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 주의 !!!!

 : 신해이도~각명나선 사이 시점.

 그 이전 스토리+이벤트 스토리 스포도 살짝 있음.


1편 : https://arca.live/b/punigray/95456693

2편 : https://arca.live/b/punigray/96845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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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되짚어 보고서야 깨달은 건데, 자신이 평소 하던 일은 대부분 임무의 연장선이었다. 전투 중에 썼던 무기를 수리하거나, 임무에 필요한 장비를 점검해두거나, 브리핑에서 넘겨받은 정보를 분석해두거나 하는 등.

 특화기체 개발에 착수한 이후로도 별반 달라진 건 없었다. 그냥 정비 목록에서 제 몫의 장비가 빠졌을 뿐이라. 그래서 저번 임무에서 사용한 무기를 손본 것을 끝으로, 일거리가 아예 없어진 이 상황이 많이 당황스러웠다.

 그나마 딱 하나, 할 수 있는 게 있긴 한데. 시야가 절로 휴게실 한쪽을 향해 치우쳤다.

 시선이 닿은 곳에는 지휘관의 전투복이 걸려있었다. 자신이 개조해준 흔적은커녕, 흠집조차 하나 없는 깨끗한 것이. 그게 이상해서 물어봤을 때 돌아온 대답이 참 가관이었다.

 

 [응, 새로 지급받은 거야. 실은, 그 날 퇴각할 때 공격당해서…….]

 

 [예?]

 

 있지도 않은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공격당했다니, 그 대행자에게?

 

 [괜찮아, 그냥 전투복만 못 쓰게 된 거고 별로 안 다쳤어.]

 

 [결국 다쳤었다는 뜻이잖습니까!]

 

 전투복이 못 쓰게 될 정도였는데 괜찮다는 게 말이 되나. 기도 안 차는 부연에 저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고, 지휘관은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진짜 괜찮았대도, 좀 긁힌 정도였는걸. 애초에 죽일 작정도 아니었던 거 같고. 그 작자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날 갖고 놀기만 했으니까.]

 

 그렇게 말하면 퍽이나 안심이 되겠다. 그때도 늑골이 부러져서 왔으면서.

 그게 거짓말인지 아닌지 스스로 검증할 방법이 없는 게 가장 답답했다. 침식된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떠올릴 수만 있었어도. 끝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제게 지휘관이 볼멘소리를 냈다.

 

 [이럴 거 같아서 말 안 하려고 한 건데…….]

 

 말을 안 해도 될 게 따로 있지! 걱정해달라고 반어법으로 시위하는 것도 아니고!

 정말 되새길수록 울분만 치미는 기억이다. 그렇게 제 속에 천불을 낸 장본인은 지금, 리브와 함께 휴게실을 나서고 있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응, 조심해서 갔다 와."

 

 정정, 나가는 건 리브 혼자였다. 지휘관은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뒤 돌아섰다. 사람 좋은 웃음으로 리브를 배웅하던 낯은, 자신을 마주하자 대뜸 뾰족해졌다.

 

 "리, 또 내 전투복 보고 있었지?"

 

 반사적으로 눈을 피했다. 그런다고 엄한 목소리가 따라붙는 걸 피할 순 없었지만.

 

 "절대 안 돼! 아시모프가 괜찮다고 할 때까진 일하는 거 금지! 손대면 리브한테 다 이를 거야!"

 

 "쳇."

 

 리브까지 들먹이다니, 비겁하게. 덕분에 지휘관의 전투복을 개량하는 건 엄두도 못 내고 있는 실정이다. 간병 모드가 된 리브에게 쫓겨 다니느니, 그냥 자신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낫지.

 ……한편으로는, 그래서 지휘관의 말을 결국 믿은 거기도 했다. 정말 중상을 입었었다면, 지금처럼 종일 서류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꼴을 리브가 보고만 있지 않을 터다. 의료 분야에서만큼은 타협이 없는 그녀의 성격상 그건 말이 안 된다.

 그 엄격함이 스스로에게도 적용되면 오죽 좋겠느냐만. 아직까지는, 소대의 모두가 그녀 대신 주의를 기울여주는 게 최선인 것 같다.

 

 "지휘관님은 같이 안 가세요?"

 

 "그러려고 나온 거였는데, 오늘은 옆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해서. 바래다주기라도 하려 했더니 리브가 사양하기도 했고."

 

 씁쓸함을 곱씹으며 한 질문에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상태가 많이 호전된 건가? 백야 기체의 후유증은 지휘관과의 의식 연결을 활용해서 치료 중인 것으로 들었는데.

 그런 거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며칠 전의 발작 이후로 별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걱정스럽던 차라.

 

 "루시아는 훈련실에서 아직 안 돌아온 거지?"

 

 "네."

 

 "그래, 그럼 난 다시 일하러 갈게……."

 

 유언이라도 남기듯이 말한 지휘관이 사무실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 안에는 그가 처리해주길 기다리는 서류들이 여전히 산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게 도와준다고 할 때 진작 듣지. 왜 항상 쓸데없는 데서 고집을 부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저것도 요령도 없다고 표현해야 되는 부분일까.

 그래도 덕분에 할 일이 하나 생각났다. 사무실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하고 휴게실 안쪽으로 향했다.

 

 "……."

 

 필요한 걸 준비해서 사무실로 들어섰을 때, 지휘관은 눈을 감고 있었다. 문서작업을 하던 자세 그대로. 규칙성 없이 끄덕대는 고개가 의식이 없는 상태임을 보여주었다.

 통제를 잃은 펜은 가역적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서류 위를 가로지른 건 아니었다. 출력한 자료에다 보고서에 인용할 부분을 표시하던 중이었던 거 같으니. 당장 밑줄 친 대로 따라 썼다가는 쓴 사람도 풀 수 없는 희대의 암호문이 될 판이다만.

 눈에 띄는 것은 하나 더 있었다. 서류 위에 문진처럼 놓여있는 지휘관의 단말기. 켜진 채로 방치된 화상에는, 익숙한 문체로 작성된 문서 하나가 띄워져 있었다.

 

 "지휘관님."

 

 "억……? 맙소사, 나 그새 또 졸았네?!"

 

 화들짝 깨어난 지휘관이 고개를 좌우로 힘껏 털며 푸닥거렸다. 그 꼴을 지켜보고 있으려니 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설마 퇴근한 이후에도 일하신 겁니까?"

 

 단말기의 문서는 어떻게 봐도, 지금 붙잡고 있는 보고서의 초안이었다. 지휘관은 한 박자 늦게 화상을 가렸다. 제 눈치를 살살 보는 모습으로 보아 뭘 잘못한 건지 알긴 하나보다.

 

 "그으게, 저기…… 생각날 때 미리 정리해두면 빨리 처리할 수 있으니까……."

 

 "그러고서 근무시간에 자버리면 본말전도잖아요. 쉴 때는 좀 제대로 쉬시라고 도대체 몇 번째 말씀드리는지 모르겠네요."

 

 자칫 잇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자신이 얼마나 안간힘을 쓰고 있는지 알긴 할까. 어색하게 웃는 낯이 오늘따라 유독 밉살스럽다.

 잔소리를 퍼붓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만, 그래봤자 저 우직한 성격에 씨알도 안 먹히겠지. 끓어오른 짜증을 한숨과 함께 삼켰다. 대신 그때까지 들고 있던 것을 그의 곁에 내려놓았다.

 

 "드시면서 하세요."

 

 "오, 고마워."

 

 자신이 타 온 커피를 본 지휘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원래는 매일 아침 한 잔씩 마시는 게 기본이었는데, 요 며칠은 그가 출근하자마자 곧장 사무실로 향하는 바람에 잊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걸 까먹을 수 있었나 싶다만…….

 

 "풉컥!"

 

 "?!"

 

 요란한 소리가 생각을 끊었다. 지휘관은 입가를 가린 채 연신 기침을 했다. 손은 반쯤 토한 커피로 엉망이었다.

 

 "괜찮습니까?"

 

 "괜…… 찮, 콜록!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드네, 켁."

 

 잠이 덜 깬 채로 마시다 사래라도 들렸나. 책상 한구석에 밀려나있던 티슈를 지휘관에게 건넸다.

 

 "그러고 보니 설탕이 어디 있더라? 오늘은 좀 달게 먹어야겠어."

 

 상황을 수습하고 켈록거림도 잦아들었을 무렵.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그를 빤히 바라봤다. 쓴 것이라도 베어 문 양 찌그러진 얼굴이 새삼스러웠다.

 

 "별일이네요."

 

 "그치만 서류만 보고 있으니 당 떨어지는걸……."

 

 하긴 문서작업도 꽤나 머리를 쓰는 일이다. 앉아만 있는 듯한 겉보기에 비해 에너지 소모가 심할 테니, 일리가 있긴 한데.

 자신이 준 커피에 손을 댄 게 처음이라서 그런가. 어쩐지 사무실을 나서는 모습에서 시선을 떼기 어려웠다.

 설탕을 찾으러 간 지휘관을 뒤로 하고 개인실로 향했다. 도중에 전투복 쪽에 괜히 또 눈길을 준다. 지금처럼 여유가 있을 때 미리 해둬야 할 텐데. 고칠 곳이 한두 군데도 아니고.

 일단은 다음을 기약하고, 달리 할 게 없는지 물색하며 개인실을 배회했다. 그래봤자 정말 뭐가 없긴 했다. 근래에는 개인적인 연구조차 신기체 개발의 방향성을 고민하는 쪽으로 바뀐 탓에.

 이런 무료함은 쿠로노 놈들의 수작질에 지휘관이 감금당했을 때 이후로 처음인 듯싶다. 물론 당시엔 일부러 아무것도 안 했던 거니까, 손이 빈 게 이 정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불현듯 또 불안감이 엄습한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허비해도 되는 걸까, 하고.

 승전보가 몇 번 울렸음에도 지상의 전황은 여전히 좋지 않다.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는 알 수 없으니 안심하기는 아직 일렀다. 당장 자신들도 방심했다가 대행자 같은 거물과 맞닥뜨렸지 않나.

 사실은 말만 거창할 뿐 그냥, 습관처럼 일거리를 달고 살았던 반작용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이 조바심 자체가 뭐라도 붙잡고 있을 게 없어서 생긴 거니까.

 역시 온전한 휴식이란 제게 사치인 걸지도. 지휘관이 알면 성가셔질 법한 생각을 하며 작업대 위의 선반을 뒤졌다. 혹여 잊고 있던 미완성품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

 원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만, 매일 지휘관의 커피를 타던 것도 까먹었던 참이다. 고로 어디선가 기억에 없는 작업물이 튀어나오더라도 이상할 건 없다. 정 아무것도 없으면 간만에 휴게실의 통신 방화벽이라도 손보면 되고.

 그 결과 뭔가 나오긴 나왔다. 예상했던 것과는 좀 다른, 종이봉투 하나가.

 봉투는 공중정원의 상점에서 포장용으로 쓰는 것이었다. 평소처럼 연구용 부품을 구매한 거라면 이런 불필요한 것까지 받아오지 않았을 거다. 즉 자신이 뭔가 다른 걸 샀었다는 건데.

 선반의 잘 안 보이는 구석에 박혀 있던 것을 밖으로 꺼냈다. 무게는 굉장히 가벼웠다.

 

 "이건……."

 

 안에 있던 건 장갑이었다. 담백한 디자인에, 회색 직물로 짜여진. 푸르스름한 빛이 돌지만 재질 자체는 폭신해서 제법 따뜻해 보였다. 그런 특징들이 어쩐지 자신이 잘 아는 누군가를 연상케 했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장갑은 자신이 직접 산 게 맞았다.

 

 [형, 잠깐 시간 괜찮아?]

 

 과학 이사회에서 돌아오는 길이었을 것이다. 머레이와 마주쳐서, 평소처럼 간단한 안부 인사를 하려 했는데. 이 날은 웬일인지 머레이가 저를 불러 세웠다.

 

 [만들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이 부품을 못 찾아서 말이야. 혹시 구할 수 있는 곳을 알고 있어?]

 

 머레이가 보여준 건 과학이사회나 정비부대에서 쓰는 테스트 장비용 규격으로, 시중에는 유통되지 않는 제품이었다. 물론 자신은 그걸 구할 루트를 알고 있었다.

 

 [내가 같이 가는 편이 빠를 거야. 외출 허가를 받아볼 테니 잠시 기다려.]

 

 그길로 곧장 지휘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통화가 빠르겠지만 긴급한 사안도 아니고, 임무가 없던 날이라 금방 확인할 테니.

 

 『머레이를 도울 일이 생겨서 잠시 나갔다와야 할 것 같습니다. 외출 신청을 해주실 수 있습니까?』

 

 반응은 예상대로 신속했다. 먼저 도착한 것은 허가 확인서 쪽이었다.

 내용은 제법 그럴듯했다. 외출 목적은 ‘타 소대와의 협업’, 동행인은 ‘케르베로스 소대의 지휘관’으로 교묘하게 에둘러져 있었으니까. 그동안 자신이 대신 작성했던 각종 경위서와 시말서를 보고 배운 것일런가. 그리고 외출 시간이…… 6시간?

 

 『동생이 바쁘지 않다고 하면 겸사겸사 가족끼리 바람도 좀 쐬고 와.』

 

 어처구니없는 수치에 눈을 의심하는 순간, 회신 알림음이 들렸다. 직후 자동으로 열람된 간단한 글귀는 머릿속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무슨 바람을 어떻게 쐬면 6시간씩이나 걸리는 거지. 공중정원 일주라도 하고 오길 바라는 건가? 지휘관이 이런 영문 모를 짓을 할 때마다, 이제는 꽤 익숙해졌다고 여긴 게 오만이었을까 싶어졌다.

 

 [아하하, 형의 지휘관은 통이 크네.]

 

 […… 일단 가자.]

 

 도망치듯 통신 화상을 끄고 앞장섰다. 목적지는 예전에 지휘관과 함께 들렀던 군수품 비밀 공급처였다.

 

 [일반 상점에서 구하기 힘든 부품은 앞으로 여기 와서 구하면 돼. 오는 길은 기억했지?]

 

 [응, 좌표도 기록해놨으니 문제없어. 역시 형한테 물어보길 잘했네, 이런 곳이 있단 건 어떻게 안 거야?]

 

 필요한 것은 순조롭게 구할 수 있었다. 다만 너무 일사천리였던 나머지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았다.

 6시간은 너무 과하지만, 그렇다고 또 30분도 안 돼서 돌아가는 건 좀 아니지 않을까. 그건 일부러 신경 써준 지휘관에게 실례가 될 거 같았다. 갈 곳이 궁해서 뭘 하며 시간을 보낼지가 문제긴 한데.

 짧은 고민을 거쳐 상점 지구로 향했다. 하필 추운 날이라, 카페 같은 곳이라도 들어가 있는 편이 나았다.

 공중정원은 내부에 지구에서 발생하는 기상 상황을 유사하게 구현하고 있었다. 일출과 일몰부터 시작해, 인공 강우 및 강설과 계절감의 조성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비효율적인 짓을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어차피 인공적인 환경인데, 그냥 쭉 쾌적한 상태를 유지하는 게 좋지 않나? 에너지 활용 측면에서도 손해인 것 같은데.

 더불어 이런 들쭉날쭉한 날씨가, 지병으로 오래 고생했던 머레이에게 좋지 않을지도 모르고. 이래저래 마음에 안 든다만, 구조체 하나가 이의를 제기해봤자 씨알도 안 먹히겠지.

 스멀스멀 밀려오는 불만을 억누르며 그럭저럭 손님이 있는 가게로 들어갔다. 거기서 자릿값으로 시킨 음료를 마시며 머레이와 짧은 대화를 나눴다. 뒤늦게 서로의 안부를 물은 정도라 별 영양가는 없었다.

 

 [이럴 때 전시회가 있어서 같이 가면 딱인데, 아쉬운걸.]

 

 확실히, 그랬으면 말이 자꾸 끊어져서 골치가 아플 일은 없었을 텐데. 도대체 그놈의 전시회랑은 왜 이렇게 인연이 없는 건지. 처참할 정도로 빈약한 화제에 머레이조차 난감하게 웃었다.

 침묵이 길어지는 만큼 음료가 줄어드는 속도는 빨라졌다. 머지않아 머레이가 잔을 비웠고, 1시간도 지나지 않아 가게를 나서게 되었다.

 

 [머레이, 저거 어때?]

 

 돌아가던 중, 지나쳐가던 어느 가게 앞에서 문득 걸음이 멈췄다. 진열된 의류와 잡화 중에 머레이가 평소 즐겨 입는 정장과 잘 어울릴 듯한 장갑이 눈에 띄어서였다.

 

 [어라, 형이 사주는 거야?]

 

 [요즘 꽤 추우니까. 외출할 때 끼고 다녀.]

 

 본인도 싫지 않은 눈치라 곧바로 값을 치렀다. 고작 장갑 하나인데도 머레이는 퍽 기뻐보였다. 손에 꼭 맞다며 웃는 얼굴이 여전히 어릴 시절과 비슷하다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건 형의 지휘관에게?]

 

 문제의 장갑 역시 거기서 발견한 것이었다. 왠지 지휘관이 생각나서 잠깐 본 것뿐인데, 시선이 너무 오래 머물렀던 걸까.

 아무튼 이유를 정확하게 짚어버리니 안 사고 넘어가기도 좀 뭐했다. 크기도 적당해서 사이즈가 안 맞을 거란 핑계를 댈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이 떠밀리듯 장갑을 집어 들었다.

 

 [그 사람은 누가 옆에서 잔소리를 안 하면 도통 자길 챙기질 않아서.]

 

 마침 배려도 받은 참이니까. 좀 부담스러운 수준이긴 해도, 덕분에 잠깐이라도 머레이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확실히 답례를 하는 게 맞겠지.

 계산을 하고 포장하는 것을 기다리는데 저를 쳐다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의아한 눈으로 마주보니 머레이가 미소 지었다.

 

 [형이 즐거워 보여서 다행이야.]

 

 [즐겁기는, 귀찮기만 한데.]

 

 나름 꽤나 퉁명스레 답했으나, 도리어 경쾌한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어쩐지 6시간짜리 외출 허가를 보였을 때와 비슷한 민망함이 치밀었다. 봉투에 담겨 나온 장갑을 받아들고 걸음을 서둘렀다. 그래봤자 머레이가 부르는 소리에 얼마 앞서가지도 못했지마는. 

 

 *

 

 그러고는, 건네줄 타이밍을 잡지 못해 계속 가지고만 있었다. 따로 만나기엔 최근 서로 일정이 안 맞기도 했고, 당장 지난번의 그 대행자 건으로 완전히 잊고 있었기도 해서.

 이왕 생각났으니 기회를 봐서 넘겨줘야겠다. 뭐라 핑계를 댈지가 고민이긴 한데. 예의 사고로 놀래킨 것에 대한 사과의 의미, 는 역시 좀 이상하겠지. 그러게 산 날 바로 줬으면 일이 이렇게 복잡하지 않았을 것을.

 하지만 이건, ‘여성용’인데?

 

 [역시 리가 타준 커피가 최고야.]

 

 "윽……!" 


 찰나 세상이 뒤집혔다. 의식의 바다를 흔드는 혼란에 멀미가 났다.

 뇌리에 지끈거리는 감각이 엄습한다. 아니, 이건…… 통증이 맞는 건가? 실재하는지도 모를 진원에 대한 의문을, 이명처럼 뭉개진 속삭임이 덮어버린다.

 

 ――잊■■ 안■.

 

 노이즈로 이루어진 풍랑이 인다. 맑은 줄 알았던 수면이 흙탕물처럼 어질러졌다. 몰아치는 너울 사이사이로 언뜻 스쳐가는 파편들이 이지러진 시야에 박힌다.

 

 [폐허에 장미라니, 신기한 일이네.]

 

 […… 데이터를 의식의 바다에 기록해 복원시켰습니다. 제 의식의 바다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장미라서, 지휘관님께서도 보셨으면 좋겠어요.]*1

 

 무슨 대답이 돌아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 멀지 않은 날의 일일 텐데도.

 중심을 잃은 듯한 위기감에 손을 뻗었다. 뭐라도 붙잡지 않으면 그대로 무너질 것 같았다. 그 느낌이 어쩐지 상실감을 닮았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무엇을 쥐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뭘 잃었는지도 모르는 마당에 무얼 잡을 수 있단 말인가.

 

 ――■■■야 ■.

 

 [전에 망가졌다던 드라이버가 어떤 종류인지 잘 몰라서. 그냥 원래 쓰던 거랑 같은 공구 세트 최신판을 사왔는데, 괜찮아?]

 

 깨진 목소리가 과거 심장이 있던 자리를 후벼 판다. 어째서 자신은, 기억나지도 않는 음색이 온화했다는 걸 알고 있나.

 

 [이런 건 인간끼리 어울릴 때나 쓰는 수단 아닌가요. 왜 저한테…….]*2

 

 [그냥 리한테 뭔가 선물하고 싶었는데…… 안 돼?]

 

 가슴속을 난도질하는 사금파리의 형체를 제대로 알아볼 수조차 없다. 상흔 속에 고인 핏물이 역류하는 듯하다. 곧이곧대로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착각임을 확신한다. 이미 토해낼 피도 없고, 깊숙이 찔릴 심장 또한 없다.

 하지만 이렇게 아픈데. 분명 몸 안 어딘가가, 숨을 허덕일 때마다 넝마가 되고 있는데. 그러니 이게 고통이 아닐 리가 없건만. 만약 정말로 아니라면, 그럼 나는 왜 이렇게 괴로운 거지?

 

 [――웃어봐, 리. 항상 무표정이면――]*3

 

 "그…… 만……."

 

 아프다. 차라리 죽고 싶을 만큼. 분명 이건 뭔가 잘못됐다. 혼자서는 벗어날 수 없는 수렁에서 몸부림친다. 잡음투성이 파랑에 잠긴 의식의 바다가 비명을 질렀다.

 끔찍한 것은, 이 모든 것도 한낱 편린에 불과하단 점이다. 진짜 절망은, 제가 이미――

 

 ――■■■ 네 ■■한 사■■■.

 

 불현듯 뒤엉킴이 멈췄다. 생경할 정도로 잠잠해진 수면이 느닷없이, 이제는 추억이란 부표를 단 한때를 반추한다.

 

 [잃어버리면 절대 용서 안 할 겁니다.]*4

 

 말은 그리 했지만, 사실 거창한 걸 준 것도 아니었다. 침식체에서 회수한 재료를 대충 조합해 만든 조잡한 로봇일 뿐이니.

 어릴 적의 머레이에게 만들어준 게 생각났던 걸까. 지금에 와선 늦은 생각이긴 한데, 왜 하필 그런 걸 주려고 했었는지 모르겠다. 어린애도 아니고, 그런 폐품이나 재활용한 장난감 따위 쓸모도 없을 텐데.

 

 [리가 신경 써준 건데 당연하지, 고마워!]

 

 그런데도 그게 대체 뭐라고. 제가 처음으로 준 선물이라며, 마냥 천진하게 웃으며 행복해하던――

 그 얼굴이 도무지, 기억나질 않았다.

 

 "…… 젠장."

 

 정신을 차리니, 작업대에 기댄 채 주저앉아 있었다.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왔어도 어지러움은 여전했다. 어설프게 움직였다가는 바로 나동그라질 터다. 인조피부 위로는 식은땀도 잔뜩 맺혀있었다. 그 불쾌한 습도를 인지한 순간, 목 안에 일렁이던 메슥거림이 짙어졌다.

 전투용 기체에 이런 생리적 현상은 왜 구현해놓는 거지. 이딴 게 대관절 무슨 이점이 있다고. 날뛰는 감각들이 진정되기를 기다리며 한바탕 욕지거리를 주워섬겼다.

 아픔은 거짓말처럼 사라져있었다. 그런 감각은 존재한 적조차 없었던 것처럼. 의식의 바다에 남은 기록을 뒤져봐도 기체에 실제 통각이 감지된 흔적은 없었다. 분명 좀 전까지 자신을 지독히도 괴롭힌 걸 기억하고 있건만.

 그러고 보니 아까 뭔가 잡지 않았던가. 의식의 바다를 점거한 혼탁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뻗었던 손을 확인했다.

 손 안에 있는 건 문제의 장갑이었다. 의문의 해결은 더 많은 의구심으로 이어졌다.

 왜 하필 이걸 쥐었을까. 어째서 구김이 남지 않는 재질이라 다행이라 생각했을까. 자신은 정말로 이걸 지휘관에게 주려고 산 건가? 그럼 왜 남성용이 아니라――

 소스라쳐 고개를 치켜들었다. 시선이 자신 외의 기척이 없는 방 안을 가로질렀다. 눈길이 멈춘 곳은 고요한 벽 너머, 지휘관의 사무실이 있는 방향이었다.

 지금 제 지휘관의 자리에 있는 저 사람은―― 누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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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2년 화이트데이 통신 대화) 리 난수 파트

*2. 리 이화 기체 정보) 신뢰도 증가 6번 대사

*3. 21챕터 각명나선 13) '찢어진 심장'

*4. 리 이화 기체 정보) 호감도 스토리 6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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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카 글쓰기에 각주 기능이 없는 거 같아서

 인용 대사는 *(넘버링)으로 처리함.



 다듬는 것만 해도 겁나 오래 걸리넼ㅋㅋㅋ

 혹시 기다려준 쌔럼들 있다면
 오래 걸려서 미아내...?


 다음 파트는 또 언제 올린담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