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는 가끔씩 아무런 이유 없이 우수에 젖어, 과거를 돌아보고 싶은 날이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화장을 하고 밥을 먹은 다음 집에서 나와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을 때, 문득 가스 밸브를 잠궜는지 안 잠궜는지 하는 사소한 고민이 떠오르는 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그 생각을 떨쳐내고 계속 밖을 돌아다니다가 집으로 돌아가면 가스 밸브가 열려있는 날이 많고, 신경이 쓰이고 쓰여 집으로 돌아가면 밸브가 잠겨있는 경우가 많아 후회하게 되기 마련이죠. 싫은 이지선다입니다.




이런 이지선다가 찾아올 경우 어떻게 대응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왠만해서는 바로 집에 돌아가서 확인을 하는 편입니다. 그런 습성 때문에 오늘 아침 우수와 함께 중학교 1학년 시절을 돌아보고 싶다, 하는 생각이 급작스럽게 찾아와 제 머리를 어지럽히자, 저는 그 욕구에 거스르지 않고 그대로 과거를 회고하기로 정했습니다.








많은 시간 중에 어째서 중학생 시절인가. 그건 그 시절이 떠오르기도 쉽기도 하고, 저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초등학생 시절이나 그 이전에 있었던 일은 너무 어렸을 때라 자세히 기억나지도 않고, 고등학생 시절이나 그 이후에 있었던 일은 떠오르기야 잘 떠오르지만 입시니 뭐니하는 이유로 여러모로 바빴던 시기이기에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만 남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3학년이 되기 전, 그러니까 도쿄에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가기 전 다녔던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하여 회고하고 싶습니다.








저는 아오토리노유리 여학교라고 하는 가톨릭 계열 미션 스쿨에서 2년 간 중학 교육 과정을 받았습니다. 나름 유명한 곳이지만 모르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다른 학교에 빗대어 설명하자면, 시라유리 여자 중고등학교와 비슷하거나 조금 못 한 정도에 있는 퍽 좋은 학교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세간에 받는 평가 수준은 엇비슷하지만, 학교 내부나 주위의 경관만큼은 아오토리노유리 쪽이 훨씬 아름답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도 그렇게 말할거라고 생각합니다.








시라유리도 물론 멋진 학교지만, 학교 주변에 있는 초록색 울타리나 고층 건물 탓에 그 미가 빛바랜다고나 할까요. 아무래도 도쿄에 있는 지라 어쩔 수 없겠죠. 하지만 아오토리노유리는 홋카이도 외지에 있어 주위에 고층 건물이 적고 아담한 전원주택들이 많아, 단풍나무와 소나무와 울타리를 대신하는 가느다란 풀잎들이 우거진 학교 정문의 경관과 주변의 모습이 잘 어우러집니다. 뿐만 아니라 학교 정문 안으로 들어가 길을 걷다보면 수선화, 목련, 튤립이 길 주위를 장식하고 있어 또 다른 장관이 펼쳐집니다. 하지만 제가 가장 좋아하는 건 뭐니뭐니해도 순정 소설 속에 등장할 법한, 작은 돌담 주위에 백합꽃이 만개한 수려한 정원이었습니다. 








그런 아름다운 경관에 매혹된 걸까요, 아니면 그저 우수한 여학생들이 많이 다닌다는 인식 때문인 걸까요. 학교에 재학 중이던 여학생들 중에는 홋카이도에서 태어나지 않은 학생들도 많았습니다. 제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아오토리노유리를 떠날 때까지 저와 함께 붙어 다녔던 여학생, 스기야마 요요코도 홋카이도 출신이 아닌 교토 출신이었습니다.








요요코는 흔히 사람들이 모범생을 떠올릴 때 생각하는 그런 외형을 하고 다니던 아이였습니다. 수줍어하며 고개를 숙일 때마다 단아하게 땋은 머리카락이 검은 세일러 복 소매로 감싼 어깨 너머로 늘어졌고, 똘망똘망한 눈동자는 달빛을 머금은 봄눈처럼 반짝거렸죠. 거기다가 도서부였죠. 같은 도서부지만 도저히 모범생처럼 생기지 않은 저하고는 달랐습니다. 요요코가 대중 매체 속에서 나오는 모범생들 하고 다른 점은 안경을 쓰지 않았다는 점 단 하나였습니다. 워낙 그 모습이 모범생 같아 안경은 안 쓰는 구나, 하고 신기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1학년 여름 어느 날 점심시간에 단 둘이 도서실에 있었을 때 왜 안경을 안 쓰는 건지 본인에게 물어봤는데, 요요코는 입술을 삐죽이며 바보를 대하는 듯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눈에 문제가 없으니까 안 쓰는 거지, 무슨 소리고?"








교토벤을 쓰지 않으려고 너무 애를 써서 어딘가 억양이나 단어가 어색했습니다. 저는 전부터 요요코가 그런 말투를 쓸 때마다 표준어를 쓰려 너무 애를 쓴다고 느꼈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런 어중간한 말투로 말할 바에는 차라리 마음 편히 교토벤을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이왕 생각난 김에 그렇게 제안하니까 요요코는,








"교토는 싫다, 나."








라고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왜? 태어난 곳이지?"








제가 묻자, 요요코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야, 거어 사람들은 죄다 음습하니까... 내는 싫대이, 그런거. 차라리 오사카가 좋아."








음습하다. 확실히 교토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인상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해외 사람들이 보기에 일본인들은 다 그런 면모가 있어보인다고 하지만, 교토에 사는 어른들은 그 중에서도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음습한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요요코는 그런 출신에 나름대로 콤플렉스가 있는지, 일본스러운 것보다는 어딘가 서양스러운 것을 좋아하는 면이 있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가톨릭 계열 미션 스쿨에 들어온 것도 그런 취향의 연장선이었죠.








소설도 미야자와 겐지나 가와바타 야스나리 보다는 차라리 앙드레 지드나 발자크, 오스틴 같은 유럽계열 작가나 톨스토이나 투르게네프 같은 러시아 작가들을 좋아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일본 소설을 전부 싫어하고 외국 소설이면 다 좋아한 건 아닙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싫어했고, 엔도 슈사쿠는 좋아했죠. 저는 개인적으로는 톨스토이보다는 도스토옙스키 파였고, 가와바타 야스나리나 미시마 유키오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런 요요코의 취향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책의 해석에 대해서도 좀처럼 합이 맞지 않았죠.




지금 생각해보면 참 웃깁니다. 당시는 PTA의 간섭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시기라, 저희 도서관에 있는 책은 대부분 검열본이었거든요. 예컨대 '죄와 벌' 에 나오는 소냐의 직업이 창녀가 아니라 자원봉사자로 나온다거나, '동물농장' 의 결말을 흔한 권선징악으로 바꿔놓은 책들 있잖아요? 저희 학교 도서관에 있던 책들은 전부 그랬습니다. 예외가 있다면 성경에 관한 책들 뿐이었죠.








아무튼, 소설 취향과는 별개로 저희들은 참 친했습니다. 요요코는 저와 가장 친하게 지내주었던 친구입니다. 제가 바보같은 장난을 치면 못마땅해하면서도 선생님께 혼나지 않도록 뒤를 봐주었고, 혹시 장난이 들켜 혼나게 될 때는 억울해하면서도 곁에서 같이 혼나주었습니다. 절교할 거라고 말은 하면서 급식에서 고기로 만든 반찬을 하나 둘 넘겨주면 곁눈질로 제 얼굴을 흘깃 흘깃 바라보다가 결국 용서해주었습니다. 부모님께서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던 저에게 있어서는 정말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교토에 대한 이야기를 마친 저희들은 서로 읽고 있던 책을 덮고 도서실에서 나와 복도 위를 걸었습니다.








"그러고보니, DVD 대여점에 새 해리포터가 들어왔다더라."








유유코가 말했습니다.








"가는 길에 빌릴까?"








"좋대... 좋아."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저희들은 교실로 향했습니다. 또 지루한 수업이 시작될 예정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미션 스쿨에 다니는 여학생을 보면 공부쟁이 아가씨라는 편견을 가지고는 하는데, 뭐 그런 학생들이 꽤나 있는 건 부정하지 않지만 다들 그런 건 아닙니다. 저처럼 수업 듣기를 싫어하던 학생도 얼마든지 있었답니다. 공부에 집중을 하고 싶어하는 학생과 수업을 싫어하던 학생들끼리 서로 파벌을 갈라 다투기도 했었죠.






저는 마음 속에서 이 두 파벌을 공부파와 재미파라고 불렀답니다. 공부파의 우두머리 격 되는 아이는 학급 반장인 사이온지 사치코였고, 재미파의 우두머리 격 되는 아이는 육상부의 에이스인 카타가와 사나였죠. 두 사람은 자주 다퉜습니다. 사나가 먼저 시비를 걸면, 사치코가 후후 웃으면서 요요코보다도 훨씬 더 교토 사람 같은 비꼬는 말투로 응수했죠. 웃긴 건 두 사람은 생긴게 참 비슷해서, 머리카락 모양을 보지 않고서는 두 사람을 도저히 분간할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사치코는 긴 생머리였고, 사나는 머리카락을 뒤로 묶고 다녔죠.








그 날도 어련히 사나하고 사치코는 서로 다투었습니다. 정확히는 저희가 오기 전에 이미 다툼을 마치고, 냉전 상태에 들어선 상황이었습니다. 사나의 뚱한 표정도 나름 웃겼지만, 사치코의 표정은 가관이었습니다. 이걸 표현을 하고 싶어도 마땅히 비슷한 표현을 찾지 못하겠네요. 저는 자리에 앉으며 사나에게 대체 사치코와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습니다.








"뭐겠어? 또 성적이 어쩌니 뭐니 하면서 비웃길래 싸운거지. 저 녀석, 자기가 조금 더 수학을 잘 한다고 나한테 시비를 걸고 말이야. 좌표평면이 어쩌고 저쩌고 다 졸업을 하면 쓸모 없는데 말이야."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그러자 사나는 난감한 듯이 말했습니다.








"아니, 나는 그냥 아주 살짝 발을 걸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넘어지지는 않지만 비틀거릴 정도로. 그런데 아가씨가 성대하게 넘어져버려서."








"응."








"치마가 뒤집혔어."








"당신!"








그 소리를 듣자 사치코가 씩씩거리면서 사나를 향해 다가왔습니다.








"말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괜찮잖아, 어차피 내가 아니라도 누가 말했을테니까."








"궤변이에요, 그런거. 이제는 도덕 판단을 처리할 수 있을 정도의 지능도 사라진 건가요?"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다 여자인데 그 정도는 뭐... 이런 말을 하는 것치고는 엄청난 속옷이기는 했지만. 인성에 비해서 너무 성숙한거 아니야?"








그러자 사치코는 얼굴을 성난 오니 가면처럼 붉게 물들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뻔뻔한 사람!"








그리고는 저를 노려보았습니다.








"후유, 당신도 이런 사람하고 어울리다 보면 언젠가 바보가 될거야. 그래서는 너랑 다니는 요요코도 곤란하잖아?"








저는 적당히 알겠다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저도 어느 쪽인가 하면 사나와 비슷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또 두 사람이 서로를 헐뜯고 있으려니, 도덕을 담당하시는 교사이신 미카엘라 미카네 미아 수녀님 - 통칭 미카네 선생님께서 들어오셨습니다. 그제서야 두 사람은 싸움을 멈추고 자리에 도로 앉았답니다.








아무도 미카네 선생님 앞에서는 싸우지 않았답니다. 그 사람은 너무나도 순진한 사람이었습니다. 저희들이 아무리 중학생이라고 해도, 그런 사람 앞에서 싸울 수 있을 정도로 죄악에 넘친 인간은 아니었죠.












제 과거를 여기까지 엿본 여러분들은,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가 저와 요요코가 미션 스쿨 안에서 '꺄아꺄아, 우후후.' 하면서 즐겁게 떠들고, 가끔씩은 바보같은 짓을 하는, 천진난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실 가능성이 큽니다. 뭐 틀리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저는 천진난만한 이야기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백과사전을 보면, '천진난만함' 이라는 단어의 뜻이 '말이나 행동에 아무런 꾸밈이 없이 그대로 나타날 만큼 순진하고 천진함' 이라고 적혀있습니다.






저희들, 그러니까 2006년에 중학생이 된 아오토리노유리 여학교 107기 학생들은 순진했고, 천진했습니다. 저희는 흐트럼 없는 밤하늘 밑에서 흩어지는 섬광이었습니다. 밤하늘을 향해 손을 뻗으면 손가락 틈새 사이사이로 보이는 은하수였습니다. 그렇기에 앞으로 일어날 일들도- 저는 어디까지나 중학생 시절에 있을 법한 천진난만한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덕 선생님의 수업이 끝나자 하교 시간이 되었습니다. 저희 반 학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한 기도를 하고 반을 나섰습니다. 저하고 요요코, 사나, 사치코는 하교 길이 겹쳐서 평상시 하교를 같이하는 경우가 적잖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 날은 사치코에게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사치코를 뺀 세 명만 같이 하교했지만요.








그 날 저희는 하교 길에 해리포터 DVD를 빌릴 생각이었습니다. 작년 새로운 시리즈가 나와서 그 DVD를 빌리러 가는 길이라는 말을 듣자, 사나는 흔쾌히 저희 뒤를 따라왔습니다. 사나는 영화를 참 좋아했거든요. 상업영화 뿐만 아니라 흑백 영화나 이탈리아의 스파게티 웨싱턴이니 뭐니 하는 이상한 예술 사조에도 어느 정도 교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에게 겸사겸사 또 다른 재미있는 영화를 추천받아 그것도 빌리자. 그런 생각이었죠.








그래서 DVD 대여점에서 해리포터와 영화 두 편을 추가로 빌리고 나오는 길에, 사나는 돌연 제 팔목을 붙잡더니 DVD 대여점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를 손가락으로 가리켰습니다.








"후유, 저기 봐."








"응?"








저는 사나가 가리키는 곳을 봤습니다. 제가 그쪽을 보자 요요코도 덩달아 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습니다. 사나가 가르킨 곳에는 쓰레기를 담은 봉투가 가득했습니다. '대체 왜 느닷없이 저런 장소를 보라고 하는 거지?' 싶어서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사나가 말을 이었습니다.








"저기 저 봉투 사이에 널브러져 있는거, 다 DVD 하고 만화 아니야?"








그러자 요요코가 말했습니다.








"어, 그렇네."






"뭐야, 나는 안 보여."








제가 말했습니다.








"키가 작아서 그런거 아니야? 우유를 마셔."








사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쓰레기 더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습니다. 저하고 요요코가 뒤따랐습니다.








요요코가 말한대로, 쓰레기 봉투들 사이에 온갖 DVD나 만화책이 쌓인 더미가 하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신기한 점 DVD도 만화책도 전부 신품처럼 보였다는 겁니다. '터치' 나 '러프' 같은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부터 시작해서 '허니와 클로버', '너에게 닿기를', '노다메 칸타빌레', '강철의 연금술사' 등등...... 당시에는 조금 낯설었던 다양한 장르의 만화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그 옆에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 나 '에어플레인' 같은 영화 DVD들이 있었습니다. 사나는 그 앞에 쪼그려 앉아 흥미롭다는 듯 목소리를 냈습니다. 








"대단하네. 어디 가게 사장이나 입시생이 버린건가?"








"아니면 잠시 둔 거 아이.....아니야?"








요요코가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나가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이런 곳에 이런 걸 두지는 않겠지."








"어떻게 할래?"








제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냐니. 그냥 가야지."








요요코가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나는 망설이더니,








"몇개 정도는 가져가고 싶은데."








하고 말했습니다.








"아니 아니, 무슨 소리야."








요요코가 말했습니다.








"그야 어차피 버리는 거니까, 상관 없지 않아? 도둑질도 아니고, 주님도 이 책들이나 DVD가 그냥 버려지는 것보다야 원래 목적대로 쓰이는 쪽을 더 바랄 것 같은데."








"상태가 이만큼 좋으면 버리는 건지 어떤지 확신할 수도 없잖아?"








"그러니까, 버리는 게 아니라면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이런 곳에 이런 걸 두지는 않을 거라니까?"








"으으, 그래도."








사나와 요요코는 서로 그런 대화를 나누더니, 결국 판정을 요구하듯 저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습니다.








"어떻게 할거야?"








저는 당황했습니다. 아니, 가만히 있던 저를 향해 책임을 떠밀다니, 참 잔인한 친구들 아닙니까? 그래도 친한 상대니까 이런 식으로 선택권을 넘길 수도 있는 거겠죠. 저는 곰곰이 고민하다가, DVD를 담은 봉투를 바라본 다음, 결론을 냈습니다.








"...그, DVD 한 두 개만 가져가지, 뭐."








이제와서 늦었지만 솔직히 죄를 고백하자면, 그쪽이 더 재미있을 것 같았습니다. 저도 아오토리노유리에 다니는 대부분의 학생들처럼 엄한 부모 밑에서 자란 터라, 이런 유흥이나 자극에 좀처럼 굶주려 있었거든요.




















저희는 '소년' 이라는 영화가 담긴 DVD와 '이터널 선샤인' 이 담긴 DVD를 한 장 봉투 안에 집어넣고 자리를 떴습니다. 마치 좀도둑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솔직히 나쁜 기분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이스트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아 묘한 쾌감까지 느꼈습니다.








저는 요요코와 사나를 데리고 집에 들어갔습니다. 오늘도 부모님은 없었습니다. 부모님의 방에는 커다란 TV가 있어서, 저는 부모님이 계시지 않을 틈을 타 친구들을 데리고 몰래 그곳에서 영화를 보고는 했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께서 아시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지만, 들킬 위험을 감수하는 것도 이런 모임의 재미 아니겠습니까. 저희는 DVD를 집에 가져온 김에, 헤리포터는 나중에 보고 오늘 가져온 영화를 보기로 했습니다. '이터널 선샤인' 을 보냐 '소년' 을 보냐 잠시 대화를 나눈 끝에 '소년'으로 정했습니다. 사나가,








"나, 이 영화는 아직 안 봤거든."








이라고 말한 탓이었습니다.








저는 '소년' 이 담긴 DVD 표지를 찬찬히 뜯어보았습니다. 군모를 쓴 두 소년이 서로를 껴안고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뒷면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충격적인 156분.' 이라는 거창한 홍보문구와 함께 나름 괜찮아보이는 전쟁 영화 시놉시스가 적혀있었습니다. 이런 영화를 애호하는 건 아니지만, 가끔은 이런 것도 괜찮겠다 싶었습니다.








저는 TV를 킨 다음, DVD 플레이어 앞으로 다가가 DVD를 넣었습니다. 제가 다른 두 명이 있는 쪽으로 돌아가자, 사나는 리모컨을 조작해 DVD를 재생했습니다. 저하고 요요코, 사나는 서로 착 달라붙어 화면을 응시했습니다.
















그런데 영상을 재생하자 왠걸, 표지에 나온 두 소년들은 어디가고 왠 금발을 한 젋은 여자와 안경을 쓴 여자가 나왔습니다.








"어라, 뭔가 제목하고 다르지 않나?"








요요코가 말했습니다.








"어쩔래?"








제가 사나에게 물었습니다. 사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일단 뭔지 보자."








라고 말했습니다. 저희는 그 말대로 계속 영상을 봤습니다.








화질이 기성 영화들보다 조악하기는 했지만, 두 사람이 굉장히 아름다운 사람들이라는 사실 만큼은 잘 알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수영복을 입은 상태로 바다 위를 돌아다녔습니다. "수영에 관한 영화인걸까?" 요요코가 순진하게 말했습니다. "왠지 졸작일 것 같은데." 하고 사나가 심드렁하게 말했습니다. 저희는 그런 식으로 이 영화는 어떤 내용일까, 하고 계속 잡담을 하며 화면을 지켜보았습니다.








...호텔에 도착한 두 여자가 갑작스레 수영복을 벗기 전까지는, 계속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꺅, 하고 요요코가 가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리모컨에 달린 일시정지 버튼을 누를 새도 없이, 배우들은 나신을 움직였습니다. 금발 여자가 분홍 매니큐어를 바른 중지와 검지를 움직여 안경을 쓴 여자의 허벅지와 배의 주름을 꾸욱 눌렀습니다. 금발 배우의 손가락은 그대로 주름의 능선을 타고 서서히,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더니... 안경을 쓴 여자 배우의 은밀한 장소를 아이를 달래듯 쓰다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안경을 쓴 배우가 허리를 가볍게 안으로 튕기며 거센 신음을 냈습니다. 신음을 내자 꾹 닫혀 있던 입술 사이로 짧은 혀가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금발 여자가 그 혓바닥을 향해 남은 한손을 가져가자, 안경을 쓴 여자는 상처를 핥는 암캐처럼 자발적으로 금발 여자의 엄지 손가락 마디를 핥기 시작했습니다. 












천하의 사나도 이 영상에는 당황한 모양인지 몸을 굳혔습니다. 물론 저도 마찬가지였죠. 그도 그럴 것이 살면서 그런 매체를 접한 건 그 때가 처음이었거든요. 지금이야 미성년자라도 간단하게 포르노를 구할 수 있지만, 그 때는 인터넷이 없는 집에서는 쉽사리 포르노를 구할 수 없었답니다. 거기다가 주변에 있는 어른들이 학생들을 상대로 인터넷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제제하는 게 반쯤 유행이었던 시기였기에, 더욱 그런 것에는 내성이 적었습니다. 하물며 일반적인 성행위가 아닌 여성끼리의 행위가 담긴 영상이라니!








"그, 이거..."








제가 작게 말했습니다.








"으, 응..."








요요코가 얼굴을 붉혔습니다. 








멈춰야 한다.








저희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도무지 영상에서 눈을 땔 수 없었습니다. 눈 앞에 펼쳐진 것이 금기에 속하는 것임을 본능적으로 감지했지만 몸이 굳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상야릇한, 미증유의 호기심이 저희를 옭아맸습니다. 영상 속에서 여성들의 나체가 유영하고 날개살이 나비의 날개처럼 퍼덕거릴 때마다 저희는 무심코 숨을 죽였습니다. 천박하다. 이상하다. 정상이 아니다. 하지만 미의 극치에 다다른 성인 여성의 젖가슴은 저희들을 미혹했습니다.








미혹은 물통 속 수돗물에 검은 물감이 한 방울 떨어진 것처럼 서서히 번져나갔습니다. 저 행위가 대체 얼마나 기분이 좋길래 안경을 쓴 여자는 저렇게 인상을 쓰고 헐떡이는 걸까. 저 금발 여자는 어째서 똬리를 튼 암컷 뱀처럼 몸을 배배 꼬면서 혀를 낼름거리는 걸까. 우리도 2차 성징이 지나 몸이 커지게 되면 저 영상 속 여성처럼 젖가슴이 커다랗고 골반이 넓은 - 장인이 빚어낸 여신상 같은 아름다운 몸을 가지게 되는 걸까. 제가 그런 생각을 한 것처럼, 사나도, 요요코도 그런 생각을 한 건지 누구 하나 영상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 행위는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금발 여자와 안경을 쓴 여자가 서로의 성기에 입술을 가져다 대며 손가락에 흐른 아이스크림을 핥듯 혀를 낼름거린 다음, 서로의 다리를 벌려 두 장미꽃을 맞대었습니다. 그들은 다리를 움직이고, 허리를 들썩이고, "좋아, 좋아..." 라면서 입을 맞대면서 격렬한 프렌치 키스를 했습니다. 하아. 하아. 영상 속 배우들이 음란한 신음을 흘릴 때마다 저희도 숨이 가빠졌습니다. 지금 우리는 금지된 행위를 하고 있다. 성인만이 존재할 수 있는 정원에 발을 들였다. 영상이 진행될수록 그런 확신이 들었습니다.








허리를 들썩이는 속도가 빨라지고, 빨라지다가, 결국 멈췄습니다. 금발 여자는 머리를 뒤로 넘기고는 입을 크게 벌리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동시에 안경을 쓴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소음순에서 거센 물줄기를 뿜어냈습니다. 아직 어렸던 저희들은 아직 그 행위가 '시오후키' 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저 오줌을 지린 것이라고만 생각했죠. 








안경을 쓴 여자가 뿜어내는 물줄기가 그치자, 영상도 함께 끝났습니다.








"......" 








저는 디스크 플레이어 앞으로 기어가 CD를 빼냈습니다. 사나는 입을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요요코는 입을 틀어막고 당황한듯 눈을 연신 깜빡이고 있었습니다. 저는 CD를 조용히 케이스에 도로 넣어놓고, 케이스를 비닐 안에 넣었습니다. 무언가 말을 꺼내기도 무안해서, 저는 괜스레 강한척을 하며 머쓱하게 웃었습니다.








"아, 아하하!"




이어서 말했습니다.




"이, 이상한 내용이네. 이런 거 전혀 현실적이지가 않은데."






제가 어색하게 말하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그렇지."




사나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습니다.




"분명 이단매체 같은거야. 왜, 성경을 배울 때 나온 그런..."




저희는 웃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야, 이런 것도 있구나. 내일 도로 돌려놔야지. 응, 응. 그냥 해리포터나 볼까. 그런 식으로 어설픈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요요코는 잠자코 배개를 끌어 안은 채로 앉아 횡설수설하는 저희 둘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아주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기분, 좋아보였대이."




저하고 사나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저는 요요코를 바라봤습니다. 오늘따라 괜스레 요요코가 관능적으로 보였습니다. 동그란 눈에 땀과 눈물이 섞여 송글송글 맺혀있었고, 배개 위에서 숨을 내뱉는 입술은 갓 익은 딸기 같았습니다. 수줍게 끌어모은 다리 사이에 광택이 돌았습니다. 그 모습이 어딘가 방금 전 교성을 내지르던 여자 배우와 겹쳐보였습니다. 한 번 두 사람 사이의 이미지가 겹치자 두뇌가 멋대로 요요코의 나신을 상상하기 시작했습니다. 봉긋 솟아오른 가슴 앞에 손을 올리는 요요코. 수줍은 듯 다리를 벌려 깔끔한 핑크색 국부를 보이는 요요코. 허리를 들썩이며 교성을 내지르다가, 결국 탈진하여 입에서 침을 추욱 떨어뜨리는 요요코...




"무슨 소리야?"




저는 그런 망상을 지우기 위해 괜히 발끈하며 말했습니다.




"좋을 리가 없다구, 저런 거."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지금 생각을 멈춰야 한다. 이성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습니다. 어떻게 증명해야하지. 어떻게 해야 이 이상한 감정을 지울 수 있지. 어떻게 해야. 어떻게 해야. 방법을 찾던 저는 한 가지 묘책을 - 적어도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던 악수를 - 떠올렸습니다.




그래, 직접 영상을 재현하여 증명하면 되는 겁니다. 여자가 여자에게 욕정을 할 리 없다는 사실을.




물론 영상과 같은 행위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단지 평소에 하던 것과 같은 장난을 쳐서 분위기를 환기시킬 목적이었습니다. 장난삼아 간지럼을 태우고, 요요코가 웃으면 '거봐, 별 거 아니지?' 라고 하고 어른인 체를 할 생각이었죠.




저는 단숨에 몸을 날려 요요코의 몸을 껴안았습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요요코가 놀라 비명을 질렀고, 사나는 아예 몸을 멈춰버렸습니다. 




"잠만, 후유....?!"




"에잇, 이렇게, 이렇게 조금 만진다고 해서 저렇게 될 리가 없잖아. "






저는 요요코의 겨드랑이 사이에 무자비하게 손가락을 집어놓고, 목을 입으로 앙 물며 간지럼을 태우기 시작했습니다. 평상시보다 과격하기는 했지만, 전까지는 간지럼을 태우는 정도야 자주 했습니다. 분명 그럴 터인데 요요코는 격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제 코가 작은 바람을 일으킬 때마다 몸을 연신 흠칫거렸고, 입에서는 갸날픈 목소리가 세어나왔습니다. 










"그, 그만...!"






그래도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아니, 이미 이성의 끈이 끊어져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요요코가 풍기는 냄새, 여자 냄새를 맡으면 맡을수록 아랫도리가 욱신거렸고 목이 말랐습니다. 그 갈증은 요요코가 급박하게 사투리를 내뱉으며 '안 된다, 뭔가 와버린다. 와버린다." 하고 애원할수록 더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옆에서 사나가 어떤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들리지 않았습니다.




목덜미를 핥던 입이 점점 뺨을 향해 올라갔습니다. 겨드랑이만을 노리던 손이 요요코의 가슴을 난폭하게 문지르기 시작했고, 제 손이 움직일 때마다 요요코가 허리를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부모님의 방에, 분수가 솟아올랐습니다.












감미로운 뒷맛이 입을 벗어났을 때가 되서야, 저는 비로소 몸을 떨어뜨리고 요요코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글썽거리는 눈물. 팽창과 수측운 반복하는 흉부. 눅진하게 젖어 TV 조명을 반사시키는 겨드랑이와 흐트러진 세일러복. 질척거리는 음부와 그곳으로부터 줄줄 세어나와 바닥을 적시는 투명한 액체.






-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