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랑스의 귀족적인 이미지는 부르봉 왕조에서 확립된 것이다.

부르봉 왕조에서 제일 유명한건 태양왕 루이 14세다. 


태양왕은 한국으로 치면 세종대왕에 해당하는 왕이다. 중앙집권화, 문화발전, 국가경제 발달 등... 태양왕은 틀림없이 프랑스 왕국 최고의 명군이다.


 하지만 나는 프랑스 왕조에서 가장 흥미로운 왕은 루이 13세라고 생각한다.


 루이 13세.

 자칭 공정왕.


 통칭 아니다.

 자칭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관대한 나를 공정왕이라 불러다오."


물론 후대에 와서는 빅웃음을 주는 망언으로 남았을 뿐이다.

루이 13세의 업적 중에 공?정?한게 없거든. 오히려 허세왕이라 불러야 한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허세왕, 아니, 공정왕 루이 13세는 어떤 인물인지 알아보자. 


 



 루이 13세.

 부르봉 왕가를 연 치킨왕 앙리 4세의 아들.

 그리고 메디치 가문의 수장, 마리 드 메디시스의 아들.


 루이 13세는 아버지에 관한 추억이 거의 없다.

 왜냐면 루이 13세가 매우 어린 시절 아버지가 암살당했기 때문이다. 정치적 암살은 아니었고 종교적 암살이었다. 앙리 4세가 개신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칙령을 발표하여, 분노한 카톨릭 신자가 앙리 4세를 암살한 것이었다.


 치킨왕의 마지막 유언은 "으악! 나 칼 맞았어!"

 그야말로 치킨왕다운 유언이다. 


 어쨌든 치킨왕의 사망으로 프랑스의 통치자는 자동적으로 아내인 마리 드 메디시스가 되었다. 마리는 프랑스를 통치하기 위해 메디치 가문의 유력인재들을 프랑스로 끌어들였다. 프랑스의 고위 관료들 역시 메디치 파벌 사람들로 채워졌고. 한편 마리 드 메디시스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공주 안 도트리슈와 루이 13세의 약혼을 추진한다.



 안 도트리슈.

 에스파냐 제국의 황태자.

 루이 13세에게 전혀 꿀릴게 없는 압도적인 재력과 지위를 지닌 공주. 약혼이 결정되었을 때 안 도트리슈는 11살이었고 루이가 한 13살이었다. 안 도트리슈와 루이 13세는 결혼할 사이였기에 여러번 만남을 가졌지만...



 "말이 안통해서 못놀아주겠네..."


 유감스럽게도 안과 루이는 서로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에스파냐 공주와 프랑스 왕자, 서로 다른 말투와 다른 사고방식, 다른 취미 때문에 서로 '이 인간과 부부로 살아도 되는걸까?'하는 불신감만 생긴 것이다. 이게 11살과 13살짜리가 할 고민인가. 


 어쨌든 루이는 불안감을 느꼈으리라.

 어머니 마리 드 메디시스가 궁정의 고위 관료들을 죄다 메디치 가문 사람으로 채우고 차기 왕비까지 에스파냐 공주로 결정했다. 프랑스 궁정에 프랑스인이 없다는 이상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루이는 외국인포밍된 궁정생활에 답답함을 느끼고 사냥을 자주 나갔다.

 이때 루이 13세는 운명의 상대를 만나게 된다.


 


 그가 바로 륀 백작이다.

 아버지가 없던 루이 13세의 정서적 기둥이 되어준 사람. 


 륀 백작은 뛰어난 통찰력으로 루이가 어머니에게 불만을 품고 있으며, 아버지를 동경하고 있다는걸 간파한다. 그는 루이에게 치킨왕 앙리의 위대한 업적들을 과장스레 들려주며 '프랑스의 정치는 프랑스인이 이끌어가야 한다'라는 자신의 철학을 주입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륀 백작은 '말이 통하는 여자'를 루이에게 붙여준다.



 그 말이 통하는 여자가 바로 륀 백작의 약혼자, 루이보다 1살 어린 공작영애, 마리 드 로앙이었다. 로앙은 머리가 좋았기 때문에, 자신의 역할이 루이 13세가 륀 백작에게 정서적으로 의존하게 만드는거란걸 이해했다. 그래서 루이와 륀 백작 사이에서 양념을 잔뜩 치며 루이가 진심으로 륀을 아버지처럼 따르도록, 자신을 여동생처럼 느끼도록 유도했다.


 이렇게 륀과 로앙은 정성껏 애새끼, 아니, 루이를 보필한다.

 이 시기 륀과 로앙을 견제하는 귀족은 없었다.


 왜냐면 현재 프랑스를 통치하고 있는 마리 드 메디시스는 루이 13세를 왕으로 만들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첫째 아들인 루이와는 성격이 안맞아서 틀어진지 오래라 둘째 아들에게 왕위를 넘겨줘야겠다고 생각이 기운지 오래였다. 어차피 왕자로 끝날 루이한테 프랑스의 낡은 귀족이 몇명이 붙던 간에 별 의미가 없단 얘기지.


 실제로 루이, 륀, 로앙이 모여서 하는 일도 별거 없었다. 같이 사냥을 나가고, 산책을 하고, 무도회를 열고 그런 평범하고 즐거운 슬로우 라이프를 하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마리 드 메디시스가 연 무도회날 불길한 사건이 터지고 만다.


 


 "어머니, 어머니께 바치는 연극입니다.

 부디 즐겁게 봐주세요."


 어린 루이 13세가 직접 배우로 분장하고 배우들과 함께 무대 위에서 춤을 추며 연극을 공연한다.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무도회에서 광대들의 연극으로 흥을 띄우는 건 흔히 있는 일이니까. 문제는 내용이었다.


 마리 드 메디시스가 프랑스를 망치고 있다는, 자기 어머니를 비난하고 풍자하는 내용의 연극을 상영해버린거다. 모든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킷사마....!"


 마리 드 메디시스는 몹시 분노한다.

 이때 마리의 마음은 완전히 둘째 아들에게로 기울었을 것이다. 자신이 벽에 똥칠할 때까지 오래 살아서 메디치 왕조 체제를 구축한 뒤 자기가 죽을 때 둘째 아들에게 왕위를 넘기겠다. 그래서 프랑스를 메디치 국가로 만들겠다. 그런 비전을 세우고 있었겠지.


 이때까지도 마리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루이의 배후에 있는 륀 백작이 얼마나 무서운 남자인지.


 몇달 뒤 루이는 륀 백작, 그리고 로앙 공작영애의 지원을 받아 소규모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건 너무나 간단한 일이었다. 왜냐면 륀 백작은 루이의 신임을 사서 루이의 호위병단을 이끄는 지휘관으로 임명되어있었거든. 궁정 안에 륀 백작의 부하들이 상시 대기하고 있는 상태다. 륀은 명령했다.



"프랑스의 진정한 왕을 위하여, 모두 죽여라."


 그리고 궁정에서 대살육이 벌어진다.

 마리 메디시스가 영입한 메디치 가문의 핵심 인재들이 전부 륀의 손에 죽었다. 심지어 마리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영애의 머리채를 붙잡고 질질 끌고다니다 파리 시민들 앞에서 "프랑스를 좀먹는 마녀가 죽는 모습을 보여주겠다!"하며 그 앞에서 목을 베어 죽였다고 한다. 지나치게 잔혹한 숙청이다.

 


 친한 친구의 비참한 죽음을 전해 들은 순간 마리 메디시스는 결심했을거다.

 첫째 아들을 죽여야 한다고. 저런 놈에게 왕위를 맡겨두는건 너무 위험하다고. 그래서 마리 메디시스는 메디치 파벌의 총력을 결집시켜 루이의 반란을 진압하려 한다. 하지만 이때 리슐리외가 마리를 배신하고 루이한테 붙어버리는 바람에 마리의 왕권 탈환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반면 륀 백작은 왕위계승의 제1공헌자로써, 공작으로 승진하는 쾌거를 이룬다. 게다가 프랑스의 모든 군대를 통솔할 수 있는 총사령관 지위까지 받는다. 이제 프랑스의 권력은 륀 백작에게 있는 것이다.


 륀 백작은 뱀처럼 루이에게 속삭인다.

 왕의 강함을 보이기 위해 전쟁을 더 해야 한다고.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고.


 그 말에 루이는 당황하고 만다.

 아내가 합스부르크의 공주이고 프랑스가 끼고 있는 두 국가는 합스부르크 제국들 뿐인데 어딜 상대로 전쟁을 벌인단 말인가? 그러자 륀이 말한다.


 "있지 않습니까? 선왕께서 물려주신 영지가.

 프랑스에 아직 편입되지 않은 가스코뉴라는 땅이."

"내 영지를 반역자 소굴로 몰아서 정복해라고?"

"안될거 있습니까?"



"안될거 없지! 어차피 내 영지인데 반역자로 몰던 말던 내 맘이지!

 재밌겠는데! 까짓거 해보지!"


  광왕의 탄생이다.


 이렇게 루이 13세는 군대를 이끌고, 가스코뉴 영지로 가서 영지민들을 향해 선전포고를 한다. 루이 말 잘 듣고 살던 영지민들 어리둥절. 그렇게 가스코뉴는 독립공국으로써의 모든 지위를 잃고 프랑스에 합병되고 만다.


 이렇게 루이는 륀이 바라던 전쟁에 미친 왕이 되었고, 루이가 군대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총사령관 륀의 권력도 점점 더 강해져갔다. 륀이 반역자라고 지목한 사람은 당장 바스티유 감옥에 수감되는 공포정치가 시작되려던 찰나...



 륀은 감기에 걸려 죽고 만다.

 륀의 아내였던 로앙은 절망한다.


 


 '시발아 니가 지금 죽어버리면 나는 어쩌라고...'


 륀의 죽음으로, 하늘을 나는 새까지 떨어트리던 로앙의 영향력도 대폭 축소된다. 결국 왕비가 유산한걸 계기로 수많은 귀족들이 로앙에게 대들고 일어나서 궁정에서 쫓겨나고 만다.

 

 이 여자에 대해서는 아래의 글을 참조하자.

악역영애 로앙 일대기


 어쨌든 륀도, 로앙도 프랑스 궁정에서 사라짐으로써 루이의 전쟁광 기질이 누그러진다. 하지만 그 평화는 길지 않았다.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이 종교 차별 정책에 항의하며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치킨왕이 선포한 낭트칙령을 지켜라!"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면서! 니 아빠가 한 약속이다!"

 "공정왕을 자칭하는 자가 개신교 탄압이 웬말이냐!"


리슐리외 추기경은 이 소식을 듣고 곰곰히 생각한다.

개신교도라 하더라도 프랑스의 국민. 그저 다른 종교를 믿을 뿐인데 굳이 탄압할 필요가 있을까? 세금만 꼬박꼬박 내고 국가 정책에 협조만 잘하면 훌륭한 국민인거 아닐까? 애국심없는 카톨릭교도와 애국심충만한 개신교도 둘 중, 프랑스에 더 도움이 되는건 애국심 쩌는 개신교도 아닐까?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법은 간단하다.

 치킨왕이 선포한 낭트칙령을 재선포하여 종교의 자유를 인정해주면 그만이다.


 리슐리외는 공정왕에게 간다.


 


 "공정왕이시여,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십시오. 그러면 프랑스가 평화로워집니다."

 "싫은데? 우리 아빠가 낭트 칙령 선포했다가 카톨릭 교도한테 암살당한거 못봤냐?"

 "그건 제가 막겠습니다. 카톨릭교도인 저를 믿으십시오."

 "아, 너 이새끼! 너도 카톨릭교도였구나! 네 속셈을 알겠다! 네녀석 내가 낭트칙령을 재선포하게 만든 다음에 반란을 일으킬 셈이지! 그게 아니라면 증명해! 개신교도들을 싹 다 죽이는 전쟁에 찬성해라고! 아니면 너도 반역자다!"

 "아니 피해망상 ㅆㅂ..."


이렇게 라로셸 공방전이라고 하는 프랑스 왕국과 개신교도들의 종교전쟁이 벌어지고 만다.


 


 'ㅆㅂ 이 전쟁을 어떻게든 멈춰야 하는데...'


 리슐리외는 라로셸 전쟁을 멈추기 위해 온갖 협상을 다 하며 돌아다녔다. 이때 리슐리외가 분투한 모습은 '리슐리외가 라로셸 공방전을 지휘한 용감한 모습'으로 박제되어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 레알로.


 


 실제로 라로셸 공방전을 지휘한 건 공정왕 루이였는데, 이미 라로셸이 전쟁을 할 기력도 자원도 없어졌다는걸 알면서도, 굶주린 반란군 앞에서 고기 구워먹으며 전쟁을 이어가는 패악질을 계속한다.


 굶어죽어가는 라로셸 주민들 앞에서 아직도 자신은 전쟁을 할 여력이 남았다는걸 보여주기 위해, 전략적으로 전혀 가치가 없는 해안 위치에 '루이 요새'라는 이름의 요새를 건축하는 뻘짓까지 해보인다. 리슐리외는 또다시 뒷목을 잡았다.


 하지만 이 루이 요새는 전략적으로는 무가치하지만 외교적으로는 상당히 의미가 있었다.

 라로셸을 지원해주고 있던 영국의 밀정들은 루이 요새를 보고 충격받았던거다. 그들의 눈에는 루이 요새가 라로셸을 공격할 뿐 아니라, 라로셸을 드나드는 영국 상선들까지 전부 파괴하여 영국을 고립시키려는 시도 그 첫스텝으로 보여서. 그래서 영국은 라로셸을 버리고, 라로셸은 약속받은 영국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패배하고 만다.




 이후에도 공정왕 루이는 프랑스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내란을 전부 다 미친놈처럼 국고를 낭비해가며 쓸데없이 강경하게 때려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의 왕은 전쟁에 미친놈이다'라는 소문이 퍼져서 국민들은 물론, 주변 나라들까지 루이를 건드리는걸 망설이게 되었다.


 이렇게 프랑스의 국경은 루이 13세 시대에 확정지었다.

 미친놈이 국경을 완성시킨 것이다.


 하지만 공정왕에게도 인간적인 부분은 있었다.

 야사에 따르면 공정왕의 취미는


 


 부엌에서 잼만들기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