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늑대와 향신료]에서 언급된 "가짜 주화"를 알아보자! 포스팅을 했다가 디씨 판갤에서 잠깐 동안 고증 논란을 촉발시켰으며 너와군으로부터 "그런 글 쓸 인종이 대한민국에서 님 밖에 더 있음?"이란 소리까지 들었지만 제 버릇 개 못 줬다. 결국.ㄱ-



들어가기 전에:


ⓐ늑대와 향신료는 15~16세기를 무대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글은 늑대와 향신료를 비판하거나 비난하려는 의도에서 작성된 것이 아님을 밝힌다.

ⓒ어디까지나 이 글은 재미로 읽길 바란다. 판타지는 판타지다.

ⓓC에 입각하여 패션유행사와 수면관습과 음식과 식탁예절 따위는 참고하지 않았다.





[1권]


늑대가 달린다(1권 12페이지):

 그리스도교 이전의 북유럽 사람들은 여문 이삭들이 바람에 눌린 것을 보고 '늑대가 달린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경작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두려워했으며 초기 그리스도교 성직자들은 이러한 의식구조를 고치는데 매우 애를 먹었다. 쟁기질, 여문 작물로 가득한 밭 등이 평화로운 장면으로 인식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자세한 것은 하인리히 야콥 저 [빵의 역사] 참조. 이 책에 나오는 적잖은 내용들이 늑향 1~4권을 설명해줄 수 있다.

 

수도원(1권 16페이지):

 수도원은 교회와 달리 말 그대로 도 닦는 친구들을 위한 곳이다. 교단에 따라 다르지만(시대가 지날수록 농촌보다 도시를 중심으로 한 교단이 성장을 거듭했다) 이들은 황무지에 대수도원을 세우고 농지를 경작했다. 수도원들은 청렴결백한 생활을 지향했으면서도 적잖은 부를 쌓게 되었고, 많은 기부를 한 귀족의 아들이 수도원장으로 향하는 직선코스를 밟으면서 부의 축적은 더 심해졌다. 수녀원도 마찬가지였는데, 이 때문에 교회의 기강이 흐트러지게 된다.


귀족이면서도 땅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좋아하는(1권 23페이지):

 마상시합과 전쟁은 귀족들 최대의 관심사임에는 분명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귀족들이 자신의 영지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중세 문학 작품에서는 "기사들이 더 이상 싸우지 않고 영지의 젖소가 젖을 얼마나 생산하는지에 관해서만 이야기한다"고 탄식하는 대목이 보이기도 한다. 또 영지의 발전에만 신경 쓰던 기사가 사모하던 여인이 "싸우지 않고 농사만 짓는 기사는 싫다"하자 마상시합에 출진하여 연전연승을 거둔다는 내용의 기사도문학 작품도 발견된다. 


작물은 제 땅에서 자라야 잘 여무는 게 많아(1권 72페이지):

 물론 실패한 사례도 적지 않지만, 농업기술의 역사를 생각해볼 때 전적으로 맞다고는 할 수 없다. 농업사는 기술과 품종의 끊임없는 개량의 역사다. 타 지방의 품종을 옮겨 심는 것도 드물지 않다.(물론 소련의 또라이처럼 실패한 사례도 있지만) 중세에도 품종개량이 있었느냐고? 중세의 밀과 보리 역시 여러 종류의 밀과 보리를 가져와 시험해본 끝에 나온 것이다. 거기서 더 발전한 것이 현대의 밀과 보리다.


어음(1권 77페이지):

 최초의 어음에 관해서는 여러가지로 논란이 있지만, 이탈리아 상인들보다 이슬람 상인들이 먼저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이들은 여러가지 지적재산을 유럽에 넘겨주었다) 이러한 신용거래가 널리 보급된 것은 작중에 나온 것과 같이 대량의 화폐를 갖고 다니기가 힘들다는 것도 있지만, 주화의 복잡성과 혼란 때문이기도 하다. 작중 언급되는 것은 현대의 발행인이 제3자에게 지급의무를 넘기는 '환어음'으로 추정된다. 근데 어째 로렌스의 설명만 들으면 바터무역(물물교환)처럼 보이기도 한다.ㄱ-


영주에게 고용된 회계 담당(1권 78페이지):

 회계의 역사는 고대부터 시작되는데, 수학자와 회계사들은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고소득전문직이다. 하지만 15세기까지도 회계는 어디까지나 '대충 맞으면 그만'이란 식으로 행해졌다. 또, 엄청난 액수를 횡령하기 위해 조작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는 유명한 푸거 가문이다. 막스 베버를 비롯한 여러 서양학자는 복식부기 등 회계기술의 발전을 서양의 가장 위대한 발명이며 서양이 동양을 제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로 보고 있다.


감자(1권 82페이지):

 최초로 감자를 언급한 문헌은 에스파냐의 <페루 연대기>(1553년)다. 1573년 에스파냐의 지방 시립병원에서 음식 재료의 일부로 사용하기도 했다. 다만 유럽 대부분에서 이 작물은 빵(탈곡하고 갈고 반죽하고...)에 비해 먹기 쉬워서 천한 음식으로 인식되었다. 산업혁명기 때에야 구황작물로서 그 위력을 떨쳐 인구폭발을 일으켰다. 작중에서는 좀 이른 등장이 아닐까 하지만, 어디까지나 판타지니 큰 무리는 없을지도.


주화의 귀금속 함유량(1권 86페이지):

 시대와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90%짜리도 있는가 하면 2%짜리도 있다. 화폐가치는 기본적으로 등락을 거듭하지만, 많은 군주들이 재정난을 해소하기 위해 작중의 트레니 국왕처럼 화폐 순도를 수시로 낮췄다. 이는 화폐제도의 문란을 부추겼다.


공증인(1권 93페이지):

 12세기 이전에는 왕과 귀족들을 위해 일하던 자들이나, 상업이 발달한 곳에서도 빠르게 적응했다. 아직도 이탈리아에서는 공증인이 법률가적 기능을 일부 담당하고 있다. 이들의 서명은 복잡하거나 암호를 포함한 경우가 많았는데, 위조를 막기 위해서였다.


땅이 질퍽거리니까 짐마차보다 걷는게 더 빨라(1권 94페이지):

 당시의 바퀴 달린 탈 것 자체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중세의 도로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관리되지 않은 탓이 더 크다. 통행세를 길의 유지와 보수에 사용한 세력은 그리 많지 않았다. 마차는 결코 편안한 여행수단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끔찍한 여행수단에 속했다. 대개의 여행자는 걷거나 말을 타고 이동했다. 참고로 어떤 여행수단이든 하루 30km 이상을 움직이지는 못했으며(고대 로마 시대에는 무리를 좀 하면 하루 60~70km의 여행이 가능했다) 교황청 파발꾼 정도만이 예외에 속했다. 중세의 여행자들은 35km 선상에 있는 2개의 방문지를 가로지를 경우 하루 안에 불확실한 35km의 여행을 시도하는 것보다는 첫날에 20km, 이틀에 15km라는 식으로 이동해 노숙을 피하는 것을 선호했다. 


농부들은 공기에 정확하다(1권 94페이지):

 시간 관념에 대한 이야기. 농민들이 시간에 거의 신경쓰지 못했으며 기계식 시계가 발명된 후에도 시간관념이 잡히기까지 수백년이 걸렸다. (다만 이것을 예로 들어 시간의 수량화에 대해 가치폄하를 한다면 곤란하다. 중세 시대 학자들도 농부의 예를 든 어느 학자의 이야기를 듣곤 "모자에 똥을 눠줘라"고 했다.)

 공기 이야기가 나오는 김에 사족을 달자면, 유럽 농업사를 이해하는데는 기후변화가 빠질 수 없다. 기후변화의 한 예로, 14세기 전반에 기후가 악화되면서 영국에서는 포도재배가 사라졌으며 노르웨이에서는 곡식이 수확되지 않았으며 발트해 연안이 얼어붙었고 독일과 네덜란드에서는 홍수가 더 빈번해졌다. 자세한 것은 [서유럽농업사]와 [서양중세의 삶과 생활], [간결한 세계경제사]등을 참고할 것.


대상-소자본 원거리 무역-을 습격한 늑대 떼(1권 96페이지):

 늑대는 근대 이전까지 가장 무서운 짐승이었다. 유럽의 겨울을 훌륭히 견디며, 곰과 달리 겨울잠을 자지도 않고, 교활한데다 떼를 지어 수백km씩 이동하기 때문이다. 섬나라 영국만이 늑대를 멸종시킬 수 있었다. 15세기 파리와 밀라노에서 늑대 떼가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도시들이 인구 20만에 달하는 유럽 최대의 도시였음을 감안해보면 당시 늑대가 얼마나 기승을 부렸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인구에 대해서는 아래 102페이지 해설 참조)


짐마차 바퀴가 진창에 빠졌다가는(1권 100페이지):

 10~13세기 동안 육로 통행은 많이 늘었으며 여행 또한 과거에 비해 편해졌다. 하지만 영주들이 일부러 길을 관리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는데, 험한 길에서 떨어진 물건을 주워먹기 위해서였다. 이런 길에서 대상은 값비싼 물건을 노린 도적기사(덤불기사라고도 한다)의 표적이 되기 쉬웠고 행상인은 불량배나 도적의 표적이 될 수 있었다.


국왕으로부터 자치권을 쟁취한 도시(1권 102페이지):

 왕과 봉건영주들은 도시민을 봉신처럼 다스리려 했지만 상인들의 요구사항은 봉건적 위계질서에선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상인들은 도시 거주 하급귀족과 협력하여 단결했으며, 자치권을 얻기 위해 대군주들과 협상을 벌이거나 투쟁하였다. 11세기 밀라노는 군사력으로 자유를 획득하였으며 롬바르디아 북부 도시동맹은 12세기에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황제의 군대와 싸워 이겼다. 그러나 이러한 도시발전은 다른 지방에선 성공적이지 못했다. 밀라노는 13세기 말에 20만명의 인구가 살았지만, 1377년까지 런던의 인구는 4만명에 불과했고 독일 최대 도시였던 쾰른의 인구도 이와 비슷했다. [간결한 세계경제사]와 [도시로 본 중세유럽] 참조.

 (14세기 초 파리의 인구가 8만명이었는지 20만명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밀라노 인구 역시 20만이 아니라 10만이라는 자료가 있다. 하지만 [도시로 본 중세유럽]에서는 20만명이 불가능한 숫자는 아니라고 언급하며 [간결한 세계경제사]에서도 20만이란 숫자를 인정하고 있다.)

 

고추(1권 107페이지):

 감자와 마찬가지로 아메리카의 신대륙 작물.


계약을 교환한 상인들끼리 돈을 각출해서 배를 빌리다(1권 109페이지): 

 실제 역사에 다양한 형태로 등장한 '코멘다'를 뜻한다. 여러 사람이 돈을 모아 투자하며, 교역여행 끝에 많은 자본을 댄 사람이 많은 수익을 거둬가는 형태의 회사는 11세기에 나타났다. 너무 늙어 여행하기 힘든 상인이 실질적으로 교역을 담당한 다른 상인에게 자본을 제공하는 방식, 여러 사람이 자본을 모아 투자하는 방식 등이 발견된다. 지중해 해상무역이 일반적인 것이었으나 육상무역에도 적용되었다. 이 계약은 보통 일회적 모험에 국한되어 있었다.


상회와 지점(1권 114페이지):

 교역량이 증가하고 상업관행이 표준화됨에 따라 여행자조합공동체, 합자회사, 도시동맹, 한자(상인조합공동체에서 도시한자로 발전) 등 다양한 형태의 상업조합과 회사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보다 효율적인 활동을 위해 여기저기에 지점을 만들었다. 이탈리아의 회사들은 베니스 본사에서 런던 지사를 운영하기도 했는데, 12~15개의 지점을 가진 대기업도 있었다. 대기업들은 지사를 운영하는 것 외에도 자체의 선박과 짐마차를 소유했으며 어떤 기업은 광산까지 소유하거나 임대했다.


환전상(1권 114페이지):

 중세엔 다양한 종류의 화폐가 있었고, 다양한 지방의 사람들이 모이는 정기시 등에서는 이것들의 가치를 가늠하는 전문직이 필요했다. 화폐전문가인 이들은 곧 금융업에도 손을 대게 된다. 화폐의 종류는 아래에서 언급하겠다.


견본(1권 118페이지):

 견본을 보여주고 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상파뉴 대시 등 여러 견본시와 집산지에서 활성화되었다. 자세한 것은 [간결한 세계 경제사] 참조 요망.


주판(1권 118페이지):

 가장 원시적인 계산수단이지만 중세 유럽에선 500년부터 1000년까지 주판이 확인되지 않는다. [수량화 혁명]에서는 이를 두고 로마 이후 유럽이 크게 낙후되었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주판과 비슷한 계산도구는 한참 후에야 나타나는데, 늑향에 나오는 주판하고는 생긴 것이 다르다. 실제 중세 유럽에서 쓰인 것은 책상 위에 검은 줄을 긋고 계산용 칩을 올려둔 '계산판'이었다.(물론 '판타지'인 늑향이 이것까지 신경 쓸 이유는 없다)


화폐의 종류(1권 138페이지):

 작중에 나오다시피 개나 소나 화폐를 주조했다. 또 종교축일이나 높으신 분들의 기념일에 맞춰 제작되기도 했으며, 이러한 이유로 화폐의 수명이 1년은 커녕 며칠을 넘기지 못할 때도 많았다. 이러한 화폐의 가치변경은 대개 착취로 이어졌으며, 이렇게 제작된 화폐는 제조자의 영토 안에서만 통용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등 무역도시의 영향력이 큰 화폐는 널리 쓰이기도 했다. 참고로 12~13세기의 프랑스에서 화폐제조군주는 300명, 독일에서는 500명이었다. 후대에 발굴된 어느 부유한 한자(Hanse: 중세의 상업도시동맹. 한자동맹Hanseatic League은 잘못된 말이다) 상인의 환전소에서는 헝가리에서 스페인까지, 핀란드에서 이탈리아까지의 84개 조폐소에서 만들어진 865종의 화폐가 발굴되었다.


빵가게 조합법(1권 140페이지):

 중세 도시의 직업들은 조합법을 만들어 여러가지를 규정했다. 서로 다른 색의 염색업자들 혹은 피혁장인들과 염색업자들의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강물을 사용하는 시간대와 날짜를 정한 것이 좋은 사례다. 이런 조합법과 그 분쟁에 관련된 문서는 아직도 엄청난 양이 보존되어 있으며 유럽 각 지방의 향토사 연구에 매우 중요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합법은 편집증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폐쇄적으로 변하는데, 이는 조합의 이익을 위해서지만 결과적으로 조합의 몰락을 가져왔다. 양판소 용병길드? 그것도 길드냐? 찌질이 집합소지.ㄱ=


안경(1권 145페이지):

 네로 황제가 보석을 이용해 경기를 관람한 것이 최초의 안경이란 말이 있지만 설득력은 별로 없다. 다만 안경다리 없는 안경에 대한 찬양과 기록, 그림은 중세에선 일찍부터 찾아볼 수 있다. 자세한 것은 [코 앞에서 본 중세] 안경편을 참고할 것.


화폐를 부딪혀 순도를 측정한다(1권 153페이지):

 작중에서는 신만이 쓸 수 있는 것처럼 묘사하지만 실제로는 여러 전문가들이 사용하는 방법의 하나. 현대의 화폐전문가들도 자주 사용한다. 초보자가 하기엔 너무 고난이도의 방법인 것은 사실이지만.


촛불(1권 168페이지):

 거푸집을 이용한 제작법이 등장한 후에도 양초는 고급품이었다. 포경산업의 성장과 근대 기계제조 양초가 등장하기 전까지 양초보다는 기름등이 더 많이 쓰였다. 밀랍으로 만든 양초는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 썼고, 낮은 신분의 사람들은 저질의 수지로 만든 양초를 사용했다. 여러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등에서 묘사하는 것과 달리 중세의 밤은 매우 캄캄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초(와 기름) 값을 아끼기 위해 날이 저물면 바로 잠들었기 때문이다. 조합법에서도 야간작업은 금지하는데, 조합의 규정에 어긋나는 상품이 만들어지거나 화재가 나거나 "양초값 때문에 제품 가격이 펄쩍 뛰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호밀빵(1권 188페이지):

 밀이 대량재배되는 날이 오기까지 호밀빵은 유럽인들의 주식이었다. 독일인들은 "귀리 먹는 천한 것"들과 자신들을 차별화하기 위해 "호밀 먹는 사람들"이라고 자칭하기도 했다. 1700년까지 영국에서 소비되는 빵의 40%는 호밀빵이었다. 1800년에 들어선 후에야 호밀빵이 사라졌다. 호밀의 국가였던 독일도 도시 사람들이 밀빵을 찾기 시작하면서 호밀빵의 수요는 크게 줄어들어버렸다.


고향이 사라지다(1권 195페이지): 

 마을이 사라지는 이유는 기근, 전쟁, 역병 등 다양했다. 전쟁 등으로 불 타 없어지는 집이 워낙 많아 여기서 파생된 단어까지 있을 정도다. 대개의 경우 피신한 생존자가 돌아와 마을을 재건했다.


자경단(1권 209페이지):

 밤중의 도시에서 변을 당하면 법에 호소하지 못했다. 야밤에 나가는 행위 자체가 법의 보호를 포기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밤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대개 수상한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상업이 발달하면서 자경단의 역할은 상인들의 분쟁을 조정하는 역할로 옮겨갔지만, 이런 사람들을 붙잡는 역할 또한 사라지진 않았다. 자경단은 대개 Sergent계급이 지휘했다.


지하수로(1권 241페이지):

 중세 유럽이 요강의 내용물 따위를 길에다 쏟아붓는 등 온갖 이유로 지저분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하수도 시설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자세한 것은 입맛 떨어지므로 과감히 생략한다.


마치 고리대금업자가 천국으로 가는 길이 아득히 먼 것에(1권 278페이지):

 고리대금업이 죄악으로 인식된 이유는 신의 것인 '시간'에 가치를 매겼기 때문이다. 12세기 교회는 회개하지 않고 죽은 이자 수취자를 교회 묘지에 묻는 것을 거부했으며 16세기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도 이들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우리는 중세 시대 관련 자료에서 고리대금업자들을 향한 엄청난 양의 악평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자본 없이는 경제가 돌아갈 수 없었기에 고위직의 사람들이 20%가 넘지 않는 이자율로 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것이 묵인되는 경우도 있었으며, 상업이 발달한 지역에서는 이런 제한 따윈 가뿐히 무시되기도 했다.


후추(1권 307페이지):

 유럽에서는 수확 후 축제를 벌일 때 살찐 가축들을 잡아 일부는 저장하고 나머진 그 자리에서 먹어치운다. 문제는 저장된 육류가 대개 소금에 절여진 채 시간을 보내고 나면 거의 썩다시피 한다는 것이다. 이 염장고기의 지독한 냄새를 없애거나 보존성을 높이기 위해 후추가 꼭 필요했다고 한다. 늑대와 향신료 1~2권 중 겨울이 되면 육류요리가 늘어나고 향신료 소비가 늘어날 것이란 말은 이를 뜻한다.

 

 그러나 후추를 뿌려먹을 재력이면 겨울에도 신선한 고기를 얻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을 축제 후 저장된 고기는 거의 며칠 내에 소모된다. 후추를 비롯한 향신료는 오래된 고기의 냄새를 없애거나 고기의 보존성을 높이는 용도보다, 부유층의 과시용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참고로 [기호품의 역사]에서 저자는 향신료가 보관 목적이 아니라 사치품으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향신료에 보존효과는 별로 없으며, 중세유럽요리가 현재보다 아랍이나 인도의 요리에 가까울 정도로 자극적이었던 것을 고려할 때 이 주장은 타당해보인다. 




참고도서:


간결한 세계 경제사

중세 산책

서유럽농업사

코 앞에서 본 중세

서양중세의 삶과 생활

빵의 역사

돈과 인간의 역사

도시로 본 중세 유럽

기호품의 역사

수량화 혁명

서양의 장원제




뱀다리1: 잠자리 관습, 식탁예절, 패션유행사 등은 제외. 여름엔 벌거벗고 잤고 겨울엔 옷 입고 잤으며 부드러운 침대는 17세기까지 대중화되지 못했다. 작중 호로와 로렌스는 가을에 여행을 다니고 있으니 옷은 입고 잤겠다. 식탁예절? 11세기에 베네치아의 도제에게 시집 온 비잔틴 왕녀는 포크 쓴다고 저주 받았다. 15세기까지도 '포크 쓰는 놈은 교수형 당할 놈'이란 뜻의 욕이 존재했고. 패션? 이상할 정도로 긴 뾰족구두와 탄력 없는 스타킹을 신은 남자가 보고 싶다고?


뱀다리2: 태클 대환영. 반영하겠음.


뱀다리3: 2권은 안 할지도 모르겠음.ㄱ-


뱀다리4: 본인의 절친한 이웃 index가 이 글을 여러 짤방과 함께 편집하여 코믹하고 읽기 쉽게 만들어보겠다고 한다. 무모한 놈. 그리고 아직 소식이 없다.


최종수정일: 2015년 1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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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이글루스 폐지되기 전에 옮겨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