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력 800년 6월 1일 새벽 2시 55분.


 양 웬리가 오랜 지병이었던 지구교도의 블래스터에 허벅지가 뚫려 위상수학적으로 도넛이 되어버린 날.


 마술사는 끝내 이제르론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 대신이라고 하기는 뭣하지만, 양 웬리의 시간은 정지하지 않았다.





 양은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경악하며 눈을 비볐다.


 그토록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머리 위에 헤일로가 달린 소녀들이, 원시적인 화약무기를 들고 총격전을 벌이는 게 아닌가.


 심지어 총에 맞고서도 다치지 않는다.


 양 웬리가 그동안 익혀온 36세기의 상식이 모조리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순간이었다.


 이 이상한 세계는 뭐지?


 제국인들이 믿던 발할라가 정말 존재했던건가?


 지금 내 눈 앞에서 발키리들이 전쟁을 벌이고 있나?


 그보다도, 총성을 들으니 세삼 신경 쓰이는 곳이 있었다.


 분명, 허벅지를 관통 당했을 탠데?


 양은 시선을 아래로 향해보았지만, 그의 허벅지는 멀쩡했다.


 부상의 흔적조차 없이.


 하지만 양은 자신이 도넛에서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에 딱히 감명 받지는 않았다.


 "이건, 도대체?"


 암릿처 성역 회전에서 키르히아이스 함대가 배후를 기습했을 때,


 버밀리온 성역 회전에서 트뤼니히트가 난데없이 항복해버렸을 때,


 하다 못해 바로 직전에 총을 맞았을 때도 이토록 놀랍지는 않았다.


 양은 생전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다.


 미지로부터의 공포는 인간이 느끼는 스트레스 중에서도 최악이다.


 따라서 이 건에 대해 양을 책망한다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리라.


 인간은 전지하지도, 전능하지도 않으므로.


 하여튼, 놀라운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 저 간판은 일본어였던가?"


 양은 어째서일까, 이 낯선 세상의 문자를 읽을 수 있었다.


 당연하지만 양은 1500년 전에 핵전쟁으로 사멸한 중세 언어따윈 모른다.


 애초에 인도 유럽어족의 후손인 동맹 공용어나 제국 공용어와는 달리, 계통부터가 다르지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은 거리의 간판이 일본어임을 명확히 인지한다.


 또한 그 의미를 이해한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질 않는다.


 이건, 그야말로 '신비' 그 자체였다.


 이쯤 되니,


 양 웬리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 * *




 돈이 없이는 인간은 자유롭지 않다.


 사람은 월급 받은 만큼은 일해야 한다.


 딱히 신념이랄 것을 가져본 것도 없고, 그런 개념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 양 웬리였지만 굳이 따져보자면 저런 개념을 신념으로 쳐 줄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자유행성동맹에서도, 이곳 키보토스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원칙이었다. 


 정말 본의는 아니었지만, 양 웬리는 느닷없이 이세계 전생이란 것을 당하게 되었다.


 동맹의 입체 TV 드라마에서도 안 써먹을 것 같은 고리타분한 전개였다.

 

 하지만 어쩌겠나, 이게 현실인 걸.


 최대한 간략하게 표현해도 57,007,800자에 달하는 과정 끝에.


 양 웬리는 연방수사동아리 샬레라는 곳에 취직하게 되었다.


 어쩌다가 팔자에도 없던 선생 노릇을 하게 된 걸까?


 정말이지 적성에 맞지 않는 직업이다.


 뭐, 군인은 적성에 맞았냐만.


 하여튼, 급료 분의 일은 해야 한다 싶은데 이게 잘 되지 않았다.


 일단 사관학교 졸업생이기는 하니 행정업무를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양 웬리의 성향 자체가 그런 업무완 맞지가 않았다.


 더군다나 그는 지독한 기계치였다.


 생전 제대로 다룰 줄 알던 기계라곤 트뤼니히트의 얼굴을 스크린에서 빨리 치우기 위한 리모컨 정도.


 그렇다 보니, 지나칠 정도로 전산화가 잘 되어있는 샬레의 업무는 그야말로 이제르론 요새를 상대하는 느낌이었다.


 "카젤느 선배, 오늘 따라 선배님이 사무치게 그립군요. 그리고 선배의 이름이 먼저 나온 건 미안하지만, 프레데리카 당신도."


 자신으로서는 겨우 학원도시 1개 분량의 행정업무에도 애로사항이 난무한다.


 인구 500만의 인공위성 이제르론의 행정업무를 총괄하던 카젤느 선배,


 14,000장의 이제르론 요새 슬라이드 사진에서 앞뒤가 모순된 6장의 사진을 찾아내던 프레데리카.


 둘 중 어느 쪽이건 자신보다는 이 '선생'의 역할에 적합했으리라.


 하지만 이제는 모두 다시는 만날 수 없을 인연들이다.


 엘 파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제르론은?


 지나간 과거에 미련을 두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은 알고 있지만, 사람 마음이 그렇게 쉽지가 않다.


 "선생님......? 선생님!?"


 '어이쿠, 또 실수했군.'


 "미안, 하야세양. 잠시 정신이 팔려있었나 봐."


 양 웬리의 눈 앞에 있는 여학생은 하야세 유우카, 금일 샬레의 당번이다.


 샬레의 당번이란 업무 내용만을 따지자면, 동맹군 시절의 당번병과 큰 차이는 없었다.


 당번병들은 징병 당했고, 그녀들은 자의로 선택했다는 본질적 차이는 있지만.


 "선생님! 어째서 샬레의 경비 청구서에 서점 영수증이 포함되어 있는 건가요? 공무와는 상관 없는 일이잖아요?"


 "이런, 행정업무에 미숙하다보니 실수를 했네. 그 부분은 적당히 내 월급에서 제하도록."


 "선-생-님-!!"


 눈 앞의 하야세 유우카는 뭐라고 해야 할까, 율리안과 프레데리카와 카젤느를 합쳐놓은 듯한 사람이었다.


 뭐야 그거 무서워.


 "그보다도, 겨우 한 달 사이에 서점에 10만엔이나 쓰셨어요? 끼니도 빵에 잼을 바르는 정도고... 정말이지, 어른이면 어른답게 계획적으로 소비하셔야죠!"


 '예전에 그렇게 해봤는데 망했지만.'


 양은 과거를 회상했다.


 제7차 이제르론 공방전의 직전에, 쇤코프와 나누었던 대화였다.


 "서른 살 전에 각하 소리까지 들었으면 충분하지 않겠나? 게다가 이 작전이 끝나 살아남는다면 난 퇴역할 생각이거든."


 "퇴역이라고요?"


 "그렇다네. 뭐, 연금도 나오고 퇴직금도 나올 테고.... 나하고 식솔 한 사람 정도 소박하게 살아가는 데는 불편하지 않겠지."


 그래, 그랬었지.


 노후대비 차원에서 저축도 열심히 하고, 공무원 연금과 퇴직금도 마련해 놨지.


 그야말로 편안한 인생이 보장되었어야.... 했는데...


 그거 받기 전에 나라가 망했다.


 동맹 디나르는 휴지조각이 되었고.


 그동안 낸 만큼도 돌려 받질 못했으니, 본전도 못 찾았지.


 그 결과가, 지금 이 꼴.


 "...하야세양. 사람은 언젠가 죽지. 그런데 굳이 저축할 필요가 있을까?"


 "선-생-님-!!"


 당연하게도, 양 웬리가 이미 한 번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하야세 유우카는 그의 발언에 동의하지 않았다.


 알았더라도 동의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하여튼, 양 웬리가 보기엔 키보토스도 그렇게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미성년자들이 총기를 들고 아무 곳에서나 싸워 대는 상태는 '평화'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키보토스 바깥 세상은 전투가 한 번 벌어졌다 하면 백만 단위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막장이었으니, 자신이 할 생각인가 싶기는 했지만.


 * * *


 이거 말고도 보충수업부에서 낙제 직전이었던 경험을 살려 애들을 지도하는데, 자기 아들 이야기를 하다가 코하루한태 '14살에 아들을 낳은' 파렴치한으로 오해당하는 이야기라던가 사오리한태 허벅지 한 번 더 뚫리는 이야기라던가 생각해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