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짧은 소개글

<인간의 증명>은 전작인 '최강의 군단'의 홈페이지에 게재되었던 공식 단편 소설로, 플레이어블 캐릭터인 '맥'과 '마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

이 글은 전작을 애정했던 업로더가 원문을 복사+붙여넣기 한 뒤 간단한 오타만 수정한 채 개인 소장했던 것임.

나이트 워커와 맥이 흥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카라이브에 업로드함.




<인간의 증명> 1장

 

가로등은 10미터에 하나씩. 기둥에 튀어나온 장식은 1.8미터 정도 되는 남자의 머리에 정확하게 닿는다. 그쪽으로 밀어 박으면 상당한 타격을 줄 수 있다. 바닥 타일의 크기는 0.3미터, 두 번의 벽돌색 후에 한 번의 회색이 반복된다. 깨진 조각은 땅에 나뒹굴었을 때 주워 던지기 적당하다. 방금 지나간 노인은 마른 체구에 비해 점퍼가 불룩 튀어나와 있다. 총일까? 구겨진 신문에 싸인 양주병이나 훔친 빵일 가능성이 높다. 남자는 양손을 청바지 주머니에 꽂고 땅만 내려다보며 걷고 있지만 머리는 쉬지 않고 이런 것들을 생각한다. 지금 이 장소에서 싸움이 벌어지면 뭐가 생존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누굴 무엇으로 공격할 수 있을지, 얼마나 다칠지,

그러다 죽을 확률이 얼마나 될지...

오늘도 잠이 오지 않을 거 같다. 사람을 쏴야 했던 날이다. 임무 중에 목을 다친 건 심각하지 않지만 일이 점점 순조롭게 풀리지 않는다. 그는 바의 문을 딸랑거리며 열고 들어가 안쪽 구석 자리 의자에 몸을 싣는다. 바텐더가 술병을 딱 놓자마자, 잔을 휘릭 두 손가락으로 잡아 돌려 내린 후 술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채운다. 수백 번은 해 본 손놀림이다. 알싸한 알코올의 향기가 마시기도 전에 그의 뇌를 마비시킨다. 일정한 간격으로 잔을 입에 털어 넣는다. 처음 느꼈던 조니워커의 향기와 맛은 점점 무색무취의 물과 같아지고 그가 느끼던 죄책감도 같이 옅어진다. 주변의 모든 것이 비로소 실체화되어 가고 스스로 심장이 뛰는 게 느껴진다. 

이제 살아있다는 걸 실감한다. 위스키만이 그가 인간으로서 살아가고 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길쭉한 술병이 조금씩 비어간다.

  

같은 시각, 두 블록 떨어진 번화가에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움직이고 있다. 네온사인이 번쩍이긴 해도 한밤중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품이 영 어울리지 않는다. 길 한복판을 차지하며 걸어도 사람들이 알아서 피한다. 한 녀석은 손에서 나이프를 째각 거리며 흔들고 있어서 누가 봐도 위협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30미터 뒤에 그들을 주시하는 여자가 있다. 다들 그들을 보면 눈을 피하고 다시 쳐다보려 하지 않는데, 이 여자의 눈은 그들을 관찰하고 있는 게 명백하다. 사내들이 주위를 둘러볼 때마다 잽싸게 눈을 돌리고 주위의 번쩍번쩍하는 간판을 둘러본다. 짧은 청치마에 가죽 재킷을 걸치고 있어 금요일 밤에 클럽을 찾는 여느 여자들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워커 대신 힐을 신었다면 더 어울렸겠지만 그걸로는 빠르게 움직이기가 어렵다. 

사내들은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CLUB QUESTION 앞에 멈춰 서서 핸드폰을 꺼내 몇 마디 통화를 하고는 안으로 들어간다. 

가죽 재킷의 여자도 클럽에 놀러 들어가는 것처럼 종종걸음으로 따라간다. 벽에서 나온 뿌연 조명이 여자의 하얀 얼굴을 푸르게 비춘다. 홀에서 터져 나오던 커다란 음악이 한순간 뚝 멈추고 총성이 터진다.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노출이 심한 여자아이들이 복도로 뛰어나온다. 가죽 재킷의 여자는 미리 봐 둔 배전반으로 총총 들어가서 건물의 전원을 내린다. 거리에서 싸우면서 터득한 총을 무력화 시키는 기술. 어둠 속이라면 그녀는 져 본 적이 없다. 눈을 감은 채 연습했던 대로 계단을 두 개씩 뛰어오른다.

 

홀에 들어서면서 여자는 눈을 번쩍 뜬다. 어둠에 익숙해진 홍채로 아까 사내들의 무기와 위치를 파악한다. 그들은 당황해서 불 켜라고 소리만 지르고 있다. 여자는 몸을 낮추고 뱀처럼 유연하게 다가간다. 가장 가까이 있는 녀석의 허리를 붙잡으려 한다. 그대로 뒤로 넘기면 기절시키기 좋겠지만 자신도 땅을 잠깐 굴러야 해서 마음을 바꿔 먹는다. 상대가 휘두르는 힘을 이용해서 팔목을 잡고 큰 원을 그려 땅바닥에 내려친다. 조직원들은 싸움 중에 가만히 기다리는 녀석이 없다. 흥분해서 달려들면 다들 겁을 먹는 것에 익숙하다.

무대로 올라가는 계단에 어깨가 찍혔다. 꽈직 하는 소리. 아마 부러졌겠지. 왼쪽 손은 던질 때 꺾었고 오른쪽 어깨가 나갔으니 총을 못 쓴다.

하나 끝.

즉시 다음 녀석에게로 속도를 높여 달린다. 다리 사이를 붙잡고 같이 뛰어 두 사람의 체중 분으로 내려찍는다. 낙법을 칠 수 없는 상태로 머리부터 떨어지니 이건 백 퍼센트 기절이다. 마지막 녀석은 총을 꺼내 팔을 이리저리 휘둘러 겨누고 있다. 총구를 피해 뒤로 접근한다. 허리를 감싸 안고 뒤집어 땅에 찍는다. 땅바닥은 언제나 그녀 편이다. 중력의 가속을 받은 거대한 땅덩어리는 어떤 다리나 주먹보다 강하다. 일을 끝내는 데 칠 분. 발목을 구둣발에 긁힌 거 말고는 별다른 부상도 없다. 재킷 안주머니에서 꽃 한 송이를 꺼내 기절한 녀석 배에 올려놓는다. 붙어있는 메모지에는 ‘헤라’ 라는 단어가 적혀 있다. 아직도 괴성으로 클럽 전체가 시끌벅적하고 사람들이 복도를 가득 메우고 빠져나가고 있다. 그녀도 그 틈에 섞여 비비적대며 클럽을 빠져나온다.

 

원룸으로 들어서서 재킷을 벗어 던지고 샤워실로 들어간다. 한바탕 싸우고 나면 바로 땀을 씻어내는 습관이 있다. 타월로 몸을 닦고 시간을 확인한다. 꼭두새벽에 일어나야 한다. 잠을 잘 시간이 부족해서 참고 버티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 뒷목을 꾹꾹 누르며 졸음을 쫓는다. 그러다 의자에 앉은 채로 잠들어 버린다.

 

누군가 현관을 탕탕 두드린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밖은 환하다. 문을 열었다. 

“마리. 마리! 학생회장이 안 오면 어떡해. 집회 시작했을 텐데.” 학생 하나가 헐떡이며 채근한다. 

“잠시만. 옷 갈아입고 금방 나갈게.” 마리는 평소처럼 밝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인간의 증명>  2장

 

“오늘 그가 또 한바탕 소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입니다. 헤라클레스. 엄청난 힘으로 조직 폭력배들을 소탕한 후 평화를 상징하는 꽃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지는 사나이. 그는 과연 범죄자일까요? 영웅일까요? 심지어 인터넷에는 그의 팬사이트까지 등장했는데요. 현장에 기자를...”

 

커튼이 두껍게 드리워 있어 어두운 거실에 벽걸이 TV만 조명을 뿌린다. 방송에서는 마침 어제의 그 현장이 나오고 있다. 카메라의 진입을 통제하려는 경관들과 구경 온 근처 회사원들과 기자들이 얽히고설키며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장면이 지나간다. 테이블 위에는 편의점에서 나올 법한 음식물의 쓰레기들과 ‘30살이 되기 전에 꼭 해야 할 것들’ 이라는 제목의 책이 널브러져 있다. 커다란 거실에 덩그러니 있는 두 칸짜리 소파 위에 20대 중반의 남자가 다듬지 않은 수염이 듬성듬성 나 있는 얼굴로 몸을 배배 꼬며 신음하고 있다. 감긴 눈을 억지로 뜬다. 커튼 사이를 용케 뚫고 들어 온 저녁의 노란 햇살이 눈을 찌른다. 일을 끝내고 술을 마신 게 화근이다. 

‘그래도 술집에서는 딱 한 병만 마셨는데.’

이상하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킨다. 목을 움직일 때마다 야구방망이에 맞은 왼쪽 목덜미가 욱신거린다. 머리도 지끈거린다. 

집에 들어와서도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신 것 같다. 

‘집에 술이 없었을 텐데 어떻게 된 거람.’ 손을 보니 차분했다. 덜덜 떨리지 않는다. 테이블 위의 비닐봉투를 열어 술병을 몇 개 찾아낸다. 

‘이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술을 사 오는군.’

봉투에서 같이 찾은 미적지근한 캔 커피를 따 들고 창가로 나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부서진 화분 조각이 발바닥에 집혀 발로 슥슥 밀어내 공간을 만든다. 6층이긴 하지만 훨씬 더 높은 빌딩들이 둘러싸고 있는 도심 복판의 고급 빌라라서 탁 트인 숲이나 강은 꿈도 못 꾼다. 낮에는 일관된 잿빛 빌딩과 직장인들, 밤에는 너무 색이 많아서 무슨 색을 써도 다 똑같이 보이는 네온사인들과 술집들이 대비되는 곳이다.

조직 사무소가 가깝다는 이유로 토라가 한 방에 구입했었지. 자연스럽게 눈이 테이블 위의 사진을 본다. 20대 후반의 여성과 10대 소년이 나란히 웃고 있다. 자세히 보면 눈은 그렇지 않지만.

그의 아버지가 죽자 집에 가끔이라도 들어오던 어머니는 미련 없이 떠났다. 어린 학생이었던 그를 이복누나라는 사람이 나타나 이 집으로 데려왔는데 그게 토라였다. 아버지와 전혀 닮은 구석이 없어서 정말 이복누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도, 토라도 똑같이 조직에서 일하다가 죽어갔다. 그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자연스럽게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그들처럼 죽겠지.’ 아직도 멍한 눈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생각했다. ‘이렇게 술을 마시다가는 그들보다 더 빠를 수도 있겠군’

아버지가 죽었을 때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는데 토라의 시체를 확인하고 집에 와서는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아니 정말 그랬나? 이제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건너편 빌딩 한쪽에 재떨이가 있는 휴지통이 있다. 길 하나 간격이라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손에 들고 담소를 나누는 회사원들의 소리가 잘 들려온다. 토라는 바로 옆에 대고 말하는 것 같다고 투덜거렸었다. 그녀는 저들을 싫어했다. 

저것들 저렇게 사는 게 뭐 불만이라고 직장 상사 욕이며 여자친구 욕이며 와이프 욕이며, 지 행복한 줄 알아야지. 어? 하루하루를 총구 앞에서 살아 보던가.

그는 그래도 그들이 부러웠다. 잔잔한 불평을 담배와 함께 날려버릴 수 있는 평온한 일상들... 그런데 오늘은 평소보다 좀 더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빌딩 반대편인가? 대로변에 방송국 차도 보이고 확성기 소리도 들려온다. 게다가 같은 소리가 거실 TV에서도 한 간격 늦게 또 들려온다. 차 옆면에 NBC라는 마크가 보인다. 연쇄 살인이라도 발생한 건가? 호기심에 담배를 비벼 끄고 거실로 돌아와 TV의 볼륨을 올렸다.

 

 “….제약회사는 결국 보상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에 해당 대학생들이 오늘부터 시위를 시작했다는 소식입니다.

회사 건물 앞에는 지금 다수의 학생이 모여 있습니다. 문제의 그 약을 복용한 여학생들이 심한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젊은 애들이 피켓과 커다란 천을 흔들며 카메라를 보고 뭐라 소리치고 있었다. 누군가는 진지하지만 일부는 웃고 있기도 했다. 

‘다들 신나게 사는군’ 

그에게는 시위마저도 부러운 일상이었다. 테이블 위의 책을 집어 들었다. 몇 달째 열 페이지를 넘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핸드폰이 한 번 진동 하더니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 바보 같은 게임이 날 찢어놓고 있어. 쥬얼의 노래가 망연한 생각에서 그를 깨웠다. 

토라가 좋아하던 노래였는데. 그리움보다는 잊지 않으려고 벨 소리에 지정해 넣었다. 폴더를 열었다. 

 

“전화 좀 빨리 받아. 맥. 또 술 먹고 자빠져 있었지?”

“용건만 말해.” 

“긴급 상황이래 맥. 보스 호출이야.”

 

‘항상 긴급 상황이지’ 그래도 그는 한때 조직의 촉망 받던 인재답게 옷을 후다닥 챙겨입고 문을 나섰다. 문 손잡이는 120도 각도로 살짝 내려놓는다. 아무렇게나 닫아도 문은 잠기지만 이 각도로 고정시키는 건 숙련되지 않으면 어렵다. 누군가 침입했을 경우 알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이 삶을 더 연장할 수 있도록.

 



<인간의 증명> 3장

 

맥은 저녁노을이 깔린 도심으로 나섰다. 사무실은 세 블록 건너에 있는데 하필 시위를 그 사이에서 하고 있다. 돌아가면 세 블록이 또 늘어난다. 카메라에 노출되는 걸 피하기 위해 후디를 깊이 뒤집어쓰고 빠른 걸음으로 웅성거리는 사람들 무리로 다가갔다. 

안경 쓴 남학생이 가로막았다. “여기 서명 부탁드립니다. 제약회사의 만행을 일반 시민의 입장으로서 두고 볼 수 없는 마당에..” 작고 노란 배지와 종이를 건네려 했다. 배지에는 대학 로고와 상식적인 어쩌고 하는 구호가 적혀 있었다. 

맥은 무시하고 슥 비켜갔다. 뒤에서 잠깐만요 하며 뭐라고 말을 더 했지만 다행히 붙잡고 늘어지지는 않았다. 

‘사람 죽이는 해결사의 서명이 세상을 위해 뭐가 필요하겠어.’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시위는 주변에 피해를 주잖아. 나한테는 특히 더. 대학생들이면 공부를 해야지.’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는데 카메라가 급하게 움직였다. 깜짝 놀라 고개를 푹 내리깔고 피하려는데 사람들이 그를 지나쳐 갔다. 카메라들이 단상 앞에 우르르 배치되고 있었다. 여학생 하나가 단상 위로 올라섰다. 

마리! 마리! 학생들의 당찬 함성이 울려 퍼졌다. 

‘저 여자가 대장인가. 대학생들도 조직과 다를 게 없군.’ 

마리라는 여자애는 짙은 갈색 머리에 매끄러운 다리를 잘 드러내는 7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블라우스로 덮인 가선이 부드럽게 노출되어 있었다. 

‘귀엽군. 가장 예쁠 나이지. 스물 정도 되었으려나.’ 그녀가 시위대를 한번 돌아보고, 제약회사 빌딩을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무척 환했다. 

‘밝은 여자네.’ 

걸음이 저절로 멈췄다. 

여자가 입을 열고 연설을 하는 모습을 관찰했다. 귀가 살짝 눌려있었다. 그와 한때같이 일했던 털보와 비슷했다. 그 녀석의 귀는 뭉개져서 귓바퀴가 머리에 붙어있는 것 같이 너덜너덜했는데 그걸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다니곤 했다. 나이가 들자 털보는 귀를 잘라서 조직에 놓고 걸어 나갔다. 시체가 되어 조직을 떠나지 않은 몇 안 되는 인물이라 했다. 이 여자애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설마. 어렸을 때 다쳤을 수도 있겠지.’

드러난 발목에도 상처가 있었다. 생긴 지 얼마 안 돼 보였다. 여자애의 날렵한 다리 때문인지, 미소 때문인지, 귀와 털보 때문인지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가 가지지 못한, 가질 수 없는 삶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술도 끊고 저렇게 해맑은 여자애와 햇살 아래서 데이트도 하고 사람을 관찰하고 주변을 분석하는 습관도 버리고 아침 해를 보며 눈을 뜨고 밤에는 사랑하는 사람은 꼭 안고 잠들고...

그러는데 여자가 말을 끝내고 내려왔다. 뒤이어 단상에 남자가 올라갔다. 

“학생회장에 이어 부학생회장의 한 말씀 듣겠습니다” 마이크에서 끼잉 하는 소리와 함께 소개가 이어졌다. 

‘좀 전의 그녀가 학생회장이었군.’

연설을 시작하는 남자애는 조각 같은 얼굴을 한 멋쟁이였다. 목소리도 적당히 잘 울리고 옷은 단박에 부티가 흐르는 데다 호주머니 자락에 BMW 키링이 삐져나와 있었다. 맥은 자신의 알코올 냄새가 배인 후줄근한 회색 후디를 더 깊이 눌러 내렸다. 마리와 그 남자애는 서로 보며 환하게 웃었다. 

‘어울리는 한 쌍이군. 그래 저렇게 잠시 사회에 관심을 가졌다가 결혼하고 아이 낳고 그러고 사는 거지.’ 그는 고개를 돌리고 걷기 시작했다.

 



<인간의 증명> 4장

 

조직 사무실은 번화가 한 가운데서 네온을 당당하게 틀어대고 있는 고급 클럽 안에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데다 좁은 복도가 미로처럼 꼬여 있어서 구조를 모르고는 적이 쳐들어오기 어려운 곳이었다. 보스는 호주머니에 땅콩을 가득 넣고 쩝쩝거리며 말하는 노친네였는데 아직도 조직에서 더 승진하려는 야망을 버리지 못했다. 맥이 처음 일을 시작할 때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랴 너희가 우리 조직의 미래여.’ 쩝. 꿀꺽. 땅콩 몇 개 꺼내 쥐고. ‘덕분에 나도 롤스로이스 함 굴려 보는 거 아닝가?’ 입에 털어 넣고. 

털털하고 제법 인자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회칼을 잔인하게 쓰는 데다 철두철미한 인물이었다. 사무소의 위치나 경비 시스템이나 항상 따라다니는 보디가드들이나. 

‘죽기는 싫은 거지. 화장실에도 같이 가잖냐.’ 

키즈가 언젠가 그걸 두고 낄낄거렸다. 

키즈 역시 맥과 비슷한 나이에 같이 일을 시작했다. 초반엔 클럽 여자들과 같이 어울리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무슨 팀장이랍시고 졸개들을 데리고 우루루 몰려다니곤 했다. 권력에 맛을 들어버린 모양이었다. 그러다 언포기븐인가 서부영화가 유행하던 재작년에 조직 최고의 총잡이가 누구냐 라는 화제가 돌면서 키즈와 충돌한 적이 있었는데 설전 끝에 총격전으로 갈 뻔한 후 냉랭한 관계가 지속되고 있었다. 

“헤라클레스라고라. 들어봤나.” 보스가 입에 땅콩을 떨어 넣었다. 말 한번 하고 탁 털어 넣고. 리듬감이 넘치는 보스였다. 맥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리해라잉.”

“정체는 뭡니까?”

“뭐. 라틴 애들이 고용한 떠돌이겠지. 이번엔 깔끔하게 처리해.” 그러면서 그의 목에 있는 멍을 노려보았다. 

“총기는 어떤 걸 쓴대요?”

“총은 안 쓴다. 주먹으로 때려눕힌다고 카더라. 우리가 나 참 머 좀 할라- 치면 나타나서 방해하는 거 보면 북쪽 애들인 거도 같고. 쩝. 이런 식으로 선전포고도 없이 한단 말이여. 법이 무너졌어 법이. 꿀꺽. 처리하고 뒤져서 어디 소속인지도 알아바라이.” 마지막 단어는 오득오득 땅콩을 씹으면 말했다. 

“그렇게 하죠.”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섰다. 문을 닫기 전에 보스의 목소리가 비집고 나왔다. “그놈 새끼. 얼굴 디밀면 바로 연락 때릴끼야. 24시간 대기하고 있으라”

 

사무실을 나와 홀로 들어섰다. 곧 손님들이 들이닥칠 시간이었다. 잔잔한 블루스가 깔리고 플로어에는 손바닥만 한 옷으로 몸을 가린 댄서들이 흐느적거렸다. 2.5초마다 돌아오는 천장의 붉은 레이저 빛이 눈을 찔렀다. 그 간격에 맞춰 자신도 모르게 총을 꾹 쥔다. 

술이 땡긴다. 공짜라서 여기서 술을 마시기도 했었지만 젊은 애들을 끼고 히히덕거리는 녀석들 꼴 보기 싫어서 포기한 지 오래였다. 사람들은 눈에 안 들어오고 쟁반 위로 위스키병이 둥둥 떠다니는 것만 보인다. 혀가 바짝 마르고 몸이 덜덜 떨린다. 정신 차리자. 절대 마시지 않는다. 이러다 저승에서 토라를 만나겠어.

누군가 엉덩이를 탁 친다. 진한 향수가 오른쪽 어깨를 타고 올라온다. 댄서 한 명이 다리를 감으며 속삭인다. “맥. 맥. 자주 좀 오라니까. 술 한 잔 줄까?” 안면은 있는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술 한잔하는 말에 손이 덜덜 떨렸다. 여길 벗어나야겠어. 진땀을 흘리며 홀을 나서는데 마침 덩치들이 우루루 들어왔다. 키즈였다. 

“아이고! 맥도널드!” 

“그걸로 부르지 말라니까. 몇 년째냐.”

아랑곳 하지 않고 키즈는 떨리는 손을 보며 말을 이었다. 

“야 야. 진짜 손 그래서 누굴 맞추기나 하겠나? 꼭지나 당기면 다행이겠네. 안 그르냐 애들아?” 

졸개들을 돌아보며 키즈가 말했다. 왁자지껄 웃음이 홀에 퍼진다. 

“아~ 새끼. 이제 맞고 다니냐. 목 바라. 목 바라. 애들 보기 창피해서 일 못하겠다” 그러면서 어깨에 팔을 걸쳤다. 술 냄새 땀 냄새가 훅 올라온다. 

“난 간다.” 맥은 팔을 거칠게 빼며 걸음을 옮겼다. 

“야. 일하다 무서우면 날 불르라. 최고의 총잡이가 달려갈끄야아.” 웃음을 터트리며 졸개들을 쳐다본다. 또다시 왁자지껄. 

클럽을 나서자 짙은 수분을 머금은 찬 공기가 허파를 채웠다. 담배를 하나 꺼내 불을 붙였다. 후우. 한숨에 연기를 실었다. 술이 더 당기는 밤이 되어 버렸다.

 

<인간의 증명> 5장

 

집에 돌아오는 거리는 밤이 내려앉았다. 입김이 하얫다. 밤공기를 들이마시며 보도블럭을 세다가 보니 현관 앞에 도착했다. 손잡이는 익숙한 각도로 정확하게 비틀어져 있다.

필사적인 노력으로 술을 사오지 않는 것에 성공했다. 그는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하지만 그 후로 한 시간 동안 술을 사오지 않은 것을 생각했다. 충혈된 눈을 뜨고 한숨을 내쉬며 집을 나섰다.

‘바에 가서 마시는 거야. 오늘은 딱 세 잔 만’. 이브라힘의 방주라는 술집 앞에 서서 또 몇 분간 생각하다 결국 문을 밀어 젖히고 들어갔다. 토요일 밤이라 좌석이 다 차서 카운터에 걸터앉아 스트레이트를 시켰다. 손이 심하게 떨렸다. 잔을 받자마자 텁 털어 넣었다.

“안주는 됐어.”

말하면서 눈이 마주치자 바텐더가 눈을 돌렸다. 문을 닫을 때 그가 정신을 잃고 엎드려 있으면 골치겠어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또 왔구나 싶겠지.

오늘은 그래서는 안 된다. 언제 헤라클레스인지 하는 놈이 나타나실지 모르니. 30분에 한 잔씩. 12시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일어난다. 나름대로 규칙을 정했다. 그러고 나니 모든 게 괜찮아 보였다. 술이 몸을 한 바퀴 돌자 멍멍한 귀가 갑자기 확 뚫릴 때처럼 감각이 다 작동하기 시작했다. 늘 하듯이 주변을 살폈다. 카운터 위에는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이 많았다. 안 보고 집어도 다 쓸 수 있을 정도였다.

상대가 기습적으로 치고 들어와도 대처할 수 있는지 확인했다. 그가 항상 앉는 안쪽 테이블에는 두 남자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런

형사다.

말투도 그렇지만 사복형사의 전형적인 복장을 하고 있었다. 권총 때문에 불룩해진 왼쪽 가슴의 옷섶을 보지 않아도 허리춤에 찬 경찰봉이 노골적이었다.

‘형사가 아니라 경찰 나리였군.’

사복 차림에 경찰봉을 차고 다니는 경찰은 처음 봤다. 비싼 바가 아니라서 이곳에도 종종 형사들이 오긴 한다. 어쨌든 그들도 술은 필요할 테니까. 같은 공간에서 마시는 건 이래저래 불편한 일이긴 하지만 신경 안 쓰면 그쪽도 신경 쓸 일은 없다. 그는 술을 마셔도 난동을 피우지 않았다. 쓰러질 때까지 마셔서 문제지.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시선에 콧수염이 잡혔다. 서로 눈인사를 건넨다. 너도 또 왔구나. 서로가 문제인 걸 잘 안다. 언젠가 알코올 중독 치료 모임에서도 눈인사를 건네지 않을까 싶었다.

중앙의 젊은 남녀를 흘깃 보다가 아까 그 사복 경찰이 경찰봉을 들고 툭 툭 구둣발을 치는 동작이 눈에 걸렸다. 뭔가 이상하다. 계속 쳐다볼 수는 없어서 일정 간격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빠르게 훑어 내렸다. 경찰봉 끝에 구멍이 나 있고 손잡이 쪽에 버튼이 달려 있다.

‘저런 건 처음 보는데.... 아 뭐 상관없겠지.’

지나치게 주변을 살피는 일은 피곤하다. 술이나 마셔야지. 30분 지났나? 아직 이른 것 같기도 한데. 술잔을 손아귀에서 떼구르르 돌리며 입맛을 다시는데 젊은 남자의 고함 소리가 음악 소리를 누르며 들려왔다. 

 

“왜 자꾸 쳐다보냐고. 늙어빠진 쓰레기 주제에.” 중앙에 자리 잡았던 젊은 남자다. 시비가 붙는 경우는 종종 있는 일이다. 남자가 벌떡 일어나는데 포켓에 자동차 키링이 흔들린다. 어디서 봤다 싶었는데 아까의 그 부학생회장인가 하는 녀석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여자 쪽을 보니 그녀였다. 데이트 중인가. 학생들이 돈도 많네.

“그만해 필” 여자애도 따라 일어나며 말린다. 필이라는 남자애는 얼굴이 흥분과 술기운으로 뻘게져 있었다. 이제 바 안의 모두가 경찰을 쳐다보았다.

‘이제 나도 자세히 쳐다봐도 되겠군.’

경찰은 씩 웃고 있었다. 여유가 있다. 다행이다. 좀 혼내고 말려나. 

“일어나 봐 병신아. 쫄았냐?” 여자애가 말리자 필이 더욱 다가서서는 윽박지른다. 말투가 딱 시비 거는 어린애를 닮았다. 경찰이 천천히 일어나며 느물거렸다.

“가슴이 커서 좀 봤다. 왜 니꺼냐? 만져 봤냐?” 동료 경찰로 보이는 일행이 웃음을 터트렸다.

“필. 이 사람들 형사야.” 여자애가 나섰다. 여자 쪽이라도 눈썰미가 있어서 다행이다. 남자애는 자리에 돌아가지 않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뭐 형사 아니라 치지. 새끼가 얼이 빠져가지고. 술 마시고 지랄- 이야” 말 끝자락과 함께 경찰봉이 쌔액 하고 돌았다. 얼굴 한가운데를 가격했다. 필은 비명도 못 지르고 바닥을 굴렀다. 맥은 술을 홀짝 마셨다. 30분을 못 지키고 있어.

쌔한 알코올이 위장을 다 돌았는데도 구타가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만 하세요. 이만하면 됐잖아요” 여자애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이쁜이는 가만히 있-어. 이놈 먼저 손 보-고” 말끝마다 후려친다. 남자애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좋지 않다. 대충 끝낼 인물이 아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경찰 나리. 그러다 감방 가시겠어요.” 그가 경찰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살짝 올린 거 같지만 엄지를 꾹 눌러 넣어 휘두르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경찰이 고개를 돌리는데 눈동자가 풀려 있었다.

‘지나치게 흥분했어. 이거 제정신 맞나.’

조직에 막 뛰어든 애들 중에 이런 녀석이 가끔 있었다. 폭력을 가할수록 흥분하고, 그걸 잊지 못하고. 즐긴다는 점에서 천직일 수도 있지만 대개는 오래가지 못하고 그 폭력에 되려 죽음을 맞는다. 경찰이나 조직이나 가느다란 선을 사이에 두고 있을 뿐. 이 경찰도 그런 타입인 듯 했다.

예상한 것처럼 경찰의 주먹이 날아왔다. 몸을 숙여 피했다. 그러느라 경찰봉 쪽의 어깨를 놓쳤다.

“어쭈. 피했냐? 너 뭐-냐?” 말을 늘이면서 힘을 주며 휘두르는 습관이 있다. 타이밍을 재기 쉽다. 뒤로 물러서면서 여자애에게 눈짓을 보냈다. 빨리 나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몇 차례 더 공방이 벌어지는 중에 그녀가 남자애를 부축하고 일어나는 게 보였다. 체구에 비해 가뿐하게 들어 엎고 문을 나서는 게 기특했다.

‘눈치가 빠르네. 점점 더 마음에 드는데.’ 그녀가 사라지기 직전에 뒤돌아 그의 눈과 마주쳤다. 걱정해 주는 건가. 기지가 있는 여자라 5분 정도만 더 시간을 끌어 주면 충분할 것 같았다.

“이새끼봐라...”

경찰이 휘두르는 걸 그만두었다. 느낌이 좋지 않다. 슬그머니 등 뒤로 손을 뻗어 카운터를 훑었다. 물잔이 하나 집힌다. 역시나 경찰이 총을 꺼내 들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숙이는 게 보인다. 총구가 다 올라오기 전에 팔을 던져 얼굴에 맞춰 잔을 터트렸다. 이건 시간을 끌 수 있다. 물이 얼굴에 뿌려지면 본능적으로 닦으려 하는데 조각난 유리가 얼굴을 긁는다. 술집에서 싸울 때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다. 유리가 눈에라도 들어가 주면 더 좋고.

시간을 벌었다 싶어 문으로 뛰는 데 사람들의 비명이 다시 들렸다. 어이쿠. 대응이 빠르다. 눈이 안 보이는 상태에서 마구 쏘는 건가 싶었는데 어깨에 퍽 하니 충격이 덮쳤다. 관성으로 비틀거리며 바를 나섰다. 온 힘을 다해 뛰어서 골목으로 뛰어 들어갔다. 시야에서 사라지는 게 중요하다. 그럼 방향을 잡을 수 없으니 십중팔구 놓치게 된다.

어깨의 상처를 보니 총알이 관통했다. 뼈는 이상이 없어 보였다. 후디 안에 입은 티를 찢어 감쌌다. 골목에 숨어 한 시간 정도를 기다리다 집에 들어갔다.

남기고 온 술이 그리웠다.

총을 맞다니 운이 없는 날이다. 키즈가 또 한동안 까댈 거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