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게 써 놓고는, 집을 나섰는데.


우습게도 면전에 대고 헤어지자고 한 것도 아닌데, 한 글자 한 글자 적을때마다 눈물이 나서 쓰는데 고생 좀 했어. 물론 여자친구가 뜬금없이 쪽지로 이별 통보를 날리고 잠적해버린 네가 할 마음 고생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 편이 너나 나나 그나마 마음이 덜 아플 방법이라고 생각했어.


이럴 줄 알았으면, 꼬시지 말 걸 그랬네.


너랑 만나는 날엔 칼만 잡던 내가 화장품도 잡아보고, 갑옷 살 돈도 아슬아슬한 때에도 결국 예뻐 보이는 드레스도 사 봤었지. 내가 연애 상담 따위를 하게 될 줄은 꿈에서조차 생각도 못 했는데. 정말이지, 세라 고 년은 내가 네 앞에서 얼굴 붉히면서 횡설수설 하는 걸 보고는 건수 잡았다며 며칠을 놀려대던지.


그래도 세라 그 아이 덕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연애도 해 봤으니, 불만은 없지만.


콰앙!


"커헉...!"


으윽, 가슴께가 욱신거리는 게 갈비뼈가 제대로 나간 것 같다. 제법 잘 피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딴 생각 하다가 몽둥이에 제대로 얻어맞았다. 이를 악물고, 칼을 지팡이 삼아 몸을 지탱했다.


"죽겠다, 죽겠어..."


그리 한탄하며, 눈 앞의 트롤 한 마리를 응시했다. 날파리처럼 요리조리 피하던 나한테 한 방 먹인 게 통쾌했는지, 놈은 일그러진 웃음을 지으며 내게 대가왔다. 마무리를 하려는 듯 놈은 모둥이를 높이 들어올렸지만...


"하!"


기합으로 몸을 일으켜, 단숨에 오러를 두른 칼로 트롤의 다리를 잘라냈다. 기괴한 울음소리와 함께 놈의 몸뚱이가 뒤로 넘어가자, 나는 지체없이 칼을 역수로 들어 머리를 꿰뚫었다. 마침내 괴물이 움직임을 완전히 멈췄을 때, 나는 박살난 건물의 잔해에 등을 기대어 주저앉았다.


"하아...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다 도망갔으려나."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마수 사체들이 즐비했고...시간이 조금 지나 말라붙은 인간의 시신도 몇 존재했다. 마수 토벌을 위해 차출되어 온 이 마을은 이미 반파된 상태라, 남은 생존자들을 수습해 보내는 동안 내가 뒤를 맡았다.


네가 보았더라면, 정말이지 미련하다고 말했겠지만...난 이것도 나름대로 내 매력이라고 생각해. '뒤는 내게 맡겨!' 하고 길목을 지키는 기사라니, 멋지잖아. 내가 이렇게 기사의 멋짐을 설파해도, 넌 시큰둥했지만. 마법사라서 그런가?


흐음, 아닌데. 내가 널 잡아먹으려던 마수의 머리통을 한 방에 날려버리고 공주님 안아올리듯이 들어올렸을 때 뻑 간 네 표정을 내가 아직도 기억하는 걸. 물론 여자한테 그런 자세로 안겼다는 게 수치스러운지 얼굴이 벌게지긴 했지만.


'아, 혹시 내가 너무 멋있어서 반했어요?'


'...네.'


'그럼 우리 사귈래요?'


...내가 생각해도 완벽한 고백이었지. 음. 역시 멋진 기사는 시대를 막론하고 통하는 개념이 맞아.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연애는, 짧았지만 즐거웠어. 사실 딱히 대단히 특별하거나 희귀한 경험을 하지는 않았지만...같이 있는 시간 자체가 좋았거든. 네가 마법 주문 실수해서 물폭탄을 터트리고 둘 다 물에 쫄딱 젖었을 때도, 난 마냥 웃기만 했어. 그만큼 재미있었거든. 첫 키스는 어...그땐 너무 몽롱해서 무슨 기분이었는지 잘 모르겠어. 그래도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얼굴 들이미는 건 제법 박력있었어.


...이렇게 생각하니, 헤어진 게 정말 너무 아쉽네.


하지만, 어쩔 수 없겠지. 나라의 기사인 나는 이렇게 목숨 걸고 전쟁터에 끌려나가는 일이 한도 끝도 없을 거고, 내가 어디서 객사하기라도 하면 졸지에 홀로 남게 되는 건 너니까. 옆 부대 잭슨 아저씨가 죽은 뒤에 유품을 내가 전해줬을 때 아들은 울고 아내분은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리셨는데, 그 꼴을 네가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엄두가 안 나더라. 내 시체가 담긴 관을 열어보는 너와 우리 아이라니 맙소사, 상상만 해도 끔찍한 걸.


"크르르..."


피 냄새를 맡은 건지, 소란을 들은 건지....늑대 마수 무리가 천천히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나는 칼을 잡고 다시 일어서려 했지만...다리에 힘이 풀려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하긴, 갈비뼈는 나간 데다가 마력도 전부 떨어졌고, 칼은 이가 다 빠지고 방패는 진즉에 박살, 갑옷마저 우그러져선 어차피 이기는게 불가능할지도.


나는 결국 힘없이 흔들리는 칼을 내려놓고는 멍하니 늑대 무리를 바라보았다. 내가 저항 의지를 상실했다는 걸 꺠달았는지, 놈들은 경계를 늦추고는 이빨을 드러냈다.


나는, 체념한 채 너에게서 선물받은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생일 선물이라고 네가 준 이 목걸이는 네가 무슨 기능이 있다고 설명해줬지만...머리 나쁜 나는 거의 다 잊어버렸다. 목걸이가, 반짝였다.


"어...?"


"그걸 이제야 쓰냐, 이 멍청아-?!"


"꺄아악?!"


그리고 그 목걸이에서 네 고함소리가 터져나옴과 동시에, 옆에서 붉은 화염이 터져나왔다. 날 보느라 무방비하게 불꽃에 노출된 마수들은 불타는 몸을 뒹굴며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뭐, 뭐야...?"


"뭐야, 는 얼어죽을! 당연히 너 쫓아왔다! 너 혼자서 뭐해?!"


그리고, 온 몸이 땀에 젖은 네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 앞에 서 있었다.


"너,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여긴 위험하니까 따라올 생각 하지 말라고 말했잖아! 너 미쳤어?!"


쪽지에 내가 무슨 일 때문에 헤어지자고 하는 지 이유는 적어뒀지만, 그걸 따라온다고?! 전쟁터에?


"그딴 쪽지 하나 던져두면 내가 '음 어쩔 수 없네 훌훌 털어버리고 새 여자 찾자.' 이럴 줄 알았냐?! 그 와중에 쪼잔하게스리 '그래도 새 애인은 한 한 달 뒤에 만들어'라고 적어두는 건 뭔데?! 쪽지는 눈물에 다 젖어서 쭈글쭈글하고!"


쪽팔리게 그걸 일일히 다 나열하는 네 말에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너, 너...! 아윽...!"


무심코 몸을 움직이려다 갈비뼈의 통증에 눈을 찌푸렸다. 너는 한숨을 내쉬고는, 붉은 물약병을 내밀었다. 삼킨 물약은, 딸기 맛이 났다. 물약을 마시자 통증이 점점 줄어드는게 느껴졌다.


"이 화상을 어찌하면 좋냐...하아..."


그리 말하며 나를 안아올린 너를 보며, 딸꾹질을 했다.


"뭐야, 어디 안 좋아?"


"아니, 음. 뭐랄까 왜 내 작업이 성공했는지 알 것 같아서...이거 구도가 되게 좀...두근거리네. 내가 그냥 콩깍지가 씌여서 그런가?"


그 말에 너는 얼굴이 살짝 붉어지며 헛소리 말라고 일갈했지만...


어떡하지, 더 반한 것 같아.


====================================================================================


최근에 NTR/비극 소재를 하나 써서 이번엔 좀 웃기고 달달한 맛을 내볼까 해서 휘갈겨 봄. 한 사랑이 끝내 보답받지 못하거나 의무와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다 결국 의무는 달성하고 스스로는 구원받지 못하는 비극도 나름의 맛이 있지만, 이런 왕도적인 순애물도 제법 좋아함. 바보+돌직구형 직진only 여기사와 툴툴대면서도 그 올곧음에 이끌리는 마법사의 유쾌한 연애담...뭔가 가볍게 즐길만한 이야기로는 괜찮지 않나?


그러니까 '써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