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y44UrP2PFII&t=19s




쏴아-


비가, 기사의 옷 안으로 스며들어갔다. 그 비는 이윽고 기사의 온 몸에 둘러진 붕대에서 피를 머금고는, 다시 바닥으로 빨려들어갔다. 이곳까지 억지로 몸을 이끈 탓에 상처가 벌어졌는지, 옷 사이사이로 흘러나오는 빗물은 점점 더 짙은 붉은색으로 변해갔지만, 기사는 그 아름다운 얼굴과 하얀 피부와 대비되는 시체처럼 텅 빈 눈으로 숲 한가운데의 자그마한 오두막의 문을 바라보며 마치 동상처럼 굳어버린 채 서 있었다.


"......"


"하웁...마크...읏..."


"하아...소피아..."


불빛이 새어나오는 오두막의 문 사이로, 젊은 남녀의 열락의 소리도 같이 들려왔다. 기사는 본래 이러한 상황이라면 남사스럽다며 붉어진 고개를 돌리며 자리를 피했을 테지만...지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그야, 지금 저 안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는 분명 그녀의 연인인 마크의 목소리였으니.


투둑. 툭.


삐이-하는 소리가 귓가에 울리고, 피부엔 어느새 소름이 돋았지만...기사는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따금 손가락이 조금씩 움찔거렸지만...차마 문을 열고 들어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나 없다고 바람 피우기만 해봐, 그냥 확.'


그녀 자신이 원정을 떠날 때마다 농담삼아 자주 건넨 말이었는데, 정작 진짜로 일이 벌어지니 아무것도 못 하고 멍하니 구경 아닌 구경밖에 못 하는 꼴이 퍽 우습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세상을 구하기 위한 전장에서 괴물에게 살이 물어뜯겨도, 흑마법사의 저주에 몸이 잠식되어 끔찍한 고통을 겪었을 때도, 적에게 지레 겁을 먹고 기사단을 암살하기 위해 독을 탄 음식을 먹어 사경을 헤멨을 때도, 이렇게 무기력하면서도 끔찍한 기분은 느껴본 적 없었는데.


기나긴 남녀의 정사가 끝나고, 마침내 오두막의 문이 열렸을 때, 마크와 소피아는 비명을 질렀다. 기사는 한참 동안을 부상당한 몸으로 서 있었던 탓인지,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고 눈은 소름끼칠 정도로 죽어있었다.


"...브리지트."


뭐랄까.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 많았었던 것 같은데.


"...왜?"


딱딱하게 굳은 입을 간신히 열어, 한 마디의 물음을 꺼낼 수 있었다. 그녀는 그리고는, 마크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외도 현장을 딱 걸린 너는, 어떻게 반응할까. 나에게 무릎을 꿇고 싹싹 빌까? 아니면 네가 날 내버려둔 탓이라고, 뻔뻔하게 나올까?


"브리지트."


"...그래."


"우리, 헤어지자."


"......"


그는, 그저 담담한 이별 통보를 건넸다. 그리고 브리지트에게는 차마 견딜 수 없을 만큼 뻔뻔한 그 선언에,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가슴을 시뻘겋게 달구는 분노의 불꽃이 잠시나마 그녀의 눈에 생기를 되찾아주었다.


"난, 그딴 걸 물어본 게 아니야. 왜...대체 왜, 이런 개 같은 짓을 저질렀냐고. 내가 뭐가 부족해서? 내가 주는 생활비가 부족했니? 내가 저 여자보다 외모가 부족해? 내 성격이 그리도 견딜 수 없을만큼 악랄했어?"


그건, 객관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세계를 덮친 재앙에 맞서는 광명 기사단의 단장, 브리지트 아델하이트는 눈앞의 마크의 소꿉친구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했다. 아름다운 푸른 눈과 반짝이는 은발, 이름만 대면 왕국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드높은 명예, 언제나 공명정대하고 적과 당당히 맞서는 올곧은 성품, 그리고 사치를 모르는 탓에 자연스레 쌓인 부 까지도.


브리지트는, 그의 외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번 원정에 나서기 전에 우리가 싸웠던 것, 기억 나?"


"...그 일은, 분명히 너의 잘못이었어."


그녀가 이번 원정을 나서기 전, 그녀와 마크는 크게 다투었었다.


"내가, 군종 치료사들은 절대로 안 된다고 말했어. 그것 말고는 내 돈을 전부 털어서라도 가장 비싼 의원이든, 영약이든 네가 원하는대로 구하라고 내 개인 재산 전부도 너에게 줬어. 그런데도, 넌. 약속을 어겼어."


"루이스, 죽었어. 일주일 전에."


루이스는...그의 남동생이었다. 이 세상에 하나 남은 마크의 가족. 그녀가 떠나기 며칠 전 루이스는 지병이 급속도로 악화되었고...오직 재앙과의 전투에서 부상당한 이들만을 위한 군종 치료사들을 제외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할 수 있도록 자금과 정보를 아끼지 않은 그녀였지만...마크는 결국, 그의 소꿉친구와 함께 군종 치료사 하나를 뇌물로 수수하여 루이스를 치료했었다.


"...그건...미안해."


"그래도, 소피아가 마지막에 그 치료사를 뇌물로 꼬드겨서 치료를 받은 덕분에 잠시 작별 인사는 할 수 있었어."


그리 말하며 감사와 애정이 듬뿍 담긴 눈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브리지트는 그녀 내부에 담긴 오러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휘몰아치는 걸 느꼈다.


쩌적.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오러가 기어이 몸 밖으로 빠져나오기 시작하며, 오두막의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네가, 그 썩어빠진 놈을 중간에 데려갔기 때문에 17살짜리 젊은 병사가 치료조차 못 받고 죽었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구하겠다며 창을 들고 용맹하게 괴물과 맞선 용사가 어머니 품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었다고."


"루이스는, 고작 14살이었어. 그리고 소피아가 아니었다면, 그 병사와 똑같이 고통스럽게 죽었겠지. 내 품에서. 소피아는, 목숨을 걸고 불법을 저질러서라도 내 가족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거야."


"알아! 누가 모르는 줄 알아?! 그러니까 내가 해줄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줬잖아. 내가 너만을 위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줄 알아...? 전장에 있으면, 매일같이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게 비극이야. 매일마다 누구의 아들, 누구의 딸, 남편, 아내, 형, 누나, 동생, 친구, 연인이 죽어. 유족 하나하나 전부, 내가 전사자의 유품을 전달할 때마다 무너져내려. 그 목숨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귀한데,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갈아넣는 내 자신이 혐오스러울 정도로. 그런데, 그 모든 걸 나한테 들었던 네가 어떻게...!"


"나는, 그래서 널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어."


"뭐?"


"알 게 뭐야, 다른 사람 따위. 나한텐, 루이스가 이름도 모를 병사 따위보다 훨씬 소중해. 모르는 사람 백 명, 아니, 천 명의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내 동생만을 되살릴 수 있다면 그럴 거야. 도대체 아무 관계도 없는 타인을 왜 그렇게까지 소중히 여기는 거야?"


브리지트는, 충격받은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평소에 그녀에게 애정과 존경을 보여주었던 그의 얼굴은...이제, 짜증과 원망으로 일그러졌다.


"난, 내가 소중한 것만 지키면 돼. 세상이 망하든 말든, 어딘가의 누군가가 괴물한테 잡아먹히든 말든, 신경 안 써. 신경 쓰고 싶지 않아. 알아. 이런 내가 쓰레기지. 세상 모든 걸 구하려는 너는 분명 불륜이나 저지르는 나나 소피아 따위보다 훨씬 위대한, 마치 저 하늘의 태양같은 사람이야."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소피아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소피아가 그러더라. 자기는, 태양은 못 되어도 나만을 위한 모닥불 정도는 되어줄 수 있다고. 그러니까, 영원히 닿지 못할 태양이 아닌 언제까지나 내 곁에서, 나만을 위해서 온기를 베풀 자기에게 오라고."


"그래서, 선택했을 뿐이야."


"...내가, 널 소홀하게 대해서?"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넌 네가 가능한 선에서 내게 충실했지. 알아. 네 주변에 나보다 잘난 남자가 산처럼 쌓였어도 눈길 한 번도 안 줬다는 것도. 다만, 나는...그것조차도 부족했을 뿐이야. 나는...나만을 위해 줄 사람을 원해. 브리지트 넌...날 위해서, 세상을 외면할 수 있어? 너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구원을 바라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나만을 위할 수 있겠어? 전장에서 죽어가는 모든 이들을 등지고, 나 하나를 구하러 달려올 수 있어?"


"......"


"그럴 순 없지?"


그는 안타깝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소피아의 손을 붙잡고 그녀를 지나치기 시작했다. 브리지트는 붙잡으려는 듯 팔을 약간 뻗었다가, 이내 힘없이 아래로 늘어뜨렸다.


"그래서, 우리는 맺어질 수 없는 거야. 안녕. 부디...너의 그 이상을 이해해 줄 사람을 만나길 바라. 그리고...미안."


두 남녀가 떠나간 뒤...안 그래도 오래되었던 오두막은 그녀의 오러에 금까지 가자 더는 버틸 수 없었는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한 때는 그녀와 마크의 밀회 장소였던 오두막의 잔해를 천천히 걸어가던 브리지트는, 조그만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어느 화창한 날, 그와 루이스를 그녀가 직접 찍어준 사진이었다. 사진 뒷편에는, 그녀 자신의 손글씨가 적혀 있었다.


'생일 축하해 마크. 너의 미래가 이 햇빛만큼이나 찬란하길.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브리지트가-'


"푸흐...아하하하...하하...쿨럭! 쿨럭...커헉..."


허탈한 자조의 웃음을 흘리던 그녀의 입에서, 거무죽죽한 피가 토해져 글씨를 가렸다. 무릎에 힘이 풀려 쓰러진 그녀는 피를 닦아내며, 쓰게 웃었다. 개선 장군인 그녀가 축하연 따위도 내팽개치고 냅다 이곳으로 달려온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길어야, 일 년 정도입니다.'


최후의 격전에서, 희생을 최소화 하기 위해 스스로의 생명조차 불살랐던 그녀는 이제 더는 남은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렇기에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기사단장에서 은퇴하여, 마크에게 프러포즈할 생각이었는데.


"...하핫, 망상도 적당히 할 걸 그랬나 봐...콜록, 콜록."


주머니에서 조그만 보석함을 꺼낸 그녀는, 안에 꽂혀진 아름다운 한 쌍의 반지를 내던지려...했으나, 한계에 달한 몸은 그조차도 따라주지 않았다. 어정쩡하게 앞으로 엎어져버린 그녀는, 바닥에 나뒹구는 반지를 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마지막은...콜록...덤덤하게...떠나고...커흑...싶었는데...으...으윽....흐으윽..."


결국 끝에 가서야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의 삶을 한탄하던 위대한 기사는, 세상을 구했으나 자기 자신은 구하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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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설문을 돌렸던 모두를 위하는 초인 vs 나만을 위하는 범인 주제에서 영감을 얻은 스토리임. 브리지트 입장에서는 천하의 개썅년놈들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뺴박 NTR물이지만...마크나 소피아 입장에선 세상 구한다고 정작 연인은 못 구해주는 사람 대신에 서로만을 위해 줄 사랑을 찾은 순?애라고 볼 수도 있지 않나.


응? 마지막에 눈을 떴다는 건 어떻게 된 거냐고?


몰?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