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겨울이 찾아온 뒤, 땅에는 풀 한 포기 나지 않고 하늘에만 바람만 휘몰아치며 지구는 눈으로 뒤덮인 바다가 되었다.


눈밭을 걸어가던 나나미는 눈이 종아리까지 차오르자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니 마치 거대한 묘비와 같이 하얀 눈 아래 무너진 건물들의 모습을 간신히 알아볼 수 있었다.


지구는 얼음으로 뒤덮인 무덤이 되었고, 만물이 존재했던 흔적은 묘비명이 되었고, 흰 눈을 털자 그 속에서 그들이 살았던 흔적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을 뿐이다.



나나미

기계 할머니... 기계 할머니! 어디 있어요!


소녀의 외침은 아무런 대꾸도 받지 못했다. 길을 잃을까 두려운 그녀는 눈보라와 갈가리 찢긴 도시의 시체를 홀로 헤쳐나갔고, 추위에 발이 차츰 마비되어버려 깊은 눈 아래에서 가로막는 장애물에 의지하여 길을 찾아야 했다.


하루, 3일...아니면 일주일이 되었을까?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정처 없이 걸었는지 모른다. 가는 곳에는 차가운 눈밖에 없었다.


결국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녀는 멈추었다.



먼 곳의 도시와 황야는 이미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대자연은 도시 사이의 분명한 경계를 점차 지워버렸고, 끝없는 산맥은 거칠게 빌딩 사이를 가로질렀다.


나나미는 그 도시의 가장자리인 산봉우리 위에서 조용한 굉음을 들었다. 눈은 마치 파도가 멀리서 밀려오는 것처럼 요란하게 다가왔다.


처음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잠시 집중해서 바라보니 멀리 눈마루에 붉은색과 검은색의 가는 선이 한 줄로 늘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붉은색의 가는 선은 이미 불가사의한 속도로 언덕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는데, 나나미는 그제서야 그것이 눈사태가 아니라 흩날리는 가느다란 눈 때문에 눈사태처럼 보였음을 알 수 있었다.


짐승의 울부짖는 소리가 흡사 최후의 종소리처럼 들려왔다. 맨 앞쪽에는 정체불명의 짐승, 벌겋게 달아오른 짐승의 눈, 군침을 끄는 턱, 단도처럼 날카로운 송곳니가 있었다.


그것들은 황금시대 영화 속 늑대떼처럼 보였지만, 붉은 색을 띤 특징은 오히려 그들이 특수한 존재임을 나타냈다.


나나미는 일찍이 이와 같은 이세계의 천재지변과 같은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하늘의 경계선이 활짝 열린 듯 돌연변이 붉은 늑대떼가 흩날리는 눈을 타고 쏟아져 나왔다.


눈보라는 빠른 속도로 휘날렸고 어디에도 없는 벽처럼 나나미를 제자리에 가둬 공간과 시간의 개념을 철저히 차단했지만, 늑대의 울부짖음은 아주 시끄러웠고, 때로는 가까이에 있는 것처럼, 때로는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나나미는 이들의 '이주'를 잠시 피할 수 있는 장소를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지만, 황량한 설원 너머로 한 모습이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그 모습을 따라 숲속으로 들어갔고, 기갑은 촘촘한 숲 사이를 빠르게 걸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파워에서 뛰어내려 단신으로 달려갔다.



나나미

저기요, 저기요ㅡㅡ


그녀의 외침은 바람에 휩쓸려 멀리 날아갔지만, 앞의 사람 형상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사람이 지나간 길 사이에는 붉은 짐승의 시체들이 어지럽게 누워 있었다. 그것은 보통 늑대가 가져야 할 체격도 아니었고, 털이 없고 매우 투명하고 단단한 진홍색 피부 아래 뼈가 어렴풋이 보였고, 눈 위에 검은 피 같은 액체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나나미는 기괴한 생명체들을 뚫고, 눈 내리는 숲을 지나 상대방이 또 다른 설원을 밟기 직전에 쫓아가 상대방의 팔을 잡았다.



갑작스런 힘에 상대방은 고개를 돌렸다.


나나미

그...


???

...당신이었군요.


나나미

어...? 너 나 알아?


???

나나미 님...


상대방은 고심하는 듯 그녀의 이빨 사이에서 이 호칭이 여러 번 맴돌다가 어렵게 발음했다.


나나미

나나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니...


???

오셨군요... 해답을 찾으러 오셨습니까?


???

인류는 이미 멸종했습니다. 기계교회도 오랜 내부 분열로 결국 무너져내렸고, 이제 지상에는 영원한 겨울만이 남았습니다.


???

...여기는 당신이 원하는 답이 아닙니다.




???

제 이름은 하카마라고 합니다.


하카마라는 이름의 여성 기계체는 인간도 구조체도 아니었다. 나나미가 그녀를 만지는 순간, 그녀는 자신과 같은 신분의 동류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녀는 나나미를 이끌고 협곡을 누비며 그녀의 의혹을 풀어주었다.


나나미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야?


하카마

환경진화에 적응한 퍼니싱 생명체들이었습니다.


나나미

퍼니싱은 이미... 생명체로 진화한 거였구나.


나나미

넌 나나미를 알고 있었어?


하카마

...


하카마는 잠시 멈추었다가 대답했다.


하카마

이것은 우리의 첫 만남이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서로를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저에게 당신에 관해 신신당부하였습니다.


나나미

나에 대해서? '어머니'?


하카마

'미래의 어느 시점에 선현이 갑자기 강림할 것이다'.


하카마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카마

그래서 가능한 한 당신의 의문을 풀어주고 당신에게 돌아가야 할 길을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나나미

나나미는 궁금한게 아주 많아. 인류가 정말 멸종해버렸어? 왜 이렇게 된 거야? 왜 퍼니싱이 생명체로 진화했을까... 그리고 '극한의 겨울'과 '고갈'은 또 뭐야?


하카마

당신이 출현하기 몇 십 년 전 인류 정부는 퍼니싱을 흡수할 수 있는 특화 기체를 고안해 '백야'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하카마

그 기체의 실험은 실패했지만 인류는 포기하지 않았고, 후속으로 일련의 연구개발 실험이 시작되어, 막대한 에너지를 소비함과 동시에 불가역적인 환경영향을 초래하였습니다. 후에 일어난 그 격변을 인류는 '고갈'이라고 불렀고, 그 영향을 '극한의 겨울'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카마

이후 지구상에는 겨울만 남았고, 최악의 환경으로 인류가 더 이상 이 별에서 살아갈 수 없었으며, 에너지 문제로 지구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도 없었습니다.


하카마

시간의 경과에 따라 인류의 멸종은 필연으로 다가왔습니다.


하카마

그리고 당신은... '어머니'의 예언에서 기계교회를 이끌어 답을 찾을 선현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나나미

나나미는 무슨 기계교회라는 것도 잘 모르고, 선현이라는 것도 되려고 하지 않았어. 너희들은 틀림없이 잘못 알고 있는 거야.


하카마

...그간 당신을 찾지 못한 것은 저의 불찰입니다, 선현님.


나나미

나를 찾아?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린 여성의 말투는 경건함에 가까웠다.



하카마

...저는 100년 가까이 당신을 찾아 헤맸습니다.


하카마

비록 기계교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저는 당신의 요구에 최선을 다해 협조할 것입니다.


나나미

하카마…그럼 부탁인데, 연산력이 충분한 시설 알고 있어? 나나미에겐 중요한 일이 있거든.


하카마

연산력이 충분한 시설...


하카마

근처에 인간이 남긴 항공연구실험소가 있는데 그곳이 당신의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전투 개시




나나미

바로 여기야?


하카마

앞쪽이 바로 항공연구실험소 입구인데 이미 기계들이 점령한 모양입니다...


나나미

안녕, 너희들의 기계 빌려 써도 되니?


기계체

너희들은, 우리를, 방해할 수, 없다!


나나미

으아! 왜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거야!


하카마

그럼 직접 손을 써봅시다!



기계체

방해, 물리친다!


하카마

나나미 님, 상대할 준비를 합시다!




나나미

와! 여기 또 있어!



나나미

얼마나 더 남은거야! 나나미 손이 저려와!



하카마

여기 또 있습니다!




전투 종료




나나미

그래서 여기서 뭐 하고 있던 거야?


기계체

우리, 는, 항공 센터의, 로봇이다.


기계체

우리는 늘, 동료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기계체

그래서, 그것을 찾으려면, 조립해서 우주로, 나아가야 한다.


나나미

우주에서 돌아올 인류를 바라보며 지키고 있었구나...


나나미는 심호흡을 했다.


나나미

...슬퍼하지 않아도 돼...이건 다 진실이 아니야! 나나미는 이런 일이 없도록 만들 거야!


소녀는 하카마의 손을 잡았다.



나나미

고마워, 하카마… 나나미는 돌아가서 이 모든 것을 바꾸어야 해!



하카마

...?


하카마는 소녀와 맞잡은 자신의 손을 다소 넋을 잃은 듯 고개를 숙여 바라보다가 다시 잡아야 할지 망설이는 듯했다.


하카마

...저는 당신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카마

선현님은 과거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나나미

처음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던 나나미는 많은 슬픈 이야기를 접하고 나서야 서서히 깨닫게 되었어...


나나미

기계 할머니가 이곳으로 보냈을 때 나나미에게 말한 것처럼 이것은 지구의 미래, 진정한 종말의 날이었어.


나나미

나를 이곳에 데려다 준 기계 할머니는 내가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게 한 다음 지금의 비극을 피할 수 있기를 바랐을 거야...


하카마

그 말의 의미는... 제가 가상 프로그램으로 시뮬레이션한 데이터값 중 하나라는 건가요?


나나미

나나미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야...!


하카마

괜찮아요. 저는 그것 때문에 '슬프다'는 감정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저는 원래 입력 프로그램의 데이터로 이루어져 있어 큰 차이가 없었거든요.


하카마는 나나미의 두 손을 맞잡고 진지하게 말했다.


하카마

여기서의 사건들은 제가 경험한 일이며, 저에게 이것은 세상에서 실제로 일어난 과거이자 저의 귀착점입니다.


고개 숙여 잠시 생각에 잠긴 채 '백년 가까이'의 시간을 건너뛰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지만 결국 하카마는 가볍게 웃기만 했다.


하카마

그럼 당신의 세계에서 최선을 다해주시길 바랄 게요.


작별할 시간이 별로 없었고, 하카마가 지켜보는 가운데 나나미는 기갑을 뒤집어 커다란 포트의 인터페이스를 뒷목에 연결했다.


나나미

하카마…고마워! 진실로 돌아가면 나나미는 금방 널 만나러 갈 거야ㅡㅡ


연결과 함께 그녀의 전신은 빙원에 내려오는 신처럼 희미한 빛을 발했다. 울부짖는 바람은 보이는 모든 색을 쓸어버려 하늘과 땅을 구별할 수 없었고, 끝자락에 있는 열곡과 산맥들이 끊임없이 출렁였다.


하카마

나나미...


눈송이가 섞인 바람에 흔들리는 백발과 함께 하카마의 얼굴에 그리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의 입술이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움직였다.



강렬한 빛 아래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데이터 블록이 되었고, 그 흐름 속에서 무력한 추위가 서서히 흩어졌다.