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한 번 뿐인 인생을 즐겁게 살자고 한다. 즐거울 뿐만 아니라 일분 일초를 자기 삶을 확장시키는데 투자하라고 많은 사람들이 조언하기도 한다. 우리는 매 초 순간을 보내지만 다시 되돌아갈 순 없기에, 그 모든 순간을 후회로써 낭비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살아가자고.


하지만 그러기 싫다는 사람도 있다. 왜 굳이 노력해야만 하느냐고, 왜 피땀을 흘려 생존투쟁에 힘을 써야 하느냐고. 내 주변에도 자신의 삶을 후회하지 않도록 열심히 달리는 사람과,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그걸 유지하며 천천히 걷는 삶을 사는 사람이 절반쯤 있다. 나는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보면, 그 둘의 적당한 중간쯤 될까.


동물원에 가보면 사자 우리에는 돼지처럼 살이 피둥한 거대한 고양이들이 줄지어 누워 있다. 나는 그걸 볼때마다 나와 주변 친구들이 겹쳐 보여 실소를 금할 수 없는데, 그들이 더는 투쟁하지 않음으로서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모습이 딱 내 꼴이라 그런 것이리라.


인간은 너무 오랜 시간동안 자신의 몫의 투쟁을 하지 않으며 살아왔다. 융성하게 발전한 고대 이집트에서부터 개인이 삶을 찾아야만했던 중세와 근대, 그리고 가까스로 만인의 평등과 삶을 보장하기 시작한 현대까지도 진정한 의미의 투쟁이란 늘 남의 몫, 국가와 시장의 몫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스스로 의지를 잃고 평범한 삶에 만족해도 물론 문제없다. 자신이 먹고 살 수만 있기야 하다면, 그것이 남에게 의존하는 행태만 아니라면. 죽을 때까지 그러할 수 없다는게, 죽기도 전에 도태된다는 사실이 문제지만.


15세기의 전설적인 음악가들을 현대에 불러오면 그들은 전문적으로 연습한 어린이들에게도 못 미친다. 마찬가지로 화가들의 테크닉도 고작 중학생, 고등학생 아이들에게 밀린다. 이것은 내 추측이 아니라, 실제로 요즘 유소년 음악가들과 미술가들이 얼마의 실력을 갖고 있는지 직접 본 입장에서 하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기량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점점 늘어나고, 그것을 위해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건 정체가 아니라 후퇴다. 모든 사람이 전진하고 있으니까. 동물원의 사자는 지금도 진화하는 사바나의 사자를 이길 수 없다. 사냥할 수 없는 사자는 도태되고, 도망갈 수 없는 사냥감도 도태되며 한 발자국씩 진화하는 와중에 오래 전 그들에게서 떨어져나온 사자는 할 수 있는게 없다.


하지만 그렇게 드러누운 사자는 말한다: 우리는 왜 싸워야만 하는가? 그리고 분하게도 나는 그에 대한 대답을 가지지 않았다. 동물원의 사자는 아무 생각없이 주는 먹이를 꿀떡꿀떡 삼키기만 하면 그만이다. 그들은 애처로운 투쟁을 계속할 필요도, 스스로 누군가를 죽여버릴 필요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참으로 멋진 삶이 아닌가. 부르주아의 유유자적이다.


마찬가지로 오래전에 자연에서 분리된 우리는 더는 생존의 투쟁을 하지 않아도 좋다. 기껏해야 수능을 위해 입시를 준비하고, 학점을 위해 책을 펴놓기만 하면 될 뿐이다. 표범을 피해 달아나는 토끼의 입장에선 이보다 더한 게으름이 없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달리지 않아도 된다. 얼마나 멋진가...


하지만 그런 우리의 정신은 복잡한 잔고장으로 거의 폐허가 되어 있다는 사실에 아이러니를 느낄 수밖에 없다. 모든 시대를 통틀어 현대 시대에 제일 많은 정신병이 발병하고, 사람들이 가장 많이 자살하며 그들이 느끼는 불행은 최고조에 달해있다. 문명이 이토록 발전했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투쟁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투쟁에 투쟁을 반복하며 삶을 되물림할 목적으로 설계된 자연의 생명체가 정면엔 넷플릭스, 다른 손엔 감자칩을 들고 소파에 편안히 앉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서 말한다: 삶이 무료하다. 인생에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아주 정확한 말이다. 우리에겐 더는 생존이 의미가 없으니까.


새벽에 도로 옆에 나 있는 트랙을 따라 달리다보면 일상에서 느낄 수 없는 스릴이 느껴진다. 변태같다고 해도 뭐라 할 순 없지만, 나는 내 앞에 누군가 달리는 것을, 아니면 자전거가 갑자기 나를 쌩 추월할 때 가장 많은 욕구를 느낀다. 앞서 가는 저 사람을 따라잡고 싶어하는 본능적 욕구가 드는 것 같다. 그 사람을 따라잡기 전까지는 일상의 고민도, 존재를 생각하는 고뇌도 더는 들지 않는다. 물론 따라잡고 나면 갑자기 어색함이 들긴 하지만.


우리는 무엇을 향해 경주할 때 가장 행복을 느끼는 듯하다. 물리적인 의미 뿐만이 아니라... 벼락치기로 치닫는 시험 준비에, 스포츠 게임에, 게임에서 서로간의 기량을 잴 때. 결국 우리의 투쟁은 후회하지 않는 삶을 위한 것이 아닌 셈이다. 우리는 우리의 행복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