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의 소설, 날개.


솔직한 말으로 이 소설에 대해선 그다지 이해한 부분이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워낙 이상이라는 작가가 규격 외의 행보를 보여주던 인물이기도 한데다 기본적으로 이 소설은 되다 만 소설의 형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식의 흐름이라는 말은 줄곧 농담처럼 '아무 생각을 하지 않고 떠오르는 대로 말한다.' 같은 느낌으로 사용되곤 하는데 정확히 이상의 날개가 이런 면모를 가지고 있다.


나도 이러한 방식에 대해선 조금 공감이 가는 편이다.


딱히 쓸 글은 없지만 그래도 글을 엄청나게 쓰고 싶은 날이 있는데 그런 날에 이런 방식으로 글을 쓰기 때문이다.


그러다가보면 기적같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는···않고. 그냥 헛소리가 난잡하게 쓰이게 된다.


뭐, 그래도 결과적으로 재미있는 글이 쓰이긴 한다.


잡설이 길어졌지만 아무튼.


이 날개라는 소설을 다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내가 이상의 날개라는 소설을 독후감으로 소개하려는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 책을 '이해해보고 싶어서'이다.


날개, 이상의 날개. 이상의 날개라는 소설은 굉장히 유명하다.


수능 문제로도 출제하고 대문호의 글이라고 찬양받기도 하며 일각에선 게임의 모티브로도 사용될 정도로 유명하다.


특히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와 "날개야, 다시 돋아라. 한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는 너무 유명해서 가져다가 글 좀 읽는다는 사람에게 보여주면,


"아, 날개?" 하고 한번에 알 정도로 유명한 구절이다.


나는 사실 이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가 읽어본 날개에서는 이 문장에서 특별한 뜻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령 '인간 실격'에 나오는 [인간, 실격]이라는 문장이나 '데미안'에 나오는 [알은 하나의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한다.] 하는 문장은 그 문장과 약간의 서사를 아는 것 만으로도 뜻을 이해할 수 있다.


인간 실격의 "인간, 실격"은 사회로부터 점점 멀어지던 주인공이 인간을 결국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을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일종의 '인간 이외의 취급'을 받는 정신병동에 갇히게 되면서 내뱉는 말으로 주인공이 완전히 인간에서 인간이 아닌 존재로 '실격' 되었다는 뜻을 품고 있다.


동시에 인간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뇌를 하게 해주기에 아름다운 문장이라고 볼 수도 있다.


또 다른 예로는 데미안의 "알은 하나의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한다." 라는 문장은 말 그대로의 뜻을 품고 있다. 인간은 태어나고 자라면서 수 많은 것들을 '정한다.' 싫어하고 싶은 것, 좋아하고 싶은 것, 그냥 저냥 괜찮은것.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정하고 살아간다.


예를 들어 나는 오이를 싫어한다.


아삭아삭한 식감과 더불어 맛이 없기 때문이다.


허나 정말 내게 오이가 '싫어할 수 밖에 없느냐' 하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노력한다면 오이도 좋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싫어할 것은 정했다.' 라는 증거다.


이건 꼭 식품에 기호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이 부딫치며 만들어지는 관계에서도 똑같은 이야기다.


통렬한 지적을 하나 하겠다.


다들 살면서 한번쯤은 어떤 사람과 싸운 후에 화는 이미 풀렸지만 먼저 사과하기 꺼려져 삐친척하며(많은 사람이 '삐졌다' 할 때는 삐졌다가 올바른 표현인줄 알지만 사실 '삐쳤다'가 옳은 표기이다. 비슷한 예로는 '너가'가 있다. 이건 근본 없는 말으로 니가와 네가가 옳다.) 계속 서로 데면데면한 사이를 유지한 적이 많을 것이다.


이게 바로 미워하기로 '정한' 것이다.


음식도 꾸준히 싫어하는데 하물며 인간의 사이는 어떨까.


그런 상황에서는 누군가 자신이 정해둔 '미움'을 깨어내고 먼저 다가가서 사과하는 수 밖에 없다.


혹은 망각의 축복이 서로 어색한 사이를 가려줄 때까지 기다리거나 말이다.


이처럼 데미안의 "알은 하나의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한다"에는 인간 관계와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가 깃들어있다.


사실 대부분의 세계 명작이라고 하는 책들엔 다 이렇게 책의 본질이자 말하고자 한 바를 한문장으로 정리해낸 경의로운 문장이 있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렇기에 시대를 빗나가고 이미 케케묵은 재미 없는 책들이 '명작'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명작들은 재미없다.


이미 구시대의 유물인데다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경우도 꽤 있어서 현대에 사는 우리로써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포인트가 크게 없다.


허나 그럼에도 명작을 읽는 이유는 이런 통렬한 문장이 마음에 와닿을 때 '나'에 대해 조금 더 알게 해주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여전히 이상의 '날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두가지 유명한 문장이 있음에도 나는 여전히 저 두 문장에서 마음에 와닿는 의미를 찾아내지 못했다.


여기 아래부터는 내 나름대로의 추측과 다른 사람들의 추측이 가미된 이 글이 담고 있는 의미와 줄거리다.


*


우선, 이상의 날개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러하다.


주인공은 일본 매춘부(다루기 민감한 주제이기는 하다)의 기둥서방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이 아내를 제외한 그 누구와도 친하게 지내지 않으며 본인의 독백으로 세상과 서먹서먹한 사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 아내를 제외한 그 누구와도 친하게 지내지 않는 까닭은 아내가 이 근방의 그 누구보다 아름답다는 것을 알고 있고 아내의 낯을 보아 자신이 남들과 대화하는걸 기꺼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렇게나 자신은 아내를 아끼는 사람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그런 한떨기 꽃에 벌레처럼 붙어있는 자신이 역겹다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딱히 행복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안온한 현 생활상에 그대로 앉아 빈둥빈둥 행복도 불행도 없이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는 '박제' 되었다.


행복을 찾기에는 아내에게 빌붙었다는 죄책감이 자신을 좀먹고 불행을 찾기에는 불행이 가진 고통이 두려웠기에 그렇기에 그는 세상을 등지고 자신마저 속이며 성장하지 않는 채, 알 속에서 그 자신은 자신이 태어나지 않도록 선택했다.


그렇게 그는 박제되었다.


그는 언젠가 꿈 속에서 자신이 논문을 연구하고 글을 쓰며 시집을 쓰는 꿈을 꾸기도 한다.


허나 그것들은 전부 꿈이다.


그는 잠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을 갉아먹는 빈대들이 물어뜯은 자리를 피딱지가 앉도록 긁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고 나면 기이한 만족감이 들기 때문이다.


그의 시간 대부분은 전부 자유(자유라는 이름의 속박)이었기에 대부분 하릴없는 장난질을 치거나 혹은 제 자신을 고뇌하는 것이 전부다.


이러는 순간순간마다 그는 논문, 글, 시집에 대한 생각을 하지만 결코 쓰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아내와 무조건 논의해야하고 아내가 그럴 때마다 자신을 혼내기 때문이다.


내 생각으로는 여기서 그는 '될 수만 있다면 이 무의미한 인간의 탈을 벗어 버리고도 싶었다.' 라고 독백하는데 이미 박제되어버린 제 삶에 문제를 느끼면서도 벗어나고 싶지 않아하는 심리가 적용되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자신이 처한 환경에 어느정도 적응하고 나면 그것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우울하거나 의지가 꺾인 사람들이 활동적이지 못한 이유중 하나가 여기서 기인한다.


그들이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는 다양한데 대부분 '우울감에 익숙함'과 '내 노력의 가치가 더 이상 깎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그들은 '내가 노력하면 할 수 있을거야. 그럼!' 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상황에 계속 놓여 있고 싶기 때문에 역으로 노력하지 않는다.


왜?


노력으로 결과를 보려면 엄청난 노력을 보여야하고 결과는 대부분 그 수많은 노력이 모여 성공이라는 게이지가 99%까지 차올랐을 때 폭발적으로 생겨나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엄청난 노력을 보여도 98%까지는 어떤 결과도 보이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기에 그들은 노력하지 않는다.


노력하지 않으면 불행중에 행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불행에 익숙하고 더 불행해지고 싶지 않은 사람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노력하지 않는다.


불행에서 벗어나려하지 않는다.


때때로 자신을 더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자신을 덮치지만 그것에 대해 무기력한 화를 낼 뿐 원인을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노력하면 할 수 있다.'라는 참이 거짓이 되게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날개의 주인공이 이런 상황에 놓여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주인공은 아내의 직업을 알지 못한다.


혹은 알고 있더라도 인정하고 싶지 않아한다.


아내는 윗방, 자신은 아랫방. 이것은 금기이며 서로 넘어선 안될 선이었다.


그는 언제나 윗방에서 들려오는 교양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내의 돈에 출처에 대해 생각했다.


아내는 언제나 돈을 얻어오는데 생각해보면 그자들의 돈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돈을 왜 그들이 아내에게 주는가? 또 아내는 그들에게 왜 돈을 받아야하는가? 적선의 의미일까?


그는 이리 생각하다가 결국 아내가 가져다주는 돈을 변소에 버리고 말았다.


꽤나 많은 은화가 든 벙어리를 그대로 버렸다.


왜냐하면 그에게 돈이란 의미가 없는 것이었으니까.


그는 아내를 사랑했지만 박제당한 인간일 뿐이었다.


그가 하는 일이라곤 현 상황에 불만을 품으면서도 침묵하고 아내의 말을 잘 들으며 매일 아내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외출한 아내가 오기 전에 다시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일 뿐이었다.


돈을 쓸 구석은 단 한 곳도 없었다.


허나 그가 꾸준히 돈을 가져다 버렸음에도 아내는 아무말 하지 않고 그에게 돈을 주었다.


그렇게 나날이 지나고 그는 아내가 없는 틈을 타 외출을 했다.


그리고 곧 후회했다.


은화를 지폐로 바꾸기는 했으나 그는 돈을 쓸 줄 몰랐고 하릴 없이 시간이 지나 밤이 되고 나서야 집에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 말은 곳 절대로 어겨선 안되는 자신은 아랫방, 아내는 윗방이라는 규칙을 어겨야한다는 뜻과 같았다.


자신의 아랫방으로 가려면 아내의 윗방을 지나쳐야했기 때문이다.


내객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연 아내의 방 안에는 웬 남자와 아내가 같이 있었다.


그는 그때 아내의 눈빛이 어떠했는지 보았으나 애써 무시하고 그 방을 지나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방에 가려면 꼭 지나쳐가야 했기에.


그리고 그 사건 이후 둘은 무어라 속삭이더니 집 밖으로 나섰다.


그의 인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후회했고 그렇게 잠에 들었다.


이튿날 그의 방에 아내가 화가 난 표정으로 들어왔지만 그는 애써 모른척했다.


그리고 눈을 꼭 감고 화를 내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내가 그냥 방을 떠났다.


어떤 충동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그저 후회가 되어서 은화를 돈으로 바꾼 지폐 5원을 아내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리곤 까무룩 잠에 들었는데 깨어보니 아내의 방이었다.


이것이 그가 아내와 결혼하고 처음으로 아내의 방에서 잠든 날이었다.(상당히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날 이후부터 그는 자신이 은화를 변소에 버린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아내의 손에 돈만 쥐여주면 아내의 방에서 자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이 또한 의미심장하기 그지 없는 문장이다. 허나 다루기에는 민감하므로 그냥 넘어가자.)


아무튼 그렇게 날이 지나고 그의 돈에 대한 갈망은 점점 더 심해져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울 정도가 되었다.


왜 하늘에서 지페 다발이 내리지 않느냐며 말이다.


그리고 그 순간 아내가 들어와 따듯하게 미소지으며 돈을 주며 말하길 '오늘은 어제보다 더 늦게 들어와도 된다는 것'이었다.(당연하지만 오지 말라는 뜻이다.)


이리하여 그는 바깥으로 나섰으나 불행하게도 장대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집으로 돌아섰다.


이런 사나운 날에는 내객이 없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허나 내객은 있었고 그는 급한 마음에 노크도 하지 않고 문을 열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아내가 퍽 좋아하지 않을 광경도 보았다.


이날 이후로 그는 감기가 들어 끙끙 앓았다.


아내는 그에게 감기약이라고 하얀 정제약을 매일 주었다.


그는 그것을 받아삼키고 매번 잠만 잤다.


그러다가 바깥에 나가고 싶어 아내에게 말했더니 아내는 매번 나가 자신을 고생만 시키고 이번엔 감기까지 들어왔으니 나가지 말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나 약 한달이 지났다.


그는 내내 잠만 잤고 이게 몸이 튼튼해진 증거라고 믿었다.


허나 어느날 아내의 방으로 가보니 어라? 자신이 먹은건 감기약이 아니라 아달린이라는 최면제, 그러니까 수면제였다.


그는 믿고 싶지 않았으나 오늘 아침에도 감기약이라고 준 약 4개를 먹은 기억이 있었고 기이하게도 아달린의 개수도 딱 네개가 줄어있었다.


순간 참을 수 없는 충동이 들어 그는 뒷산으로 달렸다.


그리곤 밴치에 앉아 감기약과 수면제가 어디가 비슷한지 고민해보았으나 결국 심술 궃은 마음이 들어 수면제 6알을 그대로 씹어삼켰고.


그 자리에서 내리 일주일을 자고 나서야 깨어났다.


이제 그는 아내가 자신에게 한달동안 수면제를 먹인게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또 달리 생각해보면 그냥 아내가 유난히 잠이 안오는 날에 이걸 먹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것에 대해 전부 실토하고 사과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렇게 급히 내려가서 아내의 집 방문을 열었건만 그만 아내가 가장 보여주기 싫어하는 장면을 보고야 말았다.


빨리 문을 닫았으나 아내가 벌컥 열고 나와 그를 막 깨물며 말하기를 일주일동안 어디 있었냐 노름이냐 여자 만나고 다니냐 말하기에 그는 억울했다.


허나 자신을 한달동안 수면제를 먹인 이유가 무엇이냐 꼬치꼬치 따지고 들기에는 마음이 무뎌서 그냥 손에 잡히는 동전 몇개를 나무 마루에 두고 도망쳐버렸다.


그리고 그는 바깥을 정처없이 떠돌았다.


정신을 차리니 그는 어느 백화점의 옥상에 있었다.


거기서 멍하니 고민을 하다보니 역시 서로가 서로에게 오해를 하고 있었다고 확신했다.


아내가 설마 자신에게 수면제를 먹였을까, 또 자신이 밤새 계집질을 하였냐고 하면 절대 아니었다.


그는 당장 이것을 풀기 위해 아내에게 달려가려 했으나 별안간 자신의 겨드랑이 아래쪽이 간지러웠다.


이때 뚜우 하고 정오 사이렌이 울렸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았고 온갖 유리와 강철, 대리석과 지폐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이 떠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극한의 정오였다.


그가 겨드랑이 어림을 쓰다듬었다.


그러곤 깨닫길 '아하.'


이것은 그가 가졌던 인공 날개의 흔적이었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리 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이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그는 아내의 집으로 가던 걸음을 멈추고 이렇게 외쳐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


자 여기까지 왔다면 이제 조금 이해가 될 것이다.


이 작품에서 아내가 의미하는 것은 일찍이 이 글의 줄거리를 읊기 전에 설명했던 '익숙한 우울함'이고 주인공이 잃어버린 인공의 날개는 '재시도, 희망, 알을 깨는 것'을 의미한다.


주인공은 아내에게 돌아가려던 순간 별안간 찾아온 정오(글에서 정오는 정오가 오기 전까지 반드시 아내의 집 자신의 아랫방에 있어야 하던 시간임을 되새겨보면 우연이 아니다.)에 익숙한 우울감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내가 생각하기에 '박제가 된 천재를 아시오?'는 익숙한 무력감에 대해 아느냐고 묻는 문장이며 '날자.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아보자꾸나.'는 그 무력감에서 벗어나는 주인공을 찬미하는 문장이다.


어떻게 보면 날자.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아보자꾸나는 애초부터 글에 담긴 심상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기에 잘 모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잘 정리되지 않은 심상이었는데 이 글에 대한 감상문을 쓰며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날개가 가진 뜻에 대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