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학 보빔 및 몬무스화 요소 있음!

직접적인 19금 행위 묘사는 없음.





용사에 의해 마왕이 토벌당하고 백 년 정도가 지난 뒤의 세계.

여전히 마물들이 남아있긴 해도 지금 세상은 확실히 인간의 시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론, 마물과 최전선에서 싸웠던 군대조차 이제는 마물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여서 대부분의 기사들은 자신의 지위를 그저 귀족 작위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대다수의 기사들과 달리, "기사라면 수치를 당하느니 차라리 죽는게 낫다."라고 말하고 다니는 여기사 A.


"기사는 충성을 바치는 자를 위해 자신의 능력을 써야 한다."라는 이유로 대부분의 백성들에게도 무관심하고

원리원칙주의자라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정이 있든 봐주지 않는데다

다른 기사들에게도 항상 "그정도 실력으로 어떻게 기사의 상징을 달고 있지?"라면서 갈구는데


"그러는 자기는 얼마나 잘난데?"라고 따지기에는

매일같이 훈련, 토벌, 업무, 훈련 싸이클을 돌려대는 기계같은 루틴에

비슷한 나이대에서는 적수가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실력까지 있어서

다들 뒤에서는 까더라도 앞에서는 찍소리 못하는 그런 사람이다.




한편, A의 동기면서 A와는 반대로 사람 좋은 걸로 소문난 여기사 B.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군요.", "알겠어요.", "고생하셨어요."같이 좋게좋게 말해주고

잘못한 걸 봐도 심각한게 아니라면 "일부러 한 건 아니잖아요?"라면서 못 본 척 눈감아주고

고된 훈련과 일정에 지친 기사들에게 "조금만 더 같이 힘내요."라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는 천사같은 성격에

실력도 적당히 좋은 기사라서 A와는 달리 인기가 많았다.




A는 견습 기사일 때부터 그런 B를 보면서 탐탁치 않아 했다.

그녀가 보기에는 B는 충분히 자신보다 강해질 수 있는 재능이 있는데도,

다른 사람을 돕느라 자기 실력을 100%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그녀에게 더 엄하게 대하고 직접 붙잡고 대련까지 해가면서 단련시키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결국 B를 '여자 치고는 강한 기사' 정도로 만든 정도였다.


그 실패에 대한 반동인지, 아니면 단순히 A의 성격 때문인지,

A는 재능이 있음에도 그걸 썩히고 있는 B와,

B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그 재능이 개화하는 걸 방해하는 다른 사람들과,

그리고 무엇보다 B의 재능을 일깨워주지 못한 자신의 무능함에 화가 나서

B를 볼 때마다 차가운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


그럼에도 B는 "A 언니는 예전부터 저를 많이 가르쳐 주신 분이었어요."라면서 A를 옹호해주었다.

다만, B의 의도와는 달리 사람들은 B가 그렇게 감싸주는데도 B를 냉대하는 A를 더욱 싫어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물과의 싸움 도중에 실종되어버린 B.

A는 B가 마물들의 습격을 당한 마을에 지원군으로 갔다가,

다른 동료들과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자신은 최후까지 싸우다 마물들에게 잡혀갔다는 말을 듣고서

곧장 B와 같이 갔던 기사의 멱살을 붙잡고 동료를 버리고 혼자 살아 돌아오는게 기사다운 거냐고 소리치며 따졌다.


하지만 B의 실종에 충격을 받은 건 다른 모두도 마찬가지였던 상황에서 그런 A의 행동은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했고

"평소에는 그렇게 차갑게 굴더니, 이제 와서 아끼는 척입니까?"라는 비아냥과

"그렇게 걱정되면 혼자서라도 구하러 갈 것이지 기껏 살아 돌아온 사람에게 무슨 행패야?"라는 비난을 받는다.


이에 열받은 A가 그자리에서 모두를 두들겨 패버리는 바람에 그녀는 징계를 받게 된다.

상부에는 A에게 근신 처분을 내리면서 "B를 구하기 위한 구출대를 조직중이니 자중하며 기다리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A의 근신 기간이 끝난 후에도 실종된 B를 찾는 구출대는 꾸려지지 않았다.

이에 초조해진 A는 상부에 몇 번이나 서둘러야 한다고 요청했지만, 돌아오는 건 "당장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대답 뿐이었다.

A는 사람이 자신이 가겠다고까지 말했으나, 평상시 그녀가 맡고 있는 일이 너무 많았기에 기각되었다.


스스로의 성실함에 발목을 잡혀버린 A는 '내가 하는 일이 많은 건 다른 기사들이 무능했기 때문'이라고 속으로 욕하며

이번에 B를 구출하면 반드시 재능있는 몇 명을 훈련시켜서 자신을 대체할 수 있을 정도로 만들겠다는 다짐과 함께

밤을 세워가며 당면한 업무를 전부 해결하거나 연기시켜버리고, 그간 쌓아놓았던 휴가를 몰아 써서 시간을 만들어낸다.




B가 실종되고 열흘이 지난 시점, 해가 지고 난 후 A는 완전 무장을 하고 혼자서 B가 실종되었다던 마을에 도착한다.

마물이 터를 잡은 것 치고는 깨끗한 모습에 의아해하던 것도 잠시, A를 발견한 마물들이 그녀에게 다가온다.


늑대나 새, 뱀 따위를 닮은 짐승형 마물들의 낮은 울음소리와 날카로운 송곳니와 커다란 발톱도 위협적이었지만

A를 긴장시킨 건 "언니들, 이것 좀 봐요. 기사님이 혼자 왔어."라면서 키득거리는 인간형 마물들의 대화였다.


등에 달린 박쥐 날개와, 끝부분이 항아리 같은 뭉툭한 꼬리, 그리고 무엇보다 아름다우면서도 소름끼치는 외모.

서큐버스가 하나도 아니고 세 명이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본 A는 어째서 먼저 왔던 지원군이 패배했는지 이해했다.


서큐버스를 상대할 때, 훈련받지 않은 인원은 오히려 서큐버스의 힘을 강하게 만들 뿐이다.

지원군에 서큐버스를 상대할만한 사람은 B를 포함한 기사 두 명뿐.

마을사람들과 병사들은 전혀 도움이 안 됐을 터였다.

도움이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의 정기가 서큐버스를 강화시키고, 서큐버스에게 매혹당해서 기사를 방해했을게 분명했다.


하지만 A에게는 그런 방해물이 없었다.

이전에 기사 둘을 상대할 때를 생각하고 A에게 덤벼들었던 서큐버스들은 그 두 기사를 합친 것보다 훨씬 강한 A에게 역으로 당했다.

데리고 있던 마물들은 거진 도륙당한 상태였고, 서큐버스들 역시 날개가 잘리거나, 팔 하나가 못 쓸 정도로 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로 쓰러져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너희가 붙잡아 간 기사는 어디있지?" A가 쓰러진 마물 하나에게 검을 들이밀고 물었다.

그러나 서큐버스들 역시 자신들의 리더격 마물이 B를 어디론가로 데려갔다는 것까지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A는 다른 것을 물어봐도 B와 관련된 건 모른다고 대답하는 서큐버스들을 더 살려둘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검을 들어올렸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A 언니."


A가 검을 내려치기 직전, 공중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그녀의 검을 멈췄다.


"... B?"


"아니지, 그렇게 오래 되진 않았나? 죄송해요. 언니를 마지막으로 봤던 게 너무 오래 전처럼 느껴져서요.

체감상으로는 한 사오십 년 정도 지난 거 같은데, 언니 목소리가 별로 안 변한 걸 보면 얼마 안 된거 같기도 하고?

우리가 마지막으로 보고 나서 얼마나 지났나요?"


B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A에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너... 그 모습..."


"앗! 맞다, 옷!"


자신이 알몸임을 깨달은 B가 자기 키만한 날개로 몸을 반쯤 가렸다.


"깜빡했다... 뭐라도 입고 나왔어야 했는데."


B가 부끄러운듯 중얼거렸지만, A가 경악했던 건 그녀가 옷을 안 입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날개는 뭐야...?"


"아, 이거요? 원래는 조금 더 작았는데, 한숨 자고 일어나니까 이만큼 커졌어요.

그래도 크기에 비해서 별로 무겁진 않아서 괜찮아요."


B가 검지 손가락으로 날개의 윗부분을 쓸어내리면서 말했다.


"그리고 보는 거랑 다르게 꽤 튼튼하고 부드러워요.

언니도 한 번 만져..."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당장."


투구를 벗어 던진 A가 떨리는 목소리로 B의 말을 끊었다.


"... 네, 별로 긴 얘기는 아니니까요."


B는 잠깐동안 A를 차가운 표정으로 보다가 다시 생글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이 마을에 마물이 침공했다는 소리를 듣고 지원군으로 온 건 알고 계시죠?

그 뒤에 다른 사람들을 보내고 혼자 남아 싸우다가 패배해서 기절했었어요.


그러다 눈을 떴더니 어떤 방이었고, 서큐버스 퀸이 제 앞에 있었어요.

뭔가 묘하게 끈적끈적한 물이 제 몸은 물론 방바닥에 흥건한 걸 보고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고 있었는데,

서큐버스 퀸이 저보고 자기 생각이 맞았다면서, 이제 자기에게 강력한 부하가 생겼으니 마물의 왕이 될 수 있을 거라고 기뻐했어요.


그러고는 저한테 자기 발에 입을 맞추라고 명령을 하던데, 제가 왜 마물의 명령을 듣겠어요?

싫다고 했더니 그 마물이 처음엔 당황했다가, 나중엔 엄청 화를 내면서 자기가 절 서큐버스로 만들었으니 자기 말을 들어야 한다고 했어요.


근데 솔직히 저는 처음부터 그 여자 별로였거든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도 모르겠어서 혼란스러운데, 앞에서 정신사납게 쫑알쫑알 시끄럽게 굴기나 하고, 뭣보다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고 매력적이라고 헛소리까지 하잖아요?"


말을 하던 B가 싱긋 웃었다.


"그래서 그냥 먹어버렸어요."


"먹었다고...?"


"네. 이걸로 앙, 하고."


B가 긴 꼬리를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었다.


"원래는 한 입에 먹어버리려 했는데, 그년이 저항해서 시간이 좀 걸렸어요.

게다가 건방진 짓을 한 주제에 죽기는 싫었는지 반쯤 먹힌 상태로 막 뭐라뭐라 소리치면서 발버둥치지 않겠어요?

그게 지이인짜 짜증나서 배를 세게 차니까 그제야 축 늘어져서 얌전해졌어요.

그렇게 얌전히 만들고 나서 남은 부분도 다 삼켰는데, 삼키고 나니까 꼬리가 너무 무거워져서 어디 움직이기가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몸도 좀 나른하겠다, 거기 있던 침대에 잠깐 누웠는데 그대로 깜빡 잠들어 버렸어요.


다시 일어나니까 이렇게 날개도, 가슴도, 키도 자라있더라고요. 아, 이 뿔도 생겨났고."


B가 그녀의 머리를 왕관처럼 둘러싸고 자라난 매끄러운 뿔 한 쌍을 양손으로 잠깐 만지작거렸다.


"아무튼, 이제 뭘 해야 할까 하다가 이 마을이 생각나서 와봤더니 언니가 있었던 거에요.

근데 언니는 왜 여기 있는 거에요? 설마 저 찾으러 왔어요?"


"... 그래."


"와! 진짜요?"


B가 정말로 기쁜듯 활짝 웃으며 손뼉까지 한 번 쳤다.


"사실 저도 언니 정말 보고 싶었어요! 우리 마지막에 제대로 인사도 못 나누고 헤어졌..."

"B. 기사로서 너에게 말하겠다."


A가 활기찬 목소리로 반가움을 표현하는 B의 말을 잘랐다.

B는 A가 또다시 자기 말을 끊자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네, 말씀 하세요."


"자결해라."


A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칼자루를 쥔 그녀의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그럼 최소한 네가 마물이 되었다는 사실은 숨겨주겠다.

너의 가족들에게는 내가 직접 너의 전사 소식을 전할테니, 유언이 있으면 지금 말해라.

가능하면 순직한 기사로서 안장될 수 있게 노력도 하겠다."


"... 제가 왜요?"


"한 번만 더 말하겠다. 자결해라.

너의 명예는 내가 모든 걸 걸고 지켜주겠다. 그러니..."

"싫어요."


B가 딱잘라 A의 요청을 거절했다.

A는 무표정하게 B를 올려다보다 숨을 길게 들이쉬고 자세를 잡았다.


"알겠다. 더이상 너에게 말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겠지.

와라, 내 손으로 널 죽여주마."


"그렇게 말하면 제가 가겠어요?

그리고, 언니가 절 죽일리 없다는 건 제가 제일..."


B는 말하다 말고 급하게 고개를 왼쪽으로 꺾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그녀의 오른쪽 뺨을 석궁 볼트가 스치고 지나갔다.


"난 네 언니도, 상관도 아니다."


A가 손목에 찬 휴대용 석궁을 재장전하며 B를 노려보았다.


"너도 B가 아니야. B의 껍질을 뒤집어 쓴 마물이지."


반쯤은 자기 자신에게 말하듯 중얼거린 A가 다시 한 번 B를 조준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너를 죽여 B의 명예를 지키겠다."


"흐응..."


비장한 각오를 다지는 A를 보며 기분이 상한 B가 불편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냈다.


"그렇게 말하면 아무리 저라도 좀 짜증 나는데요?"


퓽-!

A는 B에게 대답 대신 화살을 쏘아보냈다.


A가 기습적으로 쏜 화살도 피했던 B는 이번에도 그 화살을 가뿐하게 피하고 A를 비웃어주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의 화살은 처음부터 그녀를 맞출 생각으로 쏘아진게 아니었다.


펑!

"꺄악?!"


B의 얼굴 옆을 지나던 화살이 그자리에서 폭발하면서 큰 타격을 주었다.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던 B는 얼굴을 감싸쥔 채 땅에 추락했다.


"아으윽... 아파..."


땅에 떨어진 B가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사이, 석궁을 벗어 던진 A가 빠르게 그녀에게 접근했다.


"하아압!"


기합소리와 함께 A의 검날이 B를 향해 호를 그리며 떨어졌다.

B는 피부가 뜯겨져 나간 얼굴에서 손을 떼고 급하게 A의 검을 막았다.

검이 막힌 A는 곧바로 검을 당기며 왼발을 축으로 삼아 몸을 오른쪽으로 반회전시켜 어깨로 B를 들이받았다.


"커흑!"


몸이 공중에 살짝 뜰 정도로 강하게 받힌 B가 뒤로 밀려나자 A가 몸을 완전히 회전시키며 사선으로 검을 내려쳤다.

B는 급하게 왼팔을 들어올려 검을 막으려 했지만, 속도와 무게가 실린 날카로운 강철은 마물의 피부를 손쉽게 가르고 뼈에서 가로막혔다.


"이이익!"


궁지에 몰린 서큐버스가 오른손을 크게 휘둘렀다.

날카로운 손톱을 피해 B의 왼팔에 박힌 검을 놓고 뒤로 물러난 A는 곧바로 옆구리에 찬 다른 검을 빼들었다.

어쨌든 간신히 숨돌릴 틈을 만들어낸 B 역시 뒤로 크게 뛰어 물러났다.


"언니는 역시 너무 강하네요."


통증 때문에 얼굴을 찌푸리며 왼팔에 박힌 검을 빼낸 B가 한 손 자세를 취했다.


"제 몸이 평범한 인간 같았으면 저는 이미 죽었겠죠?"


A는 다시 B를 공격할 기회를 엿보며 대꾸했다.


"B였다면 이정도 공격은 피했겠지. 너같은 마물과는 다르게."


"사람을 면전에 두고 그렇게 부정하면 저라도 화난다니까요."


"여기에 사람은 나밖에 없다.

너는 B가 아니라 자신이 B라고 믿는 마물일 뿐이야."


"외모가 좀 변했다고 사람을 그렇게 매도해도 돼요?"


"외모 때문이 아니야."


A가 단호하게 말했다.


"B는 나같은 것과는 다르게 친절하고 자애로운 기사였다.

상대가 적이라고 해도, 심지어 마물이라고 해도 동정심을 잃지 않았지.

최소한 너처럼 다른 마물을 죽였다는 얘기를 웃으면서 하는 사람은 아니었어."


고통 때문에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애써 여유있는 척을 하던 B의 표정이 굳었다.


"너의 가증스러운 웃음과 다르게 B의 미소는 사랑스러웠다.

나를 놀이 상대로 보는 너와 달리 B는 나를 기사로서 존중해줬었어.

그리고 무엇보다 B는 너보다 훨씬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어떤 것도 B에게 미치지 못하는 마물 주제에, B의 이름을 사칭하지 마라."

"진짜 짜증나네."


A의 말이 끝나자마자 B가 중얼거렸다.


"저 예전부터 언니 정말 좋아했거든요? 근데 지금은 진짜로 짜증나. 왠지 알아요?"


B의 눈에서 나오는 붉은 안광이 A를 노려보았다.


"내가 B 맞다니까? 왜 자꾸 아니라고 해요?

고작 몸이 좀 이렇게 변했다고, 말투가 좀 변했다고 그러기에요?

사람이 살다보면 성격이 좀 변할 수도 있는 거 아냐? 그것도 죽다 살아났는데?


그리고 그렇게 내가 좋았으면 맨날 괴롭히지만 말고 좀 예뻐해주기라도 했어야지!

뭐만 하면 '기사라면 냉철해야 한다', '기사라면 강해야 한다', '기사라면 명예로워야 한다'라면서 못살게 굴기나 하고!

나야 언니 마음을 아니까 넘어가 준 거지, 다른 사람들은 맨날 뒤에서 언니 뭐라고 하는 거 알고는 있었어요?


게다가 언니가 나이는 많아도 어차피 같은 동기인데 무슨 후배 취급하듯이, '이거해라, 저거해라,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그놈의 대련도 하기 싫은 거 억지로 끌고 가서는 봐주는 거 하나 없이 사람을 잡을듯이..."


B가 불만사항을 쏟아내는데 정신이 팔려 검을 잡은 손을 조금 느슨하게 만들자마자 기회를 엿보고 있던 A가 번개처럼 튀어나갔다.


카-앙!

기겁을 하며 간신히 A의 검을 받아낸 B가 억울함과 짜증을 담아 소리쳤다.


"아, 진짜 말 좀 그만 끊어! 몇 번 째야!"


그러거나 말거나, A는 쉬지 않고 B를 몰아붙였다.

A의 관절과 허리에서 시작된 회전이 검을 타고 날카로운 일격이 되어 B에게 쏟아졌다.

몸통을 노리고 들어오는 검을 흘려내면, 그대로 앞으로 나온 다리로 칼날이 향한다.

머리를 향해 휘둘러지는 검을 막아내면, 그대로 눈을 향해 검끝이 일직선으로 들어온다.

다리를 베어내려는 검을 쳐서 튕겨내면, 그대로 몸통으로 다시끔 빠져나간 검이 돌아온다.

간신히 하나의 공격을 막아낼 때마다 연이어 다음 공격이 들어와 B를 압박했다.


B는 압박을 풀어내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다.

하지만 A는 자신이 가진 기술을 활용하여 B의 공격을 전부 무위로 돌렸다.

간격을 좁혀 검을 휘두르지 못하게 하려 하면, A의 손바닥이나 발차기를 맞고 뒤로 떠밀려졌다.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뒤로 물러나려 하면, 무게를 담은 묵직한 일격으로 중심을 흐뜨려트리려 했다.

짧고 빠른 역습으로 강제로 공격권을 가져오려고 하면, 갑옷으로 공격을 받아내면서 오히려 카운터를 먹였다.

B가 마물의 몸이 되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체력이나 근력에서 밀려서 패배했을게 분명한 싸움이었다.


위기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할 때마다 오히려 더 큰 위기가 찾아오는 상황이 반복되자

B는 그동안의 대련에서 A가 자신을 얼마나 많이 봐주고 있었는지를 알아차렸다.

동시에, A가 진심으로 자신을 죽이려 하고 있다는 것도.


"으아아!"


처음으로 맞부딪혀본 A의 진심에 순간적인 공포심을 느낀 B가 자신도 모르게 꼬리를 크게 휘둘렀다.


"큭!"


그리고 처음으로, B의 공격이 A에게 통했다.


"엇..."


예상치 못한 성과에 A보다도 B가 더 놀라서 굳어버렸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린 B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아하."


잠깐의 비틀거림이었을 뿐이었지만, A의 공격을 멈추게 만든 B는 그제야 자신이 인간의 몸이 아님을 진정으로 깨달았다.


비록 왼팔을 온전히 쓸 수는 없지만 둔기처럼 쓸 수 있는 꼬리가 있었다.

칼날을 막을 수 있는 갑옷은 없지만 기본적으로 튼튼하고 재생이 빠른 마물의 피부가 있었다.

그리고 방패나 망토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날개도 있었다.


'이길 수 있어.'


가능성을 찾은 B의 자세가 변했다.

A 역시 분위기가 바뀐 B에 맞추어 자세를 다시 가다듬었다.


"하아압!"

"흐아압!"


그리고 이번엔 둘 모두 서로를 향해 덤벼들었다.

기사와 기사의 싸움에서, 기사와 마물의 싸움으로 변하자 둘 사이에 공방이 오가기 시작했다.


기사의 검과 교차하여 마물의 꼬리가 파고든다.

날카로운 마물의 발톱을 기사의 건틀릿이 흘려낸다.

그래플링을 걸기 위해 파고들려는 기사의 발 앞으로 마물의 날개가 벽을 친다.


B는 처음으로 A의 공격을 모두 막아냈음에 희열까지 느꼈다.


"아하하하!"


B는 웃음을 터트리며 적극적으로 A를 공격했다.

칼과 꼬리로 동시에 좌우에서 공격하고, 날개를 휘둘러 A의 시야를 방해하고, 뛰어올라 A의 머리를 노리고 무릎을 올려 치고.

인간은 할 수 없는 움직임으로 공격하는 서큐버스를 상대하는 기사가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기사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날 때마다 서큐버스의 기세가 더욱 올라갔다.

더 빠르게, 더 강하게.

자신의 힘에 취한 서큐버스는 점점 더 난폭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A가 B의 꼬리에 맞아가면서까지 노렸던 진정한 목표였다.


흥분해버린 서큐버스가 자신의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강하게 날개를 내려 찍었다.

그 순간, A의 눈이 빛났고, B는 자신이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B는 자신의 몸에서부터 지나치게 멀리 떨어진 날개를 급하게 회수하려 했으나 A의 행동이 조금 더 빨랐다.


A는 자신의 앞에 서큐버스의 날개가 박하지마자 곧바로 검을 날개 피막 사이에 찔러넣었다.

이어 검을 옆으로 돌림과 동시에 왼손으로 칼날을 잡고 앞으로 구르면서 B의 왼쪽 날개를 크게 찢어버렸다.


"아아악!"


아직 반쯤 펴져있는 서큐버스의 날개를 붙잡은 A는 일어나는 힘으로 날개를 아래로 꺾으면서 검을 내려쳤다.

날카로운 칼날이 마치 아래로 한껏 꺾은 나뭇가지를 자르는 것처럼 B의 날개뼈를 잘라냈다.

살과 뼈가 잘려나가는 고통에 B는 쓰러지듯 뒤로 물러나며 날개를 퍼덕였다.


"끄으으..."


"너희 서큐버스들은 비행에 날개가 필요하진 않지."


A가 손에 잡혀 있던 날개를 집어 던지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빠르게 날기 위해서는 날개가 필요하다.

만약 네가 처음부터 날아서 도망쳤으면 나로썬 잡을 방법이 없었을 테지.

하지만 이제 한쪽 날개를 잘라냈으니, 이제 넌 여기서 도망치지 못해."


"정말로, 가차 없네요..."


"나는 절대로 여기서 널 보내지 않겠다.

나 말고 다른 이가 너의 모습을 보게 하지 않겠어.

B를 위해서라도."


"그러니까 제가 B라니까요."


서큐버스가 반박하면서 뒤로 몇 걸음 더 물러났다.


"도망치게 두지 않는다."


"도망 안 쳐요. 그래도 마지막 발악은 해봐야지."


자세를 한껏 낮춘 B가 왼발을 뒤로 빼며 남은 날개를 활짝 펴고 검을 가슴에 붙였다.

A는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고 마찬가지로 왼발을 뒤로 뺴며 검을 몸에 붙이고 자세를 낮추었다.


낮게 깔린 달빛처럼 둘 사이의 공기가 긴장을 잔뜩 머금고 무거워졌다.

명예를 위한 검과, 생존을 위한 검이 서로를 평행하게 마주보고 맞부딪칠 때를 기다렸다.

단 한 순간의 폭발을 위해 에너지를 축적하는 세포에게 산소를 보내기 위한 둘의 호흡이 점점 더 길고 짙어졌다.

아주 약간의 움직임도 없이 교차하는 두 사람의 시선에 담긴 투지가 격렬하게 날뛰었다.


그러다 A의 턱을 타고 떨어진 땀방울과, B의 잘린 날개에서 떨어진 핏방울이 동시에 땅에 닿은 순간,


쾅!

두 사람이 박차고 나간 지면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둘의 인영이 엇갈렸다.


"크윽..."


서큐버스와 자리를 바꾼 기사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오른쪽 옆구리가 길게 찢어진 그녀의 갑옷 틈으로 붉게 물들어가는 옷이 보였다.

고통과 피로에 물든 몸이 그녀에게 휴식을 요구했지만 A는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뒤를 돌아보았다.


A의 시선 끝에 널브러진 서큐버스들 옆에 같이 쓰러져 있는 B가 보였다.

남아있던 오른쪽 날개마저 잘려나간 채, 힘없이 꼬리를 다른 서큐버스의 배 위에 올려놓고 엎어져 있는 B의 몸 옆으로 붉은 피가 퍼져나갔다.


B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걸 확인한 A는 비로소 몸에 힘을 풀고 옆으로 쓰러졌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흙먼지와 함께 그녀의 얼굴에 제멋대로 들러붙었다.


마지막 순간에 B의 칼이 조금만 더 깊게 들어왔다면 A는 분명 죽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까지 각오했던 A와 달리, 살아남아야 했던 B는 몸을 밖으로 살짝 빼고 있었기에 A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못했다.

그 각오의 차이가 A의 목숨을 구했다.


"살...려..."


바닥에 엎어져 숨을 고르고 있던 A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발... 언니..."


풀벌레 한 마리 조차 울지 않을 정도로 주변이 조용한데도, 목숨을 구걸하는 여자의 목소리는 간신히 들릴 정도로 작고 희미했다.

A는 간곡한 구원의 요청을 무시하기 위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살려달라는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다가 마침내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될 때까지 필사적으로 여자의 목소리를 무시했다.


괴로울 정도로 길게 늘어진 짧은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목소리가 사라지자 A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미안하다... B..."


"당연히 미안해야죠. 얼마나 아팠는데."


또렷하게 들려오는 B의 목소리에 A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급하게 칼을 잡고 튕기듯 일어난 A의 심장이 아플 정도로 빠르게 쿵쾅거리며 온몸에 피를 퍼트렸다.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이것들 아니었으면 진짜 죽었을지도?"


B가 꼬리로 다른 서큐버스의 배를 꾸욱 누르면서 말했다.

꼬리 아래에 깔린 서큐버스는 어떻게든 그것을 치우려고 낑낑거리다 갑자기 크게 한 번 덜컥이고는 바르르 떨다가 그대로 절명했다.


"후으... 서큐버스 퀸보단 못해도 얘들도 나름 먹을만 하네요."


마치 길거리에서 파는 음식을 감평하는 것처럼 가볍게 말하는 B의 날개는 어느새 다시 돋아나 있었다.


"몸은 다 나은 거 같긴 한데... 어쩌지? 얘도 마저 먹어야 하나?"

"히익!"


다른 두 서큐버스가 정기를 빨려 죽은 모습을 보고 덜덜 떨며 무서워하던 서큐버스가 B의 말에 비명을 질렀다.


"그렇게 둘까보냐!"


검을 잡고 일어난 A가 B에게 달려들었다.

비록 A가 지치고 부상을 당하긴 했어도 여전히 그녀의 검은 날카롭고 위협적이었다.


카앙!

"갑자기 그러면 위험하잖아요."


그러나 서큐버스 두 마리의 정기를 빼앗은 B에게는 닿지 않았다.

오른손에 든 검으로 A를 막아낸 B는 왼손 손톱을 세워 휘둘렀다.

A는 급하게 몸을 뒤로 뺐지만 그녀의 갑옷에 날카롭게 찢어진 자국이 생겨났다.


까드득.


'확실하게 숨을 끊었어야 했는데.'


A는 자신이 정에 휩쓸려 기회를 놓친 것을 자책하면서 이를 갈았다.


고작 서큐버스 두 마리를 흡수했을 뿐인데, 이기기는 커녕 온전히 도망칠 수 있을지조차 불분명할 정도로 강해졌다.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상황임에도 A는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검을 들었다.


"B의 명예를 위해, 반드시 널 죽이겠다."






"으음..."


작은 신음을 흘린 A가 천천히 눈을 떴다.


"여기는..."


A는 잠이 덜 깬 것처럼 몽롱한 의식을 애써 깨우려고 노력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높은 천장에 매달린 조명에서 나오는 하얀 빛이 분홍색 벽면에 반사되어 방 안을 고급스러우면서도 음란한 느낌이 들게 만들었다.

각 벽면에 두 마리씩 조각된 새들은 나무 조각임에도 깃털이 화려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바닥에는 한 눈에 봐도 두껍고 부드러운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었고, 오른쪽 벽면에는 커다란 거울이 달려 있었다.

거울의 옆에는 검은색으로 칠해진 고급 옷장이 있었는데, A는 그 옷장을 보면서 어쩐지 꺼림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A는 꺼림찍함의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나 옷장으로 향하려 했다.


철그럭-


하지만 그녀가 몸을 전부 일으킨 순간, 그녀의 손에 묶인 사슬이 철그럭 소리를 내며 A를 잡아당겼다.

당황하며 자신의 손발을 본 A는 그제야 자신의 손목과 발목에 사슬이 매달려 있는 걸 알아차렸다.


"그렇지... B... 아니, 그 마물에게 져서..."


A는 B와 싸우다가 검을 빼앗기고 배를 맞아 기절했던 걸 떠올렸다.


'그렇다면 여기는 서큐버스의 소굴인가.'


자신이 붙잡인 신세라는 걸 파악한 A는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단 본인이 입고 왔었던 갑옷과 장비들은 주변에 보이지 않았다.

A가 입고 있는 장식이 없는 하얀 원피스도, 그녀의 것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잠옷이었다.

A는 아주 어렸을 때를 빼고는 그런 얇고 부드러운 하얀색 원피스 형식의 잠옷을 입어본 적이 없었기에 어쩐지 몸이 휑하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그녀가 누워있는 침대 역시 편안하긴 했지만 어색했다.

반투명한 자주색 커튼이 달린 침대의 기둥들에는 곡선을 따라 금과 보석이 적절히 더해져 있어 고급지다는 느낌을 한껏 끌어 올렸다.

사람이 눕는 침구는 질좋은 붉은색 천과 속으로 만들어져 있어 피부가 닿을 때마다 부드러운 느낌을 줬다.

베개 역시 침구에 지지 않을 정도로 매끄러운 검은색 벨벳으로 만들어져 있었으며, 그 위에 있는 침대 머리판에는 기하학적 무늬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A는 그 머리판에 박혀있는 쇠사슬을 당겨보았으나, 머리판이 조금 움직였을 뿐 사슬은 조금도 빠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침대 아래쪽으로 이어지는 다리 쪽의 사슬 역시 그녀가 다리를 좌우로 벌리거나 오므릴 수 있을 정도로만 움직였다.


여기사는 어떤 방법으로든 일단 사슬을 풀기 전에는 이 장소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도 사슬이 풀렸을 때 곧장 도망칠 수 있게 미리 탈출 루트를 짜두려는 생각으로 주변을 둘러본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창문이 없다.'

"언니, 일어났어요?"


B가 들어오며 문이 열리자 고요했던 방 안의 공기가 요동쳤다.


"잠은 잘 잤어요? 많이 피곤했던 거 같던데. 꽤 오래 주무시더라고요."


"..."


"배는 안 고파요? 화장실은?"


"... 여긴 어디지?"


"제 방이에요. 원래는 서큐버스 퀸이 쓰고 있었던 거 같은데, 그 마물은 이제 없으니까 제가 쓰려고요. 막내도 그러라고 했고요."


"막내?"


"제가 잡아먹은 서큐버스들 중에 마지막으로 남은 애요.

막내라고는 해도, 다른 아이들은 없으니까 그 아이가 첫째기도 하네요.

그래도 막내가 더 어감이 좋으니까 막내라고 부르고 있어요.


원래는 그 아이도 잡아먹으려고 했는데, 저를 위해 뭐든지 할 테니 죽이지 말아달라고 사정사정 하더라고요.

자기가 정기를 모아오면 그동안 저는 언니에게만 집중할 수 있다고 하던데, 꽤 마음에 들어서 수락했어요."


B가 A의 옆에 앉아 그녀의 다리를 쓰다듬었다.


"와... 언니 몸은 진짜 탄탄하네요. 멋있어."


"손 대지 마라."


"그러지 말고. 닮는 것도 아니잖아요? 아, 아니면 다리 말고 다른 곳이 더 좋아요?"


다리를 쓰다듬던 B의 손이 A의 배로 옮겨진 순간, A가 B의 목덜미를 물어 뜯으려 했다.


"엄마야!"


정말 간발의 차이로 A의 입질을 피한 B는 곧바로 꼬리로 A의 목을 휘감아 억지로 침대에 눕혔다.


"와, 깜짝이야... 진짜 놀랐네...

개도 아니고 갑자기 사람을 물려고 하면 어떻게 해요?"


"당장 풀어...!"


A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돼요. 지금 풀면 언니가 또 나한테 덤벼들 거잖아. 전 이제 아픈 거 싫어요.

아, 맞다! 언니가 자는 사이에 제가 준비한 게 있어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젓던 B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저는 아픈 게 정말 싫지만 언니는 그 정도는 아니잖아요?

게다가 맨날 '기사라면 수치를 당하는 것보다 죽는게 낫다'고 말했고.

다른 사람이면 그렇게까진 안 할 거 같은데, 언니는 진짜로 할 거 같아서, 언니한테 살짝 마법을 써놨어요."


"마법?"


"별 건 아니고, 제가 허락하기 전까진 언니가 안 죽는 마법이에요."


"... 뭐?"


B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되묻는 A를 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말 그대로, 제가 옆에 있는 한 언니는 이제 죽을 일이 없어요.

왜냐하면 언니가 상처를 입을 때마다 자동으로 제 마력을 써서 회복되는 마법을 걸어놨거든요.

아무리 그래도 목이 잘리거나 심장이 터지면 죽긴 하겠지만, 제가 곁에 있는데 누가 감히 언니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그런 마법이 존재할리가 없어!"


"그래서 새로 만들었어요."


"새로... 만들어...?"


"네. 정기를 빼앗는 느낌을 살짝 바꿨더니 되더라고요."


A는 새로운 마법을 창조해낸 걸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쉽게 말하는 B의 말에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이미 있는 마법을 변형하는 것조차 뛰어난 마법사가 못해도 수 년을 투자해야 하고,

새로운 마법을 만들어내면 그 자체로 위업을 하나 달성했다고 칭송받는게 일반적인 상식이다.

그런데 B는 자신이 마법을 만들어 냈다는 걸 너무나도 가볍게 말하고 있었다.

그것도 허세가 아니라, 순진하게 A를 보며 '저 잘했죠?'라는 표정을 지은 채로.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 A의 앞에 있는 서큐버스는 여태까지의 그 어떤 마물과도 격이 다른 존재라는 뜻이었다.


'이 마물은 너무 위험하다. 당장 토벌 요청을 해야해.'


"아무튼, 멀쩡한 거 같아서 다행이에요.

언니가 많이 아팠으면 강제로 서큐버스로 만드려고 했거든요.

근데 저는 언니가 스스로 서큐버스가 되고 싶다고 말하게 만들고 싶어요."


"나를... 웃기지 마! 마물이 되느니 차라리 죽는게 나아!"


A가 다시 날뛰기 시작했다.


"네년은 B에 이어 나까지 모욕할 셈이냐!"


"그러니까 제가...

하아..., 됐어요. 어차피 언니가 그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굳이 언니를 그대로 내버려 둔 거기도 하고."


B는 발버둥치는 A의 몸을 꼬리로 완전히 휘감았다.


"이이익...! 젠장! 이거 놓으라고...!"


팔이 몸통에 붙어버려서 움직일 수 없게 된 A는 다리를 마구 휘저었지만 사슬 소리가 요란해질 뿐이었다.


"자, 언니. 조금만 조용히."


"읍?!"


서큐버스의 꼬리 끝이 A의 입과 코를 덮었다.

A는 꼬리를 떼어내기 위해 고개를 마구 좌우로 흔들었다.


"읍! 으읍!"

"언니, 진정하고 숨 한 번 크게 들이쉬세요."


그 말을 들은 A는 숨을 참고 끝까지 버티려 했지만, 3분이 넘어가자 결국 입을 벌렸다.

A가 입을 벌리자마자 달콤하면서 끈적한 냄새가 그녀의 입천장과 혀와 목 깊은 곳에까지 들러붙었다.

그러나 서큐버스의 꼬리에 산소는 없었기에 A는 더더욱 숨이 막혀버렸다.


"끄읍! 끄으으읍!!!"

"아직 안 돼요. 그러니까 진작에 말 좀 듣지."


질식하는 고통이 너무나도 괴로웠던 A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지만 B는 태연한 얼굴로 새빨게진 A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그러는 사이에도 서큐버스의 페로몬은 A의 몸 속 깊숙이, 폐와 위에까지 차곡차곡 쌓여만 갔다.


"이정도면 됐으려나."

"푸하악!"


A가 숨이 막혀 움직임이 점차 줄어들 때가 되어서야 B는 그녀가 숨을 쉴 수 있게 해주었다.


"카학! 커허헉!"


A는 연신 기침을 쏟아내면서도 어떻게든 공기를 들이마시려고 애썼다.

무리하게 입을 벌리면서 앞으로 나오게 된 목의 점막이 공기와 직접 닿아 따끔거렸고, 급하게 산소를 온 몸에 흩뿌리는 심장이 아프게 쿵쾅거렸다.


"어휴, 예쁜 얼굴 다 망가지네..."


B는 그런 A의 얼굴 주변을 닦아주며 안타까운 듯 혼잣말을 했다.

한동안 정신없이 산소를 탐하던 A는 어느정도 호흡이 돌아오자 B를 노려보았다.


"너,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미안해요, 언니. 많이 괴로웠죠."


"그거 말고, 지금, 뭘 한 거냐고!"


A가 뜨거운 숨을 내쉬면서 물었다.

답답함을 주체하지 못한 A는 무의식중에 몸이 조금씩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 답답함은, 그녀의 몸을 감싼 꼬리에서 오는게 아니라, A의 몸 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고 있었다.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그저 달에 한 번 방해가 될 뿐인 자궁에서부터 시작된 답답함이 A의 몸을 꾸욱꾸욱 밀어올렸다.

뜨겁고 간지러운 감각에 밀려나온 유두가 얇은 옷 위로 자신의 위치를 드러냈고, 아래에서 밀려나온 끈적한 물이 옷과 침대를 천천히 적셨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각이 커질때마다, A가 내뱉는 한숨도 점점 더 뜨거워졌다.


"어라? 언니, 진짜 몰라서 물어보는 거에요?"


"내가 포로가 되어본 적이 있을리 없잖아!"


"아무리 그래도... 성지식은 있을 거 아니에요? 자위 정도는 해봤을 거고.

저도 남자 경험은 없지만, 야릇한 기분을 스스로 해결한 적은 있어요."


"그거랑 이게 무슨..."


B의 말을 듣고 뒤늦게 자신의 몸이 왜 이런지 알아차린 A가 수치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 언니, 설마 한 번도 해본 적 없어요?"


"... 닥쳐라."


"진짜? 진짜로? 막 야한 기분이 들고 그랬던 적도 없어요?"


"나는 기사다!"


A가 큰 소리로 외쳤다.


"내 자신의 정욕을 탐할 이유가 없어! 너같이 태생부터 음란한 년과는 다르단 말이다!"


A는 부끄러움과 성적 흥분에 씩씩거리면서 살짝 눈물이 고인 눈으로 B를 노려보았다.


"..."


수치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역으로 화를 내는 A를 보던 B가 입을 열었다.


"... 깬다..."


"뭣..."


"아니, 좀... 언니가 기사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 일줄은 몰랐어요...

평소에 언니를 존경하긴 했는데, 지금은... 상당히 별로네요. 오히려 무서워요."


"마물한테 평가받기 위한 기사도가 아니야!"


A의 얼굴이 한층 더 새빨게졌다.

B는 잠시 시선을 돌렸다가 갑자기 미소지었다.


"오히려 잘 됐네요."


욕망으로 가득찬 미소를 지은 B의 얼굴이 A의 얼굴로 점점 가까워졌다.


"기사일 땐 맨날 배우기만 했으니까, 이젠 제가 언니한테 가르쳐주는 것도 좋을 거 같아요."


"뭘 하려는... 하으읏!"


B에게서 얼굴을 조금이나마 멀리 빼려고 하던 A가 신음을 터트렸다.


"살짝 쓰다듬었을 뿐인데."


천 위로 A의 젖은 부위를 쓰다듬은 B가 키득거렸다.


"이게 뭐야..."


A는 자신이 새된 소리를 낸 것과, 척추를 타고 찌릿하게 올라왔던 감각에 놀라 얼빠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런 A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간 B가 촉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 언니."


입술과 혀가 움직이는 끈적한 소리에 소름이 돋은 A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제부터, 제가 언니에게 쾌락을 알려드릴게요.

언니가 그 쾌락을 받아들이고, 저에게 부탁하면, 그때 제가 언니를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줄게요."


"더 높은 곳...?"


A가 살짝 잠긴 목소리로 되물었다.


"저와 같은 서큐버스로 만들어 드릴게요."


"...!"


B의 유혹에 정신이 확 들은 A가 다시 한 번 B를 물어뜯으려 했지만, 이미 B는 A의 곁에서 떠나간 뒤였다.


"나는 결코 너한테 굴복하지 않아!"


A가 분노와 각오를 담아 B에게 소리쳤다.

그런 A의 태도에 만족한 B가 손을 A의 다리 사이로 옮기며 말했다.


"그 난폭한 저항도, 언제까지 계속 할지 기대되네요."






"하악, 하악, 하악..."

"언니, 아직 깨어 있는 거 맞죠?"


서큐버스가 손에 묻은 액체를 털어내며 말했다.


B가 A를 희롱하기 시작한지 벌써 6시간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쾌락을 강요받는 A의 몸 주변은 그녀의 애액과, 침과, 눈물과, 오줌 따위로 흠뻑 젖어있었다.

B가 A에게 걸은 마법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탈진사 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정말 독하네요. 어떻게 쉬자는 말 한 번을 안 할까?"


B는 혀를 내두르며 바닥에 있는 카펫에 발을 쓱 문질렀다.


"에이, 여기도 젖어있네..."


"B, B..."


쾌락으로 가득찬 고문을 받는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A가 갈라진 목소리로 B를 불렀다.


"네? 저 부르셨어요?"


B는 자신을 부르는 주인의 목소리를 들은 강아지처럼 고개를 홱 들고 A의 곁으로 다가갔다.


"왜요? 뭐 말하실 거 있어요?"


"부탁, 하나만..."


A가 천천히 고개를 B를 향해 돌리면서, 그녀의 얼굴에 붙어있던 푹 젖은 머리카락이 후두둑 침대로 떨어졌다.

지칠대로 지친 A의 얼굴을 보면서도 그녀가 자신에게 무언가 부탁을 한다는 사실에 신이 난 B가 웃으면서 A의 손을 잡았다.


"뭐 원하는 거 있으세요? 물? 밥? 아니면 화장실? 조금 쉬었다 할까요?"


"아니..., 아니야..."


"그럼?"


"자결... 해다오..."


기대감에 가득 차 있던 B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B, 제발... 언니로서, 마지막 부탁이다...

혼자 죽는게, 두려우면... 나도 같이... 죽어줄 테니..."


A가 B에게 잡힌 손에 애써 힘을 주었지만, 살짝 손가락이 B에게 걸리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 손을 바라보던 B는 반대쪽 손으로 A의 손을 덮었다.


"... 제가 죽으면, 언니도 따라 죽을 거에요?"


A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인가 보네요."


B가 A의 손을 떼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요, 절대 안 죽을 거에요. 특히 언니가 나랑 같이 죽는다고 하면 더더욱."


"B..."


"잠시 쉬었다 해요. 나도 배고프니까. 뭐라도 만들어 올게요.

그동안 좀 쉬고 있으세요."


"B, 가지 마... B..."


A가 간절하게 B의 이름을 불렀지만, B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가버렸다.


"제발... B... 미안하다..."


창문 하나 없는 방에서, 심적으로도 육체적으로 지칠대로 지친 체 혼자 남겨진 A는 잠에 드는 그 순간까지도 B에게 용서를 구했다.














이러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A가 쾌락 타락 한 다음, B의 힘으로 서큐버스가 돼서, 서큐버스 퀸인 B를 모시는 거지.


그렇게 마물이 된 A가 B를 위해 기사도를 한껏 발휘한 결과, B가 새로운 마왕이 되는 거고.


이전의 마왕들과는 다르게 서로 보비느라 정신없어서 인간들에게는 별로 위협이 안 되지만


용사가 멋모르고 "마왕! 너를 처단하러 왔다!"하면 A에게 한 합에 썰리고 "보비는데 야랄 ㄴ" 취급 받는 거임.




아무튼 이런 식으로 자기가 아끼던 사람을 구하기 위해 사지로 뛰어들었지만


막상 그 아끼던 사람이 변해서 여기사를 능욕하는 전개.


처음에는 여기사가 상대를 부정하며 거절하지만,


계속된 고문과 설득에 어느 순간 넘어가서


마지막에 가서는 처음 가지고 있던 결의와 애정이 뒤틀린 방향으로 전개되는 거 너무 맛있거든요


그러니까 좀 가서 "써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