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 위치한 한 병설유치원.


햇살이 내리쬐는 운동장에 한 여아가 멍하니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한겨울의 한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아서 볕을 쬐는것만으론 추울법도 하건만, 여아는 개의치 않고 멍하니 서서 하늘로 손을 뻗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작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전부 그러쥐기라도 하려는 듯이, 까치발까지 서서 있는 힘껏 손바닥을 위로 뻗어올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여아 본인은 적어도 자신의 행동이 '손으로 태양을 그러쥘 수 있을거 같아서'가 아니라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단지 그렇게 하고 있으면, 생각나지 않는 무엇인가가 생각날 것 같아서 막연하고 그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무엇을 생각해낸단 말인가?


살아온 햇수라고 해봐야 고작 한 자릿수에 불과한 작은 핏덩이의 삶에, 그렇게까지 필사적으로 떠올려야 할만한 우여곡절이 얼마나, 아니 있기나 하겠는가?


그럼에도 여아는 머릿속에 낀 뿌연 안개 너머, 어렴풋이 떠오른 형체없는 삶의 일부를 그러쥐기 위해, 계속해서 저 하늘 너머에 있을 막연한 기억에 손을 뻗고 있었다.



여아의 이름은 '한 서린'.


그녀가 속한 한빛유치원의 유명한 문제아 중 하나이다.


문제아라고는 해도 평상시에는 멍하니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을 뿐인, 그저 원아들 사이에서 겉도는 것만이 유일한 걱정거리인 것 처럼 '보이는' 조용한 부류의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썽쟁이의 표본이라고 할만한 산만하고 시끌벅적한 말썽을 일으키는 일은 없었지만, 그래서 죄질은 더 나빴다.


평소에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멍하니 있거나, 참선이라도 하듯 돌부처처럼 벽을 보고 앉아있는게 고작인 주제에, 


잠시라도 눈을 떼고 있으면 그네의 꼭대기나, 가로등에(가로수가 아니라 가로등이다!) 올라가 있다던가, 


교사 몰래 지네나 거미같은 위험한 독충들에, 심지어 작은 뱀까지 잡아다가 모아서 키우고 있다던가,


놀이터 뒷편의 응달에서 퍼온 진흙묻은 이끼더미를 그 밖의 출처를 알 수 없는 물질(주로 들풀)과 섞어서 먹으려 한다던가, 


조금이라도 담임교사의 주의가 흐트러지면 그런 사고들을 벌이곤 했다.


그래서 그 여아는 그런 곡절로, 하루종일 산만한 원아들 사이에서 시달리는 교사들의 지친 마음에 한층 더 깊은 피로감을 선사하고는 했다.


그러니 서린이 하늘을 보며 멍하니 서 있는 날이라고 한다면, 그나마 교사들에게 있어서는 무탈한 편인 날이 될 터이었다.


그랬어야 했다.



발단은 정말 사소한 계기였다.


유치원 운동장은 천난만한 아이들의 영역이라곤 해도, 각 공간마다 점유하고 있는 정해진 주인이 있다.


적어도 이곳, 한빛유치원에선 그런 법칙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딱히 명시된 규칙이 있는건 아니었기에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무림처럼 즉각적인 응징이 있는것은 아니었지만, 


서린이라는 여아와 같은 '이레귤러'의 존재는 사소하게는 소심한 불편함을 유발하거나, 어떤 때는 큰 싸움까지 발전하기 마련이다.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운동장 한 가운데 우뚝 서서, 저도 모르는 새 남아들이 공을 차고 노는 영역 사이로 들어가고만 서린은, 


그만 공에 정신이 팔린 채 뛰어다니던 한 남아와 부딛히고 말았다.



"으긱!?"



누가봐도 활달한 말썽꾸러기에 가까운 그 남아는, 그 분위기에 걸맞는 괴상한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고, 엄한데 정신이 팔려있던 서린 또한 남아에게 밀려 균형을 잃으며 뒤로 쓰러졌다.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지만 서린은 순간적으로 '이런 몸으로는 이렇게 넘어지면 크게 다칠텐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동시에 자신이 생각한 '이런 몸'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런 잡다한 생각보다도 몸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머리가 기억하는, 경험이 만들어낸 반응이 몸의 위기에 반응해 튀어나왔다.


서린은 반사적으로 몸을 둥글게 만 채, 양 팔로 지면을 쳐올렸다.


그녀는 어째선지 알고있는, 적어도 확실하게 알고있는게 확실한 이 동작이, 몸에는 숙달되지 않아서 어딘가 엉성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나름 멋지게 보일 정도로 깔끔하게 들어간 낙법이었다.


넘어지는 충격을 몸으로 흘려보낸 서린은, 이 상황을 수 없이 겪어본 것 같은 이상한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이 다음에 해야 할 일도 알고 있었다.


한 번 넘어진 뒤에는, 누군가가 무슨 수를 쓰기 전에 다시 일어나 대비를 해야 한다는 것.


누군가란 대체 누구며, 그 누군가가 자신에게 쓸 수란 무엇인지는 제쳐두더라도, 이 기묘한 감각은 탐구하면 할 수록, 조금씩 그녀의 머리에 깊숙하게 낀 미혹의 안개를 조금씩 걷어내는데 도움을 주고 있었다.


서린은 낙법의 반동을 이용해 용수철처럼 다시 지면에 똑바로 섰다.



"에윽!?"



그와 동시에 아픈 데를 슥슥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남아는 용수철처럼 튕겨오른 서린의 몸에, 마치 무거운 돌 벽에 부딛힌 양 튕기듯이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그렇지만 미지의 감각에 정신이 팔린 서린은, 그녀의 작은 몸을 생각했을때 그 충돌이 비교적 강한 충격이었음에도 그것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우이씨……. 야!"



남아는 공놀이를 방해하고, 거기에 자신을 (비록 고의는 아닐지라도)밀쳐내고 사과는 커녕 신경도 쓰지 않는 서린에게 화가 잔뜩 나 있었다.


남아는 있는 힘껏 서린을 밀쳤다.


자신만의 탐구에 정신이 팔려있던 서린은, 자신을 향해 가해진 갑작스러운 힘에 밀려, 그대로 뒤로 몇 걸음 밀려났다.


그와 동시에 머나먼 저 편에 가있던 서린의 정신이 현실로 돌아왔다.


다만 그것은 서린의 눈 앞에 있는 자신을 향하고 있는 명백한 적의 때문은 아니었다.


자신을 향해 가해진 적대적인 힘, 그 너머에 그녀가 이제껏 탐구하던 감각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서린이 이번 생애 처음으로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순간이었을지도 몰랐다.


서린은 뒤로 밀려났음에도 조금의 휘청임도 없이 균형을 되찾았고, 빠른 걸음으로 남아에게 다가갔다.



"야, 뭐……――"



서린은 여전히 자세한 것은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감각은 작금의 '위협'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속삭이고 있었다.


'받은 것은 그대로 돌려줘라.'


서린은 오른 손의 손바닥을 곧게 펴서 전신의 체중을 실어 남아의 가슴께로 내질렀다.


그녀에게 있어 생애 처음으로 저지르는 타인에 대한 폭력이었다.


남아는 서린이 내지른 무자비한 장법에 지면에서 조금 뜨다시피해서 등 뒤로 나가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무자비한 폭력의 손길을 내지르는 그녀의 두 눈에는, 분노는 커녕 어떠한 감정도 실려있지 않았다.


단지 당했으니까 돌려준다, 하던대로 행동한다.


그런 느낌이었다.


대신 힘과 힘의 격돌, 자신을 향하고 있는 명백한 적의에서 무언가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미지에 대한 탐구, 


혹은 잃어버렸을지도 모르는 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이 가득 차올랐다.


동시에 자신의 몸이 발경에 충분히 준비되어있지 않으며, 동작에 졸력이 가득하다고 느껴져서 조금 초조해졌다.


곧, 밀려나 넘어졌던 남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처음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하면, 자신이 찾던 답이 보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녀의 기대감은 볼품없는 울음소리와 함께 짜게 식어버리고 말았다.



"으……. 훌쩍. 으, 으에에에엥……."



이 나잇대에서 행해졌다곤 믿을 수 없이 불합리한 수준의 폭력에 겁을 먹은건지, 아니면 그저 억울했던건지는 몰라도, 남아는 전의를 잃고 그대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동시에 이상한 낌새를 감지한 교사가 헐레벌떡 운동장으로 뛰어나왔다.


서린은 그것으로 이 깨달음의 순간이 완전히 끝났음을 직감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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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해서 싸우면 안되잖니. 먼저 위험하니까 저리 가, 라고 하는게 맞지 않니?


서린이, 너도 마찬가지야. 


아무리 공상에 빠져있다고 해도 공놀이 하는데 가서 서 있으면 위험하잖니?


……저기, 서린아? 선생님 말 듣고 있니?"



그 물음을 마지막으로 햇님반 담임교사가 입을 다물자, 창밖으로 석양을 받아 붉그스름하게 빛나고 있는 교무실에 침묵이 깔렸다.


그제서야 계속해서 손바닥을 허공에 밀어내면서, 자신이 방금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나 곱씹어보던 서린의 정신이 돌아왔다.


서린의 눈이 자신을 향하고 있는걸 확인한 담임교사가 재차 물었다.



"……듣고 있니?"


"아니요."



서린은 어떤 미안한 기색도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그와 동시에 억울함으로 잔뜩 찡그린 남아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비어져나왔다.


담임교사는 한숨을 내쉬면서 머리를 싸맸다.


이제는 아무래도 좋으니 표면상으로나마 해결하고 끝냈으면 좋겠다.


빨리 얘네 부모가 와서 데려갔으면 좋겠다.


이제 그만 퇴근하고 싶다.


아마 그런 생각으로 가득한게 분명했다.


담임교사는 자신의 마음이 얼굴 표면 위로 드러나지 않게 애쓰며, 다시 한번 참을성있게 서린에게 다그치듯 말했다.



"서린아, 네가 친구를 밀어서 다쳤잖니. 그래놓고 사과 한 마디 없으면 안되잖니?"



담임은 주변에 있던 원아들의 증언을 통해 대략적인 사건은 파악했지만, 인과관계야 어찌되었건 결과로만 따지면 그랬다.


그녀는 빠른 해결을 위해서는 어찌 되었건 한 쪽의 편을 들어서 사과를 받아내고 중재하는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담임교사는 그간의 경험을 통해 체득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경우에는 상처가 큰 쪽의 편을 들어주는게 원만한 합의에 이르는 지름길이었다.


담임교사의 말에 편승하듯, 남아는 울먹이는 얼굴로 보란듯이 반창코로 덮인 상처를 쓸어내렸다.


서린은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은 공허한 눈으로 울상을 짓고있는 남아를 응시했다.


마치 눈 앞의 존재들이 대등한 입장에서 관계하기엔 너무나도 하찮은 미물로 보이는듯이, 


눈 앞에 있는 살아 숨쉬며 울고있는 사람보다, 선생님에게 붙들려서 귀찮은 설교를 들어야 하는 상황만이 눈에 들어오는 듯 했다.


서린은 이 미물은 왜 이리도 격하게 감정을 내비치고 있느냐 하는 눈빛으로 잠시 남아를 바라보다가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미안해."



조금의 감정도, 성의도, 느껴지지 않는 공허한 사과였지만, 적어도 그 대상이 사과를 다그치고 있는 선생님이 아니라 사건 당사자라는 점에서, 


담임교사는 이 정도면 이 나이대 수준에서는 합격점이라고 판단했다.



"자, 서린이도 사과 했으니까 우리 ○현이도 사과해야지?"



이제는 왜 사과를 해야하는지 인지시키는건 아무래도 좋고, 그저 오전부터 이어진 이 지긋지긋한 악연을 끝내고 싶을 뿐인 담임은 곧바로 화살을 남아에게로 돌렸다.


한껏 기분좋게 놀다가 밀쳐지고, 울고, 망신당하고, 불려가서 혼나고, 지칠대로 지친 남아는, 이제는 아무래도 좋고 집에 가고싶다는 마음만큼은 담임과 이해가 일치했다.


남아는 있는 힘껏 입술을 일그러트리며, 애써 사과의 말을 입에 담았다.



"나도 미…안……."



담임은 남아의 입에서 '미……미……미친놈아 니가 먼저 잘못했잖아!'가 나오지 않았다는데 안심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담임은 자신이 어린 시절 겪었던 불합리한 중재를 똑같이 되풀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자괴감에 빠지게 되었지만, 당장의 일은 해결되었지 않은가.


담임은 무너지듯 의자에 몸을 기대면서 얼굴을 쓸어내리고는, 두 아이들에게 가라고 손을 휘적거렸다.


교무실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를 들으면서, 오늘 하루도 무사히 끝났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담임은 그 상태로 잠시 정신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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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몇 분 정도 의식을 잃고 있었던 담임은 코 앞의 인기척에 정신을 차렸다.


서린이였다.


서린이는 아까 불려온 그대로 훈계가 끝나자마자 교무실을 나서는 대신, 그 자리에 그대로 다시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버린 듯 했다.


그녀는 처음 불려왔을때 처럼 손바닥을 앞으로 내지르는 동작에 매료되어 있었다.


완전히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서린이의 동작은, 동작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마치 권법이라도 단련하듯이 동작이 더욱 커지고, 부드럽게 너울거리며, 또 강맹하게 변해갔다.


담임은 그렇게까지 자신만의 세계에 빠질 수 있는 서린이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헤……. 서린이 너, 무술이라도 하려는거니?"



무술.


무술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인지는 당장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 단어는 늘상 꿈 속에 있는듯한 서린의 수면처럼 잔잔한 마음에 커다란 너울을 만들기 시작했다.


서린의 끊임없이 장을 밀어내던 팔이 드디어 멈췄다.


그녀는 무술이 무엇인지, 자신히 하고 있는게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것이 '무술'이라는 것 만큼은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 반응에 담임의 피로로 흐릿해졌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왔다.


어쩌면 자신의 취미 중 하나가, 이 문제아를 돌보는데 있어서 실마리가 될 지도 모른다는 감이 왔기 때문이었다.


아ㅋㅋㅋㅋㅋㅋㅋ취미 애기가 일하는데 도움이 된다니 절대 못참지ㅋㅋㅋㅋㅋㅋㅋㅋ



"서린이 혹시 '무협'이라고 알아?"



그렇지만 '무협'이란 단어는 그다지 서린에게 있어서 뭔가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무술'이라던가 '의협'이란 말은 몰라도, '무협'이라는 말은 그렇게 떠올릴만한 무엇인가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서린은 고개를 가로저었고, 담임의 얼굴에는 실망감과 당혹감, 그리고 부끄러움이 한데 섞여서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렇지만 곧 서린의 마음속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의협'이란 무엇인가?


얼마 전, 그렇지만 아득히 먼 기억임이 분명한 기억이 서린이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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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몸에 상처가 가득한 엉망인 남자가, 피투성이가 되어서 입으로 핏물을 뿜고 있는 남자를 안고 있었다.



'장 형, 어째서 나를 감싼 것이오?'


'내가 그대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던진 까닭은 단지 큰 일을 도모하기 위함 뿐이 아니요, 


그대가 우리 문이 위기에 있을때마다 앞장서서 우리를 도왔기에 지금의 큰 일을 도모할 수 있었던 까닭이라, 


그대의 도움의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으매, 비록 지금 내가 마도에 몸을 담고 있다고는 하나, 그 은의에 보답할 길을 늘 찾고 있었고, 방법이 이것 뿐이라 어쩔 수 없었소.


선도(仙道)의 달콤한 꾀임에 빠져 헛된 꿈을 꾸었다고 하나, 그대 덕분에 의협의 마음 만큼은 늘 잊지 않을 수 있었으니 참 다행이라 생각하오. 


이제서라도 은의를 기억하고 사람 된 도리를 다하고 죽게되었으니, 마지막까지 그대에게는 도움만을 받게 되었구려.'


'장 형!'



죽어가는 와중에 있는 힘을 다해 애써서 긴 말을 내뱉은 피투성이 남자는 말이 끝나자마자 고꾸라졌고, 상처입은 남자는 그를 안고 크게 울부짖었다.



'정말 어리석구나.'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눈앞의 남자들을 조롱하는 목소리.


이것은 서린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었다.


기억 속 서린은 손에 든 바늘을 손가락으로 튕기면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선도(仙道)에 닿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건만, 인의(人義)를 버리지 못해 마지막에 와서 모든 일을 그르치니, 참으로 어리석다.'


'네 이노오옴! 네놈만큼은 절대로 용서 못한다, 천마!'



남자는 서린을 보고 천마라고 불렀다.


천마(天魔).


그것이 서린이었다.



"아."


"응? 왜 그러니, 서린아?"


"아아아아아! 생각났다아아아아아아아!"



담임은 이 좀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아이의 경악한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다운 감정이 떠오른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영문은 잘 모르겠긴 해도, 이 아이에게도 감정이란게 있긴 하구나 싶어 조금 안도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린, 아니 천마는 자신의 조그만하고 부드러운 고사리손을 보며 있는 힘껏 절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