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사정과 세계의 억지력 및 원활한 진행을 위한 편의주의적 전개 등에 의해서, 나는 가장 마지막에 한 게임의 주인공이 되어 가장 마지막에 봤던 대역 소설 세계관에 트립해버렸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가장 마지막에 본 소설이라는 게 신석기 시대 단편이었다는 것이고...


더 큰 문제는 마지막에 플레이했던 게임이 전염병 주식회사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보고 지금 인류를 멸망시키라는 거야?


보통 대역은 현대인이 회귀 빙의 환생 트립해서 개발딸 하는 것 아니었어?


나는 왜 역으로 기술을 퇴화시키는 역할이지?


하기사 이것도 '대체' 역사가 맞긴 하네!



불행 중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이걸 정말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면- 내가 전염병 주식회사에서 가장 마지막에 플레이 했던 전염병이 뇌신경 기생충이라는 것이다.


뇌신경 기생충은 유일하게도 인류를 멸망시키기 않고 클리어가 가능한 전염병이긴 한데...


문제는 그 클리어 방식이 모든 인간이 이 기생충을 신으로 숭배하게 된다는 심히 딥 다크 판타지스러운 방식이라는 것.


하다못해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인들도 마음 속으로 일본 천황을 욕할 자유는 있었는데, 저런 식으로 클리어하면 마음 속으로 욕하는 것 조차 불가능하다.


아니, 아예 그럴 생각조차 들지 않겠지...


그런 판국이라, 나는 이 시점에서 엔딩을 볼 생각 따윈 때려 치웠다.


머릿속 기생충 따위를 신으로 섬기는 세계는 전혀 쿨하지 않거든.


그렇다고 인류 멸망 엔딩 따윈 더더욱 좋지 않을 뿐더러, 어느 세월에 멸망시키냐.


아메리카 대륙은 또 어떻게 건널거야?


중세시대는 커녕 신석기 시대에 인류 멸망시키려면 아무리 발악해도 천년 단위로 걸릴 판이구만.


하여튼 인간을 그만두고? 뇌신경 기생충으로의 새 인?생을 시작한 지금, 내 심기는 영 편하지 않았다.


신석기 시대라 그런가 여기 인간들은 도무지 여가생활이라는 것을 할 줄 모르는 것 같으니까.


그렇다고 뭐 이제 와서 여기 살던 애들한태 말을 걸기도 좀 어색하고...


뭐라고 말해?


내가 지금 니들 머릿속에 살고 있는데 앞으로도 신세 좀 지자고?


샤먼들 불러서 퇴마의식이나 벌이지 않을까?


뭐 그런 걸로 내가 쫓겨나지야 않겠다만 앞으로도 사이가 영 불편해질 것 같은데.


...어쨌든, 여기서 존버라도 타다 보면 문명이 좀 발전할태고, 그럼 뭐라도 볼 거리가 늘어나지 않을까?


하여튼... 다큐멘터리 보는 느낌으로 신석기 시대 마을의 원시적 풍경을 보는 것도 원투데이고, 이 시점에서 내 취미생활은 21세기 현대의 광경을 상상 속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문과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하여튼 인간이 잠을 잘 때 꿈을 꾸는데, 그건 뇌에서 뭔 이과적인 작용이 일어나서 그렇단다.


그러니까 '뇌신경' 기생충인 나는 인간의 뇌를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다시 말해 자각몽을 꾸는 것이 가능하다는 거지.


그래서 나는 숙주의 뇌를 이용해 21세기 현대의 도심을 거닐었고, 실제 21세기에서의 생활처럼 만족스럽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신석기 시대 다큐보다는 재밌었다.


뭐, 최초의 숙주였던 꼬마애가 자기가 꾼 꿈을 이야기하다 미친놈 취급 받는 사소한 찐빠는 생겼지만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지.


* * *


일단, 정확히 몇 년이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엄청 오래 지났을 무렵, 내 숙주들은 아직도 부락 하나 단위에 한정되어 있었다.


굳이 작정하고 여기 저기 퍼지다가 괜히 돌연변이 발생해서 인류 망하면 어떡해.


그런데, 지금은 그 판단을 좀 후회하게 되었다.


진작에 여기저기 퍼질 걸 그랬지.


기생충인 나한태 머리는 없지만, 그냥 습관적인 말로 표현하자면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


내 숙주들이 살던 마을에 누가 쳐들어왔거든.


전쟁은 변하지 않는다고 게임에서 그러더니, 역시나 신석기 시대부터 전쟁을 벌이는 전투종족 인간답구만.


하여튼 저것들이 누군지도 모르겠고 왜 쳐들어왔는지도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다.


여기서 내 숙주들이 몰살당하면 내 충(蟲)생도 여기서 끝난다.


그러니 뭐 별 수 있나.


살다보면 어떻게든 해야 할 때가 있고, 지금이 바로 그 때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했다.


뇌신경 기생충의 능력은 바로 인간의 뇌를 조작하는 능력.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머릿속 기생충을 신으로 숭배하게 만들 수도 있으니, 어지간한 건 다 된다고 봐야한다.


가령, 지금 내 숙주의 몸을 컨트롤 한다던가.


사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광신도 군단을 만들던가 하는 식으로 응용도 가능하지만, 딱히 민폐를 끼치기 싫었기 때문에 뇌신경 기생충으로서의 능력은 많이 딸린다.


아직은 한 사람을 컨트롤 하는 것이 한계라고 봐야겠지.



* * *



내가 미친걸까, 세상이 미친걸까.


'그' 꿈을 꾸기 전까지만 해도 평범했던 소년의 고민이었다.


꿈을 꿀 때마다 소년은 별천지를 보았다.


한 눈에 담지 못할만큼 커다란 무언가를.


사람을 싣고 내리는, 바퀴 네 개 달린 엄청 빠른 무언가를.


그 이외에도 수많은 것들을 보았지만, 그것을 표현할 길이 없어 소년은 단지 그곳을 신들의 세상이라고 믿었다.


단순한 꿈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생생하였고 애초에 그런 풍경을 생각할 능력이 자신에게 있을 것 같지도 않았으니, 분명 꿈 속에서 자신은 신들의 세계에 들렀다 온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사람들은 소년을 미친놈 취급하기 십상이었다.


그렇다보니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 세계의 꿈을 꾸고 있음에도, 어느 순간 소년은 그 광경에 대한 이야기를 꺼렸다.


그러던 어느날, 소년은 깨달았다.


자기가 미친 게 아니었다고.


계기는 뭐, 평범한 전쟁이었다.


왜 시작되었는지는 아직 어린 소년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수십 명의 장정이 단단히 작정하고 온갖 흉기를 들고 마을을 에워싸니...


'내 삶은 여기서 끝이구나' 하는 게 바로 체감되지 뭔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 잠깐 실례할게.


머릿속에서 울리는 너무나도 가벼운 듯한 목소리.


그러나 그 목소리가 가져온 효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팔이... 멋대로 움직여?'


그 뿐만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 소년은 자기 몸의 통제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다음에 벌어진 일은 놀랍기 그지 없다.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더니, 움집보다 커다란 바위를 들어서는 냅다 던지는 것이 아닌가.


내팽개쳐진 바위에 장정 둘이 납작해졌고, 순식간에 적들의 사기가 꺾이기 시작했다.


그 다음은 그야말로 무쌍난무였다.


장정들 사이로 파고든 소년의 몸뚱아리는 순식간에 다른 사내 하나를 걷어 차서 마을 반대편까지 날려보냈고, 그에게서 빼앗은 창을 마구잡이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기술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단순한 움직임이었지만, 찌르고 빼는 단순한 동작 한 번에 장정 하나가 꿰뚫린다.


그런 동작을 반복하다보니 어느새 적들이 풀이 죽었는지 모조리 도망가는 것이 아닌가.


소년은 그제서야 다시 몸을 제 의지로 움직일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소년을 영웅이라 칭송했지만, 이것은 소년의 힘도, 의지도 아니었다.


그건 도대체 누구였단 말인가?


"...그, 당신은 누구십니까?"


적들을 물리칠 때 까지만 해도 그냥 좋기만 했지만, 세삼 깨닫고보니 지나치게 섬뜩한 일이었다.


어쨌든 제 몸의 통제를 마음대로 빼앗아간 누군가가 있다는 게 아닌가.


그리고 그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대답했다.


-나는 '공산주의'다.


뒤이은, 맥빠지는 발언과 함께.


-이름 좀 잘 지을걸 시발.



* * *


너희들 스즈미야 하루히를 잊은거야...라는 명대사로 유명한 씹덕물보다도 몇 년 전에 유행했던 씹덕물에 그런 대사가 있었지.


세상은 언제나 이럴 리가 없는 일들 뿐이라고.


만약 내가 게임 주인공으로 빙의해서 소설 세계관에 트립할 줄 알았다면 전염병 주식회사를 안 했을태고,


그 이전에 신석기 시대 단편도 읽지 않았을 것이고,


애초에 그딴 게시글이 진짜인 걸 알았으면 댓글도 안 달았겠지.


그런데 이미 그 모든 일이 일어난 후네?


그럼 뭐, 이름이 '공산주의'인 것 정도야 이제 와선 오차범위 아닐까?


...뭐, 현실부정은 이쯤 하고.


"...공산주의?"


아아, 모르는 것인가...


그래, 그냥 계속 몰라라.


그게 차라리 낫겠다.


-뭐, 부르고 싶은 이름으로 불러도 상관 없고.


"아, 네..."


음, 되게 얼빠진 표정이네.


하기사, 뭔지 모를 초월적 현상을 겪고 긴장하고 있었는데, 그 초월적인 존재가 이딴 말투로 말하면 뭐 허탈할 법도 하지.


근데 뭐, 어쩌라고?


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뭐 화타처럼 도끼로 머리를 쪼개고 뇌수술이라도 할래?


-뭐, 일단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겠지만 한 가지 정리하고 가자고. 네 몸을 멋대로 쓴 건 미안하긴 한데 네 목숨을 구하려고 벌인 일이니까 괜찮겠지? 이걸로 집세는 낸 걸로 치자.


"저기, 아까부터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는데요."


-몰라도 상관 없는 이야기야, 일단은.


* * *


뇌신경 기생충인 나의 능력은, 말 그대로 사람의 뇌를 조작하는 것이다.


애초에 모든 인간이 기생충을 신으로 숭배하는 엔딩을 낼 수 있는 시점에서 말 다했지.


그러니까, 사람의 뇌를 조작해서 몸의 통제권을 탈취한다거나, 호르몬 같은 걸 조작해서 근력을 강화하고 고통을 잊게 만든다거나 하는 일 정도는 식은 죽 먹기다.


아, 지금 나는 기생충이니까 식은 죽 먹는 게 거의 불가능한 일인가?


뭐 아무튼.


어떻게 하는 건지는 묻지 마라.


자기가 팔을 어떻게 뻗고 다리를 어떻게 움직이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인간은 별로 없지만 그런 인간들도 걸어다니는 건 대부분 할 수 있다.


정확히 뭐 어떻게 할 수 있는지는 몰라도, '할 수 있다'는 것만 알면 된다.


하여튼, 이런 대단한 정신계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 순식간에 기술 개발딸을 치고 태크를 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과였다면.


...문과는 오늘도 문송하네 젠장.


뭐, 이게 내가 괜히 무게를 잡지 않는 이유였다.


기술 개발딸이라도 제대로 쳐줄 수 있으면 신적인 존재를 자칭해도 될 것 같은데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게 딱히...


아, 있긴 있네.


비록 무단침입자에 가깝긴 해도, 도적들이 쳐들어오는 거 막아줬으면 대충 집세는 낸 거 아닐까?


* * *


한 기생충이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하건 말건, 소년의 혼란은 잠잠해지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커져만 갔다.


그 별천지의 꿈을 꿀 때부터 자신이 뭔가에 씌인 것 같은 느낌은 들긴 했다만, 그게 정말일 줄이야?


게다가 정체조차 모를 저 '공산주의'라는 존재의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아듣기도 어려웠다.


하긴 주술사들도 꽤나 햇갈린다는 게 그런 존재들의 말인데 자기가 알아봤자 뭘 알아듣겠는가.


그렇기에 소년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일단 접어두고, 이 순간 가장 묻고 싶었던 것을 물어보았다.


"혹시, 제가 매일 꿈에서 보던 그 별천지도 '공산주의'님께서 보여주신건가요?"


-응, 그런데?


"그곳은 도대체 어디인지..."


-내 고향이야. 어쩌다 보니 쫓겨났지만.


목소리조차 아닌, 머릿속의 울림이었지만 어딘가 서글픈 것 같았다.


소년은 이 순간 머릿속을 빠르게 정리했다.


공산주의가 누군지, 혹은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자기에게 피해를 끼치진 않을 것이라고.


할 거면 진작에 했겠지.


"그래서... 공산주의? 님은 지금 어디에 계신 거죠? 저한태는 어떻게 말을 걸고 계시구요?"


-일단 말하자면, 나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지. 너한태는 뇌파로 텔레파시... 그러니까 그냥 네 마음속에 직접 말을 걸고 있는거고.


어차피 이 시대에 기생충의 개념을 설명해봤자 알아들을리도 없고, 알아듣는다 해도 그걸 자세히 설명하는 게 공산주의의 확산에 도움이 될리 만무하기에 '공산주의'는 소년의 질문을 대충 얼버무렸다.


이 시점에서 '공산주의'의 본체는 수많은 기생충 개체들 사이에 이루어진 네트워크 연결, 말하자면 '하이브 마인드'였으니 아주 틀린 말도 아니고.


그 순간, 소년의 시야 구석에 갑자기 무언가가 나타났다.


그런데 왠지 낯설지 않은 것이... 그것은 다름 아닌 소년 본인의 모습이 아닌가.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소년의 모습은 안개처럼 흩어지더니, 그 자리에는 소년의 아버지의 모습이 대신 나타났다.


아버지의 모습도 흩어지더니, 그 다음에는 아리따운 여인의 모습으로, 그 다음에는 늙은 족장의 모습으로...


그것은 수없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습을 바꾸어 가고 있었다.


-뭐, 일단 내 진짜 모습은 지금 네가 보기엔 좀 그러니까, 원하는 모습이 있으면 거기에 맞춰줄게.


"...제일 처음이 낫겠네요."


-오, 혹시 나르시스트니? 어, 묻지마. 몰라도 되는 이야기니까.


'데카르트의 악마'라는 개념이 있다.


어떤 강력한 능력을 가진 악마가 자신에게 개입하여 나의 모든 감각기관이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고 있을 경우...


뭐 그렇다던가.


뇌신경 기생충에 감염된 숙주 또한 이와 같다.


모든 감각기관이 기생충에 지배당하기 때문에, 보는 것과 들리는 것은 모두 '공산주의'에 의해 통제당하는 셈.


한 마디로, 환각이었다.


뇌신경 기생충인 공산주의는, 자신의 숙주에게 환각과 환청을 자유자재로 보여줄 능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심리를 읽을 수도 있고, 사고방식을 조작하는 것도 가능하며, 심지어는 그 모든 과정을 스스로의 판단이라고 속일 수까지 있는, 실로 위험천만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존재가 지금 하는 일은...


-모처럼 이야기를 나누게 된 김에 하는 말인데, 고기를 좀 더 자주 먹어주면 안 될까? 품종개량도 안 된 야생 과일들 맛도 이젠 질리는데. 아, 어떻게 과일 맛을 아냐고? 네가 맛 보는 건 나도 맛 볼 수가 있거든.


"저... 이제 그만 좀..."


수다였다.


아닌 척 하고는 있었지만, 강산이 한 번은 변했을 시간동안 타인과 대화를 하지 못했던 '공산주의'는 많이 외로웠던 것이다.


그리고 소년은 수십명의 장정이 쳐들어왔을 때보다 더한 심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떠드는 소리가 멈추지를 않는데 심지어 귀를 막아도 들린다.


내가 도대체 무슨 존재를 깨워버린거지?


말 걸지 말았어야 했나?


* * *


현대와는 달리 죽음이 훨씬 익숙하던 시대.


죽음을 때놓고서 삶을 논할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가던 소년은 뭔가 초월적인 존재가 말을 걸어오자 심히 긴장했다.


그도 그럴게, 전쟁에서 죽을 뻔한게 당장 얼마 전이다.


그런데 초월적인 존재에게 밉보였다가는 내세에서의 삶이 영 좋지 못할 게 아닌가.


그래서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긴장하던 소년이었지만....


그것도 하루이틀이었다.




"하나의 유령이 내 머리속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이봐,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유령이 아니야. 그 비슷한 거긴 한데.


"아, 시끄러우니까 입 좀 다무세요."


-미안하지만 나는 입이 없어서 말이지. 오, 이 구절 괜찮은데? 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나는 떠들어야 한다...


"확 그냥 주술사 할머니한태 찾아갈까보다. 악령 좀 쫓아달라고."


-거, 이미 경험해봐서 알탠데? 너희 주술사가 더 쩔어줄까, 아님 내가 더 쩔어줄까? 그리고 그렇게 배은망덕하기 있기 없기? 너 구해준 사람이 누군데? 아, 사람은 아닌가?


"아, 거 참 알겠다니까요! 그러니까 제발 말 좀 적당히 걸어주세요! 아니면 최소한 마을에선 걸지 마시던가! 계속 혼잣말 하고 다니니까 다들 제가 미친 줄 알잖아요!"


-어? 굳이 입으로 말 할 필요는 없는데? 이미 너와 나는 생각만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거든.


"...그럼 그것부터 설명했어야지!"


-고롬 고것부터 솔묭횄워야지!


소년은 시야 한 구석에서 계속해서 낄낄대는 공산주의를 보고 탄식했다.


더욱 악질적인 것은, 눈을 감는다고 안 보이는 것도 아니라는 것.


눈을 감고 귀를 막아도 계속해서 떠들어대는 걸 보면, 생각보다 훨씬 귀찮은 것이 달라붙은 것 같다...


뭐 그렇긴 해도, 소년은 내심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안 그래도 마을 사람들이 자기를 영웅이라고 추켜세우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던 차였다.


그런데 정말로 뭔가 대단한 존재가 자기한태 계시를 내린 건 아닐까...


하고 스스로도 고민하고 있을 무렵, 당사자와 기도로 상담?한 결과 자기 목숨을 구해준 존재는 꽤나 하찮은 무언가였던 모양이다.


그 능력과는 별개로 성격이.


그런데 처음에 실망하기도 잠시, 소년은 차라리 이게 더 나은 것 같다고 생각을 바꿨다.


정말 대단한 무언가가... 해님일수도 있고, 달님일수도 있고, 아니면 위대하다는 조상일수도 있고... 하여튼 그런 대단하신 분이 자기에게 사명을 내려줬다면 그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 아닌가.


"그런데, 왜 저였죠? 저보다는 제 아버지나, 형이 힘도 세고 머리도 좋을탠데. 아니면 마을의 다른 아무나 저보다 힘이 센 사람을 시키면 되는 것 아니었나요?"


-아 그거? 별 이유 없어. 그냥 그런거야. 그런갑다 해.


봐라, 생각보다 훨씬 맥빠지지 않는가.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왜 저한태만 말을 거시는거에요? 주술사 할머니한태 가보지 않고?"


-거, 이제 와서 말하긴 좀 어색하잖아. 뭐라고 말해? 옛날부터 내가 너희들 안에 살아가고 있었는데 앞으로도 좀 잘 지내보자고?


"...잘은 모르겠지만, 보통 신이 그런 거 하는 분들 아닌가요?"


-내가 살던 세상에선 이런 멋진 말이 있었단다. '알빠노?'


"아. 예..."


* * *


내 룸메이트?를 구해준 것 자체는 분명 호의가 맞았다.


숙주와 운명공동체인 기생충이라 한들, 나는 단수가 아니니까.


한 마디로, 이 마을의 인간 모두에 뇌신경 기생충 개체가 들어 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노예로 전락할지언정 그건 나에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아니, 되려 더 큰 마을에 알까기를 할 기회가 될 지도 몰랐으니.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의 첫 번째는, 침략자들이 정말로 이 마을 사람들을 노예로 끌고 갈지 아님 몰살시키려 할지 확실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동안 몰래 얹혀산 값을 치르기 위해서였다.


어쨌든 죽을 걸 살려줬으니 이제 문제 없겠지?


하여튼, 그 날 이후로 나는 멈춰왔던 확장을 개시했다.


게임 식으로 비유하면 dna 포인트를 찍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뭐 어쨌건, 그동안 내가 양심상 자제했던 것 뿐이지, 확장을 개시하니까 그야말로 순식간이다.


물이며 공기는 물론이고, 각종 곤충에 조류, 포유류 등등...


그냥 전염병 하면 생각나는 모든 감염 경로로 공산주의가 창궐한다.


아마 내가 '죽음'을 맞이하는 조건을 따져보면...


각 기생충 개체 하나 하나가 모조리 다 죽어버리는 게 아닌 이상 불가능할탠데...


이 시점에 백신이 만들어질 리가 없지?


벌써부터 내 불로불사가 보장되었다.


그리고, 현실패치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숙주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얻은 능력이 또 한가지 있다.


내가 '뇌신경 기생충'인 탓인지, '뇌'가 존재하는 생물은 전부 소년을 조종했던 그 때처럼 컨트롤할 수 있게 되었지 뭔가.


즉, 호랑이나 독수리 따위를 자유자재로 부려먹는 게 가능해졌다.


물론 뇌 구조며 신체구조가 인간과는 완전히 달라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지만...


어쨌든 나는 성공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느낀건데...


어, 이 정도면 이제 슬슬 자칭 신 해도 되려나?


각종 가축을 품종개량할 필요도 없이 최면어플 기생충 빔 좀 쏘면 끝나겠는데?



* * *



 "그런데, 전에 마음대로 부르라고 하셨죠?"


 -응, 그랬지?


 "그러면 공산주의님은 너무 기니까, 줄여서 공주님은 어때요?"


 소년은 곧 자신의 발언을 후회했다.


 도대체 '공산주의'는 무슨 뜻이고 '공주'는 또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그걸 들은 머리속 잡귀가 계속해서 웃어대는 게 아닌가.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산주의님을 줄여서 공주님이랰ㅋㅋㅋㅋㅋㅋ 펀치라인좀 친다 얔ㅋㅋㅋㅋㅋㅋ


 "제 머리속에 마구니가 가득하군요..."


 '마구니'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저 잡귀가 써먹던 용례를 보면 아마 이럴 때 쓰는 단어 아닐까?


 어쨌든 공산주의, 줄여서 공주의 모습이 소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뭐지?


 '공주'라는 이름이 마음에 안 들어서 어디로 가버린 걸까?


 그렇다면 어딘가 시원섭섭하다.


 말이 너무 많아서 정신적 피폐함을 안겨주던 잡귀이긴 했어도 나름 생명의 은인 아니던가.


 뭐, 어찌 되었건 이제 머리 아픈 생활도 끝인가... 생각하던 무렵.



 


 -빨갱이 공주님 납신다!


 공산주의, 줄여서 공주가 눈 앞에 다시 나타났다.


 -오, 혹시 막 설레고 두근거리고 그러냐? 속내용이야 어쨌든 겉보기로는 막 SSS급 미소녀일탠데 이런 미소녀 본 적 없지? 하긴 여기 마을에 테레비가 있냐 컴퓨터가 있냐 스마트폰이 있냐... 하다못해 책도 없어서 라노벨도 못 읽겠구만. 마을 하나 단위의 미소녀가 전국구, 세계급 미소녀 이겨 먹겠어?


 "...제발 입 좀, 아니 뭐가 됐든 아무래도 좋으니까 좀 조용히 해주세요 제발."


 솔직히, 조금 두근거려서 분했다.




 * * *




 공산주의님... 줄여서 공주님이 된 나는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도, 소년과 함께 마을로 돌아갔다.


 마냥 옛날 사람들이라고 무시하기에는 은근히 큰 규모의 마을이지만, 그래봤자 이 시대 치고는 크다는 거다.


 인구수는 대충 200명 정도밖에 안된다.


 하여튼, 그 정도 규모의 마을 한복판에서 수상한 사람이 수상한 복장을 입고 있는데 다들 눈치조차 못채고 있다.


 아무리 한밤중이라 한들, 아니 한밤중이기에 더더욱 이런 경계 실패는 질책 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이 건으로 그들을 나무란다면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이겠지.


 아직까진, 내 모습이 이 꼬마한태만 보이거든.


 근데 이제부턴 아니다.


 원래라면 이렇게 대놓고 나타날 생각은 없었는데, 다들 자기가 미친 줄 안다던 꼬맹이의 하소연도 있고, 애초에 니들이 날 마음에 안 들어하면 뭘 어쩌겠냐는 생각도 들고 했거든.


 심호흡하는 흉내로 기분을 낸 나는, 정신파를 쏘았다.


 -빛이 있으라.


 그러자 빛이 있었다.


 "...근데 그거 굳이 해야 하는 말인가요?"


 -어허! 이런 건 다 분위기가 중요한거야 분위기가.


 "아니, 뭐 대단하신 분 취급 받고 싶으면 그에 맞게 행동하시던가... 영험한 분이라기엔 되게 없어 보이는 일만 잔뜩 하시고선 이제와서 뭔..."


 -...시꺼!




 * * *




 늦은 저녁, 아니 심야다.


 전구가 발명되기 이전, 문명 수준이 낮은 시대에 인간의 생활은 일출 전 이른 새벽에 시작해서 일몰 직후에 끝난다.


 21세기의 기준으로는 아주 늦었다고는 할 수 없는 시간대였지만, 지금 시대에선 잠들어서는 안 될 이들만 제외하곤 모두 꿈나라로 가야 할 깊은 밤.


 ....이었어야 했다. 


 어느 순간, 마을 사람들은 일제히 잠에서 깨어났다.


 그 직후에 들려온? '빛이 있으라'는 그 말과 함께, 밤은 낮으로 바뀌었다.


 어느 순간 달의 위치를 대신한 태양의 아래에, 마을 한복판에서 갑자기 정체모를 누군가가 나타났다.



 마치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것만 같은 외모의 소녀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형식의, 그러나 무척 질이 좋아 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다.


 이 기적의 순간을 목도한 마을 사람들은 그만 다들 넋이 나가버렸지 뭔가.


 애니미즘과 샤머니즘, 토테미즘 등의 원시 종교를 믿던 시대다.


 이 광경을 보고서도 눈앞의 존재가 평범한 인간이라 믿을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다들 소녀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기적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공산주의가 SF 영화에서, 서로 다른 종족간에 퍼스트 콘택트를 할 때는 임팩트가 중요하다던 썰을 들었기 때문.


 그래서 공산주의는, 이들 모두가 아마 평생토록 잊지 못할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https://youtu.be/CpKGqNGTGLU




 하늘에서, 테트로미노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온 블럭들은 하나 둘씩 점차 형태를 맞춰 조립되어, 드높은 마천루를 형성한다.


 블럭들이 충분히 쌓였다 싶으면 어느 순간, 블럭 뭉치에선 빛이 나오더니 그것이 익숙한 현대식 건물로 변한다.


 그러니까, 이 광경은 21세기의 현대 도시를 복사, 붙여넣기 한 것과도 같다.


 뭐, 미친놈으로 오해 받은 소년이 좀 불쌍했으니까.


 "...어, 그럼 그게 진짜 있었던 일이었다고?"


 "맙소사... 걔가 미친 게 아니었구나..."


 터무니없는 광경에 모두가 경도되어 있을 무렵.


 누군가가 질문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리고, 공산주의가 대답했다.


 "나는 공산주의야. 줄여서 공주라고 해도 되고."


 그러나 그것은 좀 전과 같은 텔레파시가 아닌 육성이었다.


 숙주의 뇌를 생체 컴퓨터처럼 사용하던 공산주의는, 숙주의 숫자를 더욱 늘린 이후로 깨어 있는 다수의 인간을 상대로도 이와 같은 환각, 환청을 보여주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는 컴퓨터로 활용할 숙주의 뇌가 모자라서 몇 사람의 꿈속에만 나타나는 게 고작이었지만, 작정하고 확장을 개시한 시점에서 그런 단점은 없다.


 아무튼, 공산주의가 말을 이었다.


 "앞으로 이 마을에 눌러 붙을 예정이고."


 * * *


 일찍이 소년이 했던 질문.... 당신은 누구고 어디서 왔냐는 그 질문에 공산주의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https://youtu.be/8vsezgP8rjs





 그러자 하늘에는 어떤 영상이 흐르기 시작한다.


 생전 처음 들어볼 터인 말이지만, 사람들은 어째서인지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하늘에 수놓인 영상이었다.


 인류의 역사를 압축한 내용이건만, 서장의 고대 이집트, 로마, 그리스 같은 문명들의 광경만 해도 이들에게는 지나치게 미래적인 이야기였으니까.


 그나마 거기까지는, 사람들도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고대와 중세의 공방전, 근대의 해상전과 같은 전쟁들, 대항해시대...


 가면 갈수록 영상은 사람들의 이해를 벗어나고 있었다.


 마지막의 우주 정거장 쯤 되면 이미 뭔지도 모르겠고, 하여튼 저 공산주의라는 분이 되게 쩔어주는 곳에서 왔구나 하는 생각 밖에는 남지 않는 것이다.


 "자, 이제 알겠지? 내가 저기서 왔어."


 ...그러자 이 모든 광경을 목도한 누군가가 물었다.


 "당신은 저희를 다스리기 위해 오신겁니까? 마치, 그 뜻이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그러자 공산주의가 다시 대답했다.


 "응? 그럴 리가. 나는 족장이 되려고 온 게 아니거든. 왕이건, 황제건, 대통령이건... 뭐라 부르건 간에 하여튼 그런 건 되고 싶지 않은데. 그건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잖아. 나는 그 누구도 지배하거나 정복하고 싶지 않다고."


 공주님의 저 발언을 들은 소년이 경악했다.


 '그럼 내 머릿속에서 깽판친 건 뭔데!'


 공산주의는 당연히 그 생각을 읽을 수 있었지만, 거기에 대답할 의향이 없었으므로 소년의 투정은 그대로 씹혔다.


 "그리고 그거 봤으면 알 거 아냐? 계속 살 수만 있으면 거기 남아있지, 왜 이런 곳까지 오겠어? 나도 쫓겨난 거야."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다들 벙찌기 시작했다.


 뭐지?


 이거 무슨 전설의 한 장면이 아니었던 거야?


 "...그럼 여긴 왜?"


 "말했잖아. 이사왔다고. 앞으로도 이웃끼리 잘 지내보자고 인사하러 온 거지 뭐. 그럼 이만!"


 ...맥빠지는 발언과 함께 신들의 도시?는 눈 앞에서 와르르 흩어졌고, 해는 다시 저물어 밤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사람들은 고스란히 잠을 설쳐버렸으니 이웃으로 잘 지내보자는 것 치고는 층간소음부터 시작한 셈이었지만.


* * *


무려 신석기 시대부터 공산주의가 창궐하기 시작... 했지만 그건 딱히 이상할 것도 아니지.


애초에 카를 마르크스가 주장한 원시 공산사회부터가 이 무렵의 이야기 아니었나?


그러니까 공산주의를 퍼뜨리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애초에 전 세계는 원시-빨갱이들의 소굴이었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이 원시 빨갱이들의 공주님이 이사를 온 지도 시간이 꽤나 흘렀지만...


이 포스트-공산주의 사회에서, 딱히 문명이 발전하진 않았다.


이유는 터무니 있다.


문과여도 차라리 사학도였으면 모르겠는데, 난 그냥 일문과 학생이다.


진짜 하다못해 국문과만 됐어도 훈민정음이라도 반포했을탠데 그것도 못한다.


이따위니까 내가 신세계의 신 노릇 따위 애저녁에 포기한거지.


하던 게임이 마인크래프트 같은 거였으면 물리법칙 조까고 벌써 산업혁명 돌리고 있겠지만 난 고작 기생충이라고.


아, 물론 최면 기생충 빠와로 나를 영원히 숭배하게 만드는 건 간단하지만, 그건 좀... 디스토피아 아닌가?


뭐, 그렇다고 내가 정말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잉여까진 아니고...


일단 '뇌'가 있는 그 어떤 동물도 마을을 습격하지 못하도록 마인드 컨트롤을 걸어버렸다.


이젠 밤에 파수꾼을 안 세우고 다들 꿈나라로 가버려도 습격 당할 일이 없다.


또, 그냥 밭 위에 씨앗을 뿌려 놓아도 새가 그걸 쪼아먹을 걱정을 안 해도 된다.


곤충을 조종하는 것 까진 무리였으니 아예 방치해도 되는 수준은 아니다만...


뭐, 이 정도만 해도 어디야.


하여튼, 대단한 기술 혁신은 없었지만 마을의 식량 생산량은 꾸준히 늘고 있다.


사회유지비용이 격감하고, 생산력을 전부 활용하는 게 가능해졌으니 말이지.


그리고 이 정도만 되어도 벌어지는 결과물이....


* * *


초기 농경은 사냥이나 수렵채집을 대체할만큼 훌륭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한반도의 신석기 시대 농사라고 해봤자 소규모 화전에 불과하고, 농사는 어디까지나 덤이었다.


뭐, 이런 판이다보니 인간이 왜 농사를 시작했냐에 대한 여러가지 학설들이 오갔고, 그 중엔 괴베틀리 테페처럼, '신앙' 때문에 많은 인구가 모여서 그렇다는 설도 있었는데...


적어도 이 마을에선 그게 진실이었다.


야생동물이 밭을 습격하지 않는다는 점 만으로도 이미 농업 생산량은 확 늘어났으니까.


마을의 공터 위에 쌓인 제단인지, 연단인지... 하여튼 목재 구조물 위에서 주술사 할머니가 당당하게 연설을 시작했다.


특이한 것은 그 복장이었는데, 낮은 기술력으로라도 어떻게든 '공주님'의 그 복장을 흉내낸 복장.


품질이야 당연히 조악하지만, 디자인 자체는 잘 봐주면 정복이라고 쳐 줄수는 있었다.


지금 이 복장이 바로 <<소비에트>>라 불리우는 공산주의 사제들...의 예복이다.



"여러분, 신이 무엇입니까? 언제나 그리운 이름입니다.


신이라 함은 바로 공산주의! 바로 우리들의 공주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와아아!!!! 공산주의 만세!!!"


"공주님 만세! 그분은 신이야!!!"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말투고, 어휘고 이 시대에 저런 게 있으면 안 되는 것들이 한가득인 난장판.


원흉이야 뻔하다.


"동무들, 기뻐하십시오! 공주님께서 오늘자 <<프라우다>>에서 교시하신 바와도 같이, 우리 <<코뮌>>의 농업생산력이 140%나 향상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투철한 혁명정신으로 마치 천리를 달리는 말과도 같이 로력을..."


<<코뮌(commune)>>의 어원은 '공동 생활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의 작은 모임'을 뜻하는 중세 라틴어 communia다.


그래서 공주님은 이 마을을 '평양 코뮌'이라 이름 지었고...


에라이, 따져서 뭐하나.


이쯤 되면 그냥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는 편이 낫다.




* * *



'프라우다'란 빨갱이 공주님께서 밤마다 코뮌 사람들의 꿈에서 하는 방송...의 이름이다.


이제 사람들이 깨어있을 때도 환각과 환청을 보여줄 수는 있었지만, 꿈을 조작하는 게 더 쉽기도 하고 사람들이 깨어있을 때 하면 시간도 빼앗는 것 같고 해서 그렇다.


이 방송은 텔레비전 프로그램과도 같은데, 전파가 아니라 정신파를 쓴다는 점이 다르다.


여기서 코뮌의 거주자들... 그러니까 시청자들은 그날 밤 '프라우다'를 시청할 것인가의 여부를 소비에트에 제출한다.


물론 신이 직접 신탁(?)을 내리겠다는데 안 듣겠다고 하면 눈치도 보이고, 애초에 더럽게 노잼인 고대 유희보다는 빨갱이 공주님의 선전선동 방송이 더 재밌고 해서 시청률은 언제나 140%.


당연하지만 어문계열주제에 통계학을 제대로 배웠을리가 없다보니, 공주님은 그냥 아무 곳에나 140이라는 숫자를 가져다 붙이고는 했다.


농업생산률이 140% 향상되었다?


작년보다 생산량이 늘어난 것 같기는 한데 전년도 대비 얼마나 늘었는지는 모르겠으니 그냥 140%라고 치기로 한거다.


안타깝게도, 이 모든 난장판은 '공산주의님을 줄여서 공주님'이라고 했던 소년의 드립에 빵터진 '공산주의'가 컨셉에 잡아먹혀서 벌어진 일이다.


어차피 소년은 공산주의도 공주도 무슨 뜻인지 몰랐으니 상관 없겠지만.



https://www.youtube.com/watch?v=QfWnvlX0GOs





"Yesterday, all my troubles seemed so far away~"


하여튼, 오늘자 프라우다 방송에서 공주님은 콘서트를 열었다.


<<프라우다>>라는 이름값을 못 하게도, 대부분의 방송 내용은 선동이 아니라 그냥 재미를 위한 문화 계열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이유는 그냥 공주님께서 선동에 재능이 없어서 그렇다.


그리고 선동할 바에야 정신파 한 번 쏘면 끝나는 일인데 굳이 할 필요도 없고...


해서 뭐 특별한 일이 없으면 그냥 자기가 좋아했던 컨텐츠를 '공산주의자(...)'들과 공유하는 것이다.


공주는 컨텐츠를 선택하는 것에 특별한 기준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어느 때는 비틀즈, 롤링 스톤즈, 밥 딜런, 레드 제플린, 퀸... 등등 자기가 좋아하던 팝송들을 틀기도 하고...


그냥 전래동화를 낭독하기도 하고...


한창 흥미롭게 추리 영상극을 감상하던 사람들한태 '셜록 홈즈 여기서 죽음 ㅅㄱ'하고 스포일러를 때리기도 하고...


뭐 그런 식이었다.


"줄 수 있는게~ 이 노래밖에 없다~ 아니, 진짜로... 그러니까 나한태 죽은 사람 살려달라고 빌거나 비를 내려 달라고 기우제 지내거나 하지는 마라... 기도해봤자 그런 거 못해..."


"어? 사냥을 나가서 다쳤다고? 어디 절단된 건 아니라서 다행이네. 자, 인체의 자연치유력을 향상시켜 놓았으니까 오늘 밤에는 다시 나을거야. 그럼 이만!"


그러니까...


근엄하고 군림하는 신이라기 보다는 그냥 여러분의 친절한 이웃인?


그런 빨갱이 공주님 되시겠다.


* * *


딱히 인간을 멸망시키거나 지배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대로 인류 문명을 내버려 두었다가 뇌신경 기생충의 존재가 발각 당하면 곤란해지는데 어쩌지?


-> 아! 모두의 아이돌 루트를 타면 내 정체를 알아도 공생해주지 않을까?


-> (지금 여기)


공산주의님, 줄여서 공주님의 이후 활약상:


소년과 대화를 하던 중 자기는 아버지처럼 위대한 족장도, 할머니처럼 위대한 주술사도 될 수 없을 것 같다-라거나


사실은 사냥 같은 건 별로 안 좋아한다. 나는 피를 보는 게 무섭고 다른 누군가를 죽이는 것도 싫다-


같은 고민을 느끼고는, 결국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소통할 수 없기에 이런 고민과 불행을 만든다...는 결론을 내림.


그리하여 인류보완계획을 실시하니, 자신을 매개로 하여, 공산주의자(...)들은 서로간에 어떠한 거짓도 섞이지 않고,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뉴타입, 내지는 칼라 능력을 얻게 됨.


자신을 따르는 신도(숙주) 숫자가 늘어나자 이 모든 사람들이 서로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도 소통할 수 있도록, 사이오닉 네트워크를 형성.


원시고대 디시인사이드 내지는 아카라이브로, 신석기 시대부터 내 간석기가 니 것보다 쩔다는 키배가 브리튼 섬 원주민과 일본 열도 원주민 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게 됨.


공산주의님의 능력 덕에 언어의 장벽이 사라졌으므로, 외국인과는 정신파로 소통함.


결과적으로 2024년이 되어서도 산업혁명은 일어나지 않음.


왜냐하면 서로를 생각과 감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된 사람들이 하루 18시간 노동 뭐 이런 짓을 시키지 않기 때문.


그렇지만 지구상의 모든 인류는 진정한 평등을 누리며, 그 누구도 다른 누군가를 강압적으로 지배하거나 착취하지 못하게 되었음.


정신-네트워크의 세계에서 거짓은 통하지 않으므로, 위정자들은 민중을 기만하지 못하니까, 전쟁은 영원히 사라짐. 


인류는 물질세계가 아닌 정신세계의 발전에 집중하며, 삼척동자도 소크라테스 수준의 철학을 논할 수 있는 인문학 종족 테크를 탐.


공산주의는 뭐, 결과적으로 다들 행복한 것 같으니 차라리 이게 더 나은 게 아닐까 하는 소감을 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