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짧은 소개글

<그녀가 인간을 보는 방법>은 전작인 '최강의 군단'의 홈페이지에 게재되었던 공식 단편 소설로, 플레이어블 캐릭터인 '오드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

굳이 따지자면 시간 순서 상으로는 <인간의 증명>보다 이전. 그리 중요한 사실은 아님.

이 글은 전작을 애정했던 업로더가 원문을 복사+붙여넣기 한 뒤 간단한 오타만 수정한 채 개인 소장했던 것임.

나이트 워커와 맥이 흥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카라이브에 업로드함.




<그녀가 세상을 보는 방법> 1장 


뒤쪽에서 사이렌이 앵앵거렸다. 백미러를 흘깃 보니 경찰차가 바짝 따라오며 손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다.

오드리는 쇼핑을 끝내고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과속을 했던가. 횡단보도 신호를 지나쳤나. 잘 모르겠다.

요즘 들어 자꾸 멍해진다. 오늘이 화요일인지 수요일인지. 무슨 옷을 입고 나왔는지. 옷차림을 점검해 보았다.

샤넬의 흰색 트위드 투피스. 속옷을 입었는지 옷 위로 만져 봤다. 괜찮다. 머리와 얼굴도 만져 보았다. 피도 없고 상처도 없다.

코끝을 스치는 손에서 담배 냄새가 진하게 났다. 창문이 열려 있었다. 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나 보다.

 

투아렉을 익숙하게 몰아 길가에 붙였다. 폭스바겐의 서브 모델인데 힘이 좋고 운전하기도 편해서 애용 중이다.

남편은 타라고 허락해 준 빨간색 페라리를 왜 타고 다니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경찰이 뚜벅뚜벅 다가오는 걸 확인한 후 차 문을 열고 일어났다.

단속에 자주 걸리는 편이라 얼굴만 보이는 것 보다 전신을 다 보여주는 게 효과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넌 룰을 잘 지키지 않아.’ 남편이 자주 하는 말이다. ‘다른 사람들도 생각해야지. 이기적이기는..’

 

다가오던 경찰이 숨을 훅 들이키는 게 보였다. 경찰이든 누구든 그녀를 보는 남자들의 반응은 비슷했다.

눈이 커지고 침을 꿀꺽 삼킨다. 짧은 치마를 입었을 때는 다리와 허벅지를 곁눈질하고, 가슴을 드러낸 차림이면 노골적으로 들여다본다. 

 

“아가씨. 꽁초를 버리셨습니다.”

“죄송해요.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 무안한 표정으로 살짝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지도, 우습지도 않지만 다른 사람을 관찰해서 습득했다.

“벌금은 5페니...지만 특별히 전화번호를 주시는 걸로 대신하겠습니다.” 벌금 용지의 뒷면을 내민다. 젊은 경찰일 경우 가끔 있는 패턴이다. 조심스럽게 웃는 표정을 유지하며 펜을 받아 숫자를 적어 주었다. 결혼했다고 얘기해서 산통 깰 필요는 없다.

벌금은 별거 아니지만 남편의 잔소리가 귀찮다. 사이드를 올리고 엑셀에 힐 끝을 걸었다.

경찰이 사라지자마자 얼굴이 곧바로 무표정해졌다.

 

현관에서 힐을 벗으며 거실을 보니 남편이 소파에 기대 배를 쓰다듬으며 캔맥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금발에다 키도 크고 근육을 잘 다듬은 남자였다. 잘 어울리는 커플이라는 얘기를 많이 듣곤 했다.

지금은 살이 좀 붙었지만 여전히 여자가 많다. 질투의 감정은 없다. 사랑이라는 감정도 없으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개의 회사를 전전했는데 제대로 버티질 못했다. 주어진 일은 잘해 냈어도 다른 사람과 관계에서 번번이 문제가 되었다. 상사가 미칠 듯이 화를 내거나, 회사에 찾아온 손님이 기분이 상해서 돌아가거나.

마지막 회사에서 만난 사람이 지금의 남편이었다. 그는 돈이 많았고 그녀를 원했다.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제정신이야 그런 멋진 남자를?’ ‘그럴 수도 있지. 야. 그래도 결혼해서 살다 보면 정이 생기는 거야. 낳은 정보다 키운 정이라잖니?’ 당시 직장 동료들이 말했다.

 

그 말과는 다르게 정이 생기지 않았다. 그녀에겐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남편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다른 사람이 드러내는 감정을 구분한다. 자신에게 그 감정이 없음을 확인한다. 그 표정을 익힌다. 그게 그녀의 생존방식이었다. 그래도 꽤 그럴듯하게 연기해 낼 수 있게 되었다. ‘저런 남자랑 자면 대단하겠다. 아우 생각만 해도 미치겠네’ 회사에 꽃을 들고 온 남편을 보고 여직원 하나가 그렇게 말했었다. **를 하면 감정이 생길까 기대도 했었다. 결혼 후 매일 밤 그녀의 몸을 탐하던 남편은 몇 달이 지나고는 더 이상 안지 않았다. ‘넌 바비인형 같아. 보기엔 미칠 것 같이 관능적이지만 **는 할 수 없는.’

 

쾌락에 대한 감정 없음.

 

낮에 카드로 긁은 루부탱 힐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라디오를 틀었다. TV는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그녀가 등장인물들의 표정을 보고 파악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한데 TV는 그 틈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라디오가 그녀의 유일한 취미인 것. 진행자와 패널이 범죄에 관한 얘기를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러니까 연쇄 살인마 중에 사이코패스들이 있다는 거죠? 네 그렇습니다.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나요? 우리가 보면 구분할 수 있을까요? 정신이상자와는 다르게 그들의 살인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습니다. 게다가 반사회적 행위를 실행하는데 아무런 주저함이 없지요. 살인 같은 거 말이지요? 그렇죠. 애초에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니까요.

 

“저거 너랑 똑같은데. 너 사이코패스 아냐?” 남편이 말했다. 입꼬리가 한쪽만 올라가서 얼굴이 비대칭이 되어 있었다. 저런 표정은 뭐였더라. 빈정거림 혹은 분노다. “또 라디오냐. 생각하는 데 집중이 안 되잖아 집중이. 그러니까 제대로 하는 일도 하나도 없지. 등신 같은 게” 캔을 홱 집어 던진다. 둘 다였나 보군.

 

“어딜 갔다가 이제 들어와. 남편은 뼈 빠지게 일하고 있는데.” 목소리가 높아졌다. “남자랑 뒹굴고 왔냐?” 사실이 아니다. 그는 연애 초기부터 그녀를 의심하는 버릇이 있다. “여자랑 뒹굴고 있는 건 당신이잖아” 그녀는 반박했다. 이건 사실이다. 이젠 감추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년이 돌았나-” 다가오는데 목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몸이 위축되었다. 언제 인가부터 - 아마 **를 안 하고부터 - 폭력이 시작되었다. 뺨을 맞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발길질이 쏟아졌다.

“이래도 안 아퍼? 응? 비명도 안 질러? 아무런 느낌이 없지? 넌 정신이상자야” 그렇지 않다. 육체의 고통은 있다. 팔로 머리를 감싸다가 어깨를 호되게 차였다. 뼈가 부러진 것처럼 아팠다. 

 

“미안해. 술을 많이 마셨나 봐” 그가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이런 경우 미안하다고 하는 건가. “일이 있어서 오늘은 안 들어올 거야. 여기 한번 전화해 봐. 유명한 의사라니 도움이 좀 될 거야” 포스트잇에 뭔가 후루룩 쓰더니 냉장고에 탁 붙이고 문을 쾅 닫고 사라졌다. 그녀는 팔을 쓰다듬으며 쪼그리고 앉아 샤워기로 몸을 씻어냈다.

 

백에서 담배를 꺼내 들고 베란다로 나와 난간에 기댔다. 남편이 싫어해서 결혼 전에 끊었었는데 최근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술은 그녀에게 별 소용이 없었지만 담배는 도움이 됐다. 팔이 욱신거리는 걸 버티는 데에도. 팔을 주물거리고 있는데 옆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다.

 

“폭력 남편이랑 사는군” 고개를 돌려보니 옆집 베란다에 한 남자가 입에 담배를 물고 쳐다보고 있었다. 발치에는 양주병이 쓰러져 있었다. 무시할까 하다가 습관적으로 표정을 읽어 버렸다. 호기심? 아니다. 안쓰러움 아니면 동정이다. 이 도시에서는 흔치 않은 표정이다. 

“신고하지 그래. 처음 있는 일이 아니지?” 밤거리에 자욱하게 깔린 안개 너머로 시선을 넘기며 말했다. “그거, 점점 심해지는 경우가 많아.”

틱. 틱. 불이 잘 붙지 않는다. 그가 라이터를 휙 던졌다. 담배에 불을 붙여 깊이 빨아들이고 훅 내뿜으며 대답했다 “남의 일에 신경 쓰지 마.”

“매번 시끄러워서.”

“그건 총이야?” 허리 뒤쪽을 가리켰다. 그가 얼굴을 찡그렸다. “경찰이야? 무슨 일 해?”

“이건...남의 일에 신경 쓰지 말라고 해야겠군.”

그에게로 다가가서 말했다. “이리 한번 줘 봐.”

그는 잠시 주저하더니 실린더를 탁 쳐서 탄알을 빼내고 총을 한 바퀴 빙글 돌려 난간 너머로 손잡이를 내밀었다. 받아서 쥐어 보았다. 익숙한 느낌. 마치 처음부터 내 것인 것마냥 잘 맞았다. 팔을 들어 겨눠 보았다. 방아쇠를 당긴다. 딱.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흠. 자세 좋네.”

그가 하던 대로 총을 빙글 돌려 손잡이 쪽을 내밀었다. 그가 빙긋 웃으며 받았다.

 

 

 

<그녀가 세상을 보는 방법> 2장

 

노란색 미니 드레스를 골랐다. 불가리 로고 모양의 두 개의 링이 그녀의 가슴 일부를 드러내 주었다.

색을 맞추려고 새로 산 힐을 신었더니 뒤꿈치가 아팠다. 팔의 멍은 옅어지긴 했지만 화장으로 감췄다.

티파니 링 귀걸이를 걸고 늘 하던 대로 에르메스 클러치백을 들었다.

 

“입도 뻥긋하지 말고 구석에 박혀 있어.” 남편이 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그러면서 표정은 웃는다.

파티장은 생각보다 컸지만 사람이 너무 많았다. 잘난 남자들과 그들의 부인들과 명사들이란 사람들이 모여 세트로 표정 연기를 보여준다. 말하는 사람을 제외하면 다들 지루한 표정이 순간순간 스쳐 지나간다.

웨이터들만이 무표정하게 쟁반을 들고 그들 사이를 누비고 다닌다. 온갖 종류의 향수가 섞여 코를 찔렀다.

이래서야 비싼 향수를 뿌린 의미가 없다. 지나가는 쟁반에서 주스를 하나 낚아서 답답한 목을 축였다.

 

홀 중앙에서 멍하니 서 있으니 눈만 마주치면 낯선 사람들이 다가와서 말을 걸려 했다. 자리를 옮겼다. 무대에서 몇 명의 연주자들이 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다음 곡은 제니퍼 로페즈의 브레이브가 나갑니다.” 그 소리에 맞춰 서로 얼싸안고 춤을 춘다.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노래를 들으면 기분이 변하잖아. 그에 맞춰 몸을 흔드는 거 아니겠어.’ 누군가 말했었다.

 

흥겨운 감정 없음.

 

나무에 가려서 잘 안 보이는 곳을 찾아 숨어들었다. 다들 그러는 것처럼 손에 와인 잔을 들었다. 마시지는 않는다.

재수 없게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보였다가 재빨리 고민에 잠기는 표정으로 넘어간다.

파티장은 그녀에게 아주 곤란한 장소였다. 다양한 사람들이 갖은 표정을 짓고 해독 불가능한 말을 한다.

올 초 블랙시티에서 열린 파티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때 자꾸 춤추자고 들러붙는 대사에게 ‘저기 당신 아내와 추세요.’ 라고 했다가 남편이 불같이 화를 냈다. 그 후로는 같이 출장을 가더라도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호텔 방에서 나오지 못하게 했다.

오늘은 무슨 일인지 파티장에 그녀를 데리고 왔다. 그래서 이렇게 고생 중이고.

 

“이봐 잭.” 시끌벅적한 소리가 다가왔다. “포럼에서 보고 처음 보지? 자네 내 직원 맞나?” 남편의 어깨에 힘들게 팔을 두른 조그만 털 복숭이 남자가 말을 하고 있었다. “그 아름답다고 소문난 부인을 소개해 줘야지!” 낄낄대며 나무 사이로 두리번거렸다.

남편이 그녀를 발견하더니 눈짓을 했다. 어쩔 수 없이 걸어 나왔다.

 

“이분이 새로 모실 내 보스야.” 그래서 그녀가 필요한 거였다.

보스라는 사람은 입을 크게 벌리지도 않고 침을 삼키지도 않은 채 눈만 가늘게 뜨고 쳐다보았다.

이건 또 무슨 표정이지. 피로가 몰려왔다.

“꽤 키가 크시네.” 커다랗던 목소리가 낮아졌다. 얼굴의 웃음기도 없어졌다. 이런 급작스런 표정의 변화는 TV와 비슷했다.

어쨌든 그녀의 역할은 말을 적게 하는 거니까.

“만나서 반갑습니다.” 웃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는 한참을 그렇게 그녀를 보고 있더니 몸을 돌려 가버렸다.

 또 무슨 실수를 한 건가? 남편을 바라봤다. 그는 눈을 한번 부라리고 상사를 열심히 따라갔다.

 

돌아오는 길에 큰비가 내렸다. 비가 오면 사람들은 우울해한다지만 그녀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산을 챙기면 된다. 미처 준비를 못 했으면 보이는 거 아무거나 집어 들곤 했다.

“네 전화번호를 물어봐서.” 남편이 차를 뒤로 뽑으면서 말했다.

“누가?”

“보스.” 씩씩거리는 목소리였다.

“그래서 줬어?”

“전화 오면 잘 받아.”

 

지금 상황들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려 했지만 몇 시간 동안 버티느라 너무 피곤했다. 발뒤꿈치는 완전히 까져서 화끈거렸다.

 

 

 

<그녀가 세상을 보는 방법> 3장 

 

거울에 멍든 눈가를 비추어 보았다. 얼굴을 건드린 적은 없었는데. 폭력의 강도가 점점 심해진다.

무표정하게 맞고 있으니까 더 화가 치밀어 오른다고 했다. 아픈 표정을 연기하는 게 도움이 될까.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핸드폰을 청바지 주머니에 꽂아 넣고 백을 들고 집을 나섰다.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가 되돌아와서 1204호 앞에 섰다.

옆집 남자가 총을 갖고 있었지. 문을 톡톡 두드렸다. 반응이 없었다. 다시 한번 탕탕. 포기하고 돌아가려는데 문이 빼꼼 열렸다.

들고 있던 총을 바지 뒤 춤에 찔러 넣는 게 보인다.

 

“너였구나. 깜짝 놀랐네.” 그녀의 눈을 보며 물었다. “또 때렸어?”

“총을 빌리러 왔어.”

“그건..” 말 하다 말고 문을 붙잡고 있던 팔이 미끄러졌다. “일단 들어와 봐. 알려줄 게 있으니.”

문을 밀고 들어갔다. 위험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의 눈에는 동정이 있다. 여섯 살, 부모를 잃었을 때 담당 형사에게 봤던 그 눈빛이다. 그 후에 누군가에게 그런 눈을 본 적은 없었지만 그 표정만큼은 왠지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담당 형사는 사건 현장에서 죽기 전까지 나를 종종 찾아 왔었다. 매번 같은 질문들을 했다. 밥은 잘 먹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몇 푼 정도의 돈도 주고 갔다. 그런 그가 죽었을 때도 아무 느낌이 없었다.

 

애도의 감정 없음.

 

커다란 거실에 가구라고는 달랑 소파와 테이블뿐이었다. 심지어 발소리가 울렸다.

테이블 위에서 술병들이 리모컨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다. 재떨이가 위태롭게 모서리에 걸려 있었다. 커튼은 짙은 회색.

천장에 매달린 전등은 둥글고 작은 장식들 사이에 전구가 수도 없이 붙어있는 샹들리에였다.

기묘한 조합이다. 바로크와 미니멀리즘을 한 방에서 볼 수 있다.

 

“그건 같이 살던 사람의 취향이야. 혼자 살면서 가구들은 다 버렸는데 전등은 떼기가 힘들어서”

“전처야? 이혼한 건가?”

“죽었어. 이복 누나야. 그보다,” 방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총은 복잡한 도구야.” 아디다스 스포츠 백을 하나 들고 나왔다.

지퍼를 여니 총과 탄약으로 보이는 네모난 상자들이 가득했다.

“총은 빌려줄 수 있지만 실탄은 안돼. 경찰들도 오발 사고로 허벅지가 나가거든. 무거운 건 팔이 가늘어서 들기 힘들 테고. 뭐가 좋을까...” 그는 하나하나 손으로 총 더미를 가르며 중얼거렸다.

“물 좀 줄래?”

“물은 없고 커피는 있는데.”

“그것도 좋아.”

 

그가 부엌에 간 틈에 탄약을 하나 집어 핸드백에 넣었다. 상자의 글을 보고 총의 모델명을 확인했다.

그가 돌아와서 캔 커피를 하나 건넸다. “자동권총이 한 자루 있었는데... 여기 있군.” 작은 까만 색 총을 건넸다.

“콜트야. 가볍고 쓰기 편해. 숨기기도 좋고. 20발까지 연속으로 쏠 수 있지만 뭐 그런 건 상관없겠지.”

총을 받아 쥐고 모델명을 확인했다. 다르다.

“S&W가 필요해.”

“흠. 정확하게 지정할 줄은 몰랐는데.” 다시 가방을 뒤적이더니 실린더가 달린 6연발 총을 꺼냈다.

총신이 더 길고 묵직해 보였다. “이거야. 괜찮겠어?”

 

두 손으로 총을 쥐고 앞으로 뻗어 보았다. 두 손으로 손잡이를 쥐었더니 자세가 불편했다.

왼손가락을 방아쇠에 걸고 오른손은 왼손을 받쳐 보았다. 앞에 남편이 있다고 상상한다. 호흡이 멈추고 자연스럽게 탁!

고리 모양의 쇠가 앞으로 나가서 부딪쳤다. 그를 보니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눈을 크게 뜨는 건 분노, 놀람, 성욕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중 하나. 어느 쪽일까?.

 

“위버 스탠스로군. 총 쏴 본 적 있지?”

“아니. 전혀.”

“흠. 이상한데…”

전화벨이 울렸다. 그 소리에 그가 반사적으로 손을 뒤로 돌렸다.

그녀는 청바지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뽑아 들었다.

“누구세요?”

“나 휘트먼이야.”

“누구요?”

“니 남편 보스. 어제 파티에서 봤잖아.”

“아.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식사나 같이 하자고.”

“무슨 일로요?”

“무슨 일은. 니가 마음에 들어서. 뭐 친해져 보자는 거지.”

갸우뚱하면서 남자를 보았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다.

“친해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아 나 참. 말귀를 못 알아듣네. 그럼 당신 남편에 관한 얘기라고 하자고. 내일 저녁 8시에 힐튼 호텔 입구로 나와.”

그러고는 전화가 끊겼다. 그의 담배를 하나 입에 물면서 말했다.

 

“남편 보스가 나보고 친해지고 싶다네.”

“웃기는 회사군.”

“이런 게 웃긴 건가?”

“너도 웃겨. 다른 여자와는 많이 달라. 뭐 부유층 마나님들이란 다 그런 건지도 모르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가볼게. 이건 잘 쓸게” 캔 커피는 손도 대지 않았다.

나오면서 보니 그는 리볼버를 빙글 빙글 돌리며 가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문이 닫히기 전에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심해.”

 

침대에 누워 총에 실탄을 재워 넣었다. 그의 말과는 달리 복잡할 게 없었다. 안전장치를 풀고 방아쇠를 당기면 남편은 죽는다. 수없이 쏴본 것처럼 손에 감기는 차가운 금속. 빙글 빙글 돌려 보다가 핸드백에 넣었다. 자정이 넘도록 남편은 들어오지 않았다. 문자를 남겼다. 내일 당신 상사가 보자고 했어. 답장은 없었다. 금방 잠이 들었다. 꿈은 꾸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꿈이 없었다.

 

흰색 실크 드레스의 지퍼를 채웠다. 팔이 온통 멍들어 있어서 등에 있는 지퍼를 채우는 게 쉽지 않았다.

화장대에서 샤넬의 향수를 들어 칙 뿌리고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문을 나섰다.

호텔에 도착해 보니 휘트먼은 이미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뭐 이리 늦어.” 그가 찡그린 얼굴로 말했다. 그녀는 시간 약속을 잘 지키지 않았다. 남들이 늦는다고 뭐라 하지도 않았다.

사회성이 부족해. 남편이 말했었다. 휘트먼은 그녀를 호텔 2층 레스토랑으로 데려갔다. 가격이 정말 비싸고 맛이 아주 훌륭하다. 어쩌다 했지만 그녀에게는 똑같은 고기였다. 썰고 찍어 입에 넣고 배를 채운다. 그는 혼자 와인 한 병을 다 비우면서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자신이 어떤 일을 하는지, 부하직원이 얼마나 많은지, 돈은 또 얼마나 많이 벌었으며 차가 몇 대고 주절 주절 주절.

 

“결혼하셨죠?” 그녀가 물었다. 

“했지.” 그가 또 얼굴을 찡그렸다.

“아이는요?”

“다 먹었으면 방으로 가지.”

방으로 가는 중에는 말이 없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침만 꼴깍 꼴깍 넘기고 있더니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돌변했다.

키스를 하려 했으나 키 차이가 나서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시체처럼 가만히 있었다. 뭐 길어야 10분이면 되겠지.

 

거칠게 숨을 쉬던 그가 헤헤하고 웃었다.

그 소리가 그녀의 뭔가를 건드렸다. 지저분한 구레나룻이 얼굴을 스친다.

머리가 키잉 하고 울렸다. 누군가의 비명이 귀를 때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눈을 후벼 파고 있었다. 눈물샘 쪽에서 피가 흘렀다. 그는 아기처럼 비명을 질렀다.

손을 거두고 주위를 살펴봤다. 아까 그 방이다. 손끝에 통증이 심하다. 길게 기른 손톱들이 거의 다 부러졌다.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백을 집어 들었다. 비명이 가득한 현관에서 힐의 버클을 하나씩 천천히 감고 방을 나왔다.

 

집에 와서 손톱을 손질하고 있는데 남편이 문을 박차고 들어와서 대뜸 후려 패기 시작했다.

“이 등신 같은 년.” 뒤통수다. 이제 부위를 가리지 않는다.

“내가 이 자리까지 오르느라.” 옆구리에 발길질을 맞고 나뒹굴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기나 해.”

그가 씩씩거리는 사이 핸드백을 놔둔 곳으로 걸어갔다.

“이제 그만 해.” 총을 꺼내며 말했다. 손가락으로 안전장치를 풀었다.

“어이고 이거 완전 미쳤네. 그건 어디서 난 장난감이냐.” 그가 눈을 부릅뜨고 다가왔다.

방아쇠를 사르륵 당겼다.

쾅.

생각보다 소리도 반동도 컸다. 귀가 멍멍했다. 그의 뺨에 빨간 선이 그어졌다. 현관 유리장이 와장창 깨졌다.

그는 걸음을 뚝 멈췄다. 눈을 크게 뜨고 입이 벌어져 있다. 저건 명확하게 놀란 표정이다.

“내 몸에 다시 한번 손대면.” 반동으로 올라간 팔의 위치를 다시 바로잡으며 말했다.

“머리를 쏠게.”

그는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쏘지 마.” 새된 목소리였다. 어깨가 가파르게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문이 쾅 하고 닫혔다.

잠시 후 그녀는 총을 핸드백에 넣었다. 리볼버의 안전장치를 잠그는 걸 잊지 않았다.

 

“죽여버리겠어. 얼마나 잘해줬는데 은혜도 모르고.” 혼자 중얼대며 잭이 복도에 한참을 서 있었다.

분노가 가라앉지를 않았다. 다시 돌아가서 때려죽이고 싶었지만 총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없었다.

일단 물러나자. 회사 쪽도 해결해야 할 것이 많으니까. 휘트먼 그 개새끼. 남의 여자나 넘보더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내 탓을 해?

씩씩대고 있는데 한 남자가 복도 벽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그를 쳐다보는 게 눈에 들어왔다.

“뭘 봐 병신새끼야!”

“널 본다.” 그 남자는 폭언에도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바로 달려들어 분풀이나 할까 했지만 목소리나 태도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몸을 돌려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도어폰이 울렸다. 그녀는 총을 꺼내 들고 밖을 확인했다. 옆집 남자였다. 문을 열자 즉시 미끄러져 들어온다.

“얼굴을 맞췄던데?”

“응 살짝 비껴서.”

“노린 거란 말이지. 반동이 심했을 건데, 대단한데.”

“별로 어렵지 않던데. 감시하고 있었어?”

“응. 죽이기라도 하면 뒤처리를 해야 하니까”

“실탄을 가져간 것도 알았어?”

“음. 개수가 안 맞으니까.” 찌그러진 총알을 바닥에서 주우며 말했다.

“소음기도 챙겨가지 그랬어. 뭐 총소리라고는 생각은 못 할 테니 괜찮겠지만.”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내렸다. “잘 썼어. 고마워.” 총을 건넸다.

“그런 거 같네” 그는 총을 허리춤에 넣고 돌아갔다.

 

 

 

<그녀가 세상을 보는 방법> 4장

 

그 다음 날 그녀는 변호사를 통해 이혼장을 받아 들었다. 재산 분할 없음. 

다시 결혼 전 상황으로 돌아갔다. 슬프거나 회한에 잠기거나 그런 감정은 없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고민이었다. 그래도 집은 있으니까 옷이랑 가방들을 팔면 당분간은 살 수 있을 거 같았다.

총을 쏜 것 보다 그 전날 눈을 후벼 파던 일이 마음에 걸렸다. 일, 이분 정도 필름이 끊겼다. 그런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의사에게 가봐야 할까. 생각에 잠겨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부동산에서 나왔습니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 주니 무척 뚱뚱한 남자가 목과 턱의 땀을 닦으며 들어왔다.

“와 사모님이 엄청난 미인이시네요. 집 내놓으셨죠?” 그는 부산스럽게 이리저리 둘러봤다

이제 집도 없어졌다. 대책을 빨리 세워야 했다. 부동산 남자를 돌려보내고 옷장에 가서 옷들을 쭈욱 살펴봤다.

가슴이 깊이 파인 흰색 돌체&가바나 티를 찾아 입었다. 브라는 하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 미니 청 스커트에 다리를 꿰어 입고 옆집 남자가 집에 돌아오는 걸 기다렸다.

오후 늦게야 인기척을 듣고 1024호 문을 두드렸다.

 

“옷이 그게 뭐야” 술 냄새가 풍기는 눈으로 가슴을 한참 보더니 그가 말했다.

“갖고 싶어?” 가슴을 내밀며 말했다. 약간 젖은 목소리를 내면 잘 통한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담배를 꺼내 물더니 한 모금 훅 빨고 말했다. “그런 건 그만둬.”

흠 실패인가. 그가 원하는 타입이 아닌지도 모른다. 게이일지도 모르고. 

“넌 왜 다른 남자들처럼 날 원하지 않지? 내가 매력적이지 않나?”

“대단히 매력적이지. 그렇지만...” 허공에 연기를 훅 내뿜었다.

“그렇지만?”

“너는 날 전혀 원하지 않잖아?” 얼굴을 바로 쳐다보며 그가 말을 이었다.

“넌 이상한 여자야.”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한 거였다. 떠다니는 담배 연기가 흐릿하다. 머리가 아득해졌다. 정신이 들어 보니 얼굴이 뜨거워져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그의 담배의 길이를 보니 그리 길지는 않은 거 같았다.

“맞아. 잘 봤어. 난 그래.”

“뭐가 그래?”

“감정. 사랑, 분노, 눈물 그런 게 전혀 없어. 그래서 회사에 가면 항상 얼마 못 버티고 잘려.”

“그래서인지 총은 잘 쏘던데.”

“그러네. 나도 네가 하는 일을 시켜주지 않을래?”

“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데?”

“너무 위험해. 죽어야 은퇴하는 일이야. 사람이 할 짓이 아니지.” 그는 핸드폰을 들어 버튼을 몇 개 누르더니 통화를 했다. “잠시만”

담배를 하나 피워 물었다. 목이 시큼했다. 아 멘솔이네. 담배를 챙겨올걸. 그가 핸드폰을 접으며 말했다. 

“마침 자리가 하나 있어. 별로 좋은 일자리라고는 할 수 없지만 불법은 아니니까.”

케첩이 뭍은 햄버거 포장지 한 귀퉁이를 찢어 주소를 적어 주었다. “이곳으로 찾아가 봐. 총은 다시 가져가. 필요할 거야.”

그녀는 총을 챙겨 넣고 방을 나섰다.

 

현관문을 돌리는데 손에 피가 묻어 있었다. 손톱이 쓰라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한밤중이다.

분명 해가 지기 전에 그의 방을 나왔는데.

어째서 지금 한밤중이지?

들어와서 시계를 보니 11시였다. 이번엔 5시간 정도를 잃었다. 의사에게 가봐야겠어. 그녀는 생각했다.

냉장고에서 전화번호가 적힌 포스트잇을 떼어냈다.

 

 

 

<그녀가 세상을 보는 방법> 5장

 

“아니. 연쇄살인이 맞다니까요.” 동양인 형사가 말했다. 형사 셋이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서 있는 위치로 보아 동양인 형사가 한쪽, 루이스와 클락을 닮은 두 형사가 반대쪽을 맡고 있는 듯했다.

“지갑이 없어졌단 말이요. 강도 살인 갖고 왜 힘들게 이 나라까지 와서 이러쇼?” 루이스가 말했다.

“어여 집에 돌아가서 목욕도 좀 하고 자라고. 냄새나잖아.” 클락이 거들었다. 동양인 형사는 물러나지 않았다.

“눈알이 하나가 없어졌습니다. 작년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사건 중에도 그런 경..”

루이스가 말을 끊었다. “아 그러니까 눈알이 없어지면 다 연쇄살인이냐고.”

“확실하지 않으니까 부검 내용을 보여달라는 거 아닙니까.”

“아 거 디게 끈질기네. 이봐 우 형사. 우리 지금 사건이 너무 많아서 다들 바빠. 쓸데없이 일 더 만들지 말라고. 우리도 집에 못 들어간 지 일주일이나 됐어.”

“이 친구 애가 다른 남자한테 아빠라 부르고 있지.” 둘이서 껄껄 웃어댔다. 동양인 형사는 한숨을 쉬었다.

“그럼 수사본부 같은 건 됐구요. 사건 기록이라도 주십쇼.”

 

우 형사는 오랜 시간의 운전에 녹초가 되어 있었다.

국가 간 이동을 위해 국경 검문소에서도 한참 기다려야 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비행기가 뜨기는 했다.

하늘을 떠다니는 커다란 괴물들 때문에 비행기가 몇 개 공중 분해된 후로 항공회사들이 모조리 망해 버렸다.

모텔 방에 짐을 던져 넣다시피 하고 밖으로 나왔다. 피곤했지만 배가 고팠다. 

이 도시는 백인 위주라서 차별이 심했다. 황인, 흑인, 라티노들은 슬럼에 조금씩 무리를 이루어 살고 있었다.

숨을 들이쉬면 무겁고 탁한 공기가 빨려 들어온다. 비가 오지 않으면 흐려서 이곳 해를 본 적이 별로 없다.

초고층 빌딩을 자랑하지만 인간성은 낮아져만 가고 있는 곳이다.

생각에 잠겨 차를 몰다가 타코 체인의 할라피뇨 로고를 발견하고 휙 핸들을 돌려 꺾었다. 뒤쪽에서 차들이 빵빵거리고 난리였다. 그는 차에서 내려 그들에게 씩 웃어주면서 식당으로 걸어 들어갔다.

 

안 그래도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타코를 고추 소스에 질퍽하게 찍어 먹었다.

커피를 따르던 웨이트리스가 혀를 내두르며 친하게 굴었다. 귀여우시네요. 안 매워요?

금방 안 가고 옆에 붙어서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다가 그가 피해자 사진을 펼쳐 들자 질겁하고 도망갔다.

타코 두 개를 허겁지겁 집어넣고 나서야 허기가 조금 가셨다. 바싹 마른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홀짝이며 파일을 넘겨봤다.

찐득한 소스가 묻어 물수건으로 연방 닦았다. 대부분은 자신이 끄나풀을 통해 알아낸 것과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40대 후반의 남성. 투자회사 고위직. 결혼은 했으나 별거 중. 목의 자상으로 인한 동맥 출혈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됨.

그 외에도 목에 몇 개의 자상이 더 있음. 왼쪽 눈알이 없음. 칼로 파낸 듯함.’ 그다음이 특이했다.

‘다른 쪽 눈에도 비슷한 상처가 있는데 칼이 아니라 긴 손톱으로 파인 것으로 보임. 사망한 시점이 아님. 딱지가 앉아 있었음.’

다행히 이곳 부검의들은 일을 잘하고 있었다. 통화 기록을 역순으로 훑어 올라갔다.

회사 직원들, 회사 직원들. 죽은 날 연속으로 몇 통화를 한 번호가 있어서 기록을 봤더니 잭이라는 이름의 직원이었다.

바로 통화를 시도해 봤으나 전화기가 죽어 있었다. 다시 기록을 찾아 올라가다가 특이한 번호를 발견했다.

사망 전 전날. 좀 전의 잭의 두 번째 번호다. 아내이거나 보호자. 전화를 걸었다.

 

“누구신가요?” 아무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여자 목소리였다.

“수사국의 존 우 형사입니다.” 국가를 밝히지 않았지만 거짓말은 아니다.

“실례지만 잭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십니까?”

“전남편입니다.” 주저 없이 대답이 돌아왔다.

형사라고 해도 전혀 당황하지 않는다. 느낌이 이상하다. 보통 사람들은 형사와 통화한다고 하면 긴장하게 마련이다.

“휘트먼씨와 이틀 전에 통화를 하셨던 데요.”

“네.”

“지금 어디 계십니까? 사시는 주소를 알려 주시겠습니까?”

“5번가에 있는 페블스 흥신소에 있습니다.”

“직장 말구요. 거주지 주소요.”

“거기서 삽니다.” 끝까지 감정의 기복이 없었다. 이거다 하는 직감이 왔다.

“내일 찾아가겠습니다. 오전에 거기 계십시오.”

“그러세요.” 전화가 끊겼다.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인 남편과 그 아내가 얽혔다. 남편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냥 단순한 치정 살인인가? 얘기해 보면 알겠지. 그는 타코를 마저 찍어 먹고 남은 찌꺼기와 함께 커피를 후룩 마셨다.

쓴맛이 입에 잔잔히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