다 뒤졌다. 그리고 방금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내 이름을 기억하던 기사단장이 왕과 함께 암살 당하면서 내 이름을 기억하던 이들은 모두 죽었다. 5년 간 이어진 참혹한 전쟁은 아무도 휴전을 외치지 않았지만, 그렇게 끝나 버렸다. 


암살자가 누군지는 모른다. 왕국에 사는 만인이 국왕을 죽이길 원하는 암살자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만약 범인을 잡아낸다면 목매달기는커녕 섭정의 자리를 줘야 할지도 모르지, 그 꼬라지는 보기 싫어서 왕의 막내딸을 급하게 왕좌에 앉혔다.


원하는 사람 왕좌에 앉히는 법 의외로 쉽더라? 그냥 제일 먼저 수도로 군대 끌고 달려가서 깃발 꽂으면 되더라고. 

아랫것들이 말 안 들으면 어쩌냐고? 집으로 가자고 말 한마디 해주면 끝난다. 3남 1녀 중 막내딸이지만 내 마음속에 다른 선택지는 처음부터 없었다. 여자라면 적어도 전쟁은 안 할 거 아니야? 남자는 전쟁 했다가 지면 자살하면 그만이지만 여자는 지면 죽는 걸로 끝날 리가 없으니.

 

정통성? 명분? 다 개나 주라 그래. 뒤지기 싫으면 아가리 닥쳐야지, 이제 내가 실세인데

 

“다 맞는 말이지만, 영주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하군요”

그러나 태양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왕좌에 앉은 아리따운 여성은 청명한 목소리를 울리며 단호하게 내 생각을 반박했다.

 

“당신이 무시한 그 정통성이 지금 제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나라를 되살리고 싶었다면 제가 아니라 제 오라버니께 왕관을 씌워줬어야죠”

 

“딱히 나라를 되살리고 싶은 마음에 한 행동은 아닙니다만?”

진심이다. 이 망할 나라 따위 진짜 망하든 말든 나는 상관없다. 적당히 똘똘하고 외모도 반반한 여자니까 왕위에 올려줬을 뿐, 너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당신이 애국자가 아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찬탈자를 꿈꾼다 해도 마찬가지. 제국이 어째서 진격을 멈췄는지 기사단장이나 되신 분이 정녕 알지 못하시는 겁니까?”

 

찬탈자라는 단어가 여왕의 입에서 나오자마자 어떤 이들은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표정을 짓고, 어떤 이들은 머리를 부여잡고 절망하거나,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는 등 각자의 방식대로 다채로운 반응을 보여줬지만, 나만은 그들과 달리 크게 개의치 않고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냉정함과 통찰력을 겸비한, 이런 당당한 태도야말로 내가 그녀에게 반한 점이니까.

 

“기사단장이니 당연히 알고 있지요. 그러나 퀴즈를 낸 사람은 타인에게 정답을 묻기 전에 먼저 스스로가 퀴즈를 낼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분열되기를 원해서입니다. 우리가 분열되면 제국은 왕국을 손쉽게 통째로 삼킬 수 있으니까요. 당신이 얼마나 잘못된 선택을 했는지 알겠습니까? 안팎으로 나라가 어지러운데 정통성 있는 왕을 세울 기회조차 직접 쓰레기통에 버리신 기사단장님. 이를 타파할 계획은 갖고 있으시겠지요?”


겉으로 듣기엔 나를 비난할 뿐이지만 그 속 뜻은 시궁창인 나라를 살려보려는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들 때문에 도저히 편히 잠들 수가 없으니 나더러 진압하라고 재촉하는 것. 그러나 여왕에게는 안타깝게도 기사단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다.

 

“불가능합니다. 중앙 귀족들과 지방의 영주들을 동시에 제어하는 것은, 제가 반란을 진압하려 기사단을 출군 시킨다면 폐하 혼자서 감당, 가능하십니까?”

 

그러니 주제를 깨닫지 못하는 주군에게 때때로 현실을 깨우쳐 주는 것 또한 충신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의회를 설립해 평민의 정치 참여를 유도하고 부족해진 세금은 귀족들에게서 충당하자는 복안! 매우 좋습니다. 국토의 절반을 뺏긴 상황에서 가뭄과 흉년으로 고생하는 농민들을 더 이상 수탈하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그러나! 영주들은 이미 칼 들고 일어났으니 그러다 칩시다. 징세 청부업자와 대지주, 귀족들의 반발은 어떻게 해결하실랍니까?”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이 썩어 빠진 나라의 개혁은 불가능했다. 그게 가능했으면 선왕이 전쟁이라는 무리수를 두면서 기사단이라는 신흥 무장 세력을 육성하는데 미친 듯이 집착하지는 않았겠지. 물론 그 녀석은 얼간이다. 왜냐고? 전쟁에서 졌으니까!

 

“지금 여왕께서 두고 있는 모든 수는 무의미한 발악입니다. 모든 국가는 언제나 멸망하기 마련! 이미 늙어 죽어가는 나라를 회춘시키는 방법? 그게 가능할 리가!”

 

역사가 나를 간신이라 비난해도 상관없다. 

나는 그저 허수아비에 불과한 여왕이 이 나라의 시조와 대등해지려고 치는 헛된 발버둥이 진심으로 안타까울 뿐이니까. 


-털썩!

내가 열변을 토하고 정문을 향해 등을 돌린 순간 왕궁에서는 영원히 들려서는 안 될 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의 모든 시조는 피를 이어받은 후손들이 숭배 받기를 바라며 왕조를 연다. 비록 영원하진 못해 그 끝이 아무리 추하더라도, 왕조가 망하는 순간까지, 아니 마지막 왕이 목숨을 잃는 그 순간까지도 왕이라면 결코 무릎은 꿇지 않는다.

  

「타인을 굴복시키기 위해, 타인에게 숭배받기 위해, 타인을 무릎 꿀리기 위해


 만인 위에 군림하는 것이 왕이기에


 그렇기에 왕은 같은 왕이 아니라면 타인에게 무릎 꿇을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하늘에 맹세코 여왕을 무릎 꿇게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현실을 말해줬을 뿐인데, 그녀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전하! 부디 고정하시옵소서!” 


모두가 경악했다. 나조차도 지금은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 곁에 있던 수십 명의 늙은이들은 이미 나를 향해 절하고 있는 왕을 향해 절 하느라 바빴다. 우습지 않은가? 나를 향해 절하는 여왕을 향해 절하는 신하들이라니! 아니 우습지 않다. 아니 우습다. 아니 정확히는 우스우면서도 우습지 않았다.

 

“나는, 이 나라의 마지막 왕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하에게 무릎 꿇은 왕으로 기억될지언정! 목숨을 구하며 누구보다 추하게 죽어간 왕으로 기억될지언정! 절대로, 마지막 왕으로, 기억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내 눈동자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진다. 미각이 망가진 혀에서 이상한 침 맛이 느껴진다. 분명 내 혀는 고장 났을 터인데. 시간이 아득히 느리게 흘러가는 것이 느껴진다. 궁궐 안에서 서 있는 이는 나 하나 뿐. 왕이 무릎 꿇은 그 순간부터 하인도, 노예도, 신하도 나를 제외한 만인이 무릎 꿇었다. 

 

“그러니 결코! 내 신하가 나보다도 먼저 이 나라를 포기하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멍청하여 망해가는 나라를 구하는 방법 따위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정답을 알지 못하면서도, 질문을 할 자격이 없음을 알면서도, 그대에게 감히 묻고자 합니다. 늙어 죽어가는 나라를 회춘시키는 방법. 불가능하더라도 상관없으니, 알려주십시오. 그것이 무엇입니까?”

 

두렵다. 내가 왕좌에 앉힌 자는 어쩌면 허수아비가 아니라, 허수아비의 모습을 한 지독한 악마였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