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의 지하 감옥 최하층 내부, 마구잡이로 자라나서 봉두난발을 한 중년의 사내가 독방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정좌를 한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관리는 물론이고 먹을 것조차 제때 먹지 못하였는지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 있고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 아무리 최하층, 거기에 더해 독방에 갇힌 극악한 죄수라고 하여도 자연스레 동정심이 생길 법한 모습이다.


저벅, 저벅.


그러던 중 먼 곳에서부터 누군가의 발소리가 울려 퍼졌고 이윽고 사내가 수감 되어있는 독방 앞에서 멈춰 섰다.


철컥, 끼이익.


독방의 문이 열리자, 발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희미하게 흔들리는 등불에 비쳐 보이는 윤곽으로 짐작해 보건대 갑옷을 입고 있는 듯했고 교황청이라는 장소로 짐작해 보건대 성기사임이 틀림이 없었다.


마치 불경한 것을 마주하기 싫다는 듯이 투구까지 뒤집어쓴 성기사에게서 가늘고 높은 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기, 그···. 제가 당신을 뭐라 부르면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녀에게서 나온 말은 죄수를 대하는 간수의 그것이 아닌 상급자를 대하는 것처럼 조심스럽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중년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비루해 보이는 행색과는 다르게 그의 두 눈에는 정광이 흐르고 있었고 표정 또한 성기사를 대하는 보통 죄수와 같이 비굴하거나 주눅 들어 있는 모습이 전혀 없고 평온하다.


그가 말했다.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구나. 뭐라 불러도 상관없으나 결코 내 이름을 입에 올려서는 아니 되네. 그래, 마침내 그날이 왔는가?"


기껏 투구까지 눌러쓰고 왔건만 기어코 자신을 알아차린 듯한 그의 모습에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비통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정말로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저와 동기들이 틈을 만들 테니 부디 탈출···."


"아니, 그리해서는 아니 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자네와 동기들에게 폐를 끼치게 되겠지. 그것은 옳지 않아."


그녀의 말을 단칼에 끊어낸 사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운 뒤 양손을 모아서 내밀었다.


"단단히 묶게나. 극악무도한 죄인이 결코 도주하지 못하도록."


"···불편함 없도록 모시겠습니다."


이윽고 그의 양손에 묶인 포승줄은 어린아이라도 손쉽게 풀 수 있을 정도로 너무나도 헐거웠다.


* * *


최하층을 지나, 하층으로.


하층을 지나 중층, 상층으로.


마침내 지상에 도착한 성기사와 중년 사내의 모습.


지상에 도착하니 그를 인계받기 위한 험악한 인상을 한 장신의 거한이 대기하고 있었다.


"부, 부디 그분의 가는 길을 잘 부탁드립니다."


포승줄을 잡고 있던 그녀는 험악한 인상과 어울리지 않게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거한, 집행자에게 쥐고 있던 포승줄의 끝부분을 건넸다.


"욱, 으윽. 크흐윽···."


그런데 놀랍게도 중년 사내의 신병을 인도받은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피도 눈물도 없다는 교황청의 이단 심문관의 대장인 집행자라고는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


"울지 말게. 자네는 해야 할 일을 하는 걸세."


도리어 죄수의 신분으로 추정되는 중년 사내가 그를 어르고 달래고 있다.


"이제 그만 가세나."


"우윽, 크흐흑. 예, 예에. 알겠습니다. 이, 이것이 제가 해야 할 일이겠죠."


떠나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그녀는 투구를 벗고 옆구리에 낀 채로 이미 퉁퉁 불어있는 눈을 하고선 말없이 경계를 붙였다.


* * *


집행자와 중년 사내가 도착한 곳은 교황청 심처에 있는 재판장이었는데 그 장소는 죄인의 처형도 겸하는 장소였다.


그 말인즉 사실상 그곳에 들어가면 제 발로 걸어 나올 일은 없다고 봐야 했다.


울음을 겨우 그친 집행자는 포승줄을 쥐고 있는 손을 사시나무 떨듯이 떨며 무어라 말하기 위해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 말게나."


"······."


순식간에 의도를 파악당한 집행자의 입이 다물어졌고 중년 사내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 데려와 주느라 수고했네."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작별 인사를 마친 집행자는 포승줄로 중년 사내의 몸을 둘둘 싸맸고 일련의 작업이 끝나자, 그는 망설임 없이 재판장 안으로 들어섰다.


재판장 중앙에는 유리로 만들어진 듯한 거대한 직사각형의 구조물이 들어서 있었으며 그것을 지켜볼 수 있는 높은 위치에 이를 둘러싸듯이 방청석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재판장 내부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장난이 아니다.


우선 최종 판결을 정하는 가장 높은 위치인 심판석에 앉아있는 이는 엄숙한 인상의 노인, 교황.


교황의 바로 아래에 앉아있는 냉담한 인상의 중년 남성은 추기경.


그리고 제일 아래쪽 심판의 관이라 불리는 처형대인 유리 구조물 앞에 서 있는 이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젊은 여인, 성녀.


그 외에도 방청석에 앉아있는 이들도 모든 마탑을 대표하는 대마도사, 검성, 권왕, 신창, 용병왕, 대전사장, 제국의 황제 등등 하나같이 보통 사람들은 살면서 이름만 들어봤을 인물들.


하나같이 쟁쟁함을 넘어서 위대한 자들의 시선이 쏟아지고 있건만 심판을 받는 죄수로서 들어선 중년 사내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이 평온할 뿐이다.


그가 걸음을 옮겨 망설임 없이 심판의 관 안으로 들어섰다.


"교황 성하, 추기경 예하. 오랜만입니다. 이 죄인에게 부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시길."


죄인의 태도는 이다지도 당당하건만 오히려 교황과 추기경의 얼굴에는 슬픔이 가득하다.


가까스로 표정을 관리한 추기경이 입을 열었다.


"죄인, 심판에 앞서 본인의 입으로 신분과 이름을 설명하라."


"예. 저는 전 성기사 단장이었던 랜든이라 하옵니다."


신분과 이름을 듣자 다시금 슬픔이 차오른 모양인지 추기경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전 성기사 단장 랜든은···. 자신의 죄를 고하라."


"이 몸과 정신이 나약한 탓에 사리사욕을 위해 사악한 외신과 결탁했나이다."


이를 악문 추기경은 목이 멘 모양인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 성기사 단장 랜든은 사악한 외신과 결탁하여 수백, 수천만 명의 사람을 구해낸 전과가 있는가?"


"틀린 말입니다. 그들은 제가 아닌 오직 자신을 믿음으로써 스스로를 구해냈을 뿐입니다."


듣기로는 죄가 아닌 공적이라 칭하기에 모자람이 없건만 랜든은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추기경은 계속해서 랜든의 공과 덕을 죄목처럼 늘어놓았지만, 그는 어느 하나도 긍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추기경은 고개 숙여 눈물 흘리며 마지막 질문을 입에 올렸다.


"전 성기사 단장 랜든은···. 그리하여 세상을 구해냈는가?"


"틀리옵니다. 이 세상은 모두의 믿음과 의지가 모여 구원에 도달한진저 이 몸은 티끌 하나 보탠 적이 없나이다."


추기경은 소매로 얼굴을 훑어낸 다음 고개를 돌려 교황을 바라봤다.


"이상으로 죄인에 대한 심문을 마칩니다."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교황은 추기경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들었는데 그의 눈가에는 이미 물웅덩이가 생겨 있었다.


여전히 엄숙한 인상의 교황은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랜든을 바라보며 말했다.


"죄인에게 명한다."


"하명하십시오. 성하."


"그대의 죄를···. 부정하라."


숫제 명령이 아닌 부탁이나 다름이 없는 내용.


랜든은 자비롭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리할 수 없나이다. 부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시옵소서."


"교황이 아닌 친구로서의 부탁이네. 그리해 줄 수는 없겠는가?"


서로 간의 나이 차이가 있어 보이건만 교황은 그를 친구라 부른다.


친구라 불린 랜든은 한 쪽 무릎을 꿇더니 묶여있는 손을 힘겹게 모아서 합장한 뒤 눈을 감고는 입을 열었다.


"교황 성하, 저 또한 친구로서 부탁드립니다."


"······."


"슬퍼하지 마시옵소서. 저는 이미 모든 것을 누렸습니다. 믿음으로 선의를 행하고, 자비로써 악의에 맞섰으니 더는 여한이 없나이다."


그의 말을 들은 교황은 떨리는 손으로 망치를 높이 들어 올리고.


"죄인, 랜든에게 판결을 내리노라."


쿵.


"···영멸."


될 수 있는 한 천천히 망치를 떨어뜨렸다.


"감사합니다. 성하. 아니, 친구여."


판결이 내려지자, 성녀가 손을 들어 올려 심판의 관에 가져다 댔다. 그것을 가동할 권한은 오직 그녀에게 있었기에.


"······."


손을 댄 채로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안색을 한 채로 서 있던 그녀는 기도하는 자세 그대로 앉아있던 랜든을 바라봤다.


"단장 아저씨. 지금 제가 심판의 관을 가동하면 저는 아마도 평생을 후회 속에 살겠죠?"


"······."


"이제는 당신이 미워요.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성녀 따위는 되지 않는 건데···."


뚝, 뚝.


그녀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러 재판장의 바닥에 떨어진다.


"그럼에도 당신을 미워할 순 없는 제가 더 미워요."


"너무 슬퍼하지 말거라. 나는 죽는 것이 아니니."


"하지만 영멸을 당한 자들은 지옥에 가는걸요. 단장은, 아저씨는 그런 곳에 가야 할 사람이 아니잖아요···."


잠시 침묵하던 랜든은 덤덤하게 자신의 뜻을 밝혔다.


"누군가는 지옥에 떨어진 자들을 살펴줘야 하지 않겠느냐. 나는 그저 그것을 하러 갈 뿐이니 편히 생각하거라."


"네···. 아저씨라면 그렇게 말할 것 같았어요."


"그래, 더는 망설이지 말고 하거라. 모두를, 이 세상을 위해서."


"역시 피할 수 없는 거겠죠?"


마음을 정리한 성녀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로 심판의 관을 작동시켰고 곧 눈 부신 빛이 그 안을 가득 채워나갔다.


"잘 있거라."


"랜든, 좋은 꿈 꾸시길."


심판의 관이 발동하면 내부에 있는 죄수가 소멸할 때 영혼의 빛을 볼 수 있다.


여태껏 관찰된 빛은 시꺼멓고 누리끼리한 꺼림직한 색이었다.


그러나.


외신에게서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외신의 조각을 몸에 심고 고결한 정신으로 타락하지 않고 수많은 사람을 구하고 마침내 세상을 구해냈지만, 외신의 마지막 조각을 지워내기 위해서 스스로 영멸을 선택한 자가 내뿜는 영혼의 빛은.


번쩍!


밝게 빛나고 그럼에도 눈부시지 않은.


너무나도 따스한 빛이었다.


심판을 진행한 교황, 추기경, 성녀는 오열했고 그에게 구원받았던 방청석의 사람들도 소리죽여 울었다.


그렇게 모두의 영웅은 이 세상 나들이를 마치고 떠나갔다.


* * *


영웅이자 성인으로서 살다 죄인으로 죽은 랜든이 죽은 이후 그로부터 천년 뒤.


서로 간의 미움과 탐욕, 악의만이 가득하고 신앙과 믿음, 선의가 사라지고 오직 절망만이 가득한 세상.


몇백 년 전의 전쟁으로 폐허가 된 교황청 아래, 지옥이나 다름없는 이 세상에서 과거의 성기사 랜든이 눈을 떴다.



전형적인 중세 시대에서 천년이나 지났지만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한 파괴로 문명은 크게 발전하지 못한 세계에 다시 나타난 과거의 위인이 오로지 옳음과 선의로 세상을 바꾸는 인간 찬가적인 무언가를 보고 싶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