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제국의 하늘에 거대한 숫자가 떠올랐다.


168:00:00


처음에는, 모두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 볼 뿐이었다.


167:59:59


그 순간, 모두가 그것이 '시계'임을 알아차렸다. 그와 동시에, 하늘이 열렸다.


하늘에 뻥 뚫린 빨간 구멍에선,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아주, 아주, 많이.


그리고, 지옥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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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15:29


"...지금, 그게..."


하얀 수녀복. 아름다운 푸른 눈. 새하얀 머리카락. 대륙 유일의 성녀의 손은, 사시나무 떨 듯 떨리고 있었다.


"...네. 피렌체 협곡에 파견된 성전기사단 12분대, 제국 마도사단 2사단, 드워프의 화력부대 및 수인 부족 모두 전멸했습니다. 리하르트 용사님 역시...치명상을 입고 현재 의식 불명입니다."


"투르하 해안에 파견된 대수림 소속 엘프 부대와 용기사단 1사단, 그리고 자율로 참여한 민병대 및 자잘한 용병단 역시 몰살당했습니다. 대마도사 아델하이트 님은 현재 실종 상태입니다."


"그게, 대체."


"그리고, 제국의 황제와 교황 성하가 직접 이끄신 정예 타격대 역시..괴멸되었습니다. 교황 성하는...마지막 남은 생존자들이 퇴각할 시간을 버시다 사망하셨습니다."


"그러므로...성녀님이, 현재 세계연합군의 새로운 지휘관이십니다."


성녀는 미칠듯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지로 억눌렀다.


온 대륙에 '시계'가 떠오른 순간, 하늘이 열리고 세상엔 말 그대로 지옥이 펼쳐졌다. 그 구멍에서 떨어진...결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괴물들은 대처할 틈도 없이 수많은 도시, 마을, 영지를 끔찍하게 유린했다. 말도 통하지 않고, 회유도 통하지 않는 그것들은, 오직 이 세계의 지성체의 절멸만이 목적이라는 듯 인간, 엘프, 드워프, 수인 가릴 것 없이 지성체라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찢어발겼다. 고작 사흘 만에, 대륙의 절반이 피로 뒤덮였다.


"시, 신이시여. 제발, 제발..."


이 말도 안 되는 파괴의 속도에, 그 동안 눈치를 보던 종족들과 나라들은 기겁을 하며 세계연합군을 결성했다. 서로의 감정은 내려두고, 저 끔찍한 종말을 막기 위해서.


그리고, 그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오히려, 날이 갈 수록 저 괴물들의 공세는 거세지며, 하루가 멀다 하고 도시와 국가의 함락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이리도 끔찍한 종말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그녀의 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전에는, 아무 일이 없어도 대답해 주셨잖아요. 제발, 제발 대답해주세요. 신이시여. 저희는, 지금...지금이야말로...당신이..."


당연히,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는 비단 인류의 여신 아스타만이 아니었다. 엘프의 세계수도. 수인들의 늑대신도. 드워프의 강철신도.


모두, 종말의 앞에서 침묵하고 있었다.


"성녀님."


겁에 질려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올리던 그녀의 어깨를, 누군가가 짚었다. 성전기사단장이었다. 지난 원정에서 한쪽 팔과 눈을 잃은.


"명을 내려주십시오. 내리셔야 합니다."


"저, 저는..."


"성녀님."


그가, 한 손으로 부드럽게 그녀의 양 손을 붙들었다.


"압니다. 갑작스레 책임을 지시게 되어버린 것도. 저 이해할 수 없는 이물들이 몰고 오는 파멸도. 두려우시겠죠.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끄셔야 합니다. 저희가, 이끌어야 합니다. 힘없는 모든 이들이, 저희에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 말하며, 그는 손을 놓고 검을 들었다.


"신께서 어째서 저희 기도를 외면하시는지 알 수 없으나...적어도 저희는, 약자들의 기도를 들어줄 수 있지 않습니까."


의연히 말하는 그를 잠시 바라보던 성녀는, 입술을 강하게 깨물고는 일어섰다.


"...피난민과 군을 모두, 주나한 산성으로 옮기세요. 그곳에서, 항전하겠습니다."


"...명을 받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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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22:19


성녀는, 성벽에 서서 산맥을 뒤덮은 붉은 물결을 바라보았다. 전술에 대해 거의 문외한인 그녀도, 알 수 있었다.


승산 따위는, 없다.


"...싸울 수 있는 모든 이들은,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리 말하는 성전기사단장-이제는 연합사령관이 되어버린 그를 바라보며, 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승산은 없다. 보이는 미래는, 오직 패전뿐이다. 이런 상황에서의 출정은 그저, 자살일 뿐.


"단장님."


"예."


"저희 그냥, 포기할까요."


"......"


"아시잖아요. 저건, 못 이겨요. 제가 제 수명을 모조리 갖다바쳐도, 당신이 온갖 금술과 약물을 생명이 불사를 각오로 사용해도. 절대로, 승리할 수 없을 거에요."


"성녀님."


"그럴 바에는 차라리, 그냥 다 포기해버리고 마지막 순간을 가족과 함께 죽으라고 말해주는 게 진짜 배려 아닐까요."


절망으로 탁해진 그녀의 눈에, 하늘에 난 구멍에서 무언가가 나타났다.


드륵.


그리고,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하."


그것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눈알이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그녀는 무릎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하...하하하하하..."


그리곤 넋을 놓은 듯, 실성한 채 웃었다.


"성녀님."


"아하, 아하하하하...하하..."


"성녀님!!!"


그리고 고함치는 그를, 성녀는 텅 빈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희는, 출정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말에, 성녀는 이를 악물었다.


"출정은 얼어죽을 출정. 당신들 다 죽으러 가는 거야. 저거 보여? 도대체 몇 마리인지 숫자도 못 세겠어. 그런데, 이젠 하늘에 날아다니는 눈깔까지 나타났네? 저걸 대체 어떻게 이겨. 여기서 대체 어떻게 살아. 이미 다 끝났다고!!!"


날카롭게 받아쳤지만,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압니다."


"뭐...?"


"승산은 없겠죠. 아무리 희망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어도...결말은 저희의 전멸. 인류의 끝이라는 것, 다들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기 휘두를 시간에 가족 얼굴이나 보러 가라구요, 제발. 그냥...그러면 되잖아."


"하지만, 저희는 최소한 인간으로서 죽겠습니다. 백정에게 끌려가는 가축마냥,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도축당하는 것 마냥 죽지 않겠습니다. 저희는 마지막까지 물어뜯고, 검과 창을 휘두르고, 불과 번개를 쏘아내며 죽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성전기사단장은 등을 돌렸다.


"부디, 무사하시길."


그런 의미없는 기원과 함께, 그는 떠났다.



https://www.youtube.com/watch?v=Q7E4Hiqe1s4


000:52:02


"제군들...아니, 모두들. 잘 아실겁니다."


처참한 몰골로 병장기를 든 이들 앞에서, 외팔이 애꾸눈 성전기사단은 입을 열었다.


"아마 저희는, 패배할 것입니다."


"......"


"아마도 높은 확률로, 오늘은 저희 모두의 멸망의 날이 되겠죠. 오늘 해가 지기 전에, 저희는 모두 죽고 저희의 세계는 저 흉수들에 의해 잔인하게 유린될지도 모릅니다. 며칠 후에는 인간이든, 드워프든, 엘프든, 수인이든, 오크든...존재했다는 흔적조차 사라질 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는, 검을 들어올렸다.


"저는, 끝에서도 사람으로 죽고 싶습니다. 사람답게 저항하고, 사람답게 맞서 싸우며, 사람답게 저의 가족을 지키다 죽고 싶습니다."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도망치셔도 좋습니다. 마지막 남은 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내셔도 좋습니다. 다만, 저는 나가겠습니다. 이건 명령도, 부탁도 아닌, 그저 저 한명의 결심일 뿐입니다."


"그러니 부디, 문을 열어주시게."


그가 문지기들에게 말하자, 천천히 거대한 성문이 열렸다. 그는, 묵묵히 걸어나갔다.


함성은 없었다. 박수도 없었다.


다만, 모든 이들이 그저 묵묵히 떨리는 손들로 창, 검, 지팡이, 해머, 활, 농기구, 돌, 마도서를 들고 따라나갔을 뿐이다.


"그럼..."


번쩍.


공격 개시 명령을 내리려던 찰나, 성전기사단장의 눈앞에서 섬광이 빛났다. 빛이 사그라들자, 그 앞에는 허탈한 미소를 띄운 성녀가 서 있었다.


"성녀님."


"됐어요. 아무 말도 하지 마요."


그녀는 묵묵히, 사람들에게 축복을 뿌렸다. 촉복이 끝나자, 그녀는 남아있는 신성력을 바닥까지 긁어모아 찬란한 빛의 구체를 벼려냈다.


"저도. 당신도. 여러분도 다."


"인간으로 죽어보죠."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전장의 함성이 협곡을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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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1:29


이변은 없었다.


놀랍게도 아직 추가로 죽은 자는 없었지만...마법사들은 마력이 떨어졌고, 성직자들은 성력이 한계에 달했으며, 전사들은 지쳐 쓰러지고 무기 역시 대다수가 부러졌다.


성녀는 피가 줄줄 흐르는 옆구리를 손으로 눌러 지혈하면서도, 온 몸이 난도질당한 성전기사단장에게 마지막 치유 주문을 시전했다.


"성...녀님..."


"말...하지 마요. 다음."


하지만, 그녀는 치유를 멈추지 않았다. 그의 뒤편에 쓰러진 병사를 향해 터덜터덜 걸어가며, 그녀는 수명마저 바쳐 신성력을 끌어냈다.


000:00:42


"자...여기...쿨럭."


하지만 이미 부상까지 당한 몸은 한계라는 듯, 그녀는 입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쿨럭. 커흑...아직...난..."


그녀의 마음은 아직 더 할 수 있다고, 필요하다면 생명도, 수명도, 영혼도 모두 태워버릴 수 있다고 외쳤지만...몸은, 현실의 벽에 부딫혔다.


000:00:12


기세에 잠시나마 물러섰던 붉은 괴물의 군세가 덮쳐오는 것을 바라보던 시야도, 점차 흐려졌다.


'사실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 순간마저 침묵하는 신이, 원망스러웠다.


'기적을 바라는 건 역시...욕심이었을까.'


000:00:03


000:00:02


000:00:01


000:00:00


하늘의 뜬 시계가 종말을 고하듯, 마침내 끝에 다다랐다.


-...에 따라 '지구'의 간섭을 허가합니다.


미안하구나, 나의 딸아.


그리고, 하늘이 열렸다.


"타이탄급 주포 발사."


그리고, 이상하게 치직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섬광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강하. 강하. 강하."


그 때와 똑같이 하늘에서 쏟아져내리는 검은 무언가들을 보며, 성녀는 침통하게 눈을 감았다. 이윽고, 폭음이 들려왔다.


하지만, 인간의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키에에에에에엑-!


카아아아악!


그저, 괴물들의 비명만이, 전장을 가득 채웠다. 성녀는 눈을 떴다.


-나는, 우리들은, 너희를 구할 수 없었다. 너희에게 기적을 일으켜 줄 수 없다.


"에너지 방벽 방출기 설치 완료. 다 물러나! 의료팀! 부상자 챙겨!"


성녀의 눈 앞에서는, 이상한 옷을 입고 이상한 장신구를 얼굴에 잔뜩 단 남자가 소리치고 있었다. 희한하게도, 그의 말과 입모양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 눈에 띄였다.


그런 그녀의 눈앞에선, 이내 푸른 빛의 벽이 세워졌다. 무슨 이유에선지, 신성력도 마력도 느껴지지 않는 벽을 저 괴물들은 뚫어내지 못하는 듯 보였다.


"맙소사...아가씨, 조금만 참아요. 보자...12번."


남자와 비슷하게 이상한 옷을 입은 중년의 여성이, 주머니에서 뾰족한 침이 달린 유리병을 꺼냈다.


"급속 재생 앰플 사출."


아까와 같은 이상한 목소리.


"아얏..."


"조금만 참아요. 이제 안 아플 거야."


그 말대로, 침을 찔러넣고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고통이 줄어들었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자, 옆구리가 뜯겨나갔던 곳은 말끔히 새 살이 돋아나고 있었다.


"당신들은, 누구..."


그러면서 그녀가 둘러본 광경은, 믿겨지지 없었다.


이상한 옷은 입은 그들은...괴물을 물리치고 있었다. 자신들에게는 확실한 종말과도 같던 그들이 맥을 못 추며 섬멸당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부상자들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빠르게 회복되어 일어나고 있었다.


"치직...강습팀. 수신 확인하도록."


눈앞의 남자가 단 무언가에서, 중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습 1팀장 강희찬 수신 양호."


"강습 2팀장 리사 엘리엇 수신 양호."


"강습 3팀장 호르헤 마르티네즈 수신 양호."


"강습 4팀장 마테오 콜롬보 수신 양호."


"작전 목표는 침략체의 섬멸과 원주민 보호다. 단, 원주민 보호가 우선이라는 것 명심하도록."


""""명령 확인.""""


질서정연한 응답과 함께, 넷은 지휘를 시작했다.


"전투 드로이드 링크. 온라인. 권한 확인. 승인. 강희찬 대원님 환영합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떨어졌던 쇳덩이들에게서 일제히 빛이 나기 시작했다. 달려 나가려던 이상한 의복의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뒤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도와주러 온 거니까, 쉬고 있어요."


-그래서, 기적을 일으켜줄 이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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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소환이 아닌 아예 행성의 군대 전체를 소환하면 어떨까-에서 시작한 아이디어임. 거기에 요즘 좆간 관련 소설이 워낙 많다보니 오히려 인간 뽕을 듬뿍 넣은 맛을 한번 내보고 싶었음. 그래서 매드무비 브금까지 삽입하고.


물론 지금의 지구 꼬라지를 보면 좆간들이 다른 차원까지 군대를 파견해서 도와주는게 말이 되냐! 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래서 어째서 평소엔 좆같기가 이를 데 없는 지구인이 다른 세계를 도와주기로 결정했는지 제법 재밌는 이야기가 될 것 같지 않음?


자 그러니까 이제 그것까지 포함한 소설을 이걸 본 네가 써 오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