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사회주의에 대해서 모르는 분들이 많아서 철학을 모른다는 가정 하에 현대 사회주의 철학에 대한 입문적인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사회주의의 일부 요소만을 차용하려는 서구권 중심의 수정주의적 사조와 사회주의의 학문적 기반이였던 동구권의 붕괴,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반공주의적 사회 풍조 등 여러 원인으로 인해 물질적 표상만이 대중적으로 알려져 사회주의라 하면 정치경제학에 한정되는 편협한 사상이라는 인식이 있습니다.— 막 나가는 경우 『공산당 선언』을 『나의 투쟁』과 동일시 하며 마르크스가 학자임을 부정하는 경우도 있죠.— 그러나 사실 마르크스, 엥겔스 이후로 사회주의는 자유주의 철학으로부터 독자적인 별도의 철학적 세계관을 형성하였습니다.


사회주의 사상의 토대가 되는 이 철학적 세계관을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하며, 자유주의적 세계관을 이해하지 않으면 자유주의적 논리를 이해할 수 없듯이, 사회주의적 세계관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으면 사회주의 이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핵심적인 논리학 체계를 설명하겠습니다. 조금 어려울 수 있지만 사회주의를 이해하려면 결국은 나아가야 하는 과제입니다.




2. 변증법



이름으로 알 수 있듯이, 변증법적 유물론은 변증논리학과 유물론의 결합체입니다. 헤겔을 부정하려 했던 현대 관념론의 역사와는 반대로 현대 유물론은 유물론을 통해 헤겔 변증법을 보완, 계승하려 했습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헤겔 논리학에 자신의 체계적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 마르크스, 엥겔스에 앞서 먼저 헤겔에 대해 이야기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헤겔은 형이상학자였습니다. 형이상학이란, 사변적인 사고에 의해 감각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려고 하는 철학의 분야입니다. 플라톤부터 현대 철학자들까지 이어져 온 가장 보편적이고 전통적인 철학이 바로 형이상학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존 형이상학자들은 세계의 본질을 어느 한 객체로 설정했습니다. 이데아, 물자체, 절대자, 어떤 한정된 영역이 바로 세계의 본질인 것입니다. 헤겔도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방식대로, 사변을 통해 세상을 바라봤습니다. 그러나 헤겔은 스스로가 형이상학자였음에도 기존 형이상학의 경직된 세계관을 비판했습니다. 기존 형이상학에서 본질은 단지 존재하던 것이였지만, 헤겔에 있어 세계의 본질은 변증법적인 '운동'입니다. 본질은 자연이나 절대자, 인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관계, 절대자와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변증법적 논리에 따라 세계의 본질은 어느 유일자에 있는것이 아니라, 세계와 인간 양자 관계에, 전체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헤겔 철학의 기초입니다.




3. 헤겔 형이상학 비판



헤겔은 이성을 통해 "필연을 인지함으로서" 변증법적인 통일을 이뤄나갈 수 있다고 봤습니다. 만인의 이성을 초월하는 절대정신의 합일화를 주장했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헤겔은 형이상학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성의 영역은 단지 정신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천문학은 분명 이성이지만, 원시인끼리 동굴에 둘러앉아 토론한다고 천문학이 발생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천문학은 천문대, 인공위성 등 전문적인 기계장비 및 시설을 이용했기 때문에 발생, 발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강도가 온다는 것을 미리 안다고 해서 강도를 막을 순 없을 것입니다. 강도에 대비하여 방범 장비를 무장해야, 혹은 비를 대비해 지붕을 지어야, 전쟁을 대비해 피난을 가야, 어떤 물질적인 생산 활동이 이뤄져야 비로소 이성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어떤 행동을 하기 위해선 항상 이성적인 사유가 앞서야 합니다. 천문대를 짓기 이전에 전문적인 천체 연구 시설에 대한 계획과 필요 의식이 앞서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광학 장비와 개발 시설, 기술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천문대에 대한 계획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생산 활동은 정신과 물질을 반복적으로 오가며— 변증법적으로—둘을 합일화합니다. 이것이 인간 활동의 본질, 노동이고, 정신과 물질의 관계이며,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 수단이며, 이성의 유일한 발현 수단입니다.


헤겔은 진리를 단지 정신 활동에 한정했습니다. 진리는 객체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주장한 헤겔이, 다시 진리를 이성과 절대정신에 한정시켜버리는 오류를 범한 것 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마르크스, 엥겔스에 따르면, 헤겔은 헤겔적 의미에서 반 헤겔적입니다. 이 오류를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 개념을 통해, 유물론적으로 바로잡았습니다. 정신에 대한 형이상학적 탐구였던 헤겔 변증법은 형이상학을 벗어나 자연과 사회에 대한 실증적인 과학적 변증법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헤겔은 철학이 사유에 관한 학, 보편에 관한 학이지만 보편이란 사상이기 때문에 철학으로서의 유물론은 가능하지 않다고 믿었으며,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였다. 여기서 그 자신이 항상 "조야한" 관념론이라 지칭하였던 저 주관적 관념론의 오류를 되풀이 하였다. 객관적(오히려 절대적) 관념론은 지그재그로(또 재주를 부리면서) 유물론에 아주 가까이까지 접근해 오며, 일부분은 심지어 유물론으로 전화하기까지 하였다."
— V. I. 레닌




4. 인과론



변증법적 유물론 학파도 논리학적으로 헤겔과 크게 다르지 않은 주장을 고수합니다. 그런데 변증논리는 제대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변증논리학에서는 형이상학적인 인과론을 비판하면서도 일정한 객관성을 부정하려 하지 않는 생소한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에 있어 가장 보편적인 철학은 —반헤겔적—관념론일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 인과관계의 문제에 있어 어떤 이는 원인과 결과 사이의 인과성을 인식할 수 없다 주장하고, 어떤 이는 인간의 의식이 인과관계를 형성한다 주장하며, 어떤 이는 인과관계 자체를 부정합니다. 이렇듯 관념론에선 인과관계의 객관성을 부정합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에선 인과관계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세계는 단 하나의 원리, 객관에 의해 작동되며, 모든 인과관계는 객관적으로 종속됩니다. 원인이 없는 현상은 존재할 수 없으며, 결과가 없는 원인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과 사회의 상호작용에 대한 인과적 이해는 단편적입니다. V. I. 레닌에 따르면, 그것은 "단일한 세계과정의 이런저런 측면들을 인위적으로 고립시킴으로서 객관적 연관을 단지 유사하게만 반영"하는 편협한 인식입니다. 자연과 사회의 관계는 우리가 인과관계라는 형이상학적 언어로 표현하는 것보다 더 큰 상호작용 속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세계의 모든 부면이 사실은 전체와 연계되어있지만, 인과관계 도식을 통해서는 한번에 한 관계만을, 한 측면만을 이해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론 원인 뒤에 반드시 결과가 따르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결과 뒤에 원인이 따를 수도, 원인과 결과가 동일하게 형성될 수도 있습니다. 이른바 닭과 계란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관계를 고정된 인과관계를 통해서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닭과 계란은 서로에게 연관되어 있으며, 또한 양자가 뒤바뀔 수 있는 '변증법'적인 존재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상호작용에 결정적인 요인—본질—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닭과 계란간의 연관관계의 결정적인 동기가 되는것은 닭의 생물학적 '성장'일 것입니다. 닭이나 계란, 어느쪽이 선차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종 전체가 그러한 생물학적 특성을 가지기 때문에 이러한 운동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닭과 계란의 선차성 문제는 인과성이 부정되는 역설이자, 원인과 계기, 결과와 발전이 분리되는 대표적인 변증논리적 사례입니다.




5. 결정론



본질적인 관계에 의한 사물의 운동 현상은 필연적입니다. 이런 결론으로 나아가면 변증법적 유물론은 결정론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일정한 우연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과성을 완전히 긍정하게 된다면 모든 현상이 필연적이라는 잘못된 결론으로 나아갈 수 있지만, 변증법적 유물론에서는 우연성을 필연성과 상이하면서도 연관된 것으로, 인식주관이 필연성을 우연성으로 착각한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실존하는 개념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위에서 논한 정의에 따르면, 세상에 원인이 없는 현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우연성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세계의 필연성 속에서 우연성이 발생할 수 있는 이유는 우연성이 필연성과 분리되는 별개의 개념이 아니라, 필연성 속에 내제되어, 대립적이면서도 상호연관된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돌을 산꼭대기에 올리면 물리학적 법칙에 의해 굴러갈 수 밖에 없다는 필연성이 있지만, 동시에 정확히 어느 방향으로 구를지는 수학적 우연성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런 필연적인 우연성은 필연성을 가속시키거나, 약화시키며 필연성에 개입하기도 합니다. 예컨데, 사회주의 혁명은 필연적입니다. 나중에 논할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사회주의 혁명에 필요한 물질적 요건—자본주의적 생산력—이 이미 충족 되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어느정도 우연적인 면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회주의 혁명이 언제, 어디서, 빨리 올지, 혹은 늦게 올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이런 우연적인 성질이 일부 존재함에도, 결정론은 현상의 원인, 객관적 법칙들을 이해하는데에 필수적이기 때문에,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결정론은 과학의 필수 조건으로 이해됩니다.




6. 양질전화



위에서 사물의 운동엔 본질적인 원인이 있다고 했습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는 것이죠. 현상, 사물의 모든 부면은 동일한 것이 아니고, 양과 질적 규정—형식과 내용—에 따라 구분되는 부면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17, 18세기의 기계론적 유물론자들은 사물의 질적 규정을 부정했습니다. 자연, 의식에 대한 기계적 해석은 그러한 논증의 결과죠. 그러나 각 사물은 각자의 질적 규정을 달리 가지고 있고, 기계론은 이러한 사물의 특징들을 이해하는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기계론에 따르면 동물과 인간은 본질적으로 동일하고, 그 차이는 양적 규정을 통해서만 나타나는데, 그런 가정 하에선 야생과 구분되는 사회의 특수한 현상들을 이해할 수 없지 않습니까?— 한편, 그러한 시도 중 하나가 사회물리학, 사회진화론이기도 합니다.—


또한, 양과 질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자연 과학, 사회 과학 등 모든 과학은 양적으로 같은 과학입니다. 그러나 질적—내용적—으로는 각 분야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학의 각 분야들은 질적으로 특수하기 때문에 상호 무관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과학들은 서로 연계되며 질적 차이를 통해 대립하고, 상호 법칙을 형성, 발전합니다. 한 분야의 발전이 다른 분야의 발전을 유발하고, 전반적인 양이 발달하게 되면서 이른바, 질이 양을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현상을 '양질전화'라고 합니다. 전반적인 양의 발전은 다시 질로 환원되게 됩니다—질량전화—. 양질전화는 점진적인 발전인데에 반해, 질량전화는 급진적, 혁명적인 발전입니다. 과학사에서의 특수 상대성 이론, 사회사에서의 부르주아 시민 혁명 등이 질량전화의 예시입니다. 질량전화가 일어난 다음은 다시 양질전화가 발생하면서, 연속적으로 발전합니다.

양질전화는 사물의 운동을 이해하는데에 중요한 법칙 중 하나입니다. 사물과 현상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것은 단순히 그것의 본질에서 드러나는 질적 규정을 명백히 밝혀내는 것 뿐만이 아니라, 또한 양과 질의 공통된 관계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7. 대립물의 투쟁으로서의 발전



변증법에 따르면 상시 운동하지 않는 사물은 없습니다. 그런데 운동이라는 것은, 1에서 2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1과 2의 차이가 없다면 운동도 불가피하게 불가능 할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운동은 어떤 관계의 모순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자연과 사회의 관계, 타인과 자아의 관계,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관계, 항상 두 사물 간의 대립되는 모순이 전제되어야, 다시 말해 두 사물 간의 거리가 전제되어야, 어떠한 움직임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운동은 대립되는 두 관계의—대립물 간의— 투쟁이기도 합니다. 투쟁이란 것은 단지 일상적인 용법으로는 생각해선 안되고, '한 사물이 다른 사물을 재규정 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사과가 썩는다는 것은 신선함에 대한 상함의 투쟁, 오래된 규정에 대한 새로운 규정입니다. 오직 투쟁을 통해서 모순이 완화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발전은 대립물의 '투쟁'이다."라는 레닌의 유명한 명제 입니다. 변증논리학에서 모든 것이 으레 그렇듯이, 발전 역시 한 투쟁이 완결된 순간에 정지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운동했다는 것은, 1에서 2로 전환되었다는 것은, 한 사물과의 모순이 완화됨과 동시에 다른 모순을 발생시킨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절대로 발전은 멈추지 않습니다.


'정반합' 도식을 안다면 여기까지는 익숙한 이론일 것입니다. 그런데 정반합 도식이 알려주지 않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순이 긍정적인 경향—비적대적 모순—과, 부정적인 경향—적대적 모순—으로 나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모순은 부정적인 의미로만 사용하지만, 변증법 용법으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비적대적 모순은 사물간의 관계가 합목적적으로 일치합니다. 다른 규정을 가진 다른 대립물이지만, 통일된 목적을 가지고 통일한 방향으로 운동하는 것이 비적대적 모순입니다. 반면 적대적 모순은 사물간의 관계가 합목적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경우를 뜻합니다. 이 경우에는 반드시 한 사물이 소멸해야지만 모순이 완화되고, 다음 모순으로 이행할 수 있게 됩니다. 원시 공산제—원시 시대— 사회에서의 주된 모순은 적대적 모순입니다. 자연적 환경이 인간의 생활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적대적 모순이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계급제—현대— 사회에서의 주된 모순은 적대적 모순입니다. 왜냐면 착취적 생산관계라는 사회적 본질이 계급 간의 적대적 모순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계급적 대립이 사라진 공산제 사회에서의 주된 모순은 비적대적 모순입니다. 사회의 모든 부면이 단합했으며, 자연 환경 조차 지배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적대적 모순과 비적대적 모순의 차이를 이해하지 않으면 발전의 긍정적 경향과 부정적 경향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