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짧은 소개글

<인간의 증명>은 전작인 '최강의 군단'의 홈페이지에 게재되었던 공식 단편 소설로, 플레이어블 캐릭터인 '맥'과 '마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

이 글은 전작을 애정했던 업로더가 원문을 복사+붙여넣기 한 뒤 간단한 오타만 수정한 채 개인 소장했던 것임.

나이트 워커와 맥이 흥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카라이브에 업로드함.




<인간의 증명> 6장

 

병원에서 꼬박 하루를 보냈다. 의사는 조직에서 고용한 아줌마였는데 병원에서 약을 빼돌리다 감방에서 좀 살았다 했다. 애가 다섯인데 첫째는 학교에서 사고치고 셋째가 아프고 넷째는 놀이터에서 없어져서 찾아다녔고 뭐 그런 변명들을 하면서 오후 늦게서야 출근했다. 환자는 총상을 입고 아프건 말건, 기다리면서 불만을 터트릴 간호사조차 한 명 없었다. 

의사는 담배를 하나 물더니 대뜸 임시로 감아둔 붕대를 풀고 소독약을 들이부었다. 상처가 불타는 것같이 아팠다. 의사 자격증이 있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으아 마취도 안 합니까?” 목소리가 끄윽거리면서 나온다. 

“시끄러. 니들한테 마취약도 아깝거든.” 담배 연기를 훅 내뿜는다. 

“진료 중에 담배는 또 뭡니까?”

“꼬우면 너도 피워. 스친 거 가지고 엄살은... 그건 그렇고 요즘 자주 오는구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한다. “그렇게 술을 마셔대다간 니 애비처럼 될 거다”

“술 마셔서 총 맞은 게 아니에요. 경찰이 좀..” 

의사는 말없이 담배를 비벼 끄고 붕대를 돌돌 말았다. 

“내가 열 번 넘게 치료한 놈은 없어. 왠지 알지?”

말 안 해도 알아요. 아줌마. 

다행히 더 이상 잔소리는 없었다.

 

편의점에 들러서 냉동 만두를 몇 개 샀다. 바는 생각도 못한 채 어느새 지나쳤다. 

오늘은 뭔가 되는 날이다. 집에서 만두를 돌려먹으며 그 여자애를 생각했다. 그녀의 미소를 떠올렸다. 어깨는 욱신거리고 손은 가끔 경련이 오고 있었지만 평소처럼 술이 머리 속을 지배하지는 않았다. 여자애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 진정이 되고 있었다.

핸드폰을 열어 봤지만 아무런 연락은 없었다. 이런 임무는 질색이다. 마냥 기다려야 한다니. 어제 일로 수배령이 내렸을 것 같지는 않았다. 경찰도 총을 쏴 댔으니까. 그 경찰. 최소한 정직이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TV를 틀어 이리저리 채널 사이를 돌아다녀 봤다. 주식얘기, 날씨 얘기, 보니라는 아이돌 가수가 예능 프로에 나와 성대모사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요즘 여고생은 못하는 게 없어. 그러다 맥주 광고가 나오면 황급히 채널을 넘겼다. 언젠가부터 채널이 더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아주 오랜만에 술 없이 곯아떨어졌다.

 

 

 

<인간의 증명> 7장

 

띵-띵

 

핸드폰 알림 소리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무리 피곤해도 조건 반사처럼 몸이 반응한다.

 

전당포. 헤라클레스. 빨리!

 

문자를 확인하고 총을 집어 들고 집을 우당탕 나섰다. 그 와중에도 리볼버 장탄 수를 확인하고 실린더도 한번 돌리고 현관문 손잡이 각도도 맞췄다. 손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한밤중이었다. 점점 더 추워지고 있다. 외투라도 하나 걸치고 나올걸. 돌아갈 시간은 없다. 이 시간에는 골목에 차가 많아서 뛰어가는 게 더 빨랐다. 네 블록을 미친 듯이 뛰어 조직의 돈이 쌓여 있는 전당포에 도착했다. 총을 꺼내 들고 벽에 붙어서 건물 안으로 머리를 쑥 넣어 봤지만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총을 뒷주머니에 넣고 쓰러져 있는 조직원들을 살폈다. 둘 다 완전히 기절했다. 하나는 어깨와 팔이 탈골되어 있었고 하나는 한쪽 다리가 이상한 각도로 뒤틀려 있었다. 핸드폰을 잡은 손이 뒤집어 꺾여 있어서 손목뼈가 드러날 지경이었다. 

‘그냥 때려서 이렇게 탈골이 되나? 얼마나 힘이 센 녀석이길래.’ 

카운터 안쪽으로 한 명이 더 기절해 있었다. 칼 좀 쓴다는 녀석이었는데. 입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턱에 한 방 먹으면서 혀를 씹었군. 이런 초보 같으니.’

칼잽이 옆에 칼이 없다. 근처를 찾아다녔다. 카운터 주변에는 없고. 건물 안에도 보이지 않는다. 문과 벽 사이에서야 칼을 찾아냈다. 날 삼 분의 일 정도에 피가 배어 있었다. 

‘그래도 칼을 꽂긴 했네. 자식.’ 

핏자국과 발자국을 비교했다. 여기서 몸에 박힌 칼을 뽑아 문틈으로 던진 거군. 허벅지였겠지. 칼잡이들은 거길 노린다. 맞추기 쉽고 치명적이다. 게다가 헤라클레스는 덩치가 무척 컸을 테니 찌르기 적당한 위치다. 피가 가장 많이 몰린 튄 곳을 찾았다. 워커 발자국 하나가 피의 흐름을 막고 있는 게 보였다. 칼을 뽑을 때 땅을 디디고 서 있던 곳이다. 옅은 핏자국이 타박타박 찍혀있다. 

이 발자국이 분명히 맞는 거 같은데 크기가 이상했다. 250이나 될까. 그렇다면 헤라클레스라는 게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인 건가. “현장 클리어. 단서 발견. 추적 중. 둘 이상일 가능성 있음” 

핸드폰을 열고 현장 보고를 마쳤다. 피 묻은 발자국은 점점 옅어져서 한 블록 너머로는 찾기 어려웠지만 군데군데 떨어진 핏방울이 그를 계속 안내했다. 

‘지혈을 하지 못했어.’ 

흔적은 중심가를 빠져나와 대학교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일정 간격으로 균일하게 방울이 보인다. 벽에서 멈춰 있지도 않았고, 심한 부상은 아니다. 야식을 파는 가게를 지나는데 튀긴 감자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허기가 밀려왔다. 이 상황에서도 배는 고프다. 

손을 내려다보니 살살 떨리고 있었다. 심장도 쿵쿵거렸다. 핏방울은 5층이나 6층 정도 되어 보이는 빌라 건물로 들어갔다. 현관을 넘으면서 총에 소음기를 걸었다. 문손잡이를 1층부터 하나씩 살폈다. 2층 맨 끝 문에서 찾던 걸 발견했다. 숫자 키 덮개에 피가 있다. 숫자 버튼 네 개에도. 

뭐가 먼저일까?

숫자가 안 보일 정도로 피가 가득한 게 첫 번째다. 그다음은 뭐 계속 시도해 봐야지. 

도어락은 네 번 만에 열렸다. 딱 평균치다. 귀를 기울이고 있다면 이미 삑삑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문을 조금 열고 문 뒤의 기척을 살폈다. 안쪽에서 샤워기의 물소리가 들린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고 있다. 문을 홱 열어젖히고 총을 허리춤에 끌어당긴 채 빠르게 튀어 들어갔다. 뭔가 보이면 당긴다. 팔을 뻗지 않으면 총을 떨어뜨릴 일도 없다. 문은 해결사의 가장 위험한 경계다. 문과 함께 박살 날 수도 있고. 뛰어 들어가자마자 온몸에 총알이 박히는 경우가 가장 많다. 문득 오드리가 생각났다. 문을 박차고 들어가더라도 기다리는 상대보다 더 빠르게 기관총을 갈겨대는 여자. 

역시나 샤워실에서 나는 소리 외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조용히 문을 닫고 어두운 거실로 진입했다. 욕실 쪽에서 흐릿한 빛이 물소리와 함께 흘러나온다. 쉬운 일이 되었다. 가슴에 두 방, 쓰러지면 머리에 한방. 보스에게 보고하고. 집에 가서 술 한잔하고. 술. 손이 심하게 떨린다. 

코너를 돌자마자 실루엣이 덮쳐왔다. 방아쇠를 당겼지만 어이없이 빗나갔다. 손이 떨려 팔을 앞으로 뻗어 정확도를 높이려 했는데 그게 실수였다. 팔을 턱 잡혔다. 손목을 구부려 방아쇠를 다시 당겨 봤지만 총알은 벽에 박혔다. 몸이 붕 뜨더니 방 전체가 한 바퀴 붕 돌았다. 가까스로 손을 짚어 머리부터 떨어지는 건 막을 수 있었다. 총. 총은 어디로 떨어졌지? 충격으로 몸이 무겁다.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려는데 무릎이 날아왔다. 몸에서 힘을 빼며 받아서 뒤로 홱 젖혀진다. 가슴이 뻐근했다. 숨이 잠깐동안 멈춘 느낌이었다. 그래도 타격이 그리 세지는 않다. 흐릿하게 보이는 그림자는 역시 작은 체구였다. 250사이즈의 그 녀석이군. 더 큰 녀석은 집에 돌아오지 않은 건가. 그렇다면 총이 없어도 승산이 있다. 

적이 달려들었다. 카운터를 날리려고 복싱 자세를 취하는데 적이 시야에서 쓱 사라진다. 태클이다. 레슬러다!. 아까 팔 잡아 던진 건 유도 기술인데? 양다리를 잡혀 뒤로 밀리면서 털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절대 레슬러들과 바닥에서 엉키지 마. 그러는데 이미 바닥에서 엉키고 있었다. 뒤로 넘어질 때의 충격에 기절할 것 같았다. 옷을 잡아채어 균형을 잡아보려 했지만 적은 벌거벗은 데다 물기로 미끄러웠다. 상대는 그의 몸에 올라타 셔츠의 옷깃을 교차해서 당겨 경동맥을 조여왔다. 머리가 아득해진다. 양팔을 빼내어 마구 휘저어 보았지만 타격을 제대로 먹일 수가 없었다. 오히려 박치기가 빡 들어왔다. 그걸로 정신이 나가기 직전에 다리를 차올려 겨우 뒤집는 데 성공했다. 무겁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다. 90킬로만 되었어도 목 졸려 죽은 해결사가 되었을 거야. 죽어서 큰 창피를 당할 뻔했다. 아니 지금도 상당히 부끄러운 상황이다. 박치기를 먹은 오른쪽 눈이 희미했다. 

어둠이 저 녀석을 돕고 있다. 스위치는 어딨지. 총은 현관 입구 쪽에 있었다. 상대는 공격을 서두르지 않는다. 권투 자세를 잡았다. 크게 휘두르면 안 돼. 그러면 때려도 팔이 잡혀. 그럼 끝이야. 털보가 말했었다. 짧게 끊어쳐야지. 

태클이 들어온다. 아까보다 느려서 움직임이 보였다. 다리를 잡혔을 땐 몸을 낮추고 발을 최대한 뻗고 무게를 실어. 중심을 잃으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줄까? 털보의 털이 얼굴을 쓸던 감촉이 떠오른다. 권투로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완패했었다. 

상대는 힘이 부쳤는지 몸을 돌려 빠져나가려 했다. 그는 상대의 양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넣어 힘을 줬다. 이 상태에서 벽으로 밀어붙이면 된다. 그런데 가슴이 있었다. 게다가 너무 커서 팔이 걸려버렸다. 

여자다.

순간 그의 몸이 떠오르더니 크게 앞으로 넘어가 버렸다. 업어치기다. 신발장 모서리에 허리가 걸려 끊어질 거 같았다. 팔로 머리를 가드하며 구르는데 추가 공격이 들어오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벽을 짚고 일어났다. 등을 기댄 채 상대를 노려본다. 

한걸음 다가온다. 몰래 손을 뒤로 돌리고

두 걸음 째. 스위치를 찾는다. 

탈깍. 

불이 번쩍 들어왔다. 여자가 눈을 가리는 틈에 발로 배를 밀어 차서 거리를 벌렸다. 육탄전 쪽은 승산이 없다. 총을 집어 겨누고 보니 상대는 침대에 쓰러져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침대보와 바닥에 피가 흥건해 있었다. 자신의 손과 옷에도. 

허리를 칼에 찔린 조그만 여자에게 죽도록 맞다니. 한숨이 나왔다.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귀가 눈에 들어왔다. 약간 눌린 귀. 

 

그 귀다.

 

“고개를 돌려 봐” 나직하게 말했다. 

그녀가 고개를 힘겹게 들었다. 

그녀였다. 

상대도 알아보았는지 눈빛이 움직였다. 

그는 총을 겨눈 채 움직이지 못했다. 

어제 잠들기 전에 내내 머릿속을 채웠던 그 여자가 침대에 누워 총알을 기다리고 있다. 평소 하던 대로 탄알 셋을 저 몸에 밀어 넣고, 흔적을 지우고, 술을 마시고, 그렇게 살아가면 된다. 

그때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아파서인지, 체념해서인지. 약한 미소다.

 

그 순간 모든 게 변했다.

 

 

 

<인간의 증명> 8장

 

경찰은 하루종일 온 시내를 들쑤셨지만 소득이 없었다. 어제 그 새끼를 찾아서 죽여놔야 잠이 오겠는데 말야. 발포 건은 총기사고로 처리해서 정직은 면했지만 총을 압수당했다. 그래도 이게 있으니까. 경찰봉을 구둣발에 툭 툭 치며 생각했다. 

찾기만 하면 요걸로 곤죽을 만들어 줄 작정이었다. 그다음엔 무릎을 꿇리고 빌게 해야지. 다른 녀석들이 그랬던 것처럼. 

해가 떨어질 때까지 술집들을 죄다 기웃거려 봐도 코빼기도 안 보였다. 어제 그 바에 가서 바텐더를 족쳤지만 자주 오는 손님이라는 거 말고는 더 나오는 게 없었다. 단골이라면 집이 이 근처거나 회사가 이 근처이거나. 왜 안 보이는지 조바심이 났다. 자신을 엿먹인 놈은 철저히 되갚아준다. 다시는 덤빌 생각도 못 할 정도로. 그게 이 사회의 정의다. 

그놈을 찾아 죽이고 나면 그 연놈들 차례였다. 말하는 싸가지를 보면 대학생들인 게 틀림없었다. 사내새끼는 죽여버리고 여자애는 데리고 놀다 처리해야지. 가슴이 죽였는데 **. 그 새끼 때문에 아 **. 

다리가 아파서 노천에 파라솔이 있는 테이블에 무작정 걸터앉았다. 

“야 적당히 먹을 것 좀 내놔 봐.“ 쳐다보지도 않고 말을 던졌다. 조금 지나서 동양계 웨이트리스가 튀긴 감자와 주스를 탕 하니 내려놓았다. 

“야.”

“왜요?” 쭉 찢어진 눈초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야 이 노랭이 ***이. 뭐 불만있냐?” 

안 그래도 폭발하기 직전인데 오늘 시체 하나 보겠군. 

주인이 화들짝 뛰어나왔다. 

“아이고 이거 죄송합니다. 얘가 일한 지 얼마 안 돼서요. 몰라뵈었나 봅니다. “ 

주인은 여종업원을 들이 밀다시피 안으로 감췄다. 경찰이야 경찰 하는 소리가 가게 안에서 흘러나왔다. 

“아 **. 오늘 일진이 왜 이런지 모르겠네.” 

혼잣말을 하며 지나다니는 여자들을 노골적으로 쳐다봤다. 추파도 좀 던지고 노닥거리는데 사내 셋이 옆자리에 앉았다. 운동을 했는지 제법 건장해 보였다. 운동선수거나 체육 특기생이겠지. 잘됐어. 경찰봉을 안 보이게 허리 뒤춤에 끼워 넣었다. 

“와. 니들 게이냐아? 사내놈들끼리 머하냐.” 

셋 중 덩치가 가장 큰 녀석을 노려보며 말을 던졌다. 

“이거 뭐야?” 의자가 쿠당 하고 넘어지더니 검은 쪽 놈이 다가왔다. “왜 시비야 아저씨?”

“아 그냥. 심심해서.” 일어나며 실실 웃었다. “뭐해 병신들아. 따라와” 

빌딩 사이의 골목으로 들어갔다. 무슨 건물을 앞면만 닦아 대는지, 조금만 옆에서 보면 먼지가 가득했다. 쓰레기와 담배꽁초가 물 위에 둥 둥 떠있다. 작은 외등이 들어와 있기는 했지만 으슥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 예상대로 세 녀석은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따라 들어왔다. 

“잘 왔다 얘들아.” 그는 경찰봉을 뽑아 들고 휘두르기 시작했다.

 

“제발 그만..”

“뭘 그만해 임마. 졸라 센 척하더니. 아이고 다들 약골이구만. 요즘 학생들이란 것들이 다 이 모양이지. 핸드폰 다 내놔 봐.”

쓰러져 있는 녀석들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사진을 뒤져 봤다. 

“아이 씨. 무슨 까리한 여자 사진 하나 없냐아. 이 새끼들 진짜 게이 아냐?” 

실망하고 있는데 한 녀석 가슴에 노란 배지가 보였다. 

그 연놈들도 달고 있었지. 노력한 보람이 있구만. 역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거야. 

순서는 달라졌지만 여자 쪽부터 찾아서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인간의 증명> 9장

 

맥은 쏘지 못했다. 

팔을 떨어뜨리고 의자를 끌어당겨 옆에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당신이었네요.” 여자가 작은 소리로 말을 건다. 옆구리에서 아직 피가 흐르고 있었다. 

“붕대.”

“네?”

“붕대 있나?”

“네. 욕실 앞에 꺼내 놨는데.” 몸을 일으키려 해서 제지하고 붕대를 찾아 돌아왔다. 여자의 허리에 단단히 감았다. 가슴이 팔을 스쳤다. 옷장에서 옷을 대충 집어서 던져줬다. 

“옷도 좀 입어.”

“조직에서 나왔군요. 집에 들이닥칠 줄은 전혀 몰랐어요.” 그녀는 반바지에 다리를 힘겹게 꿰어 넣으면서 물었다. “왜 안 쏴요?”

“이제 그만 하려고.”

“좀 더 빨리 그만두시지. 배가 아파요.”

“시끄러. 난 온몸이 욱신거려.”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러니까 왜 그런 일을 하고 다니는 거야. 시위하는 걸로는 부족했나?”

“그건 그거고. 이건 아빠의 복수에요.”

“그 정도 마음가짐으로 안 돼. 한 명도 죽이지 않았지? 기회가 될 때마다 명줄을 끊어 놔야지. 아까 날 죽일 기회도 있었잖아. 그래서는 개죽음을 당할 뿐이야.”

“그런 거 같네요.” 그리고 또 그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안 죽었잖아요.”

 

이 미소를 계속 볼 수 있다면. 

그는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며 말했다. “걸을 수 있겠어? 병원은 바로 앞이긴 한데.”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났지만 금세 비틀거렸다. 

“피를 많이 흘려서 그래. 업혀.” 

총을 꺼내 안전장치를 채워 호주머니에 꽂았다. 몸을 돌려 앉으니까 그녀가 풀썩 등에 기대 왔다. 붕대로 고정한 옆구리가 비틀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밤거리는 싸늘했다. 술에 취한 여자,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회사원들, 실랑이를 벌이는 연인들. 그는 자연스럽게 그들 사이로 녹아들었다. 바람에 얼굴은 차가웠지만 등은 따뜻했다. 양손에 만져지는 다리의 맨살이 부드러웠다. 움직임이 없어서 기절했나 싶었는데 조그만 소리로 얘기를 시작했다. 

“시카고에서 일하는 거죠?”

“그랬었지. 아까 그만뒀지만.”

“당신들이 아빠를 살해했어요. 작은 쌀집인데 그것까지도 욕심이 났던가 봐요. 대가 세셔서 절대 굽히지 않았죠” 그는 듣고 있었다. 

“하루는 아저씨 같은 사람들이 잔뜩 몰려와서는 가게를 다 때려 부수고 아빨 끌고 갔어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구요.”

“본보기 같은 거야. 안 그러면 통제가 안 되니까.”

“흥. 본보기 같은 소리 하시네요. 아저씨도 아빠 같은 사람 많이 죽였죠?”

“난 전투 담당이야. 다른 조직에서 시비를 걸거나, 혹은 헤라클레스 - 너 같은 경우 말야. 맞지?”

“네. 그때부터 이 거리에서 혼자 살았거든요. 여기 애들은 무척 거칠어요. 저처럼 가족을 잃은 애들도 많고. 하루가 멀다 하고 훔치고 싸우고 난리였죠. 앗..” 여자가 꿈틀거렸다. 그는 걸음을 멈췄다. 

“아프냐?”

“아뇨 다리가 간지러워서요. 아저씨 손요. 하하”

“아.” 손을 허벅지에 꼭 붙여 간질거리지 않게 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싸움은 꽤 잘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쌀가마니를 잘 날랐거든요. 일대일 싸움에서는 져 본 적이 없어요. 아저씨랑도 다시 싸우면 안 질걸요?”

“잘났다.”

여자는 아랑곳없이 말을 이었다. “그랬는데 한 번은 총을 꺼내는 녀석이 있었어요. 삼촌 총을 들고 왔다던가. 총알이 머리를 스치는데 여러 가지 생각도 같이 스쳐 가더라구요. 그래서 공부를 시작했죠. 혼자서 조직을 다 없앨 수는 없으니까. 경찰청장이나 시장이 되려 했죠.”

“그래서 학생회장까지 잘하고 있던데, 그렇게 쭉 할 것이지 웬 헤라클레스 놀이야.”

“분명 헤라라고 적었는데? 복수의 여신요. 왜 헤라클레스가 된 건지 모르겠네요.” 작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 미소를 짓고 있겠구나. 얼굴을 볼 수 없는 게 아쉬웠다. 

“정공법으로 조직을 없애는 거, 그건 시간이 좀 오래 걸리기도 하고. 그냥 제 마음의 불꽃 같은 거라고 하죠. 근데 집은 어떻게 찾은 거에요?”

“핏자국. 지혈을 했어야지.”

“워커는 중간에 흙에 털었는데. 관찰력이 대단하시네요.”

얘기하다가 조직에 보고한 게 생각났다. 핏자국을 지워야겠어. 

그녀를 응급실에 눕히고 치료하는 걸 지켜봤다. 의사는 피를 많이 흘려서 그렇지 상처가 깊지는 않다고 했다. 

“마리.”

“어 이름을 아네?”

“영웅놀이 같은 거 그만둬. 핏자국을 지우고 내가 사라지면 너랑 연관시키기는 어려울 거고. 더 일을 벌이지만 않으면 안전해.”

“아저씨는 괜찮아요? 저도 같이 가요. 도움이 될 텐데.”

“필요 없어.” 그 말을 뒤로하고 나왔다. 마리는 힘이 부쳤는지 눈을 감고 있었다. 

 

 

 

<인간의 증명> 10장

 

병원 앞에 대기하고 있는 빨간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왔다. 비가 툭 툭 떨어진다. 그 새 싸리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의 무게를 느끼지는 못하지만 어느새 흠뻑 젖는다. 잘됐어. 길바닥의 핏방울은 놔둬도 되겠군. 

그래도 시간이 부족했다. 아디다스 백에 리볼버와 탄창 박스, 금고 안의 현금다발을 쓸어 담았다. 사무실에서도 슬슬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문을 나섰다가 다시 들어와 테이블 위에 있는 토라의 사진만 챙겼다. 가방을 보조석에 던져 넣고 지프를 몰아 마리의 원룸으로 향했다. 스피커에서 킨의 노래가 흘러 나온다. 그 와중에 담배를 하나 피워 물었다. 한 손으로 운전하는 건 아주 익숙하다. 운전 중에 총도 쏴 본 적 있으니. 

세 곡이 끝날 때쯤 주차장에 차를 넣었다. 그녀의 방에 가 보니 달라진 건 없었다. 분홍색 커튼, 레이스 침대. 피가 얼룩져 있는 하얀색 이불. 취향은 공주야. 

수건에 물을 묻혀 현관 손잡이와 도어락의 핏물을 닦고 홑이불과 수건을 돌돌 말아 세탁기에 쑤셔 넣고 주차장으로 나왔다.

 

“일은 다 한겨?”

뒤에서 키즈가 나타났다. 가슴이 덜컥했다. 뒤에 졸개 세 명을 달고 있었다.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시체는?”

“안에 있지.”

“이 새끼가 거짓말은. 안에 없다던데.” 졸개를 보며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셋 다 총을 들고 있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병원에 간 사이에 흔적을 따라 들어와 봤겠지. 아니면 감시하고 있었거나. 그와 키즈, 둘 다에게 임무를 맡겼을지도 모른다. 이제 그녀도 발을 뺄 수가 없겠구나. 

“왜 그런겨? 손이 떨려서 못 쏜 거여?”

“일 그만두려고.”

“잘됐군. 그런데 그건 불가능하잖여?” 졸개들이 철컥 하며 공이를 세운다. 

“알고 있어.” 

넷을 한꺼번에 쏘기는 어렵다. 술이 들어간 지 만 하루가 지나서 손도 심하게 떨렸다. 게다가 몸을 숨길 데도 없는 주차장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서 있어서야.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기다려 봐야 차가 들어올 기미도 없다. 

“야. 원망은 마라. 니가 자초한 일이니. 나도 잠 줄이면서 니 뒤처리나 하고 앉았잖여.” 키즈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한다. “그래도 한때 괜찮은 총잡이라고 하던 녀석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가지고는...”

“첫 번째야.”

“뭐라냐?”

“첫 번째 총잡이라고. 넌 나보다 항상 늦었잖아.”

“허어 이 새끼가.”

“라티노들과 싸울 때 말야. 내가 다 끝냈지. 넌 차 뒤에서 오줌 지리고 있었잖아?” 일부러 가장 싫어하는 얘길 꺼냈다. 졸개 하나가 피식 웃다가 키즈가 노려보자 황급히 표정을 굳힌다. 

“이게 끝까지 사람 열받게 만드네.” 키즈는 그의 손이 떨리는 걸 보며 말을 이었다. “새끼, 총 하나 쥐어 줘 바라.” 

“어 형님...” 졸개들은 주저했다. 

“잘 봐. 누가 위인지 똑바로 보고 떠들어 대. 야 그냥 야 니꺼 꺼내 들어. 별 등신 같은 게 예전에 좀 날렸다고 날 무시해버려잉? 넌 저기 저-기 가서 서 봐.” 총구를 이리저리 흔들며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다섯 걸음 걷는 거다. 야. 니가 세라.” 

손은 벌벌 떨리고 다섯 세는 도중에 튈 수도 없었지만 그냥 죽는 것보다 나았다. 여기서 죽어버리면 그녀도 잡혀서 온갖 고초를 겪다가 묻히겠지. 왼손으로 오른손을 비벼대면서 일어났다.

 

“하나.”

그간 무수한 총격전을 겪어도 죽음을 두려워해 본 적은 없다. 아니,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고 하는 게 맞을 거 같다. 이러다 죽으면 죽는 거고 했었지.

“둘.”

이번엔 꼭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숨을 들이마시고 손을 쳐다보았다. 진정이 되지 않았다. 이 상태로는 팔을 들어 올리지도 못하겠는데.

“셋.”

총을 움켜잡았다. 어쨌든 쏘기는 해야지. 토라가 빨리 쏘는 자세에 대해 말했던 걸 떠올렸다. 평소처럼 팔을 앞으로 쭉 내밀면 늦어. 힙샷이야. 기억해 힙샷. 몸을 기울여 낮추고 엉덩이께에서 바로 쏘는 거야. 먼저 쏘기만 하면 맞은 상대는 몸이 비틀려서 너한테 날아오는 총알은 빗나가는 거야.

“넷.”

그녀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돌봐 줄 사람도 없었는데. 그런 환경에서 어떻게 그런 미소를 가질 수 있었을까? 가슴이 뜨거워졌다.

“다섯.”

총성이 울려 퍼졌다. 그는 네발을 쐈다. 머리 하나당 하나씩. 첫 두 발은 정확하게 들어갔다. 키즈와 한 녀석이 풀썩 쓰러졌다. 나머지 두 방은 빗나갔다. 역시 손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예전 같았으면 다리라도 맞췄을 텐데. 자동차 사이로 몸을 던지는데 총성이 되돌아왔다. 다리에 한 방 맞았다. 어쩐지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했더니 키즈에게 겨드랑이 근처에 한 방 맞은 모양이다. 왼쪽 허리까지가 축축해졌다. 스친 것도 아니고 총알이 박혔군. 심장에서 몇 센티 거리였는데 그게 언제나 키즈와 그의 차이였다. 

총알이 계속 날아와서 차를 때렸다. 몸을 더 숙였다. 그에게는 단 두 발의 총알이 남았다. 적은 두 명. 어떻게 되고 있는지라도 보려고 머리를 들었다가 눈앞이 깜깜해지며 고개가 땅에 쿵 떨어졌다. 

‘더 이상은 운이 따르지 않는군.’ 마지막으로 그녀를 한 번만 너무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