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첫 기억은, 추운 바닥이었다.


그곳이 시장이었는지, 주택가였는지, 뒷골목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딱딱하고 추운 곳에 누워있었다는 것만 기억날 뿐이다. 왜 그런 곳에 누워 있었는지조차 모른다.


"허이고, 애를 아주 잡았네 잡았어."


흰 수염이 난 노인 한 명은, 혀를 차더니 그런 날 안아들었다.


"집이 어디냐? 데려다주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허어...일단은 신전으로 데리고 가야...꼬마야?! 정신 차ㄹ..."


그게, 나와 스승님의 첫 만남이었다.


------------------------------------------------------------------------------------------------------------------------------------------------


"...하여간. 그놈의 오지랖은 끝까지 안 고치셨네요. 고집하고는."


"예끼놈...그 오지랖 덕에 네 목숨이 지금까지 붙어있는 거다 이 괘씸한...쿨럭!"


"말 하지 마세요!"


피가 철철 흐르는 상처를 대충 찢어낸 천 조각으로 짓누르며 소리쳤다.


"하아, 하아...노아."


"말 하지 말라고!"


"노아, 안 된다는 것 알고 있지 않느냐."


회광반조인지, 스승님의 눈빛은 일순간 또렷해지고 목소리 또한 선명해졌다. 하지만 이 빌어먹을 피는 멈출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받아라, 노아."


"...싫어요. 전 신전 일에 관심 없으니까 그건 스승님이 직접 관리하세요. 어차피 전, 그 검 깨우지도 못하니까."


"불경한 소리 하지 말고, 받거라. 예니르께서 노하신다."


"그러니까 대체 왜 나섰냐고요, 그 나이에! 그냥, 그냥 도망치시지. 모르는 사람 하나 구하겠다고 이 꼴이 되서는..."


"노아."


"......"


스승님은,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는 철검을 내밀었다. 나는 결국 마지못해, 그 쇳덩이를 받아들였다.


성검, 묵철.


우리 신전의 (라고 해봤자 신자는 스승님과 나 뿐이다) 신이자 유파의 창시자, 그리고 승천한 최초의 용사 (라고 전해지는) 검성신 예니르의 검. 자격있는 자가 검을 휘두르면, 칼이 검게 물들어 닿는 모든 것을 벨 수 있게되는 신기. 용사라는 건 동화 속에서나 나오는 시대에, 우리 신전이 권세가 강하지 않음에도 약소하게나마 존재를 이어나가게 해주는 원천이다.


하지만 나는 단 한번도 그 기능을 사용할 수 없었다. 아무리 검술을 단련해도, 오러를 능숙하게 다뤄도, 소용없었다. 단순한 칼싸움은 진작에 스승님을 넘어선 내가, 신전장 일을 물려받을 수 없던 유일한 이유.


그리고, 스승님이 모르는 사람 하나 구하겠다고 나서다가 이렇게 된 원인.


"신자, 노아. 그대는...예니르를 계승하여, 인간을 수호하며 인류의 적을 벨 것을 맹세...쿨럭...하는가?"


아니요.


"...맹세하겠습니다."


"하하...고맙구나. 그리고...너무 슬퍼하지 말거라. 나는 온전히 내 의지로, 싸우다 가는 것이니...'


내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음에도, 스승님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


부스럭- 부스럭-


"이놈의 낙엽. 나무를 아예 잘라버리든가 해야지."


멍하니 스승님의 묘 앞에 쌓인 낙엽을 치우며 투덜거렸다. 물론 말뿐이었다. 이 사과나무는, 스승님이 직접 심으신 거니까. 마침 눈에 띈 김에, 전에 따 두었던 사과 하나를 꺼내 베어물었다.


우적.


"...맛은 좋네요. 스승님도 하나 드세요."


혼잣말과 함께, 다른 사과 하나를 묘비 위에 두었다. 낙엽을 전부 쓸고 난 뒤, 적당히 채비를 하고 문을 나섰다. 장터에 가서 일주일 동안 먹을 식재료를 사 둘 생각이었다.


"꺄아아아악-!"


신전을 나서 도시에 절반 가까이 갔을 때, 비명 소리가 숲 속에 울려퍼졌다. 나는 머뭇거리다, 늘 차고 다니는 묵철 대신 평범한 철검을 꺼내들었다. 아마 산짐승이나 도적 둘 중 하나일 텐데, 적당히 겁을 줘서 쫓아낼 생각이었다.


"거기 누구세요?"


풀을 헤치며 나아가자, 바닥에 쓰러진 젊은 여인이 눈에 띄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등에 멘 걸로 봐선 약초라도 캐러 온 것 갔았다.


"사, 살려주세요!"


나와 내 검을 본 그녀는 반색하며 도움을 청했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곤 검을 쥐고 시선을 돌렸다.


"...어?"


내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나왔다.


그건, 짐승이나 도적 따위가 아니었다.


시꺼먼 피부. 네 개의 다리. 네 개의 팔. 한 쌍의 얼굴. 얼굴마다 달린 여섯 눈과 두 입. 날카로운 이빨이 어지럽게 난 흉측한 입들이 초승달 모양으로 쪼개졌다. 그 괴물은, 웃고 있었다.


"밥. 또?"


오싹.


식은땀이 흐르고, 손이 조금씩 떨렸다. 뭐야 저건. 저런 건, 본 적 없는데.


'과거, 예니르께서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괴물들과 맞서 싸우셨다고 한다.'


대충 흘려들었던 이야기 한 구절이, 떠올랐다.


까득.


이를 악물고, 오러를 끌어올려 검을 휘둘렀다.


쨍그랑-!


어.


오러를 두른 검이 쪼개짐과 동시에, 놈의 다리에 맞아 몸이 뒤로 날아갔다.


"커헉! 쿨럭..."


올라온 피가래를 뱉어내고, 깔끔하게 동강난 검을 쳐다보았다. 좀 오래 쓰긴 했어도 괜찮은 검이었는데 한 방에 부러지다니. 욱신거리는 배를 문지르며, 천천히 다시 일어섰다.


검은 부러졌고, 방금 한 대 맞은 걸로 봐서는 저 괴물이 뭔진 모르겠지만 더럽게 힘이 센 건 확실하다. 묵철은...부러지진 않겠지만, 난 이걸 사용할 수 없다. 아마 칼만 안 부러지는 선에서 방금과 똑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싸우면 진짜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내가 모르는 사람을 위해 굳이 목숨까지 걸어야 할까.


아니.


그대로 뒤를 돌아서 도망칠 준비를 했다.


"?! 자, 잠깐만요!"


뒤에서 당황한 여자가 다급하게 나를 부르는 것이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어쩔 수 없잖아. 난 아직 살고 싶고, 마음엔 안 들지만 스승님 부탁이니 신전도 관리해야 하고. 나중에 이 망할 성검도 물려줘야 하고.


그러니까, 지금은 그냥...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지?


머릿속에서,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목소리를 낼 만한 다른 사람은 없...


내 옆에, 왠 검은 장발의 여자가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서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실망과 경멸이 가득했다.


".......!"


'당신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도망치는게 좋을 걸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묵철의 주인이 목숨을 위협받는 약자를 외면하고 비겁하게 도망치다니, 수치를 모르는 것이냐?


'당신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난 이만 갈...'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동시에, 묵철이 저절로 떠올라 그 여자에게로 날아갔다.


'검, 돌려줘.'


-목숨이 그리도 아깝다면 꺼져라. 너에게는 묵철을 쥘 자격이 없다.


'당신이 뭔데 그걸 함부로 결정해? 내 검 내놔!'


-뭐기는, 이 검의 원 주인이자 네놈이 이 검을 계승하는 맹세를 한 당사자지. 그리고 검을 깨우지조차 못하는 놈이 "내 검?"


'...예니르? 아니 그 얘기가 진짜였어?'


-가관이구나. 내 이야기를 믿지도 않는 놈이 묵철을 계승받다니. 스티븐 그 놈이 무재는 출중하다고, 한 번만 믿어 보라길래 얌전히 있었지만...더는 볼 가치가 없군. 목숨이 그리도 소중하더냐? 그럼 도망쳐라. 하지만 이 검은 네놈 따위가 휘둘러도 되는 것이 아니다.


...스승님의 이름. 아무래도 밤중에 신전에서 혼자서 중얼거리시던 게 기도 비슷한 거였나보다.


'...돌려줘, 아니 돌려주세요. 그건...스승님 유품이나 다름없는 겁니다.'


-스승의 유품이라? 그렇다면 더더욱 너는 이 검을 쥘 자격이 없구나. 스승이 전성기의 기량도, 오러도 없는 상황에서 생면부지의 타인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불살랐음에도 뻔뻔스럽게 도망치는 겁쟁이 따위가 감히 그의 제자를 자칭하느냐?


전부 맞는 말이다. 내 스승이 오지랖 부리다 죽는 것을 보았지만, 난 그렇게 죽을 생각 따위는 없었다. 겁쟁이라고 해도 할 말도 없지. 한 대 쳐맞고 지레 겁먹어서 도망치는 중이었으니. 이왕 이렇게 된 것, 지긋지긋한 신전도 떠나고, 묵철도 버리고, 떠나버리는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노아, 고맙구나.


'...대체 뭐가 문젠데요. 스승님이 죽은 것처럼, 나도 죽으라고? 당신도 스승님도 대단한 영웅이시겠죠. 근데 나는 아니야. 사람이 좀 살고 싶다는데, 그게 그렇게 큰 죄입니까?'


-...하. 좋다. 마음대로 하거라. 허나 묵철은 네 검이 아니야. 이것만큼은, 너에게 돌려줄 수 없다.


'누구 마음대로-'


-어린아이도 아닌 것이, 적당히 투정 부려라.


몸이, 무거워졌다.


-살고 싶다고? 좋다. 허나 묵철을 쥐는 자는 목숨을 중히 여길지언정 목숨을 위해 타인을 외면해선 안 된다. 그것만큼은, 인정할 수 없어. 둘 다 가질 수는 없다. 묵철은 영웅을 위한 검이다. 제 안위를 위해 약자를 저버리는 영웅이 가당키나 하더냐?


'내 스승님이 물려준 겁니다. 내 거에요.'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스티븐을 보아서라도, 마지막 기회를 주마.


묵철이, 땅에 내리꽂혔다.


-선택해라. 그 검이 네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다면, 증명해야 할 것이다. 검을 들고, 당당하게 적에게 맞서라. 행여나 적이 너무 강하다느니 죽으라는 거냐니 하는 소리는 집어치워라. 이미 이것도 많이 참아 준 것이니.


-목숨이 아깝다면, 그대로 걸어가면 된다. 막지 않겠다. 하지만 묵철은 가져갈 수 없다. 그건, 저 .......을 막기 위해서 안배해둔 것이니. 양심이 있다면 세상을 위해 안배된 것을 고작 유품이라는 명목으로 처박아둘 생각은 하지 않겠지.


'......'


왜 이딴 거지같은 일이 나한테 일어나는 거지.


세상 따위, 사실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다. 애초에 그 어린 나이에 부모도 없이 추운 길바닥에 버려졌는데, 내가 왜 세상을 구해야 하는데. 난 그냥, 스승님이랑 느긋하게 청소나 하면서 살고 싶었다고. 그런 스승님도 잃었는데, 이젠 유품마저 목숨을 걸지 않으면 가져가겠다니, 당신이야말로 양심이 있어?


그래, 가져가. 그 개 같은 성검 따위 필요 없어. 그 망할 성검도, 맹세인지 나발인지도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돌아가자. 돌아가서, 짐을 싸고. 돈을 챙겨서, 떠나자. 빌어먹을 여신, 엿이나 먹으라지.


스승님, 몸도 성치 않으신데 그만 좀 싸우세요. 대체 왜 그렇게 억지로 싸우는 거에요? 얼굴도 모르는 사람 좀 죽으면 그게 뭐 어떻다고...


뭔가 일이 터지면 항상 다쳐서 오는 당신을 향해, 그리 말했다. 그러면 당신은 늘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같은 말을 했었지.


너도 언젠간 알게 될 테지만...나는 그저, 외면할 수 없었던 것 뿐이란다.


내가 등을 돌렸던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도, 괴물도 멈춰 있는 상태. 그녀는 커다랗게 떠진 눈망울로, 나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뭐가 어려운데. 그냥 이렇게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멀리, 멀리 도망가면 되는데. 알 게 뭐야. 죽던지 말던지.


...당신은 도대체 왜 이런 겁쟁이 고아 따위를 내버려두질 못하고 신전에 들인 건지. 정말로, 이해가 안 돼.


철컥.


검을 쥐자 터져나오는 오러와 함께, 세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망할 성검은 그동안은 죽어도 안 도와주더니, 어느새 새카맣게 물들어 있었다. 아니, 이젠 내 오러마저도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쿨럭, 퉤. 좆같은 성검 같으니."


-...검을 쥘 줄은 몰랐군. 각오는 되었나?


"거 여신님, 아까까지 실컷 조리돌림하다가 이제 와서 신경 써 주는 척 하지 마세요."


-허?


순간 얼빠진 표정을 짓는 예니르를 보자 그제야 마음이 조금 풀렸다. 나는 씩 웃으며,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엿이나 까잡수십쇼, 여신님. 전 저걸 당신 얼굴이라 생각하고 벨 거니까."


나는 그대로 검을 하늘 높이 치켜들고는,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물러나라, 노아.


당신이 처음 이 검을 휘두르는 걸 보여줬을 때, 그 뒷모습이 참 멋있었는데. 생각해보면 그걸 보고 검술을 가르쳐 달라고 처음 조른 게 나였구나. 자승자박이네.


서걱.


------------------------------------------------------------------------------------------------------------------------------------------------


정의감 있는 것도, 무자비한 것도 아닌 쫄보 소시민이 얼떨결에 성검을 물려받고, 물려받은 다음에도 어지간하면 위험한 일은 피하려는데 여신이 옆에서 사람들 구하라고 존나게 갈구면서 점점 진짜 영웅처럼 변하는 이야기...가 생각나서 짜낸 스토리임.


요즘 주인공 중에서 선하고 올곧은 애가 잘 없어...좀 답답해도 난 잘 먹는데...


그러니까 그런 소설 좀 많이 '써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