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추리소설의 거장, 교고쿠 나츠히코의 두번째 작품 망량의 상자.


'교고쿠도'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서점 주인이 주인공인 추리물이다.


 작가 이름 교고쿠 나츠히코다.

 주인공 이름 교고쿠도고.


 와 자캐딸도 아니고 오너캐딸 실화냐.

 

 난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이게 너무 신경쓰였다.


 '작가 이름이 교고쿠인데 주인공 이름이 교고쿠도라고...'


 


왜 독자인 내가 부끄러워지지


어쨌든 이 소설은 일본 장르소설의 계보에서 상당히 중요한 지점을 차지하고 있다.


추리소설에서는 신본격이라 불리는 트릭이 정교한 본격미스테리물을 다시 부흥시킨 인기작 중 하나로 분류된다. 그리고 라노벨에서는 괴기미스테리 요소를 사용한 라노벨의 조상 뻘 되는 소설로 분류하고 있다. 추리소설과 라노벨의 계보, 양쪽에 이 소설은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 소설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매일 밤 두 소녀가 만나며 서로 운명의 관계라고 속삭인다.


 한 소녀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소녀.

 한 소녀는 부잣집에서 태어난 소녀다.


 부잣집 소녀는 가난한집 소녀에게 연심을 품고 있는걸로 보인다.

 그 말을 에둘러서 운명으로 포장하여 전달하고 있는 듯하다.


 가난한집 소녀는 부잣집 소녀와 만나며 상대에게 매료되기 시작한다.

 둘의 영혼은 이어져있고 사실은 하나라는 속삭임에 황홀함을 느끼지.


 둘은 늦은 시간까지 찻집에서 대화를 나누다 헤어지려 전철역에 간다.

 그리고 작별하려는데 가난한집 소녀가 뒤를 돌아본 순간,


 부잣집 소녀가 전철에 몸을 던진다.

 그리고 이 마을에서는 검은 옷을 입은 창백한 남자가 인간의 한쪽 팔이나 다리를 들고 배회한다는 기묘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을 각지에서 인간의 오른팔이 발견된다.

 오른팔만 세개. 


 이것이 이 소설의 시작이다.

 트릭이 중요한 본격추리물인만큼 내용을 자세히 말할 수는 없다. 재미가 반감되니까.


 트릭을 제외하고 이 소설을 말하자면 이 소설은 캐릭터가 너무나 극단적이란거다.

 주인공인 교고쿠도는 헌책방 주인이다.

 그런데 동시에 집안 대대로 내려온 신사를 관리하는 신주이기도 해서 쉴새없이 계속 귀신 이야기를 해댄다. 항상 기괴하고 무서운 이야기만 하는, 검은 기모노를 걸친 음침한 책방주인. 이러한 교고쿠도의 캐릭터는 마치 그가 현실의 사람이 아니라 저승의 존재인 듯한 인상을 주어 독자를 몰입시킨다.


 한편 교고쿠도의 친한 친구인 장미십자탐정 에노키즈.

 얘가 추리소설의 역사에서 전후무후한 캐릭성을 가진 탐정인데...


 추리를 안한다.

 아니, 추리를 못한다.


 하지만 범인이 누군지는 안다.

 왜냐면 에노키즈는 과거를 보는 마안을 갖고 있거든.


 물론 '마안'이기에 과거의 소리를 들을 수는 없다.

 그래서 사건 현장에서 누가 어떻게 사람을 죽였는지는 알 수 있지만 동기는 알 수 없다. 또한 눈으로 식별할 수 없는 트릭을 사용했다면 언제 사람이 죽었는지는 알 수 있지만 어떻게 죽였는지, 누가 죽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당연히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일어난 범행이라면 에노키즈의 마안도 통하지 않는다.


 애초에 얘 마안, 발동조건을 자기도 모른다.

 그냥 마안이 발동할 때까지 둘러보는게 얘가 하는 일의 전부다.


 범인은 알고 있다.

 하지만 범죄를 입증할 방법은 모른다!


 이런 놈이 탐정인 것이다.

 심지어 얘는 자신에게 과거를 보는 마안이 있다는 사실에 별로 놀라움을 느끼지도 않는다. 머리가 너무 좋은 나머지 '아 이건 과거구나'하고 뇌에서 바로 직관적으로 이해해버려서 과거를 보는 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 에노키즈는...


 다른 사람들이 과거를 못본다는걸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얘는 마안이 발동해서 과거를 봤을 때도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가 본걸 설명하지 않는다. 주변에서 틀린 추리를 하고 있으면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라? 이새끼들은 바보인가? 아무리 봐도 그렇게 진행된게 아닌데 왜 저런 소릴 하고 있는거지?'라며 의아해할 뿐이다. 그리고 '아 얘네는 지능이 낮은거구나. 이 바보들과 이야기해봤자 뭐하겠어'라며 아무 말도 안하고 그 자리를 떠난다.


 에노키즈가 입만털면 순식간에 사건이 끝나는데

 에노키즈가 입을 안털어서 이 소설은 수백페이지가 더 진행되고 마는 것이다. 물론 에노키즈가 없다면 사건해결이 불가능한 케이스가 대부분이라 이건 에노키즈 잘못이 아니지만.


 작중 유일하게 에노키즈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이 교고쿠도이기 때문에 에노키즈는 교고쿠도와 친하게 지낸다. 그리고 자기가 본 걸 교고쿠도에게만 슬쩍 말하고 '이런걸 봤는데 이게 뭐 어떻게 된건지 난 모르니까 네가 알아서 생각해봐라'하고 드러눕는다.


 그러면 교고쿠도가 '네놈은 정말이지...'하며 한숨을 푹 쉬고는 너무나 간단히 추리를 해버린다. 에노키즈는 발바닥으로 박수를 치며 '야 니가 하니까 빠르네! 이게 제일 효율적이지!'하며 기뻐하고.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된 추리소설 '허구추리'는 망량의 상자를 재해석한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음침한 남자 주인공, 그리고 마안을 가진 사기급 탐정. 두 사람이 사건을 해결해나간다. 망량의 상자 시리즈에서 보여주는 이 구도가 허구추리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망량의 상자에서는 음침한 남자 교고쿠도가 추리의 주도권을 쥐고 있지만,

 허구추리에서는 마안을 지닌 소녀 이와나가 코토코가 추리의 주도권을 쥐고 있단 점.


 만약 에노키즈가 지 멋대로 추리를 가장한 개쌉소리를 하며 범인을 몰아붙였다면?

 그런 발상을 밀어붙이면 나올 법한 소설이 허구추리다.


  한편 음침한 교고쿠도와 마안탐정 에노키즈라는 이 두 강렬한 캐릭터는 다른 작품에도 영향을 미쳤다.


 


나스 기노코가 쓴 '공의 경계'다.


마안을 가진 소녀가 음침한 마법사의 의뢰를 받아 사건현장에 나가고, 마안을 통해 진상을 식별하고 사건을 해결해나간다. 그리고 그 사건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해설은 음침한 마법사가 한다. 공의 경계 또한, 망량의 상자가 확립한 음침한 해설자 x 마안탐정이라는 구도를 그대로 따른다.


 이런 점에서 망량의 상자는 현대의 추리물과 씹덕장르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 캐릭터 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이유로 망량의 상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망량의 상자는...

 ㅈㄴ 재밌다...


 난 망량의 상자의 첫페이지를 펼친 순간 충격받았다.

 미소녀 두명이 서로에게 연심을 속삭이며 연애하는 풍경이 나오는데 바로 다음에 한명이 전철에 뛰어들어서 죽는다. 그리고 마을에서 오른팔만 세개가 발견되고 경찰들이 혼란에 빠진다.


 아니 이 두 사건이 대체 무슨 관계가 있단건가.

 소녀 한명이 전철에 뛰어들어 죽은 것과, 오른팔만 세개 발견된 사건 사이에 접점이 있을 리 없는데 왜 이 두 장면을 나란히 이어서 보여주는가.


 그리고 오른팔만 세개 발견되었다면 실종자들의 나머지 부분은 어디에 있단건가?

 검은 옷을 입고 인간의 사지가 담긴 상자를 들고 다닌다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런 자극적인 이미지들을 쉴새없이 투하해서 책에서 손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이 모든 사건들이 대체 어떻게 해서 일어난 것이고 어떻게 연결되는건지, 모든 사건의 진상은 무엇인지.


 그리고 사건 전체의 진상

 진상이 드러났을 때 작가가 표현하는 이미지가 너무나 섬뜩하고 공포스러워서 그냥 충격받았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무서운 소설 1위가 이 소설이다.
 추리소설에 흥미가 있는데 어떤 작품부터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면, 망량의 상자를 읽어보는 것도 꽤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미지가 너무 생생하게 머릿속에서 떠오르는데 그게 너무 무서워서 벌벌 떨게 만드는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