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리한 동작으로 상대방을 파고드는 승부사! 알레르망!"


군중의 환호소리.


그 사이로 목청이 터져라 울부짖는 심판이 더욱 소리를 높인다.


"그으으으 상대는 악마를 먹는 빨간머리. 페리도트!"


앞은 보이지 않는다.


칠흑과도 같은 어둠 속에 소리만 가득하다.


가끔씩 롱소드를 꽉 붙든 철제 건틀렛이 보였다 사라지길 반복할 뿐이다.


"후우... 후우..."


잔뜩 긴장한 탓일까.


귓가에 바람을 불어넣듯 심호흡을 하는 소리가 간질거린다.


"시합 시작!"


경기장을 울리는 트럼펫 소리와 함께 대전의 막이 오른다.


그 시작과 함께 투박한 검을 든 판금갑옷이 거리를 좁혀온다.


천천히.


하지만 스텝을 밟으며 빈틈을 노리고 있다.


그리고 상대가 한발 더 내딛는 것을 끝으로 시야가 닫힌다.


- 카앙!


그것도 잠시.


찰나의 암전이 끝나니 검끼리 맞닿아 날카로운 금속음이 튄다.


페리도트가 크로스가드를 이용해 상대의 공격을 받아냈다.


하지만 이제부터 시작이다.


계속해서 공격의 궤도가 바뀐다.


[정신차려 페리! 폼탁(Vomtag) 자세로 바꿔!]


소리없는 외침이 어둠 속을 달리는 와중 묘한 감각이 짜릿한 자극을 주었다.


상대방이 검을 회수하며 무게중심을 바꾸는 찰나 팔다리가 있는 것 처럼 힘이 들어갔다.


"어?"


이건 내 입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다.


지금의 나는 입이 없으니까.


나를 먹은 빨간머리 소녀의 입에서 나온 것이니까.


"방해하지마!"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영혼을 울린다.


그 순간 깨달았다.


아주 짧은 순간 부분적으로 그녀의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알아서 해!"


페리가 방금 전 내 말을 들은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기 몸을 제멋대로 움직인 원인을 추측할 수 없었을 터.


"꼬맹아. 아까부터 뭘! 그렇게 조잘대냐!"


이번에는 굵직한 남성의 목소리가 검의 동작과 맞추어 찔러온다.


페리의 반응을 기대하다가는 점수를 내주고 만다.


여기서는 존하우(Zornhau)로 받아치고 득점하자.


- 카칵!


검끼리 부딪치며 나는 소리를 제끼고 검끝이 미끄러져 들어간다.


하지만 상대의 판금갑옷에 닿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근육이 저릿저릿하니 그녀가 저항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서로 다른 힘이 반대로 작용하며 근육 섬유가 끊어질 듯 뻐근하다.


"아 진짜 좀!"


한 육체에 불협화음이 가득하니 자세는 흐트러지기 마련.


페리가 혼잣말 아닌 혼잣말을 내뱉은 직후.


-퍽!


정수리를 세게 얻어맞았다.


"크흑!"

[아윽!]


"시합 종료! 득점차로 알레르망의 승리!"



* * *



한국에서 멀쩡히 잘 살다가 모종의 이유로 마왕군의 잡졸이 되어버린 나는 페리도트에게 죽었다.


아니, 죽었을 터였다.


"다 너 때문이잖아!"


-꿀꺽. 꿀꺽.


그녀가 벌컥벌컥 액체를 들이키는 소리가 어둠을 울린다.


분해서 맥주라도 마시는 거겠지.


[내가 아니었으면 1초만에 탈락했어.]


"지랄하고 있네!"


보몽 공작령에서 열린 토너먼트는 쉽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제국 서방장벽을 지키는 공작령이 아닌가.


공작령에서는 매년 우수한 인재를 뽑고자 토너먼트를 열었다.


아밍소드로 점수를 내는 토너먼트부터 기병창으로 상대를 낙마시켜야 하는 자우스팅(Jousting)까지 다양한 시합을 돌아가며 개최했다.


상금, 기사작위, 그리고 명예.


저마다의 이유를 가진 실력자들이 모여들었고 우리가 싸운 승부사 알레르망 또한 그들 중 하나였다.


"역시 너를 먹는 선택을 하는게 아니었어."


[아니 내가 뭘 잘못했는데?]


"흥."


페리는 공작령 근처 마을 자경단의 막내였다.


흔히 진저(Ginger)라고 부르는 빨간머리라서 그런지 자경단에서 적응을 못하고 나왔다고 한다.


죽인 마물을 그자리에서 먹어치우는 충격적인 장면도 한 몫 했을테고.


괴물이 된 괴물 사냥꾼이 인간무리에서 적응하는것은 쉽지 않았겠지.


"근데, 그건 어떻게 한거야?"


[그거라니 뭐?]


"그... 내 몸. 마음대로 한거."


[글쎄. 나도 모르겠다. 그냥 힘이 들어갔어.]


이건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다.


마치 없던 팔다리가 돋아난 것 처럼 힘이 들어갔다.


"지금 해봐."


[뭐? 왜?]


"아 아무튼 해봐 빨리."


시합 때는 주도권을 가지고 팽팽하게 저항했던 그녀였다.


그런데 지금은 해보라고 종용한다?


그녀를 조금은 골려주고 싶은 생각에 음흉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소녀의 몸에 빙의한 한국산 30세 동정 마법사가 할 법한 발상이.


-텁. 조물조물.


아아. 몽글몽글하다.


감촉 좋네.


손에 딱 들어오는 것이 아담한 크기의 사과가 갬비슨 너머로 느껴진다.


"..."


잠깐의 침묵.


별 다른 이변이 없으니 도리어 무서워진다.


아니, 이변은 있다.


분명히 그녀의 몸 속에 영혼 찌끄러기로 남아있을 텐데 점점 더위가 엄습해온다.


그리고 뜨거워진다.


[더워. 페리. 뜨거워.]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사막처럼.


"야이 미친새끼야!"


그날, 페리는 선술집 주인에게 테이블을 부순값을 변상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