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 이 이야기는 야사가 상당히 많이 섞여있습니다.

 실제 역사라기보다는 이랬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감각으로 읽어주세요.



 리슐리외 시대의 역사물을 보다보면 이상하게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슈브뢰즈 공작부인'이라고 하는 여자다. 프랑스 역사물에서 슈브뢰즈 공작부인이 등장했다고 하면 100% 악덕영애로 등장한다. 마리 드 메디시스는 그래도 프랑스에 필요한 인물이었다고 재평가라도 되지만 슈브뢰즈 공작부인은 순도 100% 악역영애다.


 슈브뢰즈 공작부인.

 마리 드 로앙 공작영애.


 프랑스의 왕비 안 도트리슈보다 1살이 많고,

 프랑스의 국왕 루이 13세보다 1살 어린 공작영애.


 이 소녀가 프랑스 왕실의 역사에 등장하는 건 16살 무렵이다.

 어린 루이 13세를 보좌하고 있던 륀 백작(40세)이 결혼을 하며 아내를 궁정으로 데려온다. 그 16살 난 소녀가 바로 마리 드 로앙이다.



 일단 로앙 가문은 프랑스 전통의 공작가문이기 때문에 사실상 왕족에 맞먹는 혈통이다. 

 게다가 파리 인근 지역인 중앙 프랑스 지역의 유력가문. 왕가로써는 친하게 지내야 할 인물이다.


 마리 드 로앙과 륀 백작의 결혼은 정략결혼으로 추정된다.
 나이차도 나이차지만, 둘의 결혼 타이밍이 예사롭지 않다.


 무려 륀 백작이 콘치니 재상을 제거하고 루이 13세가 왕으로 즉위한지 2달 뒤, 륀 백작과 마리 드 로앙은 결혼한 것이다. 륀 백작은 루이의 오른팔로써 자신의 권위를 받쳐줄 기반이 필요했을 것이다. 한편 로앙 공작가는 루이 13세의 정신적 지주인 륀 백작과 가까워짐으로써, 왕실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을 것이다.


 마리 드 로앙은 그렇게 루이가 왕으로 즉위한 뒤 프랑스 궁정에 등장한다.

 루이는 마리가 싫지 않았던 듯하다.


 루이의 아내는 스페인 공주라 사고방식이 너무 달라 대화가 힘들다. 그런 루이에게 있어 마리 로앙은 상당히 좋은 여사친이었다. 로앙은 루이와 마찬가지로 중앙프랑스의 귀족이고, 귀족정치에 대한 이해도 매우 뛰어나 루이의 고민 상담을 자주 들어줬으니까. 이 시기의 루이는 어쩌면 아내보다도 로앙에게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편 로앙은 왕비인 안 도트리슈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먼 타지에 온 여자의 마음은 섬세하니까~"라며 자신이 직접 안 도트리슈의 시녀가 되길 자청한다. 로앙 공작가의 영애니 왕비의 시녀가 되기 걸맞은 신분이기도 하고. 안 도트리슈는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로앙에게 무척 감동하며 로앙을 졸졸 따라다니게 된다.


 마리 드 로앙 공작영애.


 취미는  국왕폐하가 창작한 아름다운 연극대본을 읽고 함께 즐기는 것.

 왕비전하와 함께 정원을 산책하며 아름다운 꽃을 감상하는 것,


 순수하고 아름다운 프랑스 공작영애의 귀감이 되는 소녀.


 


 ...일리가 없었다.


 로앙의 진짜 취미는 궁정에서 정치질을 하다가 말아먹은 패배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깔깔대며 웃는 것. 정치질과 뒷담없이 이 세상을 무슨 재미로 살아간단 말인가.


 로앙의 목적은 프랑스 왕실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국왕 루이는 어차피 로앙에게 푹 빠져있다. 

 안 도트리슈? 어차피 상식부족에 친구도 없는 스페인 공주다. 다른 친구를 못사귀도록 계속해서 감시하면 프랑스의 상식을 배우지 못해 점점 루이의 눈 밖에 날 것이다.  루이와 안 도트리슈의 관계는 점점 멀어질거고 둘이서 만나는 것도 꺼리게 되겠지.


 그러면 둘을 중재할 수 있는 건 로앙 뿐이다.

 양쪽 모두와 친한 존재는 로앙 한사람 뿐이니까.


 로앙은 국왕과 왕비 사이에 절대로 없어서는 안되는 왕실의 최중요인물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봐도 16살 소녀의 발상이 아니다.

 로앙 얘는 아무리 봐도 2회차 뛰고 있음.


 그렇게 로앙은 철저하게 왕비를 감시했고, 왕비는 뭘 하던 로앙의 허락을 받아야 할 정도로 정서적으로 종속되게 된다.



짤방은 관계없습니다.



 하지만 몇년이 지나... 로앙이 실각하게 되는 대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루이 13세의 아이를 임신했던 안 도트리슈 왕비.

 하지만 왕비가 유산을 하고 만 것이었다. 


 왕비의 유산 소식에 로앙은 정신이 아득해지고 만다.


 

 

 왕비의 모든 생활을 관리했던 시녀가 누구였던가.

 로앙이다. 당연히 왕비의 유산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사태가 오고 만 것이다. 



이때다 싶어 로앙을 싫어했던 모든 사람들이 안 도트리슈 왕비에게 로앙 때문에 유산한거 아니냐고 밀어붙이기 시작한다. 로앙이 왕비의 생활에 지나치게 간섭한 바람에 스트레스로 유산한게 아니냐고.


 뭐 유산에 별 이유가 있겠는가.

 하지만 왕자를 유산한거다.

 차기 왕이 될 생명이 떨어져나간 것이다.

 이건 왕비의 권위에도 문제가 생기는 사태다.


 그래서 안 도트리슈는 로앙을 손절한다.


왕비 "저년때문에 스트레스로 내가 유산했어요!"

루이 "로앙 씨발년아! 넌 추방이다! 다시는 궁정 안에 들어오지마라!"


 


 아니 내가 애가 떨어질 줄 어떻게 알았겠냐고요.

어쨌든 국왕과 왕비의 마음을 사로잡아 왕실의 실세였던 로앙 공작영애는 순식간에 왕실권력의 바깥으로 내동댕이쳐지고 만다.

 로앙이 사라진뒤 왕비와 국왕의 관계는 다소 가까워진다.

 그런걸 보면 로앙이 왕비와 국왕 사이에서 이간질하고 있었던건 확실해보인다.


 그렇게 잠시 왕실은 평화로워진줄 알았는데...

 어마어마한 대 스캔들이 왕실에 터진다.


 그건 바로 안 도트리슈 왕비의 불륜 스캔들.

 


 안 도트리슈 왕비가 프랑스 국왕과 이혼하고, 영국의 대장군과 결혼하기로 결심했다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단순한 불륜을 넘어서 대단히 심각한 국제 문제다.


 안 도트리슈는 합스부르크의 공주다. 그런데 합스부르크 공주가 프랑스 국왕을 손절치고 영국의 장군과 결합한다는게 대체 뭘 의미하는가?


 


 포위섬멸진을 의미한다. 영국과 합스부르크가 손잡고 프랑스를 포위한뒤 멸망시키겠다는 암시다.


 이 스캔들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네년의 불륜의혹에 대해 해명하세요! 미친새끼야!"


 추방당했던 마리 드 메디시스 전 섭정이 파리로 컴백했을 정도였다.

 물론 마리 드 메디시스가 그냥 온건 아니고 메디치 가문의 총력을 다해서 스캔들에 관해 조사해봤다. 그런데 정말로 영국의 대장군이 프랑스에 몰래 밀입국하여 안 도트리슈와 접촉한 적이 있다는 증거가 발견된 것이다. 마리 드 메디시스의 정보망을 얕보면 안된다. 이 여자 메디치 가문이다.


 


"본색을 드러내셨군요, 합스부르크의 암캐년아!"


 물론 아르망 리슐리외 재상도 강도높게 왕비를 추궁한다.


 결국은 마리 드 메디시스 전 섭정, 리슐리외 재상, 루이 13세, 프랑스 정점의 3대 권력자가 모두 모여서 한 테이블에 앉아 왕비를 미친듯이 추궁하는 불륜 청문회가 열리고만다.


 안 도트리슈는 흐끅흐끅 울면서 자백한다.


 "그 영국 신사를 만난적은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로앙이... 로앙이..."


 여기서 로앙의 이름이!?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로앙공작영애가 왕비에게 한통의 편지를 보낸다.


 "그동안 미안했어, 안...

 내가 너에게 얼마나 심하게 대했는지 반성하고 있어.

 하지만 나에게 마지막 기회를 줄 수는 없을까?

 나는 너와 친구였던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어..."


 이 편지를 받은 안 도트리슈 왕비는 갈등한다.

 그리고 편지에 써진 재회의 장소로 간다.


 다시 한번 로앙과 우정을 시작하기 위해서.


 


"오랜만이네요, 로앙. 그리웠어요."

"나도 그리웠어, 안. 참, 너 아직도 친구가 별로 없지?

 오늘은 너에게 소개시켜줄 친구가 있는데 말야..."

 "네?"

 "널 만나기 위해 바다에서 건너오신 분이야."


 

"안녕하세요 영국의 장군입니다.

 듣던대로 매우 아름다우시군요."


 


 이 순간 왕비는 깨달았다.

 ㅈ됐다.


 왕비는 필사적으로 영국장군에게 도게자했다고 한다. 대체 왜 바다를 건너 프랑스까지 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일은 없던걸로 하고 돌아가달라고. 영국 장군은 당황했지만 신사였기에 본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언젠가 왕비가 자신의 마음을 받아줄거라는 기대를 품은 채.


 


 그렇다. 

로앙은 왕비와의 우정을 회복하기 위해 불러낸게 아니었다.

 왕비를 ㅈ되게 하려고 부른 것이었다. 감히 네가 유산 한번 한 정도로 나를 추방해? 이런 느낌으로.


 로앙은 이 복수를 위해 영국장군까지 프랑스로 밀입국시켰다. 왕비가 당신에게 마음이 있는것 같네요~라고 속여서 말이다.

 글로벌 스케일의 악녀짓이다.

 여성향 웹소설에 나오는 악덕영애 중에 로앙보다 스케일 큰 악녀는 흔치 않을듯.


 어쨌든 본국으로 돌아간 영국장군은 로앙에게 속았다는게 쪽팔렸는지 '그래도 왕비님이 나한테 마음이 없는건 아니었어~'라고 허세를 부려댔고, 그 허세가 매번 메디치 가문의 정보망에 걸려들어서 마리 드 메디시스가 '이 합스부르크의 암캐년이!'하며 파리로 상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왕비는 맨날 도게자하면서 억울하다고 빌고.


 정말 놀라운건 이 사건 이후에 로앙이 ㅈ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심지어 로앙과 안의 관계가 파탄나지도 않았다.


 

로앙은 이 사건 이후에도 여전히 잘 산다.

오히려 궁정을 떠나 있던 덕분에 인맥도 훨씬 더 넓어져서 친구도 많아지고 왕비가 부르면 또 놀러가고 그런다. 로앙의 인맥은 정말 놀라운 수준이었는데 프랑스야 당연히 기본이고, 해외 각국에도 로앙의 친구가 있었다. 아니 로앙 가문은 그냥 중앙프랑스의 공작가일 뿐인데 얘는 자기가 메디치 가문 영애라도 되는 것마냥 대륙급으로 움직이고 있음. 그런걸 보면 마리 드 로앙 자체가 매력이 대단한 인물이었던듯하다. 


 심지어 로앙은 내란을 기획한 적도 있다.

 리슐리외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수아송 백작에게 '리슐리외가 지배하는 프랑스 ㅈ같지 않냐? 여기서 한번 들고 일어나보는건 어때?'하며 내란을 부추긴다. 수아송 백작을 위해 로앙은 스페인 귀족 일부의 지원 약속도 받아낸다.


 


 하지만 리슐리외는 수아송 백작을 이미 요주의 인물로 주목하고 있었고, 반란은 순식간에 진압된다.   로앙은 '에라 모르겠다'하고 수아송 백작을 손절했다. 결국 수아송 백작만 ㅈ되고 끝났다.


 사실 로앙말 듣고 내란 일으킨 애들의 지분은 이 시기 프랑스 역사에서 그리 크지 않다.

 왜냐면 마리 드 메디시스를 중심으로 한 오를레앙 파벌이 이 시기에 반란을 일으켰고, 그 혼란기를 틈타 라로셸에서 영국의 지원을 받아 개신교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이때가 기회다 하고 내란 일으킨 귀족들이 워낙 많아서 어찌보면 로앙의 내란 기획도 그냥 이 시기에 평범한 군웅할거 중 하나로 볼 수도 있을 듯하다. 


 로앙이 저지른 싸패짓이 워낙 많아서 루이 13세는 유언으로

 '로앙을 절대로 파리에 들이지 마라'는 말까지 남겼을 정도.




루이 13세가 죽은지 얼마 되지 않아, 리슐리외 재상이 죽고 마자랭 재상이 등장한다.

마자랭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안 도트리슈 왕비가 프랑스의 섭정이자 지배자가 된다.


안 도트리슈는 기대했을 것이다. 

오랜 친구인 로앙이 자신을 도와 프랑스를 안정시켜주길.


 


 어림도 없지!

 나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던 찌질이가 프랑스의 지배자라니! 

 나라가 미쳤구나! 합스부르크의 암캐를 몰아내자!


 솔직히 마자랭이랑 안 도트리슈가 떡쳤다는 소문 로앙이 냈을거같음.

 얘 인성보면 그 소문 내고도 남는다.


 로앙은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하여 프랑스의 귀족들을 끌어모으고 오를레앙 파벌에 들어가버린다. 

 물론 이 반란은 실패한다. 급격하게 몸집이 커진 오를레앙 파벌에 수장급 인재가 로앙을 포함하여 무수히 많았던게 문제.


 결국 안 도트리슈를 몰아내고 나면 누가 오를레앙 파벌을 이끌건지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다. 그리하여 오를레앙 파벌이 셋으로 분열되어 각개격파당함으로써 오를레앙 파벌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가고만다.


 여기서도 로앙이 참 운이 억세게 좋은 여자인게, 수장 싸움에서 빠르게 밀려난다. 싸패짓을 워낙 많이 해서 이미 못믿을 사람으로 악명이 높거든. 반란군 수뇌부에서 밀려난 덕분에, 반란 실패 후에도 추방 정도로 온건하게 끝난다. 아니, 애초에 루이 13세가 '로앙을 파리에 들이지 말라'고 유언을 했으니 얘는 그냥 아무 벌도 안받은거나 똑같은거다. 


 

심지어 로앙은 자신의 무사평온을 위해 또 안 도트리슈에게 러브콜을 보낸다.

안과 자신의 우정을 강조하며 자기는 딱히 안에게 미움따위 없다고 강조한다.


 마자랭 재상은 왕비의 바램을 들어주고 싶었는지 왕비 파벌로 로앙이 들어오는걸 허락해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로앙이 아 ㅆㅂ 못해먹겠네 하고 다시 반왕당파로 돌아서 시골로 내려가고 만다. 로앙이 싸패인건 워낙 유명해서 마자랭이 심하게 견제했던 모양.


 솔직히 이쯤되면 안 도트리슈는 진짜 호구가 아니었을까 싶다.

 안에게 로앙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로앙은 그렇게 안과 결별한 이후 프랑스 궁정의 역사에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시골로 내려가 화려한 저택을 살롱을 짓고 자신의 추종자들과 즐겁게 놀면서 여생을 끝마쳤다. 솔직히 로앙이 한 짓들 보면 아무도 로앙과 친해지고 싶지 않을거 같은데, 주변에 계속 사람이 끊이지 않았던걸 보면 로앙의 인간적인 매력이 대단하긴 한 모양.

 

  마리 드 로앙 공작영애는 이후 프랑스의 소설가들에게 어마어마한 영감을 주며 모든 악녀, 악역영애의 모티프가 되었다. 지금 나오는 악역영애물의 악녀들도 그 근원을 거슬러올라가보면 그 뿌리에는 로앙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