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방사광가속기 가서 X선 이용하여 고체 샘플 격자구조나 스핀구조 연구하는 박사과정생이다. 방사광가속기에서 일하려면 연구제안서 써서 "이런 개쩌는 연구할 테니 기기 사용할 시간 좀 주세요." 하고 심사위원회에 구걸을 해야 한다. 연구제안서가 존나 섹시하면 심사위원회가 "ㅇㅋ 하셈." 하고 보통 1주일 정도 자기네 기기 사용할 권한이랑, 그 기기에 정통한 전문가 1~2명을 붙여주는데, 그 시설 사용 가능한 기간을 '빔타임'이라 하고, 전문가를 '빔라인과학자'라고 부른다. 


2021년 하반기에 2022년 상반기 빔타임 제안서를 모집하길래, 내 지도교수가 희토류 기반 자석 위에, 전이금속 기반 자석 박막을 얹은 샘플 만들어서 방사광 가속기에서 연구하고 싶다고 제안서 보내고, 위원회에서 오케이 사인이 났다. 문제는 제안서 쓸 때 누구도 그 샘플 어떻게 만드는지 레써피를 몰랐다는 거. 위원회에서 작년 11월에 2022년 1월 셋째주에 와서 연구하라고 통보함. 샘플 완성까지 2개월 남은 셈이었다. 연구실 셋업이 모두 부드럽게 잘 작동하더라도, 2개월이면 약간 아슬아슬한 시간인데, 이 작업을 헬난이도로 만드는 몇가지 좆같은 조건들이 추가되어 있었다. 


1. 연구실 인원이 지도교수 포함 4명인 스타트업 뺨치는 소규모 그룹. 그런데 난 5년차 박사생이라 졸업준비가 급한 상황이라, 웬만한 경우 아니면, 이제는 뒷방 퇴물처럼 그냥 논문만 쓰면서 지내는 게 국룰임.

1-1. 지도교수, 포닥1, 박사생1(나), 석사생1 이런 구성인데, 포닥이 온 지 1년 남짓이라, 아직 우리 셋업 디테일을 정확히 모름. 제일 고인물로 치면, 지도교수랑 5년동안 이 랩에서 일한 내가 제일 고인물이고, 석사생은 오히려 옆에 있으면 일 하나하나 새로 가르쳐야 해서 같이 일하면 속도는 줄어드는 격임. 


2. 코로나 시국에 포닥 하나 인도에서 왔다가 계약기간 다 안 채우고 중도해지하고 본국 돌아간 놈이 있었다. 이 놈이 실험실 랙에 걸려 있는 장비들을 다른 랙으로 옮기는 작업을 맡고 있었는데, 옮기겠다고 이리저리 얽히고 섥혀있는 전선들을 라벨 하나 안 붙이고 다 뽑아둔 채로, 하드 쓰로잉 후 그냥 본국 돌아감. 당연히 자기가 무슨 일을 하다가 중단했는지에 대한 문서화 작업도 하나도 안 남김. 아주 씨발년임. 

2-1. 난 코로나 시국 동안 거의 1년 반을 홈오피스해서 이 사실을 전혀 몰랐고, 지도교수도 작업 진척상황을 그 동안 꼼꼼히 챙기지 않아서 이 도망간 씨발년이 이 정도로 망쳐놓고 갔으리라곤 상상도 못함. 

2-2. 랩에 있는 장비들이 내가 기억한 대로 작동하질 않으니, 그거 고치는 데에 시간이 든다. 그런데, 이게 무슨 기기들이 다시 고쳐야 하는지 미리 알고 시작하면 계획이라도 미리 짜고 역할 분담 시켜서 빨리빨리 진행하는데, 전혀 브리핑이 안 된 채로 일하러 들어가니 하나 고치고 나면, 다른 거 작동 안 하는 거 깨닫고, 그게 반복되면서 무슨 두더지 잡기 하는 느낌이었음.


3. 새로 제안한 프로젝트를 지도교수는 현재 있는 포닥이 리드를 해줬으면 하고 기대했지만, 포닥은 이 물질이 어떤 물질인지 전혀 모르고, 전문분야도 아니었음. 그리고 위에 말했듯이 셋업을 부분적으로만 잘 다루고, 전체는 잘 모름. 그래도 짬이 있어서 잘 배우는데, 멘탈이 개복치고 개인적인 사정도 겹쳐서, 의욕이 잘 나지 않는 상황.

3-1. 박사생인 나는 그 물질로 논문을 하나 쓸만큼 잘 아는 상황이지만, 5년차에 프로젝트 하나 더 추가했다가는 졸업 더 늦어지겠다 싶어서 더 안 받겠다고 뻐팅긴 상황. 

3-2. 사실상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이끌고 싶어하는 사람은 지도교수 하나 뿐. 근데 본인은 제안서 쓰랴, 다른 랩도 관리하랴 할 일이 많아서 직접 랩에는 자주 못 들어오고, 일은 우리들이 해야한다. 


이 세가지 조건이 추가되고 나니, 2개월 동안 진짜 신세계를 경험했다. 실제 인생이 운빨좆망겜 '다키스트 던전' 플레이하는 기분임. 포닥은 하드쓰로잉하고 뻑하면 징징대고 그거 받아주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자고 달래고, 석사생 옆에서 일 잘 할 수 있게 끊임없이 지도하고, 나도 논문 작업 완전히 정지시킨 채로 딴 일만 하고 있으니 자꾸 스트레스 쌓여서 거의 매주 한 번씩 시험의 단계를 맞이하고.  


예를 들어서, 연말에 크리스마스 휴가가 12월 마지막주부터 1월 신정 휴가까지 주어지는데, 그 긴 휴가 기간 전에 뭐라도 가시적인 결과를 내려고 크런치 모드로 아득바득 일을 밀어붙이고 있었음. 그런데 휴가 바로 3일 남기고, 둘이 해도 힘든 일인데, 갑자기 같이 일하던 포닥이 아프다고 집에 드러누움. 사실상 석사생 베이비시팅하면서, 나 혼자 일 해댔다. 중간중간 지도교수 들어와서 도와주고. 솔까 신뢰관계 없었으면 '이 새끼 일부러 안 나왔나?'하는 의심을 할 정도로 절묘한 트롤 타이밍이었음. 그래도 어떻게든 혼자 일해서, 초반에 말한 그 전이금속 박막을 기를 수 있는 장비 작동준비 완료 시켜놓고, 만든 박막이 산화되지 않게 뚜껑 삼아 덮는 캡핑 박막을 기를 수 있는 장비도 작동준비 시킨 채로 무사히 휴가를 맞이했다. 


그런데 여전히 레써피 실습은 안 해본 상태. 즉, 신정 쇠고 다들 복귀하고 나면, 1주일 안에 박막 레써피 실습한 후에, 샘플 퀄리티 체크하는 여러 사진들 찍어서 기록을 해야만, 1월 셋째주 빔타임에 실제 샘플을 들고 갈 수 있다는 말. 그래서 휴가 복귀하자마자, 지도교수한테 지금 상황 매우 좆됐고, 그래도 내가 이만큼 캐리했고, 이제 네가 거의 매일 랩에 들어와서 도와줘야만 우리 1주일 안에 성공할 수 있다고 몰아치는 장문의 이메일을 폭풍 보냈더니, 지도교수가 전적으로 서포트를 시작함. 포닥 새끼도 망할 각이 슬슬 보이니 '이거 망하면 지도교수가 화낼텐데 어쩌지?'하고 자꾸 징징대길래, 홧김에 '씨발년아 그 소리할 시간에 일하라고.'가 튀어나오려다가, '계획을 이렇게 엉망으로 짠 지도교수 탓이니 넌 그런 걱정 말고, 차분하게 일에 집중하라'고 격려함.


그렇게 이번 수요일에 박막을 기를 희토류 기반 샘플 퀄리티 확인하는 사진 찍는 것 완료하고, 목요일에 첫 샘플 만드는 시도를 하려는데, 빔타임에 갈 포닥이랑 석사생은 빔타임 경험이 전혀 없어서, 이 실험을 어떻게 수행하고, 어떤 물리적 배경으로 이런 실험을 하는지 강의를 들어야 했다. 평소 같으면 이런 기초교육은 실험 2-3주 전에 수행한다마는, 다들 존나 바쁘다보니, 실험 4일 전에 벼락치기로 했다. 결국 지도교수가 포닥+석사생 나란히 교육시키느라 빠져서 나는 내 프로젝트도 아닌데, 내가 혼자서 첫 샘플 만듬. Molecular Beam Epitaxy라고 박막을 거의 원자 단위로 차곡차곡 쌓으면서 만드는 것이라 나노미터 단위 박막 만드는 데에만 4~5시간 걸렸다. 


그러고 어제 금요일이 다가왔는데, 포닥이 점심시간 후에서야 나오는 거임. 알고보니, 목요일 퇴근 후에 코로나 부스터샷을 예약했어서 그거 목요일 저녁에 맞았고, 자고 나니 고열에 시달려서 존나 아프다는 거임. 내 머리 속은 '그걸 왜 씨발 이 타이밍에 맞아?'였지만, 아픈데도 오한에 덜덜 떨면서 미안하다고 사무실 나온게 존나 애처로워서, "No need to sorry. This is group activity. I got your back today, you get my back later. (미안할 필요 없다. 이건 단체활동이다. 오늘 내가 캐리했으니, 다음에는 네가 캐리해라.)"고 말해주고는 두번째 샘플 혼자서 새로 만들고, 샘플 만드는 동안 빈 시간에, 지도교수가 이 병든 포닥한테 6개월전부터 하라고 지시했던 자잘한 to-do list들 5시간 만에 싹 다 해줬다. 금요일 저녁에 샘플 두 개 다 만들어서 다음주 빔타임 수행 가능하다고, 그리고 원했던 작업 이거이거 완료되었다고 랩북 업로드하고하니, 5년동안 같이 지냈지만, 지도교수가 이렇게 연신 땡큐땡큐를 외치는 건 거의 처음 봤다. 기쁘긴 기쁜데, 너무 고맙다고 계속 그러니 '머리가 어떻게 되었나?' 싶어서 좀 어안이 벙벙했다. 고맙다할 상황을 만들지말고, 미리 계획을 잘 짰어야지. 


한 그룹 안에서 고인물이 되다보니, 박사생인데도 뭔가 중간관리자가 되고 있는 기분이다. 부릴 놈들 멘탈 관리하고, 할 일들 교육, 분배 및 스케줄 정리하고, 대장한테는 까칠하게 이거이거 개선해야 우리들이 일 할 수 있다고 따지고, 다들 나자빠지면 어떻게든 밀어붙여서 프로젝트 마감하고. 다음주 되어야 내 2개월간의 뻘짓이 의미가 있나 없나 알겠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어거지로 그룹 캐리한 게 혼자 뿌듯해서 자랑글 올려봤다. 질문은 언제나 환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