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다시 눈을 떴을 때… 이번엔 전혀 낯선 장면이 펼쳐졌다.


경험적 판단으로는 폐기장처럼 보이는 장소였고, 공기 중에는 엔진오일과 버려진 지 오래된 음식물에서 풍기는 시큼한 냄새가 진동했다.


가로등 불빛을 받아 가까스로 앞을 바라보니 마른 풀처럼 쌓여진 폐기물 더미가 보였다. 다가가서 확인해보니…. 모두 구조체의 잔해였다.


지휘관

(...)

(...우선 루나를 찾자.)


문득 폐기물장 너머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따라 걸었다.


그 속에서 루나는 감염체 잔해 속에 서서 또 다른 낯선 소녀와 대치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지휘관

루나는... 아주 앳되보여.



루나

언니...


루나는 조심스럽게 부르짖었다.


지휘관

(의식의 바다에 아주 깊숙히 접근한 모양이네.)

(의식의 바다에서 시간이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아.)



???

흥, 그만해, 너도 더러운 구조체에 불과해!


루나 맞은편에 서 있는 같은 구조체 소녀가 흥분해 소리를 질렀다.


루나

언니, 나보고 감염체 죽이라고 했잖아. 난 이미 해냈어, 난 죽였어... 왜 그런 식으로 날 쳐다봐...


지휘관

(이것은...)

(루나가 어렸을 때의 일?)


의식의 바다 속의 시간이 거꾸로 가고 있었다. 오래된 것일수록 더 깊숙이 묻어둔 흉터였다. 자신은 이미 루나의 의식의 바다의 가장 깊은 곳까지 다가가고 있었다.


???

적당히 해, 난 그냥 못생긴 인형을 훔쳤을 뿐인데...네 멋대로 그냥 날 언니라고 생각하지만 난 너 같은 감염체 동생 둔 적 없어!


???

감염체, 감염체! 뒤져버려! 어서 날 공중정원으로 보내 줘, 너 같은 더러운 놈은 죽어버려야 돼!


그 소녀는 권총을 들어 루나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루나는 그저 슬픈 듯이 서 있었다.


지휘관

조심해!


무의식적으로 루나를 밀쳤다. 루나는 몇 발자국 비틀거리다가 어느새 손에 쥔 비수가 땅에 떨어졌다. 그녀는 비로소 반응한 듯 얼굴에 약간의 표정이 생겼다.



루나

날 막을 셈이야?


지휘관

하마터면 맞을 뻔했어.


맞은편에 서 있는 낯선 소녀는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다.


???

사악할 감염체일 뿐이야. 어서 비켜, 난 저걸 죽여야 돼!


지휘관

그녀한테서 떨어져.


???

저것만 죽이면 나는 공중정원에 갈 수 있어!


지휘관

그런 거 없어!



???

농담 하지마, 그런 허세로 나를 죽여버릴 재능이라도 있나보네! 그럼 날 죽여! 죽여봐! 죽여보라고!


지휘관

어서 떨어져!


여자애는 그야말로 루나에게 홀려 그녀에게 손찌검을 했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마음속에서는 어떤 목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있으니, 이 보다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고도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루나는 무감각한 표정으로 바닥에 묻은 더러운 비수를 주워들고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지휘관

(그녀를 가로막다.)

(루나, 그러지 마.)


루나

죽... 죽여달라니... 언니... 그, 그럴 수...


???

어서 와, 빨리 날 죽이러 오라고, 그럼 너는 승격자가 될 수 있어! 네가 하고 싶 은 것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지휘관

이제 충분해.


여자의 멱살을 잡아당겼고 예의범절도 분노에 불타버렸다.


지휘관

(너무 심하잖아!)

(그렇게 죽고 싶으면 내 손을 써도 마찬가지다!)


???

...괘씸해...가증스러워! 역겨워, 더러운 감염체!


그 여자아이는 분연히 발을 동동 굴렀으나, 화를 내며 떠나버렸다.


지휘관

괜찮아?


루나

웃기지마... 뭐하는 짓이야, 왜 날 말린거야!


루나의 얼굴은 몹시 흉칙했지만,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약간 정신이 들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루나

꺼져.


지휘관

...


루나

내 꿈에서 사라져!


지휘관

...가능하면 다른 곳에서 얘기하자.


루나는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그 위에 검은 흙탕물이 가득 묻어 있다.


…그 진실된 기억 속에서 무엇이 일어났는지 자신은 알 수 없었다.



루나

왜 이런 짓을 한거지?


지휘관

(단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할 뿐이야.)

(같은 일을 두 번 할 필요 없어.)


루나

건방져...!


입술을 깨물고 있는 루나는 거의 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어 가슴의 옷감에 두 손을 문질러 탁한 손을 깨끗이 닦으려 했다.


지휘관

....


주머니에 넣어둔 천을 건넸다.


지휘관

이미 깨어날 방법을 알고 있어.


루나

...


지휘관

사람은 자신의 의식 속에서 안전한 보금자리를 만들어 낼 수 있어.


지휘관

그 보금자리에 도착하기만 한다면.


지휘관

어쩌면 이곳을 떠날 수 있을지도 몰라.


루나

안전한 보금자리...


루나

나의...


루나는 힘이 다 빠진 듯 갑자기 앞으로 쓰러졌다. 그녀는 너무도... 가냘펐다.


그녀가 자신의 품에 안기기 직전에 세상은 다시 뒤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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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어둠, 끝없는 어둠.


그 속에서 루나는 언니의 부름을 들었다.


그녀는 이런 어둠을 싫어한다. 외로움이 그녀를 짓누르고 있다.


왜... 왜 난 깨어나지 못하는 거야...?



저 멀리서 붉은 빛이 반짝이는 것은 루나가 어둠 속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빛이었다.


너무 어두워, 너무 어두워...


루나는 이렇게 괴로워했다. 평생 다시는 갖고 싶지 않았던 경험이었다.


그녀는 승격자가 되면 더 이상 두려워할 게 없을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가소로운 꿈속, 깊은 의식의 바다에 묻힌 추억이 그녀를 이렇게 쉽게 무너뜨렸다.


언니…누군가가 있다면…누군가가 있었으면…그녀는 무언가를 잡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 빛은 바다의 등대처럼 물에 빠진 사람의 유일한 희망이 되었다.


마음 속에서 가지 말라고 처절하게 울부짖었지만, 그녀가 간직한 아픈 기억은 이미 본능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그녀는 그 붉은 빛을 향해 나아갔다.


그녀는 그곳에서 무언가 그녀를 아프게 하는 것을 발견한 것 같다. 그것은 빛이 아니라 무서운 진실이다.


루나는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다. 불나방이 불에 뛰어드는 것처럼 그곳을 향해 나아갔다.


루나는 추억에 짓눌린 느낌이 들었다...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되풀이 하는 것 같았다.


시간을 되돌려 천 번, 만 번을 반복해도 루나는 버림받고 배신당해 결국 이 만 번의 길을 걸어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딛고 나아간다.


그 한 줄기 붉은 빛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싫어... 루나는 눈을 감고 앞으로 볼 광경이 그녀의 심장을 멎게 할까봐 두려워했다.


그녀는 다시 손을 내밀었는데 이번에는 부드러운 것을 건드렸다.


...



지휘관

루나!



루나

...


눈앞의 루나는 눈을 지그시 떴다. 얼굴에 낙담과 불신이 뒤섞여 보인다.


지휘관

괜찮아?


루나

...



루나

빛...


지휘관

아, 여기 너무 어둡네.


지휘관

이 무드등을 가지고 다닌게 천만다행이야.



루나

어째서... 너야...


지휘관

(출력은 크지 않지만, 그럭저럭 쓸만해.)

(소형이지만 불빛은 밝아.)


혼탁함 가운데에서 루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이 보였다.


지휘관

우린 점점 깊이 들어가고 있어.


루나

...


지휘관

내 예상대로면...


루나

그만해.


지휘관

...왜?


루나

너는 말이 많아.


소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숨통을 틔우고 있었고, 그 다음 찾아온 침묵은 더욱 엄숙한 영역으로 이어졌다.


지휘관

...


두 사람은 잠시 침묵한 채 서로 곁을 지키며 밖으로 나왔다.



저 멀리서 달이 점점 떠오르고, 폐기가스 처리장 전체가 환히 밝혀졌다. 그저 평범한 처리장처럼 보였다. 아까처럼 먹물 끼얹듯 어두웠던 밤은 착각일 뿐이었다.


지휘관

지금은?



루나

지금 뭐?


지휘관

지금은 좀 괜찮아졌어?


루나

...이런 게 참 싫어. 그걸 봤다고 나를 충분히 알 거라고 생각하지 마.


루나

너는 너의 입장이 있고 나는 나의 입장이 있어.


루나

...


지휘관

...잊지 않을 거야.


지휘관

하지만 네 말처럼 그렇게 냉혹하지도 않았어.


루나

...?


지휘관

(나는 너의 마음과 계속 대화하고 있잖아, 안그래?)

(여기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너의 대답이야.)


루나

...


루나

날 가엽게 여기지 마.


이쪽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험악했다. 마치 가시덤불에서 돋아난 듯 부서진 도도함처럼.


그런 가시밭길이... 그녀의 몸에서 전부 빠져나와 그녀를 감싸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와 동시에 세상은 또다시 폭풍우처럼 찢어졌다.


루나는 달빛을 받으며 폭풍의 중심에 섰다. 산들산들한 바람과 흰 옷은 마치 뿌연 안개가 자욱하게 감도는 듯, 유월 말 남십자성 아래의 창공처럼, 잡을 수 없는 엷은 구름 한 점, 죽은 흰비둘기 한 마리와 같았다.


그리고 모든 것은 다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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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우리... 노래하자...'


'모든 게... 잘 될 거야...'



눈을 떠보니 이번에는 복도에 서 있었다.


장식을 보니 폐쇄된 성당 같았다. 벽의 칠이 많이 벗겨져 마치 방 전체가 산산이 부서진 것처럼 보인다. 벽 뒤에서 희미하게 어린이의 노래 소리가 흘러나온다.


복도를 따라 가니 복도 끝에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남자아이?

어차피 다 먹었어! 어쩌라는 거야?


여자아이?

그래, 네가 뭘 할 수 있겠어?



수녀?

탓 하고 싶으면 너무 순진한 너 자신을 탓할 수 밖에 없어.



루시아

제발... 제발 부탁이에요...



루나

언니... 언니...


루시아

제발 부탁이에요... 이대로 가면 저와 동생은... 이 겨울을 버틸 수 없어요...


루나

언니... 미안해...


그 속에 서 있는 루나의 모습은 아이들 사이에서 우람해 보였지만, 그녀는 이미 그 문제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루나

언니...이번엔 내가 지켜줄 수 있어...


소녀가 중얼거리며 손에 든 비수를 들어올렸다.


루나

이렇게만 한다면 이 모든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지휘관

루나 정신차려.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 루나는 무뚝뚝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를 부르는 사람을 보고 루나는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루나

【지휘관 이름】... 내가 루나 그 자체라는 걸 아직도 깨닫지 못한거야?


지휘관

(루나, 너의 의지가 잠식당하고 있어!)

(내가 누군지 줄곧 알고 있던거야?) ← 선택


루나

그동안은 아니였어...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어, 맞지?


지휘관

(…루나의 기억은 점점 더 깊어질수록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어.)


루나

여기서 널 죽이고 모두 다 죽여버리면, 나는 이 나약함을 없앨 수 있어.


루나

그렇게만 한다면 나는 더욱 강력한 대행자가 되서 언니를 지키고 언니와 함께 세상의 저편으로 나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거야.


지휘관

그러면 너의 의식의 바다만 무너질 뿐이야!


루나

너를 믿지 않을 거야, 나는 아무도 안 믿을 거야!


루나

난 믿음으로 너무 많은 대가를 치렀어... 이 손으로 할 수 있는 일만 믿을 거야.


루나

가브리엘을 경솔하게 믿지 않았었다면, 소명의 망상이 진실이었으면, 폐품 처리장에서 그 '언니'를 죽이지 않았었으면...


루나

나의 개조가 성공했었다면, 내가 언니를 잘 지켰었다면, 내가... 겨울나기 음식을 순진하게 빌려주지만 않았었어도...


루나

네가 이 모든 것을 망치지만 않았었어도!


루나

그때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파멸시키고 싶어.


루나

이게 나의 꿈나라야.


루나

그런데…구조체가 꿈을 꿀 수 있을까….


루나

내가 어렸을 때 가졌던 꿈은 이미 기억나지 않아.


루나

하지만 승격자도 꿈나라를 가질 수 있다면, 아마 이랬을 거야.


루나

어둠, 사악함, 더러움...



지휘관

(승격네트워크가 역으로 루나를 잡아먹기 시작했어...)

(루나는 벌써 마음이 혼란스러워지고 있어...)


루나

나는 이 세상에서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어… 심지어 더 절망적인 일을 겪어도 인간성을 지키는 사람들까지…


루나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루나

지금까지 온 모든 걸음은 나 스스로가 결정한 거야.


루나

그때 너가 내 삶에서 나타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야. 이제 모든 것은 지금의 나에게 아무 쓸모도 없어.



루나

난 이미 대행자 루나야. 그리고 영원히 대행자 루나로서... 이 세상에 존재해.


루나는 떨고 있었다. 인간에게 잡힌 그녀의 손이 전율하면서 비수가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사방에 있던 모든 아이들이 '괴물'이라고 소리지르며 뿔뿔이 흩어졌다.


지휘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나도 잘 모르겠어.


지휘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야.



인간은 팔을 벌려 마치 닻처럼 견고하고 힘차게 순백색의 구조체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지휘관

꿈나라는... 이렇지 않아.


루나

...


지휘관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지휘관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너의 모든 방법을 이해하지도 못해.


지휘관

하지만 난... 너의 불안을 느껴.


네가 느끼는 불안, 망연함, 네가 겪은 진실, 배신... 이 모든 것을.


비록 '꿈에서 깨어나면 너와 나는 현실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장이 정반대인 두 자리로 돌아갈 것을 알면서도, 자신만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지휘관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 맞은편에 서 있는 넌...


지휘관

보다 나은 꿈을 꾸어야 해.


비좁은 공간에 바람이 불고, 부드러운 바람이 방 안을 감쌌다. 모든 것이 캔버스처럼 재구성되었다.




바람이 불자 방은 수수하고 아늑한 어린아이 방의 모습으로 변했다.


지휘관

모든 게 바뀌었어.


루나

...


갑자기 실체를 갖게 된 것처럼 소녀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루나

원래... 이런 느낌이었구나.


좁은 공간 속 불빛이 루나의 얇은 윤곽, 루나의 창백한 얼굴, 얇은 입술을 오므리고 소리 없는 웃음을 진 루나를 비추었다.


지휘관

(...넌 안전해)

(나한테 맡겨)


루나

어디선가... 들어본 말 같아...


지휘관

응, 이제 안전해.


루나

...정말이야?


지휘관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돼. 상처받지 않을 거야.


루나

언니, 이 꿈은... 깨어나지 않아도 좋아.



루나

...괜찮다면 내가 잠들때까지 이대로 있어줘... 내 곁에 있어줘...


몽환적인 소녀가 웅얼거리며 순백하고 평온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지휘관

...



빛을 발하는 무드등을 침대 머리맡에 놓았다. 그동안 건네고 싶었던 선물이 드디어 그녀의 곁에 도착했다.


모든 것이 지나간 후에 피로가 몰려왔다. 링크 반응도 또렷해졌다.


지휘관

이제...


지휘관

다 끝났어.



'우리 노래하자, 모든 게 잘 될 거야.'


'여린 꽃봉오리, 물결처럼 출렁이는 고운 모래, 우유와 따뜻한 빵, 사슴 사냥 후 지핀 모닥불, 탁탁거리는 희미한 불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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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이름 모를 노랫소리

...


이름 모를 노랫소리

우리 노래하자, 모든 게 잘 될 거야.


이름 모를 노랫소리

여린 꽃봉오리, 물결처럼 출렁이는 고운 모래, 우유와 따뜻한 빵, 사슴 사냥 후 지핀 모닥불, 탁탁거리는 희미한 불소리가 들려오네.

 

이름 모를 노랫소리

...우리 준비하자, 모든 게 망가지도록.


이름 모를 노랫소리

한데 엉킨 진흙과 모래, 힘겨운 발걸음, 전쟁의 총성과 칼부림 소리, 머리가 내는 둔탁한 소리는 칠흙같이 어둡네.


아득한 소리

...【지휘관 이름】...


지휘관

...루나?


아득한 소리

그때 만났던 게 네가 맞다면...


지휘관

어디에 있는거야.


화면 속 루나는 마치 인큐베이터에 갇힌 아기처럼 집식체의 투명한 입안에 삼켜져 있었다.


아득한 소리

...【지휘관 이름】, 나에게 링크해.


지휘관

하지만 난...


멀고도 가까운 소리

...많이 피곤하신가요,


멀고도 가까운 소리

지휘관?


지휘관

응?



리브

지휘관님... 그 날 이후로 많이 피곤하실텐데 이럴 때 지휘관님에게 폐를 끼쳐서...


지휘관

(상관 없어)

(이미 다 준비 했어)



단말 시스템에서 전송된 데이터를 복원하는데 성공했고 적조 속에서 찾은 정보가 확실히 루나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창가에 똑바로 서 있던 청년은 손에 든 자료에서 눈을 들어, 자신을 보고 잠시 멈추었다.


이미 파오스의 창으로 재구성된 환영을 통해 그 데이터를 확인했지만 결국 지휘관님이 아닌 제가 확인한 것이라 실제 의식으로 진입해서 본 것과 복원한 환영 사이에 차이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지휘관님의 상태가 완전히 회복되어야 이 일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아시모프 측과는 제가 이야기하겠습니다.


지휘관

(이미 다 회복했어.)

(고마워, 리.)


...


파업을 거부한다는 대답에도 불구하고 리는 여전히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지휘관

(어?)

(내 얼굴에 뭐 났어?)


아닙니다. 전부 준비되셨다고 하니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적조 속에서 찾아낸 루나만 확인해주시면 될 겁니다.


지휘관

그래...


리브

피식


지휘관

...


리브

지휘관님 얼굴에... 눌린 흔적이 있어요.


지휘관

뭐?



리브

아, 아까 엎드려 주무셔서 그랬을 거에요! 괜찮아요, 조금 있으면 풀릴 거에요. 죄송해요.


손가락이 저절로 자신의 뺨에 닿아 울퉁불퉁한 자국이 만져졌다. 열이 좀 나는데, 아마 빨개것 같다.


한쪽 유리창에 자신의 몸매가 비치고 볼에 살짝 닿는 자세가, 한순간 기억 속의 어떤 장면과 겹쳐졌다.


루나

그래서 너도... 내 꿈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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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루나의 메시지?


네, 지금까지 얻은 정보로 미루어 볼 때 적조 속에서 죽음에 가까운 경험을 겪는 의식만이 포획될 수 있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인간도 구조체도 죽음에 직면했을 때 기억의 가장 깊은 곳에 묻혀 있는 감정이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 현재 저희가 관찰한 대부분 적조 속 의식이 보여주는 단편적 특징에 부합됩니다.



두 사람은 홍채 인식을 통해, 한편으로는 이야기를 나누며 연구실로 들어갔다.



아시모프

내 동의를 거치지 않고 함부로 결론을 내지 마.


아시모프

실험 데이터가 부족해서 아직 정론을 내리긴 일러.


아시모프

하지만 '그것'만큼은 내가 해결할 수 있어.


지휘관

(아시모프의 눈에서 투지가 보여)

(좋습니다, 원기왕성하네요.)


아시모프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이 잘 협조한다는 전제 하에서 그렇지.


지휘관

(물론입니다)

(언제 안 맞춰준 적 있었나요)


아시모프

당신은 지금 루나와 유일하게 의식링크를 해본 지휘관이고, 이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그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아시모프

급히 지휘관을 두둔할 필요 없어, 단지 내 의심을 피력했을 뿐이야.


언제부터 그레이 레이븐이 전술적으로 특정 수단을 동원할 때 최고책임기술자의 허락을 받아야 했던거죠?


지휘관

(동의)

(리, 괜찮아)


아시모프

너희들 말이 맞아. 내가 관심있는 것은 너희들이 전쟁터에서 어떤 수단을 쓰는지가 아니라 바로 데이터야. 그래서 어떻게 하는지 알고 있겠지?


지휘관

(알고 있습니다)

(그정도는 분별할 줄 압니다)


아시모프

이걸 써, 적조 속에서 발견한 루나의 의식 데이터를 전부 저장해놨어.


아시모프

여기서 현재 시뮬레이션되고 있는 것은 검측 대상인 루시아에 대한 루나의 의식 데이터가 포함된 적조 샘플의 반응이다.


아시모프

너는 루시아의 지휘관이고 루나와 링크된 적이 있으면서 감정적인 유대가 별로 없어 '검수'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야.


지휘관

알겠습니다.


아시모프

그럼, 준비.



데이터 불러오기<<<<의식 링크 검사<<<<<<



다시 눈을 떴을 때 시야에 나타난 것은 긴 복도였다.



??

언니, 거기서 뭐 해?


옆의 공기는 앙상한 모습으로 응집되어 있었고, 긴 금발 머리의 여자 아이는 고개를 들고 이쪽을 바라보며, 얼굴에 따뜻한 미소를 띠었다.


지휘관

이것은... 루나?


아시모프

적조 속의 '의식체'는 '의식체' 그 자체가 아니라 적조에게 삼켜지고 해체된 후 미끼의 도구로 이용되는 것이다.


아시모프

그래서 내용 또한 주요 인물에게 가장 깊게 와닿는 형태로 보여주고 있지.


지휘관

그렇군요.


앞으로 계속 나가자, 뒤로 밀려난 루나는 이내 물안개가 되어 허공에 흩어지고, 그 옆에 새로운 루나가 다시 떠오른다.


'루나'

언니, 내가 뭘 찾았는지 봐! 먹을 수 있는 고기 통조림…. 칭찬 안 해?


지휘관

...


아시모프

대답할 필요 없어.


지휘관

알겠습니다.


'루나'

언니, 밖에 눈이 내려! 나랑 눈사람 만들러 나갈래?


'루나'

언니... 하암! 후~후~ 약간 춥네... 언니 손 엄청 따뜻해... 잡고싶어!


끊임없이 '루나'가 그 자리에 남고, 사라지고, 또 새로운 '루나'가 나타난다.


순진하고 즐거운,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루나. 그게 아마 루나가 기억하는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 아닐까?


이것은 적조가 끼친 영향일 뿐이라는 것을 마음 속으로 잘 알기에 그 환영을 보러 가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루나'

즐거워, 나는 이 선물 너무 좋아!


'루나'

손이 추워... 내 손 좀 더 잡아줄래...?


'루나'

...왜 날 외면하는거야...


이번에는 뒤에 버려진 '루나'가 사라지지 않고 간절하고 슬픈 얼굴로 인간이 떠난 쪽을 바라보았다.


'루나'

내가 잘 못해서 그런가...? 미안해…더 열심히 할게…강해질게…나를 버리지마…


지휘관

(...)

(왜 사람들이 적조에 이끌리는지 이해했어)



루나

같이 있어 준다고 했잖아…. 나를 도와 이 모든걸 바꿔주겠다고 했잖아…?


지휘관

...?


아시모프

집중해.


복도의 끝에 서자, 사방은 이미 온통 어둠으로 변해, 눈앞의 캄캄한 문 하나뿐이었다.


(문을 밀다)


삐걱


따뜻한 빛이 문틈으로 새어나왔다. 안쪽은 장식이 평범했고 심지어 다소 낡아빠진 어린이 방이다.



지휘관

이건...!


아시모프

왜?


아시모프

아마도 그거겠지. 설마...


지휘관

...아닙니다.


앞으로 걸어가다가 침대 위에서 곤히 잠든 루나를 발견했다.


지휘관

...!


그 금발의 어린 루나가 아니라... 승격자가 된 뒤의 루나였다. 은백색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뺨 옆에 내려앉아 있었고 그녀는 매우 '안전'해 보였다.


아시모프

심박수가 갑자기 빨라지는데, 뭐 알아냈어?


지휘관

...


지휘관

옛날에 저한테 했던 말 기억나나요?


지휘관

의식의 바다의 자기 방어 기제였나?


아시모프

...익수(물에 빠짐) 현상? 그건 왜?


지휘관

익수 현상?


아시모프

구조체 연구 초기에 구조체와 의식연결을 하는 지휘관의 마인드 비콘이 불안정하거나, 양자가 서로 맞지 않으면 구조체의 의식의 바다에서 자생하는 자기방어기제에 의해 소외되는 사례가 있었어.


지휘관

(그럼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애초에 '원격링크' 프로젝트를 중단시킨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죠?)


아시모프

의식의 바다를 진짜 바다로 비유해서 설명하자면, 구조체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조건 반사적으로 모든 것을 끌어내리려고 하지.


아시모프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 어디까지나 초창기에 의식의 바다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을 때의 일이거든. 현재 공중정원에서 생산되는 구조체의 호환도는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서 익수 현상을 완전히 차단할 수 있어.


아시모프

한 번 이런 현상이 발생하면 지휘관이 뇌사할 수도 있고, 이런 식으로 인재가 유출되는 것을 우리는 감당할 수 없어.


지휘관

(...)

(과학 진보 만세)


아시모프

그런데 갑자기 왜 궁금해한거야.


지휘관

그냥 갑자기 생각이 났습니다.


지휘관

물에 빠진 구조체는 의식의 바다에서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못해야 합니까?


아시모프

이론대로라면. 하지만 이 과제와 관련해서 오랫 동안 손을 놓고 있긴 했는데, 뭐 새로운 아이디어라도 제공할 거 있어?


지휘관

(아닙니다)

(나중에 있으면 알려드리겠습니다.)


통신 채널의 아시모프는 콧방귀를 뀌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심스러운 몸짓을 유지하며 다시 한번 이 방을 둘러보니…따뜻하고 고요하다.


이것이 바로 루나 의식의 바다 가장 깊은 곳에 존재하는, 가장 안전한 그곳이다.


루시아는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고, 가장 돌아가고 싶었던 시절을 보냈었다.


아시모프

...그럼, 뭐 발견한 거라도 있어?


지휘관

...아뇨.


아시모프

루시아의 대답도 너와 마찬가지였어. 루시아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그 기억 데이터는 루나의, 음, 뭐랄까... 소중한 추억?


아시모프

그럼 이제 나와.


<<<<<<<<<<<<<<


그 후 리와 리브는 아시모프의 연구실에 남아 연구를 보조하고 자신은 홀로 그곳을 떠났다.


지휘관

...


의식의 환영 속에서 본 광경은, 앞서 루나의 의식의 바다에서 본 것과 기이하게 겹쳤다.



환영 속에서, 자신은 똑똑히 보았다... 소녀의 침대 머리맡에 놓인 붉은 빛이 켜진 무드등 하나를. 그 자신에게 더없이 익숙한 등불을.


이 모든 것은 의식의 바다 깊숙한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 꿈도 아니었으며, 어쩌면 전혀 무의미한 것도 아님을 스스로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


어쩌면 모든 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다를 수도 있다. 어쩌면 어떤 일은 어둠 속에서 이미 변했을지도 모른다.



공중 정원의 복도에 잠시 멈춰 섰다. 앞에 있는 거대한 창문 뒤에, 푸른색의 거대한 별이 여전히 돌고 있다.


온통 상처투성이인 이 별 사이를 걷는 것은, 마치 눈밭에서 담금질하여 나온 구조체 소녀와 같다.


...아직도 그 곳에 있을까?


아마 다음에


다시 만날 기회가 있다면


직접 물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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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 영원히 애껴주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