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아

이 데이터는 뭐야?

 

리는 전자 화면에 표시되는 정보를 손을 흔들어 껐다.

 

리 

공중정원에서 탈출한 구조체가 남긴 데이터는 돌아가면 비앙카에게 넘겨줄 것입니다.

 

루시아

탈출, 그런가...

 

루시아는 다소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리 

네, 청소부대에게 쫓긴 기록을 메모리에서 찾아냈습니다. 

루시아, 기억나나요........

 

루시아

뭐라고?

 

리 

아뇨.... 아무것도.

 

다른 사람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그녀가 존재하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건지, 리도 자신이 왜 그러는지 몰랐다.

 

물론 '기억된다'는 걸 확인해도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사람은 죽으면 뼈가 되어 땅속 깊이 묻히거나 재로 변해 용기에 들어간다. 땅과 비석은 그들이 한때 존재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구조체의 죽음은 점진적인 자기 인식의 소멸이며, 몸은 쉽게 버릴 수 있고, 의식은 데이터 조각에 불과하다. 구조체가 말하는 '의식 복귀'는 근본적으로 ...

 

(아니.. 이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야.)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계속 나아가는 것 뿐이야.)


 

전투 영상: RECORD0324

>>>상태: 기밀

 

데이터가 심하게 손상되어 정상적으로 재생할 수 없습니다. 사용 가능한 다음 데이터로 자동으로 건너뜁니다.



훈련 기록: VOCALTEXT10293

>>>상태: 숨김


 


그녀는 오늘도 그곳에 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훈련실에서 혼자 재활훈련을 하고 있다. 칼을 휘두르는 자세는 전장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당당하고 멋있었다.

 

대장은 훈련일지에 이렇게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하지만 이 부분은 내 일기이니 그냥 기록하도록 한다.

 

어디까지 말했더라? 오, 그녀의 눈빛은 언제나처럼 차가웠지만,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외로움이 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난 그녀의 외로움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루시아는 지난 임무에서 크게 다쳐 중상을 입었고 그녀를 제외한 팀원들과 지휘관들이 모두 사망했다고 들었다.

 

딱히 특이한 점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그녀에게는 뭔가 다른 점이 있다는 걸 항상 느낀다.

 

그녀는 이제 그레이 레이븐 소대에 유일하게 남아 있다.

 

그녀와 함께 싸울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당시에는 이런 생각을 하며 훈련을 마치고 바로 훈련장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그때 무엇을 했는가? 그래, 훈련을 마친 루시아에게 인사를 준비하면서 연습실 문 앞에서 기다렸다.

 

그런 다음 나는 루시아의 군사적 업적을 칭찬하고 그녀에 대한 감사를... 그레이 레이븐 소대에 감사를 표시하고 마침내 그레이 레이븐 소대에 제대로 합류하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이래야 했을 텐데, 사실은 루시아가 훈련실을 나서는 모습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녀가 내 앞을 지나갈 때, 그녀의 눈은 이쪽으로 향하지도 않았다.

 

두려움 때문에 기회를 놓친 나는 결국 절차에 따라 그레이 레이븐 소대에 합류하기 위한 지원서를 제출했지만, 어김없이 거절당하고 지금의 소대에 배속됐다.

 

유명한 그레이 레이븐 소대에, 나같이 평범한 병사는 필요 없겠지.


 

훈련 기록: VOCALTEXT10310

>>>상태: 숨김



새 소대에 합류한 후의 행동은 시뮬레이션 훈련과 별반 다르지 않은데, 내가 하는 일은 대부분 보호구역 주변의 침식체를 청소하고, 건설을 돕고, 장치를 세우고, 침식체의 움직임을 조사하고, 심층 조사를 담당하는 팀에 보고하는 것이다.

 

지휘관은 내가 더 어려운 일을 하지 못하도록 의도적으로 방해한 것 같다. 내 능력이 대장이나 테레사만큼 강하지 않고 중요한 임무들이 엉망이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루시아와 함께 싸우지는 못하더라도, 현재 소대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되니까 열심히 훈련해야 한다.


 

훈련 기록: VOCALTEXT10314

>>>상태: 숨김



다행히 오늘 훈련장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오늘 루시아는 다음 지상작전을 위한 적응 훈련을 하기 위해 모처럼 '여명' 기체를 출동시켰다.

 

붉은색 포니테일과 기체의 고출력에서 나오는 붉은색 빛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눈부셨다.

 

다만 이 기체를 사용하는 루시아는 늘 마음이 편치 않아 보인다. 우연히 기술 부서에서 얘기를 들었는데, 기체의 헤어스타일을 고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런 루시아가 정말 귀엽고, 그 헤어스타일이 너무 잘 어울리는데, 아쉬움이 컸다.

 

아무래도 나는 용기가 없어서, 누가 나 대신 말해주면 좋겠다.

 

하지만, 요즘 루시아는 좀 다르다. 싸움이 전부인 듯, 눈빛은 차갑고 공허했다.

 

그러나 요즘 그녀의 눈에는 공허함 외에 다른 것이 있다. 예전처럼 혼자 멍해 있지만, 그럴 때면 누군가 찾아와서 더 시끄러운 곳으로 끌고 간다.

 

때로는 어리고 얌전해 보이는 여자가, 아마 그녀는 그레이 레이븐의 또 다른 멤버일 수도 있겠다. 때로는 불같은 성격의 여자로, 루시아와 겨뤄보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더 자주 오는 것은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새 지휘관이었는데, 그 사람은 항상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혼자 있는 루시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루시아는 언제나 진지하게 그를 맞았고, 그때 그녀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아늑해 보였다.

 

뒤통수만 봐도 실없이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돌격매 대원도 늘 그레이 레이븐 기지로 달려갔다. 나보다 더 자주 가다가 돌격매 대장에게 잡혀가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대범하게 문을 밀고 들어가는 것과 달리, 나는 매번 지나가는 척만 해야 했다.

 

어느새 루시아의 곁에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전투일지:VOCALTEXT0331

>>>상태:숨김


 

그 전까지는 ‘죽는다’라는 가능성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사람은 반드시 죽지만, 나는 구조체니까.

 

우리를 구조체로 개조했다는 사람들의 말로는, 전투 중 기체가 심하게 손상됐을 때는, 의식 복귀가 필요하다고 했다.

 

복귀한 의식이 새 기체에서 다시 살아나, 구조체가 끝없이 싸울 수 있게 된다고 했다.

 

의식 복귀의 부작용은, 우리의 전투 데이터가 기억 데이터보다 우선적으로 복귀하기 때문에, 만약 복귀 도중 뜻밖의 일이 생기면, 기억을 잃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투 경험이 많은 선배들의 말에 따르면, 위기의 순간에는 복귀할 여유가 없고, 주저하는 순간에 전세의 방향과 동료의 생존이 결정되는 참혹한 일이 벌어진다고 했다.

 

지금의 내가 전쟁터에서 복귀한다면, 공중정원의 선실에서 다시 깨어난 나는, 과연 ‘나’라고 할 수 있을까?

 

대장은 내가 엉망진창에 생각이 너무 많아 지휘관이 자꾸 멈추고 나를 위해 의식의 바다를 조정하는 것을 계속할 수는 없다고 했다.

 

대장의 질타에 고개 숙여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지휘관의 배려의 말에 더 죄책감이 들었다.

 

이번 임무에서 지휘관과 대장이 아니었다면 침식체 무리에게 죽었을 거다. 분명 일반적인 임무였는데, 추락한 이종의 코어 파편과 부딪혔을 뿐인데, 그 파편들이 엄청난 양의 침식체를 끌어당길 줄은 몰랐다.

 

내 안에 뿌리내린 두려움이 어디서 오는지도 몰랐고, 나 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다.

 

나는 병사로서 부적합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레이 레이븐 소대가 나를 거절하는 것도 당연하다.


 

전투영상:RECORD0329

>>>상태:손상됨


 

테레사

시간이 없어요!! 여기서 침식체에게 뚫리면, 바로 뒤 보육 구역이 침식체로 둘러싸이게 돼!

 

우린 여기를 떠나야 돼! 여긴 전환탑과 너무 가까워, 지휘관이 없으면 우리의 침식률이....

 

테레사

퍼니싱 농도가 낮은 곳으로 가서 지원 호출을 해! 내가 폭탄을 터뜨릴게. 제길. 제어장치가.... 수동으로 폭파시키는 수 밖에!

 

그렇게 되면 네 몸도 위험해!

 

테레사

그래야만 저것들을 막을 수 있어! 폭발하기 전에, 의식 복귀를 할테니, 그 다음은 네게 맡기겠어!

 

잠깐...

테레사!!!


전투일지:VOCALTEXT0330

>>>상태:숨김


위성 위치 확인 시스템과 통신시스템이 완전히 망가졌다... 그러다보니 공중정원에서 내 위치를 알아낼 수 없었다.

 

잇따른 전투로 데이터가 쌓여 의식의 바다의 부담이 커졌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나는 지금 탈출했다고 표기되고 있는데, 이대로 다시 끌려간다면 쉽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다’라는 것이 너무 두렵다.

 

그리고 폭발하는 분진과 연기 사이로 보이는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전투의 몸짓, 칼 솜씨, 머리카락 색깔은 달라졌지만, 그녀가 루시아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그녀는 왜 승격자였지? ....그리고 왜 나는 그것에 조금도 놀라지 않았을까?

 

마치, 나는 예전에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왜 지휘관에 마지막에 ‘미안하다’라고 했을까?

 

도대체 나는 언제, 재가동했던 거지?



전투영상:RECORD0334

>>>상태:공개

 

붉은 전류가 기체 사이를 빠르게 흘렀고, 상처투성이 구조체가 칼을 짚고 무릎을 꿇었다.



???

또 만났네, 아름다운 아가씨. 살아있는 걸 보니 아주 좋군.

 

……넌 누구야?

 

???

너 나 기억 안 나? 지난번에 내 이름 알려줬잖아.

 

지난....번?

 

???

응....? 이렇게 된 걸 보니 이미 한 번은 재가동되었나 보네.

지난번에 좋은 대화를 나눴는데, 그 아름다운 추억이 나한테만 남은 것 같아서 아쉽네.

 

...

 

? ? ? 

그런 경계심으로 쳐다보지 말아줘. 나는 너의 동반자라고.

다시 자기소개를 하자면 롤랑이야.

 

롤랑

그리고 축하해... 넌 우리 중 하나가 될 자격이 있어.

 

자격?

 

롤랑

그래- 승격 네트워크에 접속해서 그 능력의 자격을 공유하는 거야. 퍼니싱은 더 이상 네게 위협이 아니야. 우리는 네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통제하는 법을 가르쳐 줄 거야.

 

왜 나야?

 

롤랑

잊어버렸나.... 그런데 재가동해도 자격이 사라지지 않았네.

어쨌든... 바로 조금 전, 너는 이미 승격 네트워크의 첫 번째 선별에 통과했어.

내 노력이 헛되지 않게 해줘서 고마워.

 

은발의 승격자는 해맑게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롤랑

그럼 우리는 루나 아가씨를 만나러 가는 거야.

 


■■메모리 데이터 복원

>>>상태: 공개



승격자의 리더는 내가 상상했던 냉혹하고 차가운 기계가 아니었다.

 

달빛처럼 작고 몽환적인 소녀였고, 롤랑은 그녀를 ‘루나 아가씨’라고 정중하게 불렀다.

 

왠지 모르게 웃는 모습이 루시아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루시아는 잘 웃지 않지만.

 

그녀의 얼굴은 연약하고 무해하게 보였지만 그녀 앞에서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녀가 헛웃음을 짓는 것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그녀가 손을 내밀자....

 

의식의 바다가 들끓기 시작했고 기체의 활동이 점차 내 통제를 벗어났다.

 

내 것이 아닌 증오와 파괴의 욕망이 내 모든 의식을 침범했고, 나는 그것을 억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시력을 잃을 때까지 눈앞은 핏빛으로 달아올랐다.

 

그 이후는 다 기억나지 않는다.

 

완전히 의식을 잃기 전에 롤랑의 목소리가 들렸다.

 

롤랑 

'아니...실패인가... 역시 이 상태는, 성공해도...'



...


 

? ? ? 

...예상 외로, 침식체의 잔해가 이렇게 많을 줄이야...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혼란스러운 의식의 바다에 낯익은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루.....시....아.....?

 

얼마 남지 않은 에너지를 모두 시각 모듈로 옮겼다. 조금이라도 더 잘 보고 싶었다.

 

점차 의식과 시각 신호가 회복되며 퍼니싱에 타든 느낌이 다시 온몸을 엄습하면서 겨우 유지하던 균형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눈앞의 모든 것을 보기로 선택했고, 흑발의 소녀가 검을 휘둘러 끊임없이 스쳐지나가는 침식체를 죽였고, 그 뒤에는 지휘관으로 보이는 인간이 있었다.

 

신비한 승격자가 아니라 내가 찾고 꿈꾸던 루시아가.

 

......그녀의 입장에서 지금의 내 모습은 보통의 침식체와 다를 바 없겠지.

 

그럼에도 나는 몸을 힘껏 움직여 쌓인 잔해 속에서 기어 나왔다. 움직일 수 있는 몸이 두 손만 남은 걸 보니 하반신이 내가 멈춘 사이 정신 나간 침식체에 의해 분해된 것 같다.

 

내 주변에 잠복해 있던 침식체가 내 행동으로 깨어났고, 누군가가 침입한 것을 알아채고 곧바로 전투 모드에 들어갔다.

 

지휘관 주변의 침식체를 제거하고 나서야, 루시아는 마침내 이쪽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내 앞에 왔고, 마침내 나는 그녀의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그녀의 모습은 기억과 조금 다른,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체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추억의 그 늠름하고 멋진 전투 스타일에, 군더더기 없는 칼춤, 차가운 눈빛――그녀는 진짜 루시아다.

 

그리고 확실히, 이 헤어스타일은 그녀에게 정말 잘 어울린다. 이번에는 누가 그녀에게 말해줬는지 궁금하다.

주위에서 루시아를 맹렬히 공격하던 침식체가 그녀의 칼에 모두 잠잠해지자 그녀는 나를 향해 칼을 들었다.

 

'...인류...인류를...파괴...‘

 

바이러스의 침식이 심해짐에 따라 주인 없는 속삭임이 다시 강제로 내 의식을 점령하려고 했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은 그렇게 둘 수 없었다.

 

죽을지 언정 내 본래 의지는 지키고 싶다. 나는 내 것이 아닌 한을 품고 죽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루시아에게 손을 내밀어 칼이 떨어지는 순간을 기다렸다.



 


루시아 

당신, 공중정원 출신이시군요...

 

그녀는 ... 그녀가 뭐라고 하는 걸까?

 

예상했던 어두운 죽음은 오지 않았지만, 청각 모듈을 작동할 에너지는 이미 충분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칼을 든 손을 아래로 늘어뜨린 것을 보고, 다른 한 손을 뻗어 나를 향해 내민 손을 잡았다.

 

손의 촉각 센서는 이미 고장 났지만, 나는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루시아

미안해요, 우리가 늦었어요...

 

내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지금은 침식의 표정이 아닌 미소를 짓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아마도 내가 루시아와 가장 가까워진 순간일 것이다. 나는 그녀의 눈에서 안타까움과 애틋함이 보였고, 그녀의 손은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계속 구석에서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는데....

 

나는 그녀의 싸움, 훈련, 그리고 혼자 있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녀도, 이렇게 부드러운 표정을 지을 수 있구나.

 

루시아

제가 반드시 이 모든 것을 끝낼게요, 그러니까......

 

루시아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내 손을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얹고, 짧은 맹세를 하는 듯했다.

 

의식이 완전히 멈추기 전의 마지막 순간에,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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