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떨어지고 있다.
시적인 비유가 아니라, 5~7 미터쯤의 낮은 높이가 아니라 떨어진다면 무조건 죽을 만한 그런 높이에서
나는 떨어지고 있다.


아래를 내려다 보아도 어둠 뿐, 내 피와 살점이 뿌려질 바닥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처음엔 공포로 살려달라고 소리질렀지만, 시간이 좀 지나니 왜인지 무섭지도 않고 오히려 지루하기만 할 뿐이었다.
머쓱해진 나는 시간을 세었고, 당연히 정확하진 않지마는 적어도 60초를 13분동안 13번 셀 시간은 있었다.


더 이상 시간을 세는 건 의미 없을 테니 조금 더 의미 있을 과거 회상이나 해보자.
시작은..... 어디보자...
아마도 이 상황의 원인일 그 소녀를 내가 카페에서 만났을 때 부터가 가장 좋겠지.





햇빛이 쏟아지는 주말 오후에 나는 카페의 창가자리에 앉아 혼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생활비가 다 떨어져 겨우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며 내가 어제까지 있었던 페이지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를 포함한 모두가 책갈피라 부르는 것이 어제의 내가 마지막으로 읽었던 페이지를 내게 알려준다는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어느 문장까지 읽었는지 기억해내지 못한다는 거지."


책을 읽을 때면 나는 자주 혼잣말을 한다.
인상깊은 문장을 직접 말로 함으로써 여운을 느끼려는 목적도 분명히 있지만, 대부분은 방금과 같이 쓸모 없는 혼잣말이다.
그래도 방금의 그 혼잣말은 내 여러 의미없는 혼잣말중에서는 가장 쓸모가 있는 것으로, 나는 이런 상황에서 자주 그것을 트리거로 내가 어디까지 읽었었는지 기억해낼 수 있었다.
"18번 손님,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52쪽 18번째 문장, 재미있는 우연인지 내 대기번호와 읽으려는 문장의 번째가 같았다.
별것 아닌 우연에 즐거워 하며 음료를 받기 위해 엉덩이가 완전히 의자에 붙기 전에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책에 고정되있던 시선을 앞으로 향하니 아마도 창밖에서 내 행동들을 바라보고 있었을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내가 사는 곳에선 좀처럼 볼수 없는 희귀한 외모였다.


동물의 털같이 새하얀 머리카락, 그녀의 눈은 검고 크고 선명하다.
앙증맞게 다문 그녀의 작은 입은 내고 싶은 말이 있는지 우물거리고, 그녀의 귀여운 얼굴도 표정이 시시각각 바뀌고 있다.
게다가 귀여운 토끼귀 까지. 
그녀는 내게 상기시키듯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멋들어진 회중시계를 들어 내게 보여준 후 어딘가로 사라졌다.



.......토끼귀 라고!



나는 즉시 카페를 뛰쳐 나왔다.
그녀가 어디로 사라지는지 나는 보지 못했지만, 감이라고 할까 즐겁게도 내가 어디로 가야 그녀를 만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있었다.
확신에 찬 발걸음으로 길에 가득한 인파를 뚫고 그저 가슴이 시키는 대로 길을 달렸다.
길이 막히면 그러지 않은 쪽으로, 양갈래 길이라면 고민도 하지 않고 오른쪽으로.
집에서 무거운 가구 뒤쪽을 털어가며 겨우 모든 돈으로 주문한 커피가 떠올랐지만 이제와서 후회는 필요는 없다, 내일이면 다음달 생활비가 들어 올 테니.


"이상하네.. 분명 여기라고 생각했는데.... "
생각보다 오래 달리게 되어서 호흡이 힘들었지만, 벽에 기대어 쉬니 금방 회복 됐다.
여기는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게 누구라도 들어오고 싶지 않을게 분명한 골목이었다.
완전히 길을 잃어 신세를 한탄하면서도 다시 돌아가는 길을 찾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뻗어 핸드폰을 찾았다.


"돌아 갈까. 카페로 돌아가면 커피 받을 수 있으려나...."
아무리 그래도 요즘 커피 값이 비싸 돈은 아까우니 커피만은 받 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발정난 수컷 토끼도 아니고 왜 그렇게 열심히 토끼 귀의 그녀를 쫓았던 걸까
그러고보니 읽던 책도 거기 카페에 두고 왔었지.


나는 주머니에서 열심히 핸드폰을 찾았지만, 꾸겨진 영수증만이 있었다.
나는 좀 더 열심히 주머니를 뒤적거렸지만, 나오는 건 낡은 옷에서 자주 나오는 그 특유의 실뭉치였다.
"여기가 사람 한 명 살지 않는 유령 도시가 아니라면, 적어도 만나는 사람들 중 한 명한테서는 핸드폰을 빌릴 수 있겠지."
나는 부정적인 상황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노력하며 걸었다.
하지만 걸어도 걸어도 사람은 커녕, 실제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바람마저 전혀 불지 않는 것 같아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만이 침묵과 함께 늘었다.


"방금 저기서 뭔가 보인 것 같은데!"
이런 장소 특유의 으스스함을 잊으려고 일부러 활기차게 말하며 나는 겁도 없이 한 높은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이래서야 공포 영화 주인공들 한테 뭐라 못하지.


사람이란게 참 웃기다.
갑자기 외계인과 닌자가 나타나 서로 싸우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 고작해야 호기심으로 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가다니.


내가 들어간 빌딩엔 정체도 알지 못한 채로 쫓던 토끼귀의 소녀가 있었다.
"이번 경우에는 토끼굴이군요. 토끼굴이라기보다는 그저 높기만 한 빌딩이지만요."
"토끼굴?"
"토끼굴 하면 추락, 추락 하면 토끼굴. 그러니 일단 떨어져 볼까요."


*


배신 당한 기분이겠지.

그는 너를 위해 발정난 수컷토끼가 되어줬는데.
너는 정말 어쩔 수 없이 멍청한 토끼 였구나.

그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지금 그가 느끼는 그 감정 처럼.

그래도 한 가지 그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토끼 귀는 절대 믿지 마.


*


한 번 눈을 감았다 뜨니 지금까지의 기나긴 낙하가 거짓이었다는 듯이 나는 초록 나무들로 가득한 숲 바닥에 대자로 누워있었다.
갈갈이 찢어 질 듯한 마음의 고통과는 다르게 내 몸은 아픈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사방 팔방 찢어진 마음을 추스르고 몸을 일으키니 내 바로 앞에 표지판이 하나 있었다.


'이상한 나라를 여행하는 낯선 당신을 위한 가이드 북!! → → → '


웃긴 말이 적힌 표지판이 가리키는 곳에는 가이드 북이 아닌 기다란 장검이 있었다.
이게 뭐 장난인가 싶어 다시 표지판을 바라보니,


'보팔 소드.'


"어라? 분명 여기엔 가이드 북이라고 쓰여있지 않았나?"


그리고 보팔 소드가 있던 그 장소를 보니,


환영합니다!!


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설마...?"


나는 뭔가를 깨달은 척 하며 표지판을 보니, 그곳엔 내가 처음 봤을 때 적혀있던 그 내용이 있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책이 있었던 그 장소를 보니,


       보보
       보팔
팔팔팔 팔팔팔 
팔팔팔 팔팔소
       소소
       소소    
       소소
       소소
       소드
       드드
       드드
       드드
        드
        드


그 곳에 보팔 소드가 있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그저 그것의 기본적인 형태만을 묘사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검이었다.


운동보다 책
만화보다 소설인 나지만, 그 이전에 나도 남자.
이런 거, 참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나는 칼날이 땅에 박혀 거꾸로 세워진 그것의 손잡이를 양 손으로 집었다. 
발은 어깨 넓이, 어디선가 바람을 타고 날아온 모자달린 흰 망토가 내게 저절로 입혀졌다. 


*


태양이 그를 축복하듯 비춘다.
기다리던 영웅이다! 

바람이 그의 흰 두건으로 장난을 치며 소식을 전한다.
영웅이다, 영웅이다!

소식을 듣고 동물들이 모여든다.
우리들의 영웅이다!

모두의 찬양 속에서, 그는 보팔 소드를 뽑았다.


*


새가 지저귀는 소리,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꽃들이 피어나는 소리.
나는 숲 속을 걷고 있다.


멋진 장비들을 얻은 건 좋지만 그것을 자랑할 상대가 아무도 없으니 급격히 달아오른 텐션이 풍선 바람 빠지듯 빠졌다.
그래도 멋진 자연 속에서 평화롭게 걷고 있으니 그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기분이 좋아져서
갑자기 생긴 문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코를 박아버렸다.


"아야야..... 갑자기 이렇게 생기면 당연히 아무도 못피하지...."
살펴보니 평범한 문은 아니고, 클래식한 무늬로 꾸며진 호두나무 문이다.
나는 이 수상한 문을 열지 말지 고민했지만, 언제까지 걸어야 할지 모르겠는
이 숲에 계속 있는 것 보다 이 문을 열어 건너편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는 게 더 좋다고 생각했다.


"이래 놓고 건너편에 또 숲이 나도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상황을 상상하는 건 그것대로 재미있지만, 정말 그러면 엄청 실망할 것 같다.


나는 약간 긴장한 채로 문을 열었고, 문 너머는 다행히도 숲이 이어지진 않았다.
그 대신이랄지 문 너머는 마치 1900년대 유럽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복잡한 시가지였다.
하늘엔 분명 태양이 있지만 거리엔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다.
태양을 막는 높은 건물이 있는 것도 아닌데 태양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아서


하늘
빛나는아침
하늘.


어두운밤
땅.


마치 하늘과 땅이 분리된 것 같았다.


나는 문을 완전히 넘었다.
닫힌 문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었고, 문을 다시 열어보니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여기저기 낡고 거미줄이 쳐진 가정집이었다.
나는 다시 문을 닫았고 다시는 열지 않았다.


비가 온 뒤인지 이곳저곳 물웅덩이가 있는 거리를 걸었다.
사람은 아무도 없고 간간이 종소리가 울리기만 할 뿐인 거리였다.
여러 건물들이 어지럽게 나열된 거리에서 나는 명백히 가장 중요해 보이는 엄청 큰 건물을 발견했고, 건물의 문을 열기 위해 다가갔을 때, 누군가 뒤에서 말했다.


"거긴 들어가지 않는 게 좋을 걸? 그 안엔 수상한 변태 신사들로 가득하거든. 그중에는 남색이 취미인 신사도 있어"
나는 이보다 더 빠를 수 없는 속도로 문에서 떨어졌다.
"후후. 소문일 뿐이지만. 그래도 가끔 저 빌딩에서 비명소리도 들리고, 조사하기 위해 들어갔던 경찰이나 군인들도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조심해서 나쁜건 없지?" 
내 뒤에서 계속 말을 거는 소녀가 있다.
"앙큼한 토끼를 쫓아 이상한 나라로 떨어져버린 낯선 사람." 


*


자신감 넘치는 소녀의 목소리를 
검붉은 색을 바탕으로 검은색을 사용한 어둡고 아름다운 드레스는
짙은 남색의 머리카락이 길고 풍성하게 허리까지 내려와 매력적인 
아름답고 귀여운 얼굴은 볼 것도 없고
머리카락과 같이 짙고 깊은 밤과 같은 눈은 블랙홀처럼
그 모든 것에 대비되는 흰 피부는
아침과 밤이 땅과 하늘로 나뉜 이 거리와 무척 어울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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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시리즈 좋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