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XX페이지에서 인기를 끌었던. "몰락 귀족은 복수를 꿈꾼다" 는 소설이 있었다. 전체적인 문체는 여성향에 가깝지만 히로인이 없다는 것이 독특했고, 추악한 음모로 부모님을 여윈 채 길거리를 떠돌던 어린 귀족 사파이르가 온갖 역경을 딛고 본래 자리를 되찾는 복수물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빙의물, 먼치킨물이 아니라는 점이 마음에 쏙 들었지만.... 최종 보스이자 사파이르의 가문을 몰락시킨 장본인, 프레이야 문라이트가 투옥되는 회차를 읽던 중 사고가 일어났다.


"꺄악!"


미처 대응할 틈도 없이 승용차 한 대가 인도에 서 있던 나를 전속력으로 덮쳤다. 온몸의 뼈가 부러진 듯 끔찍한 통증이 엄습했고, 머리에서 피가 끊임없이 흘러내리며 시야를 가렸다.

억겁의 시간 동안 암흑을 떠돌다 눈을 뜬 곳은 천국도 지옥도 아니었다.

===============================================

"뭐야. 정신 차렸네?"


여동생의 원수, 부모님의 원수, 가문의 원수, 나까지 수십 번 죽이려 했던 장본인.

프레이야 문라이트는 격렬한 전투 끝에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던 불로불사도 잃은 채 투옥되어 있었다. 나 역시 오른눈에 지워지지 않을 흉터가 남게 되었지만... 실명하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여긴...?"


항상 침착한 그녀도 이런 상황에선 당혹스러워지는 모양이다.


"다, 당신은... 사파이르?"


"알면서 왜 묻지?"


"그럼 여기는.. 발로란 공국?"

"불로불사의 힘을 잃더니 머리가 어떻게 됐냐?"

"그럴 리가 없어. 아니야. 아니야... 이건 꿈이야..."


꼴사납기 그지없군. 속으로 비웃음이 절로 나왔다.

마력을 억제하는 사슬에 묶였으니 도망가지도 못할 것이다. 나는 그녀를 남겨둔 채 지하 감옥을 빠져나왔다.


저녁에 다시 왔을 때도 그녀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내가 소설 속에...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미안해서 어쩌나? 이건 현실인데."


벽만 바라보며 중얼거리던 그녀가 대뜸 이쪽으로 기어왔다. 발목의 족쇄 탓에 움직일 때마다 쩔그렁 소리가 울려퍼졌다.


"자, 잘못했어요.. 전부 다... 제발 살려주세요..."

".....걱정 마. 지금 죽이진 않을 테니까. 인간은 물 없이도 3일은 버틴대."


아주 잠시나마 입가에 걸린 미소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냥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알아. 일부러 네년을 살려둔 거지."

"그게 아니라...! 엄마.. 아빠...."


자기 손으로 부모마저 죽인 악녀가 엄마 타령이라니. 당장이라도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은 작정이었다.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고 떠날 때까지도 그녀는 애타게 부모님을 부르짖었다.


"제발 믿어주세요.. 전 프레이야가 아니에요. 사고로 빙의당한 거라고요..."


다음날도 끊임없이 늘어놓는 헛소리에 질린 나머지 무심코 가녀린 목을 움켜쥐었다. 꼬박 하루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탓에 그녀의 저항은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였다.


"적당히 좀 해라. 응?"

"커흑! 저, 정말이에요.. 제발..."


그대로 손아귀에 힘을 주려던 순간, 문득 그녀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소리는 분명 프레이아였지만, 말투도, 행동도 그저 연기하는 것 같다기엔... 어쩐지 너무나도 어색했다. 이중인격이라도 되는 것일까?


마음 한 구석에서 솟아나는 죄책감도 있었다. 그녀의 육체 나이는 기껏해야 19살. 얼굴이 퉁퉁 부은 채 잔뜩 갈라진 목소리를 내는 광경이 마냥 통쾌하진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조금은 더 살려놔도 되지 않을까.


"자, 잘 먹겠습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나고, 감옥에서 프레이야와 대화할수록 내 의문은 커져만 갔다. 내가 알던 원수의 모습이 절대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처럼 굶어죽기 직전이 아닌데도 그렇게 싫어하던 생선을 먹어치우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맛있어?"

"네, 네! 너무 맛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너 다른 차원에서 빙의됐다고 했지? 아는 건 다 말해봐."


그녀의 과거사, 나와의 악연 등은 알지만, 정작 공국의 기본적인 법령도 잘 모른다는 상태였다.

표정이나 목소리의 떨림은 거짓말과 매우 거리가 멀다. 어쩌면 설마..?


"다 먹었으면 나와."


앞으로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결단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원래 이런 장르는 빙의당한 쪽이 주인공인데 역으로 기존 세계관 인물이 주인공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