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도 벌써 두 달 전 일이구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던 코하네가 감상에 젖어 꺼낸 말이었다.


하지만 옆에 있던 그는 아직 만족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음... 솔직히 난 그 이후로 제대로 보진 못 했어."


"응?"


한 손에 턱을 괸 채 그녀를 바라보던 토우야가 말했다.


호기심에 가득 차 있었다. 초콜릿에 얽힌 일이 끝나고 나서의 일을.


"새 옷에 새 머리에, 엄청 단장했었잖아."


"그...렇지?"


"그러니까 다시 보고 싶다는 거야. 그때 못 받은 것도 있고."


코하네에게 하트 모양의 초콜릿을 건넸다.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화이트데이도 한참 지났는데, 게다가 토우야에게 뭔가 받은 적도 없었는데.


"아오야기 군, 이거 뭐야...?"


평범한 선물이라고 치부하기엔 타이밍이 이상했다.


그리고 이들의 관계는 달랐다.


어느샌가 좋아하고 있었던, 좋아하는 관계였으니까.


"...후후."


"저기, 이거 뭐냐니까...?"


"왜, 뭐같애?"


"아. 일단 고마워. 나 이상한 생각 해버렸네..."


코하네는 부끄러움에 뒤돌아 자리를 뜨려 했다.


하지만 문을 향해 다가갈 수록, 천천히, 천천히... 그녀의 발걸음은 느려져 가기만 했다.


기다리고 있었다.


말을 걸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샌가 우두커니 멈춰서 있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꼭 부여잡은 채.


참기 힘들었다.


뒤돌아볼까?


그러면 토우야도 나를 보고 있을까?


그런 작은 행동마저 망설여졌다.


마음이라는 녀석이 몸을 무겁게 짓누르기만 했으니까.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떡하지? 너무 호들갑 떠는 걸까?


아니, 그런 것도 모르고 있으려나...


깊은 곳에서 아쉬움이 몰려왔다.


곧 그 아쉬움은 한탄으로 변했다. 그냥 선물 하나로 무슨 망상인지...


한숨을 한번 내쉬고 문을 열려는 순간, 무언가 팔을 거머쥐었다.


"...?"


사람의 손이었다. 크지만, 살짝 부드러운.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자 보인 것은 기다려왔던 그였다.


눈이 마주치자 팔의 감촉마저 더 짙어지는 것 같았다.


"너도 나랑 같은 마음일까?"


"아...!"


일단 천천히 이야기하자고, 그렇게 말했지만 심장의 고동은 말을 듣지 않았다.


시야도, 촉감도, 소리도, 감정도... 모든 것이 아득히 멀어지는 것 같았다.


무언가에 취해버린 것처럼 정신이 멀쩡하지 못한 상태로 대화가 이어졌다.


무심코 어느 약속을 잡아버리고, 시간은 흘러갔다.


언젠가 말한 적 있었다.


좋아한다고. 더 좋아해주겠다고.


그렇게 말해놓고선 정작 토우야에게 건넬 초콜릿 한 조각조차 잊고 있었던 게 현실이었다.


한심했다. 분명 중요한 일이긴 했지만, 더 중요한 사람에게 소홀해져 버렸으니까.


그것도 두 달이 흘러 후회하고 있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런 상황에서 찾아온 구원의 손길은 다름아닌 어머니의 조언이었다.


'아직 안 늦었으니까, 좋아하는 사람을 잡으려면 과감해져야 해'라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서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쭈뼛쭈뼛 걸어가다보니 그의 모습이 보였다. 눈이 아플 정도로 매력적이었던 그의 모습이.


하얀 셔츠에 받쳐 입은 장밋빛 스웨터는 겉에 두른 검은 코트와 어우러져 더욱 붉게 빛났다.


더해서 딱 맞는 베레모가 코디를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정신을 차리던 코하네는 용기를 내 그에게 다가갔다.


둘러맨 핸드백의 끈을 괜히 만지작거리며 인사를 걸었다.


"안녕... 아오야기 군."


"..."


"아오야기 군?"


"...예쁘네."


"응?!"


"아, 빨리 왔네 아즈사와."


단단히 준비한 코하네에게 토우야는 넋을 잃었다.


검은 외투 속 붉은 원피스가 다가 아니었다.


목깃 아래 과감히 드러낸 맨살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더해서 머리 스타일에도 파격적인 변화가 있었다.


빤간 리본 아래 얕게 올려 묶은 양갈래는 살짝 곱슬거리는 머릿결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이게... 그 아즈사와...)"


토우야 역시 남자랄까. 그의 시선은 위아래로 왕복할 뿐이었다.


찰랑거리는 머리로.


뽀얗게 드러난 맨살로.


팔랑거리는 치마 밑 다리로.


"음... 너무 그렇게 보면 조금 부끄러운데."


"아, 미안..."


다급하게 사과하는 모습에서 느꼈다.


머리 하나 차이 나는 큰 키에서도 귀여움이 우러날 수 있구나. 저절로 미소가 차올랐다.


"그... 오늘은 꽤 과감하네."


싱긋 웃은 코하네가 눈을 힐끔 돌려 그를 바라봤다.


말을 채 다 하지도 못했던 토우야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오야기 군도 부끄러움이 있긴 하구나... 나도 그렇긴 하지만, 엄마가 말해준 게 있으니까...!)"


마음에 불이 붙었다. 자신감이 타올랐다.


곧 코하네는 스스럼없이 그의 손을 꼭 쥐었다. 그러자 토우야는 다시 고개를 돌리며 코하네를 바라봤다.


"헤헤, 귀여워."


"난... 귀엽지 않아."


"아니야, 귀여워."


"그건 아즈사와가 더... 아니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구나."


"으응? 그럼 뭔데?"


"그냥... 예뻐. 엄청. 지금까지 본 것 중 제일."


"그...래?"


"큼, 어디 갈지 미리 정해놓진 않았는데...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어?"


영화관? 게임 센터? 노래방? 늘 가던 곳은 웬지 모르게 꺼려졌다.


지금은 그저 토우야가 나만 바라봐줬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 뿐이었다.


"나 단 게 먹고 싶어."


"음... 제일 잘 하는 곳으로 갈까?"


코하네는 고개를 도리도리 돌렸다. 그리고 말했다.


그런 건 상관 없으니 사람이 최대한 적은 곳을 찾자고. 그러면서 거리를 걷자고.


결국 토우야도 싱긋 웃었다. 코하네의 의도 정도는 바로 알아챌 수 있었으니까.


바뀐 그녀의 모습에 적응하는 데 몇 분이면 충분했다.


토우야는 코하네와 맞잡은 손을 잠깐 떼었다.


그리고 팔을 엮으며 그녀를 잡아당겼다.


이어서 다시 손을 잡았다. 서로의 몸이 밀착됐다.


"...아오야기 군도 과감하잖아."


"아직 이럴 정도는 아닌 것 같지만..."


"아니야, 난 좋아. 그리고..."


"..."


토우야는 말없이 코하네를 기다렸다. 고조된 감정을 붙들어맨 채, 두근거림을 공명시키며 기다렸다.


이내 다가온 것은 심장을 터뜨릴 만큼 치명적인 대답이었다.


"그런 정도가 되고 싶어서 이러는 거잖아?"


"아... 아..."


"응, 그런 거로 하고... 이제 가자."


붉고 검은 두 남녀 사이에 무언가 싹트기 시작했다.


장미처럼 진하고 약간은 따가운, 또 초콜릿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무언가가.


도로를 건너, 건물을 건너, 사람을 건너, 풍경을 건넜다.


둘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큰길 외곽에는 코하네가, 토우야가 원하는 곳이 있겠지...라는.


십수 분동안 걸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말이 오가지는 않았다.


입을 열려고 할 때마다 고양된 감정이, 싱크로된 두근거림이 막아세웠으니까.


"...아, 저기 2층 사람 없네."


"어, 나 여기 알아! 누가 말해줬는데... 상가 나가서 큰길 건너에 있는 2층 유리벽. 초코라떼 엄청 잘 한댔어. 누구였더라..."


어찌됐든 상관없겠지. 그러면서 들어갔다. 약간의 쑥스러움에 직원 앞에서는 팔짱을 풀었다.


그리고 시그니처 메뉴인 아이스 초코라떼 2잔을 주문했다. 그리고 계단으로 가던 중...


'아, 저희 가게가 2층이 보일러가 고장 나서 조금 추울 수도 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상관없어요.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단둘이 있을 수 있다면 마냥 좋을 뿐이었으니까. 클래식한 인테리어 속 푹신한 소파가 둘을 반겼다.


"...아오야기 군."


"왜?"


"기대도 돼?"


"당연하지."


툭. 나란히 앉아 있던 코하네의 머리가 토우야에게 떨어졌다.


자연스레 그도 고개를 살짝 숙이며 얼굴을 가까이 갖다 대었다.


"나, 언제부터였을까... 아오야기 군에게 이렇게 편하게 기댈 수 있게 됐던 게."


그때 토우야는 생각했다. 마음을 드러내는 데 지금만 한 타이밍이 없다고.


좋아한다고, 예쁘다고, 사랑스럽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너한테 반한 순간부터?"


"...?"


"왜, 다시 말해줘?"


또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입고 있던 장밋빛 원피스처럼.


괜히 쑥스러움에 라떼를 홀짝 들이켰다. 그래도 어안이 벙벙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나는 말이야, 네 그런 모습을 보고 싶었어, 아즈사와."


"어...떤 거?"


"아무리 예쁘게 차려입고 와도 결국 천성대로 귀엽게 구는 모습."


"그, 그런 말 하지 마. 자기도 귀여우면서..."


"후후, 이젠 안 통해."


"...몰라."


코하네는 괜히 머리를 움직여 토우야의 어깨를 한 대 툭 쳤다.


그것은 마치 불을 일으키는 부싯돌처럼, 토우야의 마음에 스파크를 일으켰다.


"...그 옷이랑 머리는 어떻게 된 거야?"


"물어보는 게 조금 늦네."


"어쩔 수 없지. 처음 봤을 땐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그냥... 평범하게 가긴 싫었어."


괜히 엄마 말대로 해봤다고 하긴 싫었다.


이럴 땐 확실히 어필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잠깐, 어필? 난 어필하러 토우야와 만난 거였나?


이미 토우야에게 한껏 기대고 있으면서, 뒤늦게 생각했다.


자기는 이미 말했었다. 그런 사이가 되기 위해서 여기 온 거라고.


"(내, 내가 뭐라고 한 거지...)"


다시 초코라떼를 홀짝였다. 용기의 부작용이 뒤늦게 몰려오고 있었다.


쑥스러움의 정도를 벗어난 감정이 그녀의 몸을 뒤덮었다.


"미쳤나 봐 진짜..."


"응?"


"아, 아...!"


답지않은 실수였다. 속마음을 그대로 털어놔 버리다니.


부끄러움에 치를 떨고 있었지만, 오히려 토우야에게 더 깊이 파고들고 있었다.


"...아하."


또 들켜버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망설여졌다. 정말 확실한 걸까?


내가 토우야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나타내도 되는 걸까.


결국 들켜버린거 확 말해버릴까?... 라고 생각은 했지만, 용기는 한 번뿐이었다.


녹아내릴 것 같은 이성을 부여잡은 그녀의 머리가 뜨거워지고 있었다.


"(난... 뭘 하고 싶은 거지?)"


"어떻게 됐든, 나 때문에 입어주고, 머리도 만져줬다는 거지?"


"..."


"고마워, 코하네."


"어...?"


뭘 들은 거지? 토우야에게서 떨어진 코하네는 황당함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저 살짝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고마워, 나 때문에 힘내줘서... 고마워, 이런 나라도 편하게 생각해줘서. 그래도... 난 편한 정도로는 끝내기 싫더라."


토우야는 코하네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오히려 먼저 마음을 연 것은 그였다.


마음이 녹아내리고 있던 것은 한 명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처럼 초코라떼를 한 번 홀짝이고 마음을 추스른 그는...


남은 한 손으로 코하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소녀의 마음은 미칠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젠 돌이킬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용기도 담력도 부족한 겁쟁이인 그녀는, 손을 올리며 결심했다.


"...잠깐 실례할게."


"?!!"


코하네는 자신의 손을 잡고 있었던 그의 손을 반대쪽 손으로 포갰다.


그리고 천천히 옮겼다. 그녀의 고동이 가장 잘 느껴지는... 가슴 정중앙으로.


"느껴져? 나는 모르겠어, 지금 내 가슴이 이렇게 뛰는 이유를... 알고 싶어, 확실히 하고 싶어. 이 마음을."


"아..."


"나, 엄청 좋아하는 거지? 토우야 군을."


소녀의 마음은 녹아내렸다.


동조된 소년의 마음과 함께.


달콤한 향기를 풍기며.


점화된 마음에 박차를 가하며.


더욱 크게 달아오르며.


이에 대한 토우야의 대답은 말이 아니었다.


쓰다듬던 손으로 목덜미를 감싸며, 붙잡힌 손을 그대로 당기는 것.


누구보다도 사랑스러운 그녀를, 장밋빛 초콜릿 같은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곧 느껴졌다. 점점 뜨거워지는 것을.


토우야는 흠칫하며 코하네의 고개를 살짝 들어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귀여운 얼굴이 한껏 달궈져 있었다. 하지만 그 눈동자는 확실히 토우야를 향하고 있었다.


"왜 그래...?"


"그, 그러게... 나도 모르겠어. 너무 좋아서 이러나..."


"코하네..."


"정말, 정말로... 토우야 군도 같은 생각이었다는 게, 너무 기뻐.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할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해."


어디 둘 지 몰라 흔들리는 시선. 하지만 목소리에 한 치의 떨림도 없었다.


어떻게 책임질까. 생각이 막중해졌다. 다만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가슴으로 느껴지는 현실이 더욱 가깝게 다가왔으니까.


좋아서, 좋아해서, 그래서 기뻐서.


단지 그것만으로 감성에 불타는 소녀가 내 품에 있었으니까.


핑핑 돌아가는 눈. 부끄러움에 정신 못 차린 채 방황하고 있는 눈동자.


토우야는 그 눈을 더욱 응시하고 싶었다. 그래서 안고 있던 코하네를 놓아줬다.


양손을 가슴에 얹은 그녀의 모습은 예뻤다.


입꼬리를 살짝 올린 그 얼굴이.


부드러운 머릿결이.


붉은 옷깃이 예뻤다.


그저 예뻤다. 그렇기에 말했다.


"나도... 좋아해. 엄청, 코하네."


"...응!"


얼굴을 식힌 그녀는 안심하며 웃었다.


달콤한 설렘의 열기는 곧 산들바람 같이 나부끼는 사랑에 부딪히며 지워질 터였다.


줄 생각만 하던 그녀는, 너무나 큰 마음을 받아버렸다.


챙겨주기만 하던 그는, 이제 책임지고 좋아하기로 결심했다.


이것은, 이 순간은 한 장의 사진에서, 그리고 하나의 초콜릿에서 이어진 것. 다시금 그들의 손이 맞닿았다.


서로를 마주보며 웃었다.


코하네가 웃었다.


토우야가 웃었다.


초코라떼의 단내가 부드러운 분위기에 사랑을 얹어주고 있었다.


토우야는 받았다.


코하네는 주었다.


그 어느 것보다도 달콤한 초콜릿을.


설렘에 가슴이 썩어 문드러질 것만 같은 마음을.


코하네는, 토우야는 약속했다.


입고 있는 장밋빛 옷자락보다 더욱 새빨갛게 좋아하겠다고.


어제 건넨, 어제 받은 초콜릿보다 달콤하게 해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