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짧은 소개글

<인간의 증명>은 전작인 '최강의 군단'의 홈페이지에 게재되었던 공식 단편 소설로, 플레이어블 캐릭터인 '맥'과 '마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

이 글은 전작을 애정했던 업로더가 원문을 복사+붙여넣기 한 뒤 간단한 오타만 수정한 채 개인 소장했던 것임.

나이트 워커와 맥이 흥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카라이브에 업로드함.




<인간의 증명> 11장

 

그가 아는 모두가 커다란 원반 위에 서 있다. 귀가 하나 없는 털보, 그리고 토라, 어 토라는 죽었는데? 얼굴이 먹구름이 낀 것 같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도 원반 끝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래 저 모습이었어. 어렸을 때 본 기억이 나는군. 가슴에 구멍이 뚫린 키즈가 소리쳤다. 내가 최고의 명사수다! 원반은 엄청난 속도로 빙빙 돌고 있었다. 마리가 바짝 화가 난 얼굴로 소리쳤다. 니가 내 아빠를 죽였어! 마리가 그의 얼굴을 붙잡고 말했다.

“정신 차려요. 경찰이 오고 있어요!” 눈을 떠보니 그녀가 있었다. 호흡이 거칠어서 따스한 숨결이 얼굴에 느껴졌다. 소원이 이루어졌어. 가만히 얼굴을 보며 웃었다. “지금 멍하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그는 호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내밀며 힘없이 말했다. “내 가방을... 병원은 안돼. 알게엤지이….” 그리고 다시 암전.

 

덜컹하면서 몸이 시트에서 떴다 가라앉았다. 차가 크게 흔들렸다. 왼쪽 가슴의 총알 하나가 그를 바위처럼 짓누르고 있었다. 

“미안해요. 운전은 익숙지 않아서.” 그녀가 지프를 몰고 달리고 있었다. 끼익 끼익. 와이퍼가 작동 중이었다. 비가 오는군. 끼익 끼익. 

“병원은 안돼” 속삭이며 다시 눈을 감았다.

 

온갖 기억들이 실체가 되어 그의 눈앞을 날아다녔다. 그가 죽여야 했던 상대 조직 총잡이들의 마지막 표정, 단말마, 보스는 땅콩 대신 사람의 손가락을 씹어대면서 호통치다가 아버지의 모습이 되곤 했다. 그렇게 악몽의 바닥을 떠다니다가 차가운 칼날이 얼굴을 긁는 감각에 눈을 번쩍 떴다. 저지하려고 팔을 들다가 고통이 신경을 타고 올라와 신음을 흘렸다.

“가만히 있어요. 면도 중이니까.” 마리가 면도날을 들고 그의 몸 위에 올라와서 얼굴을 가까이 숙이고 있었다. 채 말리지 않은 그녀의 머리에서 달콤한 향기가 났다. 

“거의 다 했어요. 움직이지… 아 거참. 움직이지 말라니까.” 그녀의 무릎이 그의 다리 사이를 누르고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다 됐다. 와 이거 봐요. 수염 깎으니까 꽤 미남인데.”

“여긴?” 입술이 바짝 말랐다.

“우리 학생회실이에요. 학교 안요. 의대생 하나 시켜서 총알을 빼냈어요. 경험이 없어서 그렇지 실력은 진짜 의사 못지않아요.“

“얼마나 지난 거야?” 창틈으로 빛이 충분히 들어오고 있었다.

“12시간?” 생각보다 많이 흐르지는 않았다. 대학교 내부라면 찾아내기도 쉽지 않겠지. 몸에 힘을 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화이트보드에 마커로 무슨 구호 같은 게 쓰여있었다. 만들다 만 대자보가 몇십 년은 된 거 같은 책상들 사이를 기어 다니고 있었다. 기울어진 의자 위에 그의 아디다스가 보였다. 그 와중에 가방을 챙겨왔다. 꼼꼼한 여자다.

그의 시선을 쫓던 그녀가 가방을 들고 왔다. 몸을 조금 일으켰다. 다리는 스친 정도인 거 같은데 겨드랑이가 편치 않았다. 열어서 현금을 확인하고 총을 몇 개 꺼내서 실린더를 열고 철컥, 돌리고 뜨르르륵, 닫고 찰칵 너무나 많이 해서 익숙한 동작이다.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그녀가 걱정스럽게 보고 있었다.

“일이 잘 안된 거죠?”

“네 집이 들켰어. 우린 둘 다 추적당할 거야.”

“저도 같이 싸울게요.”

“넌 어딘가 숨어 있어. 이건 애들 일대일 싸움 같은 게 아냐.” 라고 말해놓고 피식 웃었다. 키즈와 애들 일대일 싸움 때문에 목숨을 연장한 게 아닌가. 

“뭐가 웃겨요 아저씨?”

“그 아저씨라 안 부르면 안 될까?”

“그러고 보니 나이가 생각보다 많지 않은 거 같네요. 수염이랑 말투 때문인가?”

“그러는 너는 공부하는 대학생이 그렇게 짧은 핫팬츠가 뭐냐. 바지를 입었는데 엉덩이가 다 보이겠다.”

“어머. 아저씨가 골라 준 거잖아요. 어제?”

“어쨌든 니 옷이잖아.”

“음. 룸메이트 옷이에요.” 그러고는 당차게 하하 웃었다. “이런 옷이 필요할 때가 있어요. 여자잖아요. 그만 쳐다봐요. 자꾸 그러면 아저씨라 부를 거에요.”

이미 아저씨라 부르고 있잖아. 네다섯 살 차이밖에 안 날 텐데. 

잠시 일어나 앉아 있었더니 어지러워졌다. 옆으로 쓰러지는 걸 그녀가 와서 안았다. 

“잘 자요 아저씨.” 좀 더 안고 있어 주지. 그는 아쉬운 채로 잠이 들었다. 그 모습을 문가에서 남학생 하나가 무표정하게 보고 있었다. 손에 주사기를 들고서.

 

 

 

<인간의 증명> 12장

 

팔이 따끔해서 본능적으로 밀어냈다. 그때 그 녀석이다. 이름이 필이었던가. 경찰에게 맞은쪽 눈이 멍들어 있었다. 주사기가 팔에서 툭 떨어졌다.

“마리는 어딨지?” 멍한 머리로 말했다.

“넌 이제 끝이야. 마리는 내가 데려갈 거야.”

“뭐…”

“마리는 너 같은 쓰레기가 넘볼 여자가 아냐. 내 거라고. 다시는 아무도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겠어.”

급하게 몸을 일으켰지만 구토가 밀려왔다.

“이게..”

“마취제 같은 걸 좀 찔러 넣었지. 경찰에도 신고했어.” 쫓아가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필이 뒷걸음질로 방을 나가면서 말했다. “마리는 꿈도 꾸지 말라고. 밑바닥 인생 주제에.”

주사기를 뽑아 코를 댔다. 냄새가 프로포폴이다. 화장실에 기어가서 잔뜩 토했다. 나올 게 없을 때까지 토했다. 삼십 분 정도 그렇게 변기를 붙잡고 찬물에 얼굴을 넣고 있으니 서서히 정신이 들었다. 마취제가 많이 들어가지는 않은 거 같았다. 

가방을 집어 들고 방을 나섰다. 약기운에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다. 몇 층이지? 계단은 어디지? 시간은 벌써 저녁 무렵이었다. 조직에서도 사람을 풀었을 텐데. 

계단을 찾아 난간을 부둥켜안고 엉금엉금 내려갔다. 마주친 학생들이 웃거나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아무리 내려가도 끝이 없는 느낌이었다. 마침내 일층 학생 식당에 도착했다. 밥때가 아닌지 서너 명이 따로따로 밥을 먹고 있었다. 

마리가 지프를 어디에 세워뒀을까 추리하며 손잡이를 돌려 나가려는데 문 바로 뒤에서 익숙한 소리가 가까워진다. 이 장소에서 날 소리가 아닌데. 철그럭 철그럭 하는 금속 부딪치는 소리. 권총은 아니고. 소총이다. 그것도 꽤 묵직한. 가방을 급하게 열다 지퍼가 걸렸다. 있는 힘을 다해 식당 조리실 방향으로 뛰어 들어갔다. 

뒤쪽에서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소총이 불을 뿜었다. 책상이 부서지고 조리실을 둘러싸고 있는 돌이 파파팍 튀었다. 문을 차는 것과 거의 동시에 총소리가 들렸어. 이렇게 빠른 판단이라니. 

오드리다. 

지퍼가 걸렸던 게 다행이다. 그녀의 차가운 소총 앞에 리볼버 들고 서 있어 봤자 벌집이 되었을 거야. 학생들과 식당 아주머니들이 겁을 먹고 꺄악-댄다.

지퍼를 당기고 밀고- 풀면서 소리쳤다. “오드리!”

“땅콩이 널 죽이래. 그래서 왔어.” 언제나처럼 건조한 목소리. 그녀는 보스를 땅콩이라 불렀다.

“사람들은 내보내면 어떨까?” 그는 학생들 때문에 마음대로 총을 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지퍼도 열리지 않고. 아. 열렸다.

“알았어. 대신 빨리 내보내. 경찰이 도착할 거야.”

“여러분!” 그는 있는 힘껏 소리쳤다. 왼쪽 가슴이 땡겼다. “이곳은 총격전이 벌어질 예정입니다. 고개를 숙이고 건물을 나가세요.” 이어서 오드리에게 말했다 “거기 그렇게 서 있으면 사람들이 못 나갈 텐데.”

“귀찮게 하기는.” 

오드리가 대답했다. 목소리로 위치를 파악해 놓는다. 마지막으로 식당 아주머니가 문을 나가는 게 보였다. 

“시작할게 맥.”

감정 없는 목소리와 함께 머리 위 양철 선반에 캉캉 총알이 박혔다. 그녀는 한방 한방 겨눠서 쏘기보다 스윽 스윽 흔들어 대충 쏘는 스타일이다. 총알이 떨어질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정문은 돌파당했지만 조리실 입구는 필사적으로 막아야 했다. 콰과쾅 하며 식당 여기저기가 터져 나갔다. 고개를 숙이고 손만 살짝 내밀어 총소리가 나는 방향에 대응사격을 하면서 쉴 새 없이 움직였다. 테이블을 문짝에 밀어 세우고, 다 쓴 리볼버를 던지고 새로 꺼낸다. 장탄을 다시 할 시간 같은 건 없다. 다시 타타탕, 타타탕. 잠깐의 틈에 의자 두 개를 한꺼번에 겹쳐 쌓는다.

“맥. 술에 절어 산다더니. 총알에 힘이 없구나.” 총소리 사이에 그녀의 무감정한 말이 들린다. 감정의 가감이 없으니 그녀의 평가는 항상 믿을 만했다.

총이 선반을 훑고 지나가자 식칼과 조리도구들이 우당탕탕 하며 주변으로 떨어졌다. 선반 금속 면이 깔끔하게 반사되어 그녀의 모습을 흐릿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팔만 쑥 내밀고 총을 뒤쪽으로 꺾어 그녀를 쏘았다.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그녀는 급히 소총을 들고 돌격자세로 우측 긴 테이블에 자리를 옮겼다. 다시 금속 면을 따라 가로 움직여서 아까와 같이 사격. 그녀의 머리가 홱 돌아갔다. 맞췄다 싶었는데 금세 모습이 사라지더니 위쪽 선반 면에 총알을 쏟아붓고 있었다. 

아깝군. 눈치챘네.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하게 판단한다. 아군일 때는 좋았는데. 돈으로 움직이는 용병은 어쩔 수 없다. 어제의 아군이 오늘의 적이 되는 세계니까. 반짝반짝하던 금속 면은 울퉁불퉁하게 꺼져 있었다. 이 작전은 더 이상 쓸 수 없다. 

리볼버를 네 개째 집어 들었다. 잠시 조용하다 싶었는데 조리실 문에서 쿵 하며 테이블과 의자가 진동했다. 발로 걷어차고 들어올 생각이었겠지. 특수경찰 돌격팀 방식이다. 그 힘에 살짝 문틈이 열리더니 책상의 무게로 다시 닫혔다. 이거 열리면 끝이라고 생각해서 리볼버 두 자루를 들고 문틈과 창문에 열두 발을 전부 쏟아 부었다.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창문이 깨져 나갔다. 가방을 들고 한 손으로 총을 꺼내 들면서 벽에 붙었다. 남은 총은 이제 한 자루. 기다린다. 문을 돌파하기는 어렵다는 걸 알았을 테니 다시 조리대 쪽일까. 

소리가 없다. 방금 총에 맞은 건가? 조리실 선반 너머 테이블들을 살피는데 조리실 창문 깨진 틈으로 그녀가 날아 들어왔다. 우아하다. 뒤로 물러났다가 뛰어들어온 거야. 그 자세에서도 소총을 겨눈다. 피할 데가 없다. 본능대로 뒤로 물러나면 황천길이다. 반대로 그녀를 향해 낮게 뛰어 들어갔다. 몸이 엉키고 주먹이 오고 간다. 리볼버는 언제 떨어졌는지 알 수도 없었다. 그녀가 소총을 두 손으로 쥐고 버티려 했지만 완력은 그가 더 강했다. 그녀 위에 올라탄 상태에서 옆구리를 강타하고 한쪽 팔을 잡아 뺐다. 그 순간에도 그녀는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는 이미 뒤쪽으로 넘어간 상태여서 애꿎은 형광등만 터트렸다. 총을 빼앗아 들고 뒤로 물러나 그녀를 겨눴다.

“거길 넘어올 줄이야. 생각도 못 했어.”

“넌 죽이기 쉽지 않네. 힘들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난 갈래.“ 

단조롭고 억양이 약하다. 세상에 없을 미모를 가지고도 정이 안 가는 여자였다.

“이봐 장난해? 내가 쏠 수도 있잖아.”

“넌 안 그럴 거야.” 그녀가 부시시 일어나서 치마를 탁탁 털었다. “게다가 총알도 없어 그거.” 이런. 마지막에 방아쇠를 당긴 게 그것 때문이었군. 돌격소총의 총알을 다 세면서 싸우다니.

“돌려줘 내 총. 비싼 거야.” 

그는 총을 던졌다.

“다시 올 거야?”

“아니. 넌 수익성이 없어. 게다가 내가 죽을 위험도 크고. 포기할래.”

밖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네가 죽였어야 할 여자애는 사무소에 붙들려 있더라. 왜 안 죽였어?” 그녀가 물었다. 얼굴에 표정이 생겼던 거 같은데. 호기심인가. 저녁 햇빛이 비쳐서 잘못 본 걸 거야. 그녀는 감정 없는 용병으로 유명했다.

몸을 일으켜서 총들을 가방에 수거했다. 그 녀석. 마리를 데려간다더니 제 발로 죽을 자리로 들어가 버렸군.

 

오드리가 나가고 잠시 후 학생회 건물을 나왔다. 사이렌이 거의 도착했다. 빠른 걸음으로 건물 뒤편 주차장에서 지프를 찾아 뒷문 쪽으로 빠져나왔다. 결국 조직과 정면승부를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한 손으로는 운전을 하면서 다른 손으로는 총알을 하나하나 끼워 넣었다.

 

 

 

<인간의 증명> 13장

 

경찰은 이틀째 대학교 주변을 배회했다. 배지를 조사해서 이 학교라는 것까지 알았는데 전공도 이름을 모르니 얼굴이 보일 때까지 돌아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번 찍으면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지나다니는 학생들을 붙잡고 협박도 하고 물어도 봤지만 자신이 얼굴을 잘 묘사하지 못한다는 것만 깨달았다. 학교 보안요원과 실랑이하다가 시간만 낭비하고 말았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어. 그런데 다른 방법이 뭐가 있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것들 잡으면 죽기 전까지 두들겨 줘야 화가 풀리겠어. 남자 놈이고 여자 놈이고. 아니 여자 년인가. 에이 **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림자가 슬슬 길어질 무렵이 되니 다리가 아팠다. 근처에 오토바이를 눕히고 매점에서 물이라도 얻어 가려고 학생회관 쪽으로 걸었다. 모퉁이를 도는데 건물 안에서 연속으로 커다란 총소리가 들렸다. 

‘어라 기관총이다.’ 가슴에 손을 넣었다. 총이 없었다. ‘**. 총은 뺏겼지.’ 입구에서 몇 명의 학생들이 우루루 뛰쳐나왔다. 들어갈까 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엄청난 양의 총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건물 다 부수겠네 새끼들. 무슨 전쟁 났나.’ 총도 없고 정문으로 들어가는 건 자살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그는 가만히 기다렸다. 이틀이나 기다렸는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잠시 후 총소리가 끊겼다. 경찰봉을 꺼내 들고 일어서니 문이 벌컥 열렸다. 늘씬한 여자가 소총을 들고 파파팍 걸어갔다. 경찰을 흘깃 보더니 뚱한 표정으로 차를 몰고 가버렸다. 

‘뭐지 저 여자는?’ 어이없이 보고 있는데 그 깡패 새끼가 나왔다. 술집에서 방해한 놈. 오호라 다 한통속이었구나. 너구리 잡으려다가 늑대를 찾은 꼴이었다. 깡패 녀석은 바쁜 걸음으로 차 문을 열고 들어갔다. 경찰도 오토바이를 향해 뛰었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무전기를 켰다. 대학 학생회관에서 총격전. 시카고 조직 내 싸움일 가능성. 저놈 시카고 소속이었군. 그는 그들을 잘 알았다. 거리를 적당히 유지하며 지프의 꽁무니를 쫓았다.

 

 

 

<인간의 증명> 14장

 

아직 저녁 6시인데 구름이 잔뜩 껴서 벌써 어둑어둑하다. 지나가는 차들은 하나둘 불을 쳐들었다. 가로등이 뿌옇게 조명을 깔아 준다. 맥은 지프를 클럽에서 반 블록 떨어진 곳에 세웠다. 가슴이 뻐근하고 다리가 땡겼다. 걸음이 불편해서 다리의 붕대를 풀어보니 상처가 심했다. 근육을 관통했다. 더 움직이면 뼈가 상할 수도 있겠는데.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이까짓 다리 하나 걱정할 때가 아니다. 붕대를 강하게 압박하니까 걸음에 신경이 덜 쓰였다. 

머리가 핑 돌았다. 땅이 흔들흔들 거렸다. 

사람들이 모두 그처럼 주저앉아 있다. 

혼자만 어지러운 게 아니라 땅이 진짜 흔들리고 있었다. 이 도시에 지진이 났다는 얘긴 들어본 적이 없는데. 

땅이 진정되자 가방에서 리볼버를 꺼냈다. 클럽으로 들어가려는데 조직원 다섯 명이 우르르 튀어나와 흩어졌다. 운이 좋다. 아직 클럽을 열기 전이다. 그는 누가 어디에 몇 명이 박혀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카운터의 두 명을 처리했다. 쏘는 반동으로 리볼버를 빙글 돌린다. 빠르게 움직이면서 연속으로 사격을 해야 할 때는 리듬감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소음기가 있을 때와 없을 때, 글록과 콜트. 모두 돌리는 느낌이 다르다. 사무실 문 앞에서 또 한 명. 피슉. 빙글. 키즈의 졸개 녀석이다. 쓰러지는 게 어색해서 보니 어깨에 부목을 대고 있었다. 마리가 제대로 부러뜨려 놨군.

문 안쪽에서 보스의 고함이 들려왔다. 제대로 열이 받은 모양이다. 그는 흥분하면 정신을 못 차린다. 카운터 뒤로 가서 라이트와 음악을 켰다. 척 맨지오니의 푸르겔 혼이 울려 퍼졌다. 비트도 일을 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제 소음기는 필요 없다. 

총을 바꿔 들고 사무실 앞에 바짝 붙어 섰다. 문을 열고 고개를 내미는 걸 총으로 한방 갈기고 쓰러지는 걸 잡아 그대로 밀고 들어갔다. 총알이 쏟아졌다. 시체 때문에 시야가 다 열리지 않았지만 사무소 내부가 얼핏 보였다. 마리는 의자에 앉아 축 처져 기절해 있었다. 입술에 피가 흘렀다. 보스는 마리의 앞에서 놀란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누군가 이곳까지 들이닥친 적이 없었겠지. 

왼쪽에 두 명. 총알의 각도로 봐서 오른쪽에도 있다. 최소 세 명이다. 시체 겨드랑이 사이로 오른쪽 녀석을 처리하면서 잡고 있는 걸 왼쪽 두 명에게 집어 던졌다. 몸을 날려 소파 뒤로 뛰어들어가며 누운 자세로 총알을 날렸다. 가방을 끌어당기는데 가방에 총알이 빗발쳤다. 지퍼가 열리지 않았다. 총알 구멍을 찢어 총을 뽑았다. 손톱이 부러지며 피가 흘렀다. 

홀의 음악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로 넘어갔다.

누가 이런 음악을 넣어놓은 거야. 

소파의 반대쪽 끝으로 기어서 총을 하나 더 꺼내 양손에 하나씩 쥐었다. 가방을 반대 방향으로 쭉 밀어 던졌다. 소파 밖으로 가방이 나가자마자 총알받이가 되고 있었다. 즉시 몸을 일으켜 가방에 대고 총질하고 있는 나머지 두 녀석을 양손으로 한 발씩 발사해서 끝냈다. 와. 오늘이 컨디션이 최고군. 이런 게 되다니.

“야야 임마. 거기까지만 해라” 보스가 마리를 뒤에서 안고 한 손에 회칼을 들고 있었다. 총을 들어 노출된 부분을 쏴 보려 했지만 손이 흔들렸다. 좀 전의 자신감은 다 어디 간 거지. 도저히 쏠 수가 없었다.

“총 던져!” 보스가 마리의 목을 칼로 스윽 그었다.

집어 던지다시피 총을 버렸다. 보스는 원을 그리며 기절한 마리를 질질 끌고 문 쪽으로 이동했다. 사무소 문을 바로 뒤에 두고 쓰러진 시체가 잡고 있는 총을 집으려 했다. 

이제 끝인가. 너무 지쳤다. 토라가 항상 말했었지. 쏠 때 말고는 계속 생각해. 주변을 미리 둘러보고 상황을 계획해 둬. 

지금은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고-웨스트 하는 느린 노랫말이 더 느리게 들려왔다. 아픈 쪽 다리가 턱 꺾여 자리에 주저앉았다. 보스는 총을 잘 못 빼내고 있었다. 죽은 녀석이 너무 강하게 쥐고 있던 거군. 씨익 웃으면서 오른손의 칼을 보여줬다. 가까이 오지 말라고. 알아. 

“그러니까 자슥아.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기다. 오늘 보니까 날라다니더만. 그런 재능을 가지고 니 애비랑 똑같이 죽나. 신은 공평하다니께. 선물만 주는 게 아니라 폭탄도 앵겨준겨. 어-어- 움직이면 이년 목 딴다 알제?” 말을 하면서 시체의 손가락을 하나씩 풀어냈다. 

새끼손가락 하나 걸쳐있군. 저 손가락 길이만큼 목숨이 남았어. 

 

구둣발이 문 앞에 등장했다. 

보스의 비명이 들렸다. 한 사내가 경찰봉으로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패고 있었다. 

“아 드디어 찾았네 *새끼-들. 어-디서 내-앞에서 도-망갈려 -헉-” 신나게 때리던 경찰이 비명을 질렀다. 보스가 마리를 놓고 회칼로 경찰의 발등을 찍어 버렸다. 비틀거리는 사이에 보스가 벌떡 일어나서 칼을 놀렸다. 나이가 들긴 했지만 칼 솜씨가 상당했다. 경찰봉을 통파처럼 써서 버티는 상대를 벽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또 한번 땅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진동할 때마다 문 안으로 검은 그림자들이 스물스물 들어왔다. 두 사람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똑바로 쳐다보면 움직임이 보이지만 시야로는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는다. 움직임에 소리도 없다. 

내가 지금 정신이 나간건가… 헛것이 다 보이는군

“이, 이봐 그만 그만. 겨, 경찰이다.” 경찰이 비틀비틀 주저앉으며 소리쳤다.

“경찰 좋아하시네. 미친놈의 새끼.” 보스는 칼을 들고 경찰에게 다가갔다. 잠깐 시간이 생길 것 같았다. 몸을 움직이는데 절로 비명이 났다. 기어서 소파 옆의 가방을 집으려는데 보스가 돌아봤다. 

“매애애애액! 움직이지 말라했잖냐” 

경찰이 그 틈에 보스의 가슴을 경찰봉으로 때렸다. 앉아서 휘둘러서 느려 터진 약한 타격일 뿐이었다. 보스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피식거리고는 한쪽 팔로 가슴에 대고 있는 경관봉을 치우려 했다.

“바로 고거다. ***아.” 

경찰이 씩 웃으며 버튼을 눌렀다. 철컹하는 소리와 함께 긴 꼬챙이가 경찰봉 끝에서 튀어나와 보스의 가슴을 관통했다. 보스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경찰이 일어나서 보스의 몸을 꼬챙이로 쑤셨다. 

“아 이 새끼. 이 새끼.“ 

그가 가방으로 기어가는데 경찰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와 턱을 걷어찼다. 입에서 피 맛이 났다. 흐린 눈을 떠 보니 경찰이 꼬챙이를 들고 찌르려 하고 있었다. 다시 땅이 흔들렸다. 아까보다 더 심하게 흔들렸다.

“히야.”

여자의 괴성과 함께 경찰이 벌떡 넘어졌다. 마리가 정신을 차리고 움직이고 있었다. 경찰은 뒤집히는 순간에도 경찰봉을 놓지 않았다. 뒤쪽에 그림자들이 우글거렸다. 마리가 달려들었다. 

그는 마침내 가방에서 총을 꺼내 조준했다. 경찰이 마리에 가려 있다. 아직은 아니다. 그녀가 태클할 때를 기다린다. 마리의 상체가 쑥 내려가고 경찰은 그 빈 자리에 경찰봉을 찔러 넣었다. 맥의 총이 불을 뿜었다. 가슴에 맞추지 못하고 승모근 쪽에 총알이 들어간 거 같았다. 총에 맞아 휘청이는 걸 마리가 태클로 밀어붙였다. 벽 쪽에는 그림자들이 기다리고 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마리, 멈춰!” 그러자 그녀가 멈췄다. 관성 때문에 경찰은 벽까지 나동그라졌다.

“아이 **. 이년은 또 뭐 이래.” 투덜거리면서 경찰이 일어나는데 그들이 움직였다. 꿈틀대는 검은 그림자들. 경찰의 온몸에 기어올라 말 그대로 먹어 치우고 있었다. 경찰의 육체가 있던 공간을. 꿀꺽. 머리 한쪽 부분이 깔끔하게 없어진 경찰이 어이없는 눈으로 말했다. 

“이것들은 뭐야?” 

경찰의 신체는 다리가 먹히면서 무너져 내렸다. 그 위를 그림자들이 우르르 뒤덮었다. 땅이 또다시 흔들렸다. 천장에 균열이 생기고 전등이 홀에 내려앉으면서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벽이 파열되고 있다.

“나가요. 건물이 무너지고 있어.” 

마리는 그를 부축하고 그림자를 피해 클럽을 나섰다.

 

 

 

<인간의 증명> 15장

 

“술은 그만 마셔요.”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마리가 말했다.

“오늘만 좀 마시자. 어제는 너무 힘든 날이었잖아.”

“그래도 몸도 여기저기 상처 투성이여가지고…”

“괜찮아 괜찮아. 너는 미성년자니까 콜라 마셔 콜라.”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그녀와 마주 앉아 있으니 괜히 기분이 좋았다. 반대로 그녀는 전과는 다르게 웃음기도 없이 긴장해서 저 미성년자 아닌데요 라고 중얼거렸다.

“저기… 아저씨...” 그녀는 주저하며 말을 꺼냈다. “나랑 같이 말이에요..”

그 순간 뒤에서 누가 툭 치며 말했다.

“아 찾았다.” 향수 냄새가 확 풍긴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다. 마리와는 다르게 몸매를 너무 잘 드러내는 착- 붙는 진녹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하면 매력적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그걸 잘 이용할 줄도 알았다. 

“늦었잖아. 줄리아. 도와달랬는데 다 끝나고 오는 건 뭐냐.” 

“블랙시티에서 치워야 할 쓰레기가 좀 있었거든. 오우 이 여자애는 누구야? 애인이야 설마?”

“저는 이만 갈게요.” 마리는 다시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밝게 웃으며 돌아섰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한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따라 나가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와 기분 좋은 애네. 마음에 있는 거야?” 손가락으로 얼굴을 콕 찌르며 말했다. 대답하지 않았다.

“같이 뭘 하자는 거래?”

“나도 몰라. 근데 언제부터 듣고 있었던 거냐?”

“니가 여자랑 같이 있으니 의심스러워서. 뒤에서 좀 지켜봤지” 킬킬거리며 그녀가 손을 들어 술을 시켰다. 

“야. 넌 저런 애랑 안 어울려. 애가 그늘이 없잖아. 내가 딱 인데 말야. 데이트 신청이라도 좀 해봐.”

“넌 한 남자만 만나지 않잖아.”

“그렇긴 하지.”

그녀에게 최근 있었던 얘기를 해 주며 생각했다. 

‘마리가 마저 하지 못한 말이 뭐였을까… 줄리아가 한 말대로 난 밝은 하루의 해를 받으며 살아갈 여자와는 어울리지 않겠지.’

그녀가 잠시 어둠 속에 고개를 내밀었던 것뿐이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총알과 술 대신 커피와 연애를 즐기는 평온한 일상으로 살고 싶었다. 집 앞 직장인들처럼. 언젠가 그럴 수 있게 된다면, 그러면 한번 찾아가서 말을 걸어 봐야겠다. 밝은 표정에 활짝 웃는 그녀에게로.


-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