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저 동화 읽을 나이는 지났는데요."


노인이 별들로 가득 찬 하늘을 가리키며 이야기하자, 그녀의 손자인 이안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나무를 깎았다. 나무 끝이 충분히 날카롭게 깎이자, 이안은 만족스러다는 듯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깎인 나무 작살을 등 뒤로 던진 뒤 새 나뭇가지를 집어들어 깎기 시작했다.


"하하, 이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 시절부터 전해진 이야기인데 그걸 안 믿느냐?"


"마법도 못 쓰는 우리가 무슨 별에서 와요. 차라리 드래곤들이 별에서 왔다면 몰라."


"우린 마법을 써서 온 게 아니라더구나."


"그럼 뭔 수로 내려왔데요?"


"...그건, 할머니도 잘 모르겠구나."


"그럴 줄 알았어요...저 이 작살들 내일까지 다 깎아야 해요. 안 그럼 피르카스...그 귀쟁이 자식이 또 저희 배급을 깎을지도 몰라요."


피르카스는 이안과 그의 할머니가 사는 "사피 보호구역"의 엘프 담당자였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마법을 전혀 다루지 못하는 종족인 이안을 비롯한 사람들은 "사피"라 불리며 정해진 구역 안에서 단순 노동을 하며 살아갔다. 물론 엘프들은, 사피라는 말보단 루마(축복받지 못한 자) 라고 부르길 좋아했다. 당연히 그들도 엘프는 귀쟁이, 드워프는 난쟁이, 드래곤은 도마뱀이라고 뒷담화를 까기는 했지만 당연히 면전에선 감히 그런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들은, 마나의 축복이 없는 열등한 종족이었으니.


그래도 이안 정도면 형편이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다. 부모가 없는 이안을 거둬들인 할머니가 지내는 곳을 관리하는 숲 엘프들은, 정해진 기간에 작살, 창, 화살 따위를 납품하기만 하면 딱히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의 축복조차 없는 종족과 구태여 엮이길 꺼려했다. 세계수의 분노를 산다...뭐 그런 미신이 나도는 모양이었다.


"방해해서 미안하구나...그래, 나이티 나이트."


"네. 나이티 나이트."


사피들의 고대어...라고 전해지는 이글리스였다. 할머니가 가르쳐주어서 쓰기는 했지만, 사실 이안은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할머니가 항상 자기 직전에 건네는 걸 듣고 대충 밤 인사구나 하고 넘길 뿐. 담요를 덮고 잠을 청하는 할머니를 뒤로 하고, 이안은 조용히 마지막 작살을 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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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일곱, 여덢...좋아. 루마치고는 그럭저럭 잘 깎았군. 오늘치 보급이다."


피르카스는 이안과 손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그가 건네는 도구들이 담긴 바구니를 집어들었다. 어차피 만들어지는 중에 자기 손에 질리도록 닿은 물건을 쓰면서 구태여 손은 안 닿으려는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안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에게 중요한 건 따로 있었으니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보급이 적어?"


"의회 결정이다. 너희 사피에게 주는 보급의 양은 기존의 절반으로 줄이기로 결정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벌컥 화를 내자, 피르카스는 순식간에 얼굴을 싸늘하게 굳히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바닥에서 덩굴이 솟아올라 이안을 휘감고는 그의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커헉...!"


"주제넘게 기어오르지 마라, 불결한 루마 꼬마. 지금 받은 것도 빼앗기고 싶나?"


"...죄송...합니다."


이안이 사과하자, 피르카스는 혀를 한번 차더니 그대로 뒤를 돌아서 떠나갔다. 덩굴은 이안을 대충 내팽겨치고는 다시 땅 속으로 사라졌다. 이안은 쓰라린 상처를 문지르며 보급을 들고 터덜터덜 할머니의 오두막으로 걸어갔다.


"이안...! 무슨 일이니?"


"...별 거 아니에요. 오다가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졌어요."


그의 몰골을 본 할머니가 다급하게 달려와 물었지만, 이안은 거짓말로 적당히 속여넘겼다. 말해봤자 할머니에게 근심만 얹을 뿐...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테니까.


마법도, 신도 없는 사피의 삶이란 언제나 이래왔으니. 정착할 곳도, 직업도 없이 그저 받아주지 않을지언정 내쫓거나 죽이지 않는 곳에서 눈에 띄지 않도록 숨어사는 삶.


괜스레 하늘이 미워져, 이안은 고개를 들고 하늘을 노려보았다. 기분 탓인지...하늘이 유독 일그러져 보였다.


후웅-


아니, 아니다.


하늘에, 뭔가가 있다.


하늘이 이상한 모양으로 찌그러지기 시작하더니, 굉음과 함께 이안의 오두막 뒤 공터에서 먼지가 피어올랐다. 먼지가 걷히자, 거대한 검은 무언가가 열리며 사람...같이 생긴 무언가들이 걸어나왔다.


"뭐...뭐야?!"


이안은, 집에 굴러다니던 나무 작살을 집어들고 할머니를 등 뒤로 물렸다. 그것들이 다가오자, 그는 고함을 지르며 작살을 내질렀지만...그것의 손아귀에 붙잡힌 작살은 너무나도 쉽게 박살이 나버렸다.


황당한 수준의 악력에 그가 멍하니 부러진 작살을 바라보는 동안, 그것들 맨 앞에 선 누군가의 머리가 쪼개졌다.


"우, 우왁?! 머리가?"


"...@*#@$*^@?"


그리고 드러난 얼굴은...이안과 비슷한, 남자 사피의 얼굴이었다. 다만 이안이 모르는 괴상한 언어를 쓰는.


"...이안, 잠깐."


"할머니?!"


"아...아...아이므...케이트...스미스..."


"...your name is Kate Smith?"


할머니가 어눌하게 말한 이글리스에, 남자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다른 이들에게 소리쳤고, 이에 그들 역시 머리가 쪼개지며 다른 얼굴들이 드러났다.


"이 사람들이 이글리스를 도대체 어떻게 아는 거에요?!"


"이글리스? Iglis? No, it's English! (이글리스? 이글리스? 아니, 이건 영어란다!)"


"어, 어...음...사, 사피?"


그가 밝은 얼굴로 다가오며 말하자, 당황한 이안은 자신과 남자를 번갈아 가리키며 스스로의 종족명을 말했다. 그 말에 남자는 잠시 눈살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Sapi? Sapiens? Oh, we are Homo Sapiens, if that's what you mean. (사피? 사피엔스? 아,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가 맞단다-그게 그런 의미가 맞다면 말이야.)"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몰랐지만...이안은 적어도 하나는 알 것 같았다. 저 괴상한 복장.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진 현장.


"우리가...별에서 왔다는 게 진짜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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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미래, 인류가 우주를 한창 개척하던 중에 판타지 풍의 행성에 불시착하고 뿔뿔히 흩어져 오랜 시간이 지난 끝에 자신들이 누구인지조차 잊어버린 채 살아가던 중 신호가 끊긴 이민선을 추적하던 탐사선에게 마침내 발견되는 이야기임. 공용어로 쓰이던 영어는 몇몇 단어나 표현만이 간신히 살아남은 상태(나이티 나이트 = Nighty Night)고, 해당 행성의 원주민들과는 다르게 당연히 마법이나 초능력이 없기 때문에 열등한 종족으로 천시받던 사람들이 자신들은 알고보니 이 행성의 종족 따위는 대적조차 못할 위대한 문명의 일부라는 걸 깨닫는다면?


이 이후로는 그냥 행성을 떠나서 인류로 돌아갈 수도, 몇몇은 그냥 이 행성에 남을수도, 아니면 여태까지의 울분을 담아 분노의 제노 퍼지 진심펀치를 갈길수도 있음.


그러니까 "써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